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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주 가끔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을 잊어버렀다가 다시 떠올리는 것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어느 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고 그저 살살, 머릿속을 간지럽히기라도 하듯이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만 들어서 조조는 날이 갈수록 피로해졌다. 잃어버린 것 따위, 잊어버린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혹여 잊어버렸다면 아무래도 좋을 것이었다. 대단찮은 것일 게 뻔했다.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적었고, 손에 꼽히는 그것들을 조조는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뛰쳐나와버린 직장도 다시 복귀했고, 초선이도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가 걱정할 만한 것은, 신경쓸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자꾸 뒤를 돌아보게 할 만큼 신경쓰이게 하는 무언가가 자꾸만 자신을 건드렸다. 뭘까. 대체 무엇을 잊어버린 걸까. 자신이 잃은 것은 대체 무엇일까. 대체.
혼자 오신 모양입니다.
조조는 고개를 들었다. 굳이 이 바를 골라서 온 이유는 이 바가 상대적으로 조용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곳보다 고가인 가격대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적어도 그럭저럭 운영이 되는지 사장은 시끄러운 사람들에게 가차없었다. 조조는 그 중에서도 테이블 하나를 혼자 차지하고 키핑해 두었던 양주를 꺼내 조그만 샷잔을 빠른 속도로 채우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말을 걸기를 바라지 않는 탓이었다. 당장 저쪽 바에서는 크지 않은 목소리로 시시덕거리는 사람이 몇이나 있었다. 조조는 자신에게 말을 건 사내를 노려보았다. 훤칠하게 키가 큰 남자는 침착하다 못해 무표정하게 그런 조조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자신은 앉아있고 사내는 서있다 지만 허리를 한참이나 굽혔는데도 그는 조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키가 큰 거지. 조조는 생각하며 빠르게 샷글라스를 비웠다.
그런데?
대꾸를 해 준 것은 술이 독하기 때문이었다. 조조는 안주로 할 만한 마땅한 것을 주문하지 않았다. 술이나 좀 마시다 돌아갈 예정이었던 것도 있고, 원래가 안주에 흥미가 없었던 탓도 있었다. 술만 켜고 있어도 문제는 없었지만 남자가 말을 걸어 템포가 끊어진 탓에 입이 심심해 왔다. 남자는 입꼬리를 올려 스르르 웃었다.
같이 앉아도 되겠습니까?
다른 자리에 앉지.
조조는 대꾸하며 다시 샷 글라스를 채웠다. 호박색의 액체가 글라스를 채우고 탁자 위에 물그림자가 일렁였다. 길다란 남자의 손가락이 그 그림자를 훑었다.
조조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처음으로, 제대로 올려다 보았다. 남자는 깔끔하게 머리를 넘기고 있었다. 드문드문 섞인 붉은색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단정하게, 바위처럼 굳은 얼굴을 하고, 남자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조조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지는 못했다. 조조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대답했다.
...그래.
남자는 샘플러를 시켰다. 웨이터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각기 다른 양주 열 잔이 담긴 보드를 사내의 앞에 내려주었다. 조조는 그 과정을 술로 입술을 축이며 말 없이 바라보았다. 자신이 왜 앉아도 된다고 했을까? 허락한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술을 즐긴다고 왔는데 벌써 술에 취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일어나 보아야 하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몸이 무거웠다. 평소 같았으면 훌훌 털고 일어났을텐데, 오늘은 그러기가 싫었다. 조조는 반쯤 비운 샷 글라스를 내려놓았다. 남자가 샘플러 보드에서 잔을 하나 꺼냈다.
여기.
......
자주 오십니까?
다른 데보다는.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길다란 손 끝에 매달린 잔이 조금 기울었나 싶었는데 순식간에 안에 든 술이 반이나 없어졌다. 술을 잘 하나 보지. 조조는 자신도 잔을 기울이며 그렇게 생각했다. 좀 전까지 목에 걸리는 것 같던 술이 잘도 넘어갔다.
샘플러 열 잔 중 세 잔이 비워질 때까지 그들은 그 이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내는 꿋꿋이 조조 앞에 앉은 것 치고는 말을 건네지 않았고 조조가 사내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는 것은 두 말하면 입 아프다. 특별히 말을 건넬 이유도 무엇도 없었기 때문에 조조는 그냥 말 없이 술을 켰다. 남자가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자신의 앞에 앉은 이유가 궁금해질 때 즈음, 남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드시는 술이 어떤 것인지요.
남자는 상당히 고풍스럽게 말했다. 조조는 말하는 대신 잔 옆에 둔 술병을 내밀었다. 남자는 조심스레 두손으로 술병을 받아들고 천천히 라벨을 살폈다.
맛있습니까?
조조는 답변을 골랐다.
...그다지.
한 병이 거의 다 비어가고 있습니다만.
...내 취향이 아니라서.
입에 착 달라붙는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독한 술이 필요해서. 그러나 다음날에 숙취 따위로 흔들리면 안 되어서. 비싼 술일 수록 숙취가 없다는 건 어쩌면 그냥 뜬소문일지도 모르지만, 조조는 그렇게 했다. 사내는 유리병을 좀 더 매만지다 테이블 위에 병을 내려놓았다. 작지만 분명하게, 탁,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드셔 보시겠습니까?
사내가 자신 앞에 놓인 일곱 잔의 샘플러를 가리키며 말했다. 조조는 눈을 깔고 그 잔들을 보았다.
굳이 술을 마셔야 한다면 취향에 맞는 술이 낫지 않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조조는 괜히 배알이 틀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건 저 사내가 무슨 상관인지. 이유 없이 적의가 끓어올라 조조는 조금 당황했다. 사내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샘플러 보드를 조조에게 약간 가까이 밀었다. 취한 걸까. 조조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남자는 한 쪽 팔로 테이블을 괴고 앞으로 조금 몸을 기울였다. 조조는 몸을 조금 뒤로 빼었다. 소파 등받이가 등에 닿았다.
이게 제일 독합니다.
...남의 것에 손대는 취미는 없어서.
권하는 잔은 조금 다르지 않은지요.
아까부터 생각했지만, 정말 말을 고풍스레 쓰는 사람이었다. 조조는 조금 떨떠름하게 자신의 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다 잔이 비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병은 사내의 옆에 있었다. 거기까지 손을 뻗은 것이 어렵다 느껴졌다. 정말로 취했나? 그런 것치고는 정신이 분명했다. 평소보다 덜 마시기도 하였고. 조조는 천천히 손을 내려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사내가 말한 가장 독한 잔을 집어들었다. 혀 끝이 녹아내릴 듯이 축여졌다.
어떠합니까?
...나쁘지 않군.
사실은 꽤나 괜찮은 편이었다. 동료들이 즐겨 찾는 소주보다 마시던 양주가 더 취향에 그나마 더 맞았지만, 이건 더 괜찮았다. 도수가 얼마나 될까. 조조는 문득 그렇게 생각하다가 여전히 희미하게 미소를 띄우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아까보다 즐거운 눈치였다.
개인적으로는 이게 더 괜찮습니다.
지금 드신 것보다, 조금, 약하긴 하지만.
...내가 독한 술을 찾는다고 말했던가?
독하기로 유명한 술을 취향도 아닌데 드신다고 하니, 그저 독한 술을 찾으시는 게 아닌가 하여.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니었지만. 아까처럼 뭔가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남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 마냥.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것 마냥. 조조는 자신의 손에 들린 샘플러를 비웠다. 문득 바에 흐르던 곡이 바뀌었다는 것을 조조는 깨달았다. 바 쪽에 앉아있던 사람이 신청곡을 넣은 모양이었다. 오래된 노래가 발 밑에 잔잔히 깔렸다. 조조가 잔을 내려놓자 다음 잔이 손에 쥐여졌다. 조조는 잠시 그 잔을 바라보다 곧 깨끗이 비웠다. 다음 잔이 쥐여지는 것은 신속했다. 조조는 등을 소파에 기대었다.
...넌 뭐지.
사내가 웃었다. 본 것 중에 가장 환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러고보니 통성명도 아니하였군요.
......
사마의라 합니다.
......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조조는 한참 뜸을 들였다. 말해도 될까. 어째서인지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말해도, 괜찮을까. 고작 이름인데. 정말 고작 이름인가? 조조는 다시 한 번 술로 입을 적셨다. 아까보다 아주 약간 더, 입에 단 맛이 감돌았다. 다시 한 번 새 잔이 손에 쥐여졌다.
...조조.
조조님이시군요.
사내가, 사마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에 열이 끓어올랐다. 조조는 눈을 감았다.
눈이 떠졌다. 상쾌한 기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겠으나, 꽤 자연스러운 기상이기는 했다. 눈을 몇 번 깜박이고 조조는 침대 옆 테이블을 더듬었다. 핸드폰이 손에 잡혔다. 시간은 충분히 일렀다. 출근하기에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조조는 몸을 일으켰다. 남색 시트가 몸 아래서 바스락거렸다. 남색? 조조는 눈을 깜박였다. 조조가 쓰는 시트는 색이 옅었다. 푸른색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색 정도로 짙은 색은 없었다. 그제야 방의 모양새가 보였다.
자신의 방이 아니었다. 일단 방의 생김새부터가 달랐다. 작지 않은 방에 큼직한 침대가 놓여있었다. 두 명은 잘 수 있을 법한 침대에 남색 시트가 깔려 있었고 이불 또한 맞춘듯한 남색이었다. 침대 옆 테이블은 고전적인 맛이 있었고 벽지의 모양새 또한 조조의 방과 달랐다. 두 개 달려있는 방문 둘 중 하나의 뒤켠에서 물소리가 났다. 조조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다 이불을 들추었다. 속옷 한 장 간신히 챙겨입은 상태였다.
혈기왕성할 나이도 아닌데 이게 무슨 짓인지. 조조는 숙취도 아닌데 지끈지끈 아파오려는 머리를 손으로 받쳤다.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럴만한 성격도 못 되거니와, 여기는 모텔도 아니고 남의 집인 듯하였다. 집까지 데려왔을 정도면 꽤 만만찮게 놀았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니. 조조는 속으로 욕설을 뇌까렸다. 조조는 침착하기 위해 주변을 좀 더 둘러보았다. 별 장식 같은 것이 없는 깔끔한 방이었다. 옷을 걸 데도 없었는지 아니면 세탁기를 돌리고 있는 건지 자신의 옷조차 없었다.
욕실에서 나오면 일단 자신의 옷을 돌려달라고 하자. 그리고 안녕을 고한 후 나가서 택시를 잡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다시 택시를 타고 출근을 하는 것이다. 조조는 그렇게 계획을 짰다. 하룻밤 놀이였다면 상대방도 그렇게 상처입지 않을 것이다. 침실이 분리되어 있는 걸 보면 이 집 주인도 꽤나 부유하게 지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리 진지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조조는 다시 한 번 마른세수를 했다.
물소리가 끊겼다. 조조는 등 근육을 긴장시켜 몸을 빳빳이 세웠다. 마른 몸에 달라붙은 근육들이 팽팽하게 조여졌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문이 열렸다.
장신의 남자가 머리를 털며 문 밖으로 걸어나왔다. 조조는 잠시 얼어붙었다.
아, 일어나셨습니까.
수건으로 물기가 서린 머리를 털던 남자가 말을 건넸다. 머리를 내려서 바로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낯이 익었다. 어제 같은 테이블에 앉아 술을 권하던 남자였다. 그러니까, 이름이.
...사마의?
어제가 기억이 나십니까?
사마의가 약간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조조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젓지도 못하고 얼어붙었다. 조조와 다를 바 없이 속옷 한 장 입고 있는 신체는 단단히 조여져 있었다. 훤칠한 키에 어울리는 길쭉길쭉한 육체가 조조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조조는 눈을 짧게 감았다 떴다.
왜 내가 여기 있지.
끝이 올라가지는 않았으나 의문문이었다. 사마의는 수건을 뒤집어쓴 머리를 약간 기울였다.
기억나지 않으시나 봅니다.
......
어디까지 기억하십니까?
...통성명을 한 데까지.
잠시 기억을 더듬느라 말과 말 사이에 텀이 생겼다. 그래. 그 이후로는 기억이 까마득했다. 아마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이렇게까지 취했는데 숙취가 없다니 나름 대단했다. 사마의가 입을 떼었다.
그 이후로 몇 마디를 더 나누었습니다.
......
그리고선, 많이 취하셨는지 몸을 잘 못 가누시기에 보내드리려 했는데.
사마의가 희미하게 웃었다.
제가 조조님의 집을 모르지 뭡니까.
조조는 불퉁하게 사마의를 노려보았다.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어딘지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적당히 숙박 업소 같은데에 던져 놓지 그랬나.
남의 카드를 멋대로 쓰는 것도 실례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남을 집에 들인단 말인가. 그것도 손님방도 아닌데다가. 조조는 눈을 조금 가늘게 떴다가 작게 깜박였다.
사마의.
예 조조님.
...우리가, 어제, 뭔가... 했나?
조조는 답지 않게 말을 에둘렀다. 직접적으로 말하기가 어째서인지 민망했다. 평소라면 남이 창피해하던 기분이 상하건 구체적인 단어를 사용해 직접적으로 말했을텐데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어째서일까.
사마의가 소리내어 웃었다. 크게 소리가 난 것은 아니었고, 가볍게 죽인 소리는 공기를 진동시키기에도 부족해 보였다. 그러나 아주 작게, 소리가 났다. 조조는 그것을 어째서인지 조금 이질적으로 느꼈다. 마치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을 보듯이. ...당연히, 한 번도 본적 없는 사람인데도. 사마의의 손이 쑥, 공간을 침범해 들어왔다. 조조는 본능적으로 몸을 빼었지만 침대 위에서는 물러날 공간이 별로 없었다. 금방 침대 헤드에 등이 닿았다. 사마의의 손이 조조의 뺨에 닿았다. 그리고 아주, 다정하게 쓸었다. 허리를 숙인 사마의의 얼굴이 지척에 가까워졌다. 물기를 머금은 머리가 내려와 있는데, 조조는 어쩐지 그것이 요요하다 느꼈다.
어떤 것 같으십니까?
조조는 말문이 턱, 막혔다. 사마의의 얼굴이 가까워져 왔다. 이런, 분위기라면, 정말로, 혹시라도- 조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온기가 뺨에서 떨어져 나갔다.
장난입니다.
조조는 눈을 떴다. 사마의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보장드리죠.
......
조조는 조금 말문이 막힌 채로 사마의를 올려보았다. 사마의는 다시 한 번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었다.
씻으시죠. 시간이 늦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등판을 바라보다, 조조는 문득 머리를 터는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씻고 나와도 입을 옷이 없다는 것이었다. 숙취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조조는 그것을 씻고 나온 이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닦으며 조조는 피로해져서 눈을 감았다. 침실에는 침대 한 채만이 덜렁 있었다. 밖으로 나가야 할 터였지만 내키지가 않았다. 이미 남의 침대를 차지하고 잔 시점에서 예의범절이고 뭐고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주인도 없는 집을 멋대로 배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옷을 못 입는 것은 달갑지 않다. 입었던 속옷을 다시 입은 것만 해도 충분히 찝찝했다. 어떻게 해야할까. 조조가 미간을 구기고 있는데 하나 더 있던 문이 열렸다. 옷을 갖춰입은 사마의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아직 머리까지 정돈하지는 않았는지 살랑살랑 흔들리는 앞머리가 머리 위에 내려와 있었다. 아직 자켓을 차려입지 않은 상의의 셔츠는 맞춤인 듯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고 바지 또한 구김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다려져 있었다. 사마의는 놀랐다는 듯 조조를 돌아보았다.
금방 씻고 나오셨군요.
조조는 뭐라 답할지 말을 골랐다. 사마의가 뒤를 도는 게 먼저였다.
드레스 룸은 이 쪽입니다. 오시죠.
조조는 입을 뗄까 하다, 곧 관두었다. 말을 섞기도 애매했다. 조조는 다시 한 번 머리의 물기를 쥐어 짰다. 그리고 나오기 전에 흘끗, 침실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이불까지 정돈된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요하게.
발에 밟히는 마룻바닥이 따뜻했다. 조조는 고개를 기울였다. 툭, 물방울이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드레스룸은 꽤 큼직했다. 한 켠에는 머리를 말리고 간단하게 스킨로션을 바를 수 있게 화장대 비슷한 것이 놓여있었고 그 외에는 옷을 걸 수 있게 위아래로 선반과 옷걸이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웬만한 옷가게에도 뒤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내 옷은 어디있는 거지. 조조는 불퉁하게 생각했다. 걸려있는 옷은 대부분 양복이었다. 한 켠에 캐주얼한 옷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날씨가 날씨라서인지 대부분이 니트류였다. 조조는 어제 자신이 입었던 복장을 떠올렸다. 가죽자켓에 붉은 셔츠, 블랙진. 아무리 봐도 여기에 있을 법하지 않았다. 조조는 그래서 내놓고 물었다.
내 옷은?
구비해 둔 것이 있습니다.
잠시 조조는 영문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구비해 두다니? 어제 처음 본 사람의 옷을? 앞뒤가 통 맞지를 않아서 조조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물었다.
내, 옷은?
아.
사마의가 탄성을 내었다. 조조를 흘긋 돌아보는 눈이 조금 휘어있었다.
어제 옷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마 세탁소에 가 있을 겁니다.
이 시간에? 조조는 좀 전보다 더욱 미간을 좁혔다. 출근하기에도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어제 술을 마시던 시간이 일렀던 것을 감안해도 세탁소가 열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게다가 자켓이라면 모를까, 다른 옷들까지 세탁소에 맡기다니 뭔가가 이상했다. 조조가 입을 떼려는 순간, 사마의가 선수를 쳤다.
앉으시죠.
...뭐?
머리를 말리셔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뭐?
이제 조조는 기가 막혔다. 사마의는 자연스레 손을 뻗어 화장대를 가리켰다. 그래, 분명 화장대에는 드라이어도 있었고 그 앞에 앉을 수 있게 작은 의자도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그렇다고 자신이 왜 앉아야 한단 말인가. 옷이나 내어 줄 것이 아니었던 건가. ...왜?
조조님.
조조는 고개를 들어 사마의를 조금 올려다 보았다. 사마의의 얼굴은 진지하다 못해 조금 냉하기까지 했다. 어제 몇 번 보았다고 조금 눈에 익어버린 얼굴에 조금 화가 치밀었다. ...어제부터 화가 늘어버린 느낌이었다. 조조는 옅은 한숨을 속으로 내쉬며 발을 떼었다. 자연스럽게 등 뒤로 돌아온 사마의가 드라이어를 집었다. 그 동작이 물흐르는 듯 해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던 조조는 그 동작이 지독하게 자연스럽다는 걸 조금 뒤에나 깨달았다. 그러니까, 사마의가 머리를 말려줄 때에나.
머릿결이 좋으시군요.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건지 손짓이 거칠지 않았다. 길쭉한 손가락 사이사이로 자신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져서 조조는 조금 당황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거울에 비치는 사마의의 얼굴로는 표정이 가늠되지 않았다. 조조는 당황한 자신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이 상황이, 어째서일까, 낯설지 않은 것이 더 당황스러웠다.
내가-
거의 다 말랐습니다. 잠시만 계셔 주십시오.
입을 떼어도 말이 잘라먹혔다. 드라이기의 소리가 시끄러워서 대화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조조는 손을 뻗어 사마의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 안에 빠듯이 차는 두툼한 근육과 뼈대가 꿈틀거렸다. 드라이어가 꺼졌다.
...내가 하겠다.
조조가 낮게 말했다. 사마의가 그 얼굴을 내려다 보다,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거의 다 말랐습니다.
......
괜찮습니다.
내가 괜찮지 않아.
...그러시다면.
굉장히 선선히, 사마의는 조조에게 드라이어를 건넸다. 그리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 뒷짐을 지고 섰다. 군인들이 할 법한 절도있는 자세였다. 셔츠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이 거울 너머로 보였다. 지켜보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조조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기력이 바닥을 찍는 느낌이었다. 다시 켜진 드라이어의 소리가 요란했다.
머리가 다 마르자 사마의는 옷을 꺼내왔다. 날이 날인데다가 본인의 옷이 아니다 보니 익숙하지 않은 착장인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조조에게는 약간 당황스러운 복장이기도 했다. 짙은 갈색의 면바지에 연푸른색 셔츠, 크림색 니트에 두툼한 줄무늬의 머플러, 그 위에 코트. 심지어는, 속옷까지 있었다. 모두 새것이었다. 조조는 당황하여 사마의를 올려다 보았다. 사마의는 아무렇지고 않은 듯한 무표정으로 조조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치수를 잘못 사온 옷일 뿐입니다.
아예 한 벌을? 그리고 그렇다면 옷을 바꿔왔으면 되었을 일이다. 조조는 다시금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에도 그다지 펴지는 일은 없던 얼굴이기는 하였으나 오늘따라 인상이 많이 찌푸려지는 것 같았다. 조조는 피로하게 미간을 꾹꾹 눌러 폈다.
입으시지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
사마의가 희미하게 웃었다.
기대하겠습니다.
뭘 기대한다는 거지. 조조는 다시 울컥 올라오려는 것을 내리누르며 사마의 손에서 옷을 받아들었다. 두툼한 니트는 보기보다 꽤 포근했다. 옷을 입으려다 문득 조조는 사마의를 보았다. 무언가가 꺼림직했다. 앞에서 거의 내내 알몸으로 있다시피 하였고 그 위에 옷을 걸치는 것 뿐인데도 그걸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조는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고개를 돌려주면 좋겠지만, 그 말을 하기에는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사마의는 아까처럼, 여차하면 자신이 하겠다는 듯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속옷은 이따 갈아입는 게 낫겠군. 조조는 판단하며 셔츠를 팔에 꿰었다. 얇은 셔츠가 몸에 달라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달라 붙는 게 셔츠만은 아닐 것이었다. 단추를 잠그자 허리에 셔츠가 딱 맞게 붙어왔다.
갑작스레, 기억이 머릿속을 파고 들어왔다.
단단히 잡힌 허리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뺨은 거의 짓뭉개지듯 어딘가에 기대어 있었고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차지 않았다. 오래 기대어 있어서 그런 것일까. 온 몸이 들리듯이 움직였다. 자신의 발로 딛고 있다고 부르면 안 될 것처럼 힘이 없었다. 그래도 한 걸음씩, 천천히, 누군가의 보조에 맞추듯 앞으로 디뎠다.
잘 하고 계십니다 조조님.
웃음기 있는 목소리가 귓가를 저몄다. 조조는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눈에 비쳤다.
조조는 고개를 돌려 사마의를 바라보았다. 어제와는 달리 웃고 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폐를 끼쳤군.
조조는 셔츠를 마저 잠그고 바지를 걸치며 말했다. 버클을 잠그자 허리가 알맞게 조여왔다. 허벅지도 통이 딱 맞았다. 기성복이 안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맞춤복마냥 붙어오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맞춤복일리는 없을테니까. 조조는 그렇게 생각하며 니트와 코트를 걸쳤다. 그리고 코트 주머니에 비닐째 속옷을 쑤셔넣었다. 별 것 아닙니다. 사마의가 말했다. 조조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잠시 고민했다. 아. 폐를 끼쳤다고 하였지. 질문과 답변의 사이에 텀이 길었다. 조조는 고개를 들어 사마의를 보았다. 사마의는 어느새 드레스룸 한 쪽 구석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양말을 안 드렸더군요.
괜,
괜찮다고 말하려는 순간 사마의가 조조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입으로 양말이 들어있는 봉투를 뜯었다. 다른 한 쪽 손이 자연스럽게 조조의 뒤꿈치를 쥐고 들어올렸다. 아무리 무게중심이 없는 발이라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무게를 싣고 있었을텐데, 너무나도 쉽게. 그리고 눈 깜박할 사이에 양말이 신겨졌다. 그리고 소리조차 없이 바닥에 다시 내려졌다.
다른 발도 주시지요 조조님.
그렇게 말하며 올려다 보는 얼굴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이 기묘할 정도로 익숙하고도 낯설어 조조는 마른 침을 삼켰다. 목이 탔다.
답지 않게 여유를 부려서 그런지 나온 시간은 평소 출근 시간에 가까워 있었다. 집에 들렀다 가는 것은 무리일 것으로 보였다. 조조의 옷을 다 입히고 나서 이런저런 소지품까지 챙겨준 사마의는 후다닥 제 옷을 챙겨 입었다. 짧은 시간을 투자했다고 하기에는 제대로 갖춰입은 옷과 올린 머리가 깔끔했다. 어제와 비슷한듯 확실히 다른 옷차림이었다. 현관에서 어제 신고 나왔던 구두를 찾던 조조는 사마의가 꺼낸 구두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이쯤 되면 꽤 오싹했다. 스토커인가? 자신을 누가 쫓아다닌다거나 알아본다는 것은 느끼지 못했었지만 자신도 좀 수소문 해 보아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조조는 사마의가 내어준 로퍼를 신으면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머리를 굴렸다.
날은 쌀쌀했다. 겨우 엘레베이터 앞인데도 목이 깊숙한 곳부터 차갑게 느껴졌다. 택시를 불러야겠는데. 조조는 핸드폰을 들어 자신의 위치를 검색했다. 근무하는 곳과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시간이 꽤나 걸릴법했다. 지각 할 것 같은데. 조조는 인상을 찡그렸다. 주변에 택시가 없는 건지 도통 잡히지가 않았다.
조조님.
사마의의 부름에 조조는 고개를 들었다. 사마의는 다시금 무표정했다.
모셔다 드려도 괜찮을런지요.
...모셔다 준다니? 조조는 조금 황망하게 사마의를 바라보었다. 사마의는 손목에 찬 시계를 보며 조조에게 다시 말했다.
제 출근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습니다. 조조님을 바래다 드리고 싶은데...
답지않게 말끝이 늘어났다. 엘레베이터가 가까운 층에서 멈추었는지 소리가 났다.
눈이 마주쳤다.
그래도 괜찮을런지요.
순간 숨이 막혔다. 새카만 동공이 조조를 옭죄였다. 옴짝달싹 못하도록 뭔가가 자신을 잡아 맨 느낌이었다. 조조는 홀린듯이 그 동공을 들여다 볼 밖에 없었다. 뭔가가 그 안에서 일렁거리는 느낌이었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것이 공포인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등줄기를 기어오르는 듯한 소름. 그 뿐이었다.
조조님.
사마의가 조조를 다시 한 번 불렀다. 조조는 그 목소리가 참으로 몽롱하다고 생각했다. 가능했다면, 온 몸을 떨었으리라. 그러나 그것마저 불가능했다. 조조는 천천히 사마의의 손이 자신의 뺨까지 올라오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느리게 자신의 얼굴을 향해 손끝이 다가왔다. 조조는 눈을-
땡.
엘레베이터에서 신호음이 들렸다. 조조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온 몸에 감돌던 긴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에 순식간에 피로가 온 몸을 감쌌다. 조조는 엘레베이터에 발을 디뎠다.
허락해 주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등 뒤에서 사마의가 말했다. 조조는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사마의는 눈을 휘어 웃고 있었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갈 거라 생각했던 손끝은 의외로 1층을 눌렀다. 태워다 준다고 하지 않았나. 농담을 꽤 진지하게 하는 타입이군. 조조는 그렇게 생각하며 옷깃을 다시 여몄다. 꽤 두툼한 코트가 몸에 달라붙었다. 엘레베이터가 내려가는 기계음이 정적을 채워넣었다. 엘레베이터가 멈추고 조조는 그 자그마한 방 안에서 밖으로 발을 디뎠다. 아까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보다 강한 한기가 끼쳐들었다. 조조는 길게 숨을 토했다. 몸에 소름이 절로 돋았다.
현관까지 이어지는 길은 짧았다. 자동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다시금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날씨가 얼마나 춥기에. 조조는 가볍게 혀를 찼다. 그리고 조조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바로 현관 앞에 대 놓은 차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했고 그 외에도 여기저기 주차된 차가 많았다. 어떤 차가 사마의의 것일까. 조조는 가늠하며 눈을 깜박였다. 조조의 뒤에 바짝 붙어 걷던 사마의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조조님, 타시지요.
조조는 사마의를 바라보았다. 어디에 타라는 거지? 차를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말없이 서 있자니 사마의가 몇 걸음을 더 디뎠다. 그리고 앞에 서 있던 검은 리무진의 뒷좌석을 열었다.
타시지요.
......
기사가 있는 차를 타고 간단 말이지. 조조는 코로 약간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조는 금세 차에 올랐다. 푹신한 시트가 마음에 들었다. 옛날 생각 나는군. 그리 마음에 차는 기억은 아니었지만, 어쨌건 그랬다. 옆의 문이 닫히고 잠시 후 반대편 문이 열렸다. 조조의 왼편에 사마의가 앉았다. 그리고 차가 미끄러지듯 출발했다.
차 안은 고요로 가득했다. 근본적으로 말이 없는 사내 둘이 타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일지도 모른다. 조조는 시트에 등을 좀 더 기댔다. 긴장이 잘 풀리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 긴장을 너무 빼고 있는 것도 좋지는 않지만- 눈을 감고 머리를 시트에 기대자 왠지 모르게 익숙한 감각이 들었다. 그리고 퍼뜩, 아까마냥, 기억이 떠올랐다.
여전히 뺨에 닿는 온기는 단단했다. 몸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기울어 있었다. 누운 것도 아니고 앉은 것도 아닌 이상한 상태에서 조조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조조님, 주무십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조조는 쉰 목소리로 아니, 하고 대답했다. 남자가 웃는 것이 뺨을 통해 느껴졌다. 허리에 얹혀져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약간 떨어져있던 다리가 바짝 붙었다. 조조는 잘 가누어지지 않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남자의 고개가 숙여졌다.
...걱정하는 일은 없었다고 하지 않았나?
조조가 거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입이 맞추어졌다. 독한 술냄새로 가득찼던 입에 말랑한 살덩이가 들어왔었다. 조조는 그 순간 왜 자신이 눈을 감았는지 해명할 수 없었다. 사마의가 고개를 돌려 조조를 바라보았다. 눈이 동그랗다고 해도 좋을만큼 크게 뜨여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휘었다.
없었습니다 조조님.
...너.
그 때 걱정하셨던 일은 정말 없었습니다.
사마의는 제 허벅지 위에 올려 놓았던 손을 조조 쪽에 가까운 시트에 얹었다. 그리고 무게를 실어 조조쪽으로 기울었다. 천천히, 높았던 시야가 맞춰졌다. 코가, 한 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떨어져 있었다. 조조는 순간 숨을 멈추었다. 사마의가 희미하게 웃었다.
숨, 쉬십시오.
조조님, 하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입술이 맞닿았다.
조조는 흐릿한 눈을 몇 번 깜박였다. 혀뿌리가 더듬어지는 감각은 익숙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 입천장이 쓸리는 감각도, 혀끼리 문질러지는 감각도 익숙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움찔거리는 사이에 입맞춤은 끝이 났다... 그걸 입맞춤이라고 불러도 된다면. 조조는 숨을 몰아쉬었다. 사마의가 희미하게 웃었다. 숨 쉬시라고 말씀드렸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조조의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었다. 이렇다하게 움직인 것도 없으니 정돈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마의의 손은 꽤 오래 여기저기를 머물렀다. 손목깃이나 옷깃, 어깨 근처, 코트 자락까지. 마지막으로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말하며 머리까지 한 번 넘겼다. 조조는 그제야 자신이 저항하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넘기는 사마의의 손을 쳐냈다. 꽤나 큰 소리가 났다. 오히려 때린 조조가 놀랄 정도로. 그러나 사마의는 태연하게 제 손을 거두었다.
휩쓸린다. 조조는 억지로 사마의에게서 고개를 돌려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신경이 옆의 남자에게 쏠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단지 하룻밤을 보낼 요량이었으면 어제도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 일도 없었다고 단정하는 저 사내는, 대체. 골이 아프려고 하는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거의 다 왔군요.
그 순간에야 창 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자주 순찰하는 구역이었다. 조조는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시간을 보았다. 출근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었다. 분명 빠듯하게 출발했는데. 지름길이 있다는 건 정말이었을까. 그 길은 어떻게 안 거지? 이리저리 생각하는데, 말이 이어졌다.
조조님.
조조는 대답하는 대신 사마의를 보았다. 사마의는 웃고 있지 않았다.
...전화번호를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조조는 침묵했다. 손에 든 핸드폰이 유난히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게,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뱀앞의 쥐가 된 느낌이었다. 이것은 위험하다. 본능이, 무의식이 경고를 내렸다. 지금까지만 해도 충분히 위험했는데, 이건 더하다고. 더 이상 얽히면 안 된다고. ...왜? 머리 한 구석에서 반문이 올라왔다. 왜 안 되는 건데? 사마의는 충분히 친절하고 다정했다. 심지어 과한 부분도 있었다. 이런 남자가, 위험하다고? 믿기 어렵다는 게 머리의 판단이었다. 두 마음이 아주 잠시간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기껏해야 눈 몇 번 깜박일 시간이었다. 조조는 두 생각 중 어느쪽이 더 옳을 지를 저울질하다, 직감의 손을 들어주었다.
...번호, 눌러.
그래서 조조는 핸드폰을 조작해 내밀었다. 정말 나쁜 사람이라면, 자신은 그것을 밝힐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감옥에 넣는 것이지. 그것이 자신의 업이므로. 이것이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열정이라는 것을, 조조는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그 저울질에서, 사마의의 행동에 의문조차 느끼지 않았다는 것도, 역시 깨닫지 못했다. 사마의는 희미하게 웃으며 조조의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갔다. 잠시 후, 작은 진동이 사마의의 주마니 안에서 울렸다. 사마의는 두 손으로 조조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조조는 자신의 핸드폰을 가져갔다.
차가 멈추었다. 고개를 돌리자 자신의 직장이 바로 코앞이었다. 조조는 주머니에 자신의 핸드폰을 챙겨넣었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사마의가 조조님, 하고 조조를 불렀다. 사마의는 그린듯이 웃고 있었다.
잘, 다녀오십시오.
조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빴다. 숨 쉴 틈조차 별로 없을 정도로 바빴다. 경찰이 바쁜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라지만, 바쁜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선배들조차 조조의 평상시 같지 않은 옷차림을 지적하지 못할 정도로 경찰서는 바쁘게 돌아갔다. 그리고 퇴근시간이 지나서야, 조조는 경찰서에서 뱉어지듯 튕겨나왔다. 옷차림을 여밀 새도 없었다. 조조는 인상을 찌푸리며 코트를 걸쳤다. 주머니가 묵직했다. 그래도 억지로 짬을 내어 속옷은 갈아입었다. 전에 입었던 속옷은 버렸다. 별로 아깝지도 않았다. 조조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핸드폰이 만져졌다.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은 줄 알았는데 여기있었군. 조조는 감흥없이 생각하며 핸드폰을 꺼냈다. 하루정도 연락을 못했으니 초선이의 걱정이 클 터였다. 연락을 넣을 셈으로 핸드폰 잠금을 풀려는데, 문자가 한 통 도착해 있었다. 메신저 앱이 아니고, 아주 고전적인, 문자가. 스팸인가? 조조는 잠금을 풀었다. 요새는 스팸이 아니고서야 문자를 보내는 사람도 드물었다. 가끔, 아주 가끔 사적인 용무가 오긴 하지만 자신에게 그럴 일은 없었다.
-퇴근하셨습니까?
문자에는 단 한 문장만이 적혀있었다. 자신의 퇴근 여부를 묻는, 짤막하고도 단순한 한 마디. 시간은 대략,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퇴근하였을 즈음이었고 번호는 모르는 번호였다. 누구지? 조조는 화면을 몇 번 두드리다, 그 전에 자신이 보낸 문자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 보는 번호에, 자신이 보낸 문자가 있다고? 거기에는 딱 세 글자가 적혀있었다.
-조조님.
두 개의 메시지가, 서로 떨어져 있는데도 왠지 이어져서 들리는 것 같았다. 조조님, 퇴근 하셨습니까? 귓가에서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아서 조조는 턱을 쓸었다. 그리고 홈 버튼을 눌러 전화 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갔다.
...초선아?
알고 있었다. 이건 도피에 다름 아니다. 그것도 그리 길지 않은 도피였다. 자신은 그 연락을 무시할 수 없다. 스팸 지정을 하지도 못하고, 차단하지도 못할 것이다. 인지하고 있는 일이었다.
도피는 짧았다. 초선이는 금세 잠자리에 들고 싶어했고, 그것은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었다. 이래저래 챙겨주고 나니 조조는 다시 한 번 문 밖으로 뱉어졌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날이 추워서 한 번 부르르 떨고, 조조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당연하게도, 차디 찬 핸드폰의 감촉이 손에 닿았다.
조조님,
퇴근하셨습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귓가를 맴돌았다. 조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두 글자를 작성해서 보냈다.
-그래.
자신이 생각해도, 참, 성의 없는 문자였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보내는 답장이었다. 그럼에도 달랑 한 마디, 맥락을 짐작할 수도 없는 두 글자를 보내었다. 그러나 조조로써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얽혀 있었다. 벗어날 수 없다. 조조는 그렇게 느끼는 자신이 낯설었다. 왜? 기껏해야 문자 한 마디인데? 고작해야 어제 만난 사람인데? 조조는 기계처럼 문자 창 위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이름을 입력했다.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해서 백스페이스를 눌러야 했다. 하얀창 위에 이름이 올랐다.
'사마의'
저장 버튼을 누르려는데,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내가, 이 사람을 전에도 본 적이 있던가?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조조는 저장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도 문자가 도착했다.
-퇴근이 늦으시군요.
조조는 뭐라 답변을 생각해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 사이에 문자가 한 번 더 왔다.
-집에는 잘 들어가셨는지요.
마침표까지 꼼꼼히 찍혀있었다. 조조는 다시 짤막하게 문자를 보냈다.
-아니.
-시간이 늦었습니다. 쉬셔야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시간은 그리 늦지 않았다. 아이들에게는 늦은 시간일지 모르지만, 조조에게는 야근을 좀 하고 나면 되는 시간이 이 즈음이었다. 사마의라고 해서 별 다르지는 않을 터였다. 조조는 화면을 조금 두드렸다.
-너는 퇴근 했나?
-침실입니다.
생각보다 하루 사이클이 건전한 모양이었다. 어제가 특별한 거였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문자가 한 통 더 도착했다.
-알고 계십니까?
밑도끝도 없는 물음에 조조가 답장을 보내려고 할 때 문자가 한 통 더 왔다. 조조는 문자함을 열었다.
-지금 제 침실에서 조조님의 향이 납니다.
조조는 입을 막았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연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등줄기가 오싹거렸다. 조조는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이렇게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게. 조조는 핸드폰을 잠그고 다시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머리가 아프려했다. 어제 그렇게나 술을 마셨는데 다시 술이 고팠다. 조조는 핸드폰을 꾹 쥔 손을 주머니에서 빼지도 못하고 머리를 짚었다.
택시에 오르고 나서야 조조는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침착함은 자신의 특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조조는 눈을 감고 핸드폰을 손톱으로 두드리며 수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진동은 울리지 않았다. 이제 정말 잠자리에 든 걸까? 눈을 감으니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까 한 번 떨어져내렸던 심장은 제자리에 다시 올라붙었지만 자기주장을 훨씬 확실히 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인지도 못했던 것이, 나 여기 있다고 계속 시끄럽게 굴어서 조조는 불편했다. 언제 또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가만가만 생각해 보았지만 집중이 자꾸 흐트러졌다.
문득, 죄책감이 들었다. 잘못 된 일을 하는 것 같은, 뭔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 같은. ...누군가를 잊어버리는 것 같은, 그런 죄책감.
조조는 눈을 떴다. 그리고 메시지 창을 열었다.
-무례하군.
전송해 보낸 후에야 몇 마디를 덧붙였어야 했을까, 후회가 되었다. 그러나 전송된 말은 변하지 않는다. 좀 더 나쁘게 말했어야 했을까? 그러나 저걸로도 충분히 기분 나쁨이 표현 되지 않을까? 고민하는데 핸드폰이 다시 진동했다.
-그렇습니까.
...조조는 왠지, 그 글이 웃고 있다고 느꼈다. 그것도 남자가 잘 짓는 희미한 미소가 아니라, 한 번 들은 적 있는, 소리내어 웃는 웃음으로. 좀 더 화를 냈어야 하는 걸까? 그러나 가장이란 어려운 일이다. 한 번도 제 마음을 가장해 본 적이 없는 조조에게는 더더욱. 문자가 한 통 더 왔다.
-저는 사실을 말한 것 뿐입니다만.
이번에는 정말로 화가 났다. 조조는 문자를 날렸다.
-웃기지 마라.
답장이 금방 왔다.
-저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만.
그래도 말해도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는 거지. 그렇게 적고 있는데 핸드폰이 한 번 더 울렸다.
-못 믿으시겠다면, 지금 와서 확인해보시렵니까?
조조는 핸드폰을 깨트릴 듯 꽉 쥐었다. 순식간에 피곤해지는 느낌에 눈이 절로 감겼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데 문득 아침이 떠올랐다. 온몸을, 옷깃을, 머리를 다듬어 주던 손길이. 몸에 닿을듯 말듯 스치던 손끝이. 조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택시 기사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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