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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도 글 백업입니다.

 

 

눈꺼풀을 내리자 다시 뜨는 것도 뻑뻑할 정도로 건조한 눈이 느껴졌다. 조금 새어나온 눈물이 마른 안구를 적시자 마른 눈동자가 통증을 호소했다. 안경을 벗어 연단에 내려놓고 손으로 눈꺼풀 위에서 눈을 지그시 눌렀다. 압력이 가해지자 관자놀이를 후벼파는 것 같았던 두통이 조금쯤 덜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맡는 기업 강의이다 보니 상당히 긴장한 모양이다. 비록 치프 강사라고는 하지만 보통은 일괄적으로 스쿨에서 주최하는 것에 사람들이 등록하여 모이는 것이 일반적이고, 기업에서 의뢰를 해 출장을 가는 것은 그렇게 흔치 않다. 그것도 대기업에서 의뢰해 오는 것은 더욱 드물고, 다른 강사가 파견나가기도 쉬우니 이렇게 큰 강의를 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두통이 날 정도로 긴장을 한 모양이다. -아니. 중언부언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풍운. 입 속에서 소리나지 않게 사명을 뇌까렸다. 빌어먹을 남녀차별 같으니. 식어빠지다 못해 형상을 기억하듯이 굳은 분노가 글자를 만들었다가 산산조각나며 사그라들었다. 너무 씹어서 단물이 다 빠진 질긴 껌마냥 풍운에 대한 분노는 이제 별 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못할 정도로 너덜너덜하게 닳아 있았다. 뱉을만한 휴지가 없어 계속 씹고 있을 따름인 거지 그닥 문제가 된다거나, 아직까지 아픈 상처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처가 있었던 곳에는 손 대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증거로, 점심시간이 다 된 지금에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 것 아니겠는가.

작게 한숨을 뱉어내고 안경을 다시 썼다. 연단 너머로 넓게 펼쳐진 강당에는 사람 하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조금 전까지 열심히 필기한 흔적-새카만 노트라던가 널려있는 펜따위가 책상 위에 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대 풍운이 뭘 어쨌다는 건지. 자신은 그 대 풍운을 가르치는 선생의 입장인데 말이다. 조금은 억지스럽게 생각하며 미소를 띄우기 위해 노력하면서 강단에서 내려왔다. 풍운의 복지 중 제일은 사원 식당 밥이라 하던데 어디 그 맛 좀 봐야겠다.

-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은 변태 같은 놈이다. 아니 정정하자. 변태다.

"이야, 정 선생. 아까 강의 하시는 거 듣고 놀랐습니다. 그런 정리는 어떻게 하나? 여자인데 말이야."

"감사합니다."

언제 봤다고 정선생이라고 부르는 건가 이 개구리가. 면접 후에 권력 싸움이 어쩌니 하고 한 번 물갈이가 있은 후에는 풍운의 사원 복지가-정신적인 의미에서-한층 나아졌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래도 이런 인간 몇몇은 꼭 있는 모양이다. 느물느물하게 생겼다거나 어쨌다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라 꼭 이런 식으로 사람한테 기분 나쁘게 구는 그게 문제라는 거다. 그 증거로, 아까 단순히 안녕하시냐고 인사할 때까지는 꽤 후덕한 인상이라고,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입을 열자 마자 바로 이미지가 뒤집혀 버렸다. 게다가 파견나온 계약직 사원이라고 생각하는 건지-물론 계약직에게도 이러면 안되기는 하지만-은근슬쩍 말을 낮추면서 여자라고 깔보기까지 하고 있다. 장난하냐고.

"아, 결혼 안 했을테니까 정 선생보다는 미스 정이 더 나으려나? 여자는 아무래도 어려보이는 게 좋다고 하니까."

그 말은 늙어보인다는 건가. 거기에 갑자기 미스 정이라니. 이제는 그럴 의도가 없다고 해도 말 하나하나에 가시가 서 있는 느낌이다. 오늘 하루짜리 강의라 다행이지 내일도 나와야 했다면 정말로 열받았을 일이다. 점심시간만 어떻게 도망치면 될 것 같은데. 점심까지 같이 먹자고 하면 정말 최악이란 말이다.

"아, 그런데 미스 정. 벌써 점심 먹은 건 아닌 듯 한데... 한 끼 같이 할텐가?"

뱃속에서 욕이 올라오려고 하는 걸 내리 눌렀다. 핸드폰으로 112에 신고해 버릴까. 지금 손으로 머리를 내리치면 정당방위라고 인정 될 수 있을까. 손에 들고있던 스마트폰을 깨질 듯이 움켜 잡았다.

"강사님?"

갑자기 들려온 제 3의 목소리가 긴장을 확 풀어 버렸다. 이를 악물다 못해 입술을 잘근잘근 난도질 하고 있었다는 게 갑자기 느껴졌다. 입술이 아렸다. 조건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거의 에이포 용지 박스 분량의 노트를 끌어안고 있는 소심해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특징적인 구레나룻 모양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았다.

"어, 흠, 김건호 대리?"

"아, 이, 2과 과장님. 죄송합니다. 강사님 뒤에 계셔서 못 뵈었습니다."

김건호, 김건호라. 아, 맞다. 그 면접 때 보았던 세트메뉴 중에 햄버거.

"여기서 지금 뭐하고 있나?"

"필기한 노트가 많아서... 자리에 가져다 두고 점심을 먹으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느려서야 쓰겠나. 영업은 아무래도 발이 빨라야지. 어흠, 큼... 언제부터 있었나. 혹시."

"예? 방금 전에 왔습니다만."

상사가 저렇게 빡빡하게 구는데 이렇게까지 반응을 못하고 있는 것도 어떻게 보면 재능이었다. 눈치가 소멸 된 건가. 속으로 혀를 차다가 문득 남색 양복의 등 뒤가 축축하게 젖어있다는 걸 뒤늦게 눈치 채었다. 긴장한건가. 말하는 걸 보면 과가 다른 듯 하니 낯을 가리거나 소심한 편이면 확실히 긴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지금 이런 걸 분석할 때가 아니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해 먹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과장님?"

살짝 운을 떼자 서로 긴장해서 쩔쩔 매고 있던 둘의 시선이 다시 쏠려 들었다. 한 시선이 단지 조건 반사 식의 멍하게 쳐다보는 거라면 다른 한 시선은 순식간에 음흉해져 속이 뒤집힐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과장님이셨군요. 생각보다 직급이 높으시네요."

"... 흠. 어허허. 그런 소리 많이 듣지. 아무렴. 직급에 비해 젊다고 말이야."

일부러 비껴 듣는 건지 자기 욕하는 것도 모르는 건지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진 두꺼비는 안 그래도 불뚝 튀어나온 배를 더 앞으로 내밀었다. 일그러지려는 얼굴 근육을 간신히 다잡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렇군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같이 식사는 조금 무리일 것 같습니다."

일그러지는 두꺼비의 표정이 참 볼만하다. 아까보다는 훨씬 진심으로 미소지으며 생각한 말을 이었다.

"김건호 씨랑 점심 약속이 있어서요. 면접 일로 안면이 있어서 말이죠."

-

"예... 예, 그렇습니다. 예. 그렇게 처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핸드폰을 끊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인사부에 성희롱 과장을 신고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익명처리, 몇 번 이상 신고가 들어오면 인사 처리. 좋은 제도다. 가슴이 뿌듯해 지니 이 얼마나 좋을 쏘냐. 인사부의 태도를 보아하니 이런 신고가 들어온 게 한두번이 아닌 것 같은 게 그 두꺼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렇게 속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김건호 씨가 괴롭힘 당할 일도 줄어드니 신경쓰일 일도 없고 말이다. 시야 한켠의 김건호-들어보니, 직급은 대리라고 했다-씨를 보니 어색하고 어쩔 줄 몰라하며 안절부절 하고 있는 게 아예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이래서 영업이 잘 될지 모르겠네. 속으로 절로 혀가 차 졌다.

"김건호 씨."

"예? 아. 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게 이름을 부르자 더 뻣뻣해졌다가 사람을 확인하고는 조금 풀어졌다.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인 건지 편한 사람과 불편한 사람의 차이인 건지 긴장의 기준을 도통 모르겠다. 하긴, 긴장한게 구부정한 등이 펴져서 더 자세가 좋아 보이기는 한다. 실제로 건강에 좋은 자세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자신감이 좀 더 있으면 완벽할텐데, 하고 생각하다 점심시간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자신에 문득 멈칫했다. 그야 일이 좋고 재미있기는 하지만 쉬는 시간까지 일을 생각하는 건 왠지 좀 그랬다.

"좀 전에는 고마웠어요. 박자 맞춰줘서."

뻥이다. 박자를 맞춘다기보다는 긴장하고 당황해서 "예?" 와 "아? 아, 네..." 를 반복했을 뿐이다.

"예에...."

마치 지금 이 대답처럼 말이다.

하긴 조리있게 "아니요, 전 강사님을 오늘 5년만에 처음으로 뵈었고 단연 점심 약속도 없습니다. 강사님 지금 다른 누구하고 착각하고 계시는 거 아닌가요?" 라고 대답하는 것보다야 백 배 낫다. 두꺼비야 나중을 기약하며 물러났지만 난 오늘 저녁 이후에 이쪽으로 출근 안 한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다.

근데 영업한다는 사람이 이렇게 물러터져도 되는 일인가. 이용당하기 너무 좋잖아. 사람은 기본적으로 더 강하게 의견을 표명하는 사람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이래서야 고객이 어떻게 말하던 네, 네 하고 대답하다 끝날 뿐이지 않겠느냔 말이- 까지 생각하고 다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쉬는 시간이다. 쉬는 시간.

"음, 근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까 사원 식당 가기도 뭐할 거고. 답례하게 제가 밥 한 끼 사겠습니다."

"예?! 아, 아뇨,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강사님."

굳이 표현하자면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이 사람. 긴장하다 못해 패닉 상태에 접어든 것 같은 게 사람 대하는 데 면역이 없는 건지 폐 끼치기 싫다는 건지 죽도 밥도 아닌 것 같은게 처음 볼 때부터 지금까지 영 찝찝한 사람이다. 물론 아까 그 두꺼비에 비하자면 상대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사람이긴 하다만.

"그럼 언제 점심 드시려고요? 굶거나 제대로 안 먹으면 오후 수업 못 따라 올겁니다. 빡빡해서요."

"그...."

"그리고 저도 점심 먹어야 하니까 좋은 식당 한군데 알려주셨으면 하기도 하고요."

"아, 아아... 네..."

좀 당황한 것 같기는 하지만 아까보다 패닉이 많이 줄어들었는지 그래도 움직임이 있기는 하다. 좀 덜걱거리기는 하지만.

"그, 강사님은 뭐 드시겠습니까?"

"음, 저는 일단 백반이 좋을 거 같네요. 아침에 빵 먹고 나왔더니 쌀이 먹고 싶어서요."

"예에..."

나오면서 로비의 시계를 흘끗 보니 점심시간은 이제 45분이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빨리 먹어야 할 듯 하다.

-

한 낮의 태양이 뜨거워서 아까의 선택이 후회되고 있다. 백반집은 회사에서는 그렇게 멀지 않았지만 크게 나 있는 전면 창에서 햇살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습도도 높아서 푹푹 찌기도 하는데 햇살마저 강하다. 이런 날씨에 이 집이 제일 잘한다는 된장찌개 백반을 먹고 있자니 땀이 눈꺼풀까지 흘러 앞을 가릴 지경이다.

그건 김건호 씨도 마찬가지인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김치찌개를 밥 위에 퍼서 올려 먹고 있었다. 아 맞다. 이제 겨우 삼십분 남았지. 된장찌개를 얼른 한 숟갈 가득 퍼 밥과 함께 김치 한 점을 입에 우겨 넣었다. 확실히 잘하기는 잘 하는 집이다.

"맛있네요."

"그, 그런가요?"

"네. 추천해줘서 고마워요."

"다행입니다."

아까부터 계속 긴장한 것 같은 표정이 순간 부드럽게 퍼졌다. 많이 편해졌나보다. 다시 금방 딱딱하게 되기는 했지만 역시 부드러운 쪽이 긴장한 것 보다는 낫다. 흠, 확실히 자신감이 있어야 사람이 더 나아 보이는 게 확실하다. 영업사원으로 저 표정을 계속 유지할 수 있으면 상당히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된장찌개에 비빈 밥을 한 입 크게 넣으면서 꼭꼭 씹었다. 밥도 많이 주셨네.

"아까 보니까 필기 열심히 하시는 것 같던데요."

"아... 감사합니다."

침묵.

"요즘 잘 지내고 계세요?"

"튼튼한 게 자랑이니까요."

침묵.

"일은 잘 되세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대화가 안 된다. 사람하고 1대 1로 밥 먹으면서 이렇게까지 침묵을 고수하려 하다니 부담스럽지도 않은가. 물론 끌려오다시피 한 당황스러운 상황이기는 해도 이렇게까지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니 놀라울 지경이다. 열심히 입으로 밥을 퍼 넣고 있는데 저쪽이나 이쪽이나 밥공기에 들어있는 밥 양은 잘 줄지를 않는다. 와글와글 떠드는 주변에 비해 이 공간만 침묵이 감돌고 있으니 여기만 분리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색하다. 정말로.

"그.... 죄송합니다."

입으로 퍽퍽 음식을 집어넣고 있는데 문득 말소리가 들렸다. 자칫하면 잘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는 작은 목소리였지만 웅얼거리지는 않는 편인지 글자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전달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죄송하다니?

"아무래도... 말주변이 좋지는 않다보니. 어색하실 거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이 상황에서 뭐라고 해야할 지도 모르겠고..."

"아뇨, 괜찮아요. 제가 억지 쓴 거나 다름 없는데요 뭘."

"아니, 음. 그래도요."

어쩐지 밥의 양이 줄지 않는다고 생각했더니 밥을 떠서 입으로 가져가는게 아니라 밥을 숟가락으로 난자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공기 가득 들어있던 밥은 몇 숟갈 줄지도 않은채 위 아래가 뒤집히다 못해 뒤석여 있었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숟가락은 밥공기 안을 휘휘 젓고 있을 뿐이었다.

"그... 강사님 수업, 열심히 들었습니다. 상당히 유익했고... 도움도 많이 될 것 같습니다. 강의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뭘요. 저도 열심히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에서 열심히 하는데 잘 안 들어주면 그것도 힘들어서요."

"그런가요..."

"예. 그보다 얼른 식사하세요. 이제 점심시간 겨우 30분 남았습니다. 강의 들을 준비도 하셔야죠."

"아,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간신히 분위기가 풀어졌다. 숨 막힐듯한 어색함이 없어지니 조금은 살 것 같은 기분이다. 제대로 밥을 입 속에 넣은 것을 보고 꽤나 식감이 좋은 계란말이를 입에 넣으려고 할 때였다.

"어? 이게 누구야?"

김건호 씨의 손놀림이 문득 멈췄다. 놀라서 굳은 건지 무서워서 굳은 건지 안색이 파랗게 질리다 시피 해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도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한데.

"아, 화, 황 대표.... 님...."

"우와, 몇 번을 말했는데 딱딱하게 부른다. 그냥 태룡 씨라고 부르라니까요. 얼레? 여자분이랑 밥 먹는 중?"

황태룡? 황 대표? 황... 태룡?! 그 면접에서 다트?!

뒤를 확 돌아보자, 아니나다를까, 유난히도 밝고 활달해보이는 남자가 뒤에서 신나게 김건호 씨를 놀리고 있었다.

"아하! 소개팅!"

"아닙니다!"

"에이 아니긴 뭘 아니야. 눈치없게 방해해서 미안, 합니다. 밥 맛있게 드세요!"

"아닙니다! 영업 스쿨 강사님이십니다! 잠시 밥만 먹고 있었습니다!"

벌떡 일어날 기세로 안절부절 못한다. 군대 수준으로 각이 들어가려고 하고 있다. 차라리 일어나서 차렷자세를 하는 게 더 편해보일지경이다. 물론 마음이. 그런데 긴장했다고 보기에는 목소리가 좀 큰데.

"음, 진짭니까?"

이 사람은 왜 이런 걸 나한테 묻는 건가.

"....예. 뭐."

"아하하,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아무래도 저 숫기없는 사람이 이유 없이 여자랑 밥 먹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요."

풋, 하고 웃어버릴 뻔했다. 빙글빙글 놀리듯이 웃고 있는 이 황태룡이라는 사람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추스르지 못하는 김건호씨의 얼굴이 당장 불타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차마 소리치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이 상황이 안 부끄러운건 아니고, 여러모로 복잡한 기분인 것 같은게 표정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귀엽다면 귀여운 모습이었다.

"아, 죄송한데 그럼 합석해서 먹어도 될까요? 지금 급하게 먹고 가야할 거 같은데 자리가 없어서. 하하하."

"예? 예! 그, 그러세요! 아. 음.... 그..."

"...괜찮습니다."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다 그제서야 상대방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서는 쪼그라드는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별로 상관이야 없지만, 저정도 집중력이라니 꽤나 굉장하다. 황태룡씨는 사양하지 않겠다며-이럴 때 쓰는 말은 아닌 것 같지만-건호씨 옆자리에 앉아 기세도 좋게 된장찌개를 시켰다.

"이 집 상당히 맛 있지 않습니까? 지난번에 한 번 왔던게 다인데, 와, 잊을 수가 없어서 오늘 또 왔다니까요?"

"네, 꽤나 맛있네요. 건호씨한테 맛집 소개해 달라고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중이에요."

"오, 건호씨 맛집 좀 꿰고 있나 본데요? 하긴 저도 여기 건호 씨한테 소개받은 데니까요."

"아무래도 영업이니까요."

"그건 그렇죠. 반찬 나왔다! 이모님 감사합니다!"

지독할 정도로 활달한 사람이다. 게다가 너무, 음, 기분이 좋아보여서 다가가기가 어렵다고 해야하나. 그런 느낌이 조금 드네. 옆에서 밥숟갈을 입에 넣을지 말지 고민하는 것 처럼 보이는 김건호씨가 너무 대비적으로 보였다. 황태룡 씨 눈치를 봤다가 밥그릇에 시선을 떨궜다가 하는게 말을 걸까 말까 고민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근데 저렇게까지 대놓고 눈치를 보면 옆얼굴이 조금 따가울 것 같은데 왜 이 사람은 눈치도 못 채고 있는 건-

"? 강사님 뭐하십니까? 팍팍 드세요 팍팍. 강의 그거 쉬운 일도 아닌데 너무 깨작거리시는 거 아니에요?"

"예? 아뇨, 잘 먹고 있습니다... 만..."

게다가 말을 거는게, 아니 그보다 대화를 하는 게 나한테 집중되고 있는 느낌인데. 친한-이런 표현을 쓰기는 뭐하지만 아마도 나보다는 친하겠지. 여하간 친한 사람 내버려 두고 생면부지라고 해도 좋을 나에게만 말을 걸고 있느냐는 말인가.

"김건호씨, 점심시간 몇 시까지 입니까?"

"예? 하, 한 시까지로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저 황 대표님..."

"와, 한시까지면 삼십분도 안 남았네. 강사님 얼른 드세요! 커피라도 한 잔 하시려면 시간 없습니다?"

채팅 같은 거면 뒤에 'ㅋㅋㅋ'라도 붙을듯한 활달한 말이었지만 어느면에서 봐도 김건호씨를 무시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당황스러웠다. 아니, 그러니까, 깔본다는 의미에서 무시하는 게 아니라, 화가 났달까, 그래서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듯한-

그러니까, 이런 말을 적용하기는 정말로 뭐하지만, 토라진 어린애 같달까. 그것도 김건호씨한테.

황태룡씨가 잘 먹겠습니다! 라고 우렁차게 외치고 밥그릇에 얼굴을 묻은 뒤에는 아예 침묵이 감돌게 되었다. 그것도 아까와 같은 침묵도 아니고, 한층 무거워진 침묵이. 김건호 씨는 아예 축 늘어져 가라앉아 버렸고, 황태룡씨는 말을 안 하겠다는 듯이 거의 전투적으로 보일 정도로 입속에 밥을 집어넣고 있으니 말을 걸기도 애매해졌다.

-밥맛이, 딱, 떨어졌다.

숟가락을 조금 소리나게 내려놓자 밥공기에 코를 박고있던 황태룡 씨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어? 강사님 벌써 다 드신겁니까? 밥이 한참 남은- 건 아닌데 그래도 다 드셔야 하지 않겠어요?"

"아뇨. 배 불러서요. 게다기 시간도 얼마 없고 하니, 실례하지만 먼저 일어서야 겠네요."

"아... 힘 내십쇼. 뭐, 김건호 씨도."

"그, 그럼 저도..."

"아뇨."

주섬주섬 자켓을 챙기려는 김건호씨의 말을 뚝 끊었다. 툭 끊어진 말에 놀란건지 아니면 단호한 말에 놀란 건지 김건호씨가 당황해서 눈을 꿈벅거렸다. 표정 관리. 속으로 되뇌이고서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아까부터 제대로 식사 못 하시는 것 같던데, 다 드시고 오세요. 말했지만, 제대로 안 먹으면 오후수업 못 따라오실 겁니다."

김건호씨의 안색이 조금 파랗게 질렸다. 아니, 그보다는 표정이 복잡해졌다는 게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러겠다고도 할 수 없고 그럴 수 없다고도 할 수 없어서 안절부절 못한다는 게 더 명확한 표현일 것 같다.

"점심 제가 사기로 했으니까 계산하고 가겠습니다. 이따 강의 늦지 않게 들어오세요. 황태룡 대표님, 나중에 또 뵙길 바라겠습니다. 점심 맛있게 드시길 바랍니다."

뒤돌아 계산하고는 식당을 나왔다. 햇볕이 지나가는 사람을 구워버릴 듯이 내리쬐고 있어서 날이 엄청나게 더웠다. 에어컨이 틀어져 있는 식당에서 괜히 나왔나 하고 후회를 조금 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풍운 빌딩 쪽으로 걸어갔다. 괜히 싸운 사람들 사이에 휘말려 있는 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싫은 일이다. 그것도 한 쪽이 다른 쪽에게 일방적으로 삐진 일은.

뭐. 그래도.

나올 때 보니까 황태룡 씨 얼굴이 상황 수습을 못해 당황스러워 보였던게. 금방 풀릴 것 같기는 했지만.

그런데, 정말, 무진장, 덥다. 또 대량으로 사람들이 졸 텐데. 오후 강의가 제대로 이루어질지 문득 걱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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