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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따라 날이 유독 흐렸다. 장마가 지난 지도 한참인데 곧 비라도 올 모양인지 하늘이 꾸물거렸다. 그렇게 흐리면서 날은 푹푹 쪄댔다. 차라리 시원하게 쏟아지면 좋을텐데. 유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퇴근을 했지만 일부러 차를 두고 나왔다. 조금, 걷고 싶었다. 해도 지지 않았고 자신을 알아볼 사람도 없지 싶었다. 서류가방을 들고 유기는 번화가 쪽을 향했다.
오늘따라 숨쉬기가 버거웠다. 공기가 무거워서 그런 것일까. 유기는 자켓을 벗어 팔에 걸쳤다. 커프스 링크를 떼어 자켓 주머니에 쑤셔넣고 팔을 걷었다. 넥타이도 풀어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음, 좀 껄렁해보이려나? 반듯하게 다듬은 머리를 한 상태로 유기는 생각했다.
복장을 정돈(?)하는 사이에 그새 거의 번화가였다. 인구 밀도가 높아진 것이 느껴져서 유기의 입매가 좀 더 굳었다. 이제 대충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서 저녁이나 때우고 집에 가야지. 그리고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옮기려고 했다.
“-기?”
문득 가게에서 틀어놓은 음악소리를 뚫고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서 유기는 발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리자, 나쁘게 말해서 꼬질꼬질해 보이는 한 남자가 있었다. 눈 밑의 흉이 도드라져 보였다.
“저요?”
유기는 문득 반문했다. 남자의 얼굴이 꿈틀 움직였다. 낯빛이 조금, 변했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그러니까-
“저기.”
“네.”
“…난, 저기. 라고 했는데.”
“네, 절 부르신 거 아니세요?”
“그게.”
남자는 어물거렸다. 잘못 들은 건가. 유기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인상이, 참. …좋다고.”
“…아, 예.”
초보 전도사인가. 유기는 속으로 혀를 찼다. 남자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오르다 못해 거의 울상이었다. 뻔뻔하지 못한 것은 오랜만에 보아 퍽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다. 꼬르륵 소리가 들린 것은 그 때였다. 비트가 강한 음악을 가게에서 크게도 틀어놓았는데, 배에서 나는 것이 분명한 꼬르륵 소리가 그렇게 선명하게 들리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약간 당황하고 있자니 남자의 얼굴이 거의 새파랗게 질렸다.
문득 유기의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이 치받았다. 아마 최근에 본 사이비 종교에 관한 뉴스 때문일 것이었다. -설마 밥도 안 주고 저러는 건가? 유기 안의 한국인이 빨간 버튼을 꾹 눌렀다. 그래서 유기는,
“…그럼 이만.”
“저기요.”
후다닥 도망가려는 남자의 팔을 잡아챘다.
“같이 식사하시죠.”
한참을 사양하고 도망가려다가 유기에게 덜미를 잡힌(?) 남자가 간신히 고른 것은 콩나물 국밥이었다. 버글버글 끓는 뚝배기가 한 사람 앞에 하나씩 놓이고서도 남자의 고개는 들릴 줄을 몰랐다. 어지간히도 창피한 모양이었다. 저래서 전도는 어떻게 하려고 저러지? 그야말로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굶고 다닌 게 아닐까? 유기는 숟가락을 들며 권했다.
“드시죠.”
“…”
남자가 쭈뼛거리다 숟가락을 들었다. 유기는 뚝배기에 수저를 넣고 휘저었다. 밥알이 수저를 타고 돌았다.
그나저나, 국밥이라니. 이런 식당에서 먹는 것이 오랜만이다 못해 어색했다. 대중적인 맛일테니 입에 딱 맞는 맛은 아닐 거고, 그럼 좀 양념을 넣어야 할텐데 무슨 양념을 넣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식탁 옆에 늘어선 통들 중에 어떤 통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모르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는데 남자가 통 하나를 집어서 자신의 뚝배기 앞에 놓았다.
“이거. …후추.”
“아.”
“이건 식초. 이건 다대기. 거기 새우젓 넣던지. 청양고추랑 마늘도 주셨으니까. …아니다, 그냥 주면 내가-"
말아줄… 게… 남자의 말끝이 갈 수록 흐려지다가 종래에는 자신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니가 알아서 하겠지만.’ 하고 말을 돌렸다. 유기는 숟가락을 놓았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곤 팔꿈치를 상에 괴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양념 찾는 거?”
“어?”
“티나요?”
“…어, 뭐. 부잣집 도련님이 여기 오진 않을 거 같으니까.”
“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내가 부잣집 도련님인 거? 쿨룩, 하고 숨을 들이쉬던 유장이 기침을 했다. 한참을 기침한 남자는 물 한 컵을 들이켜고 다시 한 번 기침을 하더니 어색하게 말했다.
“아니 니 복장이.”
“복장이?”
“부티가 나니까.”
“어디서요?”
남자가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을 보고 유기는 확신했다. 이 남자는 옷을 볼 줄 모른다. 물론 지금 입고 있는 셔츠와 바지, 손에 들고 있는 자켓도 충분히 고가품이었다. 유행을 꽤나 답습하고 있기도 했고. 그러나 유행 같은 것도 아는 사람이나 아는 것이다. 특히 남성복은 더욱 더.
유기는, 남자에게 관심이 생겼다. 자신을 잘 아는 듯 구는 이 사람은 대체 뭘까?
“혹시요,”
그래서 유기는 덫을 놓기로 했다.
“제 마음 읽어요?”
잡으려면 일망타진. 유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비죽이 웃었다.
“무슨, 소리야?”
남자는, 유기가 생각한 것보다 더 당황했다. 그 쪽은 교리에 없는 모양이지? 유기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까 제 인상이 좋아보인다면서요.”
“그, 건…”
남자의 눈이 잠시 커졌다. 그리고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푹 내쉬었다.
“그냥, 유기 네가, 잘생겼으니까.”
남자는 아까보다, 후련해보이는 얼굴이 되었다. 천천히 얼굴이 달아오르긴 했지만, 그건 차치하도록 하자. 유기는 다른 쪽을 주목해야 했다.
“이상하다.”
“….?”
“제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요?”
“-아.”
유기는, 부사장이었지만 언론 노출이 굉장히 적었다. 옛날에야 아버지를 따라 다니다 멋모르고 찍힌 적이 몇 번 있지만 정말 어렸을 적이었고, 성인이 된 후로는 없다시피 했다. 그러니까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이름이 흔한 편도 아니고.
“다시 해 볼까요. 혹시 내 스토커에요? 아니면 날 스토킹하는 집단에 소속 되어 있는 건가? 음, 종교 단체?”
“아니라고! 난 그냥,”
“그냥?”
“그냥…”
자리에서 일어날 듯 흥분했던 남자가 다시 의자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말 해도 넌 안 믿을 거야.”
드디어 종교 얘기가 나오는 건가. 유기는 말 없이 귀를 기울였다.
“그냥 미친 놈 취급할 걸. 빌어먹을, 이것도 얘기하면 안 되는 건데.”
“흠?”
저런 수법인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유기는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조금 당황했다. 의자 끌리는 소리가 길었다.
“야 그냥, 미친놈 만났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려. 밥은 잘 먹었다.”
“예?”
아직 한 술도 안 떠 놓고. 남자는 후드를 뒤집어쓰곤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리고 문득 유기를 돌아보았다.
“아 근데, 너 잘생긴 건 사실이야.”
그리고 남자가 픽 웃었다. 유기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남자가 정말 밖을 향해서 유기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돈을 던지듯이 두고 유기는 저벅저벅 걷고 있는 남자를 헐레벌떡 따라갔다.
“저기요! 저기요!”
소란했는지 남자는 뒤를 돌았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뭐야! 왜 따라와!”
“저기요! 잠깐만! 아, 실례합니다. 저기요!”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어느 순간 남자는 뛰고 있었다. 그걸 따라서 유기도 달리기 시작했다. 번화가여서 발에 걸리는 것도 많았고 달리기가 쉽지 않다는 게 그나마 장점이었다. 유기가 남자를 잡아챘을 때 남자는 숨조차 헐떡이고 있지 않았다.
“저기, 저…”
“아니, 왜…”
유기는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그럼 나에게 왜 말을 건 건지, 당신은 누구인지, 어디에서 보낸 건지. 수많은 걸 묻고 싶었지만 어떤 것도 묻기가 조심스러웠다. 습하고 더운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간신히 숨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들자 얼떨떨한 표정의 남자가 멍하니 헐떡이는 유기가 단단히 잡고 있는 당신의 팔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
“-예.”
“유비라는 이름 듣고 생각 나는 거 있냐?”
“예?”
유기가 얼떨떨해 하자 남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툭, 던지듯이 말했다.
“그럼 유장은?”
순간 머리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왔다. 뭔가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전까지 잔잔한 파도가 치는 것 같던 마음이 폭풍이 몰아치는 상태로 변했다. 아주 그리운 것을 떠올린 듯, 그러나 기억은 나지 않는.
“유장?”
처음 듣는 이름을 유기는 아주 친숙하게 발음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당황했다. 남자가 팔을 늘어뜨렸다. 무언가 포기한 듯 보였다.
“…내 이름이야.”
“아.”
드디어 남자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아주 이상한 성취감이 들었다. 유기는 문득 유장을 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덜렁 걸려있는 손목시계는 꽤 늦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남은 한 손으로 주섬주섬 자켓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내밀었다.
“번호 좀 줘요.”
“…뭐?”
“설명을, 들어야 할 거 같은데.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유장은, 잠시 꾸물거리다 천천히 반대편 손을 들었다. 그리고 자기 핸드폰을 꺼냈다. 오래된 2g 폰이었다. 버튼을 꾹꾹 누르고 초록색 수화 버튼을 누르자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유기의 핸드폰이 울렸다. 유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기,”
“내일.”
“…”
“내일 말하자.”
유장의 표정은 피곤해 보였다. 유기는 천천히, 유장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잠시 후, 유기는 전화가 끊긴 핸드폰과 덩그러니 남았다.
당연하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현실적인 듯 하면서도 지나치게 이상한 경험이라 유기는 계속 펜으로 서류를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평소보다 지저분해져서 나온 결재서류에 직원들은 당황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신경을 쓸 수는 없었다. 그 남자가, 연락을 안 하면 어쩌지? 번호까지 저장해 두고서 하는 말치고는 나약하지만 두려울 수 밖에 없었다. 아주 기묘한 절박함이었다. 하긴 생판 남이 자신의 개인정보를 알고 있는 건 꺼림칙하겠지만, 이건 좀 다른 느낌이었다. 다 고쳤다고 생각한 다리 떠는 습관이 다시 나오려고 할 때 쯤 핸드폰이 진동했다. 유기는 재빨리 화면을 켰다.
어디서 언제쯤 볼래. 어제의 피곤해했던 얼굴이 그대로 떠올랐다. 유기는 머뭇거리다 퇴근 시간과 사람이 적은 도시 외곽 카페를 지정했다. 답장이 오지 않는 동안 여러가지 걱정이 뇌리를 떠돌다 사라졌다. 몇 시간처럼 느껴지는 몇 분이 지나고 알았다는 답장이 왔지만 잠시의 안도 후 초조함은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유기는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평소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신호등들이 자꾸 거슬렸다. 엑셀을 밟는 발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유기는 차를 몰았다.
날은 여전히 꾸물거렸다. 늦은 시간이지만 여름답게 해는 지지 않았음에도 그리 밝지 못했다. 장마가 얼마나 남았었지? 그렇게 생각이 들다가 곧 잊혀졌다. 주차장에 차가 없었다. 단 한 대도.
워낙에 외진 데에 있는 곳이기도 하고 조용한 곳이다 보니 평일엔 사람이 없는 것도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아직 유장은 오지 않았나? 유기는 차를 대며 코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계단을 걸어올라가 유리문을 열자 직원이 자연스레 응대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직원 외의 사람은 볼 수가 없었다. 유기는 주문을 하고 문득 2층에 갈까 생각했다. 오는 걸 내려다 볼 수 있으니 덜 초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2층에 올라간 유기는 당황했다.
유장은 의자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며 불량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유기는 반쯤 뛰듯이 창가 테이블을 향했다.
“유장 씨?”
발음하는 것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유장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덤덤한 얼굴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 왔냐.”
“예. 그, 밑에 차가 없던데.”
“택시 타고 와서.”
“아.”
가실 때 힘들 텐데. 워낙에 외진 데에 있는 곳이라 택시 잡기가 쉽지 않을 것이었다. 유기는 유장의 맞은 편에 앉았다.
유장은 어제의 꼬질꼬질함이 거짓말인 듯 편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도 약간 부스스하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유기였다.
“식사는 하셨어요?”
“아직.”
끝나고 집 가서 먹으려고. 유장은 퉁명스레 말했다. 식당에서 볼 걸 그랬나. 유기는 문득 저도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꼈다. 빵이라도 좀 사올까. 생각하는데 진동벨이 울렸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유장이 더 빨랐다.
“뭐 물어볼지 생각이라도 하고 있어.”
유기는 멍하니 그런 유장을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유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메리카노 한 잔과 물 한 잔을 가지고 올라왔다. 그리고 아메리카노는 유기 앞에, 물은 제 앞에 두었다. 그제서야 유기는 유장 앞에 아무런 잔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지독하게 혼란스러웠다. 그 혼란을 가르고 유장이 말했다.
“이 대화에 규칙 하나만 정하자.”
“…예?”
“화내는 건, 대화가 다 끝나고 하자.”
이상한 말이었다. 유기는 멍하니 유장의 덤덤한 표정을 바라보다,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장이 물컵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리고 말했다.
“뭐부터 물어볼래.”
유기는 김이 올라오는 아메리카노를 조금 마신 후 목을 가다듬었다.
“저를 어떻게 알고 계신거죠.”
“전에 안면 있게 지내던 사이거든.”
전생이라던가 그런 거 아니고, 잘 알고 지내던 사이. 그렇게 말하는 유장의 손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유기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더 삼키고 말했다.
“전 기억이 안 나는데.”
“기억을 잃었으니까. 너도, 나도.”
“……” “나는 우연한 기회에 되찾게 되었고… 아 빌어먹을.”
유장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갈 수록 미친 소리 같군. 유장이 중얼거렸다. 유기는 멍청히 중얼거렸다.
“병원에서 기억 상실 진단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자체를 아무도 기억 못해. 아주 소수의 사람만 제외하면.”
“예?”
“좋아. 본격적으로 미친 소리를 시작하자.”
유장은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잔을 내려두고 유장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 세상은 어떤 사람이 꾸는 꿈이 원동력이야.”
“…….”
“그 꿈을 선발하기 위해서 주기적으로 드림배틀이란 시합이 열리지. …우리는 그 시합의 참가자였어.”
“…….”
“너무 자세한 부분은 복잡하니까 생략하고, 참가하는 동안에 알고 지냈었는데, 탈락했지. 탈락하면서 시합에 참가했던 동안의 기억을 잃은 거고. 아까 말한 것처럼, 나는 우연한 기회에 찾게 되었고.”
“…정리하면.”
유기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우리는 누군가의 꿈 속의 인물이라는 건가요?”
“전혀 이해를 못했군, 젠장.”
유장은 마른 세수를 했다. 유기는 혼란스러웠다. 진작에 폐기한 종교집단 설이 강하게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세계의 원동력? 드림배틀? 꿈? 그러나 스스로가 미친 소리라고 하는 걸 보면 그 사실을 맹신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유기는 빈 물컵을 잡았다가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내려놓는 유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우리는 어떻게 만났죠?”
“뭘 어떻게 만나 싸우다 만났지.”
“…….”
“…서로를 감지할 수 있는… 장치 같은 게 있어, 참가자들은. 내가 그걸 듣고 너한테 시비 걸려다 경호원한테 잡히는 바람에.”
“아.”
“그땐 맨몸이었으니까 아마 너희 경호 기록에 있을 걸.”
“언제쯤이요?”
“작년 여름인가.”
남자는 창피한지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유기는 다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삼켰다.
“저희 많이 친했나요?”
유기는 유장의 얼굴이 문득 침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아주, 잠깐.
“그럭저럭.”
마치 착각인 것처럼.
“가끔 만나서 밥 먹을 정도는 됐지.”
“싸우는 중이었는데?”
“휴전협정 비스무리한 걸 맺었었거든.”
어차피 너나 나나 그렇게 센 편도 아니었고… 유장은 거의 투덜대듯이 그렇게 말했다.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일어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유장이 의자를 움직인 소리였다. 커피 한 잔, 물 한 잔. 유기는 눈을 눌러 감았다 다시 떴다.
“그럼 왜 찾으러 오지 않-….”
유기는 말끝을 흐렸다. 당연한 결론에 귀결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거나, 더 못했겠지. 저렇게 말을 하는 사람이 경비실을 통과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 들었다. 막무가내로 찾으러 온다면 경찰이 불렸을 수도 있다…. 혼란이 얼굴에 드러난 것인지, 유장이 픽 웃었다. 의자가 바닥을 미끄러지는 소리가 귀를 긁었다.
“더 물어볼 거 있냐?”
“-그,”
“간다.”
잘 살고. 유장이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유기는 멍하니 뒷모습을 바라보다 유기가 계단의 첫 단에 발을 들였을 때 간신히 숨을 들이켰다.
“태, 태워다 드릴게요!”
꽤 큰 목소리가 거의 쩌렁쩌렁하게 카페 안을 울렸다. 당연히 유장의 발이 잠깐 멈추었다. 유기는 주섬주섬 커피잔을 챙겨서 계단을 향해 달렸다.
“곧, 비도 올 거 같은데… 여긴 택시도 잘 안 올테니까요.”
“아니,”
“저 때문에 오신 건데… 모셔다만 드릴게요.”
네? 유기는 조심스레, 하지만 숨조차 쉬지 않고 물었다. 그리고 유장의 고개가 어디를 향하는지,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차 안은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산 넘고 실개천을 건너 언덕 사이를 지나는 그 긴긴 시간동안 둘은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한두 방울씩 빗줄기가 이슬졌다. 차 유리창에 맺히는 것이 닦아내는 것보다 빨라질 무렵에야 차는 도시 가까이까지 다다랐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유기는 그제야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어느쪽으로 가야 할까요?
유장은 생각보다 선선히 길을 일러주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알려주지 않을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유기는 그 길이 왠지 익숙한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와 본적 없는 동네라는 것은 확신 할 수 있었다.
멀리서 천둥치는 소리가 들렸다. 번개라고 생각한 빛 앞에서 유기는 유장의 말에 따라 차를 세웠다. 딸깍, 안전벨트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고맙다. …태워다 줘서.”
유기는 뭐라 할 말을 찾다가, 문득 그렇게 말했다.
“다음에 봐요.”
그러자 유장이 문을 열려다 말고 자신을 돌아보았다. 마치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그리고 그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
“뭔 놈의 다음.”
“…꽤 친했다고 하셨, 으니까?”
“기억도 못하면서?”
그 말투는 거의 으르렁거리는 것에 가까웠다. 약간 이를 가는 듯 하다, 유장은 천천히 어깨에 힘을 뺐다. 그리고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같은 거 없어. 더 물어볼 것도 없잖아.”
“하지만, 저희 계속-”
“계속 같은 건 없어.”
“-.”
번개가 쳤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작고 좁은 천장 아래서.
“영원 같은 건 없어.”
유장의 얼굴에도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소리 없이.
“내가 그랬잖아. …영원 같은 건 없다고.”
천둥이 쳤다. 유기는 유장을 잡아당겼다. 기어가 사이에 있어서 불편했지만 신경쓸수 없었다. 그 어깨를 끌어안아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아도 그는 영원히 영원 같은 건 말하지 않아왔으니까.
그러기 위하여 모든 걸 내던지는 삶을 살아왔으니까.
다시 한 번 번개가 내리쳤다. 어깨가 젖어들어왔다. 유기의 볼에서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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