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2015년 글 백업입니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실제 인물, 사건, 단체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제목을 짓는데 큰 도움을 주신 이비님께 감사드립니다.
*15금입니다.
*매우 깁니다.
삼여지공三餘之功 ; 독서하기 좋은 세 때. 곧, 겨울, 밤, 비오는 날을 말함.
량魎 ; 도깨비 량.
서 푼. 딱 서 푼이 모자랐다. 뭐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비 오는 날에는 장이 서지 않는다. 비 오는 날에만 나다닐 수 있다는 것도 골치다. 덕분에 이 동네에도 교역소 비슷한 게 있기는 한데… 부탁받은 당과까지 주다보니 돌려줄 대금이 딱 서푼이 모자랐다. 큰일인데. 서푼 구하는 거야 일도 아니다만 다음 줄 때까지는 또 한참이 걸린다. 봄에도 가뭄이 드는 바람에 한참을 못 돌아가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게 한 것도 미안한데 이번 서푼도 모자라면 교역소 문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렴.
더 큰 문제는 그 서푼이 모자란 걸 깨달은 게 산골짝에 다 온 시각에서였다는 것이었다. 당장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되는 시점에서 돈이 모자라다니. 뉴트는 혀를 찼다. 다시 교역소에 돌아갔다 오면 밤을 꼴딱 샌다. 샐 뿐이랴, 인세의 납기일을 맞추지 못하게 된다. 저쪽 집에는 돈을 궤짝으로 쌓아놓고 있건만 이제 와서 고민하는 꼬락서니라니 참으로 면이 서지 않았다. 넉넉하게 가져왔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는 소용이 없는 노릇이었다. 어디에서 급전이라도 빌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짐 더미 위에서 손톱으로 두드리며 손가락을 굴리는데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구미호인가? 다음에 올 때 야명주 하나 쥐어준다 약조를 하면 이도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이 될 것이었다. 뉴트는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뉴트는 끌끌 혀를 찼다. 대궐 같은 기와집-구미호들의 취향은 인간 취향에 맞췄는지 다들 하나같이 커다랬다. 아흔 아홉 간이 대수인가 인간의 법에 얽매일 필요도 없는데 백 칸이 넘길 예사로 했다-을 기대하고 왔는데 세 칸이 넘을까 말까한 작은 초가집이 하나 서 있었다. 이렇게 되면 빌리기도 미안해지는데. 아직 방 안에서 옅으나마 불이 드는 것을 보니 집주인이 잠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뉴트는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안에서 그림자가 흔들렸다. 정말 안 자나보다. 뉴트는 소리했다. 주인장 계십니까. 방 안에서 그림자가 한 번 더 흔들렸다. 조금 멈칫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툇마루 앞에 붙은 창호지가 너덜거리는 문이 열렸다.
나온 것은 건장한 사내였다. 얼굴에 자잘하게 주근깨가 뿌려져 있었고 머리는 기르지 않는지-뉴트는 조금 놀랐다-머리에 딱 붙어 짧다랬다. 사냥을 해서 먹고 산다 할 만큼 몸이 좋아보이지는 않았는데 손이 커다랗기는 했다. 부인도 없는지 어깨 너머로 보이는 방은 텅 비어있었다. 희한한 인간일세. 뉴트는 펴지 않은 부채로 입술을 툭툭 두드렸다. 보통은, 이리 살지 않던데.
"길 가는 나그네이오만."
"아… 예."
사내의 얼굴이 떨떠름했다. 그야, 뭐, 어느 날 갑자기 처음 보는 사람이 한밤중에 와서 말을 거는데 누가 달가워할까. 뉴트는 부채를 펴고 공연히 헛기침을 했다.
"미안하오만 혹 서 푼 즈음 빌릴 수 있겠소이까?“
사내의 표정이 희한하게 변했다. 아주 이상한 것을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생전 처음 보는 것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빗발이 약해져서 뉴트는 조금 다급해졌다. 내일이면 갚을 수 있소. 부탁드리오. 사내는 조금 떫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기다리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무방비하다고 할까, 문을 닫지 않아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빛이 환하게 쪼여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남자는 금발을 하고 있었다.
뉴트는, 조금 당황했다. 혹시 돌아가지 못해 밖을 떠도는 도깨비인가? 그늘에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갓을 약간 들어 보기까지 했어도 그래도 그대로였다. 사내는 금발이었다.
"여기."
있쇠다. 우물우물 사내가 말했다. 비 맞기가 싫은지 툇마루 밖으로는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뉴트는 손을 뻗어 돈을 받았다. 짤그랑 짤그랑.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뉴트는 갓을 조금 들어 똑바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이목구비가 다른 사람에 비해 우묵 불룩했다. 정말 이승 사람이 아닐지도 몰랐다. 문이 닫히려고 해서 뉴트는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도깨비요?“
문이 닫히다 말고 문득 멈췄다. 정말 동족인가? 뉴트는 한 번 더 물었다. 댁은, 혹시.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상대방이 대답했다. 아니우. 탁, 소리가 나게 문이 닫혔다.
-
다음날도 비가 내렸다. 물건을 교환하고 대금을 치르는 데에는 당연하지만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도깨비 나라가 좁다고 할 수는 없으나 저 동네는 이 동네보다 이런 저런 힘을 쓰기가 수월했다. 덕분에 다른 물건을 바리바리 쌓아서 뉴트는 다시 산을 나섰다. 약간 피로하기는 하였으나 버틸 만한 것이었다. 뉴트는 휘적휘적 걷다가 문득 돈 서 푼이 생각났다. 허어.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게 미안해졌다. 내일 갚겠소. 분명히 그렇게 약조 했으렸다. 장사꾼은 신용을 먹고 사는 법이다. 물론 인세의 장사꾼과 같다고 말하기엔 자신은 너무 다른 감이 있었으나 어쨌든 장사꾼이라는 족속은 다 비슷비슷하다. 뉴트는 소매를 뒤져 주머니를 꺼냈다. 실로 얽어맨 주둥이를 풀자 안에서 쇠가 쩔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자 넉넉잡아서 닷 푼 정도 갚으면 되겠지. 뉴트는 어제와 똑같이 빛을 따라 산을 올랐다.
한 번 와 보았다고 그나마 익숙한 길을 밟아 올라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칸 초가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 안은 어제에 비해 그리 밝지 않은 감이 있었다. 기름이 얼마 없나? 하긴 다른 사람이 다니기는 그리 쉽지 않은 길목이긴 했다. 도깨비나 다닐까 말까 하지. 동족이 이런 상황에서 살고 있다는 게 뉴트는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본인이야 부정하고 있다만. 혀를 끌끌 차다가 뉴트는 헛기침을 했다. 어흠. 안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주인 계시오. 어제와 같은-나름 같다고 생각하고-말을 꺼내자 문이 열렸다. 사내는 약간, 당황한 것 같았다.
"어제 빌린 돈 서푼 갚으러 왔소이다."
"어."
사내는 머리를 득득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올 줄 몰랐는데. 뉴트는 코웃음이 날 것 같아서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오지 않으면 그게 사기꾼이지 장사꾼인가. 이 도깨비는 뭘 하고 살았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트는 주머니를 거꾸로 뒤집어 흔들었다. 쩔그렁, 쩔그렁. 손에 서 푼이 떨어져 내리고는 곧 멈추었다. 뉴트는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다시 생각하며 주머니를 흔들었지만 나오는 것이 없었다. 맙소사. 엽전이 딱 서푼 뿐이 없었다. 나머지를 죄다 물건으로 바꿔버린 모양이었다. 닷 푼을 갚으려 했는데. 뉴트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인세의 후한 값 따위 저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렇지만 뉴트는 이세계의 체면이라는 것이 무언지 어느 정도는 이미 배웠다. 하고픈 일을 이루지 못했을 때에 느끼는 좌절감은, 도깨비도 알고 있는 일이지만.
"빌려간 서푼이오."
뉴트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엽전을 내밀었다. 어쩐지 영 민망했다. 사내가 빤히 그 손을 바라보다 큰 손을 내밀었다. 서푼이 뉴트의 손바닥에서 아래로 흘러내렸다.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뉴트는 그럼 이만, 하고 어색함을 떨치고 뒤로 돌았다. 그러나 발짝을 떼기 전에, 잠시 말없이 손바닥을 바라보던 사내가 그를 불렀다. 나리.
나리. 어색하면서도 익숙한 호칭이었다. 한성, 벽란도, 나성에서는 익숙하고 저 남자의 목소리로는 어색했다. 사내는 자신을 한 번도 부르거나 높게 취급하지 않았다. 나으리. 기분이 이상했다.
"여기는 산이 깊으요. 밤도 늦었구. 비도 오고 있는데."
방이 서 칸 뿐이 없어 같은 방을 써야하지만, 괘념치 않으신다면 묵고 가시요. 사내가 말했다. 뉴트는 제 복장을 돌아다보았다. 도포는 옅은 옥색이고, 신발은 미투리였다. 곱게 짠 신이긴 했으나 여튼 짚신이었다. 챙이 넓은 갓의 끈에는 호박을 매달아 장식도 해 놓았다. 저잣거리라면 모를까 이 산중을 돌아다니기에는 그리 적당하지 않은 복장이었다는 뜻이었다. 물론, 자신이 돌아다니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지만... 뉴트는 사내를 돌아보았다. 그냥, 똑바른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
산 중의 밤은 시꺼멨다. 방은 한 사람 이 좀 움직이기에 맞았고, 그럴 필요까진 없었지만 사내도 뉴트도 모로 누워 칼잠을 잤다. 서로 등지고 누웠기에 딱히 걸리적거리지는 않았다. 비가 와서 그런지 창호지 너머에서는 개구리 소리만 간간히 들리지 부엉이조차 울지 않았다. 장마가 길면 개구리도 말을 죽이려나.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사내는 숨소리조차 없이 자는지 방 안이 내도록 조용했다. 자신의 동족은 이렇게 깊고, 어둡고, 쓸쓸한 속에서 몇 날을 보낸 것일까. 뉴트는 문득 회의했다.
도깨비는 닭이 홰를 치기 전에 떠나야 이슬을 밟지 않을 수 있다. 뉴트는 갓을 쓰고 옷깃을 여미다가 몸을 돌리지도 않고 계속 자고 있는 사내를 뒤돌아보았다. 마음 한 켠에, 무언가 걸리는 게 있는 것만 같았다.
-
도깨비 나라에서 교역소라 부르는 곳은, 인세에서는 그냥 집이었다. 암암리에 못 구하는 게 없다고 떠도는 집. 야명주를 구한다 치면 손톱만한 것에서 어른 주먹만 한 것까지, 자기를 구한다 치면 중국에서 나온 것은 물론이요 몇 백 년 전의 귀한 자기까지, 서책으로 말하자면 서역의 서적부터 금서까지 그야말로 구할 수 없는 것이 없다고 소리 없이, 그러나 모르는 사람은 없는 그런 곳이었다. 딱 법도만 지켜 구십구 칸의 크기를 가진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지만 집주인은 역마살이 끼었는지 나갔다 돌아오기를 수차례 반복하여 집주인 보기는 삼정승 육판서가 온대도 하늘의 별따기라 하였다. 다녀오고 나면 온갖 신기한 물건이 창고에 새로 채워진다 하였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창고에 온갖 가지 물건을 채워 넣던 집주인이 문득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장부를 정리하던 하인이 흘끗 올려다보았다.
"지금 엽전이 몇 냥이 있느냐."
"만 냥 조금 넘게 있습니다."
"전대에 삼천 냥을 챙기라 일러라. 동래에 다녀와야겠다."
또 역마살이 끼었나. 하인은 표정 변화도 없이 짐을 부리던 하인에게 말을 전했다. 잠시 곰방대를 물었던 집주인이 한 번 더 아, 하는 소리를 내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리고 따로 주머니에 창호지로 쓸만한 종이 한 뭇하고 서 푼 챙기라 일러라.“
-
"서푼 갚으러 왔소."
사내가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제 갚으셨잖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어제 빌려가지 아니하였소이까."
어제 내일 갚는다 한 즉 오늘 서푼 갚으러 예까지 왔는데 야박하긴. 사내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뉴트는 뻔뻔하기 짝이 없는 낯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팔 아프니 서 푼 후딱 받고 들어가시오. 사내는 그야말로 기가 막히다 못해 뒤로 넘어갈 판이었다.
"나리, 이 좀 보소. 댁이 서푼을 빌린 건 그제요. 돈은 어제 갚았다니깐?"
"나으리라 부르며 사람을 희롱하려는 겐가. 얼른 받지 않고 뭐하오."
거 서푼 얼마나 한다고. 사내는 떨떠름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문 밖으로 나오려 하지를 않았다. 뉴트는 툇마루 한켠에 서푼을 내려놓았다. 나무와 부딪히며 딱, 하는 소리가 경쾌했다. 돌아서 가려다 뉴트는 문득 발을 멈췄다. 아참. 소매를 뒤적거리자 얄팍한 종이들이 너덜거렸다.
"어제 보아하니 문이 많이 닳았더만. 급한 일에 빌려 준 돈 요긴히 썼으니 사례로 받아 두시오."
"뭣, 나리, 보소."
사내가 당황하다 못해 어이가 없는지 댓돌을 밟았다. 댓돌 위에 놓여있는 짚신은 길이 들다 못해 너덜거렸고 스님이 신는 것보다도 성겼다. 뉴트는 그 신을 곁눈질 하고 휘적휘적 숲속으로 걸어들었다. 숲은 도깨비의 영역이다. 항상 그랬듯이. 어린 도깨비는 나이 많은 도깨비를 따라가지 못한다. 뉴트는 발자국을 지우는 법 또한 알고 있었다. 신도 채 신지 못한 저가 도깨비인 줄 모르는 도깨비를 따돌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
동래 쪽은 회회국 상인이 드나든다. 정확히 말하면 부산이 아니라 울산 즈음이지만, 도깨비 걸음으로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가 뭐 그리 대수일까. 유리 그릇과 그 동네 말로 오팔, 사파이어, 이 동네 말로 홍옥 진주 산호 등을 쓸어 담고 나니 대낮이었다. 너무 일찍 움직이기 시작했나. 뉴트는 혀를 끌끌 차고 곰방대에 연초를 쟁였다. 인세의 곰방대는 점점 길어지는 것이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뉴트에게는 짤막한 것이 편했다. 주막에 앉아 느긋이 연초를 태우고 있는데 옆 평상에 보부상이 주저앉았다. 대뜸 신발부터 벗는 것이 먼 데서 온 모양이었다. 제미, 닝기미, 온갖 욕설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뉴트는 별로 괘념치 않았다. 돌아다니며 물건 쓸어오는 생활을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니고. 숨을 뱉자 하얀 구름이 뻐끔뻐끔 쏟아져 나왔다. 단골집인지 주모가 보부상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이구 어서 오요. 많이 팔았수? 글렀어, 영 판이 안 좋아. 수원도 가보고 진주도 가 봤는데 동시 서울만큼 팔려야지. 뉴트는 보부상이 신던 신을 보았다. 저런 떠돌이 장사꾼일수록 신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쓴지 오래되었는지 신은 더깨가 많이 앉아있었고 때도 많이 탔으나, 특별히 올이 풀렸다던가 너덜거리거나 하는 문제점은 보이지 않았다. 뉴트는 재떨이에 연초 재를 떨었다.
"이보오, 거기 장사치."
대뜸 나온 말이 비하조였지만 보부상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고개를 돌렸다. 하기사 당장 뉴트도 장사치 말을 들으면 할 말이 없긴 했다. 뉴트는 곰방대를 소매에 쟁이며 말했다.
"거, 신도 파오이까?"
보부상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하게 폈다.
-
며칠 째였더라. 기억을 못하는 이쪽이 잘못이다. 첫날은 돈만 갚았고, 둘째 날은 창호지, 셋째 날은 미투리, 넷째 날은 장작 약간. 다섯째 날부터는 먹을 것이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최소한 최근 들어 주머니에서 푼돈이 떨어지지를 않는 것 같았다. 여름이 깊어져 날이 점점 길어갔다. 산중이야 그늘이 깊어 해가 짧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차이가 많지도 않았다. 항상 같은 시각에 간다고 자부하고 있음에도 등 뒤로 기우는 해가 보이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더 늦게 가는 것이 맞으려나. 부채가 점점 제 용도를 다하고 있었다. 그 집에 부채는 있으려나. 뉴트는 팔자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시전에 투박하니 괜찮은 부채가 있었던 거 같은데. 육의전으로 가면 부채감은 있겠지. 뭔가 이상하다는 기분은 들었지만, 여튼 오늘은 부채였다. 발이 유난히 가벼웠다.
-
주인장 계십니까. 길게 부르자 삐걱이며 문이 열렸다. 저기가 저렇게 시끄러웠나. 뉴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한결 피곤해보이는 눈의 사내가 문에 기대어 있었다.
"어제 빌려간 서푼 갚으러 왔네만."
사내는 말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툇마루 끝을 바라보는 시선을 주욱 따라가자 자신이 건네준 것이 그대로 쌓여있었다. 거 고지식하긴. 뉴트는 부채를 팔락이다 눈을 조금 가늘게 떴다. 좀만 기다리소. 사내가 신을 신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잠시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사내는 우묵한 대접에 무슨 과일 깎은 것을 들고 나왔다.
"좀 드소."
뉴트는 흘끗 대접 안을 내려다보았다. 노란 과육에 희고, 약간 붉은 껍질. 복숭아였다.
여름이 복숭아 철이라고는 하나 이런 집에서 복숭아 구하기가 쉬웠을 턱이 없다. 복숭아라. 뉴트는 고개를 기울였다. 삿된 것을 쫓아내고, 귀신이 무서워하며, 어지간해서는 인세의 것이 아닌 건 접근하지 못한다고 하지. 저잣거리에 떠도는 말이지만, 또한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잘 먹겠소."
뉴트는 손으로 복숭아 한쪽을 들어 올려 으적 씹었다. 덜 익었는지 물기 없이 과육이 시큼하고 털을 다 닦지 못해 입안이 껄끄러웠다. 그래도 뉴트는 군말 없이 한쪽을 다 해치웠다. 도깨비에게는, 복숭아가 들지 않을 따름이었다. 좀 불편해 보이는 표정의 사내에게 뉴트는 다시 억지로 서푼과 부채 하나를 쥐어주고 뒤돌았다.
한숨이 절로 났다. 인세의 것이 아닌 게 밝혀졌으니 다음엔 무엇이 올까. 소금 세례면 그나마 낫고, 그 다음은, 또 그 다음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나오게 되면 그 때는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동족을 돕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그 길을 한참이나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아주 나중이었다.
-
마음 같아서는 집을 뜯어고치고 싶었으나 서푼 성의의 한도에서 그러기는 쉽지가 않았다. 사실, 불가능한 것에 가까웠다. 서푼짜리 성의래 봐야 기껏해야 짚신 한 쪽이면 차고 넘치는 것이었으니 머리나 긁을 밖에 없었다. 가는 길에 잡았다는 핑계로 꿩이나 한 마리 가져가면 또 모르되 도깨비라는 족속은 피를 공포스레 여기는 습성이 있는 법이라 제대로 고기도 먹지 아니하는 것이다. 애초에 피를 전부 빼고 조리된 것이 나온다면 또 모르겠으되 생고기라거나 하는 것들은 보는 것도 어려웠다. 엿이나 사갈까. 뉴트는 부채 끝으로 망건을 쑤셨다. 나으리.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뉴트는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냐."
"판윤께서 오셨는데."
뉴트는 다시 벌렁 드러누웠다. 창고지기만 해도 물건을 꿰 차고 있다. 세 대가 넘게 이 쪽에서 일하는 사람이이니 믿을만했고, 물건이 없어진다면 한성에서 나가 또 다른 곳으로 가면 될 일이다.
"없다 일러라."
"예."
뉴트는 몸을 돌려 모로 누웠다. 그래서, 갱엿이 좋을까 호박엿이 좋을까? 쓸 데 없는 고민을 다시 시작하면서.
-
"이 밑에 사우?"
서 푼을 받아든 남자가 문득 물었다. 소맷부리에 다른 한 손을 박고 깨엿-엿장수가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며 신나게 팔았다-을 찾던 뉴트의 손이 문득 멈췄다. 사내가 저에 대해 뭔가를 물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오. 대답하는 목소리가 어째 좀 떨리는 것 같아 뉴트는 꿀꺽 목울대를 움직였다.
"근데 어찌 이리 날 걸러 오시우?"
"근처에 일이 있어서…."
비가 안 오는 날에는 문이 안 열기는 하지만, 어쨌든 온연히 거짓은 아니었다. 이 근방에 저 쪽으로 넘어가는 문이 열리는 곳은 이 곳뿐이 없었다. 잠시간 귀를 찌를 것 같은 매미 소리가 툇마루 근처를 맴돌았다. 뉴트는 소맷부리를 다시 뒤지기 시작했다. 이게- 또- 왜- 안 나와선-
"저녁 진지."
사내가 툭 뱉듯이 말했다. 뉴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항상 생각했던 거지만 사내는 키가 참 컸다. 툇마루 높이도 있지만, 그가 아니더라도 보통의 한 길을 훌쩍 넘기는 키였다. 자신도 도깨비 치고도 꽤나 큰 키라 자부했는데 사내는 더 컸다. 몸이 다부진 것은 아니었지만.
"자셨소?"
이어진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뉴트는 잠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잠깐동안 대화의 맥을 더듬고 나서야 뉴트는 아직, 하고 다 이어지지 못하는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들고 가실라오?"
별 달리 차린 것은 없지만. 사내가 어물어물 말했다. 두번째 초대였다. 뉴트는 저도 모르게 입을 조금 벌렸다. 잠시 후에야 헛기침을 하고, 실례 하겠소, 하고 그나마 예의를 차릴 수 있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신을 신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신이 길이 덜 들었는지 신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뉴트는 문득 툇마루 끝 쪽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쌓여있던 창호지 한 뭇, 미투리, 부채, 갖가지 물건이 없어져 있었다. 문에는 창호지가 얇게 발라져 전보다 한층 튼튼해보였다. 뉴트는 공연히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포기하고 받기로 한 건가. 진작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버선발로 방 안에 들어 뉴트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벽 너머에서 들리더니 작은 소반이 하나 방으로 들어왔다. 국, 밥, 간장, 침채와 밀가루에 풀을 섞어 지진 떡. 국은 맑고 고기가 조금 떠 있었다. 뉴트는, 뭔가, 이상한 기미를 느꼈다. 고기가 떠있는 국이라니? 최소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직접 잡았거나, 그 동안 갚는다는 명목으로 가져다 준 돈을 전부 털고 사왔거나. 뉴트는 약간 당황한 눈으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사내는 곧은 눈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드시우."
뉴트는 그제야 밥상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고 느꼈다. 이건, 약간 다른 방식의 완곡한 거부고, 아주 좋게 말해보아야 은혜 갚기였다. 전혀 필요 없는 방식의.
-
저녁을 먹고 나니 해가 넘어가다 못해 갓 기울기 시작한 달이 오르고 있었다. 천상 자고가야 할 판이었다. 뿔은 없었으니 갓을 벗는데 무언가 꺼리는 것이 있지는 않았으나 남의 집인지라 편하기 눕기는 첫날과 마찬가지로 그른 감이 있었다. 기름이 채워지지 않아서인지 호롱불은 약했다. 사내는 잠시 툇간에 다녀온다며 문 밖으로 나갔다. 오기 전에 불을 끄는 것은 실례가 될까. 모를 일이다. 뉴트는 일단 갓과 도포를 벗어 한 쪽에 잘 치워두었다. 망건은 썼으되 짧은 머리가 부스스하게 올라 짜증이나 망건도 같이 치워두었다. 이불은 솜이 얇았다. 틀기만 해도 좋았을 텐데. 생각을 해 보았지만 이불을 가지고 내려가는 것도 기계를 끌고 올라오는 것도 무리한 감이 있었다. 무슨 꾀가 없을까 양반다리를 하곤 무릎에 턱을 괴고 있는데 문짝이 열리며 삐걱거렸다. 사내가 방 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고 잠시 멈춰 있었다. 들어오지 않고 무얼 하오? 뉴트가 묻자 사내는 그제야 움직였다. 탁, 하고 방문이 닫혔다. 호롱불을 끄고 자리에 눕자 옆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가 누운 모양이었다. 오늘은 비가 오지 않아서 그런지 올빼미가 우는 소리가 났다. 개구리 우는 소리는 훨 덜했다. 올빼미가 있어서인가. 뉴트는 몸을 모로 뉘이고 이불을 끌어올렸다.
이상하게 지난번에 비해 사내가 숨을 쉬는 소리가 유난히 똑똑했다. 잠이 들지 않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마는 어쨌건 그러했다. 자신이 유독 신경을 쓰는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모로 누웠더니 불편한 감이 있어 조금씩 움직이다 뉴트는 몸을 아예 뒤집었다. 창을 향하던 눈이 안을 향하게 되었다. 컴컴하니 잠이 더 잘 오겠지. 뉴트는 눈을 감았다.
"나리."
문득 사내가 운을 떼었다. 뉴트는 눈을 떴다. 창호지를 뚫고 들어온 옅은 빛이 사람 눈동자에 비치는 것이 보였다. 얼굴이, 약간 비스듬하다고는 하나, 마주하고 있었다. 뉴트는 조금 놀랐다.
"왜 그러시오."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간 것만 같았다. 심장이 드물게 빠르게 뛰어서 씨름판에 서고 난 직후 같았다. 사내가 옅게 한숨을 쉬었다.
"혹 댁도…."
뉴트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드디어 제가 도깨비인 것을 알아차린 걸지도 모를 노릇이다. 비가 다음엔 언제쯤 내릴까. 그 때 저쪽으로 인도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쪽에서 어떻게 살게 될 지는 모르지만, 도깨비에겐 아무래도 저 쪽이 편한 법이다. 이 쪽보다야 낫겠지. 도술도 부릴 수 있을 테고- 사내가 계속 말했다.
"혹 댁도 어메가 서역인이요?"
-숨이, 탁, 풀렸다. 그래. 생각해보니 또 그랬다. 머리색이 검지 않은 것은, 도깨비만이 아니다. 회회아비 중에서는 머리가 금빛 은빛인 사람도 있고 드물게 이 동네에서도 붉은 머리가 나오곤 했다. 왜 그것을 이제야 깨달았을까. 도깨비가 멍청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코웃음을 치곤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꼭 그런 것만 같았다. 자신은, 지나치게 참혹할 정도로 멍청했다. 긍정도 부정도 못한채 입을 열었다 다물자 사내가 몸을 조금 뒤적였다. 돌아눕지는 않았다. 그리곤 말을 이었다.
"아니라면 미안하우. 머리가 노랗게 반짝반짝 빛나 길래, 그냥,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잠시 숨을 쉬곤 사내가 계속 말했다.
"동향 사람인가 하고…."
이제는 이쪽이 숨이 막혔다. 이 쪽의 오해가 풀렸다 싶었더니 저 쪽의 오해가 깨졌다. 뉴트는 뭐라 말해야할지 한참을 생각했다. 한참을 울던 올빼미와 개구리 소리가 약간의 격차를 두고 멎었다. 올빼미 소리가 먼저 멎고, 개구리 소리가 아주 잠시 뒤에 멎었다. 바람이 문풍지를 흔들었다. 뉴트는 조금 멘 것 같은 목을 가다듬었다.
"이름."
목소리가 엷게 나와서 헛기침을 해야 했다. 사내가 이쪽을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이름이 어떻게 되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웃은 것 같았다. 옅은 빛으로는 얼굴 표정까지 다 구분할 수가 없었다.
"아랫동네에서는 그냥 도깨비 도깨비 하고."
사내가 뜸을 들였다. 턱을 긁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가까이에서 득득 긁는 소리가 났다. 뉴트는 눈 앞이 조금 어찔했다. 도깨비요? 아니우. 왜 문이 그렇게 혹독히 닫혔는지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메는… 갤리라구 불렀지."
뉴트는 침묵했다. 유난히도 숨소리가 뼈에 저렸다. 닭이 홰를 치기 전 새벽에 문을 나설 때 트는 꼭 자기가 도망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을 내려오고 닭이 울 때쯤 뉴트는 생각을 고쳤다. 자신은 도망을 친 게 맞았다.
-
울산까지 가서 가비를 들였다. 냄새가 밸까 일부러 후추와는 떼어서 자루를 잘 쟁여두었다. 다점도 잘 안 된다는 판에 웬 가비인가 싶을 수 있겠으나 의외로 찾는 사람이 조금씩 있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들고 난 장부를 살피는데 어린 아이가 문을 두드렸다. 나리. 어째 어제와 겹쳐보이는 풍경에 뉴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옆에서 장부를 받들던 마흔이 넘은 종이 대신 대꾸했다. 무슨 일이냐. 대감이 오셨습니다. 정승이라 하시는데…
"요새는 개나 소나 다 정승이라더냐."
"수 승록대부 부원군이라 하십니다. 영의정이라 하시며…"
깊게 한숨이 나왔다. 왜 이리 권세를 자랑하려는 사람이 많누. 머리가 아파와 미간을 꾹꾹 누르자 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가겠습니다."
"미안하오. 없다 일러 주시오."
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문을 품지 않는 건 득일까 실일까. 도깨비에게는 득이요, 저 사람에게는 실일지도 모른다. 뉴트는 다시 장부를 들여다 보았다. 요즘들어 유난히 서책이 많이 빠지고 있었다. 언해본이라면 모르되, 서역책이나 청에서 들여온 것이. 위험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문 앞에서 뉴트는 조금, 머뭇거렸다. 구실은 어젯밤에 망가졌고, 오늘은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찾아왔는가. 잘 모르겠지만, 보름 넘게 찾아온 발은 어찌되었던 몸을 여기까지 이끌었다. 심지어 손에는 숯까지 조금 들려있었다.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로.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렇다고 돌아가지도 못하고 하늘을 보며 눈이나 비비고 있는데-해가 덜 져서 색이 붉은빛부터 누런빛까지 걸쳐있었다. 덕에 눈이 따가웠다- 문득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사내가 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어. 둘이 다 멍청한 소리를 했다.
"바, 발소리가 들려서."
사내가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뉴트는 그게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발소리가 나면 그게 인간이지 도깨비겠는가. 그냥, 이쯤 되면 자신이 온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제때 제때에 왔다는 것이다. 사내도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는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뉴트는 침착하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어제 꾼 서푼이요."
손바닥을 펼쳐 내밀자 사내가 미투리를 신고 문 밖으로 나왔다. 손바닥에서 손바닥으로 엽전이 떨어졌다. 숯은 그냥 떠넘기면 될까.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재고 있는데 남자가 문득 물었다. 나리는.
"무얼 하는 사람이우?"
뉴트는 마른침을 삼켰다.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뭐라고 대답해야할까.
"장사를, 조금."
뉴트는 그냥, 지금 돌아가기로 했다. 마당-이라 부를만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한 구석에 숯을 떨어뜨리고 가면 가져다 쓰지 않을까. 뉴트는 그럼 이만, 하고 몸을 뒤로 돌렸다. 나리. 사내가 한 번 더 뉴트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사내가 서 푼을 아주 소중한 것인 양 꾹 쥐고 있었다. 약간, 떨면서, 사내가 입을 열었다.
"…사람이우?"
뉴트는 아주 천천히 두 번 눈을 깜북였다. 외줄타기가 떠올랐다. 산대놀이를 하는 예인들은 무섭지 않은 걸까. 자기가 줄 위에 있다고 계속 생각하면, 서글프지 않을까. 뉴트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떠할 것 같으오?"
사내가 입술을 씹었다. 입술이 당장이라도 너덜거릴 것 같아서 뉴트는 뒤를 돌았다. 다시 몇발짝 걷자 사내가 당장 눈앞까지 왔다. 놀랐는지, 반보 정도 뒤로 물러났다.
"서역인들이 왜 도깨비 소리 듣는지는, 아오?"
"머, 머리가 노래서."
웅얼웅얼 갤리가 말했다. 뉴트는 웃었다. 주먹을 쥐지 않은 사내의 손에 보자기로 감싼 숯을 들렸다. 손이 뜨끈뜨끈 했다. 열이 오른 건지는 또 모른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검은 머리 서역인도 많지."
열이 손끝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닿았구나. 문득 손끝이 저리는 감이 있었다. 이 세계에 도깨비 의원이 또 있으려나. 아마도 없을 것이다. 오롯이 안고 가야하는 것이다.
"도깨비 얼굴이 서역인처럼 우묵 불룩 해서 그렇다오."
좋게 말하면 미려하다하고, 나쁘게 말하면 도깨비인 게지. 뉴트는 웃었다. 사내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해 헤매었다. 뉴트는 발길을 돌렸다. 손끝이, 손바닥이 불에 덴 듯이 저리고 아팠다. 내일 맞이하는 게 무엇일까. 가장 슬픈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났다. 해가 졌는데 달이 뜨긴 이만큼이나 멀었다.
-
장부 정리가 끝났다. 사실 정리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던 것이, 원래부터도 정리를 잘 해두어 가격이 잘못된 것이 없었다. 골치를 앓아서 뉴트는 드러누워 있었다. 또 찾아가도 되는 것일까. 매일 전날을 잊어버린 척 했기에 서푼은 매일이고 구실이 되어주었으나 찾아가리라 마음을 먹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염통에 무언가가 턱 걸리고, 열이 오르고, 살갗이 간지러운 듯 따끔거렸다. 찾아가도 괜찮을까 생각하면 애간장이 탔다.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뒤척이는데 문이 열렸다. 나리. 어제 그 종이 목소리를 떨며 그를 불렀다. 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대로 고쳐앉았다.
"도승지가 다녀갔습니다."
"도승지?"
"아니 계시다 이르긴 했사온데."
종이 말 끝을 흐렸다. 갈팡질팡하다가 연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밤에는, 계셨으면 한다고."
어찌해야합니까? 뉴트는 얼굴을 굳혔다. 잠시 침묵했다가, 뉴트는 벌렁 드러누웠다.
"괜찮다. 제시간에 오마."
"나리."
"오시걸랑 사랑방으로 안내해라. 너는 너무 걱정 말고."
그냥 아무것도 모른체해. 뉴트는 웅얼거리며 등을 보이고 돌아누웠다. 종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야 일어나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뉴트는 지나가듯이 한 마디를 했다. 기름 좀 한 병 챙겨다오. 알겠습니다. 종이 대답했다. 무슨 기름인지 어디에 쓸지 묻지 않았다. 더는 몰라도 좋았다. 종도, 모르는 것이. 뉴트는 눈을 감았다.
-
호리병이 손목에서 덜렁거렸다. 기름이 가득 든 병은 작다고는 하지만 무게가 만만치 않아 무게 중심이 자꾸 묘하게 쏠렸다. 덕택에 뉴트는 평소보다 숨을 헐떡여야만 했다. 허파가 제 멋대로 날뛰어서 뉴트는 코끝에서 비린내가 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비린내인지도 모른다. 장마는 갔지만 태풍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슬슬 비가 다시 올 때쯤이 되어있았다. 뉴트는 천천히 산을 디뎠다. 거의 다 도착해서 땅이 단단하게 다져져 있었다. 사람이 다니는 길에는 풀도 없고 땅도 매끄러우며 냄새도.
비린내가 독했다.
녹슨 쇠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악취라고 느껴질 정도로 독한 비린내에 뉴트는 소맷부리로 코를 가렸다. 뭐지? 원래 이렇게 냄새가 독한 곳이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이렇게 냄새가 강하다면 여기서 이틀이나 묵을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뉴트는 나무를 돌아 오두막 앞에 섰다.
마당의 흙바닥이 벌겋게 젖어들어 있었다.
색이 시뻘갰다. 군데군데 툭툭 떨어져있는 것도 아니고 집 주위를 한바퀴 빙 둘러 붉은 길이 나 있었다. 속에서 뭔가가 북받치고 끓어오르는 느낌에 뉴트는 한 손으로 나무를 짚었다. 욱, 우욱.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차 한 잔, 밥 한 공기, 국 한 그릇. 입에서 쓴 맛과 독한 신 맛이 돌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허연 것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눈에 절로 눈물이 고였다. 손톱 밑으로 나무껍질 가루가 박혀들었다.
"가우."
아주 가까이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딱 적당히 떨어져서. 붉은 선을 사이에 두고 한 도깨비는 이쪽, 한 사람은 저 쪽에 서서. 두 손을 늘어뜨리고, 허망하게 선 채로. 둘은 그렇게 마주섰다.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신 오지 마소.“
"이, 보시오."
숨이 덜덜 떨렸다. 땅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아서 하늘로 시선을 비꼈다. 주홍색 구름이 떠가고 있었다.
"나는, 그냥, 어제 빌린 서푼만-"
"기억 다 하는 거 아는데 딴 소리는."
어제 어제 해 대는데 어제 흘끗 보고 간 것만 가지고 그렇게 매일매일 필요한 것만 골라서 다른 걸 들고 오요? 귀신이 씨 나락을 까먹지. 사내가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뉴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사내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다 눈을 덮었다. 가소. 다시 한 번 말했다. 뉴트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움직이고 싶지도 않았고, 또 움직일 수도 없었다. 기운이 쭉 빠져나갔다. 머리와 가슴이 동시에 아파서 딱 잘라 어디가 문제라고도 할 수가 없었다. 뉴트가 떠나지 않자 침묵을 견딜 수 없었던지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랫동네서.“
사내는 숨을 골랐다. 멋모르는 종다리가 우는 소리가 먼데서 들렸다.
"아랫동네서 자꾸 말이 나. 도깨비가 요새 산을 자주 내린다고."
"그건-"
"도깨비 친구라도 얻은 게 아니냐구."
뉴트의 머릿속이 텅 비었다. 도깨비와 도깨비 친구. 편견, 오만, 사실과 거짓이 절묘하게 뒤섞인 낭설. 상처는 누가 받는가, 악은 누가 떠안는가. 사내가 말을 이었다.
"댁은, 한성 높은 분이잖소."
뉴트는, 옅게 신음했다. 머리가 쪼개질 정도로 아파왔다. 눈앞이 뿌옇게 흐렸다.
"도깨비란 소문 나문 진짜라도 좋을 게 없는 건 그쪽 아뇨."
퍼뜩 가소. 힘이 풀리는지 사내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양반 다리를 하고 있는데도 등이 굽어 힘이 없어보였다. 뉴트는 숨을 골랐다. 억지로 눈을 감자 차가운 것이 뺨을 타고 흘렀다. 손으로 나무 등걸을 짚고 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무작정 앞으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비린내가 진해져서 뉴트는 아예 숨쉬기 또한 멈추었다. 나리? 사내가 말하는 것은 무시했다. 그러나 촉각은 어쩔 수 없는지라, 신발과 다리를 타고 질퍽한 것이 느껴져 뉴트는 그대로 고꾸라져버렸다. 사내가 자신을 부르는 게 들렸다. 질지 않고 마른 땅을 디디기 위해 손을 뻗자 뜨뜻미지근하고도 심이 든 단단한 것이 손을 받혔다. 저절로 눈이 뜨였다. 사내의 얼굴이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미쳤수? 이 험한 산자락에서 어딜 눈을 감고 걸어!"
"피 볼 일을 피하려면 이 수밖에 없지 않소."
"그냥 내려가면 되는 것 아뇨! 왜 이렇게 꿋꿋이 여기를 오려고 들어! 여기가 뭐라고!"
그러게나 말이다. 여기가 뭐라고. 목구멍까지 치받친 목소리가 목줄에서 녹아내렸다. 사내가 그를 집 쪽으로 끌어 당겨서였다. 미투리가 바닥에 질질 끌리면서 지익 지익 하는 소리를 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이 무게가 있어서 힘들었는지 금방 맨바닥 위에 대자로 눕히긴 했지만, 결국은 범위 안이었다.
모르겠다. 여기가 뭐라고. 모르겠다. 왜 이리도 꾸준히, 꿋꿋이. 뉴트는 손에 힘을 주었다. 제 손을 잡고 질질 끌고 오던 사내는 힘이 풀렸는지 어깨가, 머리가 힘없이 딸려왔다.
"갤리."
문득 뉴트는 사내의 이름을 떠올려 발음했다. 사내의 얼굴이 화닥닥 붉어졌다. 깨처럼 점점이 찍힌 주근깨가 태가 났다. 갤리. 뉴트는 사내를 한 번 더 불렀다. 잡힌 손의 악력이 센지 손이 아팠다. 뉴트는 모른척하고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맞닿았다.
-
거의 구르듯이 방안으로 들어갔다. 정신없이 입술을 맞대다 나뭇가지에 긁힌 상처를 핥기도 하고 혀를 얽기도 했다. 아름을 조금 못 채우는 가슴팍을 어떻게든 끌어안으려고 손끝을 맞대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사내가 목 울림으로 웃어서 목덜미를 깨물기도 했다. 옷이 구겨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뉴트는 도포와 갓을 벗어서 구석에 처박았다. 망건은 아예 내던져 버렸다. 답호에 저고리 속저고리 바지에 속곳까지 몇 겹이나 되는 옷이 이렇게 짜증날 수가 없었다. 그냥 대충 입고 올 것을 뭐가 이렇게 입어야 하는 게 많아서. 저고리를 구석에 처박는데 문득 고름조차 풀리지 않은 사내의 옷이 눈에 들었다. 싫은가? 뉴트는 조금 헐떡이던 숨을 진정 시키려 노력하며 사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내가 한숨을 푹 뿜고 뉴트의 속저고리에 손을 올렸다. 나쁘지는 않은 일이었으나 만족스런 것은 아니었다. 뉴트는 팔을 얽듯이 뻗어서 사내의 옷고름에 손을 대었다. 사내가 당황한 듯이 제 옷에서 손을 떼었지만 매듭이나 지어놓은 고름이 풀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뉴트는 사내의 옷자락을 흩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멍이었다. 뉴트는 눈을 부릅뜨고 사내의 가슴팍과 뱃거죽에 있는 멍을 바라보았다. 울혈이었지만, 분명히 맞아서 생긴 멍이었다. 보라 빛, 누런 빛, 푸른 빛. 심지어는 피멍까지. 뉴트의 손이 멍을 덧그리자 사내가 급히 덧붙였다. 안 아프우. 당연하지만, 믿을 수 있는 소리는 아니었다.
"뉘오?"
"아무것도 아니외다."
"뉘냐니까."
"그냥, 내려가다."
온전히 거짓을 바로바로 생각해 낼 수는 없을 테니 아마 내려가다 생긴 일은 맞을 것이다. 다만, 아무것도 아닐 수는 없는 것일 따름이지. 혹시. 뉴트의 머릿속에 최악의 가정이 스쳤다.
"밖의 피, 당신 것이오?"
"꼭 닭 피는 아니어도 무섭나 보요?"
당연히 무섭지. 게다가 사내의 피라면 더 무서울 수 밖이 없었다. 뉴트는 조금 얼굴을 찌푸렸다. 사내는 웃고 있었지만, 어쨌든 기분이 좋아지지가 않았다. 뉴트는 멍 자국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로 살살 누르다, 약간 머금는 척 하기도 했다. 사내가 숨 쉬는 것에 따라 가슴팍이 올라왔다 내려갔다. 뉴트는 속저고리를 마저 벗어 던지고 구석에 같이 내던져진 호리병을 들었다. 본래는 호롱에 채우라고 가져왔던 것이지만. 쓸 수 있다면 좋겠는데. 솜으로 틀어막은 것이 깊었다. 손으로 뽑히지 않아서 끙끙 거리자 사내가 조금 웃었다. 괜히 눈을 부릅떴다. 결국 이를 사용해서 뽑았다. 동백꽃 향기가 났다.
-
닭이 홰를 치기 전에 떠나야 한다는 게 이렇게 안타까울 수 없었다. 그냥 이슬을 밟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을 하다가 뉴트는 다 챙겨 입지 못한 갤리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고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어 것으로 떠나는 인사를 대신했다. 설핏 잠을 깬 갤리가 뭐라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뉴트는 문을 닫으며 조금 웃었다.
오늘은 맑으려는지 한성 안은 안개로 가득했다. 오리무중이라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가 쉬워 뉴트는 성벽과 담을 평소보다 수월하게 넘을 수 있었다. 도포자락을 옅게 적신 물기를 털며 마루를 걸어 뉴트는 사랑으로 갔다. 잠깐 눈을 붙이면 내일 하루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아예 사내를 들어다 앉히면 어떨까.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흘리며 뉴트는 장지문을 잡았다.
안에서 숨소리가 났다. 호롱조차 켜지 않고 숨소리도 죽이고 누군가가 안에 있었다. 뉴트는 소리없이 문을 열었다. 연초 태우는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설마 닭이 울기 직전에야 들어올 줄이야."
안에서 한탄하는 듯, 조롱하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길게 뽑혔다. 손님을 사랑에 들여놓고 이러면 쓰나. 뉴트는 얼굴을 굳혔다. 그러고보니, 오늘 누군가 찾아오기로 했었다. 도승지는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이 담긴 목소리가 아니었다. 젊고, 도승지를 부릴 수 있고, 그런 사람이.
이 나라 안에 딱 한 명 있었다. 뉴트는 문을 닫고 문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전하를 뵙잡습니다."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리가 꼿꼿하군. 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인세의 법에 따르는 것은 이정도면 족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웃음소리가 멎었다.
"헛소리는 이쯤 하도록 하지. 짐이나 그대나 시간이 없는 것은 비슷하니까. 덕택에 시간을 꽤나 잡아먹어서."
두루마리가 하나 발치로 굴러들어왔다. 정확하게 발끝에서 멎은 두루마리를 뉴트는 곁눈질로만 잠시 보았다. 녹색 비단으로 겉을 대고 심을 나무로 박아놓은 전형적인 교지였다.
"부원군이 말씀하시길 이 집에서는 못 구하는 게 없어서 꽤나, 자주 들르신다 하시더구먼."
그 분과 거의 항상 뜻을 같이하는 한성 판윤도. 이어지는 말이 따분하다는 투였다. 뉴트는 고개도 허리도 숙이지 않고 묵 부답으로 일관했다.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구들을 밟는 발소리가 났다. 정확히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어 보이는 것은 허리 아래 뿐이 없었다. 비단 두루마기의 허리끈 아래의 발은 경망스럽지는 않았으나, 분명 약간은 조급했다.
"그래서 나도 그대에게 주문 하나 넣으려 하네."
말에, 왜인지 웃음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도깨비를 한 명 구해오게."
뉴트의 허리가 꼿꼿이 펴졌다. 입 안의 살을 지나치게 꽉 깨물어 코끝에 비린내가 감도는 것 같았다. 등 뒤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참, 앞으로는 순라꾼 좀 조심하게나. 눈에 더 안 띈다는 보장은 없으이.“
-
교지에 적힌 날짜는 다음날이었다. 시한이 그 다음날까지였다. 뉴트는 교지를 발기발기 찢을까 하다가 상 위에 소리가 나게 내려놓는 것으로 대신했다. 정확히 상단주에게 내려진 별공이었다. 도깨비라. 말이 좋아 도깨비지 서역인을 한 명 데려오면 그럭저럭 만족할 것이 뻔했다. 당장 자기가 나서도 뭐라 하지 않을 것이고- 아니면 그냥 이 상단이 부원군과 연루되어 있는 것 같으니 일거에 쓸어버릴 작정인 걸지도 몰랐다. 가장 마지막 것이 확률이 제일 높아 뉴트는 골머리를 썩었다. 그냥 자주 들리는 손일 뿐인데 덕분에 이쪽이 머리가 아팠다. 도깨비. 빌어먹을, 도깨비. 어차피 개인에게 내려진 것이었으니 상단을 넘기고 잠적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리라. 다들 헛꿈을 꾸었나 하고 믿게끔 창고는 다른 것으로 채워 넣고 청으로 갔다는 소문이나 내 놓고 저쪽 세상으로 빠지면 그걸로 좋은 것이다. 삼대가 내려온 상단이고 자신은 약간 진귀한 물건을 대는 정도로 물건 구멍은 얼마든지 있었다. 자신이 없어도 잘 해가리라 뉴트는 확신해 마지않았다. 그냥, 사내만 데리고 슥 잠적해 버리는 것도 꽤나 괜찮았다. 뉴트는 종을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한참을 듣던 종의 표정은 별 변화가 없었다. 언젠가는 이럴 줄 알았다는 것 같은, 초탈한 표정이기도 했다. 납속을 어디에 두었더라? 몇 장 사 놓은 것이 있을 터인데. 뉴트가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종이 문득 입을 열었다.
"언제 떠나실 셈이십니까?"
"오늘."
오늘 밤에. 뉴트는 부연했다. 종의 표정이 약간 착잡해졌다. 나리.
"오늘 한성부 판윤이 바뀌었답니다. 깐깐하고 고지식한 사람으로."
들고나는 사람을 죄 검문한다고. 뉴트의 얼굴이 파래졌다.
-
발 아래 물이 밟혔다. 다 젖은 버선이 철벅이는 소리를 냈다. 도포가 젖어서인지 빨리 달릴 수가 없었다. 반나절 거리 쯤은 떼어 놓았지만 그래도 관군은 관군인지라 관아에 명이 들어가면 바로 이쪽까지 오게 될 것이었다. 뉴트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이쪽으로 오지 말았어야 했나. 하지만 몸을 피하라고 말이라도 전해야 했고, 머리와 함께 야명주 같은 대표 물품까지 빠져 우왕좌왕할 상단에 그런 것까지 부탁할 수는 없었다. 일이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묵직하게 뭉친 빗물이 어깨를 두드렸다. 나무가 빽빽이 겹쳐있는 곳으로 들자 그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멀리서 우레가 우릉우릉 울었다. 뉴트는 발짝을 떼어 산을 올랐다.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비탈, 골짜기, 나뭇가지들이 험하게 옷자락과 볼을 긁었다. 갓이 중간 중간 툭툭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초가집 위에 번쩍, 하고 번개가 내렸다. 뉴트는 긁어내리듯이 문을 열었다. 옷을 정리하고 있던 사내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 어… 오늘은 좀, 빠른 것 같수다?"
"갤리."
뉴트의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뉴트는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았다. 벗지 못한 미투리와 버선에서 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뉴트는 갤리의 정면을 바라보며 어깨를 손으로 잡았다.
"피해야 하오. 관군이 오고 있소이다.."
"예?"
갤리가 눈을 꿈적거렸다. 뉴트는 밖에 귀를 기울였다. 아직은 비가 추적이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천둥이 내렸다.
"나랏님이 배알이 틀린 모양이외다. 내 뒤를 밟는 모양새요. 몸을 피해야…."
갤리의 눈이 떨려서 뉴트는 말끝을 흐렸다. 도깨비는 이리도 이기적이다. 갑작스레 제 고향을 버리게 만들고, 그것을 깨닫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냥, 어디까지나 이게 좋을 것 같다는 독단적인 판단이었고 깨달은 시점은 지나치게 늦어있었다. 종이 뭉치를 들고온 그 때부터가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모든 죄는 뉴트를 가리키고 있었다.
뉴트는 호흡을 골랐다. 갤리의 눈을 최대한 똑바로 바라보며 뉴트는 말을 이으려 애썼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 해야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주 적었으므로.
"선택지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뉴트는 문득 말을 올렸다. 그것이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처음부터 이래야 했을지도 몰랐다. 왕방울만 해진 눈을 한 갤리를 보며 잠시 침묵하다 뉴트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하나는 지금 당장 떠나서, 며칠 간 잠적했다 한성으로 가는 겝니다. 동소문 안에서 제일 큰 집으로 들어가 도깨비가 보내 왔다 하면 모자람 없이 챙겨 줄 것입니다. 저는 그동안 따로 몸을 피하고 있을 겁니다. 일이 잠잠해 지면 다시 만나 뵈러 가고."
그리고 어쩌면 평생 다시 못 볼지도 모르고. 뒷말을 뉴트는 호흡을 갈무리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갤리는 묵묵부답으로 말을 계속 듣고만 있었다. 뉴트는 잠시 머뭇거리다 운을 떼었다.
"다른 하나는, 나와 같이 저쪽 세상으로 가는 겝니다."
도깨비 나라. 인간이 보기엔 어떨지 또 모르는 노릇이다. 선단을 먹여 억지로 오래 살게 하고, 자신과 같은 수명으로 만들어 반쯤 도깨비가 되어 사는 게 행복할까. 이 또한 자신의 이기고 실책이다. 그러나 뉴트가 제시할 선택지는 고작 그 두 개가 다였다. 뉴트는 고개를 떨구었다. 한참동안 방 안에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만이 감돌았다. 번개가 잠시 멎었는지 천둥조차 들리지 않았다. 뉴트는 그 침묵의 무게를 어렵게 감당했다. 도깨비조차도 시간을 돌리는 건 불가능 하다. 뼈에 저려왔다.
문득, 갤리가 입을 열었다. 숨을 들이켰지만 별 말은 하지 않고, 어쩌면 하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묵직한 목소리가 말했다.
"그럽시다, 그럼."
뉴트는 고개를 들었다. 갤리의 얼굴은 초연했다. 슬퍼보이지만, 웃고 있기까지 했다. 갤리가 뉴트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뉴트의 코가 갤리의 어깨에 묻혔다. 뉴트는 갤리의 등에 어색하게 손을 얹었다. 갤리의 말이 코를 타고 웅웅 들려왔다.
"같이 가지 뭘."
뉴트는 순간 호흡을 멈췄다. 아니, 호흡이 멈췄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뉴트는 저고리 자락을 꽉 쥐었다.
"가면, 한동안은 못 오는 길입니다."
"알우."
"정말 괜찮습니까."
"괜찮대두."
뉴트는, 눈시울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고맙고, 미안하고, 송구스럽고,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가슴이 미어지게 미안하면서도, 또한 못내 좋았다. 한동안 그렇게 몸이 으스러져라 끌어안고 있었다.
멀리서 발짝 소리가 들렸다. 뉴트는 눈을 깜박이고 몸을 뺐다. 갤리가 약간 당황했다.
"나리?"
"나가야 합니다."
어서. 뉴트가 갤리의 손목을 이끌었다. 갤리의 표정이 혼란스러웠다. 육날 미투리를 맞게 신지도 못해 뒤축이 질질 끌리는 것을 알면서도 뉴트는 앞장서서 달렸다. 계곡으로 가는 길까지 채 서른 발짝도 달리지 않았는데 뒤에서 장지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빗새를 뚫었다. 뉴트는 이를 악물었다.
"더 빨리 뛸 수 있습니까?"
"그, 걸 말, 이라고."
무슨, 허여멀건, 해서, 이렇게. 갤리가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숲 속이라 관군들이 헤매고 있는 듯싶기는 했지만 반나절 거리는 벌써 스무 발짝 안으로 줄어 있었다. 유일한 다행은 비가 오는 것이었다. 뉴트는 흙물에 무릎이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엎히십시오."
"뭐?"
"두 번 말할 시간 없습니다. 얼른."
기가 차다 못해 어이가 없어진 갤리가 엉거주춤 몸을 붙였다. 뉴트는 달리기 시작했다. 귓가에 관군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열 보 안 쪽이었다. 뉴트는 신경을 떨치기 위해 노력했다. 빗물이 아직 떨어지지 않고 고여 있는 잎사귀를, 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밟아서, 한 발짝.
-이 쪽에 뭐가 지나갔어!
두 발짝.
-저기 사람이-
세 발짝.
순식간에 눅눅하고 축축하던 숨이 마르고 서늘한 걸로 뒤바뀌었다. 내딛는 발을 접질려 뉴트는 두 바퀴정도를 그대로 굴렀다. 등 뒤에서 어이쿠, 하는 말소리가 들려서 뉴트는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갤리?"
괜찮습니까? 에구구, 하고 사내가 헐떡헐떡 숨을 쉬었다. 묫자리 찾기 더럽게 힘들다. 투덜대는 소리에 뉴트는 작게 웃었다. 긴장이 풀렸다.
"다 왔습니다. 도깨비 나라요."
사내가, 아까 희한한 소리를 들었을 때와 같이 눈을 꿈적거렸다. 어디라구? 도깨비 나라. 문답을 두어 번 반복하고 나서 뭔가가 잘못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등에서 불이 났다. 갤리의 얼굴이 화가 난 듯 민망한 듯 새빨개져 있었다.
"말을 하려면 잘 할 것이지 꼼짝없이 둘이 저승 가자는 건 줄 알았잖소!"
물을 함뿍 머금은 천 위로 매가 날아들어 눈앞에 불꽃이 튈 지경이었다. 등이라 손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앞으로 몸을 숙이고 끙끙 앓다가 몸을 저 쪽으로 피하고 있는 갤리를 뉴트는 문득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같이 죽자고 했는데도 그러마 했다는 건가. 웃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왠지 웃음이 났다.
"갤리.“
"아 부르지 마우!"
"내 다리를 접질렸는데."
목소리가 간신히 닿는 저 쪽까지 물러났던 갤리가 잠시 후 투덜거리면서 이쪽으로 왔다. 갤리의 등이, 화가 나서 그런지 좀 뜨끈했다. 뉴트는 소리 나지 않게 웃었다. 우리 부인 호강시켜 주려면, 먼저 이쪽에 대궐 같지는 않아도 집 한 채 얻어야 했다. 바깥과 다르게 도깨비 나라는 아주 맑았다.
+
"-가 왜. 그 쪽 경영자랑 통화 해, 이쪽 자꾸 귀찮게 하지 말고. …그런 일 처리를 왜 이쪽으로 떠넘기는데. 지금 장난해? 끊는다."
전화기 저 쪽에서 자꾸 뉴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뉴트는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책상 위에 툭 던졌다.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깍지 낀 손등 위로 이마를 얹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Sorry, but could you wait seconds?"(미안한데, 잠깐만요.)
"어, 미안. 많이 바쁜가보네."
뉴트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억양과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려서 뉴트는 아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려나면서 전면 유리창에 퉁, 하고 부딪혔다.
"아냐나하나도안바빠!!"
"거짓말하면 죽는다고 내가 했냐 안 했냐."
뉴트는 잠시 시무룩해했지만 어쨌든 희희낙락해서 갤리를 안으로 들였다. 영어를 통 못해서 이쪽 회사에 있으면 거의 안 오는데 어쩐 일로 무거운 발걸음을 행차해 주신 것이다. 도깨비 나라에서 넘어오기 힘든 것도 힘든 거지만 나와도 보통 집이나 호텔에만 있는 편이었고. 여전히 가비에는 손도 못 대는 부인(?)을 아는지라 뉴트는 급탕실에서 주스를 한 잔 가져와야 겠다고 생각하며 갤리를 원래 자기가 앉아있던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의자를 최대한 창문에서 최대한 떼어 앉는 갤리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층수가 높아 갤리는 밖을 바라보지 못하는 탓이었다.
인간들은 참 신기하기도 하지. 자신들이 개발한 문물이면서 또 자기들이 적응하는 데에도 한참이 걸리는 것이다. 물론 제 부인이 서툰 것은 그저 한정 없이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는 게 뉴트의 한계였지만.
"갤리 점심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나 조기 퇴근하고 데이트 할까? 이 근처에 엄청 맛있는 샐러드 바가-"
"아니, 나 도면 제출하러 나온 거라."
뉴트는 또 한 번 시무룩해졌다. 제 부인이 꿈과 재능을 발휘해 목수로, 거기서 더 나아가 건축가로 활동하는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둘 다 바쁠 때는 영 좋지만도 않은 것이다. 뉴트의 표정을 잠시 바라본 갤리가 참 찝찝한 표정을 했다.
"너 안 바쁘냐? 밖에… 샐리라구 했던가 그 아가씨는 아주 바빠서 죽으려고 하는 것 같더만."
"하아나도 안 바빠. 그럼. 도장 찍는 거 말고 하는 게 내가 뭐 있겠어요."
그게 사실은 엄청 바쁜 일이지만 뉴트는 종종 이렇게 거짓말을 했다가 비서 아가씨에게 뒷덜미를 잡혀서 끌려가고는 했다. 그 아가씨도 외국인한테 물러서 탈이었다. 한국 지사에서 전화만 오면 쩔쩔 매다 일 넘겨받고는 하니까. 그래도 그 외에는 일을 잘 하는 편이어서 한국계 딱 부러지는 비서를 하나 더 고용할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물론, 연예인에게 감흥이 없는 사람으로. 여튼, 저 거짓말은 갤리도 이미 다 간파하고 있다는 말이다.
"각방 쓰고 싶냐. 나도 오랜만에 애들이랑 잘까."
"안 돼!"
뉴트는 비명을 질렀다가 표정을 수습했다. 예고 없이 임신을 하게 된 건 물론 욕먹어도 싼 일이지만 이렇게 두고두고 아픈 손가락이 될 줄이야. 가끔 뉴트는 서글퍼졌다. 그래도 애가 넷은 있어야 선녀처럼 떠나지는 않을 거 아냐. 그 집도 어지간히 끔찍하긴 한데. 결국 툴툴 거리며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다시 서류를 넘기게 되었다. 그걸 잠시 지켜보던 갤리는 뉴트가 서류에 사인을 하자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나 이제 도면 제출하러 갈 건데."
"으음…"
그리고 그냥 집에 가는 건가. 뉴트는 공연히 서글퍼졌다. 갤리가 나오면 하려고 짜놨던 데이트 도안이 이렇게 물거품이-
"너 정상 퇴근하고 데이트 할까?"
뉴트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갤리가 창밖을 바라보며 어이구 높기도 하다며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뉴트는 뒤에서 갤리를 끌어안으며 귀 뒤에 뽀뽀를 두세 번 뿌렸다. 아이구 여보야- 갤리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며 짜증을 부렸다. 얼굴이 빨개서 설득력은 없었지만.
'2.5D > 메이즈러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톰/늍갤] Wait a second, dear (29) (0) | 2023.01.25 |
---|---|
[민톰/늍갤] Wait a second, dear (28) (0) | 2023.01.25 |
[민톰/늍갤] Wait a second, dear (27) (1) | 2023.01.25 |
[민톰/늍갤] Wait a second, dear (26) (0) | 2023.01.25 |
[민톰/늍갤] Wait a second, dear (25) (0) | 2023.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