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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가 그날 바에 간 것은 다분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을 뿐더러 바에 앉아있으면 사람들이 자꾸 말을 걸어오는 것도 별로였다. 가끔가다 술이 마시고 싶어질 때면 그래서 집에서 병을 뜯는 것을 택했다. 그러나 오늘은 좀, 달랐다. 언제부터인가 끼쳐오는 무언가 잊어버렸다는 공허함이 잘 사라지지 않았다.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기분. 일도 손에 잘 잡히지 않았고 모든 것이 지루했다. 그럭저럭 일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유기는 평소와는 다른 방향으로 핸들을 틀었다. 드라이브라도 하고 들어가지 뭐. 태평하게 생각하면서. 그러나 도심 한 가운데서 드라이브를 나가 보았자, 어느 정도 이상 달리지 않으면 또 도심이 이어질 따름이다. 비슷비슷하게 펼쳐지는 간판들 사이에서 유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집에 갈 걸 그랬나 싶다가도 어딘지 모를 갑갑함에 고개가 저어졌다. 유기는 다시 신호에 맞추어 엑셀을 밟고 핸들을 돌렸다. 그리하여 어딘지 모르는 곳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물론, 그래봤자 도심이었지만.
오래 운전을 해서인지 목이 말랐다. 그러나 주변은 식당가인지 그 흔한 편의점 하나가 없었다. 카페라도 하나 있을 법 한데 영 눈에 띄지를 않았다. 하긴 이 시간에 커피를 마시면 내일이 힘들긴 하겠지. 유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상가들을 눈으로 훑었다. 상가 2층에 바가 보인 것은 그 때였다. 어떤 바라도 무알콜 칵테일 하나 정도는 갖추고 있을 것이고, 정 아니어도 칵테일을 시킨 후 물 한 잔을 부탁하면 될것이다. 물론 물 한 잔의 값치고는 비쌀 테지만, 술보다야 나으리라. 유기는 적당한 곳에 차를 대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계단을 한 칸 오를 때마다 뒤에서 울리는 웅성거림과 음악소리가 한 걸음씩 멀어졌다. 문을 열자 잔잔한 클래식이 다른 소음들을 지웠다. 어서오시라는 말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확실히 오픈시간이긴 한 모양이었다. 유기는 바텐더 바로 앞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식당가에 있는 바라서 그런지 확실히 사람이 적었다. 바텐더가 메뉴판을 내밀었다.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유기는 바텐더 뒤에 진열되어 있는 다양한 술들을 보다 웃으며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메뉴판은 펴보지도 않았다.
아무거나, 무알콜로 한 잔이요.
오.
바텐더가 빙긋 웃었다.
술은 싫어하시는 모양입니다.
운전을 해야 해서요.
저런.
바텐더는 조금 웃더니 쉐이커에 이런저런 음료를 넣었다. 그리고 절도있는 동작으로 쉐이커를 흔들었다. 얼마 안 있어 음료가 나왔다.
신데렐라입니다.
유기는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신데렐라처럼 보이나 봐요?
신데렐라를 기다리는 왕자님이실 수도 있죠.
말은 잘 하네. 그렇게 생각하며 유기는 음료를 입에 머금었다. 새콤한 신 맛이 입에 퍼졌다. 입맛이 조금 도는 느낌이었다. 그제야 유기는 제가 저녁도 걸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점심에도 비빠서 먹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저녁까지 못 먹었다. 맹렬하게 배가 고파왔다. 내려가서 뭔가를 먹고 갈까? 그러나 이 근처 식당가는 혼자 뭘 먹을만한 종류의 음식은 팔지 않는듯 했다. 집에 가서 대충 차려먹을까 싶긴 했지만 그건 또 귀찮은데다, 어딘지 모를 곳까지 왔으니 네비를 찍고 간다고 해도 시간이 꽤나 걸릴 것이었다. 유기는 옆에다 밀어놓았던 메뉴판을 처음으로 펼쳐보았다. 안주류 중에 식사를 때울 만한 게 있겠지. 그리고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볶음밥이었다. ...어? 볶음밥? 의외로 고급스러운 편인 바에서 팔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 음식이었다. 뭐 그래봐야 냉동식품이겠지. 그러나 유기가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다른 음식은 죄다 정말 안주류였기 때문에 유기는 볶음밥을 주문했다.
주문하고 나서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자, 주방으로 보이는 곳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신데렐라를 기울이며 고개를 돌리자 한 청년이 유난히도 피곤해 보이는 모습으로 한 손에 접시를 들고 다른 손으로 포렴을 걷으며 나타났다. 청년은 주변을 둘레둘레 둘러보다가 문득 유기와 눈이 마주쳤다.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기분이 안 좋은가? 유기는 손톱으로 두어번 바를 두드리며 생각했다. 청년이 성큼성큼 걸어 유기의 눈 앞까지 다가왔다. 청년의 머리에는 두건처럼, 하얀 수건이 씌워져 있었고 콧잔등과 눈 밑에는 흉터가 나 있었다. 일자로 꾹 다물린 입술이 무뚝뚝해 보였다. 허리 밑으로 둘러진 까만 앞치마 밑으로 신발의 잔등이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셔츠를 걷어서 근육으로 꽉꽉 들어찬 팔뚝이 그대로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 팔뚝이 그대로 유기 쪽을 향했다.
...볶음밥 나왔습니다.
달칵. 바 위에 그대로 접시가 올라 앉았다. 유기는 홀린듯 청년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청년은 그런 유기를 신경조차 쓰지 않고 뒤돌아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유기는 약간, 어안이 벙벙하여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주방에서 떼지를 못했다. ...홀린 것일지도 모른다. 유기는 몸을 푸르르 떨었다. 손님? 바텐더가 유기를 불러서 유기는 정신을 차린 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 위의 볶음밥을 마주했다.
그래봐야 냉동일 거라는 유기의 유장은 좋은 쪽으로 빗나갔다. 계란은 곱게 풀려서 하나 덩이지지 않았고 베이컨은 일정한 크기로 쫑쫑 썰려 있었으며 파는 향이 잘 나도록 익었으되 타지 않았다. 유기는 수저를 들면서도 자신이 보는 게 볶음밥 모형이 아닌지를 약간 의심했다. 뒤적거리자 김이 무럭무럭 올라왔다. 유기는 한 술 크게 떠서 입이 집어넣었다. 썩 괜찮은 맛이 났다. 만화에서처럼 미미를 외칠 정도는 아니지만 간도 알맞았고 밥도 고슬고슬 했다. 상당히 맛이 좋았다. 유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또 한 술을 입으로 밀어넣었다.
시장이 반찬이라 그렇다고 하기에는 볶음밥은 끝까지 맛있었다. 유기는 한 모금 남은 신데렐라로 입가심을 하고 물을 한 잔 청했다. 바텐더는 웃으며 얼음물에 레몬 조각을 띄워 내밀었다.
맛이 어떠셨나요?
...생각보다 훨씬 괜찮네요.
유기는 잠시 재보다가 솔직하게 답했다. 사실 재보고 말고 할 것도 없지만, 경영인의 감이라는 게 있으니까. 바텐더는 좀 전처럼 웃다가 약간 음흉한 듯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혹시 한 잔 더 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예? 아,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차를 가져와서요.
유기는 조금 얼떨떨해서 물었다. 매너 좋은 바의 주인인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바텐더가 다시 웃었다.
아뇨, 무알콜로요. 제 후임이 아직까지 손님분들께 만들어드린 적이 없어서 연습 삼아 한 잔. 제가 사는 걸로요.
바텐더가 생글생글 웃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어정쩡한 자세로 잠시 굳었던 유기는 다시금 자리에 주저 앉았다. 바텐더는 눈을 휘어 웃었다. 그리고 다른 쪽을 향해 약간 소리 높여 외쳤다.
유장아.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주방하고 연결된 바의 포렴이 걷혔다. 아까 볶음밥을 가지고 나왔던 두건을 뒤집어 쓴 청년이 주방과 바의 경계에서 입을 떼었다.
부르셨어요?
응. 칵테일 한 잔 만들어 보라고.
예?
손님,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신가요?
척 봐도 청년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이름이 유장이었구나. 유기는 태평하게 생각하며 아까와 같이 주문했다.
무알콜로, 아무거나 한 잔 주세요.
네에.
그리고 두사람 분의 시선이 주방 청년-유장에게 쏟아졌다. 유장은 잠시 그 시선들을 받다가 느리게 주방에서 바 안 쪽으로 발을 떼었다. 발짝 소리가 들릴 것 같을 정도로 느린 동작이었다.
초보라는 말이 농담은 아니었는지 쉐이커를 잡는 손이나 음료를 재는 손짓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아까 바텐더가 쉐이커를 흔들던 손놀림에는 비교도 할수 없었다. 맛은 별 기대를 하지 말아야겠네. 유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예의 레몬물로 목을 축였다. 잠시 후 그럴듯 하게 생긴 잔에 연녹색 이파리와 과일 슬라이스가 올라간 음료가 한 잔 나왔다. 유기는 데코가 되어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바텐더가 유장의 옆구리를 찔렀다.
...무알콜 모히토입니다.
그제야 청년은 음료의 이름을 말했다. 유기는 방긋 웃으며 잔을 들었다.
잘 마실게요.
그리고 목을 축였다. 유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음료는 맛있었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맛있었다. 너무 시지도 달지도 않고 딱 적당한 맛에 뒷맛이 깔끔했다. 저도 모르게 맛있다는 탄성이 나올 수준이었다. 초보자의 행운인가? 이런 맛을 꾸준히 낼 수 있다면 단골이 될 텐데.
장이가 잘 하죠?
바텐더가 생글생글 웃으며 유기에게 동의를 구했다. 유기는 고개를 끄덕였고 청년은 무안한 듯 뒷머리를 긁었다.
좀 동작이 어색하긴 하지만 감이 좋아서... 좀 더 연습하면 잘 할텐데 말이죠.
유기는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이며 잔을 비웠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마셨습니다. 결제 부탁드려요.
네. ×××××원입니다.
유기는 카드를 건넸다. 바텐더가 결제하러 사라진 사이 청년과 유기 사이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유기는 코트를 걸치고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편안해보이기도 했지만, 피곤해보이기도 했다.
연습 상대 필요해요?
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갔다. 유기는 자신을 보는 유장의 시선을 침착한 척 감내하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리고 유장이 시선을 떼었다. 바텐더가 돌아와 카드와 영수증을 건넸다. 유기는 뒤돌아서 바를 나갔다. 2층의 바에서 내려와 유기는 차에 올라서 시동을 걸었다. 금세 걸리는 시동 소리가 경쾌했다.
그리고 전혀 괜찮지 않은 기분이었다.
유기는 며칠을 더 회사에서 보냈다. 그건 버텼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나날들이었다. 유기는 출근했고, 일했로, 퇴근했다. 혼자하는 일이 아니다보니 사람들도 만났고, 웃어젖혔고, 술도 마셨다. 그러나 괜찮지 않았다. 전혀, 멀쩡하지 않았다. 어디 한 군데를 멍키 스패너로 비틀어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혹은, 멍키 스패너로 후려 쳤던가. 풀린, 망가진 나사를 따라 뭔가가 줄줄 새 나가는 느낌이었다. 잊어버리면 안 될 것을 잊어버린 감각. 그 소름. 유기는 눈을 감았다 떴다. 정신을 차리니 금요일 저녁이었고, 자신의 발은 그 바 앞에 있었다. 택시를 타고 왔는지 어쨌는지, 차를 어디에 두었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유기는 잠시 서성이다, 발길을 반대로 돌렸다.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본인에게도 상대에게도 뭔가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은. 가까이 하면 안 될 것에 다가가는 것 같은 그런 기분. 밥이나 먹고 집에 가자. 유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억지로 억지로 발을 떼었다.
그리고 다시 바 앞으로 돌아온 것은 열두 시가 넘어서였다. 밥도 먹었고, 차도 마셨다. 이 근처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찾아서 한 것이었다. 혼자 먹을 수 있는 밥집도 없진 않았다. 좀 많이 찾아야 하긴 했지만. 카페도 없진 않았다. 역시 좀 더 찾아야 했지만. 그러다보니 시간은 늦어졌고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도 유기는 그 바 근처를 떠나지 못했다. 유기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쉴 때가 되었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자기 제어가 안 되는 것은 처음이라 절로 혀가 차졌다. ...처음인가? 짧게 고민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피곤했다. 더 이상 생각하는 것도 귀찮아서 유기는 재빨리 결정했다. 여기서 술을 좀 마시고, 집에 들어가서 자자. 유기는 그렇게 생각하고 문을 열었다. 바 안에는 듬성듬성 사람들이 있었다. 테이블에서 마시는 사람들도 있었고, 작은 바 앞에도 몇 명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도 한 사람 앉을 자리는 있었다. 유기는 바 앞에 앉았다.
또 오셨네요.
...아, 네.
바텐더가 살갑게 말을 걸었다. 유기는 조금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무알콜로 하시겠어요?
아뇨, 오늘은... 위스키 종류로 추천 부탁드립니다.
빨리 적당히 취한 다음에 가는 게 목표였으니 독한 술이 좋았다. 칵테일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래도. 바텐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종류를 추천했고, 유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드릴까요. 잠시 후 유기가 고른 대로 큼직한 잔에 얼음과 술이 같이 담겨 나왔다. 유기는 손 안에 뿌듯이 차는 잔을 쥐고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벌써부터 취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유장은, 주방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서빙을 담당하는 사람이 원래 따로 있었는지, 아니면 그 사이에 뽑은 건지, 부지런히 주방과 홀을 오가는 사람이 있었고 유장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만 두었나? 유기는 온더락 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그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얼굴이 보고 싶었다. 뭔가를 하고 싶다기 보다는, 말을 걸고 싶다기 보다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 지쳤고, 힘들었고... 유장을 보면 기운이 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얼굴이 괜히 보고 싶었다. 처음 본 사람인데도. 유기는 멍하니 있다가 메뉴판을 읽기 시작했다. 안주류의 맨 위에는 여전히 볶음밥이 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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