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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글 백업입니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특정 인물, 사건, 단체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뒤에서 눈보라가 현관까지 밀려들어오려고 해서 갤리는 문을 닫았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람소리가 문 밖에서 휘몰아쳤다. 아니 그렇게 바람이 세지는 않았다. 그냥 그렇게 들렸을 뿐이다.

날이 아주 많이, 추웠다. 혼자 먹기에는 많은 양의 음식이 들어있는 봉투를 거실 탁자 위에 내려놓고 갤리는 소파에 풀썩 주저 앉았다. 방 안은 어두웠다. 밖에서 눈이 날리고 있는 게 창문을 통해서 보였다. 째깍째깍 시계가 가는 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왔지만 특별히 난방기구를 튼 것이 아니라 내부도 바람만 피할 수 있다 뿐이지 온도가 낮기는 마찬가지였다. 갤리는 점퍼에 달려있는 털이 부숭부숭하게 난 후드를 뒤집어 썼다. 아마도, 꽤나, 곰같이 보이리라. 어차피 집에 아무도 없으니 신경 쓸만한 일은 아니었다.

「후드에 귀 달면 안 돼? 곰 같아서 귀여울 거 같은데.」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갤리는 옷속으로 손을 넣어 뒷목을 주물렀다. 눈을 감자 해사한 금발이 눈 앞에 반짝였다. 하얀 얼굴이 웃으며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자신보다는 머리 하나, 두개는 작은 그 얼굴이 바로 앞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면서, 눈꼬리를 휘고, 웃으며.

「하긴. 안 달아도 귀엽다.」

갤리는 눈을 떴다.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그 때는 여름이었다. 비가 잔뜩 오고, 공기는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고, 옷차림은 훨씬 가벼웠고, 한참 어렸다. 훨씬 더 바보 같고, 뭐든지 될 줄 알았고, 뭐든지. 네가 있다면 뭐든지 괜찮을 것 같았는데. 

날이 정말로 추웠다. 갤리는 뭔가 따뜻한 마실 것이라도 사오기 위해 현관을 향했다. 집에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비가 많이 오는 계절이 좋았다. 비가 많이오다가 그쳐서 더워지는 그 시점은 더 좋았다. 추위는 끔찍하게 질색이었다. 추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은 다 싫었다. 목구멍에서 숨이 하얗게 토해지는 그 시간은. 그 긴긴 밤은 정말, 죽어도.

벌컥 문이 열리자 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그리 강하지는 않은 바람이었지만 간신히 조금 녹았던 볼에 다시 칼날 같이 스쳐서 볼이 벌써부터 얼얼했다. 발을 옮기자 뿌득 뿌득 하고 눈이 뭉치는 소리가 났다. 그 때는 발소리가 더 강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느새 눈이 잔뜩 와서- 갤리는 고개를 저었다. 

대문을 닫자 철컹, 하고 문이 걸리는 소리가 났다. 바람이 두어번 더 치고 지나가는지 문에서 철컹, 철컹 하는 소리가 더 났다. 갤리는 흘끗 문을 뒤돌았다. 단단하게 잠겨있는 청색 대문. 열리지 않는, 뭔가의 철옹성같은 그 대문. -갤리는 아주 충동적으로 그 앞에 주저 앉았다. 그래, 이런 적이 있었지. 딱딱한 바닥에서 서늘하게 냉기가 올라와서 아무리 몸을 웅크려도 춥고, 춥고, 또 추워서.

「거기 있지 마.」

익숙한 목소리가 한 번 더 귓가를 울렸다. 분명히 환청인 것을 아는데도 가슴 한켠이 쓰라렸다.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질타하듯이. 

「나중에, 아주 나중에.」

언제? 너와 내가 죽고 난 후에? 세상이 끝난 다음에? 질문해댔던 것들이 떠올랐다가 잊혀졌다. 다시 생각나지 않아도 좋은 것들이었다. 이제는 그래도 괜찮은 것들이었다.

「그 때도 괜찮겠지.」

하얀 얼굴이 푸스스 웃었다. 매일 못생겼다고 자신을 놀려대던 얼굴이 빨갛게 얼어서, 눈가가 조금 부어서, 아니 짓물러서? 알 수 없었다. 제 눈가도 짓물러 있었기에. 새빨간 손이, 볼을.

가슴이 쓰라렸다. 지독하게 아파서 갤리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몸을 옹송그렸다. 춥다. 눈이 털 사이를 비집고, 아니 털에 들러붙었다. 찬바람이 점퍼 자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몸을 저며오는 것 같아서 갤리는 이를 악물었다. 춥고, 아프고, 울 것 같았다. 떨어져나갈 것 같은 코 끝이 지잉, 울려와서.

"-갤리?"

고개를 들자 남색 코트자락이 눈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당황스러운 톤을 띄고 어깨를 두드렸다.

"왜 나와있어. 언제 부터 있었던 거야? 어깨에 눈이."

"추워."

갤리는 대뜸 말을 끊었다. 어깨를 털던 손이 문득 멈췄다. 갤리는 다시 한 번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춥다고 똘추야.

"-일어나."

까만 장갑을 낀 손이 갤리의 팔을 잡아 끌었다. 갤리는 손에 이끌려서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간 삐딱하게, 한 발에만 무게중심을 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푹, 앞으로 기댔다. 장갑을 낀 손이 팔과 몸 사이로 파고들어 등을 끌어안았다. 등이 단단한 손으로 꾹 눌려와서 갤리는 킁,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코 근처에서 금발이 간질간질하게 흔들렸다. 바람때문일지도 몰랐다. 갤리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냈다. 그리고는 남색 코트의 등을 두 손으로 슬슬 쓸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너 내가 주말에 일 하는 거 싫어하잖아. 끝내고 오느라."

"...다음에는 좀 더 일찍 와."

"응."

알았어.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말했다. 갤리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얼어붙은 숨이 바람에 흩어졌다. 지금은, 그래도 좀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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