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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 풀었던 썰을 그대로 백업합니다. 퇴고X

*할리킹입니다.


유기유장으로 말괄량이 길들이기 보고 싶은데 유기라면 유장을 좀 다른 방향으로 길들일 거 같아... 자기 사랑을 잔뜩 받아들일 수 있게 좀 바꿀 거 같다 나를 믿어봐요 나는 믿어도 돼요 유장 씨 당신을 끝까지 사랑해 줄게요 같은 느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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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유장은 크게 부르짖었다. 안 돼! 될 리가 있냐! 절대로 안 돼! 안 돼! 안 된다고! 유비는 울상을 하고 혀엉, 하며 유장을 불렀다. 유장은 하마터면 마음이 덜컥 내려왔다가 다시 제 자리에 올라붙었다. 유장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제갈량을 노려보았다. 어디서 감히 내 동생을 데려가려고! 다시 만난지 몇 년도 아니고 몇 달이었다. 이제 간신히 만나서 그동안 아껴주지 못했던 것을 다 풀기는 커녕 회포도 아직이었다. 자기가 대화를 했는가 무얼 했는가. 기껏 준 것이라고는 초콜릿 몇 조각이 다였다. 우리 귀여운 유진이,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하고. 다시 울컥 눈물이 치밀려 해서 유장은 목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그런 귀하디 귀하고 곱디 고운 아이를 누군지도 모를 놈팽이가 홀랑 집어가려 하다니! 심지어 사귀는 것도 아니고! 결혼이라니!

절대 안 돼! 내가 죽어도 안 돼!

하지만 나한테 제갈량을 붙여준 것도 형이고...!

내가 언제?

유장의 황당한 얼굴에 유비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공손찬을 포함해서-야속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야속한 것은 또 처음이었다. 옆에서 쯧쯧 혀를 차기는 하지만 도와줄 생각을 않는 찬이를 유비는 도와달라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공손찬은 차라리 절도있는 움직임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도 반대야. 유비는 시무룩하니 풀이 죽었다.

비합리적이군요.

제갈량이 입을 열었다. 유장의 노려보는 눈초리가 제갈량에게 내리꽂혔다. 제갈량은 그런 유장의 표정에도 굴하지 않고 고개를 세웠다.

결혼은 주, 유비 님과 제 사이의 사적인 일입니다. 유장 님이 개입하실 일은 아닐텐데요.

결혼이 사적인 일이다.

유장은 뿌득 이를 갈았다.

아니! 결혼은 가문과 가문 간을 결합이기도 하다! 가정 내의 큰 일이기도 하지! 이전에는 큰형이 결혼을 하지 못하면 그 밑으로는 결혼할 생각을 하지 못했어!

저희 둘 다 가문이라 할 만한 큰 것은 가지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가정 내의 큰 일인 건 맞지!

유장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니 유비!

응?

넌, 내가 결혼 할 때까지, 결혼 못한다! 절대 안 돼!

에엑!

물론 유장은 결혼할 생각이 추호도 없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제 유비의 '나 제갈량이 좋아, 너무 좋아... 너무너무 정말정말 좋아서 결혼하고 싶어...'하고 울먹이는 표정에 넘어간 공손찬은 고소하다는 얼굴로 제갈량을 바라보았다. 마치 소시지 먹다 파프리카를 씹은 양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유장은 운동을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유비는 축 쳐져서 힝, 하고 없는 꼬리와 귀를 늘어트리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모두가 간과한 것은, 제갈량의 추진력이 얼마나 강한지에 대한 것이었다.

-

유장의 운동하고 오겠다는 말은 다르게 말하자면 출근했다가 오겠다는 말이었다. 매일 아침 체육관으로 출근하는 유장은 체육관에서 사람들을 지도해 주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물론 자기 자신의 운동도 빼먹지 않았고, 이전의 부상 전에는 운동하는 것이 업이었기 때문에 운동한다는 말이 출근한다는 말보다 편한 것 뿐이었다. 유장은 체육관에서 나와 오늘의 운동을 보충하기 위해 동네를 한 바퀴 가볍게 돌기로 했다. 속도를 유지하며 돌고 있는데, 문득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그건 약간은 조잡해 보일 수도 있는 a4용지였다. 전봇대에 전단지마냥 붙어있는 a4용지를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건 뭔가가 좀 달랐다. 광고처럼 사진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사진은.

유장의 사진이었다. 애인 급구! 그리고 그 밑에 적혀있는 도원관의 전화 번호. 유장은 거칠게 외쳤다. 제갈랴아아앙!!! 전신줄 위에 앉아있던 새가 푸드득 날아갔다.

-

당연하지만 제갈량과 유장은 싸웠다. 죽어도 저 놈은 나랑 안 맞는다며 꽤나 심각하게. 애인을 구하려면 먼저 애인을 구한다는 소문부터 내야하지 않겠습니까? 제갈량은 부채를 부치며 이야기 했고 유장은 내 동의도 없이 그딴 짓을 저지르냐며 화를 내었다. 공손찬은 둘을 말리지 않았고 유비는 말리지 못했다. 그래서 연락이 있었느냐 하면, 그 한 나절간 꽤 많은 전화가 걸려왔다. 애인 구한다는 데죠? 하고 시작하는 것은 예사였고, 웬 변태가 있어서 경찰에 신고를 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대부분 분노한 유장이 안 구합니다!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면 전화가 다시 걸려오지 않았다. 유비나 공손찬이 받았을 때에는 좀 더 정중하긴 했지만 그래도 다시 걸려오지는 않았다. 한나절이 지나고 나자 전화는 다시 점점 뜸해져서-유장이 동네를 돌며 전단지를 수거했다. 유비와 공손찬도 도왔다-다시 걸려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다음 전화가 걸려온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전화가 걸려왔다기보다는, 사람이 찾아왔다.

아침 운동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유장은 도원관 앞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훤칠한 키의 남자는 긴 롱코트를 입고 도원관 문 앞을 어색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유장은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펴며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뭡니까?

남자가 뒤를 돌았다. 멋스럽게 넘긴 머리 아래 잘생긴 얼굴이 유장의 눈에 비쳤다. 잘생긴 건 제갈량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또 다르게 잘생겼다. 유장은 약간 눈을 찌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 저, 여기가 도원관 맞습니까?

그런데요.

그러나 남자가 방긋 웃었다. 얼굴에서 빛이 나오는 것 같아서 유장은 얼굴을 더 찌푸렸다. 어제 사진도 이런 얼굴을 찍어다 넣었었지.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악수라도 하자는 건가. 유장은 고개를 기울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어제 전화드린 유기라고 합니다.

제갈량이라는 분께 자리를 전해 들었는데요. 유장의 얼굴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

여기, 커피.

유비는 어색하게 커피잔을 건넸다. 유기는 사람 좋게 웃으며 감사합니다, 하고 잔을 받아 들었다. 유기가 처음 도원관에 들어왔을 때 유비는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기억이 난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고, 그 후로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닌 어색함 속에서 유기를 대했다. 유기는 그런 유비보다는 유장을 더 신경쓰는 눈치였다. 유장은 식탁 앞 의자에 삐뚤어지게 앉아서 유기를 반쯤 노려보고 있었다. 제갈량은 유기 옆에서 커피를 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유기가 컵받침 위에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당사자는 모르고 있었던 일이시라는 거네요? 벌칙게임 같은 거였나요?

벌칙... 뭐 그렇게 생각하던지.

유장이 퉁명스레 말하며 손을 내저었다. 흠, 유기가 소리를 내었다.

그러니까 그냥 얌전히 돌아가. 어?

그건, 좀 곤란한데요.

유기가 웃음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저도 나름대로 외로워서 찾아온 건데다,

데다?

꽤 취향이거든요. 유장씨가.

뭐라는 거야 이게. 유장의 입이 떡 벌어졌다. 유기는 조금 전보다 더 환해진 얼굴로 커피를 들었다. 아, 커피 맛있네요. 어? 어어...? 유비는 정리가 잘 안 되는지 약간 버벅거리며 대답했다. 달칵, 하고 잔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제갈량이었다.

사귀어보시지 그러십니까.

뭐?

애인도 없다, 누굴 만날 생각도 없다. 게임이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으십니까?

제갈량이 다리를 꼬아 앉았다. 유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제갈량을 바라보았다.

결혼을 하시라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만나보는 것 뿐인데 그것마저 못하시겠다면, 뭐, 지는 게 두려우신 게 아닌가 싶네요.

이...!

유장은 식탁을 뒤집을 듯 꽉 쥐었다. 제갈량은 화를 돋구기라도 하려는듯 피식 웃었다. 유장이 벌컥 소리를 질렀다.

해! 하면 될 거 아냐!

와아.

태연한듯 순진한 듯 가벼운 탄성이 터졌다. 그제야 유장은 유기를, 그 잘생긴 남자를 돌아볼 수 있었다.

어부가 이득을 봤네요. 유기가 방긋 웃고 있었다. 유장의 얼굴이 터질 듯 빨갛게 변했다. 유장은 도원관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

급하게 뛰어나오느라 땀이 죽죽 흘러내렸다. 안 그래도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데. 유장은 붕대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숨을 골랐다.

굉장히, 빠르, 시네요.

뒤에서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유장은 깝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유기는 숨을 제대로 고르지도 못하고 무릎을 괴고 유장을 보고 있었다. 유장은 황당한 눈으로 유기를 보았다. 자기가 생각해도 꽤 먼 거리를 뛰어왔는데 도원관서부터 여기까지 따라온 건가?

할 일 없어?

아뇨, 그건, 아닌데.

유기가 후, 긴 숨을 뱉었다. 입김이 뿌옇게 일었다가 날아가듯 흩어졌다. 유기가 입을 떼었다.

아무리 그래도, 얘기는 나눠봐야지 싶어서요.

뭘 또.

당사자끼리의 대화? 그런 거요.

유장은 얼굴을 찌푸렸다. 뭘 또 대화를 나누겠다고. 유장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원하는 걸 얻어냈으니까 된 거 아냐?

사귀고 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가 없네요.

사귀는 게 뭐 대수인가.

유장이 불퉁하게 말했다. 유기는 웃었다.

계약서라도 쓰죠, 우리.

유장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사귀는 데 무슨 계약서야?

합의점이 없을 거 같아서요, 이러다.

자기 소개도 못하고 끝날 거 같은데요. 유장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는 거라고는 유기의 이름 뿐이었으니까.

...도원관 말고 다른 데서 얘기하지.

커피 싫지는 않으시죠?

유기가 눈을 휘었다.

아침, 아니, 아침이라기보다 새벽의 카페는 한적했다. 각자 아메리카노 한 잔과 유자차 한 잔을 가지고 돌아온 유기에게 유장은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체육관에서 일하고 있는 유장이라고 하고,

잠시만요, 음, 유장씨?

유기가 말을 끊었다. 유장은 얼떨떨하게 유기가 내미는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었다.

그런 건 나중에 말씀해 주셔도 돼요. 자기 소개라고 하기에도 딱딱하고, 천천히 알아가는 게 좋잖아요?

그럼 뭐하러 여기 왔는데?

유장이 물었다. 커피는 너무 뜨거워서 아직 마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유장은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연애의 규칙을 정하러 온 거죠.

규칙?

뭔 놈의 규칙을 또 따로 정한단 말인가. 유장은 어리둥절하여 유기를 바라보았다. 유기가 웃었다.

음, 예를 들면, 못해도 일주일에 세 번은 만나야 한다던가?

그런가.일주일에 세 번이라. 연애를 할 만한 여유가 없었던 유장으로서는 많은 것인지 적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유기가 사르르 녹일듯이 웃었다.

그럼 일주일에 세 번으로 할까요? 하한선은.

그러던가.

유장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유기는 핸드폰을 톡톡 두드려 입력했다.

만나면 비용은 제가 댈게요.

...나도 낼게.

예? 아니에요.

유기가 손사래를 쳐서 유장은 얼굴을 찌푸렸다.

유장 씨가, 절 만나 주는 거잖아요. 저는 좋아요.

...세 번에 한 번이라도 내가 낼게.

으음.

유기는 좀 고민을 하더니 입을 떼었다.

네 번에 한 번.

...그래.

부잣집 도련님인가. 돈을 쓴다는데 거침이 없었다. 유장은 약간 식은 커피를 조금 마셨다.

아, 나 낮에는 연락 잘 못하니까, 웬만하면 낮에는 연락이 덜했으면 좋겠어. 급한 거면 모르지만.

낮에는 연락 어려우시다고요... 저녁은, 괜찮아요?

아마?

유장은 어색하게 대답했다. 유기는 핸드폰을 조금 더 두드렸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해도 될까요?

...그러던가.

유장은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시간이 꽤나 지나 있었다. 출근할 시간이었고, 유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근 시간이라, 먼저 간다.

네.

다음에 봐요, 유장 씨. 유기가 웃으며 자신의 앞에 있는 유자차를 들었다. 유장은 괜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굉장한 불공정계약을 체결했다는 걸 유장은 뒤늦게야 알았고, 그 때는 꽤나 늦어있었다.

-

유기에게 연락이 온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땀을 씻어내고 나온 유장은 울리는 진동을 보고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유비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유기가 형 핸드폰 번호 달라는데 줘도 될까?

그러고보니 폰 번호도 교환을 안 했구나. 유장은 새삼 어색함을 느꼈다. 이상하게 사귀는 사이라는 게 부각되는 느낌이었다. 유장은 간단하게 답장을 보냈다. 줘. 괜찮아. 핸드폰을 내려놓고, 유장은 머리를 말렸다. 찬 공기 속에서 머리를 털고 있으려니 오소소 소름이 돋으려 했다. 핸드폰 진동이 또 한 번 길게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유장 씨, 유기에요.

짧은 문자가 와 있었다. 유장은 어떻게 답장을 보내야할지 짧은 고민을 했다. 진동이 한 번 더 울렸다.

내일 저녁에 뵐 수 있을까요?

유장은 시계를 보았다. 시간이 꽤 늦어 있었다. 체육관 일을 끝내고 나왔을 뿐인데. 이 시간에도 만날 수 있을까? 유장은 핸드폰을 두드렸다.

8시 이후도 괜찮으면.

진동이 한 번 더 울렸다.

좋아요. 그럼 모시러 가도 될까요?

모시긴 뭘 모셔. 그냥 내가 갈게.

도원관 앞으로 갈게요.

거 말 참 안 듣는 놈일세. 유장은 얼굴을 찌푸리고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글자가 변하는 것은 아니라 유장은 한숨을 쉬고 핸드폰을 뒤집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말렸다. 자기 직전에 유장은 핸드폰을 열었다. 그리고 번호를 저장했다.

유기

이름 두 글자가 유난히 선명했다. 유장은 그대로 핸드폰을 덮고 이불을 고쳐 덮었다. 사늘한 바람이 코 끝을 스쳤다.

저녁의 도원관 앞은 한산했다. 유장은 목까지 올라오는 옷 아래에 얼굴을 묻고 숨을 뱉었다. 김이 뭉게뭉게 올라왔다 흩어졌다. 날이 쌀쌀하다 못해 싸늘했다. 바람이 칼날처럼 아프게 스쳤다. 핸드폰을 열었다. 일곱 시 오십 분. 생각보다 체육관이 일찍 끝나서 일찍 나오기는 했다. 유장은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었다. 골목 언저리에서 차가 돌아나오는 소리가 났다. 고급 세단이 도원관 앞에 멈췄다. 유장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유기가 차에서 내렸다.

야, 너.

유장 씨.

유기가 방긋 웃었다. 유장은 어안이 벙벙했다.

너, 무슨.

타세요.

유장은 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삶 어디서 이런 차가 튀어나올만한 구석이 있단 말인가. 대체 이건 뭘 하는 놈이지? 유장이 탈 생각을 하지 않자 유기가 앞으로 돌아나왔다. 그리고는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타세요, 유장 씨.

너.

타시면 말씀 드릴게요.

유기가 방싯 웃었다. 잘생긴 얼굴이 웃는 게 사뭇 유혹적이었다. 유장은 반쯤 떠밀리듯 차를 탔다. 차 문이 닫히고 잠시 후 유기가 운전석에 탔다. 따끈한 온기가 뼈까지 녹아들었다.

유장 씨, 안전벨트요.

어? 어어.

유장은 어색하게 안전벨트를 매었다. 찰칵, 하는 소리가 들리자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유장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차를 돌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냔 말이지. 유장은 헛웃음을 지었다.

너, 진짜 뭐냐.

아버지가 사업을 좀 하셔서요.

덕을 좀 보고 있죠. 유기가 웃으며 말했다. 유장은 운전을 하는 유기의 옆얼굴을 반쯤 노려보다시피 했다. 유기는 얼굴에 걸려있는 작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운전을 하고 있었다. 이미 타 버린 거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유장은 긴장을 풀기 위해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다음에는 이 차 가져오지 마. 아니, 그냥 걸어서 만나자.

음.

유기가 생각하듯 음성을 내었다.

이 차 안 가져올게요.

그러면 되죠? 차가 잠시 신호에 멈춰서 유기가 유장을 돌아보았다. 유장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드셨어요?

유기가 물었다. 긴장을 조금씩 풀고 있던 유장은 머리를 목받침에 기대고 대답했다. 아직. 유기가 그럴 줄 알았다며 웃었다.

차는 시내를 돌아 교외로 빠져나갔다. 화려한 간판과 네온사인을 뒤로 하고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이 앞으로 나섰다.

어디 가는 거야?

식사하러요.

유기는 끝까지 웃고있을 작정인 모양이었다. 유장은 뭔가, 패턴을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돈 자랑 하는 거냐?

예?

유장이 불퉁하게 말했다.

지금 뭐, 고기 칼질하러 가는 거 아냐? 돈자랑이냐고.

음.

유기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유장은 유기를 돌아보았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유장 씨가 불편하시면 앞으로는 여기는 안 갈게요.

유기가 사르르 녹아내릴 듯이 웃었다. 의외로 말이 통하는 놈인가. 유장은 긴장을 조금 더 풀었다.

식사는 맛있었다. 유기는 메뉴판을 유장에게 주지 않았고, 유장도 별로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도 맛있는 건 맛있는 거였다. 유기는 빙긋 웃으며 유장에게 질문했다.

음식은 입에 맞으세요?

유장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프는 간이 딱 맞았고 도톰한 고기는 입 안에서 녹았다. 맛은, 있네. 유장이 약간 불퉁하게 대답했다. 유기가 미소지었다.

그런데 이런 옷 입고 있어도 되는 거야? 여기.

괜찮아요.

유기가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청바지에 간단한 점퍼 차림인 유장은 정장 차림인 유기를 보며 퍽이나 그렇겠다고 생각했다.

많이 불편하세요?

유장은 침묵했다. 유기는 약간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다음부터는 신경 쓸게요.

......

유장은 괜히 미안해졌다. 미안할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잣집 도련님인 거 같은데 왜 자신과 어울리고 있는지. 유장은 포크를 잘근잘근 씹었다.

돌아가는 길은 조용했다. 차는 역시 도원관 앞에 멈췄고 유장은 안전 벨트를 풀었다. 유기가 문득 유장을 불렀다.

유장 씨.

어?

내일 모레, 뵈도 괜찮을까요?

유기는 웃음기 없이 간절한 눈으로 유장을 바라다 보고 있었다. 유장은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모레는 안 돼.

......

대신 글피는 괜찮아.

유기가 웃었다. 분위기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럼 글피에 뵐게요.

...그래.

유장은 후닥닥 자리에서 내렸다. 해가 진지 한참 지난 공기가 차가웠다. 유장은 길을 가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시동은 커녕 라이트도 끄지 않은 차가 계속 거기에 서 있었다. 유장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집을 향했다. 얼어붙은 공기가 바람에 날렸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유장은 유기를 너무 얕보았다.

사흘은 금방 지나갔다. 평상시와 같이 일을 하고, 운동을 하고, 잠을 자고, 도원관에 들리기도 하며 유장은 하루들을 넘겼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었다. 그냥, 가끔, 아주 가끔 시계를 보았다. 평소보다 한 번 더, 아니 두 번 더. 그 정도가 다였다. 약속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유장은 시계를 한 번 더 볼 때마다 훈련생들에게 좀 더 엄해졌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도원관 앞은 사흘 전보다 좀 더 춥게 느껴졌다. 해가 떨어지는 시간이 빨라져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유장은 지난 번보다 좀 더 격식있는 차림을 하고 나왔다. 그래보았자 정장은 아니었다. 면바지에 셔츠, 그게 다였다. 위에 입은 점퍼는 변하지 않았다. 분명 유기는 신경써주겠다고 했는데, 유장은 괜히 공들여 입고 나왔나 조금 고민했다. 골목을 돌아 차가 오는 소리가 났다. 차 소리가 가벼웠다. 그래도 신경 써줬네. 농담은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도원관 앞에 차가 섰다.

유장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차 앞에 붙어있는 로고가 손바닥만했다. 자신도 알고 있는 로고였다. 그건, 외제차였다. 소형차라고는 하지만 앞에 붙어있는 로고만으로도 가격이 얼마나 뛰었을지 짐작이 갔다. 유기가 차에서 내렸다.

유장 씨!

야, 야 너...!

유장은 기가 막혀서 말을 잇지 못했다. 왜 그러세요 유장 씨. 유기는 잘못을 하나도 모르겠다는 양 생글생글 웃었다.

이건 또 뭐야!

이건 제 차요.

유장이 분통을 터트리자 유기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지난 번에 그 차는 안 가져오기로 했잖아요? 그래서 다른 차를 가져왔어요! 유장은 머리가 어찔해지는 느낌에 머리를 짚었다. 맙소사. 정말 맙소사였다.

타세요, 유장 씨. 저 예약해 뒀어요.

야, 너.

얼른요.

유기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 차는 타고도 따질 수가 있으리라. 유장은 차에 타서 안전 벨트를 매었다. 유기가 차를 출발시켰다.

너, 일부러 나 엿먹이려고 하는 거지.

네?

유기는 하나도 모르겠다는 양 능청스럽게 그럴리가요,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차는 금방 번화가 쪽으로 빠졌다. 그리고 그 쪽에서도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유장이 눈을 깜박였다.

예약해 뒀다고 하지 않았어?

시간이 좀 남아서요.

시간이 남았는데 독촉도 했단 거냐. 유장은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내지 못했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유장은 한숨을 푹 쉬었다. 유기는 시동을 끄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조수석 문을 돌아가 열었다. 무언의 재촉에 유장은 안전벨트를 풀고 내렸다. 유니폼을 입은 종업원이 운전석으로 들어가 매끄럽게 주차했다. 별의 별게 다 있네. 유장은 어쩐지 골치가 아파오는 느낌이었다.

유장 씨.

어?

인형 놀이 좋아하세요?

유장은 의아해졌다. 인형놀이? 갑자기 웬?

아니,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래요?

아쉽네요. 유기가 비식 웃었다.

저는 좋아하거든요, 인형놀이.

그리고 정확히 10분 후, 그 인형놀이가 무슨 소리였는지 유장은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확실히 유장 씨는 셔츠가 잘 어울리네요.

유장은 녹초가 되어 앞에 마주앉은 유기를 노려보았다. 유기는 별 동요도 없이 그런 유장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옷을 열두 번은 더 갈아입은 기분이었다. 처음 세 벌까지는 어안이 벙벙해 저도 모르게 갈아입었고, 그 다음부터는 저항을 했지만 그대로 피팅룸에 집어 넣어졌다. 그 상태로 일곱벌 쯤 더 갈아입고 나니 말 그대로 지쳐 나가떨어졌다. 유기는 즐겁게 그걸 보면서 옷을 건네 주었다. 이거 입어 보세요. 이건 어떠세요. 이 바지는요. 지금 유장은 그래서 디피된 옷을 그대로 벗겨서 입다시피 하고 있었다. 정장은 유장에게 딱 맞았고 넥타이는 목을 조금 조이고 있었다. 몇벌의 옷이 계산대 위에 쌓여있었다.

저거 다 주세요.

뭐?

유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기는 자연스럽다는 듯이 카드를 내밀고 있었다. 유장은 카드를 가로챘다.

절대, 안 돼.

유장 씨.

유기가 사뭇 간절한 듯 유장을 바라보았다. 유장은 넥타이를 조금 풀었다.

전부 잘 어울리잖아요. 유장 씨한테.

됐어. 필요 없어.

유장 씨.

적당히 하랬지.

음.

유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유장은 좀 불안해졌다.

여기서부터.

유기가 카드를 쥐지 않은 손으로 셔츠가 늘어서 있는 줄의 한 쪽 끝을 가리켰다.

저기까지.

그리고 반대쪽 끝을 가리키고는.

전부 주세요. 좀 전 사이즈로.

뭐?

바지도 살까요 유장 씨?

유기가 방긋 웃었다. 유장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카드를 놓았다. 유기는 부탁한다며 점원에게 싱긋 웃어보였다. 유장은 점원에게 불퉁하게 말했다.

...셔츠는 빼고.

유기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유기가 안내한 곳은 테이블이 있는 일식집이었다. 예약을 했다는 게 정말인지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점원은 친절하게 자리로 안내해준데다 금세 음식을 내 오기 시작했다. 앞에 서 있는 주방장에게 유기는 말을 걸기까지 했다.

슬슬 패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차도 그렇고 음식도 그렇고, 옷도 그렇고, 전부 자신이 지난 번에 말린다고 언급한 것이었다. 적당히 해. 작작 해 둬. 그런 말을 꺼낸 것은 죄다 등급이 한칸씩 올라제꼈다. 뭐라고 꾸중을 하면 그걸 들어먹는 게 아니라, 역으로 더 굉장한 것을 가져오는 쪽으로 가 버렸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 어쩌다 이런 놈하고 엮이게 되었지? 유장은 초밥을 입에 넣지도 못하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입에 안 맞으세요?

유기가 유장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유장은 그런 유기을 흘끗 보고는 입안에 초밥을 넣었다. 입안에서 사르르 풀어지는 초밥은 맛있었다. 맛은 있었다. 다만 방긋 웃는 그 얼굴이 너무나도 찝찝하다는 것이 유장의 감상이었다. 유장은 당장이라도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은 것을 참고 입을 열었다.

얘기 좀 하지.

네, 말씀하세요 유장 씨.

놀리려 드는 거냐?

예?

유장은 진지한 얼굴로 유기를 바라보았다. 유기가 당황스런 얼굴을 했다.

뭘 하고 싶은 거야 대체. 아까 말한 인형 놀이?

그건 아까 끝냈는데요.

아니면 뭐, 돈 자랑? 아니면 한 번 꼬시고 싶었어?

말하다보니 성질이 올라오려했다. 유장은 길게 숨을 빼며 진정하려 노력했다.

많이 불편하셨어요?

그걸 말이라고.

그럼 다음엔, 유장 씨가 하자는 대로 할게요.

네 번에 한 번. 기억 나시죠? 유기가 유장의 손을 잡았다. 곱지만 중간중간에 빳빳하게 굳은 살이 박혀 있었다. 그런 유기의 손을 보다 유장은 고개를 들었다. 유기의 얼굴은 간절해 보였다.

...그래.

유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유장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주 나중에.

그 날 밤 유기의 핸드폰이 울렸다.

내일 6시 ×× 시네마 앞

문자는 간단했고 점 하나 찍힌 것 없이 간결했다. 유장의 성격이 보이는 것 같아서 유기는 웃음을 흘렸다. 유기님.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 유기는 대답했다. 아버님께서 부르십니다. ...금방 갈게요. 유기는 네, 내일 뵈어요^^하고, 문자 를 전송했다. 유기는 핸드폰을 엎어놓고 방을 나섰다.

-

유장은 집을 나섰다. 어제 샀던 옷들을 고이 옷걸이에 걸어두고 평소 입던 옷을 입고 나왔다. 운동화는 끈을 질끈 묶고 유장은 뛰듯이 걸었다. 운동을 매일 했는데 이러고 번화가에 나가는 게 또 오랜만이라고 몸뚱이가 받아들였는지 땀이 송글송글 솟았다. 유장은 옷자락으로 땀을 닦고 괜히 땀냄새가 나려나 걱정을 했다. 체육관에 갈 때는 어차피 땀냄새가 날 테니 신경 쓰지 않았지만 오늘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 안, 나려나. 다시 들어가서 씻고 올까. 어쩌지. 유장의 고민은 짧을 수 밖에 없었다. 유장 씨! 멀리서 유장을 부르는 소리가 나서 유장은 고개를 들었다. 유기였다. 처음 본 날처럼 정장 위에 롱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다쳤어?

아, 그게.

유기는 터진 입술을 가리지도 못하고 어물어물 대답했다.

오다 넘어져서요. 약은, 바르고 왔어요.

유기가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손바닥 양쪽에 넓적한 밴드가 붙어있었다. 유장은 저도 모르게 유기의 손등을 붙들고 혀를 찼다. 조심 좀 하고 다닐 것이지. 말 끝이 흐려졌다. 유기가 방긋 웃었다.

걱정해 주시는 거에요?

......

넘어지길 잘 했네요.

시끄러.

유장은 투덜거리며 손을 놓았다. 귓가가 뜨끈뜨끈 했다. 그리고 뒤를 돌았다.

영화 시작하겠다. 들어가자.

네에.

유기가 웃으며 유장의 뒤를 따랐다. 옷은 주머니에 쑤셔넣은 상태였다.

영화는 액션 영화였다. 주인공이 현란한 움직임으로 적의 공격을 피하는 것을 지켜보다 유장은 고개를 돌렸다. 잘 보고 있나? 유기는 턱을 유장 쪽으로 괴고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잠시 유기를 바라보던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입술이 터진 것이 적나라하게 보여서였다. 소리가 들렸는지 유기가 고개를 돌렸다.

왜요 유장씨?

유기가 소근소근 말을 걸었다. 유장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려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화면에서 무언가가 폭발하고 있었다. 문득 유기의 손이 팔걸이를 건너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유기의 손이 유장의 손을 찾아 깍지를 끼어 손을 잡았다. 차가운 밴드의 감촉이 유장의 손에 닿았다. 유장의 얼굴이 화닥닥 불타올랐다.

너..!

쉿.

유기가 빙글빙글 웃으며 입 앞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유장은 뻐끔뻐끔 뭐라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유기도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장은 남은 한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뻔뻔하긴, 하여간. 그런 생각을 하며.

영화 재미있네요.

유기가 말했다. 도중부터 손을 잡고 본 주제에 대담하게도 말한다. 유장은 그냥 그랬어, 조금 애매하게 대답했다. 영화를 보고 나오나 8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저녁을 뭘 먹이긴 해야할텐데. 뭘 먹여야 하나. 유장은 조금 고민했다. 손이 휙 딸려갔다.

유장 씨.

어?

떡볶이 먹죠.

뭐?

저 떡볶이 먹고 싶은데.

유장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게 날 얼마나 무시하는 건지.

밥 살 돈은 있어.

제가 먹고 싶은데요.

저 잘 먹으니까 밥값만큼 나올 걸요. 유기가 웃었다. 유장은 그 얼굴을 빤히 보다 앞질러 성큼성큼 걸었다. 그러다 문득 돌아보고 물었다.

차, 가져왔냐?

아뇨.

그럼 따라와.

-

저는 분명히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말씀 드린 거 같은데요.

시켜, 떡볶이. 아마 해줄걸.

아마...

유기가 어색하게 말을 반복했다. 포장마차는 시간이 빨라서인지 사람이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유장은 먼저 시킨 잔치국수를 내밀어 테이블 중간에 놓았다.

먹어. 여기 국수 잘 한다.

아, 네.

주변을 둘러보다 유기는 나무 젓가락을 뜯었다. 딱,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유장은 고개를 숙이고 국수를 빨아들였다. 여기고 그렇게 좋은 데도, 비싼 데도 아니지만, 그래도 떡볶이보다는 낫겠지 싶었다. 아닐 수도 있지만, 자신이 아는 곳은 별 데가 없었다. 좀 찾아보고 올 걸 그랬나. 후회가 되었다.

유장 씨.

웅?

국수를 문 채로 고개를 들자 유기의 손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유기의 손이 입가를 닦았다. 유장은 나무 젓가락을 놓칠 뻔했다.

고춧가루 묻었어요.

유기가 피식 웃었다. 입술만 올려 웃은 거긴 하지만. 유장의 얼굴이 또 불타올랐다. 유장은 마른 세수를 하며 한숨을 토했다.

그런 것 좀 하지 마라.

그런 거, 뭐요?

스킨십 막 하고, 그러는 거.

음.

유기가 턱을 괴었다.

그럼 물어보면 돼요?

...어...

유장이 말을 흐렸다. 유기는 방긋 웃었다.

저 지금 뽀뽀 하고 싶은데.

뭐?

안 돼요?

안 돼!

사람들 있는 데서. 유장이 털을 세울듯이 화를 내었다. 유기는 더 웃었다.

그럼, 손, 잡아도 돼요?

턱을 괴지 않은 손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유장은 아까 잡았던 손이 왠지 뜨끈하게 느껴졌다. 유장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시선이 아까의 손으로 떨어졌다. 유장은 손을, 조심스레 내밀었다. 유기가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곤 부드럽게 끌어올렸다.

절충안.

유기가 그렇게 말하며 손에 입을 맞추었다. 유장의 얼굴이 빨갛게, 아주 빨갛게 달아올랐다. 유장은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이모 여기 소주 세 병이요!

-

술대작에서 먼저 쓰러진 것은 유기였다. 그래도 꽤나 술이 센 편이어서 먼저 술을 시킨 유장이 당황할 정도였다. 유장은 유기를 이끌고 택시를 잡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유장 씨.

유기가 중얼거렸다. 유장은 그 똑바른 발음에 놀라야할지 아니면 자신을 부른 것에 놀라야 할지 잠시 혼란했다. 유장은 어어, 하고 대충 대답해 주었다. 유장 씨. 유기가 한 번 더 유장을 불렀다. 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역으로 유장씨이이 하고 길게, 투정을 부리듯 유장을 부를 뿐이었다. 유장은 고개를 돌렸다.

왜.

유기가 벙긋 웃었다. 순진하고 순해보이는, 눈이 휘어지는 그런 웃음이었다. 유장의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유장 씨. 유기가 한 번 더 유장을 불렀다.

미안해요 유장 씨.

...뭐?

유기가 푹, 고개를 숙였다. 힘이 쭉 빠지는 것이 아주 취해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유장의 심장이 멎는 듯 했다. 미안하다니, 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유장의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유장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떨치려 노력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유장은 택시를 불러 잡았다. 그제서야 문득 유장은 유기의 집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탈 거요, 말 거요? 기사가 재촉했다. 유장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차에 올라탔다.

-

유기는 눈을 떴다. 머리가 욱신욱신 아파 와서 유기는 머리를 짚으며 잠을 깨었다. 눈을 뜨자 저절로 끄응, 하는 소리가 났다. 어제 어쩌다 이렇게 술을 마셨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을 깜박이다 유기는 여기가 자신의 방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일어났냐.

유기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유장이 앉아있었다. 하나 있던 침대를 자신이 차지한 것인지 바닥에는 요와 이불이 깔려있었다. 유기는 일어나려 몸을 일으켰다. 머리 위치가 갑자기 바뀌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유기는 머리를 손바닥 아랫부분으로 꾹꾹 누르며 유장을 보았다. 많은 폐를 끼친 것 같았다.

유장 씨.

뭐가 미안하냐?

예?

미안하다며, 뭔데.

유장의 표정은 덤덤했다. 유기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유장은 자신도 갑작스러웠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덧붙였다.

어제, 취해서 미안하다며.

......

뭐였어?

유장 씨. 그게.

미안한 일이 있는가 보네.

유장은 덤덤히 말했다. 유기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유장은 한숨을 푹 쉬었다.

됐어.

유장 씨.

세상은 정글이야.

방심한 내가 잘못인 거야. 유장은 떨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기가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장 씨.

......

해명하게 해 주세요.

......

부탁드립니다.

유장이 고개를 돌려 유기를 바라보았다. 표정이 차가워 보였다. 유기는 그 눈을 마주 보기 위해 노력했다. 유기는 유장의 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

......

잡아도 될까요.

...키스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네.

유장은 손을 내밀어 주었다. 유기는 그 손을 잡아 조심스레 얼굴을 부볐다. 그리고 그 온기에 눈을 감았다.

...저는 아직, 유장 씨를.

......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어요.

......

유장이 침묵했다. 유기는 말을 잇기 위해 노력했다.

유장 씨를 사귀기로 한 데에는 따로, 이유가 있고.

......

그치만 지금은, 유장씨가 귀엽다고, 생각해요.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았다. 유장의 침묵이 길었다. 유기는 차마 눈을 뜰 엄두를 내지 못했다. 유장이 뭐라 할지 생각하면 움직이기가 두려웠다. 당장이라도 나가라고 할 것 같아서. 유기는 손을 좀 더 꾹 쥐어도 될까 고민했다.

...너는.

예, 유장 씨.

아무에게나 그렇게 하면 안 돼.

...네, 유장 씨.

유기는 억지로 눈을 뜨고 유장의 눈을 바라보았다. 깊이 가라앉은 눈동자를 보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유장 씨.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유장은, 천천히, 자신의 손을 빼내었다.

...나는.

......

지금 좀 혼란스러워.

유장, 씨.

택시 탈 돈은 있으리라 믿는다.

유장이 문을 가리켰다. 나가 줘. 유기는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비틀비틀 일어나 유장이 벗겨 놓았던 코트를 챙겼다. 문을 나가려다 문득, 유기는 뒤를 돌아보았다.

...연락.

......

해도 될까요?

...나중에.

내가 할게. 유장이 말했다. 유기는 입술을 씹었다. 네. 그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유장은 무너져내렸다.

유장은 그대로 자리에서 한참을 누워있다가, 핸드폰이 울려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근해야했다. 운동을 가야했다. 유장은 씻고 집을 나섰다. 일과는 평소와 같았다. 유장은 핸드폰을 몇 번이고 꺼냈다가, 시간조차 확인하지 않고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집에 들어오니 해가 떨어지고도 한참이었다. 배가 고프지 않았다. 점심 먹은 게 얹혔나. 유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침에 정리를 하지 못해서 이불이 그대로 침대 옆에 펴져 있었다. 유장은 침대 위에 털썩, 드러누웠다. 자꾸만 눈이 감겼다. 유장 씨. 문득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유장은 눈을 다시 떴다. 그리고는 허공을 보다, 베갯잇을 버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시트까지 갈아치우기에는 너무 돈이 많이 든다고 생각을 하며 꾸물꾸물 침대에서 이불로 내려와 누웠다. 베개에서는 이제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유장은 눈을 감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유장의 집에는 여전히 이불이 펴져 있는 상태였고, 핸드폰을 보는 횟수는 점점 더 줄어들었다. 유장은 오랜만에 유비를 보러 도원관에 들릴까, 생각했다. 유장은 편의점에 들러 조그만 초콜릿을 하나 샀다. 그리고 그걸 주머니에 쑤셔넣고 도원관을 향해 걸었다. 그러다 문득 골목길에서 빼꼼히 도원관 앞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길 옆에는 담벼락이 서 있었고 가로등 하나가 길을 비추고 있었다. 유장은 골목에서 나와 도원관 앞으로 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곤 유장은 도원관 문을 두드렸다. 네에. 안에서 유비가 대답하는 소리가 났다. 유장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그리고 도원관 문이 열렸다.

어 형! 오랜만이야!

유비가 부르는 것이 들리지 않았다. 유장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유장은 두어걸음 뒤로 물러섰다. 안의 탁자에서 차를 마시던 유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유장을 향해 빠른 속도로 걸어왔다.

너, 너 왜 여기에.

유장 씨.

유기가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머뭇거렸다. 아주 구차한 변명을 꺼내기라도 하듯이 머뭇거리다, 유기는 입을 떼었다.

일주일에 세 번은, 보기로 했잖아요.

유장 씨. 유장은 하, 탄성 같이 내질렀다.

나는, 난 힘들다고!

유장, 씨.

너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네 얼굴 보기가 피곤하다고! 그 계약서도 찢어버리는 게 나을까? 응?

...저는 동의 못해요.

제가 동의 못하면 계약은 파기 안 돼요. 유기가 말했다. 유장이 눈을 홉떴다.

계약 부칙으로 달아놨어요. 알아서 하라고 하셔서.

무슨 그런..!

놓치기 싫어서. 그래서요.

유장의 얼굴에 약간이나마 혈색이 돌았다가, 다시 빠져나갔다. 저것도 또한 달콤하게 들리는 허망한 계약 얘기겠거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기가 한 발짝 더 앞으로 다가왔다.

유장 씨.

유기가 입을 떼었다.

이걸론 부족하다고 하실지는 모르겠지만.

......

지난 며칠간 유장 씨만 생각 났어요.

......

도통 다른 생각을, 전혀, 못하겠어서.

그리고 유기가 유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스팔트 길이 단단할텐데. 유장은 퍼뜩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을 깨달았다.

유장 씨.

......

이런 시작은, 안 될까요?

유기가 유장을 올려다 보았다. 울먹거리지도 않고 간절하지도 않고, 그저 무표정이었다. 유장은 저도 모르게 그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유기는 뭐라고도 하지 않고 그 눈을 마저 응시했다. 유장이 입을 떼었다. 그 순간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제갈량의 목소리였다. 유장은 합, 입을 다물었고 입을 두 손으로 막고 있던 유비가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유기도 뒤를 돌아보았다. 유비가 다가와 유장의 앞을 막았다.

우리 형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유진아.

유비. 그게,

안 돼! 우리 형한테 상처 주면 안 된다구!

유비가 입술을 깨물었다. 주군, 상처가 집니다. 제갈량이 애타게 말했다. 유비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유장을 돌아보았다.

형, 들어가자. 내가, 맛있는 거 해 줄게.

어? 어어...

그리고 그대로, 유비는 유장을 이끌고 도원관으로 들어가버렸다. 탁, 문이 닫혔다. 길에는 무릎을 꿇은 유기와 부채를 든 제갈량만이 남아있었다. 제갈량은 그런 유기에게 시선을 주다 도원관 안으로 들어갔다. 유기는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 호르르 한숨을 쉬었다. 쌀쌀한 공기에 숨이 하얗게 흩어졌다. 몇 번 눈을 깜박이는데 딩동, 하고 착신음이 났다. 유기는 핸드폰을 들었다.

내일 보자.

유장이었다. 유기는 눈을 깜박이다, 푸스스 웃었다.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다음날 유기가 끌고 온 차는 첫 데이트 때의 고급 세단이었다. 유장은 얼굴을 조금 찌푸렸지만 어쨌든 별 말 없이 차에 올랐다. 따뜻한 기가 훅 끼쳐와서 순식간에 몸이 노곤노곤해졌다. 유기가 조금 웃었다.

저녁 드셨어요?

먹고 왔어. 너는.

아.

그럼 간식거리 좀 살까요? 유기는 웃으며 말했다. 유장은 조금 미안해져서 뒷목을 매만졌다. 유장은 운전하는 유기에게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그냥 식당으로 가지. 배고플텐데.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빨간 불이 걸려서 유기는 차를 세웠다. 유기는 고개를 돌렸다.

유장 씨, 자동차 극장, 가 보셨어요?

-

주파수를 맞추자 차 안에 소리가 가득 찼다. 유장은 자동차 좌석을 뒤로 조금 젖히고 팔짱을 끼었다. 자동차 극장이라, 말은 들어보았는데 이렇게 오기는 또 처음이었다. 좀 더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게 괜찮은 것 같았다. 소리를 어느만큼은 내도 되는 것이라던가. 유장은 유기가 사 온 간식거리를 씹으며 생각했다.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였다. 오해로 엇갈린 커플이 화면 안에서 싸우는 걸 보다가 유장은 슬쩍 유기를 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아.

어.

간식을 잘못 넘긴 유장이 기침을 했다. 유기는 음료 뚜껑을 열어 유장에게 넘겨주었다. 유장은 음료를 받아 목구멍으로 넘겼다.

괜찮으세요?

어, 어어.

그냥, 사레야. 유장은 어물어물 말했다. 유기는 그런 유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유장은 창피해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영화 음악이 신나게 흘러나오는 가운데에서 주인공 두 명이 싸우는 소리가 났다. 유장은 입가를 닦고 다시 화면을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유기가 아직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까? 그 별 것도 아닌 것이 왜 그리도 궁금한가. 유장은 흘끗 유기를 보았다.

자신을, 보고 있었다. 유장은 마른 세수를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유장 씨.

유기가 입을 열었다. 유장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어...

손,

잡아도 될까요. 유기가 물었다. 유장은 대답을 하는 대신 자신의 손을 조심스레 내밀었다. 유기의 손 끝이 유장의 손 끝에 맞닿고, 온기가 손끝에서 손바닥으로 번졌다. 온기라기에는 뜨거웠다. 손 사이로 주인공 둘이 시끄럽게 한탄하는 소리가 엇갈렸다. 유장은 뜨끈뜨끈한 손바닥을 반쯤 노려보다시피 바라보랐다.

유장 씨.

유기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손이 조금 잡아당겨졌다. 유기가 유장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키스.

......

해도 될까요.

유기의 얼굴이 가까웠다. 유장의 얼굴이 화닥닥 달아올랐다. 유기의 얼굴이, 커다랗게 보여서 얼굴 전체 보다는 부분 부분이 집중되어 보였다. 예를 들면, 입술이라던가. 유장은 질끈,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주인공을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

영화 재미있었죠?

유기가 방글방글 웃으며 물었다. 유장은 안전벨트를 꽉 쥐고 대답하지 않았다. 한 대 두 대 극장에서 자동차가 빠져나갔다. 재미는 무슨, 아무것도 뇌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말이 어땠더라. 유장은 자기가 결말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데에 약간 자괴감을 느꼈다. 유기는 웃으며 시동을 걸었다. 차가 부릉부릉 울며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아까보다 완연히 서먹해져서 유장은 뭐라 입을 떼지 못했다. 뭐라고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 생각만이 핑글핑글 머리에서 맴돌았다.

유장 씨.

유장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 어?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왔다. 유장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유기가 조금 소리내어 웃었다.

왜, 왜!

아뇨, 귀여워서.

뭐가 또 귀엽다는 건지. 유장은 조금 입술을 삐죽였다. 그걸 보고 유기는 또 웃다가, 목소리를 다듬었다.

저, 유장 씨.

왜.

집까지, 바래다 드려도 될까요?

도원관 말고요. 불빛에 비친 유기의 표정 이 진지했다. 유장은 잠시 그 표정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우리 집에 한 번 와 본 적 있잖아.

그 때는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요...

유기는 그렇게 말하며 핸들을 꺾었다. 차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유장은 픽 웃었다.

근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왜 외곽으로 빠져?

아, 호텔이요.

뭐?

유기가 녹일 듯이 웃었다. 아, 저 표정.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다음부터 신경 쓸게요. 그 때의 표정이었다.

유장 씨가 집을 안 알려 주시니까 바래다 드리고 내일 또 뵈려면 역시 호텔이-

우리 집으로 가! 가자! 그래! 도원관 있는 동네니까 가자!

네, 유장 씨.

그래 이건 이런 놈이었지. 유장은 골치를 짚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내일 또 보자니?

내일은 안 될까요?

유장은 유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당장 궁금함 정도만이 들어 있었다. 그 잘생긴 얼굴에 뭘 품고 있는 건지. 유장은 조금 궁금해졌다. 유장이 대답을 미루자 유기가 살풋 웃었다. 그 웃음이 익숙해서 유장은 당황했다. 아까 그 웃음이었다. 유장은 입을 뗐다.

괜찮아. 내일.

다행이에요. 유기가 웃었다. 차는 금방 돌아서 도원관을 지났다. 유장은 이쪽에서 좌회전, 저기서 우회전, 하고 길을 가리켰다. 좁은 골목을 여기저기 통과해 차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유장은 안전벨트를 풀었다.

유장 씨.

내리려 하는데 유기가 유장을 불렀다. 돌아보자, 유기가 제 입가를 톡톡 두드렸다.

뽀뽀.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유장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잡아 눌렀다. 유기의 표정이 진지해서였다. 저 얼굴에 능글맞은 웃음이 떠오르면 골치 아파지는 거였다. 유장은 유기를 끌어다 입가에 살짝 입술을 눌렀다. 유기의 눈이 커졌다가, 살짝 휘었다.

입술에 안 해 줘요?

거기면 됐지 뭘 바래?

에이.

너무해요. 유기는 투덜거리면서도 웃었다. 더 조르는 기색이 보이지 않아서 유장은 차에서 내렸다. 들어가다 말고 유장은 뒤를 돌았다. 차는 아직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

위이잉.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깐 끊겼다가, 다시 위이잉 진동이 울렸다. 진동이 끊이지가 않아서 유장은 잠에서 깨어나 머리맡을 더듬었다. 전화가 오고 있었다. 유기. 두 글자가 선명했다. 유장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자고 있었어요 유장 씨?

당연하지 지금이 몇 시인데...

장은 핸드폰을 보았다. 새벽 세 시. 한밤중이었다. 죄송해요. 유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됐어. 근데 왜.

저 혹시,

하룻밤만 재워 주실 수 있으세요? 유기가 물었다. 유장은 잠이 싹 달아나는 걸 느꼈다.

갑자기 웬...?

그게 지금 제가 유장 씨 집 앞이라서요.

뭐?

집에서 쫓겨났거든요, 저.

유장은 집 밖으로 뛰쳐나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익숙한 차 한 대가 건물 앞에 서 있었다.

-

유기는 볼을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불을 환하게 켜 놓고 유장은 마주보고 앉아서 유기를 노려보았다.

무슨 일이야.

유장 씨, 시간도 늦었는데. 주무시고 나서 얘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무슨 일이냐고 묻잖아.

유장의 눈이 더 날이 섰다. 유기는 음, 조금 앓는 소리를 내며 시선을 피했다. 유장은 아예 도끼눈을 떴다.

별 일 아닌데 깨운 거면 진짜 죽는다.

유장 씨이...

세상은 정글이야.

안 봐 줘. 유장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라서 유기는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저하고 아버지 사이가, 썩 좋지는 못해서요.

......

이번에, 결혼을 하라고 밀어 붙이시는데. 이겨낼 재주가 별로 없더라고요.

장 씨를 만나기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가 조금 있었고요. 유장은 끙, 소리를 냈다. 그런 와중에 애인 급구 소리를 보았으니. 애인이 있다고 하면 아버지도 뭐라고 안 하시지 싶어서. 유기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오늘 들어갔더니, 아버지가 그 애인하고 결혼할 게 아니면 얼른 헤어지라고...

유기가 다시 볼을 긁었다. 유장은 이제 유기를 약간 한심하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대판 싸우는데 집 나가라고 소리를 치시더라고요.

그래서 나오셨다?

쫓겨난 거라니까요.

유장은 한숨을 삼켰다. 도련님이란. 부모 없이 자란 유장은 그 세계를 영영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유장은 고개를 저으며 이불을 꺼냈다.

하루 자고 집으로 돌아가서 싹싹 빌어.

유장 씨.

어차피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애인이잖아.

제가 말하고도 칼로 베이는 양 심장이 뜨끔했다. 나는 꽤나, 유기를 좋아하는구나. 유장은 새삼스레 생각했다. 그러나 만난 것도 그 모양이고, 사귀기 시작한지 이주일도 되지 않았다. 좋아졌다고 해 봤자 얼마나 좋아졌겠는가. 자신이 이상한 거지. 유장은 뒤를 돌았다. 그리고 이불을 꽉 쥐고 서러운듯 바라보는 유기를 마주쳤다.

유장 씨.

.......

왜, 그렇게 말하세요.

제가 유장 씨를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유기가 말했다. 당장이라도 그 눈에서 눈물방울이 굴러갈 것 같았다. 유장은 당황해서 입을 조금 벌렸다. 유장 씨. 가뜩이나 좁은 방이라 붙어있던 유기가 성큼 앞으로 다가오자 유기의 얼굴이 대뜸 가까워졌다. 유기는, 유장의 볼과 입의 경계에 키스했다.

좋아해요 유장 씨.

...너.

아직은 조금이지만, 유장 씨가 생각하시는 것보다는 많이.

유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유장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쿵, 하고 농이 등에 닿았다. 유기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얼굴이 또 다시 가까웠다. 쪽, 쪽, 소리가 적나라해서 유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유장 씨, 유기가 유장을 불렀다. 눈 좀 떠 보세요. 유장은 고개를 젓다가 유기의 끈질긴 조름에 눈을 떴다. 반지가 눈 앞에서 반짝였다.

그, 당장, 프로포즈는 아니지만.

......

저랑, 약혼해 주시겠어요?

유장은 망연히 그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유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유기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유장은 생각했다. 지금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헤어질까? 다신 못 보게 되는 걸까. 그렇게 되어버리는 걸까. 그러다 유장은 유기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유기의 얼굴에는 드물게 웃음기가 없었다. 웃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만 내가, 고작 내가 이런 사람과 이어져도 되는 걸까. 유장은 문득 유기의 웃는 얼굴을 상상했다. 유기는 거의 늘 웃고 있었기 때문에 웃는 얼굴을 그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순수하게, 풋풋하게, 그리고 능글맞은 웃음. 여기서 거절하면... 혹시 웃으면서 그럼 결혼해요, 하고 말하는 게 아닐까. 유장은 생각했다. 더 큰 게, 감당 못할 게 굴러들어오는 게 아닐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유장은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유기가 와락 유장을 끌어안았다. 좋아해요 유장 씨, 좋아해요. 앞으로 더 좋아질 거에요. 자신할 수 있어요... 유기가 귓가에 속닥였다. 유장은 그런 유기의 팔을 떼어내려다, 조금 손의 힘을 풀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유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약혼했어.

도원관의 테이블 위에는 귤이 몇 개 담긴 접시가 올려져 있었다. 유비가 손님 대접을 위해 내 놓은 귤이었다. 유기는 좀 전부터 그 귤을 까고 있었다. 속살을 내보인 귤에서 하얀 껍질을 깨끗이 벗겨내려는지 유기는 한참이나 귤 한 개를 까고 있었다. 그 귤을 다 깔 동안 유장은 유비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고작 2주만에. 제갈량은 부채로 입을 가리고 눈썹을 치켜 떴다. 애인을 모집한다는 전단지를 붙인 건 자신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일이 잘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텅,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 보자 유비가 그릇을 떨어뜨린 것이었다. 제갈량은 벌떡 일어나 유비에게 달려갔다. 주군! 다행히 접시는 깨지지 않았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유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후다닥 달려 식탁 앞으로 섰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유장과 유비의 눈빛이 부딪혔다.

형! 이제 만난지 이주 밖에 안 된 사람인데...!

그 사이에 많이 만났어.

그, 만나기 시작할 때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잖아!

아, 그랬지 참. 유장은 뒷덜미를 벅벅 긁었다. 생각해 보니 저도 유기를 그닥 좋아해서 만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주제에 유기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데 충격을 받고 그리도 혹독했었다. 유장은 미안해져서 유기를 돌아보았다. 유기가 고개를 들고 방긋 웃었다.

유장 씨. 아~ 하세요.

어?

유기가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뭘 하려는지는 모르지만 더 큰 것은 안 되었다. 유장은 입을 벌렸다. 유기의 왼손 무명지에서 반지가 반짝였다. 속껍질을 완전히 벗겨낸 귤이 입 속으로 안착했다. 유장은 우물우물 귤을 씹었다.

...맛있네.

그죠?

이이익!

유비가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유장은 유비를 돌아보았다. 유비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유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주군, 제갈량이 불렀지만 들리지 않는 모양새였다. 유기는 손을 꼭 쥐고 가슴께로 올려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우리 형은 안 돼! 안 된다구우우!

+덧. 유기는 정말로 쫓겨났었습니다. 경호원들에 의해서(...) 반지 사고 호텔로 가려고(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프러포즈 하려고)했는데 호텔에서 카드가 막혀서 어쩔수 없이 유장을 찾아간... 그런 이야기(너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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