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2015년 글 백업입니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실제 인물, 사건, 단체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도시에 도착하기까지 꼬박 닷새가 더 걸렸다. 사흘이면 온다던 거리가 줄지를 않아서 갤리는 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깨어있는 것도 아닌 흐리멍텅한 밤을 보냈다. 마지막 밤에 민호는 적당한 보금자리를 찾지 못하여 바싹 마른 나무 아래에서 둘 다 잠을 청했다. 비가 온 지 나흘밖에 지나지 않아서인지 새싹이 조금씩 움트고 있었다. 새싹이라고 하기엔 많이 자란 것도 있었지만, 어쨌건. 다리 뻗을 장소를 위해 새싹들을 옆으로 치우고 다음 날 아침 노랗게 말라있는 싹을 보며 길을 떠났다. 여섯 번째 밤이 되어서야 둘은 간신히 성문 근처에 다다를 수 있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 간신히 문 안으로 들어선 둘은 일단 여관방을 하나 잡았다. 둘로 가르니 얼추 금액이 맞아서 둘은 작은 방에서 칼잠을 잤다. 새벽부터 수레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 문득문득 잠이 깨었다.
소도시라고는 하지만 도시는 넓은 편이었다. 열 몇 가구가 넘지 않는 시골 마을에서 지내다 온 갤리에게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사람이 많았다. 상설 시장이 열린다는 것 자체부터가 갤리를 흥분시켰다. 민호는 사제복을 치워버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너덜너덜한 모포에 감싸 가방에 쟁였다. 더 큰 도시로 이동하는 중에 땔감으로 써야지. 갤리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도시에는 사원이 몇 더 있었다. 원래 살던 마을과 같은 신을 모시는 신전도 있었지만, 다른 신에게 경배를 올리는 신전도 있었다. 민호는 그 중에서 가장 큰 신전을 향했다. 문이 높은 지붕 안쪽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줄은 그늘 밖 한참 멀리까지 늘어서 있었다. 나오는 사람도 많았지만 들어가는 사람도 많았다. 처음 보는 양식의 건물에 어정쩡하게 민호를 따라온 갤리는 기둥을 깎은 모양부터 지붕을 얹는 방법까지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민호는 욕설을 몇 번 하고 나서야 갤리의 주의를 끌고 올 수 있었다.
"들어가서 새로 세례를 받을 거야."
"뭐?"
"개종한다고. 신분 세탁 한다고 했잖아."
다른 종교로 갈아타면 이름 바꿀 수 있으니까. 다른 종교로 바꿀 수도 있구나. 갤리는 얼떨떨하게 생각했다. 마을에서는 대를 내려오며 모두가 한 사원에 다녔었다. 글을 아는 사람도 손에 꼽힐 수준이다. 종교가 다른 게 있다는 것도 안 지 얼마 되지 않는 참에 알 리가 없는 노릇이긴 했다.
날은 더웠고 시간은 느렸다. 새벽부터 왔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사람이 많아서인지 근처에는 이래저래 물건을 파는 상점이 늘어져 있었다. 간단한 식료품을 파는 좌판도 있었고, 사원에서 취급하는 듯 크기만 다른 이런 저런 조각상을 파는 곳도 있었다. 문득 갤리는 등에 지고 있던 가방을 뒤졌다. 식료품이 거의 바닥나 있었다. 사흘을 예상하고 출발했으나 엿새가 걸렸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해가 중천에 뜰 때에서야 간신히 그늘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아 문 안으로 들어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꽤나 남아있어 보였다. 갤리는 벽화를 살피고 있는 민호를 보았다. 갤리는 가방에서 돈주머니만을 꺼내 내려놓고 좌판을 향했다.
좌판을 벌인 노파에게서 딱딱한 빵과 밀가루, 육포, 말린 과일을 조금 사서 갤리는 자리로 돌아왔다. 벽화라고 생각한 것은 꼼꼼히 양각해 둔 조각이었다. 뭔가를 기억하려는 듯 넓은 벽면 가득히 새겨둔 조각 밑에는 같이 조각해 둔 글자가 빽빽이 쓰여 있었다. 민호는 그것을 무언가에 홀린 듯이 읽고 있었다. 멀리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할머님? 정신 차리세요? 앞선 사람들이 벽을 따라 이동했다. 갤리는 민호의 어깨를 두드렸다.정신을 차린 민호가 앞으로 나아갔다.
멈춰 섰다 앞으로 나가기를 몇 번 반복하자 벽에 새겨져 있던 조각이 사라지고 판판한 벽면이 드러났다. 민호는 말이 없었다. 황무지에서도 별 다를 바는 없었지만 앞뒤로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침묵을 견디자니 전에 없이 어색했다. 민호가 뭔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갤리는 다시 가방을 등에 지고 기다렸다. 문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갤리와 민호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은 향을 자욱하게 피워 놓았는지 독한 향기와 연기가 정신을 어찔하게 만들었다. 갤리는 기침을 몇 번 하고는 메인 목을 가다듬었다.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자 사제가 불을 다듬으며 뭔가를 불 속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민호는 사제의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갤리는 민호를 따라 엉거주춤하게 옆에 앉았다. 불에서 재를 긁어내던 사제가 고개도 들지 않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왔는가."
"개종을 하러 왔습니다."
"호오."
민호가 말을 건넸지만 사제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민호는 그리고, 하고 입을 계속 열었다. 갤리는 매운 연기에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뭔가 또 물을 게 있나?
"악마에 대해 알고 싶어서."
사제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갤리는 고개를 돌려 민호를 바라보았다. 민호의 얼굴은 잔뜩 굳어있었다. 늙고 지친 것처럼 보이는 사제가 바람 빠진 웃음 소리를 내었다.
"바깥의 벽화에는 전 종교적으로 마지막 악마 사냥이 있은 지 백 년이 되어간다고 써 있더군요. 실제로 저도 태어나서 악마 사냥을 목격한 것은 딱 한 번이고."
"보긴 봤다는 소리군."
민호가 입을 다물었다. 사제는 다시 한 번 불 안에 뭔가를 던져넣고 재를 긁어냈다. 불이 노랗게 타올랐다. 갤리는 민호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백 년? 분명히 자신의 기억 한 켠에 남아있는 것은 또 다른 악마 사냥이었고, 갤리는 이제 간신히 스물을 넘었다. 그런데 백 년이라니? 사제가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것 같은 헛기침을 했다.
"악마가 문제 시 되는 시대가 지났으니 그런 게지."
"따로 그런 시대가 있습니까."
"왜 아니겠나."
화르르 불길이 올랐다. 사제가 굽히고 있던 허리를 폈다. 철로 된 부지깽이로 사제는 잿더미를 판판하게 폈다. 회색의 고운 재에 코가 매웠다.
"악마는 애매한 때에만 문제가 되지. 정착해 사는 사람들은 많지도 적지도 않고, 다른 데에 비해서 다니는 사람도 많지도 적지도 않고."
그리고 사제는 몇몇 무늬를 재에 써 넣었다. 글자였다. 갤리는 얼떨떨하게 글자들을 바라보았다. 민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사제가 입을 열었다.
"시간."
"악마는 배정 된 시간이 없어. 인간은 약속 된 시간이 있지만 악마는 먹고, 쉬고, 자라고, 그 모든 걸 할 만한 시간이 없지. 다른 사람에게 시간을 얻어서 그 시간으로 삶을 살아가는 게야."
악마 혼자서만 있으면 혼수 상태 비슷하게 되어 모든 활동을 멈추지. 죽은 것과 비슷해. 악마와 한 사람이 있으면 시간은 반으로 나뉘고, 두 사람이 있으면 삼 분의 이 씩 누리고, 세 사람이 있으면 사분지 삼... 오가는 사람도 없는 작고 폐쇄된 마을에서는 다들 시간이 동일하게 흘러가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 도시가 커지면 잃는 양이 적어서 시간이 줄어 든 걸 눈치 챌 수도 없고. 그러나 그런 어중간한 곳에서는 민감해지는 게야. 외부인이 있으니 시간이 줄어 든 걸 눈치 챌 수도 있고. 그저 살아갈 뿐인 걸 몰아 세우는 게지. 사원은 거기에서 이득을 보기 위해 애를 쓰고. 갤리는 멈춘 것 같은 머리로 사제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갤리는 그렇게까지 멍청하지는 않다는 데에 항상 자부심을 느꼈다. 사흘이 걸리는 거리는 엿새가 걸렸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진 화형 직전 시간에 갤리는 깨닫지 못하는 잠에 빠졌다. 노랗게 말라 죽은 풀꽃 더미. 쓰러진 노인.
"의미는 없지. 의미는 없어."
사제가 의자 옆에 기대어 있는 커다란 집게를 들어 불 속을 뒤적였다. 악마가 나쁜 게 아니니까, 의미는 없지. 불길이 죽지 않은 숯 덩어리가 갤리의 눈앞으로 올라왔다.
"세례나 하세나."
갤리는 눈을 감았다.
-
사원 밖으로 나왔을 때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민호는 어깨에 앉은 재를 털며 여관방을 향했다. 갤리는 말을 줄였다. 자꾸만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여관 방 아래에 붙어있는 식당에서 스프와 빵으로 배를 느리게 채우면서 별이 총총히 박혀가는 밤하늘을 보았다. 잠들기 직전까지도 해가 뜨지 않았다.
민호가 설핏 잠을 깨었을 때 이인실의 한 켠은 완전히 비어있었다. 아니, 완전히는 아니었다. 작달막한 주머니가 하나 놓여있었다. 밀가루 약간, 딱딱한 빵과 육포, 말린 과일 약간. 민호는 주머니 속을 잠시 바라보다 가방 안으로 던져 넣었다. 찬 물로 세수를 하고 길을 나서자 완전히 동이 트지 않아 하현달이 구석에 걸려있었다. 어디로 가던 바깥은 대부분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다. 어디로 가던 갤리는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었다. 상단을 따라갔을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었지만 곧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 되었다.
하현달이니만큼 오늘은 낮달이 뜰 것이었다. 밤달이든 낮달이든 민호에게는 별 다를 것이 없었다. 이상하고 자시고 이전에 그저 달이었으니. 민호는 갤리의 뒤통수를 한 번 후려갈기지라도 않으면 성이 차지 않을 것 같았다. 새벽 공기가 찼다.
'2.5D > 메이즈러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뉴트갤리] If I were not (1) (1) | 2023.01.26 |
---|---|
[뉴트갤리] 신성 전야제 Hollow eve (2) | 2023.01.26 |
[민호갤리] 낮달에 관하여 (中) (1) | 2023.01.26 |
[민호갤리] 낮달에 관하여 (上) (0) | 2023.01.25 |
[뉴트갤리] Alive (0) | 2023.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