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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은 영 어두침침했다. 겨울이 깊어가는 시점에서야 퇴근을 하고 집에 온 시간 즈음이면 아무리 이르더라도 해가 이미 다 지고 남는 건 가로등 불 정도 밖에 없다. 그나마 층이 낮은 원룸이라 바깥의 불이 조금씩 새어들고는 있지만 그래도 방 안은 영 어두침침했다. 한유진은 구두를 벗었다. 현관은 좁았지만 신발 두어켤레 못 놓아서 신발장을 반드시 사용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움직임에 따라 장갑 낀 손에 든 종이봉투가 바스락거렸다. 한유진은 어둠이 앉은 방으로 발을 디디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건호씨 자요?"
한참 있다가 아니요, 하고 먹먹하게 대답이 들렸다. 방에 있었구나. 굳이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벽의 익숙한 위치를 손으로 더듬자 딸각, 하는 소리와 함께 방에 불이 들어왔다. 항상 보던 익숙한 방 안에 눈에 들어왔다. 한 쪽에 책상, 화장실 문, 다른 한 쪽에는 침대.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인물 한 명. 김건호는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한 쪽 무릎은 세우고 한쪽 다리는 어정쩡하게 양반다리를 하고 있었다. 세운 무릎 위에 불편하게 팔짱을 끼고 고개를 묻어 숨을 쉬기도 버거워 보였다. 한유진은 김건호 앞으로 다가가 바닥에 봉투를 내려놓고 무릎을 굽혔다. 무릎에 닿는 바닥이 유난히도 딱딱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요?"
"...유진 씨."
김건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참 굽은 등과 살이 내린 몸, 생기를 잃은 눈 때문인지 김건호는 오늘따라 유난히도 왜소해 보였다. 눈을 맞추자 김건호가 설핏 고개를 숙였다.
"왜 이러고 있어요, 불쌍해 보이게."
"...모르겠어요..."
많이, 많이 힘들어요. 김건호가 울듯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말을 더듬는 볼이 패여있어서 한유진은 김건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김건호가 흠칫 몸을 떨었다.
"왜인지... 왜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왜 이러는... 이상해요..."
"이해해요. 괜찮아요."
한유진은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김건호의 얼굴이 더욱 울 것 같아졌다. 그래서 한유진은 더 예쁘게 웃었다. 그 미소가 어떻게 보일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태룡씨랑 헤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운명이 아니라고는 해도, 역시 조금은 슬픈 거죠?"
김건호의 얼굴이 굳었다. 울상이고 근육마저 내린 것처럼 패인 얼굴이 그 상태로 움직이는 걸 잊은 것처럼 멈춰서 파리하게 핏기가 질려갔다. 경련하듯이 움찔움찔 떨면서 김건호는 엉덩이 걸음으로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등 뒤의 침대에 쿵, 하고 등을 부딪히고는 김건호는 고개를 숙였다. 숨을 거칠게 헐떡이다 김건호는 간신히 입 밖으로 미안해요, 라고 한 마디를 내었다. 한유지는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건호 씨, 이거 봐요."
한유진은 손 끝을 당겨 하얀 장갑을 벗었다. 얄팍한 천 한장을 두고 가려져 있던 손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햇빛을 못 봐서 그런지 새하얀 손등 위에 지독히도 장식적인 글씨체로 세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김건호.
몇 번을 보았지만 김건호는 도통 그 손등에 익숙해 질 수가 없었다. 저게 정말 내 이름일까. 김건호는 몇 번이고 그렇게 의심해 보았다.
"우린 운명이잖아요, 안 그래요?"
태룡 씨랑은 다르게요. 한유진이 이야기 했다. 김건호는 왜인지, 귀를 막고 싶다고 생각했다. 백 사람 중에 두세사람 정도는 누군가의 이름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보통은, 연인의 이름이었다. 월하노인의 연분맺기가 눈에 보이게 나온 것이기라도 한 양 운명은 언제부터인지 이름으로 몸에 새겨졌다. 꼭 이름이 새겨져야만 운명인 것은 아니었다. 백명 중 아흔 일고여덟명이 운명이 없다는 뜻은 아니듯이. 그래서 김건호는 황태룡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황태룡도 그러지 않았을까 김건호는 추측했다. 이제 와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이야기였지만.
어느날엔가 한유진이 자신의 손등을 내밀었을 때를 김건호는 또렷이 기억했다. 내가 운명이에요 건호 씨, 태룡 씨가 아니라요. 그 때에도 한유진은 웃고 있었다. 운명을 버리고 갈 셈이에요? 태룡 씨와 정말로 행복해 질 수 있으리라고 믿어요? 황태룡은, 그 때 뭐라고 했었던가. 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괜찮아요 건호씨."
한유진이 말해서 문득 김건호는 현실로 끌어올려졌다. 한유진은 그 때와 똑같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황태룡씨랑 있었던 가짜 행복보다, 저랑 있으면 더 행복해 질거에요. 그러니까 저는 괜찮아요 건호씨."
아플 때 많이 아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한유진이 눈꼬리를 휘었다. 그리고 다시 하얀 장갑 안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하얀 손등이 푸르게 보일 정도로 하얀 장갑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멍하니 지켜보다가 김건호는 고개를 다시 팔짱안으로 밀어넣었다. 가슴에 응어리가 맺혀있는 것처럼 묵직하게 아팠다.
"참, 건호 씨. 단거 좋아한다면서요?"
"...네?"
한유진은 옆에 내려두었던 종이봉투에서 뭔가를 꺼냈다. 애플파이, 마카롱, 에그타르트, 쇼트케이크. 가지각색의 디저트류가 바닥에 놓여졌다.
"여직원들한테 인기있는 제과점이, 회사 근처에 있어서요."
단 음식을 먹으면 기분도 좋아진다면서요? 한유진이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사양말고 많이 들어요 건호 씨. 커다란 종이봉투 하나 가득 들어있던 것이 죄다 디저트류였던 건지 종류도 많았다. 그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김건호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 해요. 입맛이 껄끄러워서."
내일, 내일 먹을게요. 죄송해요 유진씨... 말끝을 흐리며 다시 김건호는 얼굴을 팔 안에 묻었다. 모래를 씹은 것 같은 입속이 유난히 썼다. 몸이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가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목구멍으로 뭔가가 넘어가지 않았다. 왜일까. 몇 번이나 자문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목덜미가 턱, 하고 쥐여졌다. 가녀린 듯 했지만 손짓과 놀림은 유난히 억셌다. 억지로 고개가 끌어올려져서 셔츠에 목이 졸려 숨이 막혔다. 컥컥거리는 소리가 입에서 새어나와 숨을 쉬려고 절로 입이 벌어졌다. 장갑을 낀 손이 벌려진 입에 우악스레 무언가를 쑤셔 넣었다. 목젖에 끝이 닿아서 위에서부터 욕지기가 치밀어올랐다. 사레가 들린 것 처럼 깊은 기침이 떠나질 않았다. 간신히 뒷덜미에서 손이 떨어져 쿨룩쿨룩 기침을 하는데 머리 위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맛있죠 건호씨? 그 제과점에서 가장 유명한 에그타르트래요."
김건호는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한유진이 웃고 있었다. 장갑 낀 손으로는 핀셋으로 유리조각을 집듯 조심스레 마카롱을 집어들고 있었다.
"다 드세요 건호 씨. 전부 건호 씨를 위해서 사 온거에요."
저 단거 별로 안 좋아해요, 그렇게 말하며 채 숨을 고르지 못한 김건호의 입속에 한유진은 다시 한 번 마카롱을 우겨넣었다. 맛있게 드세요. 산소가 부족한 김건호의 머릿속에 한유진의 목소리가 웅웅 맴돌았다.
-
가게 주인은 뻐끔, 담배를 피웠다. 뒷골목에 자리한 가게는 조그마했고, 금연건물도 아니었다. 특별히 담배를 싫어하는 손님이 오는 것도 아니라 담배를 피우는데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 이전에 지금은 손님이 없기도 했지만.
그의 가게가 특별히 불법적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 이전에 불법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는 합법적으로 장사를 했고, 경찰이 찾아온다고 해도 떳떳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문제는 주변인들의 보는 눈이 왜인지 안 좋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 탓에 고객들이 꼭 야음을 틈타 들른다는 게 조금 짜증날 뿐이었다. 그래도 가게는 이른 오후에는 꼭 문을 열었다. 열고 있으면 손님들이 꼭 한 명씩은 들르곤 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처럼.
딸랑딸랑. 문에 달아놓은 작은 종이 내는 높은 소리가 들려서 가게 주인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인상이 좋은 사내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요구가 독특했던 손님이라 기억에 남아있는 사람이었다.
"또 왔수?"
"하하, 그러게요."
"왜 또, 무슨 일로."
"색을 좀 넣을까, 하고."
알아보니까 색이 좀 변하기도 한다고 하더라고요. 남자가 빙긋 웃었다. 가게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를 가리켰다. 남자는 선선히 자리에 앉았다.
이름이 새겨지기 시작한 후에 문신이 알게 모르게 유행하고 있었다. 연인 둘이 와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다는 의미로 보이지 않는 곳에 조용히 새기고 돌아가고는 했었다. 굳이 운명이 아니라는 걸 티내고 싶지 않아했기 때문에 헤나로 가벼운 문신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아주 가끔, 정교하게 이름을 새겨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는 했다. 그런 사람들도 둘이 올 때나 보이는 곳에 새기지, 혼자 오는 사람들은 보통은 잘 보이지 않은 곳에 새기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달랐다. 아주 잘 보이는 곳에, 아주 정교한 문신을 요구했다. 괜찮겠냐고 몇 번을 물었지만 남자는 계속 요구했다. 잘 보이는 곳에, 완벽하게 신이 새긴 것 같은 문양을 원한다고. 아플거라고 말해도 남자는 막무가내였다. 누구든 사람이 쉽게 행복해지면 안 되는 거잖아요? 결국 가게 주인은 그대로 해 주었다.
"많이 좋아하나봐 이 사람."
"그래 보여요?"
"그야 뭐어. 애인이유? 행복하겠네."
남자가 빙긋 웃었다. 손끝을 당겨 장갑을 벗으며 남자는 눈꼬리를 곱게 접어 웃었다.
"저는, 아주 즐겁죠."
그 새하얀 손등에는 장식적인 글씨체로 세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김건호,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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