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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도 글 백업입니다.

 

작위에도 처벌이 가능하다면, 부작위에도 처벌이 가능해야 한다.

나의 형량은 얼마인가.

-

코디가 부산하게 움직이다 화장이 끝났다고 외쳤다. 눈을 뜨자 안경을 쓰고 약간 수척해 보이는 인상의 중년 남자가 거울 속에서 그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는 싱긋 웃었다.

확실히 분장을 많이 해야 하는 감이 있지만 그래도 이 역은 꽤 나쁘지 않다. 아니, 굉장히 좋은 축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재미있고, 연기의 폭도 늘어나고, 인지도도 좋고. 코디에게 수고하셨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장 일이 끝났기에 대기실 안에는 한결 여유가 돌았다. 기실 이제 남은 것은 그에게 달려있지 스탭들이 부산 떨 일은 아니다. 촬영장에 지각 할까봐 덜덜 떨고 있는 로드와 매니저가 있기는 하지만 약속까지는 아직 사십분 남짓이 남았고 여기서 촬영장 까지는 걸어도 오분이 안 걸리다. 괜한 걱정이라는 소리다.

"우리 점심 짜장면 먹어요!"

뒤에서 우렁차게 들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스탭 중 한 명이 배고픔을 느낄만큼 여유를 찾았는지 문득 외쳤다가 합죽이가 되어서 그의 눈치를 보았다. 옆에서 탕수육도! 하고 맞장구를 치던 코디도 입을 다물었다. 그의 촬영은 앞으로 대여섯시간 가량 길어질 예정이었다. 스탭들은 식사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배우는 오늘 간식이라면 모를까 점심을 먹는 건 무리다. 많이 익숙해진 일이니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데 신경 써 주는 점이 그는 고맙고 귀여웠다.

"이해한다. 짜장면은 내가 먹기엔 좀 고급이지."

극 중의 대사를 패러디 했더니 와그르르 웃음이 터졌다. 샌드위치나 좀 남겨달라고 하며 그는 대기실을 나왔다.

복도는 조용하고 한산했다. 서늘한 색으로 빛나고 있는 바닥 타일을 밟을 때마다 따각따각 구두 밑창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복도의 끝에서 끝까지는 얼마만하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시간이 걸린다. 엘레베이터를 탈 것도 없이 바로 같은 층에 스튜디오가 있어서 촬영장까지 가기는 매우 용이하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에는 그닥 적절하지 않다. 그는 문 앞에서 괜히 심호흡을 했다. 누군가의 평화로운 일상과, 조용한 공기를 위해. 이너 피스, 이너 피스. 헛소리를 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뱃속이 술렁이던 것은 조금 진정이 되었다. 후, 작게 한숨을 뱉고 문을 열었다.

안은 촬영장비를 세팅하는 스탭들로 붐비고 있었다. 촬영 시간이 30분도 안 남아서 그런지 감독님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장비 체크를 총괄하시는게 유난히도 바빠 보였다. 이 시간에 한가한 것은 확실히 얼마 없다. 우렁차게 인사를 하자 다들 잠시 돌아보더니 다시 자리로 돌아가 분주하게 일을 계속했다. -한 사람만 빼고.

"조 부장님 출근 일찍하셨네요?"

박팔만 차장- 그러니까 박차장으로 분장한 오정현 씨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헤드락을 걸듯이 어깨동무를 했다. 머리가 팔에 부딪히면서 꽉 조여오며 어깨가 무거워졌다. 분명 정서적인 의미도 약간 가미해서.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위로 올라붙었다.

"오, 박 차장도 왔나?"

"와, 오랜만에 그 이름 들으니까 진짜 새롭다."

"안타깝게도 이쪽도. 건호 씨가 더 입에 붙어."

"참아주세요 부장님. 건호 씨보다는 박 차장이 더 활발합니다."

극 중 이름으로 부르는 게 확실히 역에 몰입하는 게 더 도움이 된다. 오정현 씨 같은 경우에는 본 성격과 역할간의 차이가 커서 쉬는 시간까지 그러기는 쉽지 않은 모양이지만, 연기할 때는 확실하니 그냥 개인차이려니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목들 촬영 때는 상당히 재미가 있었다. 쉬는시간에 황태룡 캐릭터 때문에 오정현 씨 비슷한 캐릭터가 두 명이 되니 사고는 덜 하는데, 굉장히 왁자지껄하고 시끄러웠었지. 캐릭터 잡는데도 오정현씨가 상당히 도움을 주기도 했었다. 특기 캐릭터에서 도움을 받아 버려 그는 조금 기쁘면서도 조금 입맛이 썼지만. 도움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일방적으로 베낀 것이니 할 말은 없다.

"오늘따라 다크서클이 진한것 같다?"

"불면증이 더 심해졌다는 컨셉이니까요 뭐..."

"그러다 분장 안 지워지는 거 아냐? 좀 심한거 같은데."

"저 지금 저주 받은 거 맞죠?"

가볍게 농담따먹기를 하고 있자니 오정현 씨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그는 역으로 반말이 점점 자연스러워진다. 이 쯤 가면 설정대로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지각대장인 기수 씨가 올 때 즈음 해서는 자연스럽게 커피도 타오라고 시킬 듯 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스튜디오 쪽으로 가고있는데 웅 씨가 문득 화제를 돌렸다.

"부장님 근데 촬영 끝나고 뭐하세요?"

"딱히 스케줄은 없는데."

"잘 됐다. 오늘 오프닝 기념 회식한대요 회식. 아주 끝내주는 맛집을 찾았다고 부감독님이 태룡이를 불러내라고 아주-"

"와아-! 박 차장님이 페로몬 흘린다! 조 부장님 꼬신다! 내 남친 바람핀다!"

갑자기 낭랑하게 울려퍼지는 이 대리의 목소리에 뇌가 사고하기를 멈췄는지 잠시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주변에서 키득키득 웃으면서 박 차장님 너무하시다- 이 대리님 불쌍해- 같은 소리를 다 들리게 하는 걸로 봐서는 단순히 장난인 것 같기는 하다만,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반응해야 더 조부장 다울지-

"아냐 이 대리! 바람 같은 거 안 피워!"

생각을 하다가 결론은 쉽게 내릴 수 있었다. 그냥 놀리자.

"이 대리, 사람 조심해서 사귀어. 저거 아주 나쁜 남자야. 다리가 그냥 여기 한 다리 저기 한 다리 조기 한 다리..."

"아닙니다 부장님!"

"이 오징어 같은 연체동물 남자! 다 잊어 버려라! 이레이져 춉!"

"이 대리! 이 대리 그건 빅뱅 핑거! 스킬이 잘못됐다고!"

CG 같은 건 물론 없지만 충분히 신나는 방법이었다. 싸우는 척 하고 말리는 척하고 같이 웃고 떠들고. 다만 일시적이라고 할 지라도 즐겁고 신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엘가가 보낸 초대장을 조용히 찢기로 했다. 작위에도 죄를 부여한다면 부작위에도 분명히 죄가 부여된다. 과연 나의 죄는 얼마만한 크기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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