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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도 글 백업입니다.
흘끗 시계를 보았다. 손목에 걸린 아날로그 시계는 소리 없이 초침을 움직여 어느새 약속시간 5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일찍 온 만큼 기다리는데 불만은 없다. 약속 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것에도 별 반발은 없었다. 하이힐을 신고 운전하는 것에는 이미 익숙해 졌다. 다만 왜 약속장소가 여기인지에 관해 궁금증을 품을 뿐이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묘하게 흥겨운 음악소리, 가족 단위의 사람들, 둥실 둥실 떠다니는 풍선과 조잡해 보이는 원색의 장난감들. 눈이 피로해지는 듯한 기분에 미간을 눌렀다. 하늘은 파랗고 날씨도 좋고 다 좋은데-
왜 자신은 금쪽 같은 휴일에 상대 회사 대표와 동물원에 와 있어야 하냔 말인가.
어디에 포인트를 두고 궁금증을 품어야 할 지 감도 잡히지 않는 명제였다. '휴일'? '상대 회사 대표'? '동물원'? -아니 그 이전에 자신이 궁극적으로 품어야 하는 궁금증은 '왜' 가 아니겠는가. 왜 나는 여기 오자는 소리에 별반 생각도 하지 않고 냉큼 승락을 했냐는 말이다. 피곤했던 게 문제인 건가? 농담을 하는 거라고 생각한 게 문제냔 말이다. 대체 뭐가 문제라 나는 여기에 있는 건가-
"선미씨! 일찍 오셨네요!"
한참을 생각하고 있는데 활발한 목소리가 귓가에 달려들었다. 저쪽에서 황태룡이 순식간에 이 쪽으로 다가왔다. 뛰어온 건지 숨이 턱까지 차올라 무릎을 잡고 조금 헉헉대고 있던 태룡은 큰 숨을 내쉬고 땀을 훔치며 싱그럽게 웃어보였다.
"미인은 사람을 기다리게 한다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많이 기다리신건 아니죠?"
"아뇨, 방금 왔습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오, 입장 시작하네요. 들어가죠."
"예?"
왜 들어가야 하는 가. 분명히 표정이 어리벙벙해 졌을 것이라 생각했고 또 실제로도 그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왜 자신과 이 남자가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입장을 해야 하는 것인가. 어떤 고도의 놀림이 정말로 아니었단 말인가? 수십가지 추측과 억측과 의문이 머릿속을 지나가고 있는데 황태룡이 자신의 팔을 잡아 끌었다. 균형을 유지하기 힘든 하이힐을 신은 사람으로써는 발목의 균형 때문에 잠시 비틀거리다 끌려 갈 수 밖에 없을 따름이었다. 어벙한 얼굴이 한 층 더 당황스런 표정으로 바뀌었으리라 생각하니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 황태룡 대표님? 하고 말을 꺼내려는데 잠깐 뒤돌아본 황태룡이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손을 잡지 않은 손을 들어 보였다.
작은 종이조각이 두 장 끼워져 있었다.
"제가 입장권 샀으니까 선미 씨가 음료수 쏘는 겁니다?"
"....예?"
-
난간을 잡고서 커피 빨대를 물고 있다가 문득 정신이 들었다고 느꼈다. 이 사람한테 페이스에 휩쓸리는 것이 한 두번은 아니라 하지마나는 이렇게까지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될 지경인 것은 또 처음이다. 난간에 몸을 걸치고 백호를 구경하면서 정신이 들다니 이건 놀랍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손 안에 영수증이 쥐어져 있는 걸 봐서는 정말로 자신이 음료수를 산 모양이다. 물론 여기 입장권 비용과 비교하면 껌 값이라고 말해도 할 말은 없지만, 여하튼.
옆을 돌아보자 황태룡 대표는 호랑이를 부르려는 시늉을 하듯 쭈쭈쭈 하고 손가락을 까닥이고 있었다. 호랑이가 반응을 하건 말건 웃기긴 마찬가지인 일이어서 이를 조금 악물었다. 멀리서 백호가 문득 킁, 하고 콧김을 내뿜었다. 타이밍이 너무 절묘한데다 황대표가 실망하는 시늉을 해서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손에 힘이 들어가 커피가 넘칠 뻔 한 것을 직전에야 알았다. 그것도 컵에서 우득, 하고 소리가 나서.
"음? 그 커피 맛 없어요?"
"아, 아니오, 괜찮습니다."
"그래요? 아, 여기 물개 쇼랑 돌고래 쇼 괜찮다는데 뭐 보실래요?"
더 봐야 하는 것인가.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셈인지 영문을 모르겠다. 오늘 아무리 일이 없다고 해도 말 그대로 금쪽같은 휴일이다. 자연스럽게 따라가고 있는 자신도 이해 되지 않지만 본인도 금쪽같은 휴일일텐데 그 시간을 자신에게 할애하는 황대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주 즐겁기는 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읏?!"
"어?! 선미 씨 괜찮아요?"
"아, 괜찮..."
괜찮다고 하려고 했는데 의외로 괜찮지가 못했다. 아까 끌려간 것이 문제였는지 가느다란 힐의 굽은 금이 가다 못해 덜렁 부러져 있었다. 그닥 아끼는 신발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악재는 악재다. 오늘은 대체 무슨 날이길래 이런 건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황대표는 어, 하고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래도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모양- 잠깐, 왜 무릎을 꿇는건가.
"뭐하시는 겁니까?"
"예? 안 업힐 겁니까?"
"...예?"
"맘에는 안 들겠지만 이 아랫쪽에 운동화 정도는 파는데 있습니다. 그 신발로 가시긴 뭐 하잖아요? 업히세요."
"아니, 제가 왜-"
왜, 까지 말하고 순간 함구해 버렸다. 가장 중요한 의문이지만 말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자신에게 놀이공원에 가자고 청했는가, 왜 갑자기 딱히 이유도 없으면서 갑자기 친절하게 대하고 있는가, 왜 갑자기 이름을 불러대는 건가, 왜-
왜, 이렇게 묘하게 대하고 있는 건가. 마치 여자친구를 대하듯이.
황 대표가 눈을 깜박이며 자신을 뒤돌아보았다.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했다는 생각이 들어 입술을 깨물 것 같았다. 얼른 일어나서 이 동물원을 벗어나야 겠다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했다.
"그야 데이트 중이니까요."
그리고 순간 멈칫 해 버렸다. ....데이트? 누구 마음대로?
"아 맞다 얘기를 안 했구나? 그래도 주말에 단 둘이 동물원 가자 그러면 데이트 일 줄 아실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선미 씨 의외로 순진하네- 라고 말하는 남자의 머리를 문득 갈겨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마 이 말만 아니었어도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제가요, 선미 씨를 지금 꼬시고 있거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러니까, 어떻게 생각하긴, 뭘 어떻게 생각하냐는 말이다.
"어 선미씨 얼굴 빨개진 것 같-"
"업어주시죠?"
"아 참, 운동화 사러 가야죠. 업겠습니다?"
남들 다 보는 와중에 업혀있으니 기분이 좀 많이 창피하고 할 말도 없고 얼굴이 화끈 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주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늘이 삼재는 아닌 모양이다. 달립니다? 라고 말하는 남자의 머리를 문득 정말로 때리고 싶다고 느꼈지만 실행하지는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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