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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글 백업입니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실제 인물, 사건, 단체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마을 바깥은 황무지였다. 길 아닌 길을 밟고 이동하다 보면 간간히 여행객이나 사냥꾼을 마주칠 수 있었지만 날이 험해서인지 대부분 얼굴조차 보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혹시 모르기에 물을 반 병 정도 밖에 비우지 못해 목이 탔다. 새벽에 떠날 때 햇무리가 진다 했더니 날이 꾸물꾸물했다. 당장이라도 비가 올 것 마냥 어둑하게 잠긴 구름 사이로 습한 바람이 불었다. 갤리는 피곤에 찌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낮인데도 저녁 무렵처럼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갤리는 앞서가고 있는 민호의 등을 바라보았다. 달리다가 약간 빠르게 걷는 것으로 속도를 줄인 것을 제외하면 특별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갤리는 그제야 자신이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급히 뛰쳐나오느라 물은 것도 없었고 물을 것도 없었다. 일단은 이동이 중요했으니까.
먼 데서부터 천천히 높은 절벽이 가까워왔다. 작은 파도 같은 모양이었던 절벽은 걸음에 따라 슬금슬금 높이를 키웠다. 쏟아질 듯 묵직한 모습을 바라보다 갤리는 민호가 절벽 한 쪽에 자그맣게 뚤린 동굴 입구를 치우는 것을 발견했다. 누군가 일부러 막아두기라도 한 양 얕은 흙더미를 무너뜨리자 자갈과 돌멩이가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민호는 흘러내린 토사를 대충 발로 치워서 툭툭 굴렸다. 한 사람이 지나갈 만한 길과 몇 사람이 들어갈 만한 동굴이 나타났다. 민호는 뒤에 있는 갤리를 확인하듯이 뒤를 돌았다. 갤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옮겼다. 이마에 차고 묵직한 것이 채찍처럼 부딪혔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공기에 완전히 습기가 오르기 직전에 동굴 안에 불을 피울 수 있었다. 사람이 흔히 자고 가는 자리인지 동굴 안에는 태워도 될 만한 잡동사니나 마른 나뭇가지 따위가 들어있었다. 구멍이 숭숭 난 모포 같은 잡다한 물건을 그러모아서 불을 지폈다. 성냥을 태운 민호는 잔해를 없애는 양 불 속에 성냥을 던져 넣었다. 불을 올리다 보니 바깥은 거의 물이 고일 듯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물웅덩이에 빗방울이 부딪히는 것은 농지에서도 보기 힘든 일이었다. 천둥과 번개가 번갈아가며 오는 것을 넋 놓고 보고 있다가 갤리는 문득 제 뱃속에도 천둥이 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먹을 건 좀 있으려나. 가방을 뒤지니 몇 조각 없는 비스킷과 육포, 밀가루 몇 줌이 나왔다. 어떻게 식사를 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자니 민호가 가방을 뒤적여 작은 솥과 걸이를 꺼냈다. 갤리는 밀가루와 비스킷을 넘겼다.
가방 안에는 대략의 행장이라 할 만한 것이 들어있었다. 옷가지, 약간의 먹을 거리, 모포, 세면 도구와 물병, 지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들어있는 돈이 아니라면 분명히 간단한 여행을 하는 정도로 비쳤을 것이다. 농노 중에는 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극도로 적기는 하지만, 여하간. 모은 돈의 일부분만 간신히 남은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당분간의 이동에 불편이 없는 정도는 되었다. 갤리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민호가 멀겋게 끓인 스프를 대충 덜어 놓고 있었다. 솥도 민호의 가방에서 나왔던 걸로 봐서는 대충의 집기는 민호의 가방에 들어있었던 모양이었다. 갤리는 헛기침을 했다. 모르는 사이에 목이 잠겨 있었는지 그릉거리는 소리가 났다. 민호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도시로 가서 신분 세탁하고 빠져야지."
"뭐?"
이래저래 전문적인 용어가 나와서 갤리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민호는 짜증내는 얼굴로 혀를 차고는 스프 그릇을 갤리에게 내밀었다. 갤리는 얼떨결에 그릇을 받아들었다. 민호는 설명하기 귀찮다는 얼굴을 했지만 그래도 입을 열었다.
"도시 가면 모르는 사람이 많으니까 대충 살기 괜찮을 거야. 다른 사람인 척 하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고. 일단 혹시 모르니까 다른 사람인 척 하고 더 큰 도시로 이동할 거라고."
"어, 어어."
"거기는 교단의 힘이 센 편도 아니니까. 종교도 여러 개고, 안 믿는 사람도 많고."
"잘 아나 보다?"
"살다 왔으니까."
갤리는 스프를 후르륵 들이키다 사레에 걸릴 뻔 했다. 민호는 얼굴을 찌푸리며 솥을 갤리에게 조금 비끼도록 치웠다. 마을 밖으로 나갔다 왔다고? 영주가 허가를 해 줬단 말야? 유지도 아닌 집안에서 그러기는 당연히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갤리는 어색하게 뒤통수를 긁으며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민호는 제 몫을 그릇에 담으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인맥이 조금 있었던 데다, 두 분 다 나를 '높으신 분'으로 만드는데 열정적이셨어서. 유학 같은 걸로 한 이 년 다녀왔지."
"어어."
그래서 이런 왔다 갔다 하는 데에 있는 소소한 대피처들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에 들어갔다고 약간 불은 육포 조각이 이에 씹혔다. 그래도 많이 말린 것인지 여전히 딱딱하고 질겼다. 턱이 아플 때까지 질겅질겅 씹고 있는데 스프를 마시다시피 한 민호가 한 그릇을 더 뜨며 말했다.
"오늘 생각한 것 보다 많이 못 왔어. 사흘 거리지만 추격 받을 수도 있으니까 부지런히 가야 해."
"앞으로 이틀 더 가야 한다고?"
"오늘 같이 가면 닷새."
어찌 보면 또 위험한 거리였다. 겨우 사흘 거리라니. 발이 아프게 걸었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많이 오지 못한 것도 이상했다. 하긴 어렸을 때는 몇 날 며칠을 걸어도 사람이 사는 데가 나오지 않아서 고생했던 기억도 있으니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갤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인생에 악마 사냥이 두 번이라니."
"뭐?"
민호의 표정이 기묘하게 바뀌어서 갤리는 급히 말을 더했다. 이상하게 들릴 법도 했다.
"내가 직접 당했다는 게 아니라, 아는 사람이."
민호가 표정을 풀었다가 다시 미간을 지푸렸다. 갤리는 스프를 비우고 한 국자를 더 떠올렸다.
"아주 어렸을 적에, 그렇다고 부모는 아니고, 별 기억은 없는데... 잡혀갔거든. 나보곤 도망가라고 하고. 그 때는 그냥 무서워하면서 울며불며 도망쳤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악마 사냥이 아니었을까 하고. 그러다 마을로 흘러 들어간 거니까 혹시 싶어서."
"별."
민호는 스프를 훌훌 마셔버리곤 솥을 뒤적였다. 대강의 내용물이 사라졌는지 설거지 대용으로 동굴 밖에 비를 잘 맞도록 솥을 한 켠에 세워두곤 민호는 드러누웠다. 갤리는 입맛을 다시곤 똑같이 스프를 훌훌 마시고 그릇을 동굴 밖으로 치운 후에 드러누웠다. 동굴과 밖의 황무지 사이에는 문턱처럼 얕게 해자가 파여있었다.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사용하던 누군가가 파 놓은 모양이었다. 갤리는 물을 받기 위해 물병을 비우고 밖에 물병 또한 세워 두었다. 천둥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습기 찬 흙 냄새와 불이 따닥 거리는 소리가 열기와 함께 끼쳐들었다. 몇 번 뒤척이다 갤리는 문득 떠오른 질문을 민호에게 던졌다.
"근데 네 부모님은?"
너 이렇게 도망 되는 거냐? 잡히면 어쩌려고? 갤리야 남아 있는 것이 제 몸뚱이 밖에 없다지만 민호는 다를 것이었다. 갤리는 벽을 보고 물었다. 저와 정이 있는 것도 뭣도 아닌데 왜 자기 목숨까지 걸면서 떠나는 걸까. 갤리는 못내 궁금했다. 민호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돌아가셨어."
"어."
"납골당에 가셨으니까, 뭐."
네가 모르는 게 이상하지는 않지. 관 짠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덤덤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그 말에 갤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입을 열려고 하다, 다물고는, 다시 고쳐 누웠다. 빗소리가 한껏 시끄러웠다. 모닥불 안으로 장작을 하나 쑤셔 넣자 불길이 화르르 일었다.
발이 욱신욱신 쑤셨다. 먼 거리를 걷느라 다리도 그리 성치 만은 않았고, 배까지 그럭저럭 부르니 눈이 뻑뻑했다. 그러나 정신이 이상하게 멀쩡했다. 뒤에서 민호가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갤리는 잠을 청하기 위해 노력했다. 빗소리가 나서인지 온갖 잡소리가 녹아내렸다.
새벽, 어느 시점에 갤리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눈이 뻑뻑했다. 비가 그쳤는지 빗소리는 많이 줄어있었다. 갤리는 등 뒤에서 시선이 내리 꽂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날카롭지도 둔중하지도 않은 시선이 떨어져 내리는 것에 반응하지 않으려 갤리는 조금 뒤척였다. 억지로 숨을 고르게 하자 시선이 사그라들었다. 뒤에서 돌아눕는지 어쩐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작게 났다. 불은 이미 불씨까지 죽었는지 벽에는 그림자가 지지 않았다. 쌀쌀해지는 날씨에 갤리는 모포를 끌어올리고 뛰는 심장을 잦아들게 하며 다시 잠을 청했다. 해가 뜰 때까지, 둘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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