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2014년도 글 백업입니다.

https://youtu.be/Lq2-HHP04jM

 

 

3월 오후의 바람은 텁텁했다아침의 차가움도 산뜻함도 없이 있는 대로 데워진 바람 사이로 꽃가루가 군데군데 날아다니고 있었다보통의 경우라면 이런 날은 창문이 콱 틀어 닫힌 실내에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그러나 12년의 정규 교육과정을 끝냈다는 기쁨에 떨고 있는 남자아이들한테는 별로 의미가 없는 이야기였다바람이 더럽건비가 왔건맑았던지 간에 오늘은 기쁜 날이고 또한 슬픈 날이었을 것이다다만 지나가는 과정일 뿐인데도.

   미도스지는 지긍지긍 발걸음을 옮겼다강당을 지나 운동장을 가로질러 자전거 주차장까지 아주 천천히 이동했다그 경로의 사이사이에 사진을 찍거나누군가를 붙잡고 울거나단추를 떼어내려고 고생하는 사람들이 길을 막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손에 들린 졸업장은 가벼웠다기껏해야 동그란 종이 상자 하나와 종이 한 장의 무게는 무거울 수 없었다그래서 미도스지는 아무에게도 오늘이 졸업식이라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외숙부는 출장을 가있었고 외숙모도 바쁘다굳이 그 사람들을 귀찮게 할 필요는 없었다미도스지의 졸업식은 그렇게 소리 없이 지나갔다초등학교 때에도중학교 때에도졸업식 이후가 약간 시끄럽기는 했지만기회비용을 따지자면 조용한 졸업식이 훨씬 나았다미리 경고를 해 두었으니 졸업식에 자신을 보러 온 후배도 적을 것임이아니 없을 것임이 분명했다.

   앞에서 사진을 찍던 사람들이 죄송하다고 외치고 우르르 자리를 비켰다그들의 옷에는 구식으로 졸업 축하식을 했는지 군데군데 밀가루와 계란이 묻어있었다어느 학교마다 하나씩 있는 조각상의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그들은 와르르 웃었다왜 사진을 찍는 거지미도스지는 그렇게 생각했다조각상은 책을 읽는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한심할 정도로 투박한 조각상이었다꼴값중얼거리고 미도스지는 다시 몸을 틀었다조금만 더 가면 자전거 주차장이 있었다.

   “미도스지!”

   발을 떼려는 순간에 문득 누군가 이름을 불렀다뭔가가 뒤통수를 잡아채는 느낌이 들어 미도스지는 고개를 돌렸다아주 오랜만에 보는 남자가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지나치게 오랜만이라 잠시 얼굴을 잊어버렸다고 느꼈던 그런 사람이었다.

   “안 늦어서다행이다강당이 비었길래 이미 간 줄 알았어.”

   남자가 웃었다웃으며 그렇게 말했다미도스지는 딱하고 이를 부딪혔다남자는 이시가키 코타로였다.

-

    남자는 졸업하자마자 소식이 뜸해졌다어느 정도였나 하면핸드폰으로는 아예 연락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사실 졸업하기 전부터 남자의 얼굴을 보기는 훨씬 어려워져 있었다퇴부서가 수리된 다음에 남자는 연락이 거의 되지 않았다인터하이 이후 퇴부서가 수리되기 전까지 그 사이의 기간 동안 꼬박꼬박 나왔던 것에 비하면 사뭇 대조적이었다드디어 공부를 하나보지 이 꼴값이미도스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남자의 대학이 도쿄 쪽으로 결정 되었다는 것을 들은 것은 고문 선생을 통해서였다거의 일을 하지 않는 고문이기는 하지만 대학 쪽으로는 신경을 쓰고 있었는지 어느 날 그는 미도스지를 불렀다공부 잘한다며이번 대의 주장이 도쿄 쪽으로 꽤 이름난 명문을 갔어너도 힘 내주면 좋겠다너무 자전거만 타지 말고미도스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냥 그 뿐이었다정말로그냥 그뿐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고개를 넘자 봄이 찾아왔다여느 때와 마찬가지였다. 1학년 부원을 새로 모집하고 인터하이를 위해 1학기를 보내는 동안 미도스지의 휴대전화는 울린 적이 없었다그 존재 의의가 시계로 격하되는 무렵 즈음해서야 한 번씩 자기는 휴대전화라고 울고는 했다대부분이 집에서 온 메시지였다그리고 OB의 방문은 항상 그런 시기에 있었다.

   여름이 다 되어 인터하이가 얼마 남지 않은 시기였다물병을 냉동고에 하루 밤 내리 넣었어도 12시가 되기 전에 얼음은 미지근한 물이 되고는 했다열대야라던가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온도는 떨어질 줄을 몰랐다한 바퀴를 돌고 올 때마다 부원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음료수를 간절해 했다남자는 그걸 아는 듯이 사식으로 커다란 봉지 가득히 아이스크림을 들고 학교를 찾아왔다기껏해야 근처 편의점에서 싼 값에 파는 하드들이었지만 그럼에도 환영받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기도 했다.

   덕분에 미도스지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쉴 수밖에 없었다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이 시간은 햇볕이 유난히 따가웠다목 뒤가 화상을 입는 것은 일상 다반사였다햇빛 때문에 아지랑이는 물론이고 눈이 시려서 뜨고 있기도 벅찰 때도 있었다그건 누구라도 마찬가지여서 항상 그 시간 즈음에는 다들 입 속에 뭔가를 담아둔 표정을 짓고 있었다미도스지는 항상 그 사실을 무시했다그래서인지 그 날 남자는 유난히도 환영 받았다부원들은 한참 봉투를 뒤지다 마음에 드는 걸 하나 고르고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이야기를 하다가 즐겁게 입에 아이스크림을 물었다.

  “선배님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먹어라.”

  떼지어 합창하듯 부원들이 말하자 남자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꼴값미도스지는 얼굴을 구기고 중얼거렸다남자가 하하하고 웃었다.

   “미도스지 군은 안 먹을 거야?”

    미도스지 군이마에서 땀이 굴러내렸다미도스지는 수건으로 땀을 훔쳤다그늘에 있는데도 햇볕이 따가워서 짜증이 났다.

   “필요 없어꼴값.”

   “하하그래?”

   그럼 난 가봐야겠다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항상 그랬다정확히 사식만을 전해주고 남자는 항상 자리를 떴다마치 뒤에서 뭐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 마냥 왔다가 얼굴 도장만 찍고 바로 떠나갔다. OB들은 다 그런 건가 싶었지만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그냥남자가 그럴 뿐이었다부모님이 일찍 좀 오라고 잔소리를 하셔서언젠가 남자는 그렇게 웃으며 변명했다아주 쓸데없이인터하이에도 얼굴을 내밀지 않고 다만 그렇게 가끔씩 사식을 전해주고 갔다.

   그 주기는 아주 서서히 뜸해져서, 3학년 여름방학 이후남자는 학교에 얼굴을 내밀지 않게 되었다아주 자연스레핸드폰은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

   “졸업 축하해 미도스지.”

   "꼴값이야 이시가키 군."

   웃고 있는 얼굴에 폭언을 퍼붓자 이시가키가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그래? 하고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게 마치 어제도 얼굴을 본 양 굴고 있어서 미도스지는 얼굴을 찡그렸다. 갈 거야. 발을 옮기자 바로 옆으로 다시 인기척이 따라붙었다. 자신의 키가 월등히 큰데도 이시가키는 유난히도 잘 따라 붙었다.

   "대학, 결정 됐어? 미도스지는 공부 잘 했으니까 별로 걱정은 없지만."

   "이시가키 군이 알아서 어디에 쓸 건데?"

   "...글쎄? 도쿄 쪽이면 이사 도와줄게."

   "꼴-값."

   별 거 아닌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자전거 주차장은 눈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졸업식이라서 그런 걸까, 자전거 주차장은 미도스지의 데 로사를 제외하면 거의 자전거가 없다시피 텅 비어있었다. 자리 지정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항상 대는 자리는 거의 비슷비슷하기 마련이다. 그건 미도스지도 마찬가지였다. 로드 경기부가 대는 자리의 맨 오른쪽 끝자락, 그러니까 왼쪽 끝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온 쪽. 그 즈음이 미도스지가 자전거를 두는 장소였다. 미도스지는 락을 풀기 위해 앞바퀴 근처에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았다. 이시가키도 햇볕을 피하려는 건지 차양이 드리워진 자전거 주차장 안 쪽으로 들어왔다. 자신은 앉아있고 이시가키는 서 있다고는 해도 자전거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 미도스지는 조금 얼굴을 찌푸렸다. 열쇠를 락에 맞춰 넣는데 이시가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미도스지."

   미도스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왜 자꾸 쓸데 없이 말을 거는 거야 이 꼴값이.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에 이시가키와 눈이 마주쳤다. 문득 미도스지는 기시감을 느꼈다. 이시가키는 서서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고 자신은 앉아서 이시가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둡게 날이 가라 앉았지만 자전거 주차장 바로 밖에 가로등이 걸려 있어서 밖은 훤했다. 자전거 프레임 사이로 이시가키가 말을 걸어와서 짜증이 북받히고는 했다. 그래, 1학년 때의 하교길이었다. 에이스와 에이스 어시스트 둘이서 추가 연습을 하고 하교를 하면 나머지는 전부 하교하고 난 후라 자전거 주차장에 자전거는 달랑 두 대가 있었다. 이시가키의 앵커가 왼 쪽, 미도스지의 데 로사가 오른쪽. 이시가키는 열쇠를 사용했고 미도스지는 비밀번호식 키였다. 날의 어두움이 깊을 수록 미도스지가 락을 푸는 시간은 이시가키가 락을 푸는 시간보다 길어졌다. 먼저 락을 풀고난 이시가키가 일어서서 쓸데 없는 한두 마디를 문득문득 던지고는 했다. 1학년 가을까지 근 반년을 매일 겪은 일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전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매몰되어 있던 일상이기도 했다. 왜 그게 지금 떠 오른 걸까. 이시가키의 표정이 문득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찰칵, 하고 열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좋아했다."

   자신이 지금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미도스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화난 표정이나 짜증내는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까. 의외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별로 신경 쓸 게 아닌 듯 했다. 정작 말을 뱉은 당사자가 자신의 표정보다 몇 배는 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충격 받은 것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던 이시가키는 한 손으로 눈가를 조금 주물렀다. 엄지와 중지 사이의 손바닥으로 눈을 가려서 미도스지는 이시가키의 하관 밖에 볼 수 없었다. 천천히 경련하듯 떨리던 입가가 가라앉아가는 것이 보였다.

   "이시,"

   "좋아했어 미도스지."

   아까보다 훨씬 안정된 발음이었고, 안정된 발성이었고, 안정된 목소리였다. 이시가키가 천천히 손을 눈에서 떼었다. 좋아했어. 하고 이시가키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돌이킬 수도 변명할 수도 없을 고백이었다. 쐐기를 박는 말에 미도스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풀린 락을 한 손에 빙빙 돌려 감았다. 쇠로 된 빡빡한 락이 손에서 조금 겉돌았다.

   "그래서?"

  푸풉, 하고 미도스지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사람들이 혐오해 마지 않는, 그런 종류의 비웃음이었다. 꼬올값, 꼴값. 미도스지는 말했다.

   "그래서 나한테 뭘 바라는 건데. 아, 혹시 고백이 성공하기를 바랐어? 안-됐-네- 난 지금 굉장히 기분 나쁜데. 아주 꼴값이야. 자전거를 너무 밟다가 머리가 돌아버린 거 아냐? 응? 이시가키 군. 다른 데에서도 쓸모 없어질 생각이야?"

   증오와 혐오와, 여러가지 감정을 잔뜩 읽어낼 수 있는 말이었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미도스지는 진탕 퍼부었다. 가장 최악의 고백을 선사해줄 생각이었고, 또 그렇게 되리라 미도스지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미도스지의 기분도 바닥을 기고 있었으므로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평탄해야 할 하루가 망가진 데 대하여 미도스지는 분노를 금치 못했으므로.

   그리고 이시가키가 웃었다.

   "아니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분명할 정도로 웃음기가 담겨있는 말이었다. 얼굴은 조금, 쓸쓸하고 안타까워 보였지만 이시가키는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기분 나빠(い). 미도스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을 찡그렸다. 이시가키가 그걸 보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좋아'했'다. 미도스지."

   그냥 그거 뿐이야. 이런 얘기를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이시가키가 그렇게 말을 흐렸다. 미도스지는 딱, 하고 위아랫니를 부딪혔다. 어째서인지, 지금의 이시가키가 미도스지에게는 알 수 없는 것으로 다가왔다. -떨궈내서 없던 것으로 하면 되니까, 별로 상관은 없었지만. 

   "...갈 거야."

   "어, 응. 너무 잡아뒀었나. 친척 분도 있을텐데."

   연락할게, 나중에 봐. 이시가키가 선선히 손을 흔들었다. 자전거 주차장에는 이제 남아있는 자전거가 없었다. 이시가키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생각하다가 페달을 밟았다. 정문까지는 순식간이었다. 바람소리가 귓가를 스치면서 점점 학교가 멀어졌다. 교토 후시미, 졸업. 흔적은 입고 있는 교복과 졸업장 한 통이 전부였다. 그래야만 했다.

   -+-

"이시양 너 언제까지 부활동 할거야?"

   젓가락이 하나 남은 한 입 크기의 고로케를 잡았다. 떨어질 듯 말 듯 달랑거리며 옮겨서 입 속으로 들어갔다. 역시, 감자가 조금 단 감이 있었다. 우물우물 고로케를 씹으며 이시가키는 웅얼거렸다.

   "그러게."

   "새꺄 그러게가 아니지 그러게가. 담임 쌤이 나한테도 뭐라 그런단 말야. 인터하이 다 끝나고 가을 거의 다 갔고 공부에 전념해야 할 시기인데 이하라 너는 안 말리고 뭐하니..."

   너 임마 공부도 잘 하면서. 이하라가 야끼소바 빵의 마지막 한 입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이시가키는 젓가락 끝을 물고 하하 하고 웃었다. 평소라면 츠지가 이하라를 이 쯤에서 말리겠지만 오늘은 츠지가 점심시간 상담 당첨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보호막 한 장 없이, 이하라의 질문에 고스란히 노출된 상태라는 거다. 이시가키는 도시락 뚜껑을 덮으며 말을 골랐다.

   "그냥... 뭐... 이제 슬슬 그만 해야지."

   "너 한 달 전에도 그 말 했거든."

   그랬나. 양심이 조금 찔려왔다. 그만 둬야지 둬야지 말하면서도 로드 부를 그렇게 쉽게 그만 둘 수 없는 이유는 상당히 복합적이었다. 그 중에서 몇몇 가지를 추려내면서 이시가키는 도시락 통을 챙겨넣었다. 굳이 이야기를 해야한다면.

   "아직 메인 어시스트도 안 정해진 것 같고, 해서. 없으면 연습하는데 지장 있잖아."

   "내년에 1학년 들어오고 나서 생각해도 되잖아 그건. 정 뭣하면 미즈타도 있고."

   오늘은 이하라가 아주 작정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 반박하기 쉽고 허술한 대사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사실 이미 미즈타와 교대로 어시스트 연습을 하고 있기도 했다. 이하라가 잠시 궁시렁 대서-"그렇게 따지면 인터하이 끝나자 마자 빠진 나랑 츠지는 뭐가 되냐고."-이시가키는 잠깐 밖을 내다 보았다. 확실히, 날이 쌀쌀해 지기는 했다. 낙엽도 이미 다 내려서 바닥에 쌓인 걸 제외하면 잎새라고는 찾아볼 길이 없었다. 벌써 이렇게 됐나. 시간 빠르네. 이시가키는 흥미 없이 생각했다. 정말 진지하게 퇴부를 고려해 봐야 할 시기 인 것 같았다.

   "여튼 하루 빨리 나와라. 너 지망학교 가려면 좀 열심히 해야 한다며."

   "그러네. 그래야겠다."

   그 쯤 말했을 때 점심 시간 예비종이 쳤다. 다른 반인 츠지와 이하라와 이시가키가 모이는데에는 은근히 시간이 걸려서 밥을 먹고 나면 남는 시간이 의외로 별로 없었다. 이하라의 경우에는 빵을 사오느라 다른 것에 비해 더 늦기도 했다. 자잘한 잡담을 나누며 밥을 먹다 보면 시간은 더 모자랐다. 나 간다. 이하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하고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아 그러고 보니까."

   이하라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너 부활 계속 나가는 거 그 녀석 때문이냐?"

   -그 녀석, 이라는 건 아마도 미도스지를 가리키는 말인 것 같았다. 그런데 미도스지 때문이라니? 앞뒤의 호응이 이상했다. 이시가키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미도스지 때문이라니, 미도스지가 뭐 어때서? 자신이 미도스지를 다른 일학년에 비해 좀 더 신경 쓰는 건 맞지만, 때문이라니 뭔가 좀 심상한 어투였다. 신경쓰느라 남아있다는 건가? 내가 왜? 나는 이하라한테 그렇게 비쳤었나? 조금 충격을 받아서 이시가키는 되물었다.

   "때문, 이라니?"

   "그 놈이 뭐 협박 같은 거 했어? 혹시?"

   농담하는 건가. 안색을 살펴봤지만 이하라의 얼굴은 그저 진지하기만 했다. 이시가키는 어색하게 말했다.

   "...아냐. 네 안의 미도스지의 이미지는 대체 뭐야?"

   "뭐냐니 괴물이지."

   아니면 다행이고. 이하라가 진짜 간다 하고 손을 흔들었다. 얼른 가. 이시가키도 손을 내쫓듯이 흔들었다. 점심시간이 막 끝나서 그런지 유난히도 피곤했다. 이시가키는 책상 위에 엎드렸다.

-

   하교 시간은 부활동이 끝나는 시간이었다. 해가 아직 완전히 지지는 않지만 산자락에 걸려있었다. 그래도 이미 많이 어두워진 상태여서 그런지 교내의 가로등은 벌써 켜져 있었다. 이시가키는 주머니를 뒤져서 자전거 락의 열쇠를 꺼냈다. 철컥, 하고 락이 열리는 감각이 손에 느껴졌다.

   "미도스지, 멀었어?"

   "무슨 상관인데 꼴값이."

   좀 걸리는구나. 이시가키는 느긋하게 드롭바를 잡고 자전거에 기댔다. 미도스지의 자전거 락은 번호키라 그런지 밤에 풀 때는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었다. 오늘 연습은 평탄했다. 사실 아주 좋았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미도스지도 평소에 비해 화를 덜 냈고, 기록도 전체적으로 조금씩 올랐다. 뭐, 어떻게 잘 되겠지. 이시가키는 생각했다. 그래서 이시가키는 입을 뗐다.

   "미도스지."

   "군 붙이랬지."

   "나 슬슬 퇴부할 생각인데."

   "흐응."

   딱히 아쉬움 같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대꾸가 돌아왔다. 그야 그랬다. 주장도 얼마 전에 노부에게 승계해 놓은 상태였고 3학년이 2학기가 넘어서까지 꼬박꼬박 출근도장을 찍은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미도스지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철컥, 하고 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시가키는 고개를 들었다. 미도스지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얼굴을 보려면 조금 위를 올려다봐야 했다.

   "정확히 언제쯤이라고는 말 못하겠는데, 뭐, 아마 일주일 안이 아닐까 하는데."

   "하루 전에 다시 얘기해. 연습 메뉴 다시 짜야 하니까."

   아, 그렇지 참. 이시가키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자전거 위에 오르면 거리는 금방 멀어진다. 이시가키와 미도스지의 집은 반대 방향이었고 언덕을 내려가면 거의 바로 갈라져야 했다. 잘 가. 교문 즈음에서 이시가키는 인사했다. 미도스지가 흘끗 이시가키를 쳐다보았다. 체인이 돌아가는 소리가 차락차락 귓가를 울렸다. 해가 산 너머로 거의 넘어가 있었다. 이시가키는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

   교무실 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종이 한 장 받아 나오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공부하려고? 그래. 잘 정했다. 도쿄 쪽으로 간댔지? 고문 선생님이 몇 마디 첨언과 함께 미리 도장을 찍어 건네주었다. 부서 명, 로드 자전거 경기부. 이름은 아직 공란이었다. 고작해야 a4용지 한 장 짜리 종이였지만 커다랗게 박혀있는 퇴부서, 라는 한자가 어쩐지 마음을 묵직하게 했다. 진짜 관두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실에 가는 김에 제출할 생각으로 수업이 끝나고 용지를 받아왔더니 교실은 이미 비어있었다. 대부분 부실로 갔거나 집에 돌아갔을 것이었다. 이제 이름을 쓰고 부실로 가면 끝이었다.

   샤프를 꺼내들어 이름란에 한 자를 한 획 한 획 적어나갔다. 이시가키 코타... 사내 랑(郞)자를 적다가 문득 샤프 끝이 멈췄다. 끝, 이라고 하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3년동안 내리 다니던 부실을 내일부터 안 가도 된다고 생각하니 뭔가 말로 형언 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당장 다리 질을 갈아야 했던 1학년, 처음으로 주전으로써 인터하이에 나가 본 2학년, 그리고 우승을 내다 봤었던 3학년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슬슬 스쳤다. 부원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지나가니 어쩐지 가슴에서 뭔가 치받혀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로(郞). 샤프가 둥글게 획을 끝맺었다. 툭, 하고 뭔가가 책상 위에 떨어졌다. 눈물이었다.

   이시가키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내가 그렇게까지 자전거부에 애착이 있었나? 기실 부원이 아니라도 부실에 못 들어가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작년 같은 경우에는 종종 고3인 선배가 놀러오기도 했고 이하라와 츠지가 최근까지 자신과 가벼운 농담 따먹기를 하러 왔다가 간 적도 있었다. 부원들도 자신을 잘 따르는 편이었기 때문에 노부건 야마구치건 만날 구실은 충분히 있었다. 부를 나간다고 해서 부원과의 관계가 뒤틀어지는 것도 아니었는데-

   아. 미도스지를 보지 못하게 된다. 이시가키는 문득 깨달았다. 구실을 가져다 대도 만날 수 없었다. 자신은 그에게 친밀감을 느끼지만 미도스지는 글쎄, 어떨까. 유대는 있지만 다만 그 뿐이다. 미도스지가 유대를 쌓도록 터 놓은 사람은 자신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료로써의 친목이었다. 그 동료로써의 유대는, 친목은, 내가 자전거 경기부를 나서도 유지 될까. 그 유대를 이용해서 나는 너를 불러낼 수 있을까 네 얼굴을 볼 수 있을까 너와 말을 섞을 수 있을까 나는-

   나는 미도스지를 좋아하는구나. 깨달음은 갑작스럽게 뇌리에 내리 꽂혔다. 어제 점심 이하라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너 부활 계속 나가는 거 그 녀석 때문이냐? 그 때 왜 자신은 그렇게 반응했을까. 미도스지를 좋아하기 때문에. 왜 자신은 이 시기가 될 때까지 어시스트 자리에 연연하고 있었을까. 미도스지를 좋아해서. 너를 좋아해서.

   나는 너를 네 세상을 밖으로 불러내 놓고, 너를 불러 세워 놓고 너는 모르는 세계까지 뒷걸음질 쳐 와 버렸다. 나도 또한 너와 한 테두리 안에 있는 줄 알았기 때문에 깨닫고 보니 너는 모르는 세계에서 뼛속까지 한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유대는 이미 유대가 아니었다. 몸이 얼어버릴 것 같았다.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간의 감정이라는 게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더 이상 너와 연을 이었다고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목구멍에서 이상한 소리가 올라왔다. 눈 앞이 흐려졌다 맑아지기를 반복했다. 종이를 누르고 있던 왼손에 힘이 들어가 퇴부서가 구겨졌다. 툭, 하고 인연이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다음날, 노부를 통해서 미도스지에게 구겨진 퇴부서가 한 장 전달되었다. 이름 칸에는 정자로 이시가키 코타로라고 쓰여있었다.

-+-

  칸자키는 마지막으로 바퀴 페달을 한 번 더 돌렸다. 손을 털고 다리를 펴자 세발 의자에 앉아있던 손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왔다. 칸자키는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특별히 이상은 없는데? 외려 이렇게 관리 잘 된 자전거는 처음 봤다고 하는 게 맞겠네."

   깊은 저녁이 되어 이제 슬슬 문을 닫을까, 하던 와중에 온 낯익은 손님은 묵묵부답이었다. 로드 사이클 샵이다 보니 손님은 그렇게 많은 편도 아니기에 천천히, 그리고 꼼꼼히 살펴 보았지만 이 시간에 온 사람 치고는 이상이라고 할만한 점은 없었다. 별 말 없이 점검료를 지불하고 손님이 문을 열었다. 계절이 8월이었다. 에어컨으로 식은 공기에 습기가 가득한 더운 밤바람이 불어들면서 피부에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어 왔다. 남자가 자전거에 올라타려고 해서 칸자키는 아까부터 궁금하던 점을 툭 던져놓았다.

    "근데 도쿄 근처로 갔다고 그러지 않았어? 그 동네도 사이클 샵 많을텐데 왜 굳이 치바까지?"

   페달에 발을 올려놓은 손님이 뒤를 돌아보았다. 손가락으로 얼굴의 반을 뒤덮은 마스크를 내리고 남자가 입술을 움직였다.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질문이었던지라 칸자키는 조금 놀랐다.

    "...그쪽에서도 여기랑 똑같은 대답을 해서."

    미도스지는 다시 마스크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튕기듯 칸자키 사이클 샵을 뒤로하고 멀어져갔다.

    -

   이시가키는 정말 다시 연락을 해 왔다. 얼마나 깊은 밤에 연락을 한 건지 알 바는 아니었지만 다음날 아침에 핸드폰을 확인하자 메일이 한 통 와 있었다. 제목은 없었다. 잘 들어갔어? 별 내용이 없었기에 미도스지는 무시했다. 그날 오후에 또 한 번 메일이 왔다. 이번에는 제목이 달려 있었다. 고문 선생님이 라는 두서 없는 제목으로 시작된 메일은 선후배 관계라는 명목이 얼마나 개인정보가 새기 쉬운 것인지를 미도스지에게 잔뜩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이사 올 때 연락해! 도와줄게! 메일은 그 말로 끝을 맺고 있었다. 미도스지는 꾹꾹 자판을 눌러 두 마디를 전송했다. 필요 없어.

   안타깝게도 정말 빈 말이 아니었는지 이시가키는 이삿날에 정말로 모습을 보였다. 짐이라고 해 봤자 자전거를 제외하면 큰 박스 두 개도 되지 않는 분량이었기 때문에 도와줄만한 것은 없었다. 대학생의 자취에 알맞는 조그마한 방이었던지라 그 이상은 채울만한 공간도 마땅치가 않았다. 이시가키는 잔심부름 몇몇을 자발적으로 하고는 어색하게 앉아있다 돌아갔다. 가는 길에 보낸 건지 메일이 한 통 도착했다. 이시가키의 집 주소였다. 언제든지 놀러와! 필요 없다고. 만담과도 같은 메일이 다시 한 번 오갔다.

    도쿄에서의 생활은 교토에서의 그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어느 정도의 가사를 직접 처리하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특별할 게 없었다. 식사를 하고, 학교에 가고, 연습을 했다. 입학식보다 먼저 자전거 경기부에 인사를 가야 했다. 강호로 소문난 자전거 경기부의 연습 일정은 미도스지가 만족할 만큼 엄하고 타이트했다. 전문가가 짜주는 연습 메뉴도 그럴 듯했다. 학기에 들어가자 이시가키도 바빠지기 시작했는지 연락이 조금 뜸해졌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것은 첫번째 시합을 나간 시점이었다. 미도스지는 반 강제로 리타이어했다. 원인은 낙차였다. 노란색도 보이지 않았고 다리의 힘도 충분했다. 병원 검진을 받고 걸어나오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어딘가 이상이 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디 순간에 뒷덜미를 무언가 잡아 챈듯이, 미도스지는 낙차했다.

   아주 천천히, 하루하루 기록이 떨어졌다. 눈에 띄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아주 미세하게 조금씩 조금씩 다리의 힘이 빠졌다. 자전거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뒤에서 당기는 것 같았다. 노란색이, 노란색이 보이지 않았다. 승리에서 한 발자국씩 멀어지는 감각이 소름끼쳤다. 데 로사의 수명이 다했나 싶어서 몇 군데나 사이클 샵을 돌았지만 대답은 전부 같았다. 잘 관리된 좋은 자전거네요.

   -정신적인 문제라는 걸 깨달은 것은 그 때 즈음이었다. 이시가키에게 메일이 왔다. 기록이 미묘하게 떨어졌다. 좋아했어. 언제부터인지 밤이고 낮이고 귓가에 소리가 윙윙 맴돌았다. 뭐라고 해야할지 모를 묘한 감각이 심장 언저리를 맴돌았다.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욱신욱신 쑤시는 것 같기도 했다. 손대면 안 될, 떨쳐버려야 할 그 무언가와 계속 연락을 하고 있는 것이 문제였던 걸까. 미도스지는 조금 더 연락이 뜸해진 이시가키를 일방적으로 무시했다. 기록이 크게 떨어졌다. 반복되는 악순환에 진저리가 쳐졌다. 좋아했어. 어느 순간부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두통은 간헐적이었고 지속시간도 달랐다. 아픈 것도 편두통이었다 머리 전체가 아프기도 하고 제 멋대로였다. 혹시나 해서 사이클 샵을 몇 군데고 더 돌았지만 대답은 전부 똑같았다. 좋아했어?

   좋아했어 이시가키군? 나를? 어째서? 무엇을? 좋아했어? 언제부터 언제까지? 좋아한다는 건 뭐지? 좋아했어 이시가키 군? 좋아'했'어?

   미도스지는 브레이크를 잡았다. 해가 떨어진 길 한복판은 가로등이 잔뜩 켜져 있는 데도 어둑어둑했다. 깊은 밤의 차선 많은 도로에는 차도 얼마 없었다. 깜박깜박 거리는 자전거용 컴퓨터는 최하기록을 다시 갱신하고 있었다. 미도스지는 핸드폰을 꺼냈다. 몇 시간을 배회한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을 비추는 핸드폰을 조작해 미도스지는 메일함을 열었다. 그리고 주루룩 아래로 훑어내렸다.

   -

   똑똑똑. 현관문을 노크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시가키의 자취방은 목조 아파트 중의 한 켠이었고 지금은 새벽 깊은 시간이었다. 당연히도 반응은 없었다. 숨을 고르고 미도스지는 한 번 더 현관을 노크했다. 똑똑똑. 문득,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미도스지는 숨을 죽였다. 현관이 덜컹거렸다.

   "이 시간에, 누구... 어, 미도스지? ...군?"

   잔뜩 잠긴 목소리로 이시가키가 문을 열었다. 앞머리가 흘러내리다 못해 머리는 까치집이 지어 있었다. 헐렁한 바지와 티셔츠 한 벌을 대강 걸친 이시가키가 어색하게 얼굴을 문질렀다.

   "웬일, 이야 갑자기? 아 일단 들어갈래?"

   밤이니까, 하고 이시가키가 웃었다. 미도스지는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

   "됐어. 하나만 물어보면 돼."

   "어? 뭔데?"

   이시가키의 표정은 아주 여상했다. 동요도 무엇도 없이 가라앉아서 미도스지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조금, 목 뒤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서 미도스지는 한 호흡에 내뱉었다.

   "이시가키 군 나 좋아했어?"

   이시가키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한껏 벌어진 눈꺼풀 안의 동공이 자그마했다. 조금, 눈이 흔들리는 걸 미도스지는 똑바로 바라보았다. 좋아했어? 미도스지는 한 번 더 반복했다. 이시가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몸이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다. 쿵, 하고 이시가키의 등이 벽에 부딪혔다. 목이 말라와서 미도스지는 주먹을 쥐었다. 장갑의 가죽끼리 뿌득이는 소리가 났다.

   "-좋아해."

   이시가키가 흐느끼듯이 말했다. 좋아해, 미안. 좋아해. 아니, 이시가키는 흐느끼고 있었다. 한껏 죽은 울음소리가 말머리와 말꼬리에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문득 답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도스지는 한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알았어. 대답을 던지고 미도스지는 몸을 돌렸다. 난간이 허술한 철제 계단을 내려가기 직전에 미도스지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어느새 현관이 닫혀있었다.

    이시가키의 집에서 미도스지의 집까지는 꽤 먼 거리를 달려야 했다. 정확한 길도 알 수 없어서 미도스지는 몇 번이고 길을 헤맸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이 시려와서 이상하다고 미도스지는 생각했다. 어딘지도 알 수 없고 몇 시인지도 모르는 동안에 미도스지는 계속 페달을 밟았다. 어느 순간부터 강이 길 옆을 따라 나 있었다.

    정신을 차리니 묘하게 하늘이 밝았다. 자신이 방금 눈을 떴다는 걸 깨닫고 미도스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철컹, 철컹, 하고 옆에 내동댕이 쳐진 데로사의 페달이 돌고 있었다. 다리가 아프다는 걸-부상인지 아닌지를 차치하고서-제외하면 다친데가 없다는 게 천운인 수준이었다. 강변이라 잔디가 잔뜩 있는 둑에 넘어진 덕에 무리가 없는 것 같았다. 강의 끝자락 즈음에서 천천히 해가 뜨고 있었다.

   미도스지는 주머니에서 빠져나가서 멀리 내동댕이 쳐진 핸드폰을 향해 기어갔다. 한참을 배회하던 손가락이 버튼을 눌렀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메일함이 열렸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에 삐빅, 하고 알람소리가 들렸다. 하, 하고 미도스지가 웃었다.

   "꼴값이야, 이시가키 군.(キモイヤ, 石垣君)"

 

 Re: 이시가키 군

보낸 사람 : 이시가키 코타로

받는 사람 : 미도스지 아키라

 

당장 갈게

----Original message-----

보낸 사람 : 미도스지 아키라

받는 사람 : 이시가키 코타로

제목 : 이시가키 군

 

하늘이 노란색이야

 

    그리고 미도스지는, 정신을 잃었다. 

'2D > 겁쟁이 페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시미도] 네가 만나러 오는 길  (1) 2023.01.20
[이시미도] 너를 만나러 가는 길  (0) 2023.01.20
[아라이시] 여름의 열매  (1) 2023.01.20
[이시미도] 수평선  (0) 2023.01.20
[후쿠킨] 마네키네코  (0) 2023.01.20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