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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도 글 백업입니다.
고개를 들자 한쪽 벽에 달려있는 전자시계가 검은 바탕위에 빨간 글자를 깜박이는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pm 9:36. 야근이 미친짓이라는 건 알지만 미친 짓을 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인사부가 미치는 철이 인사철밖에 더 있겠는가. 미간을 꾹꾹 눌러 인상 쓴 얼굴을 돌려놓았다. 잠을 못 자는 것만으로 영양크림을 물 마시듯 발라도 회복이 시원치 않을 판에 주름까지 지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다시 컴퓨터로 시선을 돌렸다. 3중으로 백업한 파일이 제대로 백업 되었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컴퓨터를 '안전하게' 종료했다. 거의 완성 된 게 날아가다니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본인만 끔찍하면 또 모를까, 인사부 전체에 지옥이 고스란히 강림한다. 몇날 며칠을 철야해서 간신히 끝내두었는데 그 짓을 또 하라고? 미친 짓이다.
고개를 들고 사무실을 쭉 둘러보자 자신을 제외하면 사람이 몇명 남아있지 않다. 이제 저 사람들도 거의 마무리 단계일 거고, 확인은 내일 와서 하면 되겠지. 길게 숨을 뱉고서 옷걸이에서 정장 재킷을 들었다. 점심마저 막내가 사온 샌드위치로 대충 때웠으니 오늘 회사에 들어온 다음에 처음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퇴근이다.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시고, 내일 뵙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진부장님-"
"내일- 뵙겠- 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중간에 좀비라고 같은 목소리가 하나 끼어있는 것 같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대부분에 목소리가 저 모양이었으니-본인도 아마 저랬을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빠졌다-그냥 무시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내일부터는 그나마 조금 나아지겠지. 그래도 서류가 더미로 들어오겠지만. 엘레베이터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버튼을 누르자 1층에 멈춰있던 엘레베이터가 올라오면서 기계 움직이는 소리를 냈다.
이번은 유난히 골치가 아팠다. 영업부의 인사배정을 거의 끝내 놓았을 때, 그러니까, 며칠 전 점심시간이었던가. 성희롱 신고가 들어왔다. 범인은 맹꽁이, 라고 인사부 내에서 암암리에 호칭되는 영업 2과 과장. 분명 경고가 몇 번 갔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하다니 어떤 의미에서는 참 대단하다. 지금까지의 이력을 보니 인사조치가 가야하는 선까지 가 있어서 그 배정과 그 자리에 올라갈 사람을 고르는 것, 그 일을 다른 높으신 분들과 이야기 하는 것 등등 영업부를 반쯤 인사 배치를 새로하는 선까지 가는 바람에 일감이 갑자기 확 늘었었다. 빌어먹을 맹꽁이. 다시 생각하니 편두통이 일 것만 같았다.
가벼운 종소리와 함께 엘레베이터가 도착했다.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평소 점심시간의 아비규환을 생각하면 천국이 따로 없는 환경이다. 1층을 누르자 바로 문이 닫혔다. 공간 내부를 울리는 기계소리에 거울이 반짝거렸다.
지금 당장 집에 가서- 그러니까 필요한 게 첫째로는 클렌징, 둘째로는 수면. 그리고 칼로리. 아침은 머리 세팅과 화장만 하고 간신히 나왔고 점심에 먹은 샌드위치라고 해 봐야 목으로 넘어가지를 않아서 1/4쪽이나 간신히 먹은데다 저녁은 조금만 더 하면 끝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사원들이 주문할 때 자신은 빼달라고 했었다. 오늘 칼로리 섭취량이 생각해보니 상당히 절망적이다. 정말로, 이러고 잘도 움직였다.
일단, 집에 가는 길에 있는 식당이든 카페든 들려서 뭔가 좀 먹고, 마시고, 집에 가서 클렌징을 한 뒤에, 숙면을 취하자. 내일은 주말이고, 일도 대충 끝난것이 주말 출근을 할 필요까지는 없을테니 긴급 상황만 없으면 푹 잘 수 있을 것이다. 설마, 주말인데 인사고과에 해당되는 긴급 상황이 생길리야.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는 하지만 최소한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
생각해보니 지금 시간에 열려있는 음식점이 있을 턱이 없다. 있어봐야 고깃집, 술집 정도일까. 당장 급한게 칼로리라고 할 지언정 다음으로 급한 것이 수면인 이상에야 음식은 일단 대충 때울 것만 있으면 된다. 이렇게까지 제대로 연 곳 하나 없이 죄다 셔터가 내려져 있으니 눈 앞 풍경만 황량한 것이 아니라 마음 속 풍경까지 황량해지는 느낌이다.
집에 가서 저녁을 차려 먹을 만한 기운은 없으니 답은 카페 밖에 없다. 결국 또 샌드위치인가. 허니 브레드 같은 건 싫은데 설마 샌드위치가 다 팔리지는 않았겠지.
회사에서 집까지 가는 길에 이 시간까지 여는 카페는 하나밖에 없다. 커피가 그렇게 맛있는 건 아니지만 일단 한 끼 식사를 때울 만한 것은 있을 거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집 근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회사 근처에 있다는 것이다. 최소한 급한 보충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다는 거니까.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울이 가벼운 소리로 울렸다. 잠시 졸았던 듯 아르바이트 생이 눈을 몇 번이고 깜박이며 잠긴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지금 샌드위치 종류 되나요?"
"예? 아, 예."
"그럼 카라멜 마끼아또 한 잔하고 핫샌드위치 부탁드립니다."
"포장이신가요?"
"아뇨."
"핫 샌드위치 10분정도 걸리는데 괜찮으신가요?"
"....괜찮습니다."
"포인트 카드나 할인카..."
"없습니다."
"예에... 그럼 진동 울리면 와 주시기 바랍니다."
밤이라 손님이 없어서 그런지 그나마 아르바이트 생이 친절했다. 아니면 단지 밤 아르바이트 생이 인성이 더 좋은 것이던지. 전자일 확률이 더 크지만.
적당히 자리를 잡으려 위치를 물색했다. 아무래도 창가쪽 자리가 더 나으려나. 일단 빨리 먹고 들어가는 게 중요하니 적당히 카운터 쪽을 잡을까. -까지 생각했을 때 그제야 자신 말고도 다른 사람이 카페 안에 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영업하고 있는 음식점이니 다른 사람이 또 있는 건 당연하지만, 이 시간에 이 카페에 사람이 또 누가 있으려고, 라는 고정관념이 지나치게 강했던 모양이다.
그 사람은 얼마나 오래 이 카페에 있었던 건지, 잔 네 개 정도가 탁자 위 여기저기에 흐트러져 있었고, 절반 쯤 남은 파르페 컵 하나가 표면에 이슬을 송글송글 맺고 있었다. 게다가, 그 사람은, 남자였다. 체크무늬 셔츠에 청바지라는 캐주얼한 복장을 하고 붎편한 카페 의자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앉아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팅을 한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밤의 유리는 거울과 진배 없다. 그럼에도 남자는 고개를 돌려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뒷모습이 어쩐지 낯이 익다-고 생각했지만 곧 그 생각을 털어버렸다. 요 며칠간 하루에도 수백명, 어쩌면 기천명의 서류를 보고 프로필을 보고 사진을 봤다. 아마 누구를 보더라도 낯이 익다고 생각될 것이다.
대충 자리를 잡고 앉으려고 하는데-역시 카운터 근처가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남자가 고개를 돌려 파르페에 눈길을 주었다. 은색의 길다란 파르페 스푼은 입에 물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주머니에 넣고 있던 양 손을 꺼내 팔짱을 끼고 파르페 잔을 지그시 노려보던 남자는 곧 이어 입에서 스푼을 뽑아 파르페 잔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파르페를 먹다 물려서 다른 걸 시키는 게 낫다고 생각한 듯하다. 카운터 쪽으로 오는 걸 보니까.
거기까지 하고 관찰을 끝맺으며 아직도 울리지 않는 진동벨을 손에 쥐어 쳐다봤을 때였다.
"어? 진선미 과장님?"
고개를 들자 조금 전의 그 남자였다. 이 사람은 뭔데 날 알고 있는 건가.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만."
"진선미 과장님 아니십니까? 아, 이젠 부장님이라고 했던가요."
"그게 저는 맞지만 저는 그 쪽을 처음 뵙습니다만."
"흠, 너무하시네. 황태룡이라고 합니다만?"
어디서 들은 듯한 이름이기는 하지만 확실하지도, 정확하지도 않다. 눈을 두번 정도 깜박일 동안 추가로 더 열심히 생각했지만, 역시 기억 나지는 않는다.
"잘 모르겠군요. 사람 잘못 보신 거 아닙니까?"
"흠, 그런가요."
어깨를 으쓱 하고 남자는 카운터로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조금 질린듯이 대답하는 알바생의 말에 남자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많이 팔면 좋지 뭘 그래요? 아, 요즘은 인센티브 안 줘요?' 라는 둥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조금 시끄럽기는 하지만, 카페 자체가 조용해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 뿐이었고 별로 눈쌀을 찌푸릴 만한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알바생이 커피를 타러 주방으로 들어간 뒤였다.
"근데 가까이서 보니 참 미인이시네요."
".....?"
작업 거는 건가? 문득 그런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웃기는 건 남자는 자신 쪽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생각해 보면 아까 자신을 아는 척 '언제 한 번 보지 않았나요?'라고 질문 한 것도 작업일 수도 있다. 언제적 작업인가. 그냥 없는 사람 취급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할 참이었다.
"빠지겠네~~♪ 기이픈 눈빛~♪"
순간 표정이 흐트러질 뻔 했다. 가락은 그렇다 치고 가사가 지나치게 익숙했다.
"윤기 흘러 동안 피부~♪"
그러니까, 이 곡을 들었던 게-
"세월도 질투하네~♪ 일필휘지 팔자 주름~♪"
생각났다. 그러니까 5년 전에 과장 달고 최판규 부장님이랑 면접 몸풀기 시간에-
-위이이잉!
문득 손에 진동이 와서 회상에서 현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진동벨을 다트 던지 듯 던지는 자세 직전에 간신히 멈춰 설 수 있었다. 5년 사이 자제력 하나 기르지 못한건가. 그 때와 같이 입 속에서 '칫' 하는 말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입 안으로 우겨넣었다.
"오우, 진짜 때리시는 줄 알았습니다. 하하하."
"손님... 주, 주문하신 카라멜 마끼아또와 핫 샌드위치 나왔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진동벨을 자기한테 꽂을까 두려워하는 알바생에게 벨을 밀어 내밀고 쟁반을 받아와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들어본 적 있나 싶었더니 '그' 황태룡이었단 말인가. 입에서 나오려는 욕을 샌드위치와 함께 곱씹었다.
"생각 나신 거죠? 잠깐 얘기 좀 해도 될까요?"
순간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서로 그다지 좋은 기억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싱글싱글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거절의 말을 입에 담으려고 할 때였다.
"그 때 맞은 다트 자리가 아직도 비만 오면 쑤십니다마는-"
".....앉으세요."
"아하하, 이거 감사합니다. 아, 잠시만요."
다시 한 번 진동소리와 함께 황태룡 씨가 핸드폰을 들었다. 소리가 짧은 걸로 봐서는 아마도 문자인 모양이다. 잠시 핸드폰 화면을 두드리더니 금방 자신의 앞자리에 앉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조차도 오래 걸릴 모양인지 남자 바로 앞 탁자 부근에는 진동벨과 핸드폰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음, 그러니까. 지금 인사부장이시죠?"
".... 그렇습니다만."
별로 대답해야 할 필요도 못 느끼는 질문이었다. 다시 샌드위치를 입으로 밀어 넣었다.
"풍운 전자?"
"-네, 뭐. 잘 알고 계시는군요."
"풍운 전자 퇴근시간 혹시 뒤로 밀렸습니까?"
이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황당해 하는 걸 티내지 않기 위해 무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는데 진동이 울렸다. 진동벨인가. 탁자를 내려다 보는데 남자는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또 문자인가. 잠시 실례한다며 화면을 몇 번 두드린 남자는 다시 탁자 위에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이놈의 인기가 꺼지지를 않아서-"
"그렇습니까."
"예, 그럼 다시 좀 묻겠습니다만, 풍운전자 퇴근 시간 혹시 뒤로 밀렸습니까? 한 아홉시 쯤이라던가-"
두 번째 들었더니 당황스러움이 조금 덜 했다. 그렇다고 당황스럽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아뇨, 풍운 정규 퇴근 시간은 아직 6시입니다만."
"진선미 부장님도 방금 나오신 거 아닌가요?"
지금 농담하자는 건가? 다시 미간이 구겨지려고 하는 느낌이 들어 인상을 펴려고 노력하며 남자를 쳐다봤다. -문제는, 이 남자가 더 없이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는 지금이 인사철이라, 야근을 하고 나왔습니다만."
"그런가요...."
그 이후 잠시 동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남자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앞에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신경쓰지 않고 팔짱까지 끼고는 아무 심각하게. 이제야 좀 조용해 졌나. 샌드위치를 베어 물고서 간신히 커피에 입을 댈 수 있었다. 뜨겁지는 않았지만 적당히 따뜻하고 달달한 커피가 혈당을 올려서 그제야 좀 힘이 나는 기분이었다.
다시 진동이 울렸다. 남자는 실례한다는 말조차 없이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어서 화면을 심각하게 쳐다보았다. 잠시 핸드폰을 뚫을 듯이 쳐다보던 남자가 문득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진 부장님."
"......?"
"이름 좀 빌려도 되겠습니까?"
이제는 할 말이 없다 못해 기가 찼다. 샌드위치가 몇 입 남지도 않았는데 얼른 먹고 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곧 지워졌다. 속이 안 좋아지면 자신의 손해일 따름이다.
"오늘따라 상당히 실례가 많으시군요."
"-아하하, 그렇군요. 많이, 실례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화면에 손도 대지 않고 남자는 핸드폰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진동 소리는 한참이나 울리지 않았다. 여기는 대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뽑는데 얼마나 걸리는 건지. 침묵이 무겁게 어깨를 내리눌렀다.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물었지만 넘어가지를 않았다.
"여유 없는 남자는 꼴불견이겠죠?"
문득 남자가 입을 열었다. 커피잔에서 입을 떼자 특유의 여유를 되찾은 남자가 작게 숨을 토하고 씩 웃었다.
"아까부터 죄송합니다. 분명히 별 일 아니고, 진심으로 사과도 받았고, 해명도 받았는데- 며칠 전부터 영 심술이 나서 말입니다. 괜히 다른 사람한테 이래저래 실례하게 되네요."
"누구 기다리시는 겁니까?"
"예, 뭐, 그렇지요."
예상은 했지만 확답을 받는 것과는 역시 조금 다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 사람을 기다리면서 음료를 다섯, 아니 여섯 개쯤 시킨다는 건- 그 만한 시간을 기다린다는 건 생각하기 힘든 일이니까.
"기다리게 하는 사람도 상당하군요."
"아, 그 친구는 모를 걸요? 놀래키려고 하다 오기가 생겨서 이러고 있는 겁니다."
그거 참 쓸데 없는 오기를. 혀 끝에서 튀어나오려는 말을 내리 눌렀다. 할 일이 그렇게도 없는건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곧 지워버렸다.
"그러고 보면 그 덕분에 쓸데없이 심통이 두배가 된 것 같기도 하네요. 와하하하."
"아까 그 심술난다는 사람과 동일 인물인가 봅니다."
"오, 추리력 좋으시네요. 맞습니다."
"그것 참 상당한 심술이군요."
"예?"
가볍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며 너털웃음을 짓는 남자는 왠지 아까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셔서 목을 축인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몇 시간이나 기다린 걸 알면, 그 사람은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할 거 같습니다만."
순간, 남자의 표정에서 순식간에 얼이 빠져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에, 남자는 헛웃음과도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아하, 큭큭큭큭... 와. 이거 한 방 먹었습니다. 야, 역시 진선미 부장님이시네요."
"칭찬 감사하군요."
위이잉, 하고 다시 진동이 울렸다. 자신과 남자 모두 핸드폰을 주목했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진동의 원인은 진동벨이었다. 남자는 아까보다 훨씬 가벼워보이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다음에는 제가 커피 한 잔 사 드리겠습니다. 고민 상담 굉장히 잘 하시네요."
"사양하겠습니다. 다음에도 또 이런 상황이면 체할 것 같아서요."
"다음엔 이런 상황 아니면 되죠 뭐."
"그렇습니까."
커피의 마지막 한 입을 목 뒤로 넘기자 아까보다 훨씬 에너지가 찬 느낌이 들었다.
"그럼, 저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예. 안녕히 들어가십쇼~"
여전히 낄낄 웃고 있는 남자는 계속 울려대는 진동벨은 신경도 쓰지 않고 다시 핸드폰을 잡아 화면을 두드리고 있었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쭉 켜는 그 동작이 가볍다 못해 경쾌할 지경이었다. 문득 자신이 한참동안 핸드폰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게 생각나 백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에 깜박이는 pm. 10 : 02. 그리고 문자가 한 통.
「부장님지시하신보고서완성했습니다월요일에확인부탁드립니다」-김철수 pm 9 : 58
서류는 월요일 것이지만 일감이 다시 쌓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잊기 전에 처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발이 저절로 회사로 움직였다. 회사 로비는 아직 빛나고 있었다.
-
엘레베이터가 올라가다 문득 멈춰섰다. 문이 다 열리는 것을 기다리지도 못하고 한 남자가 급하게 엘레베이터에 올라탔다. 사무실에서 엘레베이터까지 뛰어온 듯 남자는 거친 숨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이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란 남자가 90도 각도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진 부장님!"
"-안녕하세요 김 대리."
영업부의 김건호 대리였다. 이번 인사 고과도 그렇고, 면접에서도 그렇고, 참 여러모로 인상 깊은 사람이었다. 대체로 좋은 쪽이라서 다행이지만.
"아직 퇴근 안 했습니까?"
"그, 데이터에 잘 못된 부분이 있길래, 보고서를 작성하다, 잠시 손대다 보니 시간이 늦어져서..."
알 만하다. 저걸 저렇게 횡설수설 말하는 것도 재능이었다. 상당히 당황한 모양이다. 김건호 대리의 등 뒤에서 엘레베이터가 닫혔다.
"버튼, 안 눌렀는데요. 인사부에 가려고 하는 겁니까?"
"예?! 내, 내려가는 거 아닌가요?"
"올라가는 엘레베이터입니다. 지금 퇴근하는 겁니까?"
"아, 아뇨. 그, 거래처 대표 분이, 지금 잠깐, 그러니까 기다리신건 아니고, 요 앞에 들리셨다고 해서 잠시 인사차... 그, 일은 곧 끝날 것 같습니다!"
이 시간에 나가는 거면 땡땡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자진해서 야근하고 있는 사람이 야근 중에 땡땡이를 칠리도 없고. 아니, 그 이전에 땡땡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습니까. 하고 가볍게 대답을 하자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레베이터가 열렸다. 열리자마자 닫침 버튼을 손가락을 가져가려 하는 게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다.
"저 내립니다만."
"예? 아, 시, 실례했습니다."
"김대리."
"예, 예?"
당황하다 못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가볍게 웃음이 나왔다.
"야근 수당 제대로 신청하세요."
"....예!"
대답을 듣자 마자 엘레베이터 문이 닫혔다. 잠시 은색으로 반짝이는 문을 바라보다 발을 옮겼다. 현재 시각은 pm 10 : 08. 퇴근 시간은 미정. 하지만 기분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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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삭제컷
아까보다 훨씬 짧게 화면을 두드리고 남자는 내팽개치듯이 탁자 위에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얼마 안 있어서, 다시 집어들었지만.
잠시 켜지도 않은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남자가 시선을 느낀 건지 고개를 들었다.
"어헛, 죄송합니다. 오늘따라 실례를 많이 하네요."
"......."
알긴 아는군. 쑥쓰럽다는 듯이 웃는 남자에게 그렇게 말할 것 같아서 커피로 입을 막았다. 쌀쌀한 에어컨 바람에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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