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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 풀었던 썰을 그대로 백업합니다. 퇴고X
대학 선배 유기랑 후배 유장... 나이는 유장이 더 많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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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팀플을 시키는 교수는 당연하지만 하고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팀플이 편하고 익숙하냐 하면 절대로, 아니다. 교양 수업이, 그것도 출석부 이름 순으로 끊어서 조별과제를 시키는데 유기는 밀려오는 짜증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것도 수업 정정도 할 수 없게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다음 수업에서야 조별과제에 대한 사항을 안내하는 교수에 대해 유기는 속으로 온갖 험한 말을 쏟아놓았다. 수업이 끝나자 팀플을 챙기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유기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혼자 어색하게 앉아있는 사람이 보였다. 아까 팀플 조원 이름을 부를 때 자신과 같이 손을 들었던 사람이 었다. 유기는 그에게 다가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남자는 얼떨떨한지 어색하게 대답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듯 한 것이 복학생인듯 싶었다. 그래도 피하지 않는 것을 보니 무임승차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유기는 싱긋 웃었다.
유기라고 합니다. 같은 팀원이에요.
...유장이라고 합니다.
유장 씨. 말 놓으세요, 저보다 나이도 많으신 것 같은데.
유장이 침묵했다. 자신이 뭔가 잘못 말했나? 유기는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다른 분들 혹시 못 보셨어요?
글쎄요...
그래. 두 놈이나 무임승차를 하겠다 이건가. 유기는 당장 머릿속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지우는 프레젠테이션을 시뮬레이션했다. 두 사람의 이름이 깔끔하게 폭파되는 것을 상상하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다음에 교수님께 말씀드려야겠네요.
예.
음, 그럼 일단 조장을 정하는 게 나을텐데. 유장 씨가 하실래요?
아뇨, 아뇨.
유장이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흐트러져 있어서인지 그 모습이 꼭 물을 터는 대형견 같았다. 유기는 사람을 개에게 비유하는 생각을 하고서도 빙긋 웃었다.
그럼 일단는 제가 임시로 할게요. 핸드폰 번호 좀 주시겠어요?
아, 네.
유장이 허둥지둥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상당히 구형이었다. 2g 폰인 것은 아니고 연락은 되겠지만 도통 새것은 아니었다. 유기는 핸드폰에 제 번호를 입력하고 전화를 걸었다. 제 전화가 울리는 소리가 났다. 유기는 전화를 끊고 다시 유장에게 내밀었다.
일단 저희는 발표까지 시간이 꽤 있으니까-교수가 발표 순서도 이름순으로 정했다-일단 다음주에 다른 분들하고 컨택하고 이야기 할까요?
예.
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유기는 가볍게 목으로 인사를 하고 경영학과 친구들이 팀플을 끝내기를 기다렸다. 김씨인 애들도 있으니 끝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핸드폰 번호를 저장하다 유기는 유장 쪽을 보았다. 독강인 건지 유장은 주섬주섬 짐을 싸고 나가려 하고 있었다. 묘하게, 어수룩했다. 유기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
결국 다른 두 사람에게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출석을 꼬박꼬박 하는 걸로 봐서는 정말로 얼굴도 비추지 않고 무임승차를 할 모양이었다. 유기는 자신의 머리에 뿔이 난다면 한 뼘은 족히 넘으리라 생각했다. 유장은 여전히 어색하게 자리에 앉아있었다. 유기는 경영학과 친구들에게 먼저 가라고 말하고는 유장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유장 씨.
...안녕하세요.
유장이 또 고개를 꾸벅 숙였다. 유기는 예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말 놓으시라니까요.
괜찮, 습니다.
영 물러서지를 않았다. 유기는 속으로 혀를 차며 유장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럼 저희 역할 분담을 해야 하는데, 하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하고 싶은, 거라뇨?
뭘 또 모른 척이지. 유기는 찌푸려지려는 인상을 열심히 펴고 난처한 것처럼 웃으려 노력했다.
자료 조사나, 발표나, ppt나, 그런 거요.
아...
어, 하고 유장은 잠시 침음성을 내더니 ppt만 아니면, 뭐든 괜찮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Ppt만 아니면. 유기는 고개를 끄덕이곤 방긋 웃었다.
그럼 자료 조사는 같이 하고 발표는 유장씨가 하실래요?
괜찮습니다.
그럼 일단 그렇게 정해 두죠. 팀플 끝.
...감사합니다.
유장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뭐가 감사하다는 건지. 유기는 오랜만에 어색한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했다. 보통은 이렇게 친밀하게 굴면 그만큼의 친밀함을 되돌려준다. 그러나 유장은 유난히도 방어적이었다. 유기는 가방을 챙기는 유장을 바라보다 자리를 비웠다. 자신이 알 바는 아니었다.
만일 유장이 찾아온 자료가 엉망이지 않았으면 주욱 그랬을 것이었다.
인터넷에서 긁어온 것은 아니었다. 조목조목 책을 뒤져서 조심스레 자료를 인용해 온 것은 맞지만... 그 양이 꽤나 적었다. 메일로 보내진 자료를 보다가 유기는 머리를 싸쥐었다. 이걸로는 부족하다. 발표는 커녕 ppt도 만들수 있을까 말까인데. 유기는 거진 충동적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이나 가다가 소리샘으로 연결된다는 메시지가 나왔다. 이 사람도 무임승차할 셈인가. 유기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려 찬 물을 한 잔 뜨러 갔다. 자취하는 투룸은 꽤나 넓은 편이었다. 친애하는 아버지께서는 유기에게 줄 것이 돈밖에는 남지 않으신 분이라, 유기는 그 돈이라도 마음껏 누리기로 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방을 구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글쎄, 오기 때문에 헛짓을 한 게 아닌가 약간 의심이 드는 참이었다. 찬물 한 잔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유기는 핸드폰 화면도 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저기, 전화 하셨길래.
유기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다시 연락을 줄 줄은 몰랐는데. 유기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 화면을 보았다. 유장. 까만 글자가 흰 화면에 둥실 떠 있었다. 여보세요? 유기는 다시 급하게 귓가로 전화기를 가져다 대었다.
네, 말씀하세요.
아까, 그, 전화하셨던데.
제가 지금 일하는 중이라 바로 받지는 못했거든요. 급하신 일 아니면 일 끝나고 다시 전화 드려도 될까요? 유장이 어색한 존댓말로 한 마디 한 마디를 고르듯 이야기했다. 유기는 화면에 떠있는 자료 창을 보다가 닫았다. 아직 발표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어차피 일주일에 이틀 하는 과목이었고, 내일도 얼굴을 볼 것이었다. 유기는 찬 물 마시며 생각의 정리하기 전의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지려는 걸 억눌렀다.
아뇨 내일 뵙게 될텐데, 제가 조급했네요. 내일 말씀 드릴게요.
예에. 그럼.
달칵,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일단 내가 미리 조사를 조금이나마 해 두던지 해야지. 유기는 마른세수를 하며 마우스를 잡았다. 검색하자 논문이 와르르 쏟아졌다. 어제 일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유장의 얼굴은 유난히 피곤해보였다. 눈 밑이 시커매서 유기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고민할 정도였다. 유장은 그래도, 도망가지는 않았다. 유기는 그 점에 점수를 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
어제 보내주신 자료요.
네.
생각보다 양이 너무 적어서요. 발표하는 데에 좀, 그럴 거 같거든요.
아 그게.
유장이 목덜미를 손으로 쓸었다. 큼직한 손은 투박한 편이었다. 부스스한 머리, 얼굴에 나 있는 흉터. 어쩌다 저렇게 된 건지. 유기는 왜 자신이 이런 의문이 드는 건지 당황해했다.
도서관을 열심히 돌아보긴 했는데, 주제와 관련 된 책이 영 없더라고요. 최대한 찾아서 보내긴 했는데 그 정도고 인터넷에 나온 자료는 믿을 수가 없어서...
말이 뭔가 이상했다. 도서관과 인터넷을 뒤졌다. 그럼 더 나오는 게 있을텐데. 유기는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저, 유장 씨.
예?
혹시, 논문 찾을 줄 모르세요?
논문이요?
유장의 눈이 휘둥그레하게 커졌다. 유기는 머리를 짚었다.
-
유장이 어색하게 논문 한 편을 다운로드 받았다. 꽤 신기한 듯 쳐다보는 것에 유기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유장은 뒤를 돌아보고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학교 등록금도 비싼데 이런 건 알고 계셔야죠.
...네.
그렇죠. 유장이 아까보다 낮은 톤으로 말했다. 유기는 뭔가, 자신이 말실수를 한 게 아닐까 고민했다. 침묵 속에서 먼저 유장이 입을 열었다.
여튼, 감사합니다. 제가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잘... 몰랐거든요.
입학... 하신지 얼마 안 되셨어요?
선배 아니셨나? 유기는 당황한 표정으로 유장을 내려다보았다. 학번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XX 학번인데요. 유장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유기는 눈을 몇 번이나 깜박였다. 자기보다 두학번은 아래였다. 저, 실례지만, 나이가... 유기는 어색하게 물었다. 그리고 대답에는, 약간 멍해졌다. 선배님인 줄 알았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랬구나. 신입이었구나. 유기는 약간 얼떨떨해져서 건물을 나왔다. 해는 이제 뉘엿뉘엿 천천히 산등성이 사이로 가라앉고 있었다. 시간이 꽤 된 모양이었다. 유장은 한 쪽 어깨에 백팩을 둘러매고 꾸벅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아뇨. ...아닙니다.
오히려 이쪽이 미안했다. 그동안 속으로 많이도 안 좋게 생각을 했는데. 자신이, 꽤 편협했었다. 유기는 헛기침을 했다.
그럼 다음주까지 자료 다시 찾아서 보내주시겠어요?
네.
유장이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기는 그 모습을 보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저녁 식사 하셨어요?
예?
했을리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과 같이 있었는데. 뭔가를 먹거나 마시는 모습을 본 기억은 없었다. 그럼 당연히 안 했겠지. 유기는 방긋 웃었다.
같이 식사 하실래요? 제가 살게요.
...아뇨. 괜찮습니다.
여기 근처에 맛있는 집이.
유기는 말을 잇다가 뚝 끊었다. 거절할 줄은 몰랐는데. 유장은 핸드폰을 한 번 열어보았다. 유기는 약간 조급해져서 말을 이었다.
혹시 부담스러우셔서 그래요? 대단한 건 아니에요. 그리고 1학년이실 때 선배에게 많이 얻어먹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저처럼 이렇게 후배에게 내려 사 드릴 수 있는 거고.
보통은 같은 과에서나 통용되는 말이지만, 아무려면 어떠한가. 유기는 약간의 허풍을 섞어 유장에게 말했다. 유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지금 시간이 별로, 없어서요.
일이 있는데, 지각할 거 같거든요. 그리고 유장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더 이상 말해주지 않고 달려갔다. 유장의 뒤통수는 순식간에 훌쩍 멀어졌다. 달리기, 빠르네. 그런 감상을 떠올리다 유기는 머쓱하게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대단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배 속이 허했다.
그래서 유기는 핸드폰을 꺼내고 메신저 앱을 열었다. 유장. 글자가 새카맿다.
일 끝나시면 연락 좀 주세요.
그리고 유장은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봄인데도 해가 떨어지자 날씨가 서늘했다.
연락이 온 것은 날이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알림음에 유기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핸드폰을 들었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무슨일이세요 물음표도 마침표도 없는 일곱 글자가 덩그러니 와 있었다. 유기는 글자를 몇 개 썼다가, 지웠다.
대단한 건 아니고요,
그냥 같이 밥 한 끼 먹자고요.
보내 놓고도 어투가 이상한 것처럼 느껴져서 유장은 급히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
저녁에 시간 언제 되세요?
답장은 금방 왔다.
저녁은좀어려운데요
그럼 점심은 괜찮으세요?
편하신 시간으로 정해주세요. 저는 다 괜찮아요.
괜찮을리가. 생각해 보니 점심시간에 걸치는 과목이 꽤 있었던 것도 같았다. 유기는 미간을 몇 번 더 눌렀다. 유장이 메시지를 보았다는 것은 확실해서, 유기는 변명처럼 몇 마디를 덧붙였다.
팀플도 수업 후에 남아서 하는 것보다는 따로 한 번 뵈면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잠시 시간이 지났고, 유장이 메시지를 읽었다. 그리고 또 잠시 시간이 흘렀다. 시곗바늘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다음수업전에식사하면서뵈도될까요
그 시간이면 자신도 점심시간이라고 비워놓은 시간이었다. 유기는 핸드폰 화면을 두드렸다.
예 저도 괜찮아요^^ 그럼 그 날 열두시쯤 뵐까요?
예그럼그때뵙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났다. 유기는 눈이 시큰해진 것을 느꼈다. 집중했나? 무엇 때문에? 유기는 눈을 감고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끼익, 소리와 함께 의자가 뒤로 휘어졌다. 기분이 어째, 영 이상했다. 손에 꼭 쥔 핸드폰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
주말 동안 유장에게서의 연락은 한 통도 없었다. 아니, 아예 없지는 않았다. 중간에 자료 조사를 한 내용이 메일로 전달 되었으니까. 이전과 비교할 때 양이 훨씬 많아서인지 약간 어수선하긴 했지만 그런대로 깔끔한 내용 정리였고 참고한 출처도 꼼꼼히 달려있었다. 그건 좋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러나, 사적인 내용은 한 통의 문자 메시지조차 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알게 된 지 얼마나 된 사람이라고 사적인 내용이 오가겠는가. 일이나 열심히 하면 되는 거지. 유기는 약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뭐든 모르는 게 있으면 도와줄 수 있는데. 유기는 정리한 자료로 ppt를 만들며 흘끗흘끗 핸드폰을 보았다. 여러 조별 모임에서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고, 회의도 있었지만, 유장에게서의 연락은 없었다. 그래도 시간은 갔다. 시계는 움직였다. 유장과 약속한 날이 되어 유기는 옷을 골라 입고 나갔다. 꽃샘 추위가 덮쳐서 날이 꽤 쌀쌀했다. 어디쯤일까. 학교 정문 앞에서 유기는 유장을 기다렸다. 몇 사람이 지나가고, 또 지나갔다. 어딜 가는 게 좋을까. 학교 앞이다 보니 맛있다고 소문난 집이 몇 있었다. 어디를 가는 게 유장의 입맛에 맞을지 유기는 조금 고민했다. 결론은 유장의 입맛을 모르니 좀 기다려보자는 것이었다. 유기는 핸드폰을 열어 시계를 보았다. 10분 정도, 시간이 남아있었다. 찬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유기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자니 멀리서 유장이 오는 것이 보였다. 유장은 고개를 조금 숙이고 걸어오고 있었다. 유장 씨. 유기가 부르자 유장이 고개를 조금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유장이 꾸벅 인사했다. 유기는 앞으로 조금 걸어갔다.
잘 지내셨어요?
...네, 뭐.
말 놓으세요. 그 쪽이 편하실텐데.
아뇨, 괜찮습니다.
어색한 존댓말이 또 돌아왔다. 유기는 괜히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유기는 상냥한 웃음을 유지하려 최선을 다했다.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아니면 제가 안내할까요?
저는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유장의 머리는 부스스했다. 살짝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유기는 괜히 그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고 생각했다. 곧 털어버렸지만,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럼 날도 쌀쌀한데 좀 매운 거 괜찮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그럼 찜닭 먹으러 가죠. 유기는 빙긋 웃었다. 유장의 눈이 동그래졌기 때문이었다.
유기가 유장을 이끌어 간 찜닭집은 학교 앞에서 괜찮은 맛과 가격으로 꽤나 유명한 집이었다. 유장은 사이즈가 크지 않은 의자에 어색하게 자리잡아 앉았다. 그 모습이 약간 언밸런스해서 귀여웠다. 유기는 웃음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가격표를 보고는 조금, 유장은 안심한 듯 싶었다. 그래도 등에 힘이 들어간 건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수저를 챙겨주며 유기는 말을 붙였다.
그러고보니, 무슨 학과세요? 같이 팀플하는데 학과도 몰라서. 아, 저는 경영학과에요.
...물리치료학과입니다.
와. 의대생이에요?
아뇨, 의대는 아니고요.
유장이 웅얼거리며 물을 따라 건넸다. 유기는 그 물을 받아 목을 축이며 유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밥과 간단한 밑반찬이 먼저 나왔다. 두 사람 앞에 한 공기씩 밥공기가 놓였다. 유장이 어색하게 인사했다.
잘... 먹겠습니다.
유기는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유장이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은 알았지만, 멈춰지지가 않았다.
유장은 밥 두 공기를 깨끗하게 비워냈다. 유기도 그다지 소식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여기는 양이 많은 편인데도 유장은 정말 잘 먹었다. 사주는 보람이 있네. 유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거푸 물을 마시는 유장에게 물을 따라주었다.
많이 매우세요?
그게... 네.
뭐라고 변명을 하려다 말았는지 유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유기는 물을 한 병 더 시키고 머릿속에 휘갈겨 적었다. 매운 걸 잘 못 먹음.
저, 그런데.
네?
유장이 먼저 말을 꺼내는 건 오랜만이었다. 아니, 처음이라고 해도 되려나? 유기는 유장을 바라보았다. 유장은 어색하게 입을 떼었다.
과제 관련해서, 할 말이 있으시다고.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유기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팀플도 날 잡아서 하는 게 낫다고 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핑계였어서- 유기는 입을 여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아뇨, 어, 그게, 음.
......
대단한 건 아니고요. 그냥,
......
뭐든지 물어보셔도 된다고요. 학교 생활이나, 과제나. 뭐든.
유기는 방긋, 미소짓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맞다. Ppt도 거의 완성 되었어요. 이따 집에 가서 보내드릴게요. 발표문은 언제쯤 보내주실 수 있으세요?
선배님.
유장이 읊조리듯 말했다. 유기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너무 신경써 주시시 않아도 됩니다.
유장은 먼저 실례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기는 한참동안 얼음처럼 굳어있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다 종업원이 불렀다. 식사 끝내신 건가요? 죄송합니다. 뒤에 손님이 밀려서요. 유기는 멍청하니 자리에서 일어나서 밥값을 계산했다.
그러니까, 지금, 선배라고 불린 건가?
유기는 멍하니있다, 퍼뜩 시계를 보았다. 지각이 코앞이었다.
-유장 씨!
수업이 끝나고 나가려는 유장의 발을 유기는 급히 잡았다. 유장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유기가 쫓아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중간에 좁은 책상 사이를 움직이다 넘어질 뻔 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게 나아갈 수 있었다. 유기는 한숨을 쉬는 유장과 눈을 맞추었다.
...무슨 일입니까.
오늘 필기, 잘 하셨어요?
예?
유기는 머뭇거렸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필기... 좀 보여주실 수 있으세요? 제가 오늘 필기를 제대로 못해서.
아.
유기는 조금 다급히 말했다.
안 되시면 나중에라도.
아뇨, 괜찮습니다.
유장이 가방을 가까이 있던 빈 책상에 내려놓았다. 유기는 가까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필기를 보는 건 순식간이었다. 사진을 찍어두면 가져갈 수도 있으니까. 사진을 찍으려다 멈칫, 유기는 잠시 멈추었다. 유장은 슬슬 시선을 피했다.
유장 씨.
......
이건 뭐라고 쓰신 거에요?
...'위하여'라고요.
이건요?
...'하면'이라고 쓴 겁니다. 저, 못 알아보실 거 같으면 타자로 쳐서...
아뇨 아뇨, 괜찮아요.
적당히 놀려야지, 아니면 너무 진지해지거나 화를 돋울 수 있었다. 유기는 웃음을 무표정으로 누르며 필기를 찍었다.
고맙습니다. 제가 나중에 커피 한 잔 살게요.
...아뇨, 아닙니다. 나중에 ppt 보여 주세요.
오늘 저녁에 보내드릴게요.
유기는 달콤하게 웃었다. 유장은 그 얼굴을 보다, 필기 노트를 가방에 쑤셔넣었다. 유기는 팔랑팔랑 손을 저었다. 다음에 뵈요! 유장은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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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초의 흐드러졌던 목련은 벌써 다 떨어지고 벌써 벚꽃이 필 시기였다. 벚꽃의 꽃말은 흔히들 중간고사라 하였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니 그런 우스갯소리가 유행하는 것이겠지. 문제는 거기에 과제가 쌓였다는 점이었다. 유기는 이틀째 못 잔 눈을 비비려는 손을 눌렀다. 그래도 대부분의 과제는 처리되어서 다행이었다. 이제 남은 건 발표 과제와 중간고사 정도였다... 전혀 현재 정신상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오늘 자고 일어나면 좀 괜찮겠지. 유기는 집에 가서 잘 계획부터 세웠다. 책상에 노크가 내려온 건 그때였다. 유기는 고개를 들었다.
유장 씨?
저, 죄송합니다. 질문할 게 좀 있어서...
혼자 듣다보니까, 누구한테 물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요. 유기는 자리를 고쳐 앉았다. 유장은 머뭇거리다 질문을 했다. 확실히 좀 애매한 부분이기는 했다. 유기도 교수님께 질문을 해서야 답을 얻어냈으니까. 유기는 그 때 교수님이 답해주셨던 걸 필기해 둔 부분을 펼쳐서 이야기 했다. 유장은 조금 더 필기를 했고,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은 그걸로 끝이 나지 않았다. 유장은 여러가지 질문이 쌓여있는 것처럼 보였고, 하나같이 난이도가 꽤 있는 질문들이었다. 교수님이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려올때까지 유장과 유기는 대화를 나누어야했다. 자리에 앉은 유기는 핸드폰을 잡고 화면을 두드렸다.
유장 씨.
혹시 시간 있으세요?
저희 집에서 공부하고 가실래요?
그리고 핸드폰을 덮었다. 잠시 후, 진동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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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정신을 잃다시피 했던 유기가 눈을 뜬 것은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 소리 때문이었다. 이미 창밖은 어둑하게 가라앉아 있는 상태였다. 유기는 비몽사몽한 눈을 문지르며 핸드폰을 켰다. 유장. 작은 글씨인데도 눈에 선명하게 들었다. 유기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알려주신주소를못찾겠는데요
다행이 문자가 온지는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유기는 허겁지겁 답장을 보냈다.
지금 어디쯤이세요?
알려주신곳근처의편의점이요
제가 내려갈게요 잠시만요.
유기는 허겁지겁 방을 뛰쳐나가 신발을 신었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주머니에 집어넣은 몇 번 문자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계단 앞 공동현관 앞에서 가로등불이 노랗게 빛나는 게 보였다. 유기는 공동현관을 지나 편의점이 있는 곳까지 달렸다. 유장이 어색하게 서 있었다. 유기는 속도를 줄이며 숨을 골랐다.
유, 장 씨.
......
유장이 뭐라고 말하려는듯 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내려오시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아뇨, 여기가 길찾기가 좀 어려워서요.
유기는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그러나 유장은 따라웃지도, 전처럼 무표정을 유지하지도 않았다. 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라 말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유기는 그 표정을 의아해하면서 앞장을 섰다. 이 쪽이에요. 아, 저녁은 드셨어요? 아뇨...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저도 저녁 못 먹었는데, 괜찮으면 같이 먹어요. 유기는 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오세요. 좀, 지저분한데 모시게 되어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유기는 주섬주섬 거실에 대충 던져놓은 가방을 침실로 가지고 들어갔다. 그리곤 침실에 붙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심하게 눌린 머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기는 조금, 한탄하고 싶어졌다.
억지로 차린 저녁 밥상은 별 게 없었다. 밑반찬과 대충 끓여둔 찌개, 밥. 냉장고를 뒤지면서도 뭘 먹어야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식단이었다. 역시 뭐라도 좀 시킬 걸 그랬나, 싶었지만 유장은 오히려 이 쪽을 찜닭보다도 편히 여기는 것 같았다. 아까보다 정돈된 머리를 하고 유기는 식사를 마쳤다. 설거지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유장이 마쳤다. 이렇다할 설거지거리도 없긴 했지만 손님께 설거지를 하게 했다는 자괴감 비슷한 것이 들어서 유기는 조금 괴로웠다. 식탁으로 썼던 상을 닦고 유기는 노트북을 가져왔다. 유장이 질문을 하면 유기는 자신이 아는 대로 답을 했고 모르는 것은 인터넷을 뒤져가며 함께 자료를 찾았다. 유장이 보내준 발표문을 약간씩 손을 보기도 핬다. 유장이 그렇게 집중하는 것을 유기는 처음 보았다. 아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는 자신도 노트북에 있는 문구와 씨름하고 있었는데, 문득 유장이 보였다. 유기는 아주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저 흉터들은 어쩌다 생겼을까. 만지면 아직도 고통스러워할까. 말이 끊긴 걸 느낀 유장이 입을 떼었다.
...선배님?
문득 유기의 얼굴이 화르르 불타올랐다. 유기는 엉덩이 걸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자, 잠깐 쉬어요. 잠깐만. 벌써 시간이-
새벽 한 시. 시간이 오래도 지났다. 유장은 의아한 것 같았지만 네, 하고 긍정의 대답을 주었다. 유기는 몸을 돌려 구석을 보았다. 심장이 마구 뛰어서 멈추지 않았다. 왜인지,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가보겠습니다. 유장이 자료를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예? 유기는 몸을 돌리며 눈을 깜박였다.
지금 새벽 한 시에요. 지금 가시게요?
아직 막차가 남았으니까, 괜찮습니다.
아뇨 막차고 뭐고 지금 나가시는 건 좀 아니에요. 그리고-
유기는 약간 필사적으로 말을 주워 섬겼다. 그리고.
아직 질문하실 것도 남은 것 같고.
그렇긴, 하지만.
주무시고 가세요. 어차피 저도 중간고사라 공부해야 해요. 괜찮아요.
유기는 방긋 웃었다. 정말 괜찮은 것처럼. 사심 없고 무해하게, 방긋. 유기는 웃었다. 유장이 천천히 가방을 내려놓는 것이 보였다.
유기와 유장은 새벽 네 시 쯤에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침실에도 이불 깔만한 공간은 있었지만 유장은 끝끝내 거실에서 자기를 고수했다. 유기는 결국 졸린 눈을 비비며 이불과 베개를 내주어야 했다.
불을 끄자 방 안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시계 소리도 들리지 않을만큼 적막한 사이로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유기는 자리에 누워 몇 번을 뒤척였다. 아주,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숨이 섞이고 있었다. 분명 벽 하나가 자기 앞에는 놓여있을텐데, 그 사이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바싹 긴장이 되는 것 같고 등줄기가 저릿저릿한, 희한한 느낌. 유기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커튼 너머로 희뿌옇게 동이 트면 다음날이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유장이 집을 나설 것이었다.
-
너 요새 얼굴 보기 힘들다.
...내가?
유기는 의문을 표했다. 자신처럼 과생활에 열심인 사람이 어디 있는지. 물론 주점 같은 것이야 1학년 때에 참가를 했었으니-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이 조금은 있었다-요즘은 좀 덜할 때도 된 듯 싶었다. 강의도 꼬박꼬박 참석하고,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유기는 그래서 의문을 표할 수 밖에 없었다. 얼굴 보기 힘들다고? 내가?
중간고사 기간이라 그런 거겠지.
아냐, 뭐랄까. 좀 딴 데 보는 거 같던데.
오- 애인이라도 생겼어?
애인은 무슨. 아냐.
유기는 빙긋 웃었다. 애인은 무슨 애인. 핸드폰이 진동을 울려서 유기는 주머니를 뒤졌다.
발표문컨펌좀부탁드려요
유장이었다. 유기는 친구들에게 잠시만, 하고 입을 떼었다.
뭔데, 애인이야?
아냐, 내일 발표인 팀플.
뻥치네. 뭘 그렇게 급하다고.
너 입이 귀에 걸려 있어.
...내가?
유기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려했다.
나야 원래 잘 웃잖아.
아니 그래도, 좀.
달라 달라. 한참 달라.
...애인?
유장 씨가? 유기는 핸드폰을 톡톡 입가에 두드렸다. 애인? 유장 씨가? 분명 애인에게도 무뚝뚝하고 달콤한 말 같은 것은 못해줄 사람이지만, 헌신을 다하겠지. 그런 유장의 모습이 눈에 선해서 유기는 얼굴을 구겼다. 누구, 마음대로? 유기는 방긋 웃었다. 그리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저는 이 발표문 좋아요^^
그리고 핸드폰을 덮었다.
-
발표는 잘 끝났다. 남은 두 명의 이름을 폭파시켜 버리는 듯한 ppt가 인기가 좋아서 유기는 조금 흡족하게 발표를 지켜볼 수 있었다. 교수님도 발표가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는지 별 지적 없이 수월하게 넘어갔다. 유기는 유장에게 녹을 듯이 웃어주었다. 유장 씨. 유장은 신입생답게 약간 굳어서 교단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유기의 옆자리에 앉았다. 발표조가 이것저것 나누어줄만한 유인물도 있고 해서 일부러 그렇게 앉았다. 유기는 녹일듯이 웃는 얼굴 그대로 유장에게 속삭였다.
고생하셨어요 유장 씨.
...아뇨. 별로요.
유장은 고개를 돌렸다. 유기는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교수의 소감 몇 마디가 끝나고 강의가 끝났다. 유기는 유장을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유장 씨. 뒤풀이 가실,
저기요.
갑자기 귓가에 큰 목소리가 파고 들었다. 유기는 조금 짜증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아, 무임승차자들. 이렇게 당당하게 뒷말이 있는 경우는 흔치 않은 편인데. 유기는 얼굴을 굳혔다.
뭡니까?
아무리 저희가 참여를 좀 덜 했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좀 너무하지 않아요?
뭐가요?
유기는 팔짱을 꼈다. 키가 큰 쪽이 성질을 부렸다.
뭐가요? 우리 성적도 있고 한데 그정도도 배려를 못해줍니까?
저희도 다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요.
사정이 있으셨으면 저희한테 연락을 주셨어야죠. 제가 개인 연락을 안 드렸습니까? 다 무시하신 건 그 쪽일텐데요.
그 쪼옥? 언제 봤다고 그쪽이네 뭐네 말을 막해?
유기는 이제 어이가 없었다. 날건달도 아니고 이건 또 무슨 시비야. 유기는 앞으로 한 걸음 나서려 했다. 아마 유장이 제지하지 않았으면 그랬을 것이었다.
이봐.
이봐는 무슨,
그럼, 야.
손으로 유기를 막고 유장은 유기보다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유장은 그르렁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툭툭 뱉었다.
니들이 뭘 했는데.
너, 이 새끼가..!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고 그게 고와야 서로 고울 거 아냐, 새꺄.
붙고 싶으면 붙던가. 유장의 눈이 새파랗게 불타올랐다. 유장이 자세를 잡았다.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이 눈에 보이는 성 싶었다. 그건 마치, 잘 길들여진 늑대 같았다. 커다란 덩치에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제 무리를 지키기 위해 잘 벼려진. 두 사람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유기는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유장을 제지했다.
계속 이럴 거면 교수님을 부르죠. 그 쪽이 말이 편하겠네요. ...아니어도 우린 상관 없는데?
그리고 유기는 방긋 웃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둘을 화를 냈지만, 결국은 자리를 떴다. 유기는 뒤를 돌아보았다. 유장이 천천히 자세를 풀고 뒤돌아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유기는, 하하, 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고 불렀다. 유장 씨. 유장이 돌아보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아뇨, 별로.
별로는요, 제가 술 한 잔 살게요.
어, 아닙니다. 진짜.
뒤풀이도 겸해서요.
유기는 살짝, 유장의 손 가까이 책상에 손을 내렸다. 유장이 흠칫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유기는 웃었다.
사게 해 주세요.
...네, 뭐.
유기는 다시 하하, 소리내어 웃었다.
-
술자리는 중간고사가 끝난 이후로 밀렸다. 중간고사가 며칠 남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둘 다 술자리를 가지기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아쉬웠지만 유기는 제대로 시점을 잡았다는 데에 만족하기로 했다. 유장은 일이 있다며 둘의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 저녁 늦은 시간을 지정했다.-다행히 둘의 중간고사는 같은 날 끝났다-술 마시기는 좋은 시간이었다. 분위기를 잡기에도 썩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고. 유기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중간고사를 칠 수 있었다. 유기는 더워지는 날씨에 단정한 여름 셔츠를 꺼내입고 유장을 맞으러 나갔다. 유장은 평소보다 조금 피로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약속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기는 방긋 웃으며 유장 씨, 하고 소리쳐 불렀다. 유장은 유기가 그제야 눈에 띈 듯이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했다.
가요. 혹시 생각해 두신 데 있으세요?
아뇨, 특별히 생각한 데는 없습니다만.
그럼 제가 생각하는 데로 가도 될까요?
일부러 학교 근처에 있는 괜찮은 칵테일바를 물색까지 해 두었다. 유기는 방긋 웃으며 유장을 몰았다. 유장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죄송하지만 잠시 편의점 좀 들리면...
예? 무슨 일 있으세요?
아뇨, 제가 저녁이 아직이라.
꼬르륵, 뱃속에서 소리가 울릴 것만 같았다. 유기는 유장을 이끌다 잠시 멈칫,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잠깐 생각을 하다 발을 돌렸다.
가요.
네?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해요. 이 근처에 괜찮은 식당 아는 데가 있으니까.
아뇨, 아뇨 그러실 필요는.
술 사는 김에 밥도 사죠 뭐. 가요.
유기는 빠르게 유장을 이끌었다. 유장은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유기를 잡지도 못하며 어색하게 유기를 따랐다. 결국 술자리는 식사자리가 되었다. 마지막에 밥을 볶아주는 제육볶음 집은 반주로 할 만한 술도 팔고 있었고 가볍게 한 잔 곁들인다는 게 꽤나 거나하게 마셔버리고 말았다. 유기는 술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볍게 마시며 입술을 축였지만 유장은 소주가 입에 맞는지 물처럼 입 안에 털어넣고 있었다. 처음에는 얻어먹는다는 생각에 몸둘바를 몰라하는 것 같았지만 술이 들어가니 생각이 바뀐 모양이었다. 아니면 잊어버렸거나.
유장 씨.
예?
혀가 조금 꼬이는지 유장이 약간 더듬듯이 대답했다. 그리고 본인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헛기침을 하고 예? 하고 다시 대답했다. 유기는 조금 웃었다.
왜 저한테 존댓말 하세요. 그냥 반말로 하세요.
아뇨, 아뇨 선배님인데. 어떻게 반말로.
유장 씨가 나이는 더 많으시잖아요. 그냥 유기야, 하고 불러 보세요.
선배님...
유기야. 네?
유장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있었고, 정말로 곤란해 보였다. 유기는 한참을 말이 없는 유장에게 속으로 입맛을 다시며 안 되나보다 생각했다. 그리고는 의자를 끌어 조금 당겨 앉았다. 그 소리에 뭔가 말소리가 묻혔다.
...기야.
네? 유장 씨 뭐라구요?
...유기야...
유기는 심장박동이 쿵 떨어졌다 다시 올라붙는 것을 느꼈다. 유장이 빈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고 반댓손으로 술을 한 잔 더 켰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른 유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는 더 안 할 겁니다. 선배님. 더 시키지 마세요.
왜요, 반말 쓰세요. 웬 존댓말이에요.
유장 혀엉. 일부러 말꼬리를 늘여 부르자 유장이 푸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자작을 하여 술을 한 잔 더 켰다. 유기는 재빠르게 술을 한 병 더 시켰다. 더 취하면 더 예쁜 짓을 해 주려나. 뭐 그런 속셈이었다. 이런 속셈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유장은 운동을 했던 사람 같이 꽤 근육질이었고, 다른 의미로는 상당히 무거웠다. 어느정도는 책상물림이었던 유기에게는 쉽사리 업을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유기는 방 바닥에 유장을 내려놓고 숨을 몰아쉬었다. 유장은 꽤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술을 마시면 잠드는 편인지 어느 순간부터 대답도 하지 않고 숨소리만 내며 새근새근 잠들었다. 참 얌전한 술 버릇이었다. 그 술버릇이 나오기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술이 들어가긴 했지만, 어쨌든 참 단정한 주사였다. 유기는 팔을 돌려 어깨를 풀고 유장을 흔들었다.
유장 씨.
......
유장 씨 이불 위에서 주무세요.
...으...
아직 저녁은 추워서 감기 걸려요.
대답은 없었다. 이쯤이면 깨어날까 싶어서 흔든 거였는데, 유장은 반응하지 않았다. 간간히 나는 대답하는 것 같은 소리와 숨소리가 유장이 곯아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유기는 유장의 상체를 다시 일으켜서 팔 아래에 손을 넣고 유장을 끌었다. 미리 열어둔 방문으로 들어가 유장을 침대에 던졌다. 그런데도 유장은 깨어나지 않았다. 유기는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온 몸에 힘이 다 빨린 기분이었다. 무릎에 팔꿈치를 괴고 숨을 고르고 있는데 유장이 뒤척였다. 이불을 끌어안는 것 같았다. 유기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유장 씨.
......
유장 씨 어디 살아요?
......
평소에는 뭘 하면서 지내요?
...응...
왜 물리치료 학과로 갔어요?
......
내 생각은 해요?
......
많은 걸 알고 싶었다. 많이도 묻고 싶었는데 물을 수가 없었다. 유기는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당신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 당신과의 사이에는 꽤나 두텁고 단단한 벽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쉽사리 가까워지지 못하게, 그럴 필요 없다는 듯이. 역시, 폭탄을 하나 투하해야 하는 걸까? 그런 건 예의에 어긋나고 당신도 나도 불편해지는 건 아닐까. 유기는 팔꿈치를 무릎에 괴고 손에 턱을 고였다. 유장 씨. 그리고 괜스레 한 번 더 불러보았다.
좋아해요 유장 씨.
......
답은 또 없었다. 유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일이 주말이라고는 하지만 언제까지 안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불이라도 깔아야지 잠을 자겠지. 유기는 베개와 이불을 들고 방문을 나섰다. 탁, 문이 닫혔다. 그리고 유장이 눈을 떴다.
속이려한 것은 아니었다. 눈을 뜬 시점에 졸음을 완전히 떨칠 수 있었으니까. 귓가에 웅웅거리는 소리가 있어서 유장이 천천히 깨워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좋아한다는 말을 하고 얼마 있지 않아 유기가 일어났기 때문에 깨었다는 표시를 유기가 못 보았을 뿐이었다. 구구절절 변명을 해보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들었다. 좋아한다는 말을.
좋아해? 나를? 유장의 머릿속에 태풍이 몰아닥쳤다. 그리고 그 뒤의 폐허에 나온 말은 한마디였다. 왜? 유장은 어쩔 줄을 몰랐다. 물론 자신에게 호의를 많이 베풀어준 사람인 건 맞는데, 그게 좋아해서였다고? 왜? 자신과 유기의 접점은 고작해야 팀플 하나였다. 팀플을 하는 사람마다 좋아하게 되는 특이한 취향일리는 없으니까-유장은 일단 보류하자고는 생각을 했다-그럼 어쩌다 보니 자신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건데... 왜? 도돌이표마냥 유장은 '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세상은 정글이다. 자신은 그 정글을 아등바등 헤치고 나아가려는 작은 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에 비해 유기는, 어느모로 보나 그 정글의 먹이 피라미드 중 윗선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장 집만 해도 그랬다. 가뜩이나 값이 비싼 대학가 자취방 촌에 꽤나 넓은 집을 혼자 쓰고 있었다. 꽤, 유복한 집안의 자제임은 분명했다. 그런데 자기를 좋아한다고? 왜?
머릿속에서 왜가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유장은 눈을 감았다. 술기운이 완전히 떨쳐지지 않아 순식간에 피로가 유장을 덮었다. 유장은 그날 '왜'의 파도에 잔뜩 휩쓸리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자 유장은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침실이 눈 앞에 있어서 유장은 잠시 어리둥절한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순서대로 어제 저녁 식사부터 지금까지의 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저녁으로 제육볶음을 먹고, 반주를 곁들이다, 그게 이어져서-
좋아해요 유장씨.
기억나지 않았으면 했던 것까지 죽죽 기억이 났다. 유장은 속으로 비명를 지르며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고백한 건 저 쪽인데 왜 이 쪽이 무슨 얼굴로 봐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하냔 말이지. 그거야 반쯤 엿듣다시피 했기 때문이지만 유장은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한참을 그렇게 바르작거리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유장 씨, 일어나셨어요?
유기가 멀끔한 얼굴로 들어왔다. 유장은 뻣뻣하게 굳어서 뭐라 할 말을 고르지 못하다 어색하게 대답했다.
어, 어. 어어...
해장국 끓여놨어요. 와서 드세요.
어어...
문이 닫혔다. 유장은 자기가 반말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침대 헤드에 머리를 박았다. 죽자, 죽자 그냥. 앓느니 죽지. 몇 번 쿵쿵 소리가 나자 당황했는지 밖에서 유장 씨?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아무 것도 아... 닙니다! 유장은 목소리가 삐끗했다는 걸 깨닫고 몇 번 더 머리를 박고 싶었지만 참았다. 유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문득 본질적인 의문을 갖게 되었다.
왜 내가 이러고 있지?
그 의문은 아주 갑작스럽게 떠올라서 유장을 반쯤 지배하다시피 했다. 정말로 왜 내가 이러고 있는 거지? 고백을 한 것은 유기 쪽이었다. 좋아하는 것도 유기이고 앓는 것도 유기였다. 그런데 왜 자신이 유기를 좋아하는 양 이렇게 끙끙... 유장은 눈을 깜박였다. 워, 이건 아니었다. 정말 아니었다. 자신이 유기를 좋아해? 어디서 언감생심 그런 꿈을 꾸겠냐는 말이다. 유장은 고개를 휘저어 생각을 털어버리려 노력했다. 유장은 할 일을 꼽았다. 오늘 하루의 할 일은... 분하지만 저녁 때의 아르바이트가 끝이었다. 학비는 여러 종류의 장학금 제도가 뒷받침해 주었지만 생활비는 아니었다. 평소라면 아침과 점심에도 아르바이트를 채워 넣었겠지만 지금까지 몇 번 대타를 뛰어둔 적이 있어서 그 대타들이 자신을 대신해 활약해 줄 것이었다. 그러니 어제 술자리를 잡았지. 유장은 그런 어젯저녁 자신의 선택에 크게 엿을 날리며 저주했다. 사고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내가 유기를, 좋아한다고.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있었나? 유기가 잘생기긴 했지만, 곱게 생기긴 했지만, 성질도 좀 있고 그러니까- 온갖 생각이 판을 쳤다.
노크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유장 씨? 식사 안 하세요?
어, 어어, 잠, 잠깐만!
요! 간신히 존댓말을 유지하며 유장은 방 밖으로 나갔다. 유기는 문 앞에서 빙긋 웃고 있었다.
국 식어요. 얼른 드세요.
어, 그, 잠시만, 요. 저 일단 세수, 좀.
유장른 후닥닥 화장실을 향해 달려갔다. 소리나게 문을 닫고 세면대를 돌아보니 잘 익은 문어 한 마리가 여기저기 뻗힌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이게 다 저 놈이 잘생겨서야. 유장은 속으로 곱씹었다... 생각해 보니 꽤 말이 되었다. 유기는 잘 생겼다.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미형의 얼굴이었다. 곱디 곱게 생겨서 방긋 웃으면 옆에 꽃과 별이 휘날리는 것 같았다. 저 잘생긴 얼굴이 딱 달라붙어 있으니 괜스레 이유 없이 두근거릴 법도 했다. 유장은 결심했다. 이젠 좀 떨어져서 다녀야지. 어차피 이젠 팀플도 끝나서 같이 다닐 이유고 뭐고 없었다. 유장은 찬물을 콸콸 틀어 세수했다. 유장 씨! 국 식어요! 외치는 유기의 말에 금방 가, 요! 하고 대답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유기는 팔짱을 끼고 검지 손가락으로 팔을 두드렸다. 지금이 벌써 세번째였다. 평소에 유장은 짐을 천천히 싸는 편이었다. 다른 사람이 다 빠져 나간 다음 천천히 어슬렁거리듯 움직여서 강의실을 나갔다. 그런데, 요새는 좀 달라졌다. 마치 뒤에서 뭐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양 후닥닥 짐을 싸고 말을 붙일 새도 없이 강의실을 떠났다. 유기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벌써 유장을 보지도 못한 세번째 강의였다. 유기의 이마 사이 골이 깊어졌다. 그렇다고 연락을 하자니 뭐라고 연락 할 구실이 없었다. 유기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등 뒤에서 누가 가볍게 유기를 부르기 전까지 그랬다.
뭐해?
...별거 아냐. 왜?
할 일 없으면 학교 주점 좀 오라고.
이거 쿠폰. 얄팍한 종이 몇 장이 유기에게 내밀어졌다. 유기는 인상을 찌푸리려다가 다시 쿠폰을 보았다. 할인 쿠폰이 아니라 금액권이었다. 한 장에 만 원씩, 상품권처럼. 그래도 선배니까 몇 장 팔아주기는 해야 할텐데... 그러다 멈칫, 생각에 잠겼다. 유기는 골똘히 생각하다 동기를 돌아보았다.
너.
어?
그거 몇 장 남았어?
한 댓장?
팔고 있는 후배 컨택해 봐. 내가 십만원 어치 산다.
뭐어?
유기는 그러면서 핸드폰을 두드렸다.
유장씨 ㅠㅜ 제가 학과 주점 상품권을 너무 많이 사 버렸어요 ㅠㅠ 같이 술 좀 마셔 주세요 ㅠㅠㅠ
그러면서 유기는 싱긋, 웃었다.
뭐해? 연락 하라니까?
-
야외 주점에서 유기는 팔락팔락 손을 흔들었다. 멀리서 오던 유장이 약간 께름직한 표정을 짓는 듯 하다가 천천히 가까워졌다. 유기는 등받이가 없는 플라스틱 의자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말 그대로 노가리를 까먹고 있었다. 유장은 천천히 유기 맞은편에 앉았다.
고마워요 유장 씨, 같이 나와 줘서.
...다른 친구분들은...
걔들은 주점 담당이라서요. 주인장이 나와서 술 마시고 있으면 쓰나요.
유기는 방긋방긋 웃었다. 유장은 고개를 푹 숙이고 메뉴판을 들여다 보았다. 별 건 없는 메뉴판이었다. 소주, 맥주, 간단한 안주 거리들. 뒷면도 없는 코팅된 종이 한 장을 유장은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었다. 유기는 미리 시킨 맥주로 목을 축이며 그런 유장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유장이 고개를 들자 유기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손을 들어 점원을 불렀다. 아직 시간이 그리 늦지 않아서 사람이 적었다. 후배는 후닥닥 달려왔다.
마음대로 주문하세요, 유장 씨.
...소주 한 병이랑 파전 하나요.
네에! 감사합니다!
후배가 돌아가고 나서도 유장의 시선은 허공을 배회했다. 유장 씨이, 불러도 시선을 피하는 게 너무나 역력하게 느껴져서 유기의 눈이 가늘어졌다.
유장 씨.
예?
제가 뭐 잘못 했어요?
네?
유기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흠칫 놀란 유장이 유기와 눈을 맞추었다가 다시 후닥닥 눈을 돌렸다.
아뇨,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럼 왜 저를 안 보세요...
유기는 상 위로 살살 쓸듯이 손을 올렸다.
여기 노가리도 맛있고 괜찮고 한데 지금 상 위도 안 보시고... 절 전혀 안 보시잖아요.
아뇨, 그게...
그게...?
유장이 몇 번 헛기침을 했다. 도르륵 눈이 굴러가는 게 보여서 유기는 한 번 더 밀어붙였다.
무슨 일이세요, 네?
...서...
네?
유장이 웅얼댔다. 반팔 라운드 티셔츠에서 뻗어나온 목줄기가 노을 때문인지 새빨갛게 보였다.
...선배님이 잘 생기셔서...
유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살풋 눈을 접어 웃었다. 입을 살짝 모아서 오, 하고 발음할 듯이 했다가, 다시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잘 생겼어요?
...그게,
유장 씨는 제가 잘 생겼다고 생각하세요?
...잘 생기셨, 잖아요.
거의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라 유기는 그만 놀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장 씨한테는 제 얼굴이 마음에 들어요?
한 번만 더 놀리고. 유장은 얼굴까지 토마토처럼 달아올라서 유기를 보았다. 유기는 방글방글 웃으면서 팔꿈칠를 식탁에 괴었다. 그리고 그 손을 가볍게 주먹 쥐고 턱을 괴었다.
그럼 실컷 봐요. 닳는 것도 아닌데.
유장 씨라면 대환영이에요. 유기는 한 자 한 자 딱 부러지게 말했다. 유장이 고개를 팩 돌리는 순간.
파전과 소주 한 병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타이밍도 좋게 음식이 나왔다. 유기는 나무 젓가락을 뜯었다. 그리고 그걸 유장에게 건네주었다.
드세요. 여기 노가리 괜찮더라고요.
유장은 어색하게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유기는 소주병을 뜯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유장은 파전을 젓가락으로 찢어서 입에 넣었다. 요리를 잘 하는 사람을 붙여두었는지 파전은 의외로 맛이 좋았다. 중간에 오징어까지 씹혔다. 유장은 파전을 넘기고 유기가 따라준 술로 입술을 축였다.-그 사이에 유기에게 한잔 따라주기도 했다-유기는 빙긋 웃으며 술을 넘겼다.
그래서,
......?
제 얼굴 말고는 마음에 드는 점이 없어요?
유장은 방금 마신 술을 뱉을 뻔했다. 유기는 방긋방긋 잘도 웃으면서 물어봤다. 아, 꽃이 주변에서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유장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예?
얼굴은 마음에 드신다면서요, 얼굴 말고 다른 데는요?
유장은 등 뒤로 닭살이 솟는 것 같았다. 유기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양 상긋 웃고 있었다. 유장은 눈을 굴리다가 소주잔을 소리나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왜... 그런 걸 물으시는 겁니까.
...오.
이건 좀 당황스럽네요. 유기는 하나도 당황하지 않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유기는 손목 스냅을 돌려서 소주잔을 한바퀴 돌렸다. 그리고는 음, 하고 침음성을 뱉었다. 이제 더는 말하지 않겠지. 유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파전을 찢었다.
저는 제가 유장 씨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거든요.
젓가락을 헛놀렸다. 유장은 고개를 들었다. 유기의 얼굴은 조금 난처해 보였다. 난처하게 웃고 있었다. 웃고 있는 시점에서 난처하지 않은 걸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그랬다. 유장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걸 느꼈다. 물어보면 안 되는 질문 하나만 둥실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냐. 유장은 누군가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고 느꼈다. 물으면 안 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유장은 입을 열었다.
...왜요?
아까보다 유기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짙어졌다. 유기의 입이 열리는 게 아주 천천히 보였다. 느리게, 아주 부드럽게.
...제가 유장 씨를 좋아하거든요.
유장은 자신의 얼굴에 와락 열이 몰리는 것을 느꼈다. 아마 또 토마토 뺨 치게 새빨간 색일 것이었다. 유장은 수저를 놓고 오른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바닥에 코가 조금 짓눌리긴 했지만 신경쓸 수 없었다. 유장은 약간,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유기가 빨랐다.
유장 씨는요?
제 얼굴만, 마음에 들어요? 유기가 약간 간절한듯 말했다. 그 표정은, 처음 보는 얼굴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유장은 자신의 얼굴이 터지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질문을 더듬더듬 생각했다.
...그게.
저는, 상관 없는데.
...예?
유장의 목소리가 삐끗했다. 유기가 살짝, 테이블 위에 아직 올려져있는 유장의 손 끝에, 톡, 자신의 손끝을 맞추었다. 아주 작은 온기가 슬쩍 닿아왔다. 유장은 손을 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지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몰랐다.
저는 유장 씨가 제 얼굴만 좋아해도 괜찮아요.
......
괜찮다기보다는, 다행이죠.
유기는 방긋 웃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웃음이 허물어졌다. 약간 눈물이 맺힌 듯한 얼굴로 유기는 간절히, 유장을 바라보았다.
유장 씨.
......
제가 유장 씨를 계속 좋아해도... 될까요?
유장은 어쩔 줄을 모르고 고개를 푹 숙였다. 유기의 간절한 얼굴이 눈 앞에서 자꾸 어른거렸다. 유장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제 맘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 끝에 온 몸이 묶여있는 기분이었다. 유장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서, 한마디를 했다.
...네...
유기가 고개를 기울이며 방긋 웃는 것이 눈에 선했다. 좋아한다니 됐지 뭐. 그런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달콤한 웃음일 것이었다. 문득 유장의 손등에 따뜻한 것이 살짝 올랐다.
그럼 저희 오늘부터 1일인가요?
고개를 들자 유기의 기대감이 가득 찬 얼굴이 들어왔다. 고개를 들지 말았어야 했어. 유장은 바로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고개를 들어버렸고, 유기는 잘생겼다. 유장은 땡땡땡, 하고 귓가에 종소리가 울리는 것을 느꼈다. 유기, win. 유장은 ko당했다.
-
기말고사는 늦은 시간에나 끝이 났다. 중간을 보지 않은 전공이 기말 시험을 대대적으로 치렀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유장은 근 사흘 밤을 새다시피 하며 공부를 했다. 사흘 동안 잔 시간이 채 다섯시간이 되지 않았다. 유장은 초췌한 몸을 이끌고 비틀비틀 강의실을 나섰다. 조금 전에 켠 핸드폰에서 띠롱띠롱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람이 울렸다. 유장은 무시했다. 바닥에 끌릴 것 같은 백팩을 등에 메고 유장은 계단을 내려갔다. 날이 차게 식은지 오래라 입김이 절로 나왔다. 유장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좀 더 졸음이 깨긴 했지만 극심하게 잠이 필요했다. 집에 가려면 또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야 했다. 그건 무리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
유장 씨.
유장은 몽롱히 고개를 들었다. 유기가 눈 앞에 서 있었다. 오래 서 있었는지 볼이 발간 색이었고 코가 약간 맹맹했다. 유장은 눈을 깜박였다.
기다리지 말라니까.
어떻게 그래요. 유장 씨 사흘이나 못 잤잖아요.
유기가 주머니에서 핫팩을 꺼내 유장의 손에 쥐어주었다. 따끈따끈한 온기가 손에 스며들었다. 아, 더 졸려지려고 해. 유장은 눈을 억지로 깜박였다. 유기가 유장의 다른 손을 쥐어왔다.
유장 씨 집까지 가려면 한시간 반이잖아요. 우리 집에서 자고 가요.
안 돼... 벌써 사흘이나 신세 졌는데.
한 시간 자고 간 걸 신세졌다고 하는 거 아니에요. 자고 가요.
...무슨 꿍꿍이야?
그런 거 없는데.
유기가 환하게 웃었다. 유장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이 자식이 이렇게 웃는다는 건 100%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었다. 무슨 짓을 어떻게 하려고. 유장은 푸르르 몸을 떨다 문득 유기의 손을 보았다. 핫팩이 없어진 유기의 손은 계속 밖에 나와 있었다. 순식간에 빨갛게 얼 것 같은 칼바람이 쌩쌩 부는 밖에서, 유기는 유장을 기다렸다. ...한 번 쯤 넘어가 주지 뭐. 종강도 했는데. 유장은 한 백 번쯤 한 생각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가자, 하고 말을 꺼냈다. 유기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둘은 손을 잡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걸어갔다. 가는 길에 간단히 먹을 걸 사곤 유기의 자취방을 향했다. 허리를 두드리며 후회하는 것은 다음날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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