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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글 백업입니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실재하는 인물, 사건, 단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갤리는 천애고아였다. 이렇게 말하니 약간은 우울한 감이 들지만, 어쨌든 이 이야기는 갤리도 그다지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이었다. 갤리는 천애고아였다.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다 흘러 들어와 도제가 없던 목수가 어쩔 수 없이 거두게 된 아이였다. 몇 대가 한 곳에 정착해서 사는 이 동네에서는 분명한 이방인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나라는 유랑민이 한없이 드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마을 밖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종종 잊어버리곤 했다. 교체되는 사람은 기껏해야 몇십 년에 한 번 죽은 사제를 대신해 신전의 사제가 새로 파견되거나 역시 대를 교체해 세금을 거두러 오는 마을 영주가 다였다. 십여 년이 넘는 세월을 마을에서만 보냈지만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갤리를 서먹하게 대했다. 갤리는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었다. 어릴 적과 달리 키도 덩치도 커져서 어린 아이들의 따돌림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에 족했다. 목수가 하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반드시 목수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었기에 보수는 넉넉했다. 갤리는 조용히 지냈다. 낮에는 홀로 나무 세공을 연습하고 집안일을 했다. 요리는 잘 하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을의 유일한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었다. 평범한 나날이었다.
한밤중에 횃불을 든 사람들의 무리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지냈다.
흰 옷을 입은 사제가 해를 양각한 은으로 된 대야에 담겨있는 물에 손을 적셨다. 병에 물을 채우는지 거품이 뽀글뽀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갤리는 몸을 뒤틀었다. 두툼한 줄에 묶여있는 손은 피가 통하지 않아서 저렸고 억지로 꿇릴 때 부딪힌 무릎도 아팠다. 잘근잘근 씹어서 침 범벅이 된 재갈은 숨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양 옆에 두 줄로 늘어선 검은 옷을 입은 사제들이 촛불, 단검, 잔 따위를 들고 있었다. 사원 가까이는 아주 어렸을 때 밥을 얻어먹으러 배회한 것을 제외하면 특별히 가까이 간 적도 없었다. 하얀 옷을 입은 사제가 뒤로 돌아 유리로 된 물병을 들어올렸다.
"신의 은총으로 우리 안의 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악이라니? 사원 근처에도 가 본 적은 없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었다. 악마를 퇴치한다는 소리였다. 악마는 개뿔, 웃기고 있네. 갤리는 한 번 더 몸을 뒤틀었다. 억지로 누명을 씌우는 거라는 걸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악마라니! 들어와서 자신이 한 나쁜 일은 없다시피 한데! 죄인의 포승을 풀라. 흰 옷을 입은 사제가 고개를 돌려 단검을 쥔 사제에게 명령했다. 단검을 쥔 두건을 뒤집어 쓴 사제가 가까이 다가왔다. 갤리는 덜덜 떨며 뒤로 물러나기 위해 애를 썼다. 사제가 갤리의 뒤로 돌아갔다. 손등에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귓가로 입이 내려왔다.
-문득,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하고, 약간 증오스럽지만, 그 뿐으로 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변성기가 완전히 지나고 자신의 키가 이 놈의 키를 추월한 후로 본 적이 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갤리는 침으로 푹 젖은 재갈을 깨물었다.
단검을 든 사제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사제가 웅얼웅얼 기도문을 읊으며 물병을 들고 앞으로 다가왔다. 갤리는 눈을 감았다.
/물 맞으면 죽은 척 해 병신아./
한 번 걸어볼 만은 한 도박이었다.
-
갤리는 뺨을 맞고 정신을 차렸다. 얼얼하게 부풀어 오른 뺨을 붙들고 갤리는 흐릿한 시야를 되돌리기 위해 애를 썼다. 방금 눈을 떠서 그런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갤리는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민호?"
"드디어 정신 차렸군, 이 또라이가."
그 와중에 잠들 생각이 들어? 미친 거 아냐, 이거. 갤리는 눈을 깜박였다. 후드는 벗었지만 여전히 사제복을 입고 있는 민호가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주먹으로 때리지는 않았는지 입 안의 이에는 비어 있는 데가 없었다. 성질을 죽이는 법은 배운 모양이었다. 예전에도 이가 흔들릴 뻔 했는데 더 튼튼해진 지금이야 더 세지면 모를까 그리 다를 리도 없었다. 갤리는 몸을 일으켰다. 주변은 안개가 뿌옇게 끼어 있었다. 덜 깨서 시야가 뿌옇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근처에는 장작이 잔뜩 쌓여있었다. 화형, 혹은 화장장이었다. 민호는 장작 몇 개를 툭툭 발로 차더니 꽤나 튼튼하게 꼬매 만든 것 같은 가방을 두 개 꺼냈다. 하나가 갤리의 가슴팍에 퍽 부딪혔다. 갤리는 억, 하고 고개를 숙였다. 무게가 농담이 아니라 나무 한 그루만 했다. 민호는 가방을 둘러메었다. 그리고 단검으로 발목까지 내려오는 사제복을 무릎 위에서 찢었다. 긴 바지도 복사뼈가 있는 부분까지 잘라내었다. 민호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갤리를 보며 혀를 찼다.
"얼른 일어나. 5분 있으면 불 붙이기로 한 시간이야."
"뭐- 뭐."
"살려면 마을 밖으로 튀어야지 병신아."
"뭐?"
민호가 짜증을 부렸다 이게 크더니 할 수 있는 말이 뭐 밖에 없어졌나. 갤리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 우리 집은. 아직 납품 기한이,"
민호는 한 손으로 갤리의 멱살을 잡았다. 그렇게 가벼운 무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갤리는 민호의 얼굴 쪽으로 주욱 딸려 올라갔다. 아. 갤리는 기억을 돌이켰다. 이러고 나면 꼭 뺨에 주먹이 날아왔다. 갤리는 얼굴을 뒤로 빼려고 반항을 했다. 민호는 짜증스레 그르렁거리는 가만히 있으라고 협박을 했다.
"너 악마로 몰렸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 네 집은 이미 털렸어, 멍청아. 돈이 많이 나온다고 입이 찢어지려고 하던데. 사제라고는 하지만 죄다 도둑놈이라고."
"그,"
"내가 몇 개 빼돌려서 가방 싸 놨으니까, 닥치고, 들고, 뛰어. 장작에 불 붙여야 하니까."
장작에 불? 민호는 갤리의 멱살을 놓고 장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장작 더미 위에는 사람 하나를 묶어 둘 수 있을 만큼 긴 장대가 하나 놓여있었다. 민호는 간신히 잘려나가지 않은 주머니를 뒤져서 성냥을 꺼내 갈색 면에 대고 빠르게 그었다. 치이익, 하고 불 붙는 소리가 났다. 아주 조그만 불씨를 어안이 벙벙하게 갤리는 바라보았다. 민호는 성냥을 장작에 던져 넣었다. 밑에 석탄을 깔아두었는지 매캐한 연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민호는 옆에 있던 굵은 줄까지 타버리도록 근처에 던져 놓고는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갤리는 입을 뻐끔거렸다.
"이제 공식적으로 넌 뒈진 사람이거든?"
안 가냐? 민호가 문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갤리는 멍하니 있다가 주섬주섬 가방을 들었다. 무엇이 들어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뭔가 이것저것 도망 생활에 필요한 게 들어있는 건 확실했다. 메고 나자 어깨가 뻐근할 지경이었다. 갤리는 고개를 들었다. 신을 고쳐 신는지 민호가 한 쪽 다리를 벽에 올리고 손을 신발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갤리는 문득 떠오르는 의문을 되는 대로 내뱉었다.
"민호."
"왜, 똘추야."
"너는 왜 가려고 하는 건데, 이 똘추 새꺄."
울컥하는 마음에 되는 대로 내뱉었다가 갤리는 문득 말을 삼켰어야 하는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어렸을 적, 갤리의 따돌림을 주도한 것은 민호였다. 다들 아이가 적어도 셋씩은 있는 마을에서 어머니가 몸이 약한 민호만 외동이었다. 부모는 민호를 아주 예뻐했고, 민호는 거칠 것 없고 당당한 아이로 자랐다. 셋이서 갈라 먹을 것을 혼자 독차지해서인지 남자 아이 중에서 가장 큰 아이기도 했다. 그의 완벽하기까지 한 반대항인데다 민호와 별로 친하지도 않은 갤리가 눈에 거슬린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다른 애들이야, 뒷배도 없고 어른들도 암암리에 수군거리는 아이를 괴롭히는 게 재미있던 게 아닐까, 정도로 밖에 추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목수의 도제로 그럭저럭 정착하게 되면서 나타난 갤리의 본 성격도 만만한 것은 아니어서, 일방적으로 얻어맞는다 할 지라도 말 만큼은 대등하게 겨루었었다. 욕 한 마디를 들으면 욕 한 마디를 돌려준다. 그 버릇이 지금도 튀어나올 줄이야. 갤리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민호가 다리를 바닥에 내렸다.
"죄인 빼돌린 견습 사제도 살고 싶거든."
민호가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갤리가 뭐라 말해야 할지 잠시 말을 고르는 사이 민호는 다시 턱 끝으로 문을 가리켰다. 뛰어 똘추야. 민호가 먼저 뛰기 시작했다. 갤리는 문 밖을 나가려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따닥 거리는 소리를 내며 오르던 불길에 와지끈, 하고 장작이 무너져 내렸다. 갤리는 다시 앞을 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아주 먼 동쪽에서 동이 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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