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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글 백업입니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특정 인물, 사건, 단체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리네이밍(이름 새로 붙이기)가 있습니다.
*약 15금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아주 약간입니다만.
탁, 탁, 탁. 갤리는 짜증스레 뒤를 돌아봤다. 자각거리는 키보드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라 노트북의 빈 플라스틱을 손톱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나고 있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저 망할 놈이 둘이서 통조림1 하자고 해 놓고 저만 놀고 있으니 갤리는 더더욱 열이 뻗혔다. 자신은 아직 마감 기간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나 어쩌랴. 둘의 출판사는 동일했고, 잘 나가는 작가님이 꼭 집어서 출판부에 갤리가 있으면 원고를 하겠다, 하는 식으로 말을 했다고 하니 덜 나가는 작가로써는 같이 얌전히 갇힐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잘나가는 작가와 갇히는 통조림이라 호텔방이라서 다행인건가. 아니 잠깐만. 갤리는 다시 자기 앞의 노트북에 집중하려다 안경을 벗고 책상에 팔을 괴며 엄지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는 마감 안 지킨 적 없으니까 통조림 당할 일도 없잖아. 빌어먹을 내가 왜-
딱, 하고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크게 한 번 났다. 뒤에서 다른 소리가 나지 않아서 갤리는 다시 안경을 쓰려고 했다. 그래 마감 일찍 하면 좋지 뭐. 그 다음 권까지 널널하고. 노트북에서 깜박거리는 커서를 다시 한 번 정리하고 타자에 손을 올리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안 되겠다."
"뭐?"
아니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여기에 갇혔는데. 갤리는 황당하게 뒤를 돌아봤다. 밝은 색의 금발 아래 깍지 낀 손이 딱 달라붙어 있었다. 팔꿈치를 천장을 향해 치켜들고 가느다랗고 하얀 팔을 나비모양으로 머리 옆에 들고선 뉴트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눕다시피 몸을 제끼고 있었다. 튼튼하기 짝이 없는 의자가 넘어갈 것만 같아서 갤리는 허, 하고 약간 불안한 숨을 쉬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아니 안 써지는 걸 어떻게 해."
"지금 그게 독자가 백만 명이 넘는 작가라는 놈이 할 말이냐."
아이작 뉴턴. 이 시대 최고의 작가. 평론도 하나 같이 최고점을 찍고 신작은 매번 전작의 베스트셀러 기록을 갈아치우며 나날히 주가가 상승하고 있는, 정점에 올라서 있는 소설가 중의 한 명이었다. 그에 비해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아예 못 해먹고 살만한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팔리고 있는 장르문학 소설 작가일 뿐이었다. 그러나 세간의 평가와 편집부에서 평가는 사실 정 반대였다. 아니, 더 심각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마감 이틀 전에는 정확하게 원고를 넘겨주는 성실의 아이콘. 담당과의 사이도 화목해 애칭인 갤리로 불리는데다 만날 때마다 담당이 사비를 들여가며 선물을 사들고 오는 남자. 그리고 아이작 뉴턴, 제 사전에 마감은 없다는 저 남자.
어떻게 된 것이 마감 날짜를 내어주면 까먹었다고 하기는 일수고 도망가기는 밥 먹듯이 하며 국외로 날아가는건 일상 다반사에 핸드폰 번호 바꾸기를 수차례. 정말 마감날짜를 잊어버렸으면 모르되 하루에 두 번 꼴로 언제가 마감인지를 알려줘도 모르는 척 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그냥 편집자를 엿먹이려는 공산일 가능성이 더 컸다. 담당이 갈리기를 몇 번이고 위염으로 입원한 사람은 이미 몇인지. 거물 작가 중 한 명이다 보니 이래저래 챙겨주는 것은 많았지만 담당은 뉴트의 얼굴만 봐도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저 얼굴에, 저 글 솜씨에, 저 성격이라니. 역시 세상은 공평하다고 편집부 사람들은 뉴트와 갤리를 비교해가며 말하고는 했다. 천칭저울은 아주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갤리는 그 소문을 듣고 미간을 조금 찡그렸지만, 그 뿐이었다. 왜냐하면 자신도 공감하고 있는 게- 저딴 게 자기의 애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너 이미 계약금도 받았고 공장도 돌아갈 준비 하고 있다며. 뭐 있냐. 써야지."
갤리는 한숨을 푹 내쉬고 히스테리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뉴트를 달랬다. 자기야아 하고 매달리는 뉴트를 어르고 달래서 원고 하게 한 적이 몇 번 있었더니 이젠 편집자들이 자기를 신으로 모시려고 들었다. 그게 더 열 받는 일이었다. 덕분에 통조림 신세가 되었지 않은가. 시발 그 때 덥썩 웬 떡이냐 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래서 지금 갤리의 말은 평소보다 좀 더 가시가 서 있었다.
"아니 근데."
"뭐, 또 왜."
"여기 이 씬을 못 해먹겠단 말이지."
뉴트가 쓰는 건 스릴러물이었다. 몇 권은 영화화도 된 적이 있는데 여튼 그건 차치해두고, 갤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뉴트 쪽의 책상을 짚었다. 그리고 뿔테 안경 너머로 뉴트의 노트북을 주욱 훑었다. 뉴트의 노트북에 떠 있는 워드프로세서 창에는 천재지만 사이코패스인 주인공이 이제 막 다섯번째 희생자를 해체하려고 들고 있었다.
"-뭐가."
"사람 몸이 그렇게 쉽게 잘릴리가 없잖아."
"그게 뭐."
너 그것 때문에 담당 분께서 해부학 책 다섯권이나 사다 줬잖아, 하고 갤리는 남은 손으로 노트북 옆에 펼쳐져 있는 해부학 책을 두드렸다. 뉴트가 조금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거로는 안 돼. 쓰다 보니까 알겠어."
인간을 그냥 뼈랑 근육으로 보면 안 되지. 그 위에 피부도 있고 피도 흐르고- 예쁜 빨간 입술에서 그로테스크한 소리가 줄줄 흘러나와서 갤리는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아, 하고 뉴트가 문득 탄성을 내질렀다. 그래도 뭔가 타협을 본 모양이었다.
"뭐."
"갤리."
"왜."
"벗어."
뭐 이 미친 놈아? 갤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
다행히 뉴트가 원하는 것은 갤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진짜로 갤리를 죽인 다음에 해체해 본다거나 하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에 못지 않게, 어쩌면 그것 보다 더 치욕스러워서 갤리의 턱은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여기가."
상완 이두근의 장두고- 뉴트가 갤리의 팔 안쪽을 슬슬 쓸었다.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스치고 지나가다 어느 순간에 근육을 푹푹 찔러대서 갤리는 움찔움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이 관절 명칭이, 여기에 뼈가, 하고 중얼거리는 뉴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속살거리는 것 같아서 갤리는 딱 죽고 싶었다. 알몸, 이라기 보다는 속옷 한 장 간신히 사수한 상태에서 애인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몸을 무슨 인체 모형 보듯이-그렇다고 지금 그런 짓을 하자고 하는 거면 더 곤란하지만-하고 있으니. 내가 왜 이 새끼랑 사귀고 있을까. 갤리는 진지하게 돌이켰다. 그리고 자신의 취향에 끊임없는 악평을 보냈다.
그러니까, 갤리는, 속되게 말하자면 얼굴을 밝혔다. 남녀 상관 없는 건 그렇다 칠 수 있었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건 얼굴을 밝힌다는 명제 그 자체였으니까. 원래 애들도 예쁜 사람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갤리는 어린 시절부터 그 정도가 심했다. 덕분에 부모님은 아주 걱정이 많았다. 갤리야 사람은 얼굴이 다가 아냐. 성격도 봐야지. 그건 그랬다. 얼굴은 아주 예쁜 나쁜 여자 때문에 고생한 적도 있었고 하룻밤 상대가 모텔비도 안 내고 지갑을 털어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얼굴 밝힘증은 고쳐질 줄을 몰랐고, 다만 그 선이 조금 내려갔을 뿐이었다.
그래서 출판사 파티에서 뉴트를 처음 보았을 때 갤리는 심장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잡티 하나 없는 매끄러운 피부, 조막만한 얼굴, 반짝이며 빛나는 허니 블론드, 뭔가를 칠한 것마냥 붉은 입술, 심지어 콧볼까지 완벽했다. 저거 사람은 맞는 건가? 갤리는 몇번이나 눈을 비볐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걸 알았는지 이 쪽을 쳐다보고 피식 웃을 때는 눈이 부셔서 고개를 돌려야했다. -그 놈이 화장실까지 쫓아와서 온 몸을 더듬으면서 나가자고 했을 때 걷어 찼어야 하는 건데. 갤리는 아직도 후회 중이었다. 아직도 다음날 아침에 얼얼한 허리를 믿지 못하면서 통성명을 했을 때를 갤리는 잊을 수가 없었다. 아이작 뉴턴이야, 이쁜아. 뉴트라고 불러. 그래, 이건 미친 놈이다. 갤리는 확실하게 실감했다.
아랫배를 손가락이 더듬는 감각이 들었다.
"야 어디까지 만지려고 해. 그만해."
"아 잠깐만, 그러니까 여기가."
뉴트가 해부학 책을 파라락 넘겼다. 그리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 왜 이놈은 얼굴 찡그리는 것도 이뻐. 갤리는 울상을 지었다.
"갤리 안 되겠어."
"뭐가 또."
"팬티도 벗어."
이 놈은 그래 진짜 미쳤다. 갤리는 소리를 빽 질렀다. 지를 수밖에 없었다. 아 니 몸 보던가! 그치만 내전근하고 대둔근이 연결되는 건 내 몸으로는 안 보인단 말야-
갤리는 이마와 눈을 손으로 감싸고 천천히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주근깨가 손에 걸리는 것만 같았다. 시발, 이놈은 대체 어디까지 미쳐야 정신이 그나마 한바퀴를 돌아서 제정신이 될런지.
"응? 갤리이."
흔히 제가 얼마나 귀여움 받는지 알고 있는 어린애나 여자들이 그러듯이 뉴트는 말꼬리를 길게 빼면서 갤리를 졸라댔다. 갤리는 시선을 조금 내려서 뉴트를 내려다 봤다. 이래도 안 해줄거야? 라고 묻는 듯이 긴 속눈썹에 감싸인 까만 눈동자가, 눈꺼풀이 깜박깜박 하고.
눈동자가?
"야."
"응? 응? 갤리?"
"너 눈이 맛이 간 것 같은데."
뉴트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그리고 뉴트는, 약간 부자연스럽게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들켰네?"
등줄기를 소름이 타고 올라왔다. 시발 좆됐다. 갤리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휙, 뒤로 제껴져서 등에 침대가 닿기 전까지는 진짜 그러려고 하기도 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갤리는 뉴트의 얼굴에 정말로, 정말로 약했다.
-
"갤리이."
"꺼져 미친 놈아."
집에서 쉴 거야. 갤리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아무리 승차감이 최고인 차로 집까지 모셔다줬다고는 하지만 정확히 마감 날짜까지 통조림 당하는 내내 글 쓰고 먹고 자는 최소한의 시간을 빼면 어떻게든 수작을 걸어볼까 전전긍긍하고 있던 애인놈을 갤리는 도저히 예쁘게 볼 수가 없었다. 온 몸이 근육통으로 쑤셨다. 집에 들어가서 일단 눈부터 붙이고. 24시간 내내 잘 거야. 갤리는 퀭한 눈으로 생각했다. 뉴트도 그래도 양심은 있는건지 한발짝 뒤로 물러나 주었다.
"...일어나면 바로 전화해?"
갤리는 차문을 닫고 손을 휙휙 저었다. 가라는 뜻이었다. 들어가는 거 보고. 뉴트가 멋있게 웃으며 핸들에 몸을 기댔다. 하여간에 똘추새끼. 가끔 저렇게 보여주는 면모 때문에 자신은 뉴트와의 관계를 못 끊는 걸지도 몰랐다. 저 성격은 얼굴에 그 면모까지 얹어야 간신히 저울이 평형을 이루었다. 빌어먹을. 갤리는 고개를 저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핑핑 도는 것 같았다.
탕, 하고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 뉴트는 핸드폰을 꺼냈다. 마지막으로 통화한 번호로 전화를 걸자 몇 번 신호가 가더니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네, XX 출판사입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상대방이 잠깐 침묵하더니 네에, 하고 말을 끌면서 대답을 했다. 뉴트는 조금 웃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우웅, 하고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마감 일주일 전에 넘겨서 좀 편하시죠?"
그러게 제가 말해 드린대로 해 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어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 먹고 알 먹고. 전화 저 편의 상대방은 또 잠시 침묵하더니 예에 하고 말을 끌면서 대답했다. 한 손으로 운전을 하면서 뉴트는 눈웃음 쳤다. 자신의 애인이 아주 좋아해 마지 않는 그 눈웃음을.
"그러니까 다음번에도, 아주,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뚝, 뉴트는 전화를 끊었다. 약간의 죄책감을 대가로 편집부가 얻어낸 편안한 마감 일정. 세상의 천칭저울은 아주 완벽했다.
- 통조림 : 은어. 마감이 임박한 작가 등을 특정 장소에 가두고 작품활동을 하게 하는 행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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