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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조 주의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두 대의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였다. 한 대의 핸드폰이 울린 것이 먼저였고, 잠시 후 약간 뒤따르듯 다른 한 대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같았다. 하나의 이름에는 도원관이라 써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유진이라고 써 있었지만, 어쨌거나. 유진이에게서 온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형 미안... 제갈량이 감기가 심해서 도저히 못 나가겠어
그리고 도원관에서 온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감기. 못 감. -제갈량
사마의는 핸드폰을 닫으면서 그나마 메시지가 왔다는 데에 의의를 두어야 하나 고민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제 옆의 사내를 불렀다.
조조님.
...왜 그러나.
...제갈량이 오지 못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조조는 똑바로 시선을 앞으로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문자를 받은 유장은 아까보다 좀 어깨가 쳐져 있었다.
유진이... 유비가 못 온다는데.
...그래요?
유기는 싱긋 웃었다. 유기의 손에는 여섯 장의 자유이용권이 팔락이고 있었다. 유원지 입구 30미터 전방에 네 남자는 사다리꼴을 만들며 서 있었다. 유장은 유기와 붙어있었고, 사마의는 조조의 한 걸음 뒤에 붙어 서서 조조와 눈을 맞출 듯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다. 유기가 유장에게서 고개를 돌리자 조조와 눈이 마주쳤다. 유기는 새삼 방긋 웃었다. 조조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네 남자 사이에 맴돌았다.
발단은 다음과 같았다. 그 날은 평범한 하루였다. 유비는 평소처럼 초선이를 마중 나온 조조와 사마의를 잡았고,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원래 그날 저녁 식사 멤버에 끼어있던 유장은 자기가 모르는 손님이 있다는 것에 놀랍지도 않은 듯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마의는 인간의 육체를 가진 것이 버거운지 어색하게 젓가락을 들었고, 조조의 코치를 받아가며 식사를 했다.-여담이지만, 조조는 꽤나 엄격한 보호자였다. 일례로, 사마의는 손을 파들파들 떨면서도 교과서에 나와도 될 정도의 젓가락질을 하고 있었다.-제갈량은 자신의 앞에 '할당' 된 소시지 야채볶음을 보며 인상을 조금 찌푸리고 있었다.-이제 인간인데 편식하면 안 되지 제갈량! 유비는 야채 없이는 소시지도 없다며 엄포를 놓았다.-마초는 유장의 옆에서 어린이용 포크를 들고 식사를 하고 있었고, 관우와 장비는 사이에 자리 하나를 비워두고 유비가 찌개를 내 온다며 들어간 주방을 흘끗거리고 있었다. 조운은 공손찬의 옆에서 반찬이라도 더 챙기려 노력하고 있었다. 공손찬은 자신도 손이 있다며 그런 조운을 조금 타박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 것은 유비가 찌개를 들고 나올 참이었다.
실례합니다.
앗 유기!
유비는 오븐 장갑을 벗지도 않은 채로 삿대질 비슷한 것을 하려다 실패했다. 일단, 오븐 장갑은 늘어나는 재질이 아니었다. 어쨌든 유비는 그 상태로 말을 계속 했다.
또 우리 형한테 작업 걸러 왔지! 안 돼! 안 된다구! 돌아가!
작업 걸다뇨,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유기는 방긋 웃었다.
이젠 애인인데요.
...! 형!
유비가 울 것 같은 눈으로 유장을 돌아보자 유장은 시선을 피했다. 마초, 밥 맛있어? 마초는 도르르 눈을 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기는 소리내어 웃으며 앞으로 한 발짝 나서 배신감에 차 있는 유비의 손에 들고온 비닐 봉지를 들려주었다.
참, 이거 최고급 돼지고기에요. 양은 얼마 안 되지만 맛이나 보시라고.
물론 뒷 말은 거짓말이었다. 유비의 손에도 꽤 묵직한 양인 돼지고기를 넘기곤 유기는 재빨리 유장의 옆-마초가 있는 쪽의 반대편-에 앉았다. 유비는 고기에 넘어가 버렸다며 힝, 하고 시무룩해하는 소리를 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유기를 내쫓지는 않았다. 밥 한 공기와 젓가락을 내밀었을 따름이었다. 문제는 다음 순간이었다.
유기?
조조가 입을 열었다. 항상 떠들썩한 유비네의 식사 자리에서도 침묵을 유지하던 조조답지 않은 일이었다. 방긋방긋 웃으며 얼굴이 벌건 유장에게 이 쪽을 좀 보라고 조르고 있던 유기는 끼리릭, 쇳소리가 날 것 같은 동작으로 조조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조태오?
그리곤 둘의 표정이 나란히 가라앉았다. 사마의는 어색함이 배가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고, 유장은 유기? 하고 작게 이름을 불렀다. 유기는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유장을 돌아보았다.
아는 사람이야?
아, 네. 고등학교 동창... 비슷한 거에요.
비슷한 건 또 뭐야. 유장은 미간을 좁히고 눈을 꿈벅였다. 그러나 유기는 그 이상으로 설명할 생각이 없는지 조조를 완전히 무시한 상태로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조조도 다시 젓가락을 들며, 사마의, 식사 계속 하지. 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색한 분위기는 풀리지 않았다. 유비는 둘을 하도 빨리 번갈아 쳐다보아서 무슨 춤을 추고 있는 것 처럼 보였고, 공손찬은 눈으로 둘을 쫓고 있었다. 덩달아 오호 대장군까지 반쯤 얼어붙은 상태로 어색하게 식사를 했다.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은 제갈량의 한 마디였다.
그러고 보니 유비님.
응, 응?
유원지 답사는 언제 가실 예정입니까?
아, 맞다!
유원지 답사?
유장이 말을 꺼내자 공손찬이 입을 열었다.
요즘은 학원도 다 소풍 가니까. 근데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답사는 다녀와야지.
나는 과제가 바빠서 중간고사 넘기기 전까지는 무리지만. 공손찬이 말을 맺었다. 마초가 손을 번쩍 들었다.
마초! 같이 간다!
앗, 미안해 마초. 마초는 다음에 소풍 갈 때 가자.
유비가 진심으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맞은 편의 장비는 제갈량이 코웃음치는 것을 보며 차갑게 식은 눈을 했다. 데이트하자고 큰형님을 꼬셨구만 저자식. 유원지... 유장이 중얼거리자 유기가 물었다.
유장 씨 가고 싶으세요?
...별로.
유비 씨. 저희도 갈게요.
에엑?
유기는 유장의 팔을 잡아다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더블 데이트♥
유장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붉어졌다. 유장이 뭐라고 하려는 순간, 툭, 다른 목소리가 하나 끼어들었다.
나도 간다.
조조? 넌 또 왜?
유비는 어안이 벙벙한 목소리로 조조에게 물었다. 조조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덤덤히 말했다.
학부모의 권리로. 뭣하면 내가 차를 대절하지.
그럼 저는 티켓을 사죠.
유기가 웃으며 말했다. 제갈량은 마지막 남은 파프리카 조각을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이럴 계획이 아니었는데. 그리고는 조조와 유기의 시선이 부딪치는 사이에서 어색해 하고 있는 자신의 주군을 보았다. 그건 꽤 귀여웠으므로, 제갈량은 둘을 말리지 않기로 했다.
+일부러 유장과 한 자리 띄어 앉은 황충은 유기를 기다릴 때에는 밝은 표정이었으나 유기와 조조의 기싸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후에 다른 오호대장군을 취조를 받을 때 꽤나 고생을 했다. 결국에는 노인공경 모르느냐! 하고 빠져나왔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유비는 조조의 차 대절과 유기의 티켓 구매 제안에 동의하지 않았다. 각자 가자! 내가 도시락 싸갈게! 약간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았지만 유비의 고집을 꺾이지 않았다. 조조는 사마의를 대동해 차를 타고 왔고-가자, 사마의./예 조조님-, 유기도 유장을 고급 세단을 끌고 마중 나갔다.-유장 씨 여기에요!/...내가 알아서 간다니까./데이트잖아요./...윽...-유비와 제갈량은 버스를 타고 가겠다며 며칠 전에 신이 나서 유장에게 연락을 보냈다. 그냥 태워 준다는 거 타고 가지. 유장은 약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어디까지나 유비의 자유였으니까.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다니. 유장은 골치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같이 밥을 먹었다고는 하지만, 저 둘은 정말 생판 모르는 사람이었다. 키가 큰 쪽이 상대적으로 작은 쪽에게 항상 붙어다니는 걸 아는 것이 전부였다. 둘은 말이 별로 없는 편이었고, 얻어먹는다고 해서 그 사실이 변하지는 않았다. 가끔 사례를 한다며 과일 같은 것을 들고 오는 정도일 뿐이었다.
유장 씨.
어?
저희끼리라도 갈까요?
유기가 방긋 웃으며 물어왔다. ...별로. 유장은 어물어물 말을 흐렸다. 가고 싶긴 했다. 유원지는 tv 드라마에 나올 때나 가끔 보았지 실제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들어가게 되면 또 있는대로 유기에게 신세를 지게 될 텐데. 게다가 발단이 되어 주었던 유비도 지금은 없었다. 유장은 찝찝하게 생각했다. 그건 저쪽 또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조조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조조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흘끗 사마의를 보더니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왔다.
티켓, 두 장.
...내가 매표소 직원은 아닌데 말이지.
직원이어도 넌 진상이야. 유기는 조조의 손에 티켓 두 장을 내밀며 말했다. 티켓을 받아든 조조는 코웃음을 치며 지갑을 꺼내들었다. 유기는 그런 조조를 본체만체하며 다시 고개를 유장에게로 돌렸다. 조조도 별로 달갑지 않은지 다시 지갑을 주머니에 넣고 등을 돌렸다. 가자 사마의. 예 조조님. 둘은 곧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유장은 유장 씨, 하고 유기가 부르는 소리에 유기를 돌아보았다.
유장 씨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좀 돌아보시는 건 어때요? 저희 답사 겸 온 거잖아요. 그러니까.
너,
유장은 조심스레 말을 고르려다, 이내 실패했다.
저 사람이랑 무슨 관계야?
아...
유기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는 조금 입꼬리를 떨었다.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유장은 길게 숨을 뱉었다.
유장 씨.
어.
들어가면, 말씀 드릴게요.
유기가 미묘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장은 찝찝하게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입장하는 입구부터 분홍색이 가득했다. 분홍색 셔츠를 입고 하트 모양 풍선이 달린 머리띠를 한 직원이 분홍색으로 칠한 하트모양 관람차 안으로 둘을 인도했다. 유기는 예와 다름 없이 방긋 방긋 웃으며 유장에게 손을 내밀었고 유장은 천천히 돌아가는 관람차를 제때 타기 위해 그 손을 잡았다. 탁, 철컹. 즐거운 시간 되세요. 하나 둘 야호! 점원의 외침과 함께 문이 잠겼다. 아주 느린 속도로 천천히 관람차가 돌아갔다. 유장은 맞은편에 앉은 유기를 살펴보았다. 평소와 다름 없이 깔끔하게 차려입은 니트, 그 위의 정장 자켓과 정장 바지. 그러나 평소와 다르게, 유기는 좀 초조해 보였다. 유장은 다시 물었다.
그래서,
......
어떻게 아는 사람이야?
아, 정말.
유기는 마른세수를 하다 손가락 새로 유장을 보았다.
말하기 좀, 창피한데...
불어.
그냥 흔한, 열등감 얘기에요.
유장은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유기를 바라보았다. 유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유장을 바라보았다. 끼익, 관람차 위쪽에서 쇳소리가 났다.
뽀뽀해 주면 얘기하고요.
죽는다 진짜.
알았어요 알았어요.
유기는 한숨을 푹 쉬고 얘기했다.
제가 아버지랑,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잖아요. 고등학교를 그래서 아예, 기숙학교로 보내셨거든요. 물론 시설은 좋았죠. 시설은 최고였는데... 그렇다고 사이가 좋아진 건 아니니까요. 저는 노력하는데... 버려진 기분이 들고 그런 거죠 뭐. 그런데 저랑 비슷한 애가 하나 더 있더라고요. 그게 조태오에요. ...걔는 좀 입장이 달랐지만. 부모님이 걔를 하도 싸고 돌아서 그걸 떨치려고 밖으로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도저히 못 견디겠다고. 자기는 자기 길이 있다면서 밖으로 나온... 그런 케이스더라고요. 열받았죠. 누군 부모님을 못 봐서 안달인데. 누구는. 그래서 제가 좀, 털을 세웠죠...
이야기는 그 커다란 관람차가 꼭대기에 올라갈 때까지 이어졌다. 유장은 한참을 듣고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그대로 내비쳤다. 울상을 한 유기가 외치다시피했다.
말했잖아요, 창피한 얘기라고.
아니, 이정도까지 한심할 줄은 몰랐지.
너무해요...
힝힝. 유기는 장난처럼 우는 소리를 했다. 유장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버지하고 화해 했으니까 된 거 아냐? 왜 여전히 날을 세워?
아, 그건. 관성 같은 거랄까. 유장씨도 이젠 저 좋아하는데 자주 화내시잖아요.
유기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걸 정말 한 대 칠까? 유장은 고민하다가 푹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까딱까딱 검지를 움직였다. 가까이 오라는 듯한 손짓에 유기가 작게 소리내었다.
진짜 때리시게요?
씁. 와 봐.
유기는 천천히 몸을 앞으로 숙였다. 유장은 그런 유기의 턱을 잡고, 쪽, 한 쪽 볼에 입을 맞추었다. 유기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잘 말했으니까, 상이야.
유기는 당장이라도 터질듯이 붉어진 얼굴을 하고 다시 등을 관람차 의자에 기대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밖으로 돌리며 딴 소리를 했다. 바깥 경치 좋네. 유기는 잠시 얼떨떨해 하다가 볼을 쓸며 방긋 웃었다.
유장 씨 저희 한 바퀴 더 돌까요?
시간 아까워...
결국 둘은 한바퀴를 더 돌았다. 관람차에는 줄 서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었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붐비는 유원지로써는 흔치 않은 광경이긴 했다. 유기는 내릴 때 싱글벙글 웃으며 유장의 손을 잡았고 유장은 벌건 얼굴을 한 채 어정어정 유기의 뒤를 따랐다. 고개를 푹 숙이고 가던 유장은 유기의 말에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뭘 타고 싶으세요?
어?
유기는 싱긋 웃었다.
여기 이것저것 탈 거 많거든요. 바이킹, 롤러코스터, 귀신의 집. 그 외에도 여러가지. 뭐 타실래요?
유장은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주변을 휘 둘러 보았다. 넓은 유원지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뭘 타야할까. 유장은 인상을 찌푸렸고 유기는 느긋이 유장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몇 번 와 본 곳일 뿐더러 어차피 자유이용권인데다, 추가금이 있다면 내면 그만이다. 카드를 안 받을리도 없으니. 뭐든지 괜찮았다. 유장이 옆에 있는데 뭐가 문제가 된단 말인가. 문제가 되는 것이 있으면 치우면 그만이었다. 유기는 웃음을 더 짙게 띄웠다.
저거.
...네? 유장 씨 어떤 거요?
유장이 멀리 우뚝 서 있는 구조물을 가리켰다. 거리도 거리지만, 여기까지 보인다는 것은 꽤 크기가 있다는 것이았다. 유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유장이 가리키는 것을 바라보았다.
...저거요?
응.
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이 유원지에서 가장 큰 롤러코스터였다. 유기는 짧게 침음성을 흘렸다.
기실,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같은 공간 안에 있었다. 유원지는 넓디 넓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닫힌 공간이었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 갑자기 마주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지금처럼.
......
......
......
세 명은 나란히 침묵을 지켰다. 유기와 유장은 할 말을 잃었고, 조조도 그다지 다를 것이 없었다. 유장은 시선을 조금 들어 조조의 머리 위를 보았다. 유원지의 마스코트가 커다랗게 그려져있는 머리띠가 머리 위에 씌워져 있었다. 얼굴을 차갑다 못해 삭막하게 굳어있는데 머리띠는 귀엽기 짝이없었다. 유장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다고 느꼈다. 한참의 침묵이 롤러코스터 앞을 쓸고 갔다. 맨 처음 입을 연 것은 조조였다.
...초선이가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 해서.
...초선이가 누군데.
아냐, 알고 싶지 않아. 뭐라고 설명을 하려다 유기의 말에 막힌 조조는 아까보다 더 삭막하게 굳은 무표정으로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머리 위로 글자가 지나가는 것이 보일 듯 했다. Now loading. 조조는 몸을 홱 돌려 다시 앞으로 조금 걸어 나갔다. 그 사이 줄이 줄어들어 있었다. 유원지에서 가장 큰 롤러코스터이다 보니 줄이 꽤 길었다. 앞으로 한 시간은 기다려야겠는데. 유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발을 내딛으려 했다. 한 남자가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러했을 것이었다.
실례. 주군, 아이스크림을 사 왔습니다.
익숙치 않은 목소리가 울렸다. 유장은 그러나 남자의 얼굴이 익숙했다. 항상 조조의 근처에 앉아 식사을 하던 남자였다. 붉은 머리칼이 섞인 앞머리를 위로 올려서 안 그래도 큼직한 키가 더 커보이는 사내였다. 덥지도 않은지 길다란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내의 머리 위에도 조조의 머리 위에 씌여진 것과 같은 머리띠가 씌여져 있었다. 유장은 둘을 번갈아보다 웃음이 나는 것을 참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유기도 별 다를 것이 없는지 고개를 돌렸다.
...너 먹어라.
...? 알겠습니다, 주군.
사마의는 잠시 당황했다가 곧 납득하였는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조용히 퍼먹기 시작했다. 한 숟갈을 먹어보고는 꽤 마음에 든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우물우물 먹었다.
정오가 가까워지니 날이 꽤나 더웠다. 그늘의 가장자리에 서 있자니 햇살이 그대로 내리 쬐었다. 주변은 시끌시끌하긴 했지만 침묵의 한가운데에 서 있자니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유원지를 대절하는 건데. 유기는 그늘 쪽으로 유장을 밀며 약간 후회했다. 유장도 그리 호락호락하게 밀려주지는 않았다. 줄이 반 쯤 줄어들자 앞쪽에 아이스크림을 파는 노점상이 보였다. 이래서 아이스크림을 샀던 건가.
유장씨. 혹시 아이스크림 드실래요?
아니, 난 별로.
덥지 않으신가. 그럼 괜찮으신 걸까. 유기는 덥지 않냐고 입을 떼려다 조용히 자켓을 벗었다. 한 겹 벗자 그래도 꽤 시원한 공기가 흘렀다. 유기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고 줄어든 줄을 따라 앞으로 한 걸음 걸어나갔다. 노점상이 금방 가까워왔다.
아이스크림 하나 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 유장 씨?
좀 전에는 별로라고 하셨는데? 유기는 눈을 깜박였다. 지갑이 자켓 주머니에 들어있어서 쉽게 꺼내기가 어려웠다. 유기가 허둥지둥 지갑을 꺼내는 사이 유장은 아이스크림 가격을 벌써 치르고 앞으로 몇 걸음 더 가 있었다.
유, 유장 씨.
뭐해. 얼른 와.
유기는 노점상과 유장을 번갈아보다 앞으로 달리듯 몇 걸음 나아갔다. 유기가 다시 옆에 서게 되자 유장은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자.
...?
더워 하는 거 같아서. 대단한 건 아니지만.
유기는 눈을 몇 번 깜박이다, 다 녹는다며 재촉하는 유장의 말에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었다. 뽀얀 색깔의 아이스크림이 냉기를 피워올렸다. 유장은 아예 팔짱을 끼고 앞을 보고 있었다. 유기는 방긋 웃으며 스푼을 아이스크림에 꽂았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기다리자니 줄이 금방 줄어들었다.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집어 넣고 이제 짧게 남은 줄을 보았다. 이번에 탈 수 있을지 없을지 애매했다. 머리에 캡 모자를 쓴 직원이 다가와 물었다.
네 분 한 팀이신가요?
네 명? 유기는 얼굴을 드물게 찌푸렸다. 조조의 표정도 그닥 다르지 않았다.
아니다.
아닙니다.
앗, 실례했습니다. 두 분 씩 앉으셔야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조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유기는 괜찮습니다, 하고 말을 맺었다. 그게 끝이었는지 직원은 다시 돌아 롤러코스터로 다가갔다. 유기의 표정이 풀릴 줄을 몰라 유장은 유기를 툭 건드렸다.
야?
아, 유장 씨.
돌아보는데도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제가 이걸 잘 못 타서...
저도 처음 타 보는 거거든요. 자신이 없어서요. 유기가 중얼거렸다. 유장은 픽 웃었다. 항상 자신만만한 놈인 줄 알았는데 의외의 모습이었다. 유장은 유기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앞에서 직원이 입장 시작합니다! 하고 외쳤다.
네 명은 그 순서 그대로 롤러코스터에 안착했다. 안전 바를 내리자 유기의 얼굴은 반쯤 사색이었다. 유장은 안전 바 위에 올려진 유기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유기가 유장을 돌아보았다. 오늘 따라 약한 꼴을 많이 보네. 유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픽 웃었다. 롤러코스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긴 비명이 하늘을 갈랐다.
유장은 거의 토할 것 같은 얼굴을 한 유기의 등을 슬슬 쓸어주었다. 이걸 봐도 귀엽기만 하니 환장할 노릇이지. 콩깍지는 대단했다. 그래서 유장은 웃음을 좀 참기 위해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좀 괜찮냐?
그럭저럭이요...
유기는 심호흡을 좀 하고 나서 약간 파리해진 얼굴로 똑바로 설 수 있었다. 유기는 유장이 등에서 손을 떼자 약간 아쉬워하며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점심시간까지는 약간 시간이 남아있었다. 배고프다고 하기엔 좀 이른 시간이었고, 이 쪽에는 여러가지 놀이기구가 밀집해 있기도 했다. 조조와 사마의는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비틀거리는 유기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빠르게 걸어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 말은 이제 다시 유기와 유장만이 남아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유장 씨와의 즐거운 시간을 꿈꾸며 유기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방긋 웃었다.
유장 씨, 이번엔 뭐 타고 싶으세요?
이번엔 네가 고르지.
전 괜찮아요. 유장 씨가 고르세요.
한 번 더 탈까?
유기의 얼굴에서 빠르게 핏기가 사라지자 유장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렇다고 박장대소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유기가 본 것 중에서는 드물게 큰 웃음이었다.
농담이야 임마. 너 더운 거 같으니까, 저기 물 있는 거 타러가자.
유장 씨 절 닮아가시면 안 돼요...
무슨 소리야?
유장은 뚱하게 말하며 유기보다 앞서 걷기 시작했다. 유기는 그런 유장을 따라잡기 위해 조금 빨리 걸어야 했다. 본격적으로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한 유원지는 슬슬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늘어나서 어깨를 부딪히는 일도 왕왕 생기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유장마저도 사람이 정말 많다고 중얼거릴 판이었으니까. 그리고.
혹시 뒤에 두 분 계시나요!
여기요! 유장 씨, 가요.
앞에 단체 팀이 있는 덕에 유기와 유장은 몇 명을 앞질러서 타게 되었다. 그리고 유장은 보았다. 유기의 얼굴이 또 와그작 일그러지는 것을. 조조라는 남자의 표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넷은, 정말 어디를 가든 마주쳤다. 약속을 잡고 만날래도 이렇게 만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장이 찍는 놀이기구마다 조조와 사마의는 줄을 서 있었고 피하는 셈으로 다른 놀이기구를 향해 가면 나오는 중에 마주쳤다. 유기는 진정하기 위해 일단 식사부터 할 것을 제안했고 배가 고팠던 유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맛이 대단히 좋은 것은 아니지만, 어디를 가든 그럭저럭 평타는 치는 것이 체인 레스토랑이다. 그 중에서 패스트푸드라면 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냥 그런 유원지의 음식도 나쁘지 않았지만, 유장은 굳이 햄버거 가게를 골랐다. 가까이 있었기 때문도 있지만, 어느 정도는 익숙함 때문이었다. 유기도 가뿐히 동의했다. 로고가 커다랗게 박힌 문을 지나서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는 안으로 들어가 유장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패스트푸드점인데도 불구하고 통 자리가 나지 않았다. 다른 데로 가야 하나. 그러나 여기가 이 모양이라면 다른 데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좀 기다릴래? 얘기를 하는데 네 명이 앉을만한 자리가 비었다. 유기는 빠르게 자리를 잡기 위해 그 쪽을 향했다.
그리고 사마의가 빨랐다. 익숙한 얼굴이 먼저 선수를 치자 유기는 아득 이를 갈았다. 적대감이 넘치는 눈으로 자리에 앉은 사마의를 노려보자 사마의도 눈을 가늘게 뜨고 유기를 노려보았다. 유장은 그런 유기를 약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조조가 뚜벅뚜벅 걸어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군.
너한테 물은 게 아니다 사마의. 뭐냐, 유기.
...조태오.
조조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그 이름은 버린지 오래다. 나는, 조조다.
그러시겠지 조태오.
유치하게 시비를 거는 것을 보다 유장은 한숨을 푹 흘렸다. 기싸움이라는 것도 중요하긴 하다. 세상은 정글이니까. 거기서 패배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소소한 곳에서 일일히 싸움을 하는 것은 체력 낭비였다. 유장은 유기를 끌어내었다.
딴 데 가자.
예? 하지만 유장 씨,
꼭 이게 먹고 싶었던 것도 아니잖아. 그냥 딴 데 가.
자리도 없고. 유장이 그렇게 말을 맺었다. 유기는 약간 찝찝한 얼굴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문자가 오는 소리가 들린 건 그 때였다. 아주 상큼하고 귀여운 목소리로 문자 와떠여! 하고 외치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꽤 커서 유장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조조가 핸드폰을 꺼내 들고 있었다. 그리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화면을 들여다 보았다.
유장 씨, 뭐하세요?
어, 아냐. 그냥...
잠깐.
조조의 목소리가 둘의 발을 붙잡았다.
...자리도 남는데, 합석하지.
응?
주군?
사마의도 당황했는지 조조를 돌아보며 말꼬리를 올렸다. 조조는 매우 치욕스럽다는 표정으로 작은 목소리로 말을 흘렸다.
...초선이가 다른 친구들의 사진도 보여 달라고 했다.
유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그 초선이라는 사람이 누구길래 아까부터 계속 언급이 되는지? 유기도 모르기는 피차일반이라 둘은 잠시 어색하게 길에 못박여 있었다.
그리고 잠깐의 실랑이가 있은 후-우리가 왜? 다른 거 먹으러 가지 뭘./...내가 점심을 사지./주군...!/그 정도 푼돈으로?/(험악한 표정)-넷은 결국, 합석을 하기에 이르렀다.(사진도 찍어주었다. 유장은 조조의 표정이 그 정도로 풀어질 수 있다는 데에 놀랐다.)
식사는 금방 끝났다. 유장은 탄산음료 컵에서 빨대와 뚜껑을 빼곤 얼음을 우둑우둑 씹었다. 사마의는 잠시 화장실에 가겠다며 자리를 비웠고, 유기도 탄산음료를 손을 닦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장과 조조는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자리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이미 떨어진 탄산음료 빨대를 입에 물고 있을 따름이었다. 핸드폰이라도 보려 했지만 유장의 폰에는 시간을 때울만한 거리는 들어있지 않았다. 시간을 확인하고 만보기를 몇 번 흔들다가 유장은 결국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상대방도 핸드폰으로 간단히 타자를 치고는 곧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와글와글 시끄러운 와중에 정적이 사무쳤다. 유장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얼음을 씹다 문득 입을 열었다.
몸이 좋아 뵈는데 무슨 운동하나?
...그건 왜 묻지?
직업이 체육이라.
권투에는 흥미를 잃었지만 그래도 운동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포기 되는 것도 아니고, 몸에 밴 것을 떨칠 수도 없었다. 유기는 다시 운동을 시작했고, 직업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조조는 물어본 유장을 어이없어하는 것 같았지만, 간단히 대답했다.
전직이 경찰이었다.
그럴 상이 아니어 보이는데.
......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알 것 없다.
꼬박꼬박 대꾸하는 게 반말이라 아니꼬왔다. 유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얼음을 하나 더 입에 넣었다. 까드득.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마치 이가는 소리 같았다. 다음 말을 꺼낸 것은 조조였다.
나야말로 묻지. 저 녀석과 무슨 관계지?
유장은 얼음을 뱉을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꾸역꾸역 얼음을 목구멍으로 넘기곤 유장은 입을 열었다.
뭐?
유기와 무슨 관계냐고 물었다.
전직 경찰이라는 게 헛말은 아닌지 조조의 눈은 날카롭다 못해 살벌했다. 유장은 어처구니를 잃고 대답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평일에 일부러 시간을 내서 유원지까지 놀러왔다면 평범한 사이는 아닐테고, 애인인가?
뭐... 뭐...
유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유장은 컵에 남은 얼음을 죄다 입안으로 쏟아넣었다. 조조는 팔짱을 끼고는 등을 뒤로 기댔다.
끈질긴것한테 걸렸군. 도움이 필요하다면, 줄 수 있는데.
필요 없으니 꺼지시지.
오기인가? 무능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유장은 깊은 숨을 코로 내쉬었다.
도움이 필요 없는 사이라고 말하는 건데.
대체 유기는 이 인간한테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평을 받은 건지. 유장은 약간 툴툴거리며 선언했다. 남이 참견할 만한 관계가 아니라고. 자신은 스스로 생각해서, 걸려 들었다고. 그렇게 못을 박았다. 유장은 조조와 같이 앞으로 쏠렸던 몸을 등받이에 기대었다. 조조가 고개를 기울였다.
나야 말로 묻겠는데. 댁은 같이 온 사람이랑 무슨 사이지?
......
댁 말대로 연인인가?
......
조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걸 제외하면 표정이 도무지 무표정에서 변하지 않아서 읽을 수가 없었다.
이것 저것 열심히 타고 다니는 것 같기는 한데 예정에도 없던 학부모 답사라니, 댁이 낄 이유는 없었던 거 아닌가? 대체 왜 이렇게 끼어서 오겠다고 한 거지?
...사마의가.
이어지던 질문이 뚝 잘렸다. 말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응답에 유장은 조금 멍해졌다. 조조는 눈을 가늘게 내리깔고 뇌까리듯 말했다.
...사마의가, 오고 싶어하는것 같아서.
유장은 입을 다물고 유기를 생각했다. 유장 씨가 좋아할 거 같아서요. 그런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쾅. 등에 충격이 전해져 왔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화장실에 있던 사람들이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유기는 이를 갈며 자신의 멱살을 잡은 사마의에게 주먹을 날렸다. 사마의가 멱살을 잡은 손이 조금 풀려서 유기는 발을 들어 사마의의 배를 발로 찼다. 샌님으로 보았다면 오산이었다. 글쎄, 책상 물림이기는 하지만 운동을 하지 않았냐면 그것은 또한 아니었으니까. 이쪽도 호신술을 배우면서 큰 몸이었다. 형주 폭죽은, 어렸을 때는 작은 사업이었지만 이제는 세계를 호령하니까. 유장 앞에서 약한 척을 한다고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유기는 아까 얻어맞은 입가를 손으로 닦았다. 피가 배어나와서 짜증이 났다. 눈을 홉뜨고 고개를 들자 사마의가 벽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어서 유기는 이를 악물었다.
너 뭐야.
잇새로 말을 뱉어냈지만 사마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외려 식식 소리를 내며 숨을 골라 다시 덤벼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망간 사람들이 경비를 부르려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유기는 방어할 만한 자세를 잡으며 자세를 낮추었다. 얻어맞은 곳들이 얼얼했다. 사마의가 입을 연 것은 그 때였다.
너.
유기는 약간 당황하여 고개를 들었다.
거슬려.
유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거슬린다는 하나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공격한단 말인가?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유기는 허, 헛웃음을 토했다. 사마의가 등을 벽에 기대었다. 아까 배를 걷어차인 것이 큰 타격이었는지 배를 슬슬 문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표정은 여전히 공격적이어서 유기는 긴장의 끝을 놓지 않았다.
주군... 조조님이 너를, 불편하게 여긴다.
그야 그렇겠지. 나도 그런데.
......
설마,
......
그것 때문에 공격했다?
사마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날카롭게 유기를 노려보았다. 유기는 이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얌전해 보인다 싶었는데 제 주인 앞에서만 고양이 새끼인 척 하는 호랑이였다. 유기는 도끼눈을 누그리며 길게 숨을 뽑았다.
적당히 하지 그래.
......
좀 이따 나가서 태오한테 뭐라고 할 생각이야? 갑자기 싸움이 붙었다?
...널 제거하면.
유기는 이제 아예 헛웃음을 흘리며 허리를 폈다. 그리고 넥타이를 조금 풀었다. 아, 유장 씨 보고 싶다. 손 닦으러 왔다가 이게 무슨 봉변인지.
작작하지.
......
너나 나나 시간이 모자라지 않아? 데이트하기에도.
데이, 트?
유기는 픽 웃었다. 사마의의 눈이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태오랑 데이트 온 거, 아냐?
...주군은, 그런.
사마의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유기는 세면대로 가서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머리가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입가가 터져 있었다. 넘어졌다고 둘러대면 넘어가려나? 유장의 표정이 상상이 가서 유기는 조금 두근 거렸다. 분명, 귀여울테니까. 유기는 마지막으로 손을 씻고 화장실을 나섰다. 시간이 길었다.
롤러코스터를 세 개, 바이킹 한 번, 기타 놀이기구 두어 쯤 타고 나니 해가 천천히 저물려 했다. 유기는 지쳐서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하지만 원한다면 야간 개장까지도 놀 수 있었다. 유기는 방긋 웃었다.
뭐 더 타고 싶은 거 있으세요, 유장 씨?
...난 이제 됐어...
유장도 사정은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슬슬 갈까. 꽤 지친 듯한 유장을 보다 유기는 한 가지 재미있을 법한 놀이기구를 발견했다.
그럼 하나만 더 타고 갈까요?
너나 타지 그러냐.
에이, 그러지 마시고. 쉬엄쉬엄 타는 거에요.
유장은 고개를 들어서 유기가 가리키는 놀이기구를 보았다. 그리고 미간을 좁혔다. 유기의 손끝에는 회전 목마가 있었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타는 사람도 많고 해질녘이라 줄 서 있는 사람도 적은 회전목마에 탈 시기는 금방 돌아왔다. 유장은 한숨을 푹 쉬며 줄을 따라 회전목마 위에 올라 탔다. 나름 안전 벨트를 끼워야 하는 놀이기구여서 유장은 낑낑 대며 안전벨트를 끼웠다. 귀찮기도 하지. 얼른 끝나기를 바라며 유장은 목마의 봉에 이마를 기댔다. 이제 출발 합니다~ 발랄한 직원의 목소리에 유장은 봉을 잡고 고개를 들었다.
유장 씨!
유기의 목소리가 들려 온 것은 그 때였다. 회전 목마의 바깥쪽, 저 멀리 난간 너머에서 유기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심지어 핸드폰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진도 찍고 있는 모양이었다. 유장은 차마 욕도 하지 못하고-주변에 어린 아이들이 잔뜩 있었다-뒤를 돌아보며 주먹을 꽉 쥘 수 밖에 없었다. 내리기만 해 봐. 죽었어. 그러나 빙글빙글 돌며 위 아래로 움직이는 회전 목마는 의외로 꽤나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유장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진을 찍던 유기는 문득 익숙한 남자를 회전목마에서 발견했다. 길쭉한 다리와 세운 머리카락이 눈에 익었다. 아까 치고박고 싸웠던 남자가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유기는 침음을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조조가 근처에 서 있었다. 이쯤 되면 악연인데. 유기는 다시 고개를 돌려 유장을 주시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먼저 입을 연 것은 조조였다.
네 애인.
유장 씨가 왜.
유기는 귀를 기울이지 않기를 실패했다는 걸 통렬하게 절감했다. 조조는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리고 말을 이었다.
좋은 사람이더군. 너랑 안 어울리게.
유기는 얼굴을 조금 기울였다. 포커 페이스라면 고등학교를 다니며 죽어라 연습했다. 유기의 집안과 조조의 집안은 학교에서도 나란히 손꼽혔고, 그래서 따라오는 것들도 많았으니까. 유기는 조조에게 전혀 다른 이유에서 열등감을 느꼈지만- 그건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유기는 웃었다.
유장 씨 칭찬 고마워.
......?
보답으로 충고 하나 해 주지. 네 애인 조심해.
유기는 활짝 웃으며 그렇게 답했다. 그리고는 다시 이 쪽으로 돌아온 유장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성난 햄스터 같은 모습이 귀여워 유기는 웃음을 터트렸다. 조조가 이 쪽을 보며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걸 유기는 철저히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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