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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서 풀었던 썰을 그대로 백업합니다. 퇴고X


어 쩨갈량하고 윱이 결혼식에서 처음 만나는 육윶 보고 싶은데

이 경우에는 둘 다 부잣집이면 좋겠는데 윱이가 먼저 결혼해서 넌 언제 결혼할 거냐고 독촉 당하는 유장이라던가....

그래서 제 마음에 차게 잘생긴 사람이 좋습니다 했는데 윱이 지인으로 온 유기에게 하트 명중 당한다

윱이한테 유기가 인사할 때 처음 만나서 많이 더우신가봐요 하는 소리 듣는 유장

유장 일부러 일 벌여서 유기랑 만나는 것도 보고 싶네 처음엔 아무 생각 없다가 유장이 귀여워지는 유기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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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정글이다. 집안의 가훈치고는 꽤 살벌하지만 유장은 가훈에 꽤 공감을 하는 편이었다. 뭔가를 쟁취하려면 싸워야한다. 원하려면 이겨야 한다. 동생은 그런 세상을 몰랐으면 하는 것도 유장의 바람이기도 했다. 순한 동생이 세상에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끼고 살던 동생이 이제는 결혼을 하여 식을 올릴 정도로 나이를 먹었다는 데에 있었다.

혀엉. 나도 이제 나이가 몇인데.

화장 지워진다. 얼굴 긁지 마.

응 공손찬!

학교 후배이자 유비 친구이기도 한 공손찬이 얼굴이 찌푸려진 유장을 보며 한숨을 푹 흘렸음. 바지 정장에 굽 낮은 구두를 신고 있는 공손찬을 보며 유장은 신랑을 바꿔치기 해 버릴까 생각했음. 물론 시도라도 했다가는 공손찬이 유장을 죽이겠지만.

유장 씨, 나쁜 생각 하고 있는 거 얼굴에 다 보이거든요?

...아냐.

아니긴 뭘 아냐.

공손찬이 후, 한숨을 흘렸음.

나도 유비 상대가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닌데, 둘이 좋다잖아. 어쩌겠어.

유장은 고개를 끝끝내 끄덕이지 않았다. 물론, 잘생기고, 돈도 많고, 유비에게 헌신적인 신랑이긴 했지만 유장의 마음에는 터럭도 차지 않았다. 줄을 세운다면 열손가락 안에야 들겠지만 절대 1등은 아닐 게다. 세상은 정글이라고 그렇게 들었건만...! 유장은 작게 한탄했다.

그러나 유비는 행복해 보였고, 그 행복은 신랑 대기실 2번(1번에는 제갈량이 있었다)에 꽃이 빛을 바랠 수준이었다. 유장은 오늘로만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유비의 결혼식이지만 유장은 그렇게 마음 편히 기뻐할 수 없었다. 일단 유비의 신랑이 마음이 차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였고, 나머지는 부모님과의 불화가 그랬다. 대체, 유비가 장가를 가는 것과 자신의 결혼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인지, 유장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자신까지 얼른 누군가를 데려오라고 닦아세워져야 했는지 유장은 짜증이 잔뜩 난 상태였다. 결국 인사를 받는 부모님을 피해 신랑 대기실로 도망 온 유장의 입에서는 땅이 꺼질 듯한 한숨만 줄줄 새었다. 공손찬은 그런 유장을 살펴보다 유장의 등을 아프게 손바닥으로 쳤다. 좋은 날 적당히 하시죠? 유장은 고통을 감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대강 둘러대고 왔으니 당분간은 무어라 들을 필요 없겠지. 유장은 생각했다. 자신이 뭐라고 했더라. 잘 생긴 사람이 좋다고 하였던가. 마음에 차게 잘생기지 않으면 절대 안 된다 했던 것 같았다. 부모님도 헛소리라는 것은 잘 아시겠지만 그래도 한 숨은 돌릴 수 있을 터였다. 신랑 대기실 문에서 노크소리가 났다. 노크 하는 사람은 또 처음이네. 유장은 장갑을 낀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머리 위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유비 동창 유기라고 하는데요. 여기, 유비 대기실 맞나요?

......

...저기?

...예.

맞습니다. 유장은 반쯤 정신을 놓은 채로 대답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

공손찬은 아까부터 울려대는 핸드폰에 얼굴을 찌푸렸다. 대체 누구야 이런 날 매너 없이. 공손찬은 유비에게 양해를 구하고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유장은 화장실에 좀 다녀 온다더니 도통 오지를 않았다. 유비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보다야 나은가? 공손찬은 핸드폰을 열었다.

유장:공ㅇ손찬ㄴ너 유비ㅣ랑ㅇ 완전히그도르으ㅡㅡ동창이지

유장:째알아??쟤 누구ㅜ야????

이 오빠가 왜 이래? 공손찬은 얼굴을 찌푸리고 핸드폰을 톡톡 두드렸다.

공손찬:뭐해요 지금?

유장:누수ㅡㅡ군지 몰라?

공손찬:얼른 오기나 해요 좀 있으면 식인데

유장:찬아ㅏ제발

이 오빠가 진짜 왜 이러지? 공손찬은 흘끗 유기를 보았다. 유비랑 미소를 짓고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이 딱 동생의 좋은 친구로 보였다. 실제로도 그런 관계였다. 이 오빠 또 동생 친구 단속하려는 건 아니겠지? 괜히 일거리를 늘리는 느낌이긴 하지만, 공손찬은 제발 이라는 단어에는 좀 무른 경향이 있었다. 공손찬은 핸드폰을 두드렸다.

공손찬:유기요. 형주 폭죽 아들.

유장은 화장실에서 핸드폰에 고개를 박았다. 형주 폭죽? 형주 폭죽의 아들이 저랬었나? 폭죽과는 영 연이 닿지 않는 기업을 굴리는 집안이다 보니 형주 폭죽의 사장 얼굴도 가물가물했다. 실물을 본 적이 있기는 한 건지도 의심스러울 수준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유장은 숨을 고르고 손을 씻었다. 쏟아지는 물소리를 듣고 있자니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 유장은 비누를 짜서 손등 손바닥 손톱 밑을 가리지 않고 뽀득뽀득 소리가 날 때까지 손을 닦았다. 자꾸 손에 땀이 차는 기분이었다.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유장은 손을 헹구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유기는 손을 씻으러 들어왔는지 유장 옆의 세면대에 자리를 잡았다. 물소리가 두 개가 되어서 유장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물을 껐다. 그리고는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았다. 괜히 헛기침이 나왔다.

저, 유기, 씨?

예?

유기가 고개를 들었다. 유장은 한 번 더 헛기침을 했다.

유비 형 유장입니다. 아깐 실례 했습니다.

아, 아닙니다. 말 놓으세요.

유기가 눈을 휘어 웃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유장은 어쩔 줄 모르다 입을 떼었다.

그으래도 될, 까...?

저보다 나이도 많으신 걸요.

자꾸 심장이 제멋대로 요동을 쳤다. 뛰어 올랐다가, 가라앉았다가. 이번에는 푹 주저앉았다. 유장은 손수건으로 손을 한 번 더 문지르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유기가 아, 하고 핸드타올로 손을 닦고 오른손을 잡았다.

...유비, 잘 부탁한다.

뭘요. 저야말로 예쁘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유기가 애교있게 생글 웃었다. 유장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결혼식 후 사진을 어떻게 찍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니 결혼식이 끝나 있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유비와 제갈량은 분가해서 따로 살 것이었다. 유장은 마른세수를 하며 자신을 책했다. 뒤에서 공손찬이 혀를 찼다.

뭐 하길래 그렇게 넋을 빼놓고 있어.

...보였냐.

그럼 보이지 않고. 사진사가 왼쪽으로 가라는데 오른쪽으로 가질 않나 부케 받을 사람 맨 앞줄에서 뻣뻣이 굳어있지 않나.

받을 거면 열심히 움직이기라도 해야지. 찬이가 투덜거렸지만 유장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걸 눈치채고선 공손찬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유장은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차들이 주차장에서 한 대 두 대 빠져나가고 있었다. 저 안에 유기가 있을까, 혹은 저 안에 유기가 있을까. 유장은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푸르르 몸을 떨었다.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이 도통 멈추지가 않았다. 유장은 고개를 털듯이 저었다. 아침에 스타일리스트가 드라이해 준 머리가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그래도 결혼식이 끝났으니 그럭저럭 다행이었다.

결혼식이 끝났다. 유장은 퍼뜩 눈이 뜨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비와 제갈량은 분가를 할 터였다. 결혼식에 올 정도로 친한 동창이라고는 하지만 본가에 데려올 친구는 아니었다. 그럼 앞으로 유장이 유기를 볼 일은 영영 없다는 소리였다. 유장은 순식간에 긴장은 물론이고 기운마저 빼앗긴 것 마냥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공손찬은 뒤에서 당황했다. 아니 이 오빠가 왜 이래? 아까부터 감정기복이 널을 뛰었다. 문득 공손찬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예, 실장님. 예. 예... 아뇨, 그 부분은 추가 자료가 있습니다. 예. 내일 보내 드리겠습니다. 네.

공손찬은 전화를 끊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휴일까지 전화가 오는 실정이라니, 정말 싫었다. 유장이 문득 물었다.

무슨 일이야.

어, 이번 기획, 내가 책임자라.

클라이언트한테 자꾸 전화가 오네. 공손찬은 어깨를 으쓱 움직이며 말했다. 유장의 얼굴이 조금 놀란듯 했다가 순식간에 펴졌다. 유장은 하, 하고 웃음을 지었다.

찬아.

응?

고맙다.

...오빠 뭐 잘못 먹었어?

여기 식사가 그렇게 문제가 있을리가 없는데? 유장은 공손찬의 말을 뒤로 하고 열심히 발을 놀렸다. 부모님을 뵈어야 했다.

-

유기는 그 날 판매량을 검토하는 와중에 택배를 하나 받았다. 유비가 개인적으로 준비한 결혼 축하 감사 선물이었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 간단한 차 선물이었지만 유기의 취향을 고려한 것은 확실했다. 유기는 잘 덖어낸 차의 향을 즐기다 조심스레 뚜껑을 덮었다. 유비는 이런 데에 세심한 면이 있는 친구였다. 그래서 좋아했고, ...좋아했었다. 이제는 완전히 마음을 접어 순수하게 축하해 줄 수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유기는 차트를 한 장 넘기며 판매량을 마저 검토했다.

그러고 보니, 그 형님도 꽤나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유기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웃음을 흘렸다. 당황했는지 얼굴이 붉어서는 도망치듯 인사를 피하기도 하고. 식 내내 뻣뻣하게 긴장해서는. 귀여웠지. 유기는 미소를 띠고 차트를 마저 넘길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 숫자가 만족스럽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판매부를 좀 쪼아야겠는데. 유기는 덤덤히 생각했다.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그 때였다.

부사장님.

뭡니까?

판매부에 김부장입니다.

음?

들어온 직원이 꽤나 당당하게 말했다. 요즘 실적을 봐서는 이럴 수 있을 사람들이 아닌데? 유기는 손깍지를 끼고 그걸로 턱을 괴었다.

유진 그룹에서 불꽃 축제를 개최한다고 하는데, 저희 폭죽을 쓰고 싶다고 합니다.

과연, 당당할 만한 용건이었다. 유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

유장은 초조하게 머리를 다듬었다. 형주 폭죽은 생각한 것보다 더 큰 회사였다. 젊은 나이에 부사장까지 올랐다는 것은 오너 일가임을 생각해 보아도 꽤나 높은 자리였다. 그렇다는 것은 능력도 좋다는 뜻이었다. 유장은 호흡을 골랐다. 일 얘기만 하다 돌아가기 될 것은 자명했다. 그래도 좋았다. 어쨌건, 유기의 얼굴을 볼 수 있는 핑계가 되어 주었으니까. 자신이 직접 기획한 행사인 만큼, 완벽하게 일처리를 할 것이었다. 유장은 얼굴을 굳혔다.

문이 열렸다. 유기가 미닫이문 너머에 서 있었다. 유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어서 죄송합니, 유장 씨?

유장은 끄덕, 고개를 움직였다. 괜히 일거수 일투족이 신경쓰였다. 유기가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미닫이 문이 닫혔다. 유기의 눈이 동그랗게 떠져서 그게 멋있었다. 유장은 속으로 상을 두드리며 자리에 앉았다.

유장 씨가 여긴 어쩐 일로...

불꽃 축제, 내가 기획한 거라.

앉아. 음식 식는다. 유장의 말에 유기는 선선히 자리에 앉았다. 유장은 자신의 말이 어색하지는 않았는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유기가 먼저 입을 떼었다.

죄송합니다. 원래는 아버지가 나오셔야 하는데, 외국 출장 중이시라.

들었어. 괜찮아.

그래도요. 다음에 한 번 더 뵙겠습니다.

...나야, 고맙지.

유장은 최대한 덤덤히 말했다. 둘만 있는 식사자리는 찝찝할 정도로 조용했다. 유장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일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올라온 도안을 보니까, 지금까지 없던 형태라는 것도 꽤 있었는데.

아, 안 그래도 지금 조율에 들어가는 모양입니다. 그 부분이 가능한 것도 꽤 있어서...

유기는, 자신의 일에 꽤나 자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유기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개발부에도 신경을 꽤나 많이 쏟는 모양인지 알아 듣기는 조금 어려웠지만 유장은 설명을 머리에 담아두려 애를 쌌다. 그 모습이 참으로 멋지고도, 예뻤다. 유기가 정신을 되돌린 것은 그 찰나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흥분해서.

아니, 아냐.

재미있었어. 유장이 싱긋 웃었다. 표정이 통제가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유장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러면, 곤란해지는데. 그리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서 일적으로 만났다. 유장은 권력이 있는 일방에서 집적대는 것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급한 김에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는 곳으로 질러 와버렸더니 지름길이 아니라, 가시밭길로 온 기분이었다. 멍청하긴. 유장은 스스로를 싸늘하게 조소했다.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 그러나 세상은 실수를 곱게 넘겨주지 않는다. 세상은, 정글이니까. 유장은 웃으려 노력했다.

술, 괜찮나? 여기 사케가 괜찮은데.

괜찮습니다.

유기가 웃었다. 그 와중에도 웃음이 고와 유장은 마음이 아렸다.

-

일은 느리지만 차근히 진행되어갔다. 불꽃 축제 허가를 받고 필요한 장소를 대여하고 폭죽 생산이 차질없이 진행되는지 점검하고... 할 일은 그 외에도 산더미 같았다. 유장은 사람들이 올리는 서류를 하나하나 검토하며 하루를 지샜다. 유기를 보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유기를 보기는 거의 글른 상황이었다. 일에 사심을 담은 자의 말로인가. 유장은 쓰게 웃었다. 몇 개월의 시간을 두고 시작한 일인지라 좀 느리게 진행해도 괜찮았다. 당장 바쁜 것은 홍보부일 터였다. 몇 개월 전부터 홍보를 시작해야 할지가 난제일 터였다. 포스터까지 잘 뽑히고 나면 법인 카드 써도 된다고 해줘야하나. 유장은생각하며 올라온 결재 서류에 사인했다.

일을 끝내고 나자 해가 져 있었다. 유장은 시간을 보고는 차에 올랐다. 비서가 챙겨준 꽃다발과 선물이 차 뒷좌석에 놓여 있었다. 유비의 집들이날이었다. 이것저것 소소한 이벤트를 중시하는 유비 성격은 유장의 긴장을 마법처럼 풀어놓았다. 유장은 시동을 걸었다.

차가 부드럽게 돌아서 멈추어섰다. 유장은 차에서 내려 뒷좌석으로 돌아 꽃다발과 선물을 챙겼다. 유비가 좋아하는 수제 초콜릿 가게의 초콜릿 세트였다. 비서가 발휘한 센스가 아낌없이 보여서 유장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차가 들어오는 게 보인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문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유장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아직 넉넉했다. 혼자 들어가는 것보다는 같이 들어가는 게 나으려나. 아마도 공손찬이나 유비 친구일 테니까. 유장은 제 차에 기대서 막 들어온 차가 멈추기를 기다렸다. 시동이 꺼지는 소리가 났다. 내리는 사람의 얼굴을 보곤 유장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유기...?

아, 본부장님.

유기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장은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것 같았다. 여기서 만나게 될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유기는 생각보다 유비와 친한 모양이었다. 그동안 못 본 것이 이상할 정도로. 유장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잘 지내셨어요?

나야 잘 지냈지. 유기 넌?

저야 뭐, 본부장님이 신경 써주신 덕에.

본부장님이라고 하니까 나이들어 보이잖아. 그냥 유장 씨라고 불러.

유장은 최대한 침착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기가 좀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래도요.

오늘은 유비 형이랑 유비 친구로 만난 거야.

유장은 난처한 얼굴을 하는 유기에게 말했다. 난처한 얼굴도 잘 생겼네. 윗사람에게도 깍듯하고. 유장은 더 올라갈 데도 없는 점수를 상향조정했다. 그러다 문득, 유장은 유기의 손이 빈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선물은? 안 챙겼어?

아, 뒷좌석에 있습니다.

아.

유장은 머쓱하게 꽃을 든 손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유기가 허리를 굽혀 잘 포장된 선물과 꽃다발을 꺼냈다. 유장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잘 어울리네. 그러다 문득, 유장은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누구라도 반할 법한 사람을 두고, 자신은 대체 뭘 하는 짓인지. 유장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갈까 그럼.

네, 유장씨.

그 와중에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좋았다. 유장은 더 슬퍼졌다.

-

유기는 물로 목을 축였다. 유비는 유장이 사온 초콜릿 세트를 보고 뛸듯이 기뻐하며 유장을 끌어안았다. 제갈량이 뒤에서 뿔이 나는 게 그대로 보여서 유기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유장은 유치할 정도로 그런 제갈량을 비웃으며 유비를 쓰다듬어 주었다. 누가 보면 참 화목한 집안이라고 이야기할수 있을 만큼, 큰 집안치고는 다정하기도 했다. 유기는 유장을 보고 피식 웃었다.

유비는 이 세계에서 드물 정도로 얼굴에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편이었다. 그걸 귀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반이고,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반이었다. 전자는 유비의 옆에 남아 유비를 지켜주는 방패가 되어주었다. 그게 제갈량이고, 공손찬이고, 유기였다. 그리고 유기는 유장을 보고 그게 가풍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장의 표정은 꽤나 다채로웠다. 웃음, 무표정, 분노. 유기는 그게 제 표정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제 표정은 제가 꾸며낼 수 있어야 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저 세 표정이 아니면 잘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웃음도 다양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자신도 웃음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런데도. 저렇게 토라진듯한 표정, 저렇게 기뻐하는 표정, 행복해 보이는 표정. 자신은 저런 얼굴을 할 줄 알던가? 유기는 아니라고 결론 지었다. 목이 탔다. 유기는 물을 들이켰다. 그러다 문득 유기와 유장의 시선이 마주쳤다. 유장은 퍼뜩 정신을 차리듯이 표정을 가다듬었다. 유비의 머리를 헝클이던 손도 헛기침과 함께 떨어져 나갔다. 유장과 유비의 가장 큰 차이점은 거기에 있었다. 유장은, 신경을 썼다. 유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상처입은 짐승마냥, 없는 송곳니를 최대한으로 세우고 최선을 다해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 때때로 풀어지는 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한몸을 지키고 제 주변을 지키려고 자신의 온 힘을 쏟았다. 송곳니는,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분명 어딘가에는 숨어있었다. 유기는 허리를 폈다. 그리고 생각했다. 좀 더, 유했어도 좋을텐데. 좀 더 웃고,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는 표정을 보였으면 좋았을텐데. 유기는 그 표정에서 유비가 비친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유비는 유기에게 깊은 그늘인 모양이었다. 유기는 차려진 반찬을 하나 집어먹으며 웃었다.

맛있네요, 이거.

그치? 내가 직접 볶았어!

유비의 얼굴이 해맑았다. 유기는 유장을 보았다. 그으래? 유장은 그 반찬 쪽으로 젓가락질을 했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먹여달라고 졸랐다. 공손찬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유기는 혼자만 이 자리에 녹아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기는 살짝 젓가락을 물었다가 다시 놓았다.

술자리가 섞이지 않은 집들이는 금방 파했다. 부모님이랑은 따로 하려구! 유비의 말에 유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둘이 차를 준비하러 간 사이 유장은 천천히 테라스로 나와서 길게 숨을 흘렸다. 날이 싸늘해서 그것만으로도 김이 무럭무럭 올랐다. 몸에서도 김이 오르는 것 같아 유장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신이 좀 차려지는 것 같았다. 아까 유기와 눈이 마주쳤을 때 약간 찬 물을 뒤집어쓰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동생 친구 앞에서 뭐하는 짓인지. 유장은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좋아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 편이 나았다. 있는 대로 약점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세상은 정글이었다. 지금까지 들키지 않았다고 해도 앞으로도 들키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유장은 찬 공기를 쐬며 다짐했다.

여기 계셨네요.

뒤에서 유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장은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천천히 뒤돌았다. 유기가 빙긋 웃으며 서 있었다.

유비가 차 준비가 다 되었다고 해서요.

어, 금방 내려간다고 해 줘.

유장은 덤덤히 말하기 위해 애를 썼다. 머리를 식히려면 잠시 더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유기를 보고 더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으려면. 유장은 다시 뒤를 돌았다. 정원 위에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아직 시간이 그렇게 늦지 않아서 각도는 낮았지만 그래도 밝았다. 유장은 테라스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날이 맑네요.

유장은 뒤를 돌았다. 내려갔으리라고 생각한 유기가 테라스로 나와 있었다. 날도 추운데. 유장은 뭐라 입을 떼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불꽃 축제 때도 이러면 좋겠네요.

...그렇지.

아직 반 년이나 남은 행사를 이렇게 말하자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유장은 뒷머리를 긁었다.

날이 맑으면, 별이 더 잘 보여서, 불꽃의 일부처럼 보여요.

그건... 꽤 로맨틱한 발언이었다. 지금도 별이 총총하면 불꽃처럼 보인다며 웃는 유기를 보며 유장은 말을 아꼈다. 무슨 말을 해도 헛소리가 나갈 것 같았다. 이를 테면,

좋아해.

좋아한다던가. 문득 유장은 유기가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 입에서 뭔가가 던져진 듯 입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 발음의 진동이 채 입에서 떨어지기도 전이었다. 내가 뭐라고 했지? 좋아, 한다고 했나? 유장은 갑자기 더워짐을 느꼈다. 유기의 얼굴도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유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요란했다.

차, 차 마시러 가자.

...유장 씨.

유장은 그 자리에 못 박혔다. 유기는 몇 번 뭔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기를 반복하고 길게 숨을 빼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

저는, 본부장님을... 생각한 적이 없어요.

...알아.

유장은 중얼거리듯 이야기 했다. 본부장님. 그건 자신의 두번째 이름 비슷한 것이었다. 그런데 꽤나 차갑게 들려서, 유장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유기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유장은 유기를 말렸다.

잠깐만.

......

내가 먼저 내려갈게. ...부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면 이상할 테니까.

...예.

유장은 자리를 떴다. 훅 끼쳐들어오는 따뜻한 공기가 볼을 어루만졌다. 덕분에 뜨뜻한 눈시울이 별 티가 나지 않았다. 멍청하긴, 진짜. 유장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겨우 얼굴만 보고 좋아했으면서 뭐 그리 대단하다고. 유장은 깊은 숨을 들이 쉬고, 또 내쉬었다. 그리고 마음을 털어내었다.

유기는 기분이 이상했다. 고백을 받아본 적은, 솔직히 말해 없잖아 있었다. 그 때에도 미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이렇게 싱숭생숭한 적은 처음이었다. 유기는 계단을 따라 천천히 아랫층으로 내려갔다. 유비가 유장을 말리고 있었다. 형, 좀 더 놀다 가. 그리고 유장은 그걸 또 만류하고 있었다. 내일 출근해야지, 너나 나나. 그러면서도 말리는 동생이 귀여운지 유장은 유기의 머리를 헝클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빙긋 웃음이 떠 있었다. 방금 차인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유장은 멀쩡해 보였다. 그게 기분이 이상해서 유기는 주르륵 미끄러지듯 앉아 난간에 턱을 괴었다. 유비가 좀 더 말리려 했지만 자켓은 물론 코트까지 걸친 유장은 완강했다. 유장이 집을 나서고 곧 시동 거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가지 않아 차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유기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죄책감? 비슷하지만 또 아니었다. 색채가 확연히 다른 감정에 유기는 새로 딱지를 붙였다. 불안감? 비슷한 것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감정이라는 게 끼어들었으니까. 불꽃 축제, 계약은 제대로 성사가 되었지만, 파기되면 어쩌지? 유기는 그런 불안감이라고 단정지어 버렸다. 유기는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공손찬이 유기를 불렀다. 네 거, 녹차. 유기는 고맙다고 빙긋, 웃었다.

다음날이 바로 회의날이었다. 유기는 평소대로 서류와 복장을 갖추고 회의실로 향했다. 물론 대부분의 이야기는 실무자 선에서 오가지만, 본부장님이 직접 기획하고 살피는데다, 들르기까지 하는데 어느정도 급은 맞추어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오늘따라, 사람들의 분위기가 통 좋지 못했다. 유기는 자리에 앉으며 맞은편 의자를 세었다. 세 개. 평소에는 네 개가 있다. 사람 수에 맞추어서. 유기는 입을 떼었다.

의자, 모자란 거 아닙니까?

예?

네 분 오시지 않습니까.

저, 부사장님.

셋이 눈빛을 교환했다. 가장 윗직급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사장님.

예.

...오늘부터 본부장님은 못 오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유기는 뭔가, 뚝 끊어져 버렸다고 느꼈다. 갑작스레 내던져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기는 뿌득, 이를 갈았다.

-

형 미안.

그게 끝이었다. 회의 중 문자가 와서 쉬는 시간에 핸드폰을 열어보자 유비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형 미안. 그 세글자가 다였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유장은 그대로 핸드폰을 잠그려했다. 진동이 울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처음 보는 번호가 진동을 울려서 유장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본부장님.

유장은 잠시 핸드폰을 떼어서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인데? 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지?

본부장님, 저 유기입니다.

...예, 유기 씨.

유비가 미안하다고 한 건 이것 때문이었나. 유장은 핸드폰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유기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 못 오신 게 걱정 되어서요. 괜찮으십니까?

...아닙니다. 그냥 일이 바빠서.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시간 내서 갔었는데, 앞으로는 서류 검토만 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에는 지장 없을 겁니다. 유장은 치받혀 올라오려는 것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이거면 설명이 되겠지. 유장은 씁쓸히 웃었다.

그게 답니까?

예?

그러니까, 이런 대답은 예상치 못했다는 소리였다.

그게 다냐고 물었습니다.

부사장님.

갑작스레 이렇게 안 오신다고 전화해서 통보만 하면, 저는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유기 씨.

유장 씨, 저는-

유기야.

문득 귓가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던 말이 문득 멈추었다. 유장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일에는 정말 지장 없을 거다. ...그 정도로 안일하게 기획한 거 아냐.

...그렇지만.

그만해.

......

너 지금 화내는 게 뭐 때문이야.

유장은 갑자기 피우지도 않는 담배가 고파졌다. 극심하게. 덤덤하게 말하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졌다. 유장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유장 씨.

그렇게 부르지 마. 기대하게 하지 마, 유기야.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 유장은 한숨처럼 읊조렸다. 핸드폰 너머에서 침묵이 넘어왔다. 유장은 눈을 꾹 눌러 감았다 떴다.

용건은 끝나셨으리라 생각하겠습니다.

...유장 씨.

제가 회의가 있어서 이만.

유장-

유장은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돌렸다. 회의가 다시 시작될 것이었다.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 넣고 유장은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다.

유기는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된... 유기는 그제야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유기는 눈을 감았다. 왜 이렇게 자신이 조급해졌는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이번 회의 결과를 보고 정리 했어도 되는 일인데. 왜 자꾸 불안해 지는 걸까. 왜 자꾸만. ...일에서 문제도 없다고 장담해 줬는데. 왜. 유기는 눈을 비비며 한숨을 뱉었다. 순식간에 피곤이 몰려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꾸만 조급해지고, 화가 나고,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잘못된 일이었다. 결국엔 엄한 유장 씨까지. 나중에 사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유기는 눈을 감고 그 위에 제 손을 올렸다. 차가운 감촉이 눈을 덮어와서 유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

형, 미안.

오랜만에 본가에 온 동생이 끙끙거려서 유장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거의 한 달이 다 지나서 저녁 한 끼 먹으러 온 것 치고는 동생은 너무나 풀이 죽어 있었다.

괜찮아.

그치만, 유기 완전 화난 것 같았는데.

그냥, 그럴만 하니까 그런 거야.

얘기 하고 풀었어. 그러나 그 말을 믿기엔 유비는 생각보다 어른이었다. 그렇게 분노한 유기는, 유비는 본 적이 없었다. 둘이 싸웠나? 유비는 찜찜하게 생각하며 유장을 잡았다.

형.

응?

유기가 잘못한 거야?

...아니.

내 잘못이야. 그렇게 말하는 유장은 씁쓰름하게 웃고 있었다. 유비는 입을 앙 다물었다 다시 열었다.

형, 나 내일 공손찬하고 밥먹기로 했는데 같이 가자.

거기 완전 맛집이래! 유장은 피식 웃으며 유비를 쓰다듬었다. 공손찬이 허락 하면. 응! 유비가 웃었다. 그렇게 말해놓고 정작 제가 지각을 하면 어떻게 하냐. 유장은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공손찬하고 유장 사이에 딱히 친밀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반은 기본적으로 유비와 공손찬의 우정이었다. 유비 없이 둘이서 카페에 앉아있으려니 영 불편함이 가시지 않았다. 공손찬은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오랜만이에요, 오빠.

그러게.

먼저 시키고 있어요. 어차피 얘, 많이 늦을 거 같고.

그럴까. ...난 이거, a메뉴로.

저는 c요.

주문까지 하고 나자 정말로 할 일이 없었다. 유장은 천천히 물로 입술을 축였다.

일은 잘 되가요? 불꽃 축제 연다면서.

홍보부가 일 잘 하네. 그렇게 됐어.

흠.

공손찬은 턱을 괴고 물었다.

정말 그게 끝이에요?

...? 뭐가.

유기랑은 아무 상관도 없어요?

유장은 컵을 떨어뜨릴 뻔 했다. 간신히 컵을 다시 부여잡기는 했지만 니트에 물을 반 정도 흘려버려서 냅킨으로 급하게 닦아야 했다. 공손찬이 한숨을 내쉬었고 유장은 더이상 부정하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많이 좋아해요?

이젠 접으려고.

...미안해요, 물어봐서.

아냐.

유장은 덤덤히 대답하기 위해 노력했다. 공손찬은 티슈로 립스틱을 닦으며 말했다.

사실, 좀 말릴까 싶었거든요. 괜한 참견일까봐.

말려? 왜? 유비 친구라?

그런 것도 있고...

공손찬은 입을 힘겹게 떼었다.

걔 유비 좋아했거든.

-

유기는 자꾸만 초조해지는 자신을 달래기 위해 물을 한 모금 삼켰다. 전화기가 꺼져있어, 오늘로만 몇 번째인지 알 수 없는 연결음에 유기는 핸드폰을 내던질 뻔 했다. 왜 자꾸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지? 유기는 등을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유장 씨, 전화 좀 받아요. 전화 좀 받아줘요. 유기는 중얼거리며 버튼을 다시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들렸다. 유기는 흠칫 놀라며 등을 세웠다. 달칵, 전화를 받는 소리가 났다.

유장 씨.

......

유장 씨...

정작 유장이 전화를 받자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유기는 뭐라 해야할지 몰라 유장의 이름만 반복해 불렀다. 지금 어디에요? 뭐 하고 있어요? 우리 만나서 얘기 할 수 있을까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라곤 그것 뿐이었다. 유기는 필사적으로 전화가 끊기지 않기 위해 말을 주워 섬겼다.

유장 씨, 저.

그만해.

예?

그러나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유장이었다. 유장의 목소리는, 화가 난 것처럼 들렸다. 화가 나다 못해 절망한 것처럼, 잔뜩 가라앉아서. 그만해 유기야, 제발.

유장 씨.

날 더 비참하게 만들지 마.

그게 무슨,

무슨 말이에요 유장 씨. 유기는 핸드폰을 부서트릴듯이 꽉 쥐었다. 비참하게 만들다니, 내가? 당신을? 지금 나도 굉장히 비참하게 느껴지는데? 유기의 귀에 유장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너,

유비 좋아했었다며.

유기는 숨을 멈췄다. 아주 잠시 잠깐이지만 숨이 멎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귓가에 계속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한테서 유비를 보는 거잖아. 내가 유비 형이니까 잘 보이고 싶은 거잖아.

그러지 마라 유기야, 그건 너무 잔인한 짓이잖아. 너한테도, 나한테도. 유기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아주 잔인한 충동이었다. 상처 입히고 싶었다.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다. 유기는 그 충동을 눌러 삼키기 위해 깊은 숨을 들이 쉬었다가 내뱉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유장 씨.

......

저는 유비를 좋아했었어요.

...그러니까.

그런데 그게 왜요?

......

그게 이 상황이랑 무슨 연관이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유기 너,

잔인하다고요, 아뇨. 지금은, 유장 씨가 저한테 더 잔인한 거 같아요.

저는 유비를 좋아했었어요. 예, 옛날에 그랬어요. 지금은, 더는 아니에요. 지금은 유비가 제갈량과 같이 행복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유기는 쏟아놓듯이 말을 부었다. 유장이 듣고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유장씨.

너.

전 지금,

유장 씨가 보고 싶어요. 그게 다에요. 유기는 절박하게 이야기했다. 유장이 침묵으로 응답했다. 유기는 등을 등받이에 기댔다. 몸이 흘러내릴 것 같이 후들후들 떨렸다. 유장이 뭐라고 할까, 귓가에 온 신경이 쏠렸다.

...왜?

왜 유기야? 유장이 질문을 던졌다. 유기는 덜컥 겁이 났다. 뭐라고 대답해야 유장 씨가 마음 상하지 않지? 뭐라고 해야하지? 유기는 다시 초조해졌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대답을 알 수가 없었다. 자꾸 하나만 떠올랐다. 유기는 대답하기 위해 목소리를 쥐어짰다.

...모르겠어요.

......

모르겠어요 유장 씨...

...우리 집으로 와.

얼굴 보고 얘기하자. 뚝, 전화가 끊겼다. 유기는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 시가 급했다.

-

유장은 유기의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미리 말해 두지 않았으면 보안팀에서 걸러졌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옷은 구겨져있었고 머리는 약간이지만 흐트러져서 한두 가닥이 이마에 흘러내려 있었다. 눈도 충혈되어 있어서 잔뜩 피로해 보였다. 유장 씨. 그 와중에 유기는 웃었다. 마치 달콤한 것을 베어문 것처럼.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설레면서도 마음 한 쪽이 아렸다. 유기가 한 걸음 앞으로 디디면서 비틀거렸다. 유장은 유기의 팔을 잡아 부축했다. 술냄새는 나지 않았다.

...술이라도 마신 줄 알았는데.

음주 운전은 안 해요.

이 상태로 운전까지 한 거냐?

유기가 웃었다. 시시껄렁한 농담을 섞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유장은 비틀거리는 유기를 자리에 앉혔다.

너, 언제 잤어.

모르겠어요.

한 사흘 됐나...? 사흘. 사흘이면 자신과 통화한 그 날이었다. 유장은 입을 가렸다. 웃음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이상하게도.

좀 자고 얘기하자. 여기 있을게.

유장 씨.

유기가 유장의 손목을 붙잡았다. 간절한 것처럼.

유장 씨, 계실 거에요...?

응.

유기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이 참 고와서, 유장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분명히 싸웠는데 기분이 들떴다.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

유기는 눈을 떴다. 가물가물한 상태를 유지하다 발 밑이 떨어지는 것 같은 감각에 유기는 벌떡 이완되었던 몸을 일으켰다. 여기가 어디지? 왜 난 여기 있지? 탁, 하고 책이 덮이는 소리가 났다. 유기는 흠칫 놀라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장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제야 대강 기억이 났다. 통화를 하고, 급하게 운전해서 여기까지 와서는, 잠이 들었다. 유기는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허겁지겁 말을 주워섬겼다.

죄송해요, 제가, 잠들어 버렸네요.

응, 곤히 잘 자더라.

유기는 마른세수를 했다. 손에 딱히 걸리는 것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유기는 눈을 천천히 깜북이며 고개를 들었다. 유장이 물었다.

...왜 얘기하고 싶다고 한거야?

그게-

유기는 입을 떼려다, 다시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불꽃 축제 회의.

......

왜 더 안 오시려고 한 거에요?

말했잖아, 일이 생겼다고.

......

...그것 때문에 우선순위가 낮아질 일이 아냐. 그냥, 일이 생겨서.

저 때문이 아니고요.

유장은 말문이 막혔다. 정곡을 푹 찔러들어올 줄이야. 유기는 살짝 손을 뻗었다. 유기의 손끝이 유장의 손끝에 닿았다. 차마 손을 잡지 못해서 살짝 닿아오는 것 같아 유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유장 씨.

유기야.

......

이러지 마.

......

네 말마따나 네가 날 찼잖아. 이러면 안 되잖아.

유장 씨.

아니면 유기야.

유장이 살짝, 유기의 손끝을 눌렀다. 피아노 건반을 문지르듯, 살짝.

...나를 좋아하게 되기라도 했어?

......

유기는 침묵을 지켰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유장은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소태 같이 쓰디 썼다. 유장은 손을 거두었다.

...거봐.

......

아니잖아.

모르겠어요.

유기는 서글프게 중얼거렸다. 잠들지도 못하고 세 밤을 새운 유기는 입술을 살짝 짓씹었다.

유장 씨를 못 보게 되는 건 싫어요. 싫습니다.

.......

그런데 유장 씨를 보면서 유비를 볼 때랑은 너무... 다른 기분이 들어요.

...유기야.

두근거리고 설레는 게 아니라, 긴장 됩니다. 등이, 뻣뻣해져요. 저는 더이상 모르겠어요.

......

유장의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것이 기어올랐다. 유기가 뻗은 손을 거두어 얼굴을 문질렀다.

저는 이걸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초조하고, 긴장되는데.

......

이건 좋아하는게 아니에요 유장 씨.

이건, 이건... 유기가 말을 흐렸다. 유장은 목을 가다듬었다.

그거라도 좋다면.

...유장 씨?

내가 그게 좋다면, 어쩔래.

유장 씨?

유기와 눈이 마주쳤다. 유장은 발목에 뱀이 감기는 것 같은 서늘함이 들었다. 그 뱀이, 다리를 타고 올라서, 천천히 등허리를 타고 올랐다. 유기의 눈이 차갑게 가라 앉았다.

유장 씨.

유기야.

안 좋은 선택이에요.

내가 판단할게.

......

사귀자, 유기야.

유장 씨.

사귀자.

느릿하게 유기가 눈을 깜박였다. 속눈썹이 얼굴을 간질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장은 기다렸다. 침묵을, 정적을, 유기의 표정을 견디며. 기다렸다.

유장 씨가.

......

괜찮다면.

유기가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기의 눈이 번쩍이는 것을, 유장은 분명히 보았다. 유기는 유장 바로 앞에 섰다. 유기와 눈을 마주치느라 유장의 고개가 꺾여 있었다. 유기는 유장의 턱선에 손을 얹고 입을 열었다.

사귀어요, 우리.

그리고 허리를 굽혔다. 냉기가 입술에 내렸다.

-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다. 수많은 별들이 눈 앞에서 춤을 추다 공중으로 녹아내렸다. 그리고 다시 긴 효시 소리와 함께 하늘로 올라, 큰 소리와 함께 별들이 흩뿌려졌다. 예쁘네. 유장은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습기 가득한 공기가 폐까지 스며들었다가 다시 나가기를 반복했다. 문득 손에 보드라운 감촉이 닿아 유장은 고개를 돌렸다. 유기가 서 있었다. 유기는 굳은 표정을 하고 있다가, 유장이 고개를 돌리니 얼굴을 풀었다. 그리고 방긋 웃었다.

유장 씨.

......

좋아해요.

거짓말. 유장은 생각했다.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면서. 그러나 유장은 눈을 휘어 웃었다.

사랑해.

유기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사늘한 뱀이 다시 등허리를 올랐다. 유장은 유기에게 입을 맞추었다.

*끝. 유기유장은 이 상태로 결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기 영원히 못 깨닫다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함... 만약에 깨닫게 되면 유장이 드디어, 라고 생각할지 얘가 어디 아픈가? 라고 생각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결혼하게 되면 하객이 층위가 갈리게 되는 맛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앗 친구가 저 분이 그렇게 좋아? 라고 해서 특별히 좋은건... 아니지만... 결혼 하자고 하시니까 하는 유기는 좀 보고 싶네요 다들 눈이 야구공만한데 본인은 얼굴이 붉다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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