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도 글 백업입니다. https://youtu.be/Lq2-HHP04jM 3월 오후의 바람은 텁텁했다. 아침의 차가움도 산뜻함도 없이 있는 대로 데워진 바람 사이로 꽃가루가 군데군데 날아다니고 있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런 날은 창문이 콱 틀어 닫힌 실내에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러나 12년의 정규 교육과정을 끝냈다는 기쁨에 떨고 있는 남자아이들한테는 별로 의미가 없는 이야기였다. 바람이 더럽건, 비가 왔건, 맑았던지 간에 오늘은 기쁜 날이고 또한 슬픈 날이었을 것이다. 다만 지나가는 과정일 뿐인데도. 미도스지는 지긍지긍 발걸음을 옮겼다. 강당을 지나 운동장을 가로질러 자전거 주차장까지 아주 천천히 이동했다. 그 경로의 사이사이에 사진을 찍거나, 누군가를 붙잡고 울거나, 단추를 떼어내려고 고생..
2014년도 글 백업입니다. 안녕하세요? 마네키네코입니다. 어, 뭔가 당황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진짜 마네키네코입니다. 예명 같은 게 아니라 진짜에요. 진짜 마네키네코요. 오른발을 머리위로 치켜들고 목에는 예쁜 금색 방울도 하나 걸고 있답니다. 주인님이 말씀하시길 키는 한 뼘 정도라고 하셨어요. 저희 주인님은 키가 크신 남자분이니까 한 20센티미터 정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네키네코 답게 제 자리는 현관 근처입니다. 사실 주인님의 집은 원룸이라서 현관의 의미가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요. 원룸이라고는 해도 좋은 집입니다. 제 옆자리는 주인님의 침대에요. 싱글 침대 발치에 장식장, 아니 작은 서랍장을 두고 그 위에 핸드폰과 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답니다. 가끔, 오늘 같은 날에는 두꺼운 책 한 권이 핸..
2014년도 글 백업 https://youtu.be/_NbjKXEbde4 "나 게이야." 갤리는 메뉴판에 파묻었던 고개를 슬쩍 들었다. 학교 앞 시끄러운 펍의 후미진 한 구석의 2인석, 자신의 맞은 편에 앉아있는 친구의 얼굴은 굉장히 진지해 보였다. 항상 생글생글 잘도 웃고 있는 얼굴이-그 얼굴로 죄다 감정표현이 되는 놈이긴 했지만-딱딱하게 굳어서 쭈뼛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다면 매우 놀라운 일이지만, 이쪽의 눈치를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갤리는 메뉴판을 탁 덮고 입을 열었다. "감자 튀김에 500 두 개 시킨다." "기본 안주도 추가하면 안 되냐?" "돈 없어. 반띵해도 돈 안 돼." 나 월급날 내일이야. 갤리는 덤덤하게 그렇게 말하고 점원을 불러서 주문했다. 저쪽에 서있던 여직원이 쏜살같이 튀어..
질풍 기획은, 좋은 말로 순화했을 때 참 독특하고도 참신한 광고로도 유명했지만 업계에서는 가끔 이상한 소문이 떠도는 회사로도 말이 많았다. 야근을 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더라, 하는 그런 소문. 야근을 밥먹듯이 하는 광고 기획사로서는 당황스러운 소문이기도 했고, 따라서 그만큼 어처구니가 없는 소문이기도 했다. 가끔 한 번씩 입에 올려졌다가 낄낄거리는 웃음과 함께 뇌리에서 지워지는 그런 이야기였다. -즉, 이 소문이 진실이라는 것은 내부 사람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깊은 밤, 쿵 하는 소리가 나서 기획 3팀의 정신이 순간 퍼뜩 들었다. 며칠 째 계속된 철야 작업으로 다들 뇌리가 몽롱해져 있어서 재빠른 반응이 불가능했다. 가장 먼저 박차장에게 달려간 것은 이대리였다. "..
방 안은 영 어두침침했다. 겨울이 깊어가는 시점에서야 퇴근을 하고 집에 온 시간 즈음이면 아무리 이르더라도 해가 이미 다 지고 남는 건 가로등 불 정도 밖에 없다. 그나마 층이 낮은 원룸이라 바깥의 불이 조금씩 새어들고는 있지만 그래도 방 안은 영 어두침침했다. 한유진은 구두를 벗었다. 현관은 좁았지만 신발 두어켤레 못 놓아서 신발장을 반드시 사용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움직임에 따라 장갑 낀 손에 든 종이봉투가 바스락거렸다. 한유진은 어둠이 앉은 방으로 발을 디디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건호씨 자요?" 한참 있다가 아니요, 하고 먹먹하게 대답이 들렸다. 방에 있었구나. 굳이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벽의 익숙한 위치를 손으로 더듬자 딸각, 하는 소리와 함께 방에 불이 들어왔다. 항상 보던 익숙한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