2012년도 글 백업입니다. "건호 씨, 우리 헤어지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이었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데이트였다. 늦지 않게 나와서, 영화 보고, 얘기를 하기도 하고, 별 말 없이 있다가 서로 배가 고파져서 식사를 했다. 점심은 주로 따로 먹고 만났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덜 바쁜 쪽이 더 바쁜 쪽을 바래다 주었다. 가끔 외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니까, 오늘은 저녁식사 후 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저 한마디 때문에. 김건호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멍한 얼굴로 상대방을 쳐다 보았다. 그는 여전히 가볍게 웃고 있었고, 손에 든 물잔으로 가볍게 입술을 축이기도 하고-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은 듯 했다. 그러니까, 뭔가, 자신이 잘못 들은건가? 조금 떨리는 입으로 김건호는 말을 토해냈다. ..
2012년도 글 백업입니다. -태룡 씨, 저, 그....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으세요? 약속 장소에 나가려 하는데 갑작스레 전화가 와서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싶었다. 황태룡은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전화를 받았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로 미루어 보아 70%의 확률로 이 전화는 약속 취소 전화였다. 또 무슨 일이 생긴건가 하고 조금 찜찜해 하면서 받았는데, 생각 외로 잠시 기다려 달라는 것이어서 황태룡은 조금 놀랐다. "무슨 일 있어요?" -아, 그게, 집 문이 좀 이상해서. "내가 도와줄까요?" -예?! 아, 아뇨, 괜찮아요! "오늘 일요일이라 열쇠집도 안 할텐데 내가 그냥 가죠 뭐. 알바 경험도 있겠다." 히힛, 하고 웃으며 말을 걸자 당황해서 허둥지둥 괜찮다며 말을 더듬었다. 집도 지저..
2012년도 글 백업입니다. 흘끗 시계를 보았다. 손목에 걸린 아날로그 시계는 소리 없이 초침을 움직여 어느새 약속시간 5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일찍 온 만큼 기다리는데 불만은 없다. 약속 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것에도 별 반발은 없었다. 하이힐을 신고 운전하는 것에는 이미 익숙해 졌다. 다만 왜 약속장소가 여기인지에 관해 궁금증을 품을 뿐이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묘하게 흥겨운 음악소리, 가족 단위의 사람들, 둥실 둥실 떠다니는 풍선과 조잡해 보이는 원색의 장난감들. 눈이 피로해지는 듯한 기분에 미간을 눌렀다. 하늘은 파랗고 날씨도 좋고 다 좋은데- 왜 자신은 금쪽 같은 휴일에 상대 회사 대표와 동물원에 와 있어야 하냔 말인가. 어디에 포인트를 두고 궁금증을 품어야 할 지 감도 잡히지..
2012년도 글 백업입니다.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자취방 안에는 냉기가 감돌았다. 지금이 밤이어서 그렇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무더운 한여름인데다 열대야가 어쩌니 저쩌니 말이 많은 시기이기도 했다. 심지어 자취방 안에는 에어컨조차 없었다. 기실, 자취방 안에는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았다. 방에 냉기가 감도는 것은 아마도 사람이 드나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도 잘 드나들지 않는 집에 누가 오겠는가. 통장에 돈이 꼬박꼬박 들어오면서 자동이체 덕분에 건물주가 오는 일도 사라진지 오래다. 방 안에 있는 거라고는 앉은뱅이 선풍기 한 대, 싱크대, 작은 냉장고, 예비용까지 합쳐서 이불 두 채, 그리고 붙박이 옷장으로 쓰는 벽장 하나가 전부였다. 집에 잘 때를 빼고는 하도 돌아오지 못하다 보니 생긴 결과였..
2012년도 글 백업입니다. 작위에도 처벌이 가능하다면, 부작위에도 처벌이 가능해야 한다. 나의 형량은 얼마인가. - 코디가 부산하게 움직이다 화장이 끝났다고 외쳤다. 눈을 뜨자 안경을 쓰고 약간 수척해 보이는 인상의 중년 남자가 거울 속에서 그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는 싱긋 웃었다. 확실히 분장을 많이 해야 하는 감이 있지만 그래도 이 역은 꽤 나쁘지 않다. 아니, 굉장히 좋은 축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재미있고, 연기의 폭도 늘어나고, 인지도도 좋고. 코디에게 수고하셨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장 일이 끝났기에 대기실 안에는 한결 여유가 돌았다. 기실 이제 남은 것은 그에게 달려있지 스탭들이 부산 떨 일은 아니다. 촬영장에 지각 할까봐 덜덜 떨고 있는 로드와 매니저가 있기는 하지만 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