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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 올렸던 글을 그대로 백업합니다. 퇴고 X
*미량의 제윱
초선이는 많이 지쳐 있었다. 드림배틀 동안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니, 이것은 전부 변명이다.
사마의가 돌아왔다. 신선의 힘은 남아있지 않았고, 인간의 몸에 기억이 함께하는 정신이 깃들어 어둡던 눈의 열망은 전부 다 빼앗긴 채 사마의는 조조에게 반송되었다. 발 아래 머리를 조아리고 전보다 허망하듯 자신을 의지하는 모습에 조조는 더없는 혼란으로 사마의를 맞았다. 항시 옆에 서 있는 대신 사마의는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속죄라기 보다는 더이상 자신의 화를 돋우지 않기 위한 방법에 가까웠다. 그래서 조조는 스스로 말한 나서지 말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입을 열라며 타박하려는 자신을 감내해야 했다. 자신에게만 맞추는 것이 아닌, 진짜 사마의란 무엇인지, 자신을 그저 도구로만 보았던 것인지 몇 번이나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는 안타깝게도 돌아올 회차가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조조의 화를 돋구는 것은 그것 말고도 많았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초선이의 친척들이 그러했다.
초선이의 친척들은 몇 번이나 조조에게 연락을 취했다. 아니, 조조에게 연락한 치들은 그나마 점잖은 편이었다. 다짜고짜 유치원에 찾아들어 이 아이는 내가 데려간다는 행패를 부린 이도 있었고 납치 비슷한 것을 실행했다가 덜미를 잡힌 이도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비슷했다. 순직한 이의 연금이라는 알량한 부와 최고의 경찰집안이라는 거대한 명예. 그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은 전부 초선이에게 매여있었다. 그것은 조조에겐 마치 초선이를 짓누르는 칼처럼 보였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대신 짊어지고픈 무거운
족쇄. 그러나 법은 냉정했다. 미혼에 친척도 아닌 자가 짐을 덜어준다는 말을 법은 단칼에 잘라내었다. 초선이는 조조 아저씨가 제일 좋은데. 달라진 어미 다음에 걸린 것은 초선이의 울음이 분명했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뭔가. 뭔가의.
사마의.
......
너는 법적으로도 인간이 되었나?
예?
초선이가 그나마 너를 따르는 듯 하더군.
.......
하지, 결혼.
...원하신다면.
냉막한, 혼을 결정했다기엔 무정한 침묵이 둘 사이에 비단처럼 깔려있었다.
청첩장을 받은 유비는 식사하던 중에 입에 들어있던 음식을 흘리며 젓가락을 떨어트렸다. 손책은 먹던 만두를 뿜어냈고 제갈량은 커피에 사레가 걸렸다. 전후사정을 잘 모르는 공손찬만이 더럽다며 타박을 했지만 듣는 사람은 없었다.
사마의 버그 다시 걸린 거 아냐?
프로그램에 오류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조가? 결혼? 너랑???
주군께서 초선 아가씨를 위해 결정하신 일입니다.
아. 모두가 단번에 수긍했다. 초선이를 위해서라면 그럴 법도 했다. 남에게 손 벌리기를 곧 죽어도 싫어할듯 싶은 것이 조조였다. 자신에게 큰 빚을 진 자가 가까이 있는데 누구에게 가겠는가. 청첩장을 준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었다. 유비는 청첩장을 열었다. 일시가 적혀있지 않았다. 장소도 없었다.
? 청첩장이라며.
의례입니다. 증인이 필요하다 하셔서.
그냥 결혼 통보로군.
유비의 물음에 대한 대답에 제갈량이 중얼렸다. 그런 거야? 대단해 제갈량! 주군의 말에도 이렇다할 대답 없이 제갈량은 사마의를 노려보았다. 사마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마의, 무슨 속셈이지?
아무 것도.
......
아무것도 없다.
청첩장을 전해드렸으니 저는 가보겠습니다. 유비와 손책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사마의는 도원관을 나섰다. 순식간에 도원관이 왁자지껄한 시장바닥이 되었다. 조조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왜 하필이면 사마의를.. 제갈량은, 아무 말도 않고 커피를 들이켰다. 아무 것도라니, 그런 거짓말을 잘도. 제갈량은 조금 웃고 있었다.
-
절차는 순조로웠다. 걸릴 것이 없었다. 아들이 결혼을 한다는 것에 펄쩍 뛰는 부모는 없었다. 역으로 결혼을 한다는 것이 다행인 양 싶었다. 부모님께 사마의를 인사 드리고 나자 그것으로 모든 절차가 끝났다. 초선이의 입양은 산더미 같은 서류를 정리하고 끝날 것이었다. 결혼 신고서를 포함한 모든 서류가 수리 된 날, 조조와 사마의는 유치원으로 초선이를 데리러 갔다. 조조 아저씨! 사마이 아저씨! 초선이는 둘에게 달려들었다. 조조는 평소에 그러하듯 어렵지 않게 초선이를 들어 안았다. 오늘 잘 지냈어? 응! 오늘 점심시간에 함박 스테이크 나왔어. 그리구 모래 놀이두 하구... 아저씨는? 아저씨는, 초선이랑 놀려구 선물 가져왔지! 우와 정말? 정말. 사마의는 그 둘의 뒤를 착실히 따르다, 문득 고개를 돌렸다.
주군.
...초선아 잠시만.
초선이를 추슬러 안고 조조는 사마의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마의는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슨 일이냐.
잠시, 일이 있어서. 다녀와도 괜찮을런지요.
조조는 눈을 내리깔아 사마의를 노려보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원치 않으신다면, 동행하겠습니다.
동행해. 초선이가 예 있다.
...예 주군.
사마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조조의 한 걸음 뒤에 붙었다. 조조는 초선이를 들여다 보았다.
아저씨 주군이 뭐야?
으응, 사마의 아저씨가 아저씨를 부르는 거야.
왜 그렇게 불러?
말문이 턱 막혔다. 대답을 올린 것은 사마의였다.
제가 주군을 존경하여 그러합니다.
존경?
네 아가씨.
존경이 뭐야? 그것은-
조조!
한 남성이 빽 소리를 질렀다. 사마의는 금방 초선이에게서 눈을 뗐다. 배가 불룩 튀어나온 중년의 사내는 씨근덕거리며 조조에게 접근했다. 조조가 안아들고 있는 초선이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새였다.
너, 이, 어디서 온지도 모르는 자식이...!
경찰 공무원이라고 지난번에도 말했을텐데.
너따위가 초선이와 칠보검을 가져 가게 내버려 둘 성 싶으냐!
혼잣몸으로 사는 책임감도 없는 놈이, 이...!
말이 지나치군.
사마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조조는 문득 사마의의 키가 보통보다 꽤 큰 편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사마의가 앞으로 나서자 중년 사내는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조조는 초선이가 떨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초선이의 등을 천천히 도닥여주었다.
뭐야! 넌 뭔데 나서!
......
사마의는 무어라 입을 열려다 살짝 입술을 짓씹고 조조를 돌아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맹견처럼 보였다. 조조는 눈을 천천히 깜박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마의가 다시 중년 사내를 마주했다.
넌 뭐냐고!
조조 니..의, 남편 되는 몸이다.
중년 사내가 황망하게 둘을 번갈아 보았다. 조조는 초선이의 등을 천천히 문지르며 남자를 노려 보았다.
내 딸에게 무슨 용건이라도 있나.
뭐, 이...!
물러나라. 너 따위가 범접할 수 있는 몸이 아니시다.
사마의가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남자는 조조가 경찰이라는 것을 다시 떠올렸는지 주먹 쥔 손을 풀었다. 두고 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남자는 사라졌다. 조조는 어깨의 긴장을 살짝 풀었다. 초선이가 고개를 들었다.
나쁜 아저씨 이제 갔어, 초선아.
...나 이제 아저씨 딸이야?
조조는 잠시 멈칫, 등을 문지르던 손을 멈추었다.
나 이제 아빠 딸 아냐...?
아냐 아냐, 그런 거 아냐.
조조는 초선이를 위로하기 위해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그냥... 아저씨들이랑 사는 거야, 이제부터는.
정말...?
그러엄. 아저씨가 언제 거짓말 했어?
조조는 눈으로 사마의를 불렀다. 다시 조조의 근처로 돌아온 사마의는 아가씨, 하고 초선이의 주의를 돌렸다.
조조님과, 저와 같이 사시는 겁니다. 저런 아저씨들도 앞으로는 안 올 겁니다.
그럼 나는 조조 아저씨 딸 하는거야?
네, 그... 아버님, 딸이시기도 하고, 조조님의 딸이시기도 한 겁니다.
어려워... 머리 아파.
초선이가 작게 투정하자 조조는 다시 초선이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있잖아 조조 아저씨.
응, 초선아.
사마이 아저씨도 아빠야?
......음.
난감한 시선이 허공을 맴돌았다. 조조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아가씨.
하지만 조조 아저씨 남편이라며.
조조 아저씨가 아빠면 사마이 아저씨도 아빠잖아.
.......
갑갑한 침묵이 유치원 근처를 휘감았다. 이 관계를 뭐라 설명해야 좋을까. 무어라고. 조조는 초선이를 내려 서게 했다.
있잖아 초선아.
응.
아까 왔다 간 아저씨가 좋아 싫어?
싫어.
조조 아저씨는?
난 아저씨가 제일 좋아.
아저씨도 초선이가 제일 좋아. 그래서 저 아저씨가 초선이를 데려 가는 게 싫었어. 같이 있기로 하자고 지난 번에 말했잖아?
응.
그런데 같이 있으려면 아저씨 딸이 되어야 한다고 했고?
응...
그래서 사마의... 아저씨...가, 도와 주기로 한 거야.
.......
아빠라고 안 부르고 계속 아저씨라고 불러도 돼. 사마의 아저씨도, 조조 아저씨도.
어려워...
조조는 다시 초선이를 끌어안았다. 등을 두드려주며 조조는 사마의를 올려다보았다. 사마의는 침착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어쩐지 비어 보였다.
하루가 많이 피곤했는지 초선이는 저녁을 먹자마자 잠이 들었다. 예쁜 파스텔 톤으로 바른 벽지도, 초선이가 제일 좋아하는 브랜드의 인형도 초선이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조조는 곧 시큐리티 룸으로 내려갔다. 이전에 사마염이 어지럽혀 놓은 것은 거의 정리가 되어 있었다. 앞으로는 초선이를 돌보아야 하니 지켜보는 대부분을 누군가에게 맡겨야 했다. 혹은 초선이를 누군가에게 맡기거나. 둘 중 어느 쪽도 아직 결정된 바가 없었다.
시큐리티 룸에는 사마의가 조용히 서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는지 사마의가 조조를 돌아보았다. 주군. 사마의가 무릎을 꿇어 앉았다. 조조는 사마의를 스쳐 지나가 컴퓨터 앞에 자리했다. 사마의는 익숙한 듯 다시 일어나 조조의 뒤에 섰다.
주군.
그러나 이렇게 부르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조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이 있어, 잠시 나가볼까 합니다.
어디에 가는데.
..도원관에, 잠시.
도원관이라, 그렇다면 나름 믿을 만 했다. 인간의 몸을 처음 가지게 되었으니 이런 저런 '잔고장'을 조금씩 느끼는 모양이었다. 조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마의는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조조는 시큐리티 룸으로 올라온 정보에 집중했다. 요즘 들어 신고되지 않는 폭행사건이 조금 늘어 있었다. 조조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
밤의 시간 치고도 거리는 지독하게 조용했다. 폭행 사건이 주로 벌어지던, 다시 말해 어린 학생이나 갱단이 판치던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난히도 정적이 흘렀다. 이상했다. 조조는 챙겨놓은 수갑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고는 조금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몇 걸음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둔탁한 파열음이 났다. 조조는 재빨리 벽 뒤로 몸을 숨기고 시선을 구석 너머로 돌렸다. 끄으으, 신음이라고 부르기에도 작은 소리가 새어나오다 그쳤다. 누군가가 신음을 흘리는 남자의 배를 걷어 찼다. 작정을 하고 나온 것인지 손에는 장갑을 끼고 있었고 후드로 머리를 가려 얼굴을 확인 할 수 없었다. 키는 190에 가깝군. 조조는 새기듯 생각했다. 서 있던 사람이 쪼그려 앉아 신음을 흘리는 남자의 머리를 쥐어 들었다.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자 맞고 있던 남자가 미친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조는 재빠르게 튀어 나갔다.
거기 누구냐!
쪼그려 앉아있던 사람이 조조의 반대편으로 돌아보지조차 않고 재빠르게 튀어 나갔다. 골목이 복잡하기 짝이 없어 조조는 한 골목도 채 가지 못하고 현행범을 놓칠 수 밖에 없었다. 조조는 무전으로 구급차를 부르고 피해자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우뚝 멈추어섰다. 한껏 얻어맞은 남자는 오늘 유치원에 찾아왔던 초선이의 친척이었다.
전치 5주 판정을 받은 남자는 그냥 싸웠던 거다, 술이 들어가다 보니 다툼이 좀 거칠어졌다 따위의 말만 반복했다. 입은 열고 있었지만 묵비권과 다를 것이 없었다. 조조는 도원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유비가 네, 도원관입니다 하고 경쾌하게 대답하는 소리가 났다.
유비.
어, 조조? 웬일이야?
그 쪽에 사마의가 있나.
어 있어. 지금 커피 마시면서 제갈량이랑 주유랑 얘기 중이야.
...언제 도착했지?
글쎄, 좀 됐는데.
알았다.
말을 마치고 조조는 전화를 끊었다. 조조는 굳게 닫힌 병실 문을 노려보다 걸음을 옮겼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조조는 시큐리티 룸으로 향했다. 사마의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뻑뻑한 눈을 깜박이며 컴퓨터를 들여다 보고 있자니 생각이 줄줄 흘러내렸다. 설마, 만약에, 그렇다면. 수많은 생각이 와닿는 곳은 한 갈래였다.
다시 배신당한다면, 어떻게 하지?
등 뒤에서 소름이 일어나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조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방 안을 돌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주군.
......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사마의가 문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바깥에 서서 말했다. 조조는 사마의를 바라보았다. 코트 단은 놀라울 정도로 멀끔했다.
사마의.
예 주군.
앞으로 너는 무조건 나와 동행한다.
....예. 주군.
사마의는 고개 숙여 명을 받들었다.
사마의의 생활은 단출했다. 새벽에 일어나 씻고 조조를 위해 아침상을 본다. 음식을 데우는 수준이긴 하지만 태우지는 않는다. 그리고 같은 시각에 일어나 씻고 나온 조조와 함께 아침을 먹고 초선이를 등원시킨다. 조조가 일을 하는 동안은 시큐리티 룸을 대신 지킨다. 그리고 초선이를 하원시켜 도원관에 보낸다. 때로는 거기에서 다 같이 저녁을 먹고 오게 될 때도 있다. 도원관에 가지 않는 날에는 집으로 가거나 외출을 할 때도 있다. 있었다. 집안일은 따로 사람을 쓰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한량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초선이는 저녁에 조조가 돌아올 때까지 사마의와 같이 보내는 것이 마음에 든 듯 했다. 꽤나 자주 머리 위에 리본이 달린 채로 조조를 맞았고 블록과 인형들 사이에 갇혀 어쩔 줄 모르는 상태로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조조는 마음이 조금씩 해이해지는 것을 자각했다. 초선이가 저리도 좋아하는데, 조용히 지내고 있는데. 믿음은 곧 배신으로 이어진다. 조조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종종 주먹을 쥐어야 했다.
저녁에 도원관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아침식사를 하다 말고 문득 사마의가 입을 열었다. 초선이는 도원관을 쉬는 날이었다. 조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마의를 쳐다보았다. 사마의는 조금 굳은 표정으로 약간은 간곡한 듯 조조를 보고 있었다.
...나도 같이 간다.
알겠습니다 주군.
조조는 사마의에게는 보이지 않을 왼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긴장이 등을 타고 기어 올랐다.
도원관까지 가는 길은 서먹했다. 초선이를 데리고 가지 않는 길은 거의 초행이라 말해도 될 수준이었다. 조조는 줄곧 사마의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사마의는 긴장한 것처럼 등을 바로 세우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걷고 있었다. 시선이 곧고 발랐다. 다른 길로 빠지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시선이었다. 그 시선의 바름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제하면.
사마의! 어서 와! 조조도 왔네!
...실례하지.
죄송합니다 유비님.
아냐 아냐 죄송하긴 뭘.
유비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뒤에서 제갈량이 노려보는 눈은 철천지 원수를 보는 눈이었다. 문을 두드리기 전에 대강 어떤 분위기였는지가 자명했다. 시선의 따가움을 무시하며 조조는 유비가 안내하는 대로 소파에 앉았다. 사마의는 제갈량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몸이 이상하면 병원에 가라니까. 그런 종류의 이 상이 아닌 건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대화가 길어지려는 듯 하여 조조는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순간 어찔한 기운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잠든 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점멸했다.
조조가 많이 피곤했던 모양인데.
그렇다고 여기에서 잠이 들다니. 민폐가 따로 없군요.
죄송합니다 유비님.
아냐 괜찮아.
소리들이 귓가를 어른거렸다. 따뜻한 온기가 붙어서 조조는 조금 자세를 고쳤다. 어른거리던 소리가 잠시 멈추었다.
근데 조조도 잠을 자긴 자는구나.
인간이니까요.
자기는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
아직도 인간 몸에 적응치 못한 너보다는 낫지.
......
사, 사마의 커피 마실래?
아뇨 괜찮습니다. 주군을 모시고 돌아가겠습니다.
여전히 주군이라 부르는군. 나는 이제 이름이라도 부를 줄 알았는데.
...가능할리가.
왜, 부부지 않나.
......
어이쿠 이런 실례. 위장 부부라 하였지.
......
조조는 몸을 조금 틀었다. 안온한 온기가 등을 조금 두드리는 게 느껴졌다. 주군, 유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멀어졌다. 온기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주군.
......
조조님.
.......
목소리가 머뭇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조조는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 밑에 약간 단단한 것이 베어져 있었다. 눈 앞에 사마의의 얼굴이 비쳤다. 베고 누운 것이 사마의의 허벅지인성 싶었다. 조조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몸에서 담요가 툭 떨어졌다.
일어나셨습니까.
사마의가 담담히 인사하였다. 그 눈이 어째서인지 멀겋게 보여서 조조는 복잡한 기분에 가득 찼다. 열망을 잃은 눈이라기에는 유난히도 가라앉아 있었다. -배신당한다. 저 눈동자로는 영영, 또, 다시금.
사마의.
예, 주군.
사마의가 또렷하게 대답했다. 조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떻게 하면 그 배신을 잡아낼 수 있을까. 내가 믿는다는 것을 보이면 빠르게 배신하지 않을까. 몽롱한 머리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조조는 입을 열었다.
주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제 되었다.
사마의가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무어라 해야할지 모르는 듯 눈동자가 잘게 떨리며 방 안을 헤매었다.
이름을 불러도, 좋다.
......
제갈량이 유비에게 그러하듯이.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지 사마의는 혼란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조조는 그런 사마의를 힐끔 보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가자.
예, 주... 조조님.
어색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조조는 가슴이 갑갑하다고 생각했다.
-
조조님. 목소리가 발 뒤꿈치를 따라붙었다. 오목하게 모인 발 안쪽을 따라 다리를 기어올라와 등허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조조는 눈을 떴다. 창 밖에 천둥이 내리고 있었다. 밖에서 나름 간절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조조님. 조조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비틀비틀 문 앞으로 다가갔다. 달칵 문이 열렸다. 초선이가 사마의에게 안긴채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아저, 아저씨이이.
초선아, 초선아 괜찮니?
조조는 아연실색해 초선이를 안아 들었다. 사마의는 새하얀 얼굴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사마의.
그것이,
쾅, 하고 천둥이 한 번 더 내리 찍었다. 초선이가 강하게 울음을 터트렸다. 아, 그런 것이었나. 조조는 초선이의 등을 도닥이며 작은 목소리로 달랬다.
쉬이 괜찮아, 괜찮아. 별 거 아냐. 밖에서 비가 많이 와서 그래 초선아. 괜찮아.
아저씨이이...
그래 그래.
나 아저씨,랑 잘래...
초선이가 딸꾹질을 해 가며 칭얼거렸다. 조조는 당연하다는 듯이 등을 두드려주며 사마의에게 눈짓했다. 사마의는 알아 들은 듯이 문을 닫으려 했다.
그래, 아저씨랑 코-하자.
사마이 아저씨두...
응?
초선이에게 시선을 주던 조조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역시 당황한 표정의 사마의와 눈이 마주쳤다.
사마이 아저씨두우... 같이 자...
초선이가 다시금 졸랐다. 조조는 입술을 깨물다 고갯짓을 했다. 사마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저는 괜찮습니다.
아저, 씨는, 안 무서워?
네. 저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조조님의 방이니 저는 제 방에서 자도록 하겠습니다.
싫어어 같이 자아.
초선이가 울음을 다시 터트리려고 했다. 타이밍도 좋게 천둥이 한 번 더 내렸다. 초선이가 이제는 아예 딸꾹질을 하며 울기 시작했다. 아이가 밤에 오래 울면 열이 오른다고 하였는데. 그럴 나이는 지났건만 조조는 초선이를 달래며 사마의를 보았다. 사마의는 당황한 표정으로 어찌 할 바를 모르는 듯이 어색했다. 조조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의는 쭈뼛쭈뼛 가까이 올 줄을 몰랐다. 누워라, 사마의. ...예, 조조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사마의는 조심스레, 그리고 꼿꼿하다 못해 뻣뻣한 바른 자세로 초선이 건너 편에 누웠다. 초선이의 울음이 조금 잦아들어 조조는 간신히 한 숨을 돌릴 수 있
사마의 아저씨랑 조조 아저씨랑 같이 자구 싶어?
으, 응.
그럼 같이 자자.
조조님?
조조는 고개를 침대 쪽으로 기울였다가 다시 들었다. 그리고 넓은 침대 한 가운데에 초선이를 눕히고 자기가 옆에 누웠다. 그럼에도 사마의는 쭈뼛쭈뼛 가까이 올 줄을 몰랐다.
누워라, 사마의.
...예, 조조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사마의는 조심스레, 그리고 꼿꼿하다 못해 뻣뻣한 바른 자세로 초선이 건너 편에 누웠다. 초선이의 울음이 조금 잦아들어 조조는 간신히 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초선이는 생각보다 금세 잠들었다. 몇 마디 대화를 하다 끊어지는 것을 보고 조조는 옆에서 뒤척였다. 천둥은 이제 많이 기울었는지 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옅은 빗소리와 함께 시계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 조조는 이불을 끌어올리다가 초선이를 사이에 두고 뻣뻣이 누운 사마의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중에도 긴장을 한 얼굴이 보일 지경이었다.
이불을 하나 더 꺼내줄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즉답이 튀어나온 것을 보니 자기는 커녕 제대로 누웠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인 모양이었다. 조조는 그냥 먼저 잠에 들기로 했다. 눈을 감자 세상이 암흑으로 뒤덮혔다. ...조조님. 문득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일어날 수는 없었다.
사마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조조는 피곤하였던지 초선이처럼 빠르고 깊게 잠이 들어있었다. 기억 속에서도 이렇게 곤히 잠든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완전히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 번 도원관에서도 일어나지 못할만큼 깊이 잠든 적이 있으니까. 그러나 그 것을 제외하면 조조가 이렇게 곤히, 편히 잠든 모습 자체가 새로웠다. 항상 바짝 긴장한 상태로, 잠을 잔다고 하기 보다는 눈을 붙인다는 게 알맞은 모습으로 조조는 항상 잠을 청하곤 했었다. 이렇게 달라진 건, 드림 배틀이 끝났기 때문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조조님.
초선 아가씨 덕분이겠지. 조용하게 불렀다고는 하여도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아는 조조라면 깨어났을 것이다. 그 점이 못내 부럽고 아쉽고 안타까워서.
조조.
불러보았지만 당연히 답은 없었다. 오히려 있었으면 곤란했을 것이다. 사마의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잠을 청했지만 오지 않을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사마의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눈이 뻑뻑했다. 인간이 되면서 생긴 이상한 점 중 하나였다. 인간이라면 어쩌면 이리도 나약하고, 피로하고, 감정적인 생물체인지. 왜 이렇게 순수하지도 깨끗하지도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지. 사마의는 영영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
도원관에서 합숙을 한다고 했다. 초선이는 사범님과 같이 하루 종일 놀 수 있다는 것에 들떠있었다.
조조는 초선이의 가방을 챙기며 하나 하나 꼼꼼히 확인했다. 갈아입을 옷과 자기 전에 쓸 칫솔 치약, 초선이의 애착 인형, 간단한 간식... 사마의는 그 동안 초선이가 유치원에서 새로 배워온 놀이를 같이 하고 있었다. 도원관에 도착하자 공손찬과 조운이 둘을 맞았다. 나머지는 오늘 저녁을 위해 장을 보러 나갔다고 하였다. 초선이는 사범님, 하고 외치며 공손찬에게 달려갔다.
초선이, 잘 지냈어요?
응! 잘 지냈어요!
조운이 초선이를 대하는 공손찬을 대신해 꾸벅 인사를 했다. 조조는 마주 인사하며 초선이를 바라보았다. 초선이, 아저씨한테 바이바이 해야지. 공손찬이 말하자 초선이는 그제야 돌아보았다. 조조 아저씨, 사마이 아저씨 바이바이. 조조는 손을 흔들어 인사해 주었다. 공손찬까지 인사를 하고 나자 셋은 도원관 안으로 들어갔다. 조조는 약간 허탈한 기분으로 뒤로 돌아섰다. 사마의가 두 걸음 뒤로 물러나 조조가 갈 길을 텄다. 아주, 익숙하게.
조조는 그 습관적인 모습을 당장이라도 때려치라고 말하도 싶은 것을 목 안으로 욱여넣었다. 모든 것은 동작의 문제가 아니라 사마의를 너무나 쉽게 믿어버린 자신의 문제였기에. 상흔은 깊고도 넓었다. 조조는 입술을 깨물고 사마의가 터준 길로 나아갔다. 뒤에 사마의가 따르는 것이 느껴졌다. 조조는 억지로 생각을 돌리려 했다.
오늘은 시큐리티 룸에서 밤을 새울 수도 있을 것이다. 초선이야 도원관에서 잘 있으리라 확신해 마지 않을 수 있으니. 이상하게 올라간 폭행 사건 수치를 재조명할 수도 있을 것이고.
조조는 문득 발을 멈추고 사마의를 돌아보았다. 갑작스레 멈춘 것에 궁금함을 느꼈는지 사마의의 눈이 동그랬다. 그리고 조조는 고개를 돌렸다. 도원관이 초선이를 품고 있었다. 아, 오늘은 초선이가 없구나. 그렇다는 것은
오늘은 사마의와 둘이만 남아있구나.
문득 공포 같은 감정이 조조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또 배신당한다. 또 소중한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밖으로 내보내기엔 정말로 소중한 것을 잃게 될 지도 모른다는 촛불 같은 생각이 꺼지지를 않았다. 조조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꾹 쥐었다.
사마의.
예, 조조님.
...사마의.
...? 예 조조님.
숨이 턱 막혔다. 사마의, 사마의, 사마의. 입 속에서 이름이 계속 맴돌았다. 이러던 때가 있었나? 조조는 문득 현기증을 느꼈다. 땅이 울렁이는 것 같았다. 조조님! 큰 부름이 머리를 울렸다. 땅이 빠르게 가까워 왔다.
조조는 자신이 과로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초선이를 재웠던 비오는 날 이후 침대로 돌아간 적이 없다는 것도 인정했다. 의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자겠다는 약속을 받고 나서야 퇴원을 승인했다. 응급실의 포도당 링거을 다 맞고 가라는 조건도 덧붙였다. 톡. 톡. 톡. 링거가 천천히 조조의 몸으로 빨려들어갔다. 사마의는 조조의 침대 옆에 앉아 고개을 푹 숙이고 있었다.
주, 조조님.
문득 사마의가 입을 열었다. 한참동안 입을 다물어서 그런지 목소리는 깊이 가라앉아있었다. 사마의는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침대 위여서 그런지 평소에는 올려다보아야 했던 사마의의 눈이 내려다보였다. 그 눈동자가 새카맸다.
시큐리티 룸을, 맡겨 주십시오.
불허한다.
답이 즉각 튀어나왔다. 사마의는 아까보다 맑은 눈동자를 조조에게 비쳤다. 안 될 말이다. 절대로.
허나 주군...! 주군의 몸이 이렇게나,
나는 불허한다고 말했다 사마의.
사마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끄덕여 수긍했다기 보다는 어떻게 반박할 말을 찾는 듯이 보였다. 조조는 자리를 고쳐 누웠다. 링거가 괜시리 불편했다. 사마의의 시선이 등 뒤로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조조는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어둠이 그를 반겼다.
...주군.
등 뒤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군. 주군. 몇 번이나 소리가 들려 조조는 반기는 어둠을 뿌리치고 다시 눈을 떴다. 차라리 체념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저는 무엇입니까.
.......
저는, 나 사마의는...
침묵이 이어졌다.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음에도 정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게나 말이지. 조조는 생각했다. 대체 너는 무엇일까. 네가 무어라고. 나는 그 생각을 떨칠 수 없는 것일까. 보내지도 못하고 남기지도 못한 채 주위를 맴도는 것은 너일까 아니면 나일까. 피로가 자꾸 조조를 귀찮게 하였다. 주군,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목에 걸리는 것 같았다. 톡, 톡, 링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퇴원하고 나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잠든 조조를 업은 채로 사마의는 집을 향해 걸었다.
조조는 음식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먹는 사람이었다. 뭐든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면 지금 활용해서 먹이기라도 하겠지만 어려운 일이었다. 초선이가 집에 있으면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이것저것 챙겨 먹겠지만-사마의는 영양실조 진단이 나오지 않은 이유가 초선이 덕분이라고 확신했다-지금으로써는 여러모로 요원할 것이다. 이따 밤에 깨시면 다시 주무실 수 있게 시큐리티 룸에 담요라도 챙겨 놓아야겠다고 사마의는 생각했다.
만일, 자신이 그에게 믿음을 주었다면 시큐리티 룸의 풍경은 어땠을까. 정말로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자신이 맡을 수 있었을까. 사마의는 조조를 고쳐 업으며 생각했고, 그리고, 여전히 의미 없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건 조조의 뜻이라고. 속죄도 무엇도 아니다. 이전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열망이 횃대를 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사마의는 조조를 침대에 뉘였다. 조조. 조심스레 이름을 불렀고, 또한 답은 없었다.
조조는 한밤중에 깨어났다. 어둑한 방 안에는 자신 혼자만이 남아있었다. 덜컥, 심장이 내려 앉았다. 조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섰다.
조조는 사마의 방의 문을 두드렸다. 사마의, 사마의 안에 있느냐. 외쳤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자고 있을 수도 있어. 조조는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사마의는 안에 없었다. 초선이와 있을 수도 있어. 조조는 비틀거리는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질 뻔 하며 초선이 방을 향했다. 초선이의 방 또한 텅 비어 있었다. 사마의, 사마의? 조조는 차라리 간절하게 불렀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초선이도 데리고 간 건가? 눈 앞이 어찔했다. 시큐리티, 시큐리티 룸을 향해야 했다. 거기라면 사마의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어디로 갔을까. 어디에 있을까. 조조는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조조님?
사마의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았다. 조조는 숨을 몰아쉬었다.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사마의가 서둘러 조조의 앞으로 와 한 다리를 꿇고 앉았다.
조조님, 무슨 일이십니까.
시큐리티룸,
예?
허하지 않았을 텐데.
잠시, 담요를 가져다 두러.
몸은 괜찮으십니까 조조님. 조조는 숨을 간신히 골랐다. 사마의가 말하는 것이 들리지 않는 듯이 조조는 손을 뻗었다.
부축해라.
...예, 조조님.
사마의는 조조의 손을 잡고 반댓손을 등에 둘러 조조를 부축했다. 기운이 없는지 조조의 발이 비틀비틀 바닥을 디뎠다.
사마의.
조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사마의를 불렀다. 사마의는 듣는다는 표시로 고개를 돌리고 발을 멈추었다.
방을 옮겨라.
예?
내 방으로. 옮겨라.
목소리는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넓은 침대에는 이제 두 명이 누워 있었다. 방을 옮기라니, 지독하게 갑작스런 말이었다. 그러나 사실 옮길만한 짐도 마땅하게 있지 않아서 몸만 덜렁 오면 그만이기도 했다. 어색하게 침대에 누운 사마의는 조조의 시선을 한껏 받으며 몸둘 바를 몰라 했다. 사마의는 뒤척이는 척 하며 칼처럼 누웠다. 등 뒤로 느껴지는 시선이 따가웠다. 잠들 수 있을까. 영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다. 사마의. 조조가 사마의를 불렀다. ...예 조조님. 대답할지 말지 잠시 고민하다가 사마의는 결국 대답했다. ...아니다. 조조는 실없이 입을 다물었다. 시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조가 돌아누운 모양이었다. 무엇을 묻고 싶었을까. 사마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여전히 조조가 자신에게 싸늘한 것은 맞기에 아마도 좋은 소리는 아니었으리라 짐작할 따름이었다. 사마의는 괜히 이불을 끌어올려 추슬렀다. 어쩐지 날이 추운 것 같았다.
조조는 자신이 이성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배신을 할 상대방에게 직접 물어보아봤자 돌아오는 것은 없다. 누가 배신할 것이라 처음부터 말하겠는가. 그러나 계속적인 감시도 바람직하지 않다. 자신에게는 시간이 없었으므로. 그러나 자신은 둘 중 어느쪽도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떠오르는 대로 행동하고만 있었다. 조조는 조급해져 있었다고 스스로에게 진단을 내렸다. 그러나 갈급하지 않으면 어쩐단 말인가. 사마의가 무엇을 꾸미던 그대로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조조는 포위망을 늘리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제서야 잠이 다시 몰아쳤다. 조조는 눈을 감았다.
-
도원관의 아침은 이르다. 공손찬도 유비도 일찍 일어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고 오호대장군도 그닥 다를 바는 없었다. 예외라면 제갈량 정도일까. 그러나 이른 시간에 손님이 오는 것에 익숙하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조조를 보고 놀란 까닭은 거기에 있었다. 마당을 쓸고 정리하던 유비는 순간적으로 빗자루로 위협 자세를 취했다. 조조는 빗자루를 변하지 않은 표정으로 슥 밀어냈다.
아 뭐야 조조잖아. 이 새벽에 무슨 일이야?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다.
...누구냐! 왜 조조의 탈을 쓰고 온 거지? 정체를 밝혀라!
조조의 얼굴이 확 구겨지자 유비는 약간 헛갈렸다. 짜증을 내는 걸 보면 조조가 맞기는 한데. '그' 조조가 자신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려웠다. 큰 소리가 나자 놀랐는지 도원관에서 관우가 나왔다.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어? 그게.
부탁을 들어 줄 수 있나.
...장비! 제갈량을 깨워라! 이건 분명 장각의 술수입니다 형님!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무술가 둘이 조조의 앞에서 당장이라도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조조의 얼굴이 빠르게 일그러졌다.
잠에서 덜 깬 제갈량은 커피를 후루룩 마셨다. 어제 옥새를 좀 살펴보고 오느라 가뜩이나 피곤한데 일거리가 또 늘었다. 조조는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뚫어져라 둘을 바라보았다. 오호대장군은 뒤에서 정말 조조가 맞는지 토의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탁하신단 말씀은?
사마의가 오가는 시간을, 알려주었으면 하는데.
......
앞으로 계속. 의처증이십니까?
뭐?
아니, 이 경우는 의부증이라고 해야하나.
제갈량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이제 보면 아실텐데요. 지금의 사마의는 그럴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그걸 어떻게 믿지?
......
신뢰는 배신의 토대가 될 뿐이다.
그리고 치료약이기도 하죠.
......
부디, 다음에 사람과 말을 할 때는 눈을 좀 봐 주시기 바랍니다.
가십시오. 그닥 정중하지 않은 축객령이 돌아왔다. 조조는 얼굴을 찌푸렸다. 유비는 아리송한 얼굴을 하다가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정 궁금하면 일단 알려는 줄게. 사마의가 언제 왔는지.
...신세 지는군.
유비님.
제갈량이 작게 유비를 타박했다. 유비는 조금 울상을 지었다. 조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한 인사를 하고 도원관을 나섰다. 해가 어렴풋이 떠오르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초선이를 데리고 집을 나서야 할 시간이다. 조조는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경찰서에 있는 동안 핸드폰은 두어 번 울린 게 전부였다. 위치 추적이라도 해야할까? 지나치게 간 감이 있어 폐기하기는 했지만 떠올랐다는 것만으로도 조조는 자신이 꽤 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신고가 접수된 것은 그 와중이었다. 폭행 사건이었다.
후드를 쓰고 장갑을 낀 사내가 다짜고짜 폭행을 행사했다는 것이 피해자의 주장이었다. 다행히 cctv가 있는 근처라 그럭저럭 인상착의는 확인이 가능했다. 조조는 조바심이 나는 것을 느꼈다. 혹시나, 만약에. 생각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정말로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조조는 그걸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에 빠졌다. 아무리 꿈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이건, 이것은 아니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사마의에게 모진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불쾌해졌다. 조조는 머리를 괴었다가 마른 세수를 했다. 퇴근시간이 되었다.
집에 도착해보니 시간이 생각보다 일렀다. 오늘 초선이는 도원관에 가는 날이니 약간 천천히 움직여도 괜찮을 것이었다. 조조는 문을 닫고 신발을 벗었다. 그러다 문득, 이질감이 느껴졌다. 자신을 맞는 목소리가 없었다. 또 어젯밤과 같은 상황인가. 침착해지려 애를 쓰며 조조는 방 안으로 두어 발짝 더 걸어 들어갔다. 다행히 집 안에서는 물소리가 났다. 씻고 있는 모양이군. 조조는 거실의 소파에 주저앉다시피 앉았다. 얼마 안 있어 사마의가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셔츠에 바지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복장으로 머리는 아직 덜 말라 있었다. 그리고 한 손에는 바짓단이 젖은 옷이 들려있었다. -어째서?
사마의.
사마의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조, 조조님?
인사를 못 올려 죄송합니다. 사마의가 한쪽 무릎을 꿇어 조조 앞에 앉았다. 목에 걸쳐져 있던 수건이 흘러내렸다. 조조는 반대쪽 손에 들려 있는 옷을 확인했다. 무슨 얼룩이 묻어 손빨래라도 한 양, 옷의 일부만 척척히 젖어있었다. 조조는 사마의의 말을 끊었다.
사마의.
...예. 주군.
피는 잘 지던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조조는 사마의가 뱀 같다고 느꼈다. 잡고 있으면, 손 틈새로 어느새 빠져 나간다. 잡았다고 느껴도, 잡은 것이 아니다. 조조는 이를 악물었다.
옷은 세탁한 건가?
아, 그것이.
굳이 지금 씻은 이유는 뭐지? 사마의. 사실대로 대답해라. 사실대로 대답해야-
조조는 뚝 말을 끊었다. 사실대로 대답해야, 그 다음에 자기가 할 말이 무엇인지 헛갈렸다. 나는 뭐라고 말할 심산이었던 걸까. 나는 너를 어떻게 생각한 걸까.
부디 다음에 사람과 말을 할 때는 눈을 좀 봐 주시기 바랍니다. 제갈량이 비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조조는 사마의의 눈을 보았다. 당황한 듯 동그랗게 뜨여진 눈동자에는 이채가 깃들어 있었다. 들켰다는 난처함도 무엇도 없었다. 다만 조조만을 담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자신의 주군을.
...조조님.
......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그러나 대단치 않은 사유입니다. 잠시 후에 아가씨를 모시러 가기 위해 간단히 씻었으며, 빨래는 식사를 하는 와중에 실수를 조금 했을 뿐입니다.
...사마의.
조조는 목이 졸린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믿고 싶었다. 안온하고 달콤하게 잠겨 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평지로 메꾸어졌다고 들었지만 한 번 빠진 허방다리의 상흔은 깊게도 남아 있었다. 거짓말이면 어쩌려고? 귓가에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믿어? 어떻게, 어떻게?
사마의.
예, 주군.
날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
물으면서도, 조조는 이 질문이 말도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누구라도 말할 것이다. 어려울 것도 없다. 말은 말일 뿐이다. 빈말도 헛말도 거짓도 세상에는 얼마나 많던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든지.
......
얼마든지 어떤 것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왜?
......
어째서?
그것은,
사마의가 숨을 삼켰다. 어째서? 자신이 물어본, 숨소리에 살짝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맴도는 듯 했다. 사마의는 고개를 한참이나 숙였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불충하게도, 주군.
......
제가, ... 주군을 은애하기, 때문입니다.
숨소리가 가득 섞인 말에는 망설임이 있는대로 녹아있었다. 조조는 천천히 미끄러지는 것처럼 소파에서 내렸다. 두 무릎이 조조의 몸무게를 받혔다. 조조는 느리게 손을 뻗어 사마의의 등에 손을 둘렀다. 주, 주군? 사마의의 당황한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렸지만 모른척했다. 부디 이것이 진실이기를. 어떤 것도 믿을 수 없어서, 조조는 이것을 믿는 척하기로 했다. 등에 천천히, 소중한 것을 어루듯이 사마의의 손이 올랐다. 조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둘은 처음으로 초선이를 데리러 가는 데에 지각했다.
폭행범은 얼마 가지 않아 잡혔다. 초선이의 친척 중 하나가 경쟁자를 줄이기 위해 사주했다고 하였다. 최근에는 조조가 이미 입양한 것을 알고 말을 바꿨지만, 그 상황이 화가 난 범인이 여기저기를 다니며 폭력을 행사한 모양이었다. 조조는 상황을 정리하며 마른세수를 하였다. 별 것도 아닌 상황을 불안감으로 크게 키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 대해 후회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니까.
핸드폰이 지잉 울렸다. 사마의가 막 도원관을 떠났다는 유비의 연락이었다. 이것도 이제 취소를 해야 하는데. 조조는 도원관에 답례로 들고갈 만한 것을 생각하다 시계를 보았다. 퇴근 시간이 거의 가까워져 있었다. 조조는 물건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으로 가는 귀퉁이를 돌아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사마의.
조조님. 모시러 왔습니다.
사마의가 인사했다. 경찰서 내에서는 나름 소문이 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날마다 조조를 데리러 오는 독특한 헤어스타일의 남자가 있다고. 애인이냐며 짖굳게 묻는 선배들도 있었지만 조조는 모른 척했다. 미안한 감정이 가득 녹아있는 묵인이었다. 사마의는 검은 바지에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어깨에 묻어있어 조조는 머리카락을 떼어 주었다. 그리고 가자고 말하기 위해 사마의의 얼굴을 보았다. 달콤한것을 베어문 양 눈빛이 달았다. 조조는 붉어지려는 얼굴을 추스르고 고개를 돌렸다.
...가자.
예, 조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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