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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도 글 백업입니다.
"건호 씨, 우리 헤어지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이었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데이트였다. 늦지 않게 나와서, 영화 보고, 얘기를 하기도 하고, 별 말 없이 있다가 서로 배가 고파져서 식사를 했다. 점심은 주로 따로 먹고 만났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덜 바쁜 쪽이 더 바쁜 쪽을 바래다 주었다. 가끔 외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니까, 오늘은 저녁식사 후 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저 한마디 때문에.
김건호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멍한 얼굴로 상대방을 쳐다 보았다. 그는 여전히 가볍게 웃고 있었고, 손에 든 물잔으로 가볍게 입술을 축이기도 하고-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은 듯 했다. 그러니까, 뭔가, 자신이 잘못 들은건가? 조금 떨리는 입으로 김건호는 말을 토해냈다.
"....네?"
"음, 그러니까.... 헤어지죠. 다시 친구로."
돌아가자고요. 유노 와람쌩? 한물 간 개그를 가볍게 웃으면서 치는 상대방에게 김건호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입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물잔을 집어서 입가에 가져다 댔다. 입가를 타고 흐르는 물이 목 뒤로 넘어가는 물보다 월등히 많게 느껴졌다. 한 잔을 다 비웠는데 계속 목이 타서 물병을 집으려 손을 뻗었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에서 바닥으로 물병이 미끄러져 내렸다. 다시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테이블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김건호는 어떤 말을 해야할지, 뭘 생각해야할지 완벽히 생각을 상실해 버렸다. 헤어지죠. 그 한마디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서로 완전히 열어보였다고. 완전히 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가.
"....죄송합니다..."
"아뇨, 뭐, 건호씨가 사과할 건 아니고."
하하, 하고 웃으면서 연인은 커피를 젓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아까부터 손을 데우는 용도로도 사용되지 않고 있는 종이컵 안은 여전히 가득 채워진 상태였다. 거품마저 다 꺼진 커피를 내려다 보며 김건호는 비워진 머릿속에서 뭐라도 끄집어 내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이, 뭔가, 잘못을 했는가? 당장 얼마 전에, 가족을 소개 받고, 집에 초대 받고, 완전히 인정 받은 연인이라고 천국까지 올라갔던 것 같은데- 자신은 그 때 무엇인가 잘못을 했던 건가? 친구로 소개받아서 조금 씁쓸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뭔가 티를 냈던가? 그게 잘못이었던 걸까? 나는- 나는 대체 뭘 잘못한 거지?
"....죄송합니다."
"아뇨 사과하실 건 없-"
"죄송합니다 태룡 씨, 저는- 저는 태룡 씨랑, 태룡 씨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이기적이라고 말해도 좋다. 도무지, 어떻게 해도, 놓고 싶지 않은 인연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분명히 이 관계가 끝나고 나면-, 아니,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헤어지고 싶지 않다. 그것 하나만이 유일하게 분명했다. 김건호는 열리지 않는 문고리를 잡고 빌었다.
"저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태룡 씨가 맘에 안 드시는 게 있다면 고칠테니까, 그러니까."
헤어지지 말아주세요. 목구멍에 뭔가가 치받혀서 말을 맺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전해지지 않았을까. 김건호는 막연히 추측했다. 뭔가 더 말을 할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지금은 생각나지 않았다.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물컵은 텅 비어있었다. 말갛게 비치는 플라스틱 잔의 바닥에는 뭔가 도드라지게 올라올 것만 같았다. 컵은 여기에 있다 없어지기라도 할 양 식탁위에서 말갛게 흐려지고 있었다. 아니, 식탁조차도-
"건호 씨."
고개를 들자 뭔가 후둑, 하고 떨어졌지만 신경쓸만한 것은 아니었다. 연인은 양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이마를 손에 기대고 있었다.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그 모습은, 굉장히 지치다 못해 나가떨어진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 황태룡이.
"-아뇨, 아닙니다. 건호 씨가 잘못한 건- 없어요."
"...태룡 씨."
"그런 게 아닌데, 이걸 뭐라고, 해야할지."
문득 연인은 입을 다물었다. 김건호는 그저 아연해졌다. 왜, 그럼 무엇이 문제길래.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자신에게 질린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헤어지기 싫다는 생각이 지나치게 강력해서 더 이상 무언가를 생각할 수 없었다. 입을 열기도 벅찼다. 그렇게 한동안 식당 방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다시 물잔을 쥐었지만 물잔은 여전히 비어있었다.
"-태순이가."
문득 연인이 한마디를 던졌다. 한참동안의 침묵 뒤에 나온 말 치고는 전혀 연관성 없는 이야기였지만, 여하간 그랬다. 다시금 입을 다물었지만, 그래도 연인은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태순이가... 건호 씨가, 좋대요."
"....예?"
"많이 좋다고- 사귀고 싶다고, 그러니까."
하, 하하. 연인의 입에서 헛웃음이 몇 번 터져나왔다. 연인은 여전히 테이블에 팔꿈치를 걸치고 손으로 이마를 누르고 있었다. 무슨 얼굴을 하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제가- 드라마 되게 싫어하면서, 이런 장면 보면 꼭 욕하고 그랬는데- 와, 진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그러니까. 태순이가. 태순이가..."
하아, 하고 잠시 말이 끊겼다. 건호는 아연하게 연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연인은 마른세수를 하는 듯 하다가 손등으로 눈을 덮었다. 팔과 테이블에 기댈 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저는, 그러니까."
"...태룡 씨."
"괜찮아요 건호 씨. 저는, 저는 괜찮아요. 정말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연인은 계속 더듬듯이 고장난 레코더마냥 자신은 괜찮다는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건호는 마치 미끄러져 넘어진 것마냥 모든 기운을 상실했다. 기분이라는 말이 다 떨어져 나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단순히 잠겨버렸다고 생각한 문은, 문고리가 아예 고장나 있었다.
그게 너무나 허탈하고 슬프고 씁쓸한 일이라, 김건호는 멍하니 연인을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연인은 손에 자신의 얼굴을 기대고, 계속 그러고 있었다. 손목이 아프지도 않은건지, 아니면 거기 신경쓸 기력이 없는 건지. 시계 초침소리가 몇번이나 들려도 방은 침묵에 눅진히 젖어 있었다. 멍하니 그 침묵을 흘려듣다가, 김건호는 불쑥, 말을 뱉었다. 지금 생각나는 유일한 말이었다.
"...좋아합니다."
설령 문은 완전히 고장나 버렸지만.
"-저는,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할 말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저는 태룡씨를 좋아합니다."
무슨 생각이 있어서 말하는 건 아니지만.
"좋아합니다."
그냥, 자신이 할 수 있는 단 한 마디였다. ....그뿐이었다. 초침 소리가 다시 몇 번이고 들렸다. 툭, 하고 떨어져있던 물병 주둥이에서 물이 한방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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