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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글 백업입니다.

 

캐리님(@carrymint)이 주신 썰을 소설로 풀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비가, 아주, 아주 많이 오는 저녁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라 그런지 아직 해가 다 지지 않았는데도 바깥은 밤이 된 것 마냥 어두웠다. 여름의 집중호우는 길고도 거세서 한 번 집 안에 들어갈 사람들은 다시 나올 엄두를 못 내고는 했다. 갤리는 가게를 조금 일찍 닫기로 했다. 어차피 이제 남아있는 제품도 거의 없는데다 손님들도 올 것 같지 않고, 신제품을 개발해야 할 시기이기도 했으니까. 문패를 close가 밖에서 보이도록 뒤집어 놓고 갤리는 가게를 정리했다.
페스츄리는 숙성시간이 있는 빵 중에 하나다. 퍼프와 데니쉬, 아메리칸과 프렌치, 어느 쪽이던 간에 냉장고 안에서 충분한 휴지를 거쳐야했다. 갤리는 오븐 온도를 맞추고 미리 냉장고에 넣어놓은 반죽을 꺼냈다. 퍼프 페스츄리를 만들 생각이었기 때문에 몇 번이고 다시 꺼내서 반죽을 밀어야 했다. 랩을 떼어내고 밀대로 반죽을 밀고 또 밀었다. 적당한 두께가 되고 나서야 조금 어깨가 쉴 수 있었다. 그래봤자 아주 잠깐이고, 금방 또 반죽을 썰어야 했지만. 틀에 잘 자른 페스트리를 넣고 속 재료를 채워 넣었다. 뭐가 좋을지 몰라 일단 라즈베리 잼, 크림치즈와 커스터드의 믹싱, 잘게 썬 사과 사탕을 각각 두개씩 채워넣었다. 마지막으로 사과를 올리는데 딸랑딸랑, 하고 문 앞에 달린 방울이 울렸다. 분명히 문패를 뒤집어 두었던것 같은데. 칸막이 대용으로 쓰는 유리 너머를 내다 보자 물이 뚝뚝 떨어지는 길지 않은 금발이 현관 근처에 서 있는게 보였다. ...저 똘추가. 갤리는 속으로 한탄하며 다듬지 않은 빵반죽을 예열한 오븐에 넣었다. 어차피 시제품이라 아직은 모양이 그렇게 예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었다. 아마.
"야."
"갤리."
뉴트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천사 같은 얼굴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져 내려서 갤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 날씨에 우산도 없으면 집으로 가던가, 이 똘추야."
"신제품 만든다며."
그럼 이리로 와야지. 가도 너 집에 없을 거고. 당연한 것처럼 말하며 눈을 깜북이는 얼굴이 지나치게 예뻐서 갤리는 그 얼굴에 수건을 던졌다. 아주 가끔 이렇게 쓸 일이 있어서 딱 두 장 놓는 수건이었는데, 오늘따라 지나치게 유용했다. 물기 잘 닦아. 닦아줘. 저 뒤통수를 때릴까, 하다가 갤리는 그러는 대신에 수건으로 작은 머리통을 꾹꾹 눌렀다. 아파, 하고 뉴트가 조금 징징댔지만 무시했다. 갤리가 뒤돌아서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자 뉴트는 당연한 것처럼 갤리를 따라 주방 안으로 들어왔다. 주방 안의 넓은 네모난 탁자의 사방에는 의자가 놓여있었다. 뉴트는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꾹꾹 누르며 갤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갤리는 주전자에 물을 채우고 가스렌지 위에 올렸다. 밀크티? 뒤를 돌아보며 묻자. 어어, 하고 대답이 돌아왔다. 기다려, 하고 다른 작은 냄비에 갤리는 우유도 올렸다. 바지런히 찻주전자에 차를 넣고 컵을 꺼내는데, 등 뒤에서 뭔가가 허리를 감았다. 어깨부터 등이 전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뉴트."
"왜애."
"떨어져라."
키득키득 웃는 진동이 등을 타고 전해졌다. 잠깐만 이러고 있자. 속닥속닥 귓가에 느른하게 뉴트가 속삭여서 갤리는 한손으로 눈을 가렸다. 눈썹부터 눈이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뒤에서 달라붙은 뉴트에게는 별로 상관 없었다. 자기보다 십센티미터는 더 큰 갤리의 귀가 빨간게 정통으로 눈에 들어와서 그것만이 귀여울 따름이었다. 귀여워라. 누가 이 커다랗고 곰 같은 애인을 잡아가면 어쩌나 뉴트는 걱정되었다. 물이 부글부글 끓으면서 주전자가 삐익, 하고 소리를 질렀다. 떨어져.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 단호한 목소리가 말해서 뉴트는 순순히 손깍지를 풀었다. 아깝네, 하고 중얼거리며 조금 입맛을 다시기는 했지만 여튼, 뉴트는 순순히 떨어졌다. 애정이 담긴 밀크티를 먹고 싶다면 조금 참을 줄은 알아야 했다.
따뜻한 우유와 차가 섞이는데 오븐 옆에 붙어있는 타이머가 울었다. 이런, 하고 갤리는 찻잔을 거칠게 뉴트 앞에 내려놓고 오븐으로 달려갔다. 뉴트는 잠깐 입을 열었다가 그냥 한숨으로 마무리지었다. 갤리가 진로를 선택할 때 자신이 몇 번이나 졸라댄 쿠키와 케이크, 버터와 설탕과 밀가루와 계란이 버무려지는 수많은 과자들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 이럴 때면 과연 빵이 먼저인가 내가 먼저인가, 하는 여자들이나 할 만한 고민이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이럴 거면 아까 떨어지지 말고 좀 더 더듬을 걸 그랬나, 하고 뉴트는 뜨거운 차를 목구멍으로 넘기며 생각했다. 갤리가 탁자 위에 빵 틀을 내려놓았다. 예쁜 갈색으로 변한 페스츄리가 색색가지 속을 반짝였다. 뉴트는 느른하게 눈을 깜박였다.
"페스츄리네?"
"-뭐."
"이번 신상품은 쿠키 종류라며."
"...마음이야 바뀔 수도 있는 거지."
흐응. 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찻잔으로 입을 가리고 갤리를 올려다 보았다. 서 있는 갤리의 얼굴은 주근깨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엊그저께 페스츄리가 먹고 싶다고 지나가면서 흘린 걸 기억했나. 찻잔으로 가린 입이 지나치게 웃고 있을까봐 뉴트는 걱정되었다.
"나 한 입만."
"페스츄린 뜨거울 때 맛 없어."
"넌 빵 싫어하면서. 한 입만."
조심스레 꺼낸 빵에 묽은 살구잼으로 광택을 내던 갤리에게 뉴트는 고개를 올려서 말했다. 일부러 손으로 턱을 괴고, 응? 하고 물어보았다. 갤리는 이 얼굴에 유독 약했다. 잠시 얼굴을 찡그리면서 쳐다보던 갤리는 한 입만이다, 하고 어색하게 말했다. 그래서 뉴트는 아, 하고 입을 벌렸다.
"...넌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아아."
몇 번이나 몇번이나 구박하지만, 결국은 나한테 질 거면서. 갤리는 뜨끈뜨끈한 라즈베리 잼 페스츄리를 한 입 크기로 뜯어내서 뉴트의 코 앞으로 가져갔다. 높은 온도의 라즈베리 잼은 점성이 낮아 당장 물처럼 흘러내릴 것 같았다. 뉴트는 갤리의 손목을 쥐고 약간의 페스츄리와 붉은 라즈베리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쵹, 하고 갤리의 손가락을 일부러 살짝 빨아들였다. 똑똑히, 갤리의 얼굴을 보고는, 뉴트는 모른척 뒤로 물러났다. 야, 너. 갤리의 얼굴이 붉은 걸 눈짓하면서 뉴트는 다시 찻잔을 들었다. 응, 맛있다. 뉴트는 방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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