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2014년 글 백업입니다.
*굉장히 한국적인 배경 죄송합니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실제 인물, 사건, 기업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갤리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주 5회, 월, 수, 금, 그리고 주말. 야간 알바였기 때문에 구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밤에 편의점을 지키고 있다 보면 별의 별 일이 다 일어난다. 그나마 이 근처는 주택가였기 때문에 그닥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축에 속했다. 그러나 일어나는 것은 일어나는 거고, 한가한 시간도 오래 존재했다. 대부분의 편의점 아르바이트 생들은 그 시간을 이용해 동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좋을 대로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그건 갤리도 마찬가지였다.
이어폰을 끼고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갤리는 문득 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핸드폰도 주머니에 쑤셔넣고 이어폰도 뽑았다. 단골 손님이 올 시간이었다. 월, 수, 금, 그리고 주말. 이 시간이 되면 꼭 딸그랑 거리는 방울 소리와 함께 손님이 들어왔다. 어서오세요, 하고 갤리는 습관적인 인사를 했다. 금발의, 키가 크고, 하얗고, 입술은 붉고, 아주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였다. 날이 쌀쌀해지면서 남자는 양복 위에 검정색 코트를 입고 다녔다. 이름은 뉴트 아이작, 회사원이었고, 나이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남자가 사는 것은 항상 똑같았다. 레몬 향이 나는 탄산이 없는 음료수 한 병, 작은 쿠키 하나. 그리고.
"켄트 컨버터블 하나."
그렇게 잘 팔리는 편이 아닌 담배 한 갑. 갤리는 뒤로 돌아서 능숙하게 담배를 골라냈다. 켄트, 컨버터블. 중간에 박하향이 나는 게 들어갔다는 담배. 커다란 손에 맞지 않다고 느껴질 정도로 작은 담배갑을 쥐고 갤리는 바코드를 찍었다. 삑. 빨간 불이 스치고 지나갔다. 삑, 레몬향 음료수. 삑, 작은 쿠키. 삑, -시트러스 향이 나는 따뜻한 음료수 한 병 더.
"-7천 9백원입니다."
평소보다 한 종류가 늘어나 있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오는 길에 뭔가 있었던 걸까. 갤리는 조심스레 추측했다. 여기요, 하고 카드를 내미는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예쁘고, 무표정하고. 아니 무표정 하지 않았다. 카드를 긁으면서 갤리는 흘끗 손님을 쳐다보았다. 무례할 수도 있지만, 그 예쁜 얼굴이 방글방글 웃는 건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갤리 갈릴레오 씨?"
"예?"
갤리는 조금 당황했다. 내 이름을 안다? 왼쪽 가슴에 명찰을 차고 있다는 걸 갤리는 아주 느리게 깨달았다. 예에, 하고 길게 뺀 대답을 흘리자 뉴트가 다시 말했다.
"그저께 이사오신 분 맞으시죠?"
저희 앞 집. 인사 오셨었죠? 방긋 웃는 얼굴이 말했다. 갤리는 정신이 혼곤해질 것 같았다. 아마, 그럴 걸요. 어제부터 시작하셨어요? 이사오자 마자? 대학생? 휴학, 생이요. 부지런하시네. 칭찬 감사드립니다. ...사인 부탁드립니다. 웅얼웅얼 말하자 아차, 하고 뉴트가 전자 패널에 사인했다. 영수증에 사인이 찍혀나왔다. 사인마저 예뻤다.
"영수증은."
"버려주세요. 아."
이거, 하고 하얗고 마디진 손이 더운 음료수를 내밀었다. 예? 하고 갤리가 얼빠진 얼굴을 했다. 하하. 뉴트가 웃었다.
"드세요. 날 추울텐데 고생이 많으시네요."
갤리는 멍하니, 턱을 떨궜다. 주근깨 가득한 얼굴이 어떻게 보였는지 뉴트가 한 번 더 소리내어 웃었다. 나중에 또 봐요, 음료수와 쿠키, 담배를 든 손이 문을 밀고 나갔다. 인사도 못했다는 걸 갤리는 아주 늦게 깨달았다.
갤리는 빈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다가 옆자리를 뒤적였다. 노트가 한 권 나왔다. 빳빳한 노트를 한참 넘겨서 갤리는 빈 자리를 찾아냈다. -노트에는 영수증이 몇개나 붙어있었다. 버려주세요. 몇 번 들었었지? 아마도 이 영수증들의 장수만큼. 그리고 그보다 더.
갤리가 뉴트를 처음 만난 것은 카페였다. 위치는 비슷했다. 카페 아르바이트생 갤리와, 손님 뉴트.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처음에 들었던 감정은 그냥, 예쁜 손님이네, 여자친구랑 있으면 비교 되겠다. 하는, 딱 그런 정도였다.
회사 근처에 있는 카페가 다 그렇듯이 손님은 반복적으로 왔다. 단골이 많다는 소리였다. 점심시간, 퇴근 시간, 사람이 유독 붐비는 때가 있었고 그럴 때는 아주 밑도 끝도 없이 바쁘고는 했다. 점심시간이 끝날 즈음, 한숨을 돌리고 직원들이 점심을 먹으려고 할 때. 그 때 즈음해서야 뉴트는 손님으로 오곤 했다. -아니, 처음에는 아예 엉뚱한 시간이었었다. 3시인가, 그 애매한 시간. 남자는 포켓에 사원증을 꽂고, 한숨을 푹 쉬면서 주문을 했다. 아메리카노 아홉 잔이랑 레모네이드 한 잔이요. 전부 시럽 빼고. 아 이사람 뭔가 내기 했다가 졌구나. 시럽 뺀 아메리카노 아홉잔이랑 레모네이드 한 잔이요. 갤리는 주문을 한 번 더 반복하고 계산을 받았다.
다음날, 두 시. 그 다음 날. 한시. 그 다음날. 열 두시 오십분.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줄곧 한시 십분. 하루도 빼 놓지 않고, 최소한 갤리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날에는 매일 남자는 도장을 찍듯이 꼬박꼬박 카페에 나왔다. 레모네이드 한 잔이요. 시럽은 빼고요? 매일 반복되는 주문에 되묻자 남자가 웃었다. 하하, 네. 시럽 빼주세요.
뭐 하는 사람일까, 이름이 뭘까, 여직원들의 수다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사원증 걸고 있는 거 봤어. 대기업이더라. 이름은, 뉴트 아이작. 갤리의 뇌가 물먹는 스펀지처럼 정보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왜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회원카드, 만드실래요? 그래줄래요? 갤리는 핸드폰 번호를 알아냈다. 카드를 만들어주고도 그 작은 기록을 버리지 못해서 그 빳빳한 명함같은 종이는 갤리의 노트 앞에 깔끔히 붙어있었다. 뉴트 아이작, 그 이름이 필기체로 예쁘게 써 있는 그 종이를. 그게 문제였던 게 아닐까.
Sns를 검색해 보았지만 당사자는 나오지 않았다. 아마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뭐하는 분이세요? 어디 살아요? 몇 살이에요? 질문들이 목에 걸린 것마냥 덜렁거렸다. 그렇지만 나오지는 못했다. 뭔가가 목구멍을 꽉 누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물어보아서는 안돼는 것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알고 싶었다. 왜? 대답을 찾기도 전에 갤리는 뉴트가 버려달라고 한 영수증들을 차곡차곡 모으기 시작했다. 사인을 하던 손가락, 카드, 내리깐 까만 눈. 카페에서 이벤트가 시작되고 갤리는 문자를 돌렸다. 모든 사람들에게, 동시에, 전자적으로. 딱 한통을 제외하고. 그 한 통은 갤리의 핸드폰에서 갔다. 텀블러를 사용하면 할인된다는 내용의 그 문자를 갤리는 전화번호를 바꾸어서 보냈다. 당연하지만, 답장은 없었다. 그 다음날부터 뉴트는 텀블러를 가지고 왔다.
-거리를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치지만 않았더라면 거기서 끝났을 수도 있는데. 회사 거리를 지나가다가, 마주쳐서, 그는 갤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당연한 것이었다. 단골이기는 하지만 갤리가 항상 카운터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흔한 프랜차이즈 카페이기도 했으니 인상은 더욱 희미하리라. 그리고, 갤리는 왜인지 모르게 그의 뒤를 밟았다. 조금 떨어져서, 쓰고 있던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그냥, 어디를 가는지가 궁금했다. 당신은 어디를 다니나, 어디에서 무엇을 하나. 그냥, 그냥 궁금해서. 그냥. 그렇게 근 다섯시간, 갤리는 뉴트의 뒤를 밟았다. 아주 조용히, 그러나 심장이 터질 것처럼.
그게, 석달 전의 일이었다. 두달 반 전까지는 매일매일, 그 마주쳤던 자리에서 조용히 지켜보다 뉴트가 오면 뒤를 밟았다. 두달 전에는 텀블러 아래에 gps를 붙였다. 한달 반 전, 뉴트의 집 우편함을 뒤졌다. 러브레터 같은 건 없었다. 소포라고 할 만한 것도 딱히 없이 지로 영수증과 카드 납부 영수증이 한가득이었다. 한 달 전부터는 gps를 따라 뒤를 밟다가 뉴트의 집 현관 비밀번호를 알아냈다. -그리고 어제는 아무도 모르게, 뉴트의 집에 들어가서 초소형 카메라를 설치하고 나왔다. 삑, 삑, 삑, 삑, 버튼 네 개를 누르고 캡을 닫자 경쾌하게 울리던 기계음. 쇠끼리 서로 맞물리는 소리. 조심스레 들어가서, 천장의 한 구석에 작은 카메라를 달았다. 핸드폰으로 볼 수 있게 해 두었다. 보이는 범위에는 방 한 칸, 방에 딸려 있는 2인용 정도 되는 작은 탁자가 있는 부엌 부엌, 화장실까지 들어가는 길목. 아직 침실까지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갤리는 노트를 덮고 다시 핸드폰을 켰다. 생각해보니 오늘, 도청기를 설치하려고 한 걸 잊고 있었다. 갤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도 되는 걸까. 뒤늦은 생각이 다시 들어서 눈을 깜박였다. 등골이 서늘했지만 이미 멈추기에는 너무 늦었다.
방 안은, 아직 들어가지 않았는지 어두웠다. gps를 확인해 볼까, 하고 생각을 하는데 문이 열렸다. 현관 위에서 깜박 깜박 노란 불이 빛나고 뉴트가 신발을 벗었다. 구두 한켤레가 현관에 놓였다. 목도리를 벗은 뉴트가 현관 바로 옆 거실 벽에 목도리와 코트를 벗어서 걸었다. 탁자 위에 음료수와 쿠키를 내려놓은 뉴트가 방으로 들어갔 -어? 갤리는 눈을 깜박였다.
어제, 현관이 보였던가?
'2.5D > 메이즈러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뉴트갤리] e molto ben trovato 삭제컷 (0) | 2023.01.22 |
---|---|
[뉴트갤리] E molto ben trovato (0) | 2023.01.22 |
[뉴트갤리] 블랑제리(boulangerie) (1) | 2023.01.22 |
[뉴트갤리] Bespoke (3) | 2023.01.22 |
[뉴트갤리] 7:18 (2) | 2023.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