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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도 글 백업입니다.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자취방 안에는 냉기가 감돌았다. 지금이 밤이어서 그렇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무더운 한여름인데다 열대야가 어쩌니 저쩌니 말이 많은 시기이기도 했다. 심지어 자취방 안에는 에어컨조차 없었다.
기실, 자취방 안에는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았다. 방에 냉기가 감도는 것은 아마도 사람이 드나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도 잘 드나들지 않는 집에 누가 오겠는가. 통장에 돈이 꼬박꼬박 들어오면서 자동이체 덕분에 건물주가 오는 일도 사라진지 오래다. 방 안에 있는 거라고는 앉은뱅이 선풍기 한 대, 싱크대, 작은 냉장고, 예비용까지 합쳐서 이불 두 채, 그리고 붙박이 옷장으로 쓰는 벽장 하나가 전부였다. 집에 잘 때를 빼고는 하도 돌아오지 못하다 보니 생긴 결과였고, 건호는 그 사실에 별 불만을 품지 않았다. 식사를 하는 것은 주말 뿐이 없었고, 그 마저도 이래저래 손 가는 게 힘들어서 자주 샐러드로 때우기 일쑤였다. 양복이 늘다보니 속옷을 제하면 빨래는 거의 세탁소에 가고는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닫고 보니, 자취방은 사람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가구 집기가 적어져 있었다.
취직하기 전과 그리 변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일로 바쁘기는 매한가지다. 조금 차이가 생겼다면, 그 때는 주말에도 바쁘거나, 불안해야 했지만 지금은 주말에는 조금 편해졌다는 것일까. 여유가 생긴 걸까. 생각을 하다가 건호는 머릿속을 털었다. 당장 내일도 주말 출근을 해야 할지 모르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천치가 된 기분이 들었다.
벗어놓은 구두를 정리하며 건호는 남은 한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눈이 뻑뻑하니 피로가 머리를 조였다. 게다가 오늘은 특히- 아니, 생각하지 말자. 제발. 찌뿌둥한 몸은 쪼그려 앉은 자리에서도 일어나기 싫어했지만 환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손바닥만한 창문을 열자 보름달이 중천에 올라가기 직전이었다. 문 앞에서 확인한 시간이 11시가 조금 넘었으니 저쯤에 있는 게 맞다. 방 불을 아직 켜지 않아서 그런지 방충망에는 벌레 한 마리 붙어있지 않았다. 밖의 공기가 습하고 더우니, 모기 몇 마리쯤, 이 주택가에 날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뒷목에 와 닿는 와이셔츠 깃의 딱딱함 때문에 몸이 더 피로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옷을 갈아입기는 해야 하지만. 짧게 생각하고 고개를 돌리자 방 한 켠에 있는 벽장에 시선이 닿았다. 열고 싶지 않다. 생각하자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신이고 몸이고 지칠대로 지쳤다. 옷을 갈아입고 어서 쉬고 싶지만- 벽장은 열고 싶지 않다. 오늘 같은 밤에는 더더욱.
속옷만 입고 자도 문제는 없다지만 오늘 아침 커피를 엎어버린 덕에 이불은 지금 세탁소에서 열심히 마르고 있는 중이다. 예비용 이불은 벽장 안에 옷과 같이 넣어두었다. 지쳐 떨어질 지경이건만 상황은 그를 돕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상황에도 무던해지는 것 같아서 그게 소름이 돋았다.
길게 숨을 내 뱉고 발을 놀리기 위해 힘을 주었다. 괜찮다. 아직 기분이 바닥은 아니었다. 그러니 괜찮을 것이다. 제발. 벽장 문을 잡고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안에는 옷과 이불이 들어있었다.
그 당연한 광경은 굉장할 정도의 안도감을 불러일으켰다. 괜찮다. 그렇게 생각하며 건호는 입가에 엷게 웃음을 베어물었다. 적어도-
-안심한건가? 겨우 그거 가지고?
귓가에 '그게' 달라 붙었단 걸 깨닫기 전에는. 숨이 막혀오면서 얼굴의 핏기가 사라지는 게 느껴졌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발 밑이, 사라진 것 같았다.
-거지 같을 정도로 안일하군. 할 줄 아는 게 뭐야?
이죽이며 웃는 것의 얼굴은 흐릿했다. 건호는 손으로 눈을 눌렀다. 귓가에 맴도는 말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입술이 붙어버린 것 같았다.
-아 하긴, 특별히 할 줄 아는 것도 없었나? 오늘도 들었지? '당신 도대체 어떻게 붙은 거냐'는 말. 어제는 과장, 오늘은 팀장?
그래, 하긴, 자신도 신기하긴 했다. 다만, 그걸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었을 뿐이다. 서류처리가 남들보다 뒤떨어진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공채에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간단히 무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하루 이틀일이 아니라 익숙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세상은 늘 그렇고, 마음은 늘 아프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하긴 뭐 별 것도 아닌 일이긴 하지.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넘어 가면 안되고 방심해서도 안된다. 건호는 이불을 꺼내려 벽장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어두컴컴한 벽장 안에 얄팍하기까지 한 이불이 손에 닿았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온도에 기분이 식었다.
그래, 괜찮다. 넘어가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가뜩이나 나쁜 하루였는데 이런 일로 기분을 더 망칠 수는 없는 일이었-
-그런데 그건 누구였지? 대표님이라?
-더 기분을 망칠 수는
없는 일이었는데.
"...닥쳐."
-클라이언트를 그 딴 눈으로 보다니 너도 상당이 거지같은 인간이구만?
"닥치라고."
-누굴까나 그 옆에 있는 여자는-
"닥쳐!!!"
퍽, 하고 이불이 벽장 아래로 흘러 내리다못해 굴러 떨어졌다. 악문 이가 부서져 내릴 것 같았다. 뒤돌아서자 항상 그랬던 것 처럼 '그것'은 가볍게 빙글빙글 웃음을 베어물고 편히 서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그래 뭐 그만큼 닮았으니 여동생이겠지.
"...그런데."
나랑 상관 없는 일이잖아. 목소리가 푹 쉬어 나오는 바람에 자신이 생각해도 이 말은 설득력은 없게 느껴졌다. 되뇌일 수 밖에 없어서 아무 일도 아냐, 그건 아무일도 아니라고. 몇 번이나 그렇게 중얼거렸다. 갈 수록 목소리가 줄어들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또, 그게 웃음을 물고 있었다.
-상관 없다면서 엄청 동요하던데.
"그게 뭐-"
-뭐 이번엔 여동생이었지만.
숨이 턱, 막혀왔다. 안 돼. 말하지 마. 더 이상 지껄이지 마. 그 이상 입을 열지마-
-다음에는, 여자친구 이려나?
"다, 물어."
당연한 일이다. 그 나이에 여자친구 한 명 없는 게 오히려 우스운 일이지. 그게 말이나 되는 건가. 당연히 결혼도 생각해야 할 나이고 그러니까-
왜 자신은, 동요하고 있는 것일까.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차라리 신나보일 정도로 웃던 것이 건호의 뒷머리채를 움켜쥐었다. 강제로 마주쳐진 눈이 까맣게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것은 조금 씁쓰름하게 웃음을 베어물고 선고를 내리듯 입을 열었다.
-넌, 그거, 좋아하잖아.
당신이 없어졌으면 하고 바랐다. 당신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싶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그렇게 당신을 죽여버리고 싶단 말을 몇 번이나, 몇 번이고 목구멍 속으로 밀어넣었다.
왜 당신은 그런 사람이어서.
너무도 밝은 사람이어서.
나를 곤란하게 만들어버리는 건가.
차라리 당신이 나를 미워해 주면 좋으련만. 다만 슬플 지언정 미련없이 가버릴 수 있을텐데. 차라리 당신이 나를 증오한다면- 당신을 죽이고 편히 나도 가 버릴 수 있을 텐데.
만약 내가 당신에게 고백해 버렸다면
당신이 나를 경멸해 죽어버리라며 저주를 퍼부었다면
차라리 지금보다는 기쁘게 죽을 수 있을텐데.
천천히 발목부터 늪 아래로 잠겨들어가는 기분이었지만 벗어나기는 용이치 않았다. 사람은 죽고 나면 자신이 난 별로 돌아가게 된다고 했다. 당신을 죽이고 나도 죽는다면 당신은 당신의 별로 가고 나는 내 별로 돌아가게 되겠지. 당신을 다시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서글프고 많이 가슴이 아팠다. 어쩌면 두 감정은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그랬다. 그 별은 지옥임이 분명하리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다. 아까 벽장에서 무너져 내린 이불 위에 주저 앉았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지만 제대로 인지할 수는 없었다. 눈앞이 흐려져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건호의 눈을 가렸다. 등이 벽에 닿았음에도 그것은 분명히 건호의 뒤에 도사리고 있었다. 어떤 얼굴인지 정확히 상상할 수 있을 법하게 그것은 후후, 하고 웃었다. 눈 앞에 덮어진 손 때문에 온 세상이 시꺼멓게 죽어갔다. 귓가에 작게, 어쩐지 씁쓰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내가 몇 번이고 말했잖아. 우리는 결국-
"-여기로 돌아오게 되어있는 거야..."
그것은- 김건호는 그렇게 작게 중얼거렸다. 은한은 삼경이라 방은 밝은데, 눈 앞은 깜깜하기만 했다. 열려있는 벽장이 방 한칸을 완전히 잡아먹어버린 것 같았다. 분명히, 이불을 두르고 있는데- 방은 서늘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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