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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 올렸던 글을 그대로 백업합니다. 퇴고 X
*태오>왕윤 약간
나는 너를 놓지 못할 것이다. 너도 나도 그걸 너무 잘 알아서 탈이었다.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꿈을 꾸었다. 사마의는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한숨을 쉬었다. 누군지는 알 수 없다. 이름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씻고 나오면서 흘끗 본 거울에는 네임이 분명히도 아로새겨져 있었다. 명치에서 약간 비낀, 심장 바로 위쪽. 조조. 신화로나 내려오는 영웅의 이름이었다.
아침을 대강 때우고 출근을 한다. 버스를 타고 20분을 이동하면 회사가 밀집해 있는 구역에 다다르게 된다. 그 중에 한 건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층수를 오른다.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를 한다. 오늘의 일감을 확인하고 머릿속으로 스케쥴을 짜며 재확인한다. 동료들의 이름 중에 영웅의 이름은 없었다. 네임을 알게 되면 같은 성을 가진 사람만 보아도 뒤를 돌아보게 된다. 조씨는 흔한 편이어서 그래도 많이 사마의는 그나마 많이 돌아보는 편이었다. 그만큼 절망이 많다는 뜻이기도 해 좋은 것은 아니었다. 뽁, 입으로 형광펜 뚜껑을 물어 뽑는다. 오늘은 외부 회사와 미팅이 있는 날이다.
악수를 하기 전 먼저 명함을 건넸다. 조태오입니다. 사마의입니다. 귀를 조금 의심하며 건네받은 명함을 확인했다. 조씨였다. 하긴, 사마 씨는 드문 편이니 파트너라면 저 쪽에서 먼저 확인을 했을 것이다. 괜시리 두근거리는 것 같던 심장은 착각으로 인한 과민반응이 분명했다. 회의, 시작하죠.
둘은 덤덤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일 얘기 외에는 나눌 것도 없었다. 일 처리 또한 빨라서 메일 몇 통 오가지도 않았는데 진도가 쭉쭉 빠졌다. 제갈량은 제 담당자와 이야기가 잘 통하지 않는지 심기가 불편한 눈치였다. 주유처럼 내놓고 드러내진 않으니 또 모르는 일이지만. 외근 다녀오겠습니다. 사마의는 회사를 나섰다. 클라이언트의 회사는 지하철을 타고 꽤 가야하는 거리에 있었다. 핸드폰에는 개명을 가능하게 하는 법이 통과 되었다는 뉴스가 헤드라인에 걸려 있었다. 사마의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낭만적인 사람들의 의견은 꽤나 갈리는 모양이었다.
회사에 들자 클라이언트가 반갑잖게 맞아 주었다. 오셨습니까. 회의실은 이 쪽입니다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할 말만 딱 부러지게 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사마의는 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이 지나가며 문득 말했다. 태오야, 좀 더 살갑게 좀 말해 봐. 안녕하십니까. 이번 일, 잘 부탁드립니다. 사마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참, 하고 사내가 명함을 내밀었다. 왕윤. 직급은 클라이언트보다 조금 더 위였다. 선배님. 클라이언트가 조금 타박하듯이 말했다. 감정이 드러나는 말투는 처음이라 사마의는 조금 놀란다. 아, 죄송합니다. 다시 사무적인 말투로 돌아오자 사마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태오, 였던가. 사마의은 부질없이 곱씹었다.
일은 잘 처리 되었다. 회의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단시간에 끝났다. 말이 잘 맞는 사람이어서 다행이었다. 시간을 꽤나 잡아 먹을 것으로 예상해서 외근 후 바로 퇴근하겠다고 이야기를 해 놓고 나왔는데, 그런 이야기가 무색할 정도로 일찍 끝났다. 이대로 회사에 다시 돌아가자니 그것도 꽤나 꼴이 우스우리라.
혹시 식사 하셨습니까? 같이 하실래요?
왕윤이라는 사람의 의례적인 질문을 받아들인 건 그래서였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상대방은 의례적인 질문이 아니었던 게 천운이었다. 평소라면 정중하게 거절하겠지만. 자신의 클라이언트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본래대로라면 거절하겠지만, 자신의 클라이언트가 참여한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반쯤은 접대 같고 반쯤은 모르는 사람끼리의 식사 같은 약속은 그렇게 성립되었다.
식사는 정말 무엇이든 좋았다. 어찌 되었던 밥 한 끼 대강 먹고 나면 딱 퇴근 시간이 될 것이었다. 돌아가면 퇴근 시간이라 고민하고 있었던 사마의에게는 식사가 뭐가 되었던 좋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국밥 나왔습니다. 이렇게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클라이언트와.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다 잘 먹습니다.
사마의는 그렇게 말하며 숟가락들 들었다. 그리곤 흘끗 클라이언트-태오를 바라보았다. 곱게 생기어서 이런 걸 먹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저보다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사마의는 태오를 따라 밥을 말며 생각했다. 식사 자리를 주도한 것은 당연하지만 왕윤이었다. 별 대화 없이 후룩후룩 먹기만 하는 둘에게 왕윤은 이것 저것 질문을 던졌다.
태오, 일은 잘 합니까?
예? 아. 제 생각보다 훨씬 더 잘 해 주시고 있어서. 몇 수 배우고 있습니다.
...과찬 감사 드립니다. 오히려 저야말로 여러모로 배우고 있습니다.
태오의 말에 왕윤은 약간 이채가것으로 끝이리라 사마의는 생각했다. 식당 앞의 흡연구역에서 태오를 만나기 전까지는.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사마의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일부러 냄새도 배지 않게 신경쓰고 있었는데 이런 데에서 클라이언트를 만날 줄은. 꽤나 당혹스러웠다. 태연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 때 문득 태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사마의는 고개를 들었다. 태오가 라이터를 흔들어보였다.
가스가 다 한 것 같아서.
아, 쓰십시오.
감사합니다.
태오가 라이터를 켜고 담배에 불을 당겼다. 눈을 내리깔고, 보일듯 보이지 않는 눈동자에 불길이 비쳤다. 속눈썹이 차양처럼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인사를 하며 태오는 라이터를 내밀었다. 사마의는 조금 얼떨떨하게 라이터를 받아들었다. 말을 건 것은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왕윤, 이라는 분은 가셨습니까?
예? 아. 예. 담배를 피우지 않으셔서요. 어린 딸이 담배 냄새에 약하다고 하셔서... 태오는 말을 흐리게 끝맺었다.
아, 따님이 있으시군요.
예, 올해로 일곱 살인데 미운 시기도 안 찾아 오고 아주 예쁘다고 난리도 아니십니다.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입술이 발갰다. 별 걸 다 보는군, 나도. 사마의는 속으로 짧게 자신을 조소했다. 담배가 거의 끝까지 타들었다. 사마의는 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일은 이제 거의 끝마무리 단계였다. 다시 볼 수도 있겠지만, 이 사람이라면 훌훌 털고 일로써만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사마의는 담뱃재를 털며 눈을 휘어 웃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술 한 잔 하시겠습니까?
태오 씨? 이름을 부른 것은 철저한 고의였다.
-
몸에 좋은 것도 아닌데 통 못 끊겠단 말이죠. 담배도, 술도.
사마의는 낮게 읊조렸다. 태오는 그러게요. 하고 가볍게 대답했다. 바는 깔끔하고 조용했다. 칵테일을 만드는 바텐더도 과한 쇼맨쉽 없이 단정하고 절도있게 음료를 냈다.
오랜만에 오는데 나쁘지 않네요.
오랜만이라니, 무슨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태오가 푹 웃었다. 눈이 조금 휘어졌다. 그것도 꽤 보기 좋아 사마의는 조금 쾌재를 불렀다. 태오가 조금 길게 한숨을 쉬었다. 글쎄요.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대화하기 별로인 모양이었다. 뭐라고 해야하나. 사마의는 술로 목을 축이며 머리를 굴렸다. 태오가 입을 연 것은 그 때였다.
미안합니다.
예?
이용하려고 든 거 같아서 말이죠.
...뭐, 괜찮습니다.
사마의는 새끼 손가락으로 살짝 태오의 손을 건드렸다.
그럼 저도 실례 하나 하겠습니다.
예.
네임이 어떻게 되십니까?
아, 저 네임 없습니다.
플러팅에 돌아온 대답은 한참이나 예상을 비껴있었다. 들어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본것은 처음이었다. 네임이 없는 사람이라니. 가끔, 아주 가끔 이런 사람이 있다고 했다. 이전에는 방송에서 아주 신기하다는듯이 다루기도 했었지만, 소송을 몇번 얻어맞고는 잠잠해졌다고 했다. 사마의의 눈에 비친 이채를 알았는지 태오는 잔을 기울였다.
압니다, 신기한 거.
아니, 굳이 그런 건...
정말 괜찮습니다.
해명이 오히려 무안해졌다. 사마의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태오는 조금, 웃었다.
운명이 없는 건 아닐테니까요. 다만, 운명이었으면 하는 사람이 다른 운명일 때. 좀, 벅차지만. 태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어느 정도는 술기운을 빌어서 한 말인 모양이었다. 어쩐지 잘 웃더라니. 태오를 부축하고 나와서 사마의는 택시를 두 대 잡았다. 집을 몰라 실례한다고 말하며 태오의 지갑을 뒤지자 신분증이 나왔다. 신분증에 쓰여 있는 주소는 꽤나 있는 집안들이 모여 산다는 동네였다. 왜 이런 집안 사람이 이 회사에 다니지? 질문은 짧고도 강한 답을 튀어나오게 했다. 사마의는 긴 숨을 뱉었다. 기사님 xx동이요. 사마의는 문을 조금 거칠게 닫았다. 그리고는 제 택시를 탔다.
-
태오는 눈을 떴다. 약한 두통과 함께 강렬한 갈증이 밀려들었다. 태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비틀 부엌을 향했다. 물 한 잔을 들이키고 나니 그제야 머릿속이 좀 정리가 되었다.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민폐를 끼쳤군, 이었다.
고백해보지도 못했는데 차였다. 제가 딱 그 짝이었다. 아니, 그짝이고자시고가 아니라 그게 제 얘기였다. 네임이 없다는 걸 절절하게 깨달았을 때가 왕윤을 좋아할 때부터였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왕윤은 네임이 있었다. 지금도 부인이라면 죽고 못사는 훌륭한 남편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면, 제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태오는 자신이 영영 그 사람의 마음에는 괜찮은 후배 외에는 다른 꼬리표가 없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달려 보았자, 기억하지 못했던 대학 후배 정도겠지. 그게 전부였다. 그래서 태오는, 욕심을 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다만, 마음이 꼭 결정을 따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네임이 어떻게 되십니까?
보통이라면 상처가 되지 않을 말이 유독 아프게 들렸던 건 왜였을까. 태오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알람이 안방에서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출근 준비를 해야할 시간이었다. 태오는 깊은 숨을 쉬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
테오는 마지막 메일의 송신 화면을 확인하고 문자를 넣었다. 방금 메일 보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답장은 금세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이 사람은 일처리가 나랑 잘 맞는단 말이지. 태오는 뻣뻣한 어깨를 마저 스트레칭 했다. 태오야 일 끝났냐. 이제 퇴근해야지. 왕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 선배님. 곧 갈게요. 이야기 하면서도 태오는 웃을 수 없었다. 예전에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좋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었다. 끔찍한 자기 고문. 이성과 감정의 충돌은 태오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냥, 바라보고 싶었을 뿐인데. 자신의 감정에 태오는 어느 순간부터 진저리를 쳤다. 엘레베이터가 층계에 도착했다. 퇴근 시간을 좀 비꼈다고 사람이 없는 엘리베이터에는 왕윤과 태오 둘 뿐이었다.
선배님.
충동은 꽤나 갑작스러웠다. 모든 걸 파탄내고 싶다거나, 이상한 마음을 먹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갑작스레, 저도 모르게 입에서 툭, 부름이 던져졌다. 핸드폰을 보고 있던 왕윤이 고개를 들었다. 태오는 한 번 더 선배님, 저. 하고 입을 떼었다.
태오야.
그러나 왕윤이 빨랐다. 웃는 얼굴은 다정했지만 그뿐이었다. 왕윤은 고개를 젓지도, 더 말하지도 않았다. 그냥,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잔인하게도.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안녕히, 가시라고요.
어 그래. 너도 잘 가라.
태오는 잠시 엘리베이터 앞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후, 하고 입김을 불자 하얗게 서렸다. 볼이 찼다.
얘기는 좀 하게 해 주시지. 태오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며칠 후 태오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예정되어 있던 일이었다. 최소한 차여서 충동적으로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계획해 온 것이었다. 모든 걸 묻자고. 부모님은 말했다. 마더컴 컴퍼니의 아들로써, 이제는 돌아오라고. 태오는 거기에 응했다. 부모님은 마음에 들지 않는 태오의 신분을 깨끗하게 세탁하기 위해 개명까지 진행했다. 태오는 흙먼지를 털듯 회사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왕윤은 집안 사정이라는 태오의 말에, 잘 지내라며 어깨를 두드려 준 것이 다였다. 오히려 왕윤과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런 거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 판이었는데도. 하긴, 그러니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 사람이 알아챈 거겠지. 태오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들, 안녕히 계십시오. 환송회는 제대로 술자리도 갖지 않고 파했다.
그날 저녁 태오는 부모님께 개명이 통과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조조. 영웅의 이름이었다.
-
그날따라 회사가 어수선했다. 신입 사원이 들어온다고 해 막내들이 들뜨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분위기 전체가 풍선마냥 부푼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막 도착한 주유도 사적인 대화를 일절 삼가는 제갈량도 사정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여서 사마의는 그저 그 상황을 싫어할 밖에 도리가 없었다. 팀장이 들어와 헛기침을 할 때까지 분위기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노크 소리가 들리자 다들 미어캣이라도 된 양 파티션 너머로 무슨 일이 생기는지 고개를 빼들었다.
오늘 신입이 왔습니다. 조조 씨, 인사.
사마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조조?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 이름이 조조? 팀장의 등 뒤에 서 새로 들어온 사원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익숙한 얼굴이 시야를 강타했다. 길다란 속눈썹, 낮게 깔리던 목소리. 고운 입술이 갈라져 소리를 내었다.
조, ...조조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짝짝짝. 어색한 박수 소리가 사무실을 메웠다. 사마의는 기가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태오씨?
-
등이 욱신욱신 쑤셔왔다. 있었던 일이 아닌지라 조조는 병원을 가 보아야 하나 미간을 찌푸렸다. 일단 당장 일주일은 무리일텐데, 하고 가늠하는데 똑똑 파티션에서 노크소리가 났다. 조조는 고개를 들었다. 사마의가 서 있었다.
아, 사마의 씨.
담배 한 대 괜찮으십니까.
조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명입니까?
예?
사마의는 담뱃재를 털었다. 입에 대지도 않은 담배에서는 연기가 잘도 피어올랐다.
태오씨... 라고 말씀 드려도 되려나요. 원래는, 아 혹시 그 쪽이 가명이신가요?
아, 아닙니다.
마더컴 컴퍼니로 직장을 옮기면서 혹시나 이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마더컴은 큰 회사였다.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지 않으면 만나는 것은 커녕 얘기조차 듣기 쉽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 그것도 상사와 부하 관계로. 높은 상사가 친근하게 담배 태우자고 말을 했으니 생각해 보면 사무실이 시끄러울 것이었다. 조조는 깊게 담배를 빨아들였다.
둘 다 본명입니다. 개명을... 했거든요.
아. 그렇군요.
잠시 잠깐 흡연실에 침묵이 흘렀다. 생각이 둔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담배 하나가 줄어드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마의가 입을 열었다.
태오 씨.
예?
아, 이렇게 불러도 될까요.
...아뇨. 그냥 조조라고 불러 주십시오.
조조는 짧게 말했다. 사마의가 빙그레 웃었다.
그럼 조조 씨.
...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사수가 될 것 같으니까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사마의는 아직 길게 남아있는 담배를 비벼 껐다. 매캐한 담배 냄새를 맡으며 눈을 휘어 웃었다. 영웅을 구워 삶는 책사가 된 기분이었다.
사수라고는 하지만 가르칠 것은 그닥 없었다. 워낙에 일을 잘 하는 사람이기도 했고, 말이 신입이었지 경력자니까. 약간 달라진 보안, 제출해야 하는 사람, 그런 것들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사마의는 흘끗 조조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개명이라. 익숙치 않았다. 개명한 이름도 본명이라고는 하지만 그게 네임과 관련이 있는지 아닌지도 몰랐다. 사마의는 괜히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저 사람도 애정이 있는 상대방이 있는데, 무례하게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지 싶었다. 일에 집중해야했다.
사마의 씨.
부르는 소리가 들린 건 그 때였다. 제갈량이었다.
이 서류 내일까지 부탁드립니다.
...그러죠.
사마의는 서류를 받아들었다. 파일철을 열자 조조의 사진이 찍혀있는 이력서 같은 종이가 나타났다. 사마의는 후닥닥 파일을 덮었다. 제갈량...! 사마의는 잇사이로 이름을 씹으며 파일철을 다시 펼쳤다. 형광펜으로 하나가 표시가 되어있었다. 아버지 이름. 사장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제갈량의 필체로 한마디가 써 있었다. 고생해라. 비웃는 표정이 눈에 선했다. 어쨌든 왜 그렇게 시끄러웠는지는 알겠군. 사마의는 파일을 덮고 한 쪽으로 치워두었다. 그리고 다시 흘끗, 조조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는 표정이 어째서인지 더 불편해 보였다.
-
태오 씨.
조조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사마의의 얼굴이 눈에 비쳤다.
아, 미안합니다. 조조 씨.
...아뇨. 아뇨, 아뇨.
조조는 거푸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갑작스레 이름이 불려 당황한 것일까. 조조는 마른세수하듯이 얼굴을 비볐다.
일하더라도 저녁 드시고 하셔야죠.
아... 감사합니다.
조조는 의자를 뒤로 조금 밀었다. 눈이 뻑뻑했다. 몇몇 먼저 퇴근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더라니 자신과 사마의를 제외하면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저는 먼저 퇴근하려고 하는데.
아, 저도, 퇴근... 하겠습니다.
조조는 컴퓨터를 종료하고 자켓을 챙겼다. 사마의가 사무실의 불을 껐다.
첫날인데, 괜찮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조조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게 유난히 느린 것 같았다. 아침에는 좀 더 빨랐던 것 같은데. 등이 또다시 욱신욱신 쑤시는 것 같았다. 사마의가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면 식사 하고 가시겠습니까.
예?
어차피 각자 먹을 거 대충 때우고 가죠. 같이.
...예.
둘은 다시 나란히 국밥집에 앉았다. 부글부글 끓는 뚝배기가 앞에 놓여서 조조는 조금 당황해서 입읗 열었다.
국밥, 좋아하시는 줄, 몰랐는데요.
아, 저는 그냥 그렇습니다.
드시죠. 식습니다. 조조는 머뭇머뭇 숟가락을 들었다. 그럼 왜 이걸 또 먹으러 왔지. 천천히 숟가락을 들었다.
태오씨가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사마의가 숟가락을 들며 말했다. 지난 번에 잘 드시길래. 조조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내리깔았다가 말했다.
...저도 썩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아, 미안합니다.
사마의가 입을 열었다.
그럼 다음에는 조조 씨가 좋아하는 걸로 들죠.
그 목소리는 어쩐지 웃는 것 같았다.
-
조조는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등이 이상하게 아팠다. 칼로 찌르는 듯한 아픔에 조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더듬더듬 화장실을 향했다. 불이 켜진 화장실에서 조조는 잠옷 대용으로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는 등을 거울에 비췄다. 새카만 먹이 글자를 아로새기고 있었다. 왜, 왜 하필이면 지금. 왜 하필이면 저 사람이. 조조는 천천히 손으로 반쯤 쓰여진 글씨를 만지작 거렸다. 사마의. 조조는 조금 어색하게 발음했다. 등이 다시 쑤셔와서 조조는 깊고 거친 숨을 쉬었다. 등골에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다. 조조는 상처입은 짐승마냥 웅크려 앉았다. 등이 너무나도 아팠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네임은 거의 온전하게 새겨져 있었다. 조조는 천천히 씻고, 옷을 입고, 계단을 내려갔다. 회사 근처에 어머니 명의의 오피스텔이 있어 그걸 쓰고 있었다. 조조는 멍하니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출근 시간보다 조금 일러서 그런지 로비는 사람 없이 한산했다. 사무실도 사람이 없기는 그닥 다르지 않았다. 한산한 수준이 아니라 아무도 없는 것이 그나마의 차이점이었다. 조조는 비척비척 자기 자리에 가서 앉았다. 척추에서 견갑골까지가 이상하게 예민했다. 등이 의자에 닿는 게, 옷에 덮혀 있는 것이 신경이 쓰였다. 네임. 그놈의 네임. 그게 뭐라고 이리도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지. 조조는 억지로 의자에 등을 기대고 뒤로 몸을 넘기곤 눈을 감았다. 어두운 사무실에서는 종이 냄새가 났다.
조조 씨?
익숙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자 탁 스위치가 눌리는 소리가 나며 불이 켜졌다. 조조는 고개를 돌렸다.
사마의, 씨.
벌써 출근했습니까?
조조는 그냥 고개를 떨구었다.
어제 첫 출근이어서 힘들었을텐데.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조는 대답하고 컴퓨터 전원을 넣었다. 사마의도 정장 자켓을 벗고 컴퓨터를 켰다. 조조는 힐끔 사마의를 보았다. 서류철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사마의. 조조는 입 안에서 발음을 굴렸다. 소울 메이트. 운명의 짝. 부르는 이름은 많았다. 그게 다 무어라고. 노네임이었던 태오는 조소하고 절망했다. 무엇을 다 바쳐도 가질 수 없는 것. 조조는 그것을 손에 넣었다. 손에, 넣었는데.
태오 씨.
-예?
조조는 눈을 깜박였다. 사마의는 긴 숨을 쉬고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커피가 놓여 있었다.
한 잔 하라고요.
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당분간 태오 씨라고 부르겠습니다. 아직 개명하신 이름이 익숙치 않으신 것 같아서.
사마의의 말에 조조는 입술을 깨물었다. 깨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아뇨.
......
익숙해 져야 하니, 그냥 조조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러죠, 조조님.
조조의 눈이 조금 찌푸려졌다. 사마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냥, 조조 씨로-
아뇨. 이게 낫군요. 조조님. 오늘 하루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마의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서류철로 시선을 돌렸다. 조조는 뭐라 할 시간을 놓치고 고개를 돌렸다. 커피는 시럽이 들어가지 않은 라떼였다. 문득, 조조는 등이 아프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
조조님. 이 서류 좀 부탁드립니다. 조조님. 점심 시간입니다. 감사합니다, 조조님. 조조는 조금 저 사수가 짜증난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놀리는 거라 말하기엔 부르는 얼굴이 꽤나 진지해서 더 열통이 터졌다. 다른 사람들까지 조조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해서 더욱더. 빨리 퇴근했으면 좋겠는데. 유독 오늘따라 피곤함이 더했다. 하지만 오늘 신입사원 환영회가 있어서 퇴근이 일러진다고 바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조조님이라고 부르는 생각이 너무 빤했다. 부모님께 닿는 줄이라고 생각하겠지. 자신은 그렇게 될 생각이 없었다. 역으로 닿지 못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었다. 조조는 서류를 넘겼다.
조조님. 사수가 부르는 소리에 조조는 고개를 들었다. 사수가 빙긋 웃었다. 퇴근 시간이고, 환영회가 있습니다. 가시죠. 조조는 예, 대답하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마의는 의자를 수월하게 빼라는 듯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조조는 그런 사마의를 흘끗 보고는 최대한 무시하려 노력했다. 이제부터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조조는 그렇게 곱씹었다.
환영회는 조촐하지는 않았지만 조용했다. 왁자지껄하게 이야기를 한다기보다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가까웠다. 술도 첫 건배를 제외하면 들어오는 것이 없다시피 했다. 괜찮은 분위기네. 조조는 약간 알딸딸한 머리로 생각했다. 나름 술은 잘 마시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옆자리에 앉은 사마의는 자신보다 더했다. 조조는 잔을 내려놓았다.
괜찮으십니까, 조조님.
...괜찮습니다.
조조는 눈을 깜박였다. 사마의가 다시 말했다.
슬슬 파해가는 것 같은데, 택시를 불러드릴까요.
아뇨, 제가, 하겠습니다.
조조님.
괜찮습니다.
하나 둘 씩 사람들이 일어났다. 조조도 그 틈에 섞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택시는 금방 오지 않았다. 오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잡아 타고 가기가 일쑤였다. 조조는 핸드폰을 꾹꾹 눌러 콜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잡히지가 않았다. 곤란한데. 낮에 비해 찬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조님. 조조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웃음기 없는 발음이 한 번 더 조조를 불렀다.
조조님.
조조는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안 부르시면 안 됩니까.
......
어차피 저희 부모님과는 썩 사이가 좋지 않아서, 떨어지는 건 없을 겁니다. 여기로 온 것도 어느 정도는 체면 때문이고요.
조조님.
사마의가 빙긋 웃었다. 조조는 그 웃음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자신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또 무엇이.
조조님.
사마의가 앞으로 한 걸음 걸어 나왔다. 조조는 뒤로 물러설 뻔한 것을 참아내었다. 사마의가 눈을 휘어 웃었다.
저는 그저, 기다리는 겁니다.
무엇을? 조조의 머리가 의문을 토했다. 무얼 기다리는 거지? 나에게서? 왜? 사마의가 팔을 뻗었다. 조조는 어째서인지 질끈 눈을 감았다. 등 뒤에서 차가 서는 소리가 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조조님. 부디 살펴가시길.
-
피차 감정이라는 게 상관이 없다면 우리는 왜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가.
기다린다는 것은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조조는 집에 도착한 후에야 그렇게 정의 내릴 수 있었다. 그럼 원하는 것을 얻으면 금방 떠나가겠지. 문제는 상대가 뭘 원하는지 모른다는 데에 있었다. 사마의는, 만난 지 얼마 안 된 탓일수도 있으나, 통 알기 어려웠다. 자신에게서 무엇을 원하기에 이다지도 사람을 귀찮게 구는 것인지. 등 뒤가 욱신욱신 저려와 조조는 왼손으로 등을 더듬었다. 눈을 휘어 웃던 것이 떠올랐다. 선배. 태오는 뇌까렸다. 이게 다 제가 잘못해서인 건가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리고 아마 눈 앞에 선배가 있더라도 마찬가지리라. 조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이 왔다.
신입으로 들어왔다지만 언제까지 사원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니니. 그러게 이사로 들어오라니까. 전화가 부모님의 목소리를 토했다. 조조는 말 없이 그들의 불평을 감내했다. 그렇다고 마음마저 편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조조는 담배에 불을 당겼다. 문이 열렸다.
조조님. 여기 계셨군요.
사마의였다. 조조는 한숨처럼 담배연기를 뱉었다. 요즘 들어 꿈자리도 사나운데. 조조는 몽롱하게 생각했다.
오늘 오후 외근입니다. 알고 있겠지만.
아.
조조는 짦게 탄성을 토했다. 알겠습니다. 어쩐지 웅얼거리는 대답이 된것 같아 조조는 못내 찝찝해졌다. 사마의가 픽 웃으며 제 담배에 불을 당겼다.
이전 회사로 가야 하니 불편하실 건 알고 있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선배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조조는 들뜨는 것을 진정하기 위해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그런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마의입니다. 이쪽은, 아시겠지만, 조조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 회사의 선배들이 수군거리는 게 들렸다. 조조는 그 소리를 무시하며 파티션 사이사이의 사람 얼굴들을 뒤졌다. 왕윤의 얼굴이 없었다. 잠깐 어디 가셨나. 조조는 실망감을 감추려 노력하며 회의실을 향했다.
회의는 생각보다 난항이었다. 원하는 바를 분명하게 전달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 안 맞고 빠진 부분이 있었다.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회의를 중단시킨 것은 사마의였다. 좀 쉬었다 하죠. 다들 그 말에 수긍했는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조는 흡연실 쪽을 향하는 선배 하나를 급히 잡았다.
저, 죄송합니다만.
어?
왕윤 선배는, 어디에.
어 못 들었, 아니, 못 들으셨습니까?
예?
이민 간다는 거 같던데요.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가지런한 카드 묶음을 바닥에 흐트러트린 것 같았다. 줍고, 또 주워서 묶음으로 두려고 해도 자꾸 손에서 빠져나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조조는 얼음도 타지 않은 작은 샷잔을 들이켰다. 옆에 앉은 사마의가 못마땅하게 말했다.
조조 님, 진정하십시오. 내일 출근도 해야 한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럼,
알고 있었습니다.
조조는 양 손바닥으로 양 눈을 가렸다. 손바닥이 축축하게 차올랐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게 왜 그렇게 지독한지. 문득 뭔가가 오른 손목에 감겼다. 손바닥이 얼굴에서 떼어져 오른쪽으로 뻗어졌다. 사마의가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모르시는 것 같군요.
조조는 주먹을 꾹 쥐었다. 사마의가 짧게 웃었다.
한 대 치시는 것도 좋은 생각이죠.
......
여기가 아니라면 더더욱이요.
손의 힘이 풀렸다. 웃기지도 않았지만 괜히 눈물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사마의는 손바닥에 난 손톱 자국을 보고 혀를 한 번 찼다. 이 사람은 무엇이기에 왜 나에게 이러는 것인지. 조조는 사마의를 바라보았다. 넘긴 머리 군데군데에 붉은 머리칼이 섞여있었다. 사마의가 잡고 있는 조조 손의 손가락을 하나 하나 폈다. 조조는 그것을 바라보다, 문득 입을 열었다.
-네임이, 어떻게 되십니까.
사마의는 고개는 들지않고 눈만 위로 올려 조조를 보았다. 그리고는 픽 웃었다. 사마의는 잡고있는 조조의 손을 제 얼굴까지 끌어올렸다. 엄지 손가락 끝에 부드러운 살이 닿았다.
글쎄요.
쪽, 하고 소리가 났다.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마의가 즐거이 웃었다.
*태오>왕윤 약간
나는 너를 놓지 못할 것이다. 너도 나도 그걸 너무 잘 알아서 탈이었다.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꿈을 꾸었다. 사마의는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한숨을 쉬었다. 누군지는 알 수 없다. 이름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씻고 나오면서 흘끗 본 거울에는 네임이 분명히도 아로새겨져 있었다. 명치에서 약간 비낀, 심장 바로 위쪽. 조조. 신화로나 내려오는 영웅의 이름이었다.
아침을 대강 때우고 출근을 한다. 버스를 타고 20분을 이동하면 회사가 밀집해 있는 구역에 다다르게 된다. 그 중에 한 건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층수를 오른다.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를 한다. 오늘의 일감을 확인하고 머릿속으로 스케쥴을 짜며 재확인한다. 동료들의 이름 중에 영웅의 이름은 없었다. 네임을 알게 되면 같은 성을 가진 사람만 보아도 뒤를 돌아보게 된다. 조씨는 흔한 편이어서 그래도 많이 사마의는 그나마 많이 돌아보는 편이었다. 그만큼 절망이 많다는 뜻이기도 해 좋은 것은 아니었다. 뽁, 입으로 형광펜 뚜껑을 물어 뽑는다. 오늘은 외부 회사와 미팅이 있는 날이다.
악수를 하기 전 먼저 명함을 건넸다. 조태오입니다. 사마의입니다. 귀를 조금 의심하며 건네받은 명함을 확인했다. 조씨였다. 하긴, 사마 씨는 드문 편이니 파트너라면 저 쪽에서 먼저 확인을 했을 것이다. 괜시리 두근거리는 것 같던 심장은 착각으로 인한 과민반응이 분명했다. 회의, 시작하죠.
둘은 덤덤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일 얘기 외에는 나눌 것도 없었다. 일 처리 또한 빨라서 메일 몇 통 오가지도 않았는데 진도가 쭉쭉 빠졌다. 제갈량은 제 담당자와 이야기가 잘 통하지 않는지 심기가 불편한 눈치였다. 주유처럼 내놓고 드러내진 않으니 또 모르는 일이지만. 외근 다녀오겠습니다. 사마의는 회사를 나섰다. 클라이언트의 회사는 지하철을 타고 꽤 가야하는 거리에 있었다. 핸드폰에는 개명을 가능하게 하는 법이 통과 되었다는 뉴스가 헤드라인에 걸려 있었다. 사마의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낭만적인 사람들의 의견은 꽤나 갈리는 모양이었다.
회사에 들자 클라이언트가 반갑잖게 맞아 주었다. 오셨습니까. 회의실은 이 쪽입니다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할 말만 딱 부러지게 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사마의는 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이 지나가며 문득 말했다. 태오야, 좀 더 살갑게 좀 말해 봐. 안녕하십니까. 이번 일, 잘 부탁드립니다. 사마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참, 하고 사내가 명함을 내밀었다. 왕윤. 직급은 클라이언트보다 조금 더 위였다. 선배님. 클라이언트가 조금 타박하듯이 말했다. 감정이 드러나는 말투는 처음이라 사마의는 조금 놀란다. 아, 죄송합니다. 다시 사무적인 말투로 돌아오자 사마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태오, 였던가. 사마의은 부질없이 곱씹었다.
일은 잘 처리 되었다. 회의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단시간에 끝났다. 말이 잘 맞는 사람이어서 다행이었다. 시간을 꽤나 잡아 먹을 것으로 예상해서 외근 후 바로 퇴근하겠다고 이야기를 해 놓고 나왔는데, 그런 이야기가 무색할 정도로 일찍 끝났다. 이대로 회사에 다시 돌아가자니 그것도 꽤나 꼴이 우스우리라.
혹시 식사 하셨습니까? 같이 하실래요?
왕윤이라는 사람의 의례적인 질문을 받아들인 건 그래서였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상대방은 의례적인 질문이 아니었던 게 천운이었다. 평소라면 정중하게 거절하겠지만. 자신의 클라이언트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본래대로라면 거절하겠지만, 자신의 클라이언트가 참여한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반쯤은 접대 같고 반쯤은 모르는 사람끼리의 식사 같은 약속은 그렇게 성립되었다.
식사는 정말 무엇이든 좋았다. 어찌 되었던 밥 한 끼 대강 먹고 나면 딱 퇴근 시간이 될 것이었다. 돌아가면 퇴근 시간이라 고민하고 있었던 사마의에게는 식사가 뭐가 되었던 좋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국밥 나왔습니다. 이렇게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클라이언트와.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다 잘 먹습니다.
사마의는 그렇게 말하며 숟가락들 들었다. 그리곤 흘끗 클라이언트-태오를 바라보았다. 곱게 생기어서 이런 걸 먹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저보다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사마의는 태오를 따라 밥을 말며 생각했다. 식사 자리를 주도한 것은 당연하지만 왕윤이었다. 별 대화 없이 후룩후룩 먹기만 하는 둘에게 왕윤은 이것 저것 질문을 던졌다.
태오, 일은 잘 합니까?
예? 아. 제 생각보다 훨씬 더 잘 해 주시고 있어서. 몇 수 배우고 있습니다.
...과찬 감사 드립니다. 오히려 저야말로 여러모로 배우고 있습니다.
태오의 말에 왕윤은 약간 이채가것으로 끝이리라 사마의는 생각했다. 식당 앞의 흡연구역에서 태오를 만나기 전까지는.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사마의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일부러 냄새도 배지 않게 신경쓰고 있었는데 이런 데에서 클라이언트를 만날 줄은. 꽤나 당혹스러웠다. 태연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 때 문득 태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사마의는 고개를 들었다. 태오가 라이터를 흔들어보였다.
가스가 다 한 것 같아서.
아, 쓰십시오.
감사합니다.
태오가 라이터를 켜고 담배에 불을 당겼다. 눈을 내리깔고, 보일듯 보이지 않는 눈동자에 불길이 비쳤다. 속눈썹이 차양처럼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인사를 하며 태오는 라이터를 내밀었다. 사마의는 조금 얼떨떨하게 라이터를 받아들었다. 말을 건 것은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왕윤, 이라는 분은 가셨습니까?
예? 아. 예. 담배를 피우지 않으셔서요. 어린 딸이 담배 냄새에 약하다고 하셔서... 태오는 말을 흐리게 끝맺었다.
아, 따님이 있으시군요.
예, 올해로 일곱 살인데 미운 시기도 안 찾아 오고 아주 예쁘다고 난리도 아니십니다.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입술이 발갰다. 별 걸 다 보는군, 나도. 사마의는 속으로 짧게 자신을 조소했다. 담배가 거의 끝까지 타들었다. 사마의는 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일은 이제 거의 끝마무리 단계였다. 다시 볼 수도 있겠지만, 이 사람이라면 훌훌 털고 일로써만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사마의는 담뱃재를 털며 눈을 휘어 웃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술 한 잔 하시겠습니까?
태오 씨? 이름을 부른 것은 철저한 고의였다.
-
몸에 좋은 것도 아닌데 통 못 끊겠단 말이죠. 담배도, 술도.
사마의는 낮게 읊조렸다. 태오는 그러게요. 하고 가볍게 대답했다. 바는 깔끔하고 조용했다. 칵테일을 만드는 바텐더도 과한 쇼맨쉽 없이 단정하고 절도있게 음료를 냈다.
오랜만에 오는데 나쁘지 않네요.
오랜만이라니, 무슨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태오가 푹 웃었다. 눈이 조금 휘어졌다. 그것도 꽤 보기 좋아 사마의는 조금 쾌재를 불렀다. 태오가 조금 길게 한숨을 쉬었다. 글쎄요.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대화하기 별로인 모양이었다. 뭐라고 해야하나. 사마의는 술로 목을 축이며 머리를 굴렸다. 태오가 입을 연 것은 그 때였다.
미안합니다.
예?
이용하려고 든 거 같아서 말이죠.
...뭐, 괜찮습니다.
사마의는 새끼 손가락으로 살짝 태오의 손을 건드렸다.
그럼 저도 실례 하나 하겠습니다.
예.
네임이 어떻게 되십니까?
아, 저 네임 없습니다.
플러팅에 돌아온 대답은 한참이나 예상을 비껴있었다. 들어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본것은 처음이었다. 네임이 없는 사람이라니. 가끔, 아주 가끔 이런 사람이 있다고 했다. 이전에는 방송에서 아주 신기하다는듯이 다루기도 했었지만, 소송을 몇번 얻어맞고는 잠잠해졌다고 했다. 사마의의 눈에 비친 이채를 알았는지 태오는 잔을 기울였다.
압니다, 신기한 거.
아니, 굳이 그런 건...
정말 괜찮습니다.
해명이 오히려 무안해졌다. 사마의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태오는 조금, 웃었다.
운명이 없는 건 아닐테니까요. 다만, 운명이었으면 하는 사람이 다른 운명일 때. 좀, 벅차지만. 태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어느 정도는 술기운을 빌어서 한 말인 모양이었다. 어쩐지 잘 웃더라니. 태오를 부축하고 나와서 사마의는 택시를 두 대 잡았다. 집을 몰라 실례한다고 말하며 태오의 지갑을 뒤지자 신분증이 나왔다. 신분증에 쓰여 있는 주소는 꽤나 있는 집안들이 모여 산다는 동네였다. 왜 이런 집안 사람이 이 회사에 다니지? 질문은 짧고도 강한 답을 튀어나오게 했다. 사마의는 긴 숨을 뱉었다. 기사님 xx동이요. 사마의는 문을 조금 거칠게 닫았다. 그리고는 제 택시를 탔다.
-
태오는 눈을 떴다. 약한 두통과 함께 강렬한 갈증이 밀려들었다. 태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비틀 부엌을 향했다. 물 한 잔을 들이키고 나니 그제야 머릿속이 좀 정리가 되었다.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민폐를 끼쳤군, 이었다.
고백해보지도 못했는데 차였다. 제가 딱 그 짝이었다. 아니, 그짝이고자시고가 아니라 그게 제 얘기였다. 네임이 없다는 걸 절절하게 깨달았을 때가 왕윤을 좋아할 때부터였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왕윤은 네임이 있었다. 지금도 부인이라면 죽고 못사는 훌륭한 남편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면, 제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태오는 자신이 영영 그 사람의 마음에는 괜찮은 후배 외에는 다른 꼬리표가 없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달려 보았자, 기억하지 못했던 대학 후배 정도겠지. 그게 전부였다. 그래서 태오는, 욕심을 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다만, 마음이 꼭 결정을 따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네임이 어떻게 되십니까?
보통이라면 상처가 되지 않을 말이 유독 아프게 들렸던 건 왜였을까. 태오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알람이 안방에서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출근 준비를 해야할 시간이었다. 태오는 깊은 숨을 쉬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
테오는 마지막 메일의 송신 화면을 확인하고 문자를 넣었다. 방금 메일 보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답장은 금세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이 사람은 일처리가 나랑 잘 맞는단 말이지. 태오는 뻣뻣한 어깨를 마저 스트레칭 했다. 태오야 일 끝났냐. 이제 퇴근해야지. 왕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 선배님. 곧 갈게요. 이야기 하면서도 태오는 웃을 수 없었다. 예전에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좋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었다. 끔찍한 자기 고문. 이성과 감정의 충돌은 태오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냥, 바라보고 싶었을 뿐인데. 자신의 감정에 태오는 어느 순간부터 진저리를 쳤다. 엘레베이터가 층계에 도착했다. 퇴근 시간을 좀 비꼈다고 사람이 없는 엘리베이터에는 왕윤과 태오 둘 뿐이었다.
선배님.
충동은 꽤나 갑작스러웠다. 모든 걸 파탄내고 싶다거나, 이상한 마음을 먹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갑작스레, 저도 모르게 입에서 툭, 부름이 던져졌다. 핸드폰을 보고 있던 왕윤이 고개를 들었다. 태오는 한 번 더 선배님, 저. 하고 입을 떼었다.
태오야.
그러나 왕윤이 빨랐다. 웃는 얼굴은 다정했지만 그뿐이었다. 왕윤은 고개를 젓지도, 더 말하지도 않았다. 그냥,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잔인하게도.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안녕히, 가시라고요.
어 그래. 너도 잘 가라.
태오는 잠시 엘리베이터 앞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후, 하고 입김을 불자 하얗게 서렸다. 볼이 찼다.
얘기는 좀 하게 해 주시지. 태오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며칠 후 태오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예정되어 있던 일이었다. 최소한 차여서 충동적으로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계획해 온 것이었다. 모든 걸 묻자고. 부모님은 말했다. 마더컴 컴퍼니의 아들로써, 이제는 돌아오라고. 태오는 거기에 응했다. 부모님은 마음에 들지 않는 태오의 신분을 깨끗하게 세탁하기 위해 개명까지 진행했다. 태오는 흙먼지를 털듯 회사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왕윤은 집안 사정이라는 태오의 말에, 잘 지내라며 어깨를 두드려 준 것이 다였다. 오히려 왕윤과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런 거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 판이었는데도. 하긴, 그러니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 사람이 알아챈 거겠지. 태오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들, 안녕히 계십시오. 환송회는 제대로 술자리도 갖지 않고 파했다.
그날 저녁 태오는 부모님께 개명이 통과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조조. 영웅의 이름이었다.
-
그날따라 회사가 어수선했다. 신입 사원이 들어온다고 해 막내들이 들뜨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분위기 전체가 풍선마냥 부푼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막 도착한 주유도 사적인 대화를 일절 삼가는 제갈량도 사정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여서 사마의는 그저 그 상황을 싫어할 밖에 도리가 없었다. 팀장이 들어와 헛기침을 할 때까지 분위기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노크 소리가 들리자 다들 미어캣이라도 된 양 파티션 너머로 무슨 일이 생기는지 고개를 빼들었다.
오늘 신입이 왔습니다. 조조 씨, 인사.
사마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조조?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 이름이 조조? 팀장의 등 뒤에 서 새로 들어온 사원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익숙한 얼굴이 시야를 강타했다. 길다란 속눈썹, 낮게 깔리던 목소리. 고운 입술이 갈라져 소리를 내었다.
조, ...조조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짝짝짝. 어색한 박수 소리가 사무실을 메웠다. 사마의는 기가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태오씨?
-
등이 욱신욱신 쑤셔왔다. 있었던 일이 아닌지라 조조는 병원을 가 보아야 하나 미간을 찌푸렸다. 일단 당장 일주일은 무리일텐데, 하고 가늠하는데 똑똑 파티션에서 노크소리가 났다. 조조는 고개를 들었다. 사마의가 서 있었다.
아, 사마의 씨.
담배 한 대 괜찮으십니까.
조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명입니까?
예?
사마의는 담뱃재를 털었다. 입에 대지도 않은 담배에서는 연기가 잘도 피어올랐다.
태오씨... 라고 말씀 드려도 되려나요. 원래는, 아 혹시 그 쪽이 가명이신가요?
아, 아닙니다.
마더컴 컴퍼니로 직장을 옮기면서 혹시나 이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마더컴은 큰 회사였다.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지 않으면 만나는 것은 커녕 얘기조차 듣기 쉽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 그것도 상사와 부하 관계로. 높은 상사가 친근하게 담배 태우자고 말을 했으니 생각해 보면 사무실이 시끄러울 것이었다. 조조는 깊게 담배를 빨아들였다.
둘 다 본명입니다. 개명을... 했거든요.
아. 그렇군요.
잠시 잠깐 흡연실에 침묵이 흘렀다. 생각이 둔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담배 하나가 줄어드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마의가 입을 열었다.
태오 씨.
예?
아, 이렇게 불러도 될까요.
...아뇨. 그냥 조조라고 불러 주십시오.
조조는 짧게 말했다. 사마의가 빙그레 웃었다.
그럼 조조 씨.
...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사수가 될 것 같으니까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사마의는 아직 길게 남아있는 담배를 비벼 껐다. 매캐한 담배 냄새를 맡으며 눈을 휘어 웃었다. 영웅을 구워 삶는 책사가 된 기분이었다.
사수라고는 하지만 가르칠 것은 그닥 없었다. 워낙에 일을 잘 하는 사람이기도 했고, 말이 신입이었지 경력자니까. 약간 달라진 보안, 제출해야 하는 사람, 그런 것들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사마의는 흘끗 조조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개명이라. 익숙치 않았다. 개명한 이름도 본명이라고는 하지만 그게 네임과 관련이 있는지 아닌지도 몰랐다. 사마의는 괜히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저 사람도 애정이 있는 상대방이 있는데, 무례하게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지 싶었다. 일에 집중해야했다.
사마의 씨.
부르는 소리가 들린 건 그 때였다. 제갈량이었다.
이 서류 내일까지 부탁드립니다.
...그러죠.
사마의는 서류를 받아들었다. 파일철을 열자 조조의 사진이 찍혀있는 이력서 같은 종이가 나타났다. 사마의는 후닥닥 파일을 덮었다. 제갈량...! 사마의는 잇사이로 이름을 씹으며 파일철을 다시 펼쳤다. 형광펜으로 하나가 표시가 되어있었다. 아버지 이름. 사장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제갈량의 필체로 한마디가 써 있었다. 고생해라. 비웃는 표정이 눈에 선했다. 어쨌든 왜 그렇게 시끄러웠는지는 알겠군. 사마의는 파일을 덮고 한 쪽으로 치워두었다. 그리고 다시 흘끗, 조조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는 표정이 어째서인지 더 불편해 보였다.
-
태오 씨.
조조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사마의의 얼굴이 눈에 비쳤다.
아, 미안합니다. 조조 씨.
...아뇨. 아뇨, 아뇨.
조조는 거푸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갑작스레 이름이 불려 당황한 것일까. 조조는 마른세수하듯이 얼굴을 비볐다.
일하더라도 저녁 드시고 하셔야죠.
아... 감사합니다.
조조는 의자를 뒤로 조금 밀었다. 눈이 뻑뻑했다. 몇몇 먼저 퇴근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더라니 자신과 사마의를 제외하면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저는 먼저 퇴근하려고 하는데.
아, 저도, 퇴근... 하겠습니다.
조조는 컴퓨터를 종료하고 자켓을 챙겼다. 사마의가 사무실의 불을 껐다.
첫날인데, 괜찮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조조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게 유난히 느린 것 같았다. 아침에는 좀 더 빨랐던 것 같은데. 등이 또다시 욱신욱신 쑤시는 것 같았다. 사마의가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면 식사 하고 가시겠습니까.
예?
어차피 각자 먹을 거 대충 때우고 가죠. 같이.
...예.
둘은 다시 나란히 국밥집에 앉았다. 부글부글 끓는 뚝배기가 앞에 놓여서 조조는 조금 당황해서 입읗 열었다.
국밥, 좋아하시는 줄, 몰랐는데요.
아, 저는 그냥 그렇습니다.
드시죠. 식습니다. 조조는 머뭇머뭇 숟가락을 들었다. 그럼 왜 이걸 또 먹으러 왔지. 천천히 숟가락을 들었다.
태오씨가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사마의가 숟가락을 들며 말했다. 지난 번에 잘 드시길래. 조조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내리깔았다가 말했다.
...저도 썩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아, 미안합니다.
사마의가 입을 열었다.
그럼 다음에는 조조 씨가 좋아하는 걸로 들죠.
그 목소리는 어쩐지 웃는 것 같았다.
-
조조는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등이 이상하게 아팠다. 칼로 찌르는 듯한 아픔에 조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더듬더듬 화장실을 향했다. 불이 켜진 화장실에서 조조는 잠옷 대용으로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는 등을 거울에 비췄다. 새카만 먹이 글자를 아로새기고 있었다. 왜, 왜 하필이면 지금. 왜 하필이면 저 사람이. 조조는 천천히 손으로 반쯤 쓰여진 글씨를 만지작 거렸다. 사마의. 조조는 조금 어색하게 발음했다. 등이 다시 쑤셔와서 조조는 깊고 거친 숨을 쉬었다. 등골에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다. 조조는 상처입은 짐승마냥 웅크려 앉았다. 등이 너무나도 아팠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네임은 거의 온전하게 새겨져 있었다. 조조는 천천히 씻고, 옷을 입고, 계단을 내려갔다. 회사 근처에 어머니 명의의 오피스텔이 있어 그걸 쓰고 있었다. 조조는 멍하니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출근 시간보다 조금 일러서 그런지 로비는 사람 없이 한산했다. 사무실도 사람이 없기는 그닥 다르지 않았다. 한산한 수준이 아니라 아무도 없는 것이 그나마의 차이점이었다. 조조는 비척비척 자기 자리에 가서 앉았다. 척추에서 견갑골까지가 이상하게 예민했다. 등이 의자에 닿는 게, 옷에 덮혀 있는 것이 신경이 쓰였다. 네임. 그놈의 네임. 그게 뭐라고 이리도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지. 조조는 억지로 의자에 등을 기대고 뒤로 몸을 넘기곤 눈을 감았다. 어두운 사무실에서는 종이 냄새가 났다.
조조 씨?
익숙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자 탁 스위치가 눌리는 소리가 나며 불이 켜졌다. 조조는 고개를 돌렸다.
사마의, 씨.
벌써 출근했습니까?
조조는 그냥 고개를 떨구었다.
어제 첫 출근이어서 힘들었을텐데.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조는 대답하고 컴퓨터 전원을 넣었다. 사마의도 정장 자켓을 벗고 컴퓨터를 켰다. 조조는 힐끔 사마의를 보았다. 서류철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사마의. 조조는 입 안에서 발음을 굴렸다. 소울 메이트. 운명의 짝. 부르는 이름은 많았다. 그게 다 무어라고. 노네임이었던 태오는 조소하고 절망했다. 무엇을 다 바쳐도 가질 수 없는 것. 조조는 그것을 손에 넣었다. 손에, 넣었는데.
태오 씨.
-예?
조조는 눈을 깜박였다. 사마의는 긴 숨을 쉬고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커피가 놓여 있었다.
한 잔 하라고요.
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당분간 태오 씨라고 부르겠습니다. 아직 개명하신 이름이 익숙치 않으신 것 같아서.
사마의의 말에 조조는 입술을 깨물었다. 깨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아뇨.
......
익숙해 져야 하니, 그냥 조조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러죠, 조조님.
조조의 눈이 조금 찌푸려졌다. 사마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냥, 조조 씨로-
아뇨. 이게 낫군요. 조조님. 오늘 하루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마의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서류철로 시선을 돌렸다. 조조는 뭐라 할 시간을 놓치고 고개를 돌렸다. 커피는 시럽이 들어가지 않은 라떼였다. 문득, 조조는 등이 아프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
조조님. 이 서류 좀 부탁드립니다. 조조님. 점심 시간입니다. 감사합니다, 조조님. 조조는 조금 저 사수가 짜증난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놀리는 거라 말하기엔 부르는 얼굴이 꽤나 진지해서 더 열통이 터졌다. 다른 사람들까지 조조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해서 더욱더. 빨리 퇴근했으면 좋겠는데. 유독 오늘따라 피곤함이 더했다. 하지만 오늘 신입사원 환영회가 있어서 퇴근이 일러진다고 바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조조님이라고 부르는 생각이 너무 빤했다. 부모님께 닿는 줄이라고 생각하겠지. 자신은 그렇게 될 생각이 없었다. 역으로 닿지 못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었다. 조조는 서류를 넘겼다.
조조님. 사수가 부르는 소리에 조조는 고개를 들었다. 사수가 빙긋 웃었다. 퇴근 시간이고, 환영회가 있습니다. 가시죠. 조조는 예, 대답하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마의는 의자를 수월하게 빼라는 듯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조조는 그런 사마의를 흘끗 보고는 최대한 무시하려 노력했다. 이제부터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조조는 그렇게 곱씹었다.
환영회는 조촐하지는 않았지만 조용했다. 왁자지껄하게 이야기를 한다기보다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가까웠다. 술도 첫 건배를 제외하면 들어오는 것이 없다시피 했다. 괜찮은 분위기네. 조조는 약간 알딸딸한 머리로 생각했다. 나름 술은 잘 마시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옆자리에 앉은 사마의는 자신보다 더했다. 조조는 잔을 내려놓았다.
괜찮으십니까, 조조님.
...괜찮습니다.
조조는 눈을 깜박였다. 사마의가 다시 말했다.
슬슬 파해가는 것 같은데, 택시를 불러드릴까요.
아뇨, 제가, 하겠습니다.
조조님.
괜찮습니다.
하나 둘 씩 사람들이 일어났다. 조조도 그 틈에 섞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택시는 금방 오지 않았다. 오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잡아 타고 가기가 일쑤였다. 조조는 핸드폰을 꾹꾹 눌러 콜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잡히지가 않았다. 곤란한데. 낮에 비해 찬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조님. 조조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웃음기 없는 발음이 한 번 더 조조를 불렀다.
조조님.
조조는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안 부르시면 안 됩니까.
......
어차피 저희 부모님과는 썩 사이가 좋지 않아서, 떨어지는 건 없을 겁니다. 여기로 온 것도 어느 정도는 체면 때문이고요.
조조님.
사마의가 빙긋 웃었다. 조조는 그 웃음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자신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또 무엇이.
조조님.
사마의가 앞으로 한 걸음 걸어 나왔다. 조조는 뒤로 물러설 뻔한 것을 참아내었다. 사마의가 눈을 휘어 웃었다.
저는 그저, 기다리는 겁니다.
무엇을? 조조의 머리가 의문을 토했다. 무얼 기다리는 거지? 나에게서? 왜? 사마의가 팔을 뻗었다. 조조는 어째서인지 질끈 눈을 감았다. 등 뒤에서 차가 서는 소리가 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조조님. 부디 살펴가시길.
-
피차 감정이라는 게 상관이 없다면 우리는 왜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가.
기다린다는 것은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조조는 집에 도착한 후에야 그렇게 정의 내릴 수 있었다. 그럼 원하는 것을 얻으면 금방 떠나가겠지. 문제는 상대가 뭘 원하는지 모른다는 데에 있었다. 사마의는, 만난 지 얼마 안 된 탓일수도 있으나, 통 알기 어려웠다. 자신에게서 무엇을 원하기에 이다지도 사람을 귀찮게 구는 것인지. 등 뒤가 욱신욱신 저려와 조조는 왼손으로 등을 더듬었다. 눈을 휘어 웃던 것이 떠올랐다. 선배. 태오는 뇌까렸다. 이게 다 제가 잘못해서인 건가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리고 아마 눈 앞에 선배가 있더라도 마찬가지리라. 조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이 왔다.
신입으로 들어왔다지만 언제까지 사원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니니. 그러게 이사로 들어오라니까. 전화가 부모님의 목소리를 토했다. 조조는 말 없이 그들의 불평을 감내했다. 그렇다고 마음마저 편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조조는 담배에 불을 당겼다. 문이 열렸다.
조조님. 여기 계셨군요.
사마의였다. 조조는 한숨처럼 담배연기를 뱉었다. 요즘 들어 꿈자리도 사나운데. 조조는 몽롱하게 생각했다.
오늘 오후 외근입니다. 알고 있겠지만.
아.
조조는 짦게 탄성을 토했다. 알겠습니다. 어쩐지 웅얼거리는 대답이 된것 같아 조조는 못내 찝찝해졌다. 사마의가 픽 웃으며 제 담배에 불을 당겼다.
이전 회사로 가야 하니 불편하실 건 알고 있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선배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조조는 들뜨는 것을 진정하기 위해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그런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마의입니다. 이쪽은, 아시겠지만, 조조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 회사의 선배들이 수군거리는 게 들렸다. 조조는 그 소리를 무시하며 파티션 사이사이의 사람 얼굴들을 뒤졌다. 왕윤의 얼굴이 없었다. 잠깐 어디 가셨나. 조조는 실망감을 감추려 노력하며 회의실을 향했다.
회의는 생각보다 난항이었다. 원하는 바를 분명하게 전달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 안 맞고 빠진 부분이 있었다.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회의를 중단시킨 것은 사마의였다. 좀 쉬었다 하죠. 다들 그 말에 수긍했는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조는 흡연실 쪽을 향하는 선배 하나를 급히 잡았다.
저, 죄송합니다만.
어?
왕윤 선배는, 어디에.
어 못 들었, 아니, 못 들으셨습니까?
예?
이민 간다는 거 같던데요.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가지런한 카드 묶음을 바닥에 흐트러트린 것 같았다. 줍고, 또 주워서 묶음으로 두려고 해도 자꾸 손에서 빠져나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조조는 얼음도 타지 않은 작은 샷잔을 들이켰다. 옆에 앉은 사마의가 못마땅하게 말했다.
조조 님, 진정하십시오. 내일 출근도 해야 한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럼,
알고 있었습니다.
조조는 양 손바닥으로 양 눈을 가렸다. 손바닥이 축축하게 차올랐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게 왜 그렇게 지독한지. 문득 뭔가가 오른 손목에 감겼다. 손바닥이 얼굴에서 떼어져 오른쪽으로 뻗어졌다. 사마의가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모르시는 것 같군요.
조조는 주먹을 꾹 쥐었다. 사마의가 짧게 웃었다.
한 대 치시는 것도 좋은 생각이죠.
......
여기가 아니라면 더더욱이요.
손의 힘이 풀렸다. 웃기지도 않았지만 괜히 눈물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사마의는 손바닥에 난 손톱 자국을 보고 혀를 한 번 찼다. 이 사람은 무엇이기에 왜 나에게 이러는 것인지. 조조는 사마의를 바라보았다. 넘긴 머리 군데군데에 붉은 머리칼이 섞여있었다. 사마의가 잡고 있는 조조 손의 손가락을 하나 하나 폈다. 조조는 그것을 바라보다, 문득 입을 열었다.
-네임이, 어떻게 되십니까.
사마의는 고개는 들지않고 눈만 위로 올려 조조를 보았다. 그리고는 픽 웃었다. 사마의는 잡고있는 조조의 손을 제 얼굴까지 끌어올렸다. 엄지 손가락 끝에 부드러운 살이 닿았다.
글쎄요.
쪽, 하고 소리가 났다.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마의가 즐거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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