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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도 글 백업입니다.
-태룡 씨, 저, 그....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으세요?
약속 장소에 나가려 하는데 갑작스레 전화가 와서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싶었다. 황태룡은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전화를 받았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로 미루어 보아 70%의 확률로 이 전화는 약속 취소 전화였다. 또 무슨 일이 생긴건가 하고 조금 찜찜해 하면서 받았는데, 생각 외로 잠시 기다려 달라는 것이어서 황태룡은 조금 놀랐다.
"무슨 일 있어요?"
-아, 그게, 집 문이 좀 이상해서.
"내가 도와줄까요?"
-예?! 아, 아뇨, 괜찮아요!
"오늘 일요일이라 열쇠집도 안 할텐데 내가 그냥 가죠 뭐. 알바 경험도 있겠다."
히힛, 하고 웃으며 말을 걸자 당황해서 허둥지둥 괜찮다며 말을 더듬었다. 집도 지저분하고, 대접해 드릴 것도 없고, 금방 나갈 수 있고... 한참 변명하는 걸 듣고 있자니 왠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황태룡은 전화를 고쳐 쥐면서 머릿속으로 주소를 떠올렸다. 가만 있자, 어디 쯤이더라.
"그럼 이 더운날에 땡볕 아래 세워두게요? 건호 씨 나쁘다?"
-....죄송합니다....
울먹거리는 듯한 말이 귀여워서 웃음이 터졌다. 웃는 걸 듣고서야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는지 웃지마시라는 항의가 들렸지만, 그게 더 웃겨서 포복절도를 해 버렸다. 아 미치겠네. 한참동안 웃다가 진정되자 전화기 너머에서 조금 더듬더듬, 약속시간을 한 시간 정도 미루는 건 어떻느냐, 아직 집이시면 조금 이따 나오신다던가 하는 둥의 얘기가 들려왔다. 황태룡은 금방 간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끊기 직전까지 태룡씨 잠깐만요! 하는 얘기가 들려왔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다시 걸려오는 전화들을 대비하기 위해 핸드폰을 무음모드로 돌려놓았다. 여기서 거기까지 삼십분이면 되니까. 발걸음이 유난히도 경쾌했다.
-
"어, 이건 제가 못하겠는데요."
"그... 그래서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제가..."
"아니 이건 문고리를 아예 갈아 치워야하거든요?"
"예?!"
문고리 안쪽에 스프링이 아주 나갔다. 어제는 어떻게 문을 열고 들어간 건지 감도 안 잡히는 수준이다. 아예 문이 안 열릴텐데 말이다. 잠기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문고리가 아예 헛돌거다. 하긴 저렇게 잠금쇠가 있는 문고리를 현관문에서 본 것도 오랜만이다. 요즘은 죄다 전자식, 비밀번호식, 지문인식... 그런 게 대부분이지 손잡이가 동그란 은색 열쇠로 문을 여는 사람이 요즘 어디에 있냐는 말인지. 스페어 키도 안 주면서, 하고 조금 속으로 툴툴거리다 시선이 다시 연인에게 갔다.
침착해 보이는 표정으로 은빛 문고리를 만지던 연인은 후, 하고 긴 숨을 뱉으면서 당신의 턱선을 긴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짜증이 이는 상황에 습관적으로 마른세수를 한 걸지도 모르지만, 여하간 황태룡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허, 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큼, 여, 하간에 문고리 고치려면 내일까지는 있어야 할 거에요. 내일 회사 가죠?"
"....아, 음, 아뇨. 내일은.... 휴가, 썼습니다."
금시초문인 얘기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휴가? 내일? 꼭 말해 주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왠지 분했다. 머리가 아프고 짜증이 날 것 같았다. 휴가 낸다고 말도 안하고, 대체 뭘 어쩌시려고. 들끓는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했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웃으려고 하면 빈정거리는 비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얼굴이 굳어가는 게 형편없을 정도로 느껴졌다. -참자, 일단 오늘은, 데이트니까. ...이미 일목요연하게 망한 것 같지만.
"근데 일단 오늘은 꼼짝 없이 집에 있어야 겠네요."
"...그렇게 되네요..."
꿈지럭거리며 데이트... 하고 중얼거리는 게 보였다. 이 사람의 상상력은 얼마나 빈곤한 건가 싶어서 할 말을 잃을 뻔 했다. 꼭 나가야지만 데이트인가.
"그러니까, 저랑 건호 씨랑, 꼼짝없이 이 자취방에 있어야겠다고요."
"그렇... 네?!"
뜨악한 얼굴로 올려보는데 기분이 영 묘했다. 잠시 당황한 듯 하던 연인은 횡설수설하며 집도 더럽고 대접할 만한 것도 없고 들어오시면 그게, 두서없는 말을 내뱉었다.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왠지, 좀, 지치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애인인데, 여러모로 너무 무심한 거 아닌가. 항상 생각하는 일이긴 하지만 오늘따라 생각이 더했다. 내일 대체 뭘 하려고 휴가 쓴 것도 안 알려주고, 하고 뭉게뭉게 망상이 머리 위로 솟구쳤다. 굳이 이렇게 집에 안 들여 보내는 것도 뭔가 이유가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직구 밖에는 다른 말할 방법을 몰랐다.
"건호 씨는 제가 집에 들어오는 거 싫어요?"
"-그."
후. 짧지만 긴 숨이 연인의 입 밖으로 흘렀다. 정말 싫은 건가. 얼굴이 조금 일그러지려고 하는 것 같았다. 가슴이 좀 아프고 머리가 뭔가로 조이는 것 같았다. 기분 나쁘다는 게 이렇다는 걸 황태룡은 오랜만에 느꼈다. 연인이 두 손을 산처럼 뾰족히 모아 입과 코를 덮었다. 코인지 입인지 다시 한 번 긴 숨이 불어넣어졌다. ...그래, 저렇게까지 싫어하면 어쩌겠는가. 됐다고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라서, 그, 아무... ....을 것 같아서요."
"-예?"
소리는 더듬거리지도 않았고, 끊기지도 않았다. 다만 작았다. 그것도 좀 많이. 그게 손 안에 갇혀 있으니 제대로 들릴 턱이 있는가. 단편적으로 들리는 소리는 중요한 부분은 다 날아가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연인의 얼굴이 문득 화닥닥 달아올랐다. 연인의 눈동자가 문득 자신의 쪽으로 돌아왔다. 눈동자는 조금 떨리고 있었지만- 대신 피하지도 않고,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자신을 훑어내렸다. 문득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듯 했다. 어색한 목소리가 문득 들려와 정신을 차렸다.
"-밀폐.... 라서, 그, 아무.... 못 참... 같아서요."
다행히 이번에는 조금 중요한 부분이 들렸다. 밀폐? 뭐가? 못 참, 못 참, 못.... 한참 말을 되뇌이던 황태룡의 얼굴이 문득 같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헙,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썰렁한 바람이 둘 사이를 잠시 스쳤다. 아까부터 쪼그리고 앉아있던 연인은 한손으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볼을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음, 죄송합니다. 일단 제가 어떻게든 해볼-"
"저, 건호, 흠, 씨."
조금 얼굴색을 회복한 연인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피가 더 몰려서 터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귓가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저는, 큼, 괜찮은 거... 같은데요."
다시 후닥닥 급하게 자리에서 떨어졌다. 얼굴이 정말로 터질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연인의 얼굴 또한 다시 터질듯이 달아오른 게 보여서 그게 조금쯤 위안이 되었다. 그, 그.... 하고 연인이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그, 어, 그."
"하하, 일단 들어가죠? 좀 쌀쌀, 한 것 같네요."
"아, 잠깐, 그 태룡, 씨 잠깐만요."
쪄죽는데도 할 말이 없는 더운 날씨건만 얼굴이 뜨듯해서 그런지 영 날씨가 춥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황태룡은 계속 말을 더듬으며 당황하는 연인의 등을 밀었다. 아까 도대체 어떻게 열었을까 하는 의문과는 다르게 문고리가 고장나 있던 문은 의외로 쉽게 열렸다. 탁, 하고 문은 들리는듯 마는듯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다음 날 연인의 휴가는 고스란히 자신의 간호에 투자되었기 때문에 미리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에 관해서는 불문에 부치기로 했다. 첨언하자면, 휴일의 24시간 동안 전화벨은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고, 그 다음날 연인은 매우 미안한 얼굴을 하며 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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