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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 기획은, 좋은 말로 순화했을 때 참 독특하고도 참신한 광고로도 유명했지만 업계에서는 가끔 이상한 소문이 떠도는 회사로도 말이 많았다. 야근을 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더라, 하는 그런 소문. 야근을 밥먹듯이 하는 광고 기획사로서는 당황스러운 소문이기도 했고, 따라서 그만큼 어처구니가 없는 소문이기도 했다. 가끔 한 번씩 입에 올려졌다가 낄낄거리는 웃음과 함께 뇌리에서 지워지는 그런 이야기였다. -즉, 이 소문이 진실이라는 것은 내부 사람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깊은 밤, 쿵 하는 소리가 나서 기획 3팀의 정신이 순간 퍼뜩 들었다. 며칠 째 계속된 철야 작업으로 다들 뇌리가 몽롱해져 있어서 재빠른 반응이 불가능했다. 가장 먼저 박차장에게 달려간 것은 이대리였다.

"차장님? 차장님?"

"-으."

의자채 뒤로 넘어가 버린 박차장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뭐라고 웅얼거리고 있었다. 박차장 괜찮아? 차장님? 조부장과 송대리가 번갈아 가며 이름을 불렀다. 뒤에서 막내 둘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끄으, 고통스러운 것 같은 소리가 박차장의 목 뒤에서 넘어왔다. 그리고 박차장이 말했다.

"엘프는 음메 하고 울지 안..."

그리고 픽, 고개가 돌아갔다. 잠꼬대였다. 하, 하고 송대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부장도 한숨을 내쉬며 뒷목을 주물렀다. 화난 이대리가 중지로 박차장 이마에 딱밤을 먹이려고 하는 것을 영희가 필사적으로 말렸다.

"하긴 불면증에 야근을 사흘이나 했으니 저럴 만 하지."

조부장이 고개를 저었다. 송대리는 아무 말 없이 에너지 드링크를 하나 더 따서 조부장에게 건넸다. 캔에 새겨져 있는 빨간 황소가 꺼림직할 지경이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유일하게 힘이 넘치는 것 같은 김병철이 문 앞에서 말했다. 혼자서 화장실을 몇 번이나 가는 거야! 송대리의 사자후가 뒤에서 배웅해 주었다.

-

딱. 조부장이 엔터키를 눌렀다. 수고하셨습니다. 숫제 웅얼거리는 소리가 사무실에 닝닝하게 울렸다. 간신히 한 단락 마무리 된 일을 몇 중으로 저장하고 나서 조부장은 주섬주섬 외투를 챙겼다. 회사의 전기장판 깔린 소파 안녕. 오늘은 보일러가 들어오는 침실에서 잘거야. 몽롱한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하며 조부장은 김병철을 불렀다. 병철아- 피티 유에스비 가져가. 대답이 없었다.

"병철아?"

어 그러고 보니. 하며 이대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파 위의 박차장, 송대리, 영희, 팀장님은 이미 퇴근하셨고. 병철이가 없었다. 의자 등받이에 걸어놓았던 코트를 입는 중이던 송대리가 얼굴을 찡그렸다.

"설마 그 녀석 아까 화장실 간다고 하고 아직도 안 돌아온 건..."

"하하, 설마요. 이게 무슨 괴담도 아니고."

괴담. 영희의 말에 조부장의 머릿 속에 설핏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겠지. 설마. 조부장은 송대리를 바라보았다. 한껏 찝찝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문으로 튕기듯 달려갔다. 화장실까지 스물 두 발자국, 유일하게 잠겨있는 칸까지 일곱 발자국. 그리고.

"아부?"

떨어져 있는 정장 바지와 팬티, 그리고 셔츠를 걸친 꼬마애가 한 명 있었다.

-

"며짤이에여?"

"다서짤!"

"이름이 모에여?"

"김뵹촐이여!"

이런 비요오옹... 조부장은 이마를 손바닥에 기댔다. 어린애 나이에 맞춰서 대화를 나눠준 이대리는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었고 송대리는 이미 혼이 날아간 것 같았다. 어, 저기, 저. 영희가 혼돈에 빠진 얼굴로 물었다.

"이거, 그, 정말로, 그게 농담이 아니고."

"어. 우리 회사 괴담의 실체가 이거다."

가끔 일어나, 가끔. 송대리가 손을 저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처음 보는 일이었다. 예전에 송대리가 평사원 시절 혼자 야근을 하고있을 때 제작팀에서 한 번, 조부장이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기획 1팀에서 한 번. 그리고 나서는 또 처음이었다. 박차장도 아마 소문만 들어봤을지도 모르겠는데. 조부장은 그렇게 추정했다. 어려진 김병철은 사무실을 꺄악꺄악 잘도 돌아다니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니, 저게 병철이 일리가. 아들 아닐까요 아들?"

"병철이 맞아. 내일이면 돌아올거야."

이대리가 현실을 부정하려고 들어서 조부장은 냉정하게 진실을 깨우쳐주었다. 씁쓸한 말이지만 진짜다. 그리고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괴담이 괴담으로 남는 이유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다음날이면 모조리 원상복귀 되어서 오로지 사람들의 기억 한 켠에만 충격적으로 남아 있을 뿐 무슨 일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 지금 상황에서 문제가 될 건-

"근데 저 놈 누가 돌봐주냐?"

그 긴긴 밤을 보낼 사람이 누구냐는 거였다. 기획 3팀은 침통한 침묵에 젖어들었다. 현재 시각 새벽 한 시. 에너지 드링크의 힘을 빌어 겨우겨우 깨 있기는 하지만 말 그대로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다들 다크서클이 볼을 점거하고 있을 정도로 피곤한 상태였고, 그에 비해 저 꼬맹이는 생생하기도 했다. 꺄악거리고 뛰어다니는 것이 태엽이 무한정인 인형마냥 빠르기도 했다. 조부장은 하나 하나 사람을 꼽기 시작했다. 일단 영희는 논외로 치자. 저 둘만 사무실에 남겼다가는 물리적으로 회사가 위험하다. 조부장은 이대리를 보았다.

"이대,"

"안 돼요."

"왜. 이대리 아까 보니까 애 잘 다루던데."

"저 오늘도 안 들어가면 엄마한테 죽어요."

차장님도 댁에 모셔다 드려야 하고. 왠지 후자가 더 비중이 커 보였지만 조부장은 침묵하기로 했다. 기실, 이대리는 물론 이대리의 어머님이 더 무서웠다. 조부장은 송대리를 보았다.

"부장님."

그리고 송대리가 선수를 쳤다.

"어제 제가 제작팀에 사정해서 따온 카피 기억 나시죠."

"...어엉."

"그거 왕부장님께 보스몹 레이드 버스 태워드리기로 하고 따 온 겁니다."

당장 오늘부터에요. 문자가 지금 서른 통 와 있습니다. 송대리는 얌전히 핸드폰을 제출했다. 미확인 문자만 열통이 넘게 와 있어서 조부장은 침묵했다. 전부 왕부장으로부터였다. 시선의 흐름이 중앙으로 쏠렸다.

잠시 후 질풍 기획 빌딩 창문 밖으로 서글픈 사자후가 들렸다.

"최고참 남기고서 니들이 잘 되나 보자아아아아아아아아아!"

-

조부장은 눈동자가 똘망똘망한 아이를 노려보았다. 아이는 뭔지도 모르고 조부장을 올려다 보았다. 한참동안 그렇게 눈빛을 교환했지만 결국은 며칠 밤을 샌 사람의 패배였다. 조부장이 으윽, 하고 눈을 감자 김병철이 이겼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냐, 이거 눈 싸움 아냐. 눈이 따끔따끔 아파서 그렇게 말할만한 기운도 없었다. 어쩌면 눈싸움이었을지도 모른다.

화장실에 떨어져 있던 바지와 팬티, 양말, 구두를 소파 한 켠에 잘 개어놓고 전기장판을 켜 두었다. 잘 준비는 완벽했다. 다만 애가 되어버린 김병철이 잘 생각이 없어서 문제지. 자야 한다니까! 아무리 말해도 아이는 시져! 하고 외치기만 해 댔다. 저 책상 밑에서 이 책상 밑으로 기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헐렁헐렁한 셔츠자락을 밟지도 않고 아이는 잘도 뛰어다녔다. 간신히 자기 앞에 앉혀 놓고 눈싸움을 하듯 씨름을 해 댔는데 심지어 졌다. 아까부터의 패배감이 물밀듯 밀려와서 조부장은 자리에 모로 누웠다. 소파 등받이를 바로 눈 앞에 두고 안경을 벗고 있자니 씁쓸해졌다. 오늘에야 말로 침실에서 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찌 자?"

등 뒤에서 혀 짧은 소리가 들려왔다. 조 부장은 무시 했다. 내일도 아홉시 부터 일하려면 지금에라도 자 둬야 했다. 물밀듯이 밀려오기 시작한 수마는 금방 박차를 가하고- 조부장은 억, 하고 비명을 질렀다. 옆구리가 밟혔다. 아니, 꼬맹이가 옆구리를 꼬집듯이 쥐고 올라와 앉았다.

"자지 마! 놀쟈!"

아픈 옆구리를 쥐고 끙끙거리는데 그게 재미있는지 김병철이 깔깔 웃었다. 요게, 하고 조부장은 김병철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조부장과 소파 사이에 낑낀 모양새가 된 꼬맹이가 끄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자 샌드위치다! 자라 꼬맹이!"

"끼아아악!"

한참이나 즐거운 비명을 지르다가 꼬맹이 김병철이 헥헥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야 좀 지친건가 싶어서 조부장은 아픈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 이제 진짜 자야지. 크게 하품을 하고 눈을 감으려는데 김병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찌."

"왜애."

"내일이면 나 지베 갈 수 이쪄?"

"어어."

"웅..."

어쩌면 굉장히 애달픈 것 같은 말이었다. 침묵의 한 중간에 들려서 더 그럴 수도 있었다. 사무실의 공기는 소파 표면을 제외하면 쌀쌀했고 썰렁한 회사에서는 컴퓨터 돌아가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묵직한 고요 속에서 꼬맹이가 이불을 잡아당겨서 조부장은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러니까 자라 꼬꼬맹아."

그리고 수마가 덮쳤다.

-

턱, 하고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조부장은 눈을 떴다. 어째 영 잠자리가 불편했다. 아 어제 소파에서 잤었지. 그런것치고도 잠자리가 부련해서 조부장은 마른 눈을 껌벅였다. 등 뒤에서 어... 어어... 하고 말 더듬는 소리가 들렸다. 조부장은 뒤를 돌았다. 떨어진 서류 가방. 긴 코트. 목도리. 남색 뾰족머리. 안경을 쓰지 않은 눈으로도 분간할 수 있었다. 박차장이었다.

"어... 박차장... 이 시간부터 웬일이야..."

"어... 그게... 어... 아니..."

머리맡을 더듬거리는데 안경이 걸리는 게 아니라 웬 북슬북슬한 털이 손에 걸렸다. 조부장은 고개를 돌렸다. 갈색 머리. 셔츠. 아랫도리는 같은 담요. 발치에 검은색. 순간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갔다. 괴담은 아침이면 사라진다. 조부장은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박차장 그게 아니-

"죄송합니다!!!! 너무 일찍와서 죄송합니다 출근 시간 맞춰서 다시오겠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못봤어요 죄송합니다!!!!!!!!!!!!!"

평소에는 목소리 작으면서 이럴때만 기차화통 삶아먹지마. 조부장의 절규는 입속에서만 맴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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