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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D/레히삼

[유기유장] 구원의 세계

ㄷㄷㄷㄷ 2023. 1. 18. 22:39

*날조를 한스푼.... 으어어 쏟았어 으어어

의외로 경호원 아르바이트라던지 해서 정장에 익숙한 유장 보고 싶다... 당황하는 표정 보고 싶어서 유장에게 정장 입혔는데 자연스럽게 척 입고서 가자, 하는 유장에게 두근거려버리는 유기가 보고 싶네...

헉 경호원과 고객으로 만나는 유기유장 보고싶다.... 내 자가 복제 아닌 걸로...

사실 경호원은 장식으로 둔 거고 어떻게 해야할지 누가 사주한 건지 뭘 처리해야 할지 다 알고 있었는데 유장을 사랑하게 되어서 전부 내던져버리는 유기 보고 싶다...

자기 이익을 포기해 가면서까지 유장을 보호하려드는 유기.... 유장이 사랑스러워서 다 포기하려는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지만 유장만 있으면 아무래도 상관 없는 유기...


유장에게는 그 일이 굉장한 희망처럼 느껴졌다.

체육관을 뛰쳐나왔다. 세상은, 링 위는 정글이라는 그의 생각을 관장님은 더 이상 받아주지 않았다. 하긴, 문제는 관장님이 아니었다. 그가 가르쳐야하는 학생들이었지. 관장님도 그들의 항의에 어쩔 수 없었으리라. 유장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정처없이 이리저리 걸어다니다 문득 고개를 든 곳은 해가 다 진 시각, 전봇대 앞이었다. 가로등은 당장이라도 꺼질 듯 말 듯 깜박거렸고 그것은 마치 극에서 나오는 무슨 계시처럼 보일 정도로 우연하고도 극적이었다. 전봇대에는 공고 비슷한 것이 붙어있었다. 형주 폭죽, 경호원 모집. 짤막한 문구에는 자신감이라도 깃들어있는지 그 외에는 전화번호 뿐이었다. 경호원. 자신의 특기를 살릴 수 있는 기회처럼 보였다. 유장은 하나 남은 전화번호 쪽지를 떼어다 주머니에 우겨넣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바닥에 앉아 그 종이를 내려놓고 유장은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전화번호만 달랑 적혀있는 종이는 답을 주지 않았다. 다음날 시간이 되자마자 유장은 전화를 걸었다. 안내하는 여직원은 친절하게 언제 몇 시까지 본사 쪽으로 와 달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유장은 종이를 꾹 쥐고 네, 네, 하고 전화를 받았다. 앉아있는 대기실에는 꽤 그럴듯해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무슨 무술을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유장은 다리를 조금 떨며 제 차례를 기다렸다. 제 차례에는 무얼 하고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긴장한 채 유장은 면접을 보았다. 집에 돌아와서, 유장은 전화를 받았다. 내일부터 출근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유장에게는 이 일이 굉장한 희망처럼 느껴졌다.

이 일 해 보신 적 없죠?

유장은 뭐라고 대답할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대답해 주세요. 앞에 있는 상대방이 건조하게 말했다. ...없습니다. 유장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류에 사인을 하던 부사장은 고개를 들고 유장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손으로 턱을 괴고 유장을 바라보았다. 유장은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자신이 왜 이 자리에 뽑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아서, 설마 출근 첫 날부터 잘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지배했다. 잠시 자신의 경호 대상은, 자신을 바라보다 방긋 웃음을 지었다. 비웃음이라고 보기에는 꽤나 밝은 웃음이었다.

내일부터는 정장 입고 나오세요. 넥타이는 봐 드릴게요.

정... 장이요?

유장은 얼떨떨하게 물었다. 생글생글 웃던 부사장은 아예 손으로 직사각형 같은 모양을 그렸다.

TV에서 많이 나오는 거 있잖아요, 왜. 수트 입은 경호원이 앞장 서서 경호해 주는- 그런 거요.

...작업복, 인 겁니까?

유니폼에 대한 것은 듣지못했는데. 유장이 얼떨떨하게 답하자 부사장은 웃음을 터트렸다.

네, 작업복이라면, 작업복이죠. 틀린 말은 아니네요.

예...

정장이라니. 가격이 꽤나 될텐데. 유장은 한숨을 참기 위해 노력하며 허리를 세웠다. 부사장은 다시 사인을 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비용은 저희 쪽에서 지급할테니 이따 법인 카드 말씀하세요.

유장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도로 줄어들었다. 큰 회사는 뭔가 달라도 다른 건가. 유장은 얌전히 예, 대답했다. 그리고 어깨를 펴고 얌전히 옆에 서 있었다. 이야기 들은 대로. 부사장의 명패에서 유기라는 이름이 반짝였다.

경호 일은 서너명이 돌아가며 맡게 된다고 했었다. 자신의 퇴근 시간 즈음이 되어 일을 넘기려다, 유장은 문득 부사장의 말을 떠올렸다. 내일은 정장을 입고 오라 했었다. 그게 법인 카드로 결제 될 거라는 말도. 누구한테 말해야하지? 유장은 긴장하고 있는 어깨 너머로 흘끗 부사장을 바라보았다. 결재가 끝난 부사장은 다른 프로젝트를 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유장은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저

... 네?

집중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던 게 무색하게 유기는 바로 고개를 들었다. 잘생긴 얼굴이 부드럽게 펴져서 유장은 눈을 몇 번 깜박여야 했다. 눈 앞에서 별이 튀는 것 같았다.

왜 그러세요?

아, 다름이 아니라. 아까, 그,

법인카드 때문에... 목소리가 나오다 말고 기어들어갔다. 유기는 아, 하고 탄성을 내었다. 그리고는 앞으로 조금 숙이고 있던 몸을 뒤로 젖혀서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는 유장을 천천히,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천천히 훑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유장은 발끈 화를 내려했다. 그러나 유기가 빨랐다.

저도 같이 가죠.

네?

유니폼 사러 가신다면서요.

고용주가 동행하고 싶은데요.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워낙에 밝아서 유장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문 밖에 서 있던 경호원 둘은 정장을 빼어입고 있었다. 둘은 유기가 나오는 것을 보고 뒤를 따르려 했지만, 유기는 그들을 물렸다. 그냥 옷 사러 가는 거에요. 이 분-유기는 유장을 가리켰다-도 동행할 거고. 덤덤한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약간 섞여 가볍게 느껴졌다. 일이 터지면 나 혼자서는 안 될텐데? 유장은 뭐라 입을 열고 싶었지만 유기가 떠나는 게 빨랐다. 뭐해요, 안 따라오고. 유장은 허둥지둥 유기를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내내 조용하던 인이어에서 이런저런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런 돌발행동이라니, 툴툴대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유장은 뭐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뒤에서 차로 따라갑니다. 어떻게 결론이 내려진 듯 명령이 들리고 다시 인이어가 조용해졌다. 유장은 그제서야 마음 놓고 유기의 뒤를 따를 수 있었다.

유장은 주변을 확인해가며 차까지 가는 유기를 따랐다. 유기는 차 앞에 도착해서야 유장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대화를 나누었다는 양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차, 면허 있으시죠?

네? 아, 예.

유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운전을 해 본 적은 손에 꼽지만, 어쨌든 면허는 있었다. 유장이 그 말을 덧붙이기 전에 가슴으로 뭔가가 던져졌다. 원격으로 차량을 조정 가능한 차키였다. 유장이 키를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드는 사이 유기는 어느새 차를 돌아가 조수석에 몸을 싣고 있었다. 유장은 입을 헤 벌렸다가 부사장님? 하고 얼떨떨하게 입을 열었다. 유기는 오히려 여상하다는 듯 덤덤한 표정이었다.

뭐해요? 운전 해요.

예?

옷 사러 가야죠. 면허 있다면서요?

유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운전? 이 차를? 차는 척 보기에도 흔한 모양새가 아니었다. 본넷 앞에 붙어있는 앰블럼이 외제차임을, 그 중에서도 비싼 것임을 외치고 있었다. 유기는 유장을 한 번 더 재촉했고, 유장은 두려움에 떨면서 차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의자가 푹신해서 소름이 더 돋았다. 유기는 백화점을 가리켰고, 유장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어떻게든 운전을 해냈다. 발렛 파킹을 하는 직원에게-유기는 백화점 vip였다-차키를 넘긴 유장은 이미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유기는 그런 유장보다 앞서 엘리베이터까지 아무렇지 않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유장은 후다닥 그 뒤를 따랐다.

유기는 위협받고 있는 인물이라기엔 지나치게 자유롭게 행동했다. 그냥 버릇이 안 들어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보안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유장은 유기를 따라가며 주위를 또 훑었다. 그리고 인이어에 대고 클리어, 하고 읊었다. 뒤따라오던 차량이 같은 층에 멈추었지만, 발렛 파킹 전용 층이라 되돌아나가야 했다. 인이어 속이 다시 시끄러워진 가운데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유기는 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고, 어물거리는 유장을 향해 고갯짓했다. 유장은 빨려들어가듯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었다. 네모난 좁은 방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을 먼저 연 것은 유기였다.

요즘 유행은 좀 알아요?

예?

아니다, 양복을 입어본 적은 있어요?

유장은 무어라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가 더 빨랐다. 유기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또다시 앞서 걸어나갔다. 유장은 그런 유기보다 앞서 걷기 위해 속도를 높여 걸었다. 유기는 익숙하다는 듯이 반짝반짝 빛나는 로비를 가로질러 한 코너를 향했다.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브랜드였다. 걸려 있는 옷도 몇 벌 없었다. 그런데도 넓은 장소를 차지하고 있었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있던 직원이 유기를 알아보기까지는 잔잔한 음악을 제외하면 그 코너는 조용했다.

어머나, 사장님.

직원이 방긋 웃으며 유기를 맞았다. 가까이 다가오려는 것 같아 유장은 유기의 비스듬한 앞쪽에 섰다. 딱 반 발자국 차이였고, 아마 유기의 시야에서 직원을 가리지도 않았겠지만, 직원이 가까이 다가오기에는 무리일 것이었다. 유장은 유기를 흘끗 쳐다보고 직원을 흘끗 쳐다 본 뒤에 다시 반 발자국을 물러섰다. 직원의 표정이 신기한 것을 본듯 했다가, 다시 웃었다. 아까만큼이나 밝은 웃음이었다. 대신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 이 사람 옷 좀 보려고. 정장으로.

유장은 어색하게 열중쉬어 자세를 고수했다. 직원은 아하, 하고 탄성을 내었다. 직원은 유기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는 유장에게 다가왔다.

그럼 먼저 치수 좀 재겠습니다.

...예?

유장은 당황해서 우물우물 말을 꺼냈다. 제 사이즈가 대략... 그러나 점원이 말을 잘랐다.

저희는 치수로 잽니다. 팔 좀 벌려주세요.

유장은 반 걸음 뒤로 물러서며 유기를 보았다. 그러나 유기는 이미 흥미가 떨어졌는지 카탈로그를 넘기고 있었다. 유장은 어색하게 다시 점원을 보았다가, 다시 유기를 보았다가, 그제사 포기하곤 반 걸음을 다시 앞으로 나섰다.

나머지 두 경호원이 안으로 들어올 즈음에는 직원이 유장의 치수를 다 기입할 즈음이었다. 두 사람은 카탈로그를 넘기는 유기의 옆에 등을 돌리고 붙어 섰다. 사이즈를 다 기입한 직원은 피팅을 보자며 유장을 피팅 룸으로 들여보냈다. 유기는 다른 직원이 내 온 커피를 마시며 피팅 룸을 흘끗 쳐다보았다. 급하게 마련한 것 치고는 좋은 인재였다. 서툴러 보이는 게 흠이었지만, 유기는 그 마저도 포용할 수 있다 자신했다. 아니, 포용하고 자시고가 아닌가. 어차피 자신은 장식용이었으니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자켓 좀 주시겠습니까.

유장이 문을 연 채로 말했다. 가장 기본적인 정장이라, 옅게 푸른빛이 도는 짙은 남색의 정장 아래 핏줄이 도드라진 발등이 비쳤다. 커프스를 잠그며 유장은 가볍게 셔츠 매무새를 다듬었다. 직원이 자켓을 가져다 주며 매무새를 보고 감탄했다.

허리가 가느시다 싶더니, 역시 좀 남네요.

...자켓이 좀, 붙는 것 같은데요.

직원은 대답하는 대신 방긋 웃었다. 덜컹, 하는 소리가 들려서 유장은 고개를 돌렸다. 유기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유장은 피팅룸 한 켠에 놓여있는 구두를 신고 한 걸음 한 걸음 유기를 향했다. 시선이 똑바로 자신을 향하고 있어서 조금 부끄러웠다. 유장은 팔이 닿을 만큼의 거리에서 멈추어 섰다. 유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잘 어울리시네요.

...감사합니다.

정장을 입으실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이게 첫 직장이 아니어서요.

이 일이 구원인 것은 맞지만. 유장은 뒷말을 꼴깍 삼켰다. 유기는 유장을 다시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샅샅히 살피고는 유장의 팔을 툭 쳤다. 그리고는 싱긋 웃었다.

사 드리는 보람이 있네요. ...검은색, 두 벌 주십시오.

두 벌? 유장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그러나 말리기도 전에 카드는 기계를 스쳤고 영수증이 곱게 유기의 손으로 넘어갔다. 직원은 방글방글 웃으며 다음주 같은 시간에 찾으러 오시길 기다리고 있겠다며 인사했다. 유장은 어안이 벙벙하여 다시 피팅룸으로 보내졌다. 이번에 유기는 싱글싱글 웃으며 그런 유장의 뒤를 눈으로 쫓고 있었다. 유기의 눈웃음이 짙었다.

다음 날 유장은 제 시간에 출근을 했다가, 상황실로 납치되다시피 들어갔다.

어제는 일도 없고 급해서 그대로 투입 되었지만.

헤드셋을 낀 정장 차림의 나이 많은 남자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설명을 좀 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묽게 탄 인스턴트 커피 믹스가 담긴 종이컵이 유장의 앞에 놓였다. 유장은 무릎을 붙이고 앉아서 그 종이컵을 내려다 보았다. 상황팀에서 말해 준 것은 다음과 같았다. 최근 형주 폭죽을 습격하는 괴한이 있었다. 처음에는 물적 손해에서 시작했지만, 최근에는 유표 사장을 습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현장에서 범인을 놓쳤기 때문에 다들 쉬쉬하며 입단속을 해 그리 많이 알려지지는 않다고 했다. 덕분에 그동안 거의 최저 수준을 유지하던 임원진에 대한 경호를 괴한이 잡힐 때까지 대폭 늘리겠다는 게 형주 폭죽의 입장이었다. 유장은 그 중에서도 부사장의 경호를 맡게 된 것이었다.

약간 꺼림직한 감이 없지 않은 설명이었다. 유장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며 질문했다.

다른 분들, 경호는...

거기까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명백히 귀찮은 투였다. 유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장은 인이어를 귀에 꼽고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앞을 향해 걷는 유장의 눈빛은 아까보다도 벼려져 있었다.


유기는 따끔따끔하게 찌르는 듯한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시선의 당사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선을 옮겼냐면 그것 또한 아니었다. 유기는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눈가를 문질렀다.

무슨 일이세요?

예?

그제야 꼼꼼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유장의 눈빛이 좀 덜 따가워졌다. 일주일 내내 쏟아지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려서 유기는 어깨의 긴장을 조금 풀었다.

내내 쳐다 보고 계셨잖아요.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아뇨, 아닙니다.

유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머리카락이 고개를 따라 살랑살랑 흔들렸다. 유기는 팔꿈치를 책상에 괴었다.

그냥.

그냥?

제 할 일이... 부사장님을 지키는 거잖습니까. 그래서요.

그렇게 웅얼거리는 유장의 눈동자는 꽤나 똑바르게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꽤나 충성스러워서 유기는 속으로 혀를 차며 빙긋 웃었다.

그렇다고 내내 저만 보시면 제가 좀... 부끄러운데요.

주의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장은 유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똑딱똑딱. 시계가 흘러가는 소리가 한참을 들리자 유기는 먼저 입을 떼었다.

어쩌다 이 일을 맡게 되셨어요?

예?

본업이 따로 있지 않으세요?

유장의 시선이 허공을 헤메었다. 입술이 달싹거리다가 머뭇머뭇 입을 다물 듯 해서 유기는 한 번 더 재촉했다.

그냥 궁금해서요. 어디 가서 얘기는 안 할 테니까요.

...제가 할 일이 이것 밖에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끝? 유기는 유장을 좀 더 바라보았지만 유장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입이 무거운 편인가. 그나저나 큰일인데. 유기는 눈을 가늘게 떴다.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았다.

그 생각에 확신이 든 것은 오후였다. 유기는 계약상의 문제로 인해 접대를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두 명의 경호원이 앞서서 위험하지는 않은지 차까지의 길을 체크했고, 유장은 유기의 뒤를 따르며 위험이 따라오지는 않는지를 확인했다. 유기는 이건 과보호인 것 같다며 농담을 했고 아무도 그 농담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차에 타기 직전이었다.

칼이 옆구리를 꿰뚫었다.

숨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짧은 찰나에 유장은 유기의 눈이 부릅뜨여지는 것을 보았다. 발소리도 없이 달려온 괴한이 유장의 옆구리를 찌른 것이었다. 정확히는 유기의 다리를 노린 것 같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유장은 비틀비틀 열린 차 문에 기대어 괴한을 향해 돌아섰다. 계획이 틀어진 게 명확하였지만 모자를 깊이 눌러 쓴 괴한은 다른 두 경호원과 다르게 당황하지도 않았는지 다시 순식간에 달려서 사라졌다. 유장은 자꾸 차 문에서 미끄러지는 손을 들어 몸을 받혔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유기를 바라보았다.

괜, 찮으, 십니까.

유기가 뭐라고 벙긋 입을 열려는 게 보였다. 아, 괜찮은가보다. 유장은 푸스스 웃고는 눈을 감았다.


당연하시만 유장이 눈을 뜬 것은 병원에서였다. 산소호흡기까지 달고 깊은 잠을 자고 있다가 유장은 천천히 눈을 떴다. 병실은 2인실이었는데,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다른 하나의 침상이 비어있었다. 유장은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을 들어올리려다 손등에 끼워진 주삿바늘을 보고 반대쪽 손을 들었다. 더듬더듬 벽에 기대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한 쪽 옆구리가 강렬하게 아파왔다. 병원복을 들춰보자 붕대가 둘둘 감겨있었다. 유장은 숨을 참으며 고통을 억눌렀다. 문이 열리고는 간호사가 들어왔다.

환자분 일어나셨어요?

......

진통제 놓아드릴 거에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려고.

예?

유장은 우물우물 중얼거리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시야가 흔들리고 있었다.

퇴원하려고 하는데요.

예? 무슨 말씀이세요

. 이렇게나 많이 다치셨는데. 간호사가 당황해 하는 걸 보며 유장은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무너졌다. 아, 안 되는데. 분명히 수술한 것만 해도 병원비가 꽤 나올 것이었다. 게다가 병실도 2인실이었다. 보험? 당연히 들어놓지 않았다. 유장은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노력했다. 간호사가 유장을 말렸다. 환자분, 지금 일어나셔도 될 때가 아니에요. 자리에 누우시고-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난 것은 그 때였다. 유장은 숨을 몰아쉬던 것도 잊고 그 쪽을 돌아보았다. 문 앞에 유기가 서 있었다. 당연하지만, 다른 두 명의 경호원을 대동한 채였다. 유기가 고갯짓을 하자 두 명이 문 앞을 버티고 섰다. 유기는 방긋 웃으며 간호사에게 말을 건넸다.

선생님, 지금 면회, 가능할까요?

간호사는 흘끗 시계를 보고 유장을 보았다. 유장은 조금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아까보다는 얌전해져 있었다. 퇴원하겠다는 말도 일단은 쏙 들어갔다.

...잠깐이라면요.

감사합니다. 잠시면 돼요.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병실을 나섰다. 진통제를 가져올 모양이었다. 유기능 의자를 끌어다 유장의 앞에 앉았다. 유기는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는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수고해주셨습니다.

...아니요.

의사 선생님께 듣자니 아슬아슬하게 장기를 비껴갔다고 하더라고요. 천만 다행이라고. 수술은 잘 끝났다고 하고요.

저, 병원비는...

유장은 말 끝을 흐렸다. 뭐라고 해야할까. 자신이 갚을 수 있을만한 비용일까? 유장은 고민했다. 유기의 말이 치고 들어오기 전까지.

아, 저희 측에서 보험 들어 놓은 게 있으니 괜찮습니다.

예?

생명에 은인이신데 이정도는 해야죠.

유기는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유장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유기를 바라보았다. 뭔가, 이 사람은 이상했다. 유장이 겪어온 사람들하고 다른 것은 물론이고, 웃을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도 계속 웃고 있었다. 유장은 눈을 몇 번 깜박이며 유기를 계속 쳐다보았다. 유기는 편히 누우시라며 자리를 권했다. 유장은 엉거주춤 침대 위로 다시 올랐다. 베개에 등을 기대자 옆구리가 아파왔다. 유장은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렇게 열심히 하실 것 없습니다.

...예? 유장은 다시 고개를 들어 유기와 눈을 마주했다.

유기는 여전히 웃는 낯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몸바치실 필요는 없다고요.

무슨...

어차피 저는, 버리는 패니까요.


사장이 습격받은 직후, 회의가 열렸다. 적지 않은 수의 이사와 사장, 부사장인 유기까지 모여 앉아 대책을 강구했다. 경찰에 신고할 수는 없었다. 사장인 유표는 이 회사의 두뇌나 마찬가지였다. 제품의 반수 이상이 아직도 사장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지고 있었고 주주들은 그런 유표 사장이 있는 한 이 회사는 안전하리라 믿고 투자한 것이었다. 그래서 역으로 공격을 받은 걸지도 모르지만, 여하간에, 습격을 받았다는 사실이 새어나가면 당장 회사의 주가가 요동칠 것이었다. 유표는 초조하게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지리하게 회의를 했지만 이렇다할 대책은 찾을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그동안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경호를 확충하는 정도였다.

그 때 조심스레 입을 연 것은, 유기였다.

유기는 폭죽 형태 같은 것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재능이 별로였지만-남은 반수 중에서도 아주 일부만이 유기가 개발해 낸 것이었고, 그리 잘 나가는 편도 아니었다-경영에는 꽤 재능이 있었다. 유표도 어느 정도까지는 경영을 해내었지만 유기가 좀 더 나은 편이었다. 유기는 입을 떼었다.

제가 미끼가 된다면 어떨까요.

이사들의 눈이 집중되었다. 유기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의 동선을 알아내서 공격을 한 걸 보면 내부에 정보가 있는 사람이겠죠. 그걸 역이용하는 겁니다. 경호를 늘리되 제 경호에 구멍을 하나 내죠. 그럼 저를 노릴테니까요.

사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다들 당황한 표정을 하고 있는 가운데 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표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사장님?

이 외에 다른 방법이 있나?

하지만...

없으면 이대로 진행하도록 하지. 유기야.

예, 아버지.

잘 부탁한다.

그게 끝이었다. 병실에는 회의장에서처럼 깊은 침묵이 맴돌았다. 유장은 귀를 의심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유기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유장은 한참이 지나서야 아주 조심스레 말을 꺼낼 수가 있었다.

...사장님이, 동의 하셨다고요.

그렇죠.

세상에 제 아들이 일부러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들겠다는데 말리지도 않는 사람이 있다니. 유장은 할 말을 잃었다. 유기의 웃음이 조금 미묘하게 변하며 유기가 입을 떼었다.

다른 데에는, 별로 화내지 않으시네요.

예?

...제 경호에. 구멍이라고 한 부분이요.

유장은 눈을 깜박이다 아, 하고 탄성을 내었다. 유기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그런가. 자신이 구멍이었나. 유장은 몇 번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쳐든 상태 그대로 눈을 감았다. 드르륵,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간호사가 들어와 손목에 연결된 줄에 진통제를 주사했다. 몸 안에 싸한 기운이 퍼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유장은 눈을 떴다.

그럼 저는 잘리는 겁니까?

...아뇨.

퇴원하시면 또 오셔야죠. 지금은 병가시고요. 유기가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유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기분 나빠하지 않으시네요.

기분 나쁩니다. 그렇다고 고용주를 한 대 칠 수는 없잖습니까.

유장은 억지로 목소리를 내리누르며 말했다. 유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아주 신기한 것을 보는 것 같았다. 잠시 그렇게 앉아있다 유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 할 건 다 말했으니 가야겠습니다. 참고로 밖으로 이 이야기가 새 나가면 고소할 겁니다.

부사장님.

예?

앞으로 제 근무 시간에는.

유장은 잠깐 뜸을 들이며 단어를 골랐다.

절대. 못 다치실 겁니다.

유기가 유장을 돌아보자 유장은 사납게 웃었다. 유기는 잠시 그런 유장을 바라보다 병실을 나갔다. 유장은 풀썩 드러누웠다가 통증과 잠시 씨름해야했다. 잠시 그러고 나니 피곤이 몰려왔다.


감동했습니다 선배님.

선배님 아닙니다.

유장은 인이어를 고쳐 끼며 말했다. 의사가 과한 운동은 자제하라 말했지만 서있는 것 정도로 과한 운동이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복부에 둘둘 말린 붕대가 약간 거추장스럽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옷도 입을만 했고 서 있을 만도 했다. 이렇게 달라붙어 있는 사람을 제외하면.

유장이 경호를 설 때 문 밖에 서 있던 두 사람 중 어린 쪽이었다. 평소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다가 퇴원하고 나니 갑자기 다가오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바로 내치기에는 눈이 지나치게 반짝였다. 유장은 최대한 사내에게서 눈을 돌리려 애를 썼다.

마초라고 합니다 선배님.

선배님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것 같은데, 선배님이시죠.

저 이 일 처음입니다. 그렇게 말하려다 유장은 그만두었다.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했거니와,-유기는 분명 고소한다고 말하고 갔다-말한다고 해서 그리 태도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장은 그냥 침묵하며 마초의 말을 들었다. 어차피 부사장실도 코앞이었다.

용의자가 달려들 때가 가장 냉정하고 냉철해야 하는 순간이라고 여러번 들었는데 정작 이런 순간이 오니까 당황하게 되고 쉽지가 않던데, 선배님만 유일하게 막아서시지 않으셨습니까. 존경합니다 선배님. 저도 선배님처럼 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

유장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경호를 서고 있던 두 사람 중 하나가 유장과 마초를 보자 암구호를 확인하고 자리를 떴다. 유장은 다른 한 사람에게 고개를 까딱 움직이고는-다른 한 사람은 그 인사를 무시했다. 어쩌면 움직이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부사장실 문의 문고리를 잡았다. 방금 전까지 흥분한 것처럼 보이던 마초도 차분히 가라앉아서 문 앞에서 하나의 벽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유장은 문 안으로 들어섰다.

유기는 첫날처럼 서류를 보고 있었다. 노크도 없이 들어온 유장을 눈치챈 유기는 아무렇지 않게 싱긋 웃으며 어서오세요, 하고 말을 건넸다. 유장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문을 닫고 유장은 문이 열리는 쪽 옆에 붙어 섰다. 유기는 손등에 턱을 괴고 거의 신이 난 듯 웃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다치는 걸 잘 부탁한다는 건가. 주어가 애매모호한 생각을 하며 유장은 얼굴을 차분히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기는 여기저기를 많이 돌아다니는 편이었다. 항시 사장실 혹은 공장에 붙어있는 유표 사장과는 달랐다. 유기는 다양한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계약을 체결하거나, 접대를 하거나, 혹은 접대를 받으며 다녔다. 유기는 어디를 가든 웃는 낯을 해보였고, 싫은 소리는 돌려 말하였으며, 누구와도 친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빠져 나갈 것은 능구렁이처럼 쏙쏙 빠져나가는 것이 마치 이 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유장은 사람들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딱 반 걸음 앞서서 막았다가, 인이어에서 괜찮다는 소리를 들으면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유기로부터 자신을 과잉 보호하는 경호원이라며 놀림을 샀다.

접대는 밤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유기는 거나하게 취해서도 자기가 카드를 긁는 것을 잊지 않았다. 상대방의 얼굴이 흙빛이 되던 말던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유장은 그런 유기를 둘러 메고 주변을 살피며 차로 향했다. 다행히 차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그들 근처에 접근해 오지 않았다. 유장은 차 뒷좌석에 유기를 싣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따라서 그 사이에 유기가 뭐라 웅얼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은 유장의 책임이라 볼 수 없을 것이었다.

예?

......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부사장님?

아...

유기가 중얼거렸다. 발음이 흐릿한데다 목소리도 작아서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면 못 알아들을 것도 아니었다.

엿 같다고.

...예?

그러니까 이 반문은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가 아니라 갑작스런 이야기가 당황스러워서였다. 유기는 거의 신경질을 내며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이 상황, 엿 같다고.

방금 전까지 방글방글 웃고 있던 사람이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유장은 시동도 걸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옆구리가 뜨끔했지만 무시했다.

있지, 방금 나랑 술 마신 사장.

......

어떻게든 납품량 늘려보겠다고 기를 쓰는 건 아는데, 품질이 영 아니거든?

......

그러면 잘라야지, 잘라 내야 하는데... 우리 아버지랑 친하단 말야.

내가 또 저 사람 어떻게 사는지도 다 알아요- 유기는 소리나게 등을 등받이에 기대었다. 우리 회사랑 같이 큰 회사란 말야 저 회사가. 유기는 거의 토해내다시피 중얼거렸다. 음식을 토하는 것과 말을 토하는 것 중에 뭐가 나을까. 유장은 조금 헷갈리게 생각했다.

유장 씨.

...예 부사장님.

내가 어떻게 해야할까.

......

아, 우리 아버진 뭐 이렇게 어려운 숙제를 주고 난리야... 친하게 지내질 말던가... 그냥 안 자르면 안 되는 건가...

유기가 마른 세수를 했다. 유장은 뭐라 입을 떼지 못하고 눈만 꿈벅였다. 꿈벅이다, 유장은 얼굴을 찌푸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

부사장님이라면, 잘 하실 것 같습니다.

유기가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유기의 시선이 얼굴에 와 닿는 게 느껴졌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을 희생해서 아버지를 지키려는 사람이 아닌가. 회사도, 최선을 다해서 지키려고 하겠지. 그러니까, 아마 유기라면 잘 하지 않을까. 유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인이어에서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코드 넘버 파이브. 코드 넘버 파이브.

코드 넘버 파이브. 유장은 나이 많은 상황실의 사람이 넘겨주었던 코드 리스트를 머릿속에서 다시 떠올렸다. 코드 넘버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파이브. 유장은 급하게 안전 벨트를 메었다. 옆구리가 뜨끔뜨끔 아파왔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부사장님, 꽉 잡으십시오. 유장은 거칠게 말했다.

...공장에 테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예?

술이 깨었는지 유기가 존댓말을 했다. 유장은 엑셀을 밟았다.


유장은 공장으로 차를 몰았다. 원래대로라면 안전한 곳으로 유기를 대피시켜야 했지만 유기가 강력하게 주장한 탓이었다. 공장이 피해를 입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요. 공장 쪽으로 갑시다. 유장은 유기의 말을 이기지 못했다. 일견 타당히 들리기도 하는 것이 없지 않았고- 여하간에. 공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다. 속이야 원래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차치하고라도 겉은 아주 번듯했다. 몇 명의 사람들이 대피해 나와 있었고 경호팀 몇몇이 어떤 물체를 둘러 싸고 있었다. 폭발물인 모양이었다. 유장은 유기를 그 쪽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막아섰다. 인이어 안이 부산했다. 듣고 있자니 일단 폭발성 물질은 맞는 모양이었다. 공장에서는 원래 쓰지 않는 물질이었고 위협을 목적으로 한 것도 맞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뇌관이 없습니다.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위험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유장은 어깨의 긴장을 약간 빼었다. 유기가 등 뒤에서 상황이 어떻답니까? 하고 질문을 하고 있었다. 유장은 침묵하고 반 걸음 물러섰다. 자신은 브리핑 담당이 아니었다. 두 명 중 나이가 많은 쪽-그러니까 마초 말고 다른 쪽-이 이야기를 할 것이었다. 유장은 유기의 뒤를 따르며 인이어를 다듬었다. 다시 위협적인 코드 넘버가 울려 퍼진 것은 그때였다.

코드 넘버 나인. 코드 넘버 나인.

코드 넘버 나인이라면 주요 인물의 집에 테러가 발생했다는 뜻이었다. 유장의 얼굴이 파랗게 굳었다. 지금 코드 넘버 파이브가 발령 되면서 주요 인물들은 다들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도록 되어 있었다. 유기야 떼를 써서 공장으로 왔지만, 유표는 다를 것이었다. 아마 도 집을 향했겠지. 공장에서 피신해 나온 기술자 중 유표는 없었다. 유장이 따라오지 않자 유기가 뒤를 돌아보았다. 유장 씨? 유장은 굳은 얼굴로 유기를 바라보았다. 브리핑을 받은 유기의 표정은 아주 말끔했다. 인이어 속에서 방송하듯 나이 많은 상황팀 담당자의 목소리가 줄을 이었다.

폭발물 발견. 사망자 0명. 부상자 0명. 반복한다. 코드 넘버 나인 발령. 사상자 없음.

유장은 긴 숨을 토했다. 그리고 유기를 향해 한 걸음 나섰다.

...당분간은 호텔에서 묵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

유기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약간 벌어졌던 입이 커지는 것도 한 순간이었다. 유기는 빠르게 유장을 향해 걸어와 유장의 어깨를 잡았다.

아버지, 아버지는?

유표 님은 무사하시다고 합니다.

유기의 얼굴에서 공포 비슷한 것이 빠져나갔다. 유기는 아주 천천히 웃었다. 유기의 뒤에서 마초가 말을 이었다.

자택의 안전을 보장하기 어려우니 호텔 같은 숙박 시설을 이용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죠.

유장을 놓은 유기는 손목 매무새를 고치며 마초의 말에 수긍했다. 유장은 다시 유기를 따라 공장 쪽으로 향했다. 유기는 그런 유장을 흘끗 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안합니다.

예? 아. 아닙니다.

팔 잡은 게 뭘 대수라고. 유장은 어깨를 쭉 폈다. 옆구리가 조금 욱신거렸다.


늦은 시간의 호텔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카펫이 잘 깔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소리가 들릴 정도의 고요 속에서 유장은 호텔의 방문을 열었다. 안에는 두 개의 방이 더 있었다. 스위트 룸을 샅샅이 뒤지고 나서 유장은 인이어에 속삭였다. 클리어. 마초와 같이 있던 유기가 문 안으로 들어섰다. 피곤한 듯 유기는 엄지와 중지를 각각 왼눈과 오른눈 눈꺼풀 위에 두고 눈을 문질렀다. 피곤할 법도 했다. 날짜가 벌써 넘어가 버린 시간이었으니까. 유장은 유기가 넥타이를 풀어 침대 위로 던지는 것을 보았다.

...수고 하셨어요.

유기가 침대에 주저 앉고서 말했다. 마른세수를 하는 손 틈으로 새어나온 목소리는 피로에 찌들어 가라앉아 있었다. 유장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야근 수당은 잘 나오겠지? 유장은 약간 정신 없이 생각했다.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은 순간이었다.

잠시만요.

...예?

유장 씨, 잠시만요.

유장은 약간 벙벙한 어안을 하고 잠시 멈춰 뒤를 돌았다. 유기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한 번 안아 봐도 될까요?

예?

아뇨 아뇨, 그런 의미 말고, 한 번 끌어 안아 봐도... 될까요?

이런 의미든 저런 의미든 그런 의미든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유장은 눈을 꿈벅거렸다. 한참을 말이 없자 유기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이상한 부탁을 했죠.

아, 아뇨.

원래는 그런 말을 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눈을 내리깔고 웃는 유기의 얼굴은 너무나도 처연해 보였다. 유장은 자신의 입이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을 뱉는 것을 귀로 듣게 되었다.

괜찮... 습니다.

정말요?

유기의 얼굴이 약간이나마 밝게 빛났다. 유장은 이제 몸의 움직임마저 뇌가 컨트롤 할 수 없다고 느꼈다. 고개가 제멋대로 끄덕여졌다. 유기는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유장에게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왔다. 그리고는 등 뒤에서 유장을 푹 끌어았고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수트 너머에서 온기는 전해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무게는 전해졌다. 허리를 두르고 깍지를 낀 손은 길쭉하고도 단단했고 팔은 힘이 없는지 조금 늘어져 있었다. 머리의 무게가 묵직하게 어깨를 내리 눌렀다. 유기는 천천히 제 이마를 유장의 어깨에 부볐다. 아주 천천히, 차라리 느릿하게. 호흡이 섬유 사이사이를 스쳐 살갗까지 파고들었다. 기나긴 한숨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저릿하게 소름이 돋았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왜? 어째서? 귓가가 둥둥거려서 유장은 한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그걸 불쾌의 신호로 보았는지 어깨 근처에서 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허리와 어깨에서 느껴지던 무게감이 사라졌다.

송합니다. 제가 너무 오래 있었죠.

가서 쉬세요. 친절을 머금은 말이 귓가에 내렸다. 유장은 실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문을 열어 방을 나섰다. 다른 경호원과 교대하고 있던 마초가 고개를 들어 유장을 보곤 표정이 환해졌다.

선배님!

유장은 퍼뜩 고개를 들어 마초를 보았다. 그리고는 코로 긴 숨을 내쉬었다.

선배님 아니라고 했습니다.

배님 퇴근하시는 겁니까? 저도 지금 퇴근합니다!

유장은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시 다물었다. 생각을 좀, 돌릴 필요가 있었다. 무게감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신경이 한 번 곤두세워지면, 그 감각은 오래도록 남아있다. 아주 부드러운 것을 만졌을 때,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느꼈을 때. 사소한 것이라도 날 선 신경에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유장은 곤란했다. 이불을 깔고 누워도 무게감이 지워지지 않았다. 아니, 역으로 선명해지기만 해서 유장은 마치 등 뒤에서 끌어안긴 채로 누워있는 것 같은 감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길디 긴 숨이 귓가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유장은 몇 번 뒤척여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웠다. 분명 등 뒤에는 이불 한장을 제외하면 바닥 뿐인데 뜨끈뜨끈한 감각이 사라지지를 않았다. 아무리 교대시간이 늦은 탓에 내일 출근이 늦다고는 하지만 지금까지도 잠들지 못하는 건 곤란했다. 벌써 저 멀리서 희뿌옇게 동이 트려 하고 있었다. 유장은 억지로 눈을 감았다.

쉬세요.

귓가에 누가 재생하기라도 한 양 목소리가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 어설프게 웃는 얼굴이, 눈 앞에서 사라지지를 않았다. 어리광을 부린 상대에게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유장은 조금 혀를 찼다.

결국 유장은 잠을 설치고 출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제대로 자지 못해서 눈이 뻑뻑했다. 다행이라 할 만한 것은, 졸음이 몰려오면서 뜨끈뜨끈하던 등 뒤가 조금은 식었다는 것이었다.

아직 교대를 하기 전인지 문 앞에 마초는 없었다. 유장은 고개를 까딱 움직여 인사를 하고는 문을 열었다.

유기는 통화중이었다. 유장은 소리 없이 문을 닫고 문 옆에 바짝 붙어섰다.

...아니, 황충. 아냐. ...그럴 리가.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래. 알았다.

유기는 반말을 쓰고 있었다. 항상 존댓말만 하는 줄 알았는데. 유기는 뒤를 돌아 창을 향하며 통화하고 있어서 유장이 들어온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유장은 입을 꾹 다물고 유기를 지켜보았다. 잠시 후 유기가 전화를 끊고 뒤를 돌았다. 그리고 멈칫 자리에서 멈췄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틈이 있었다. 잠시 후 유기는 방긋 웃으며 유장을 보았다.

잘 오셨어요? 언제 오셨어요?

방금 왔습니다.

피곤하실텐데 더 쉬고 오시지.

괜찮습니다.

유장은 피곤한 눈동자를 잠시 바닥에 내렸다가 다시 들어올렸다. 유기는 몇 번 눈을 깜박이곤 다시 예쁘게 웃었다.

그날도 출장이 있었다. 유기는 평소처럼 활발하게 접대를 하고 다녔다. 술에 취해 돌아온 것도 같았다. 유장은 이제 둘이서 경호하게 된 마초를 옆에 태우고 뒤에 있는 유기를 거울을 통해 흘끔 보았다.

역시 느낌이 잘못 된 게 아니었다. 유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날카로운 시선으로. 유장은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저렇게 자신을 볼 만한 이유가 있었던가? 어제까지만 해도 다정하다 못해 질척하기까지 했던 사람인데, 오늘은 술에 취해서까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시선이 맞부딪히자 유기는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선배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마초 씨.

유장은 신호에 따라 브레이크를 밟으며 한숨을 삼켰다.

세상은 정글입니다.

예?

그렇게 안이하게 말씀하시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새겨듣겠습니다, 선배님!

마초가 감명받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뒤에 있는 유기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유장은 이제 생각했다. 과연 내가 무슨 짓을 했길래 유기가 저렇게 화가 난 걸까?


일주일이 넘게 지나도록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 동안 유기는 자신의 화에 대해 유장에게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역으로 겉으로만 보기에는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었다. 유장과 단 둘이 있을 때는 서류를 보느라 고개도 거의 들지 않았다. 외출도 자제하는양 유장의 눈치를 보며 친구들과의 약속을 물리기도 했다. 그러나, 유장은 불안했다. 잠시 등을 돌린다던가, 차에 타고 있을 때 같은 때, 유기는 자신을 쳐다보았다. 그것도 아주 뚫어져라. 등 뒤가 따끔거리다 못해 타오를 것 같았다. 차라리 대놓고 쳐다보면 나을 텐데. 유장은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으며 생각했다. 점심은 맛있었다. 마초와 같이 온 집은 국물 맛도 깔끔했고 김치도 맛있었다. 마초는 뚝배기에 코를 박다시피 하고는 식사를 하고 있었다. 유장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런 마초를 바라보았다. 점심 시간은 짧았다. 경호하는 와중에 짬을 내어 밥을 먹고 와야 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장은 시계를 흘끔흘끔 보며 들어갈 시간을 가늠했다. 오랜만에 넉넉해진 주머니로 마초의 식사를 같이 계산한 유장은-마초는 눈을 빛내며 감사해했다-인이어를 끼우고 다시 회사로 들어갔다. 유장이 식사를 하는 동안 대신 유기의 방을 지켜준 경호원이 방 밖에 나와 있었다. 유장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근무지 이탈이라니. 자신도 하지 않는 짓이었다. 유장은 힘을 주어 주먹을 쥐곤 경호원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는 암구호를 댔다. 경호원은 고개를 까닥하고는 암구호를 댔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경호실장님 안에 계십니다.

유장은 아, 하고 탄성 비슷한 것을 대었다. 그러니까, 그 사이에 또 교대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유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초가 문 옆에 버티고 서자 유장은 노크를 했다. 그리고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그럼 그대로 조치하겠습니다, 부사장님.

부탁하지, 황충.

유기가 마지막인 듯 짧게 말했다. 그리고 유장을 발견한 듯 잠시 표정이 굳었다가, 사르르 녹아내리듯 웃었다.

점심 맛있게 드셨어요, 유장 씨?

잘 먹었습니다.

유장은 문 옆에 바짝 붙어 서며 말했다. 상황실에서 보았던 나이 많은 남자가 유장에게 고개를 까딱 움직이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저 사람이 황충인가. 유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황충이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팔을 걷은 셔츠와 약간 구겨진 정장 바짓자락이 금세 문밖으로 사라졌다. 돌아보자 유기는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장 씨는 제가 황충하고 대화하고 있으면 꼭 들어오시네요.

예? 아, 그게.

질투하세요?

유장은 금세 꿀먹은 사람마냥 입을 다물었다. 저게 또 무슨 소리인가. 질투? 갑자기 무슨. 유장이 당황하자 유기는 즐겁다는 듯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저는 질투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다시 날아온 폭탄은 더 컸다. 유장은 어안이 벙벙해서 눈을 몇 번이나 꿈벅거렸다. 그러니까, 지금, 플러팅하는 거지? 유장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입을 열었다.

...의뢰인과의 부적절한 관계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유장씨는 어차피 무슨 회사 통해서 온 것도 아니잖아요. 좀 어기면 어때요?

사실은 계약서에 그런 조항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계약서는 두꺼웠고 일일히 다 읽었다손 치더라도 기억이 나지 않았으니까. 유기는 예쁘게 미소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유장에게 다가왔다.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저는 그럴 생각 많으니까.

그리고 유기는 뒤로 돌아 다시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유장은 멍한 눈으로 유기를 바라보았다. 유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었다. 유장은 아파오려는 머리를 짚고 잠시 눈을 감았다. 만사가 다 귀찮아지려 했다.


상황이 나빠질 수록 일은 고되어졌다. 사고가 몇 번 터진 후 경비팀은 충원을 요구하였으나, 당장에서야 충원 될리가 없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경호팀마저 동원해 경비팀은 일을 꾸려나갔다. 경호원의 숫자가 준 것은 그 탓이었다. 유기를 공격하려다 실패한 이후, 괴한은 사람을 직접 노리기보다는 공장에 사고를 일으키는 것으로 노선을 바꾼듯이 보였다. 폭발물은 간간히 발견되었다. 마치 놀리는 것처럼. 사람들의 긴장은 점점 더 높아졌다. 유기의 경호 인력이 줄어든 것도 그 탓이었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경비를 도왔다. 다들 그쪽으로도 훈련 된 인재라는 것 같았다. 유장을 제외하면. 유장은 유기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것으로 어떻게든 제 소임을 다하려했다. 그러나 그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늘은 마초가 경비를 서는 날이었다. 유장은 평소처럼 출근하기 전에 병원에 들렀다. 옆구리의 실밥을 뽑기 위해서였다. 의사는 실밥을 제거해 주며 경고를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너무 심한 운동은 하지 마시고요, 스트레스 심하게 받지 마시고 약 잘 챙겨드시고... 잔소리는 끝이 없었다. 유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언제 여기에서 빠져 나갈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자니 의사가 혀를 차며 유장을 보내주었다. 유장은 꾸벅 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가면 그럭저럭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뒤에서 클락션 소리가 울려퍼졌다. 유장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눈에 익은 새까만 차 한 대가 클락션을 한 번 더 울렸다. 뒷좌석 문이 열리고 차에서 유기가 내렸다. 유장은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이 반차를 내고 나온 것이지 오늘이 결코 쉬는 날은 아니었다. 게다가 유기는 바쁜 사람이었다. 오늘도 스케줄과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것이 눈에 선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일개 경호원의 마중을 나오다니. 심지어 운전하는 사람은 마초의 옆에 서 있던 경호원이었다.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까. 게다가 이것은 스케줄에도 없는 돌발 행동이었으니까. 유장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유기를 향해 다가갔다.

...부사장님.

병원 갔다고 해서. 타이밍이 잘 맞아서 다행이네요.

......

타요, 같이 가죠.

아뇨, 괜찮습니다. 어차피 제 경호가 일이잖아요? 지금부터 시작해요.

러서기도 애매했다. 유장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보조석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손목이 잡혔다.

뒤에 타요, 유장 씨.

예?

유기는 친절하게 미소를 지으며 한 번 더 반복했다.

뒤에 타요.

하지만,

뒷좌석에 누가 뛰어들어서 공격하면 유장 씨가 지켜줘야죠.

달리는 차에 뛰어드는 간 큰 사람이 있다면 공격하기 전에 교통사고로 실려갈 것 같은데. 그러나 유장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손에 꽤나 단단하게 힘이 깃들어 있었다. 놓지 않을 작정이군. 유장은 속으로 또 한숨을 쉬며-이쯤되면 속이 꺼지겠다 싶었다-천천히 보조석 손잡이를 놓았다. 그리고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차가 출발하자 제일 먼저 유기가 입을 떼었다. 유장은 안전벨트를 매다 유기를 돌아보았다. 유기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었다.

생각은 해 봤어요?

예?

제 애인이 되는 거.

유장은 다시 순식간에 골치가 아파졌다. 흘끗 운전석에 앉은 사람을 보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양 묵묵히 운전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유장은 정장을 입지 않아 손에 감아놓은 노란 천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뭐라 거절하면 좋을지를 생각했다. 일단은.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너무하네.

유기가 장난조로 비난하듯이 말했다. 유장은 유기에게서 눈을 떼고 앞좌석을 노려보듯이 보았다. 유기는 긴장이라도 푸는 양 긴 숨을 내쉬고 등을 편하게 풀었다.

뭐, 좋아요. 긍정적인 대답, 기대하고 있으니까.

유장은 앞좌석에 구멍이라도 나길 기대하듯이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말로 뭔가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유장은 운전석의 경호원이 말하자 깜짝 놀라버렸다.

부사장님, 갑자기 죄송하지만.

예?

...유표님이 공장에서 다치셨다고 합니다.


다행히 유표는 심하게 다치지 않았다. 폭발과는 멀리 있었던 것이 천운이었다. 그나마 유표가 가장 가까이 있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유표 외에 다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폭죽 공장에서 폭발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다. 후미진 곳에서 폭발이 일어나서 망정이지, 잘못하면 공장이 통으로 날아갈 뻔했다. 차에서 내린 유기는 아버지를 향해 달려갔다. 유표는 긁힌 곳을 닦고 있었다. 본래는 흰 색이었을 수건이 군데군데 붉은 기가 묻어 있었다.

아버지.

유기가 말하자 유표는 흘끗 유기를 보았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경비팀장은 어디 있나.

여기 있습니다.

경비팀장이 앞으로 한 발 나서서 유기는 뒤로 물러서야 했다. 뒤에 서 있던 유장 또한 한 걸음 물러서야 했다. 유표는 덤덤하게 경비팀장에게 말을 이었다.

경비팀 아직도 충원 덜 됐나?

...죄송합니다.

경호팀을 좀 더 끌어오게.

하지만 유표님, 그럼 유기님의 경호가.

저는 괜찮습니다.

기가 불쑥 끼어들었다. 유장은 그제서야 똑바로 유기를 바라보았다. 경비팀잘이 당황해서 유기를 불렀다.

부, 부사장님?

저보다는 공장과 직원이 우선입니다. 경호 인력을 좀 더 투입하시죠.

그렇게 하게.

...알겠습니다.

경호팀장과, 조율하겠습니다. 경비팀장이 뒤로 다시 한 발 물러섰다. 유표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까부터 대기하고 있던 차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약간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꽤나 절도있는 걸음걸이였다. 유기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 차가 멀리로 사라지고 나서야 어깨의 힘을 풀었다. 유장은 그런 유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경비팀장.

예, 부사장님.

아버지를 잘 부탁합니다.

...예, 부사장님.

주변에 있는 직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장은 유기의 뒤에 바싹 붙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유기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저벅저벅 걸어서 사무실을 향했다. 그 걸음걸이가 유표를 많이 닮아있었다. 유장은 유기의 뒤를 따라가다 흘끗 뒤를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유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장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다시 뒤를 돌아 유기를 따랐다. 유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뒤돌아보지 않았다.


유기를 경호하는 인원은 더욱 줄어들었다. 이제는 문 앞을 지키던 인원조차 없이 유장은 유기를 혼자 경호하게 되었다. 당연히 유장의 신경은 날이 섰다.

유장 씨.

유기는 어깨를 뻣뻣하게 펴고 있는 유장을 불렀다. 유장은 눈을 깜박일 새도 두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유기는 피식 웃었다.

적당히 긴장해도 돼요. 유장 씨에게 피해 갈 건 없으니까.

저랑 좀 놀아주기만 하시면 돼요. 아시잖아요. 유장은 이를 악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경호가 붙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위험이 상당하다는 방증이었다. 그런데 이제 남은 경호라고는 버리는 패로 쓰겠다는 유장, 달랑 하나였다. 그런데도 유기는 이상할 정도로 태평했다. 조금 전의 말투도 덤덤하다 못해 경쾌할 수준이었다. 자신의 안위를 걸고서, 저렇게까지 담담하게 굴 수 있는 건지. 유장은 오히려 제가 미칠 지경이었다.

점심 시간이 되었지만 유장은 쉽사리 제 자리를 뜨지 못했다. 교대할 사람은 언제쯤 오는 걸까? 아니, 오기는 하는 걸까? 유장은 찝찝하게 생각하며 문고리를 잡았다. 다녀오세요. 유기는 방글방글 웃으며 유장을 배웅했다. 유장은 유기를 돌아보았다가 앞으로 몇 걸음 나서고는 문을 닫았다. 복도는 조용했다. 유장은 저벅저벅 걸어 문을 향했다. 잘 닦인 바닥에 유장이 걷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래서 유장은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선배님!

유장은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 그 목소리가 인이어에서 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황실하고는 거의 연락을 하지 않다 보니 귀에 끼워뒀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유장은 인이어를 손가락으로 누르곤 마이크에 대고 중얼거렸다.

마초?

예 선배님 마초입니다!

마초의 목소리는 경쾌할 정도였다. 유장은 어깨의 힘을 조금 빼고 마초에게 말을 걸었다.

선배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선배님 점심 드셨습니까? 저도 이제 조금 있으면 점심시간이라서요!

...같이 먹죠.

예 잠시만요! 저 여기만 둘러보고요.

유장은 다시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간단한 잡담이 이어졌다. 경비팀에 가 있습니까? 예, 지금 공장 둘러보고 있는 중입니다. 선배님 점심 뭐 드시겠습니까? 어제 월급날이었잖습니까. 그러니까 저는 선배님이 아니라고 몇 번을...

어, 팀장님!

유장은 눈을 깜박였다. 아직도 자신 앞에는 아무도 없으니 근처에서 들린 소리는 아니었다. 아니, 그렇게 보기에는 마초의 목소리가 너무나 뚜렷했다. 팀장님, 이라니. 경호 팀장과 경비 팀장 중 어느 쪽일까. 계열이 분리되어 있다보니 연구나 일반 사무직 쪽의 팀장은 안면조차 없었다. 유장은 그렇게 가벼이 생각하며 발을 한 걸음 더 디디려고 했다.

뭘 들고 계신 겁니까? 팀장님, 왜 그러시는.

인이어를 통해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유장은 발을 멈춰세웠다. 팀장? 무슨 팀장?

마초? 마초?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지만 답이 없었다. 범인은 내부자일 확률이 높다고 했다. 유장은 공장을 향해 달리려다 인이어를 다시 눌렀다. 버튼을 누르자 상황실로 인이어가 연결 되었다. 유장은 반대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며 인이어에 보고하듯 말했다. 공장 구역에 부상자 발생. 즉각 구조 바람. 반복한다. 공장 구역에 부상자 발생. 즉각 구조 바람. 유기의 집무실을 향하는 유장의 발이 유난히도 느리게 느껴졌다.

벌컥 문이 열렸다. 유장은 헐떡이는 숨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문고리를 우그러트릴 듯이 꽉 쥐었다. 유기는 얌전히 제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약간 놀란 눈을 한 채 유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은 여전히 서류에 맞닿아있는 펜 위에 올려져 있었다.

유장 씨? 벌써 식사 끝내고 오셨어요?

부사장님.

유장은 숨을 고르려고 노력하며 입을 떼었다.

또, 테러가 있었습니다.

뭐라고요?

유기가 몸을 일으켰다. 유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 공장에서, 무슨, 팀장이.

팀장? 팀장이 테러범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유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리고는 빠르게 앞으로 걸어가 유장 을 앞질러 복도로 나갔다.

아버지. 아버지는 괜찮으세요?

괜찮으실 겁니다. 아직 공장에서 빠져나갔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으니까요.

세상에, 황충이. 아버지와 가까운 분이라 그럴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유기의 발이 조금씩 빨라졌다. 유장은 그런 유기를 앞서기 위해 달리듯 걷다가 우뚝, 발을 멈춰 세웠다.

부사장님.

예?

유기가 몇 걸음 더 가다가 유장을 돌아보았다. 그 거리가 이상하게 멀어보였다. 유기가 답답하다는 듯이 재촉했다.

유장 씨 왜 그러세요, 한 시가 바쁜데.

유장은 입을 떼었다.

 

제가 경호팀장 님이라고 말씀 드렸던가요?

 

유기의 표정이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부사장님, 혹시.

유장 씨.

유기가 애써 웃었다. 입꼬리를 끌어올리려다 실패한 것처럼 유기의 표정은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유장은 주춤, 뒤로 물러섰다. 유기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다, 알고 계셨습니까?

유장, 씨.

유기의 표정이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유장은 자신이 잘못 짚었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다 알고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혹시, 부사장님, 아니, 유기 당신이-

쉬잇, 유장 씨.

입이 유기의 손에 막혔다. 유기는 공기도 통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유장의 입을 틀어막았다. 목 뒤를 둘러싼 다른 한 손은 아플 정도로 누르고 있었다. 아주 자연스레 주도권을 빼앗겨서 유장은 아연해졌다. 아무리 경계를 풀고 있었다지만 이렇게 단숨에. 유장은 두 손으로 유기의 두 손목을 잡았다. 유기가 눈을 휘어 미소지었다.

말씀하지 마세요, 유장 씨.

......

목적어가 없는 말이었다.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일까, 아니면 '사실'을 말하지 말라는 것일까. 유기는 으쓱 어깨를 움직이고는 속닥였다.

다친 사람도 없잖아요? 그냥, 저와, 제 아버지가 조금씩 다쳤을 뿐이지.

유장 씨. 저희 아버지는 이미 글렀어요. 공장이 집어 삼킨 사람이죠. 저 사람이 사장으로 있다는 사실이 결국에는 이 회사를 위험하게 만들 거에요. 아들조차 내다 버린 사람이 뭘 소중하게 여기겠어요? 자기 자신 밖에 더 있나요? 저는 아버지에게서 사람들을 구출하려고 한 거에요. 유장 씨. 저는, 저는. 유기는 간절하게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입이 막힌 상태에서 유장은 손에 힘이 점점 빠지는 걸 느꼈다. 그에 비례해서 유기가 입을 막은 손도 점점 힘이 약해졌다. 유장은 툭, 유기의 손을 쳤다. 유기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나갔다. 유기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마른세수를 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경찰을 불러도 소용은 없을 겁니다. 황충이랑은 이미 말을 맞춰 놓았어요. 나는 자백하지 않기로.

부사장님.

유장은 입을 열었다. 이것은 스톡홀름 증후군이나,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유장은 나중에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이 너무나 묻고 싶었다.

왜 저를 진작 해고하지 않으신 겁니까?

해고할 이유는 넘쳐났는데도, 불구하고. 둘이 정말 짜고 행동했다면, 그것의 유일하게 통제할 수 없는 변수인 자신이 가장 걸림돌이 되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유기는 마른 세수를 하던 손 틈으로 유장을 흘끔 올려다 보았다. 눈빛이 날카로웠다. 그것이 마치 심장에 파고들어 박히는 것 같았다. 유기가 웅얼거리듯이 대답했다.

...당신이 나를 구해준 유일한 사람이니까.

유장은 뭔가 부러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뭔가, 옳고 그름을 구분지어 놓은 선 같은 것이 일그러지고 망가져서, 구겨지고 뒤틀려서.

...갑시다.

유장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유기가 고개를 들었다.

유장, 씨?

마초가 다쳤습니다. 가서 병원으로 보내야합니다.

유장 씨.

유기가 배시시 웃었다. 그 얼굴이 너무나도 예뻤다.

절, 도와주실 거에요?

착각하지 마십시오.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있으면 다 터트려버릴 겁니다.

유장은 엄중하게 말했다. 유기의 웃음이 조금 흐릿해졌지만,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리고 다시 짙게 웃었다.

황충에게는 엄중하게, 경고해두십시오.

네, 유장 씨.

...가죠. 마초를 보러 가야합니다.

유장 씨.

뭡니까?

한층 불손하게 말이 튀어나갔지만 유기는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빙긋, 미소를 띄었다.

좋아해요. 아시죠?

유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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