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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글 백업입니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실제 인물, 사건, 단체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창槍으로 창窓을 뚫으니 창구멍이냐, 창구멍이냐?"
"무슨 개, 말씀이십니까?"
무슨 개소리냐고 물으려다 갤리는 억지로 말을 바꾸었다. 외국어로 중얼거린 것은 알겠지만 갤리의 외국어 실력은 그렇게 좋은 편이 되지 못한다. 뉴트는 웃으며 의자에 기대었다.
"말장난."
"재미 없습니다만."
갤리는 자신이 한결 더 멍청해진 기분이었다. 외국어는 어렵다. 말장난이라니,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같은 발음이 반복된다는 정도는 이해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뉴트는 한 번 더 웃었다.
"이런 것도 있지. 눈目에 눈雪이 들어갔으니, 눈물이냐, 눈물이냐?"
"이해를 못하는데 재미 있겠습니까?"
"알고 있나? 넌 내 말벗으로 붙은 아이 중에 제일 멍청한 것 같아."
알고 있었다. 황태자의 벗으로 붙여지는 것은 보통 3품 이상 당상관의 추천을 받은 똑똑한 자제들이 붙여진다. 천재라고 소문이 자자해 황제 앞에 불려갈 정도가 아니면 다 그 안에서 결정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갤리는 둘 다 아니었고, 오히려 공부라면 손을 놓았다고 동네에서 수근대는 인재였다. 갤리는 문과는 처음부터 꿈도 꾸지 않고 그저 무과만을 착실히 준비했었다. 잡과도 나쁘지는 않았다. 요컨대, 먹고 살면 그만이었다. 부모님은 갤리를 딱하게 여겼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손재주가 나쁘지 않은 것이 유일한 갤리의 희망이었다. 똑똑하고 현명해서 태자의 벗으로 들여보내진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멍청한 것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저 아이로 하겠습니다.'
당하관이다만은 참상관인 아버지를 따라 궁에 잠시 들어왔을 때였다. 도시락을 두고 가신 아버지 덕에 서궁 근처까지 걸음을 할 수 있었다. 시전에서 사 드셔도 될 터인데 어머니는 꿋꿋하게 아버지에게 도시락을 전달하라 말했다. 갤리는, 당연하지만,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문 앞에서 아버지를 불러달라 말을 전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황실 행차가 있다 했다. 날듯이 달려나온 아버지가 머리를 눌러서 갤리는 넙죽 엎드렸다. 머리 위로 사박 사박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아주 가벼운 모래를 쓸고 가듯이 작은 소리에 갤리는 감탄 아닌 감탄을 했었다. 문득 발걸음 소리가 멈추기 전에는. 저 아이로 하겠습니다. 이상한 말이 들렸다. 고개를 들라. 위엄 있는 목소리가 명령했다.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것 같아서 갤리는 그저 넙죽 엎드려 있었다. 한 번 더 명령이 들리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갤리는 간신히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반짝이는 금발머리의 선인이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황태자는 천재로 그 이름이 높았다. 사대부로 태어나지 않아서 그렇지 과거에 나간다면 이미 그 나이에도 장원급제는 어렵지 않으리라 저잣거리 사람들은 수군대고는 했다. 경연에서 벌써 대제학과 대등하게 토론을 벌이려 하고 있다니 대충 알 만은 했다. 얼굴도 수려하고, 말도 잘 하며, 똑똑하고, 현명하다. 갤리의 반대항만을 모아놓은 것 같은 태자는 그렇게 제 벗으로 갤리를 골랐다.
그래서 갤리는 황태자를 그리 좋아할 수가 없었다. 열등감이라고 불러도 좋았다. 갤리는 일방적으로 놀림을 당하는 기분을 견딜 수가 없었다. 조롱 당하는 느낌도. 사람들은 모두 궁금해했다. 왜 저 아이가 태자 저하의 벗일까? 갤리도 그게 궁금했다. 왜? 돌려 말하는 법을 몰라서 갤리는 그대로 황태자에게 물었다. 왜 저를 고르셨습니까? 황태자는 방을 데굴데굴 구르며 마구 웃었다. 그리곤 포복절도라는 성어를 갤리에게 알려주었다. 오랜만에 실컷 웃었다면서. 뉴트는 갤리의 집안이 한미해서 좋았다고 했다. 다른 벗들과 다르게 부담없이 부를 수 있어서 좋았다며. 갤리는 이해할 수 없었고, 뉴트는 그런 면도 좋다고 머리를 두어 번 토닥거렸다. 그리고 쪽지시험을 보겠다고 했다. 갤리는 그 다음에도 사람들이 왜인지 이유를 물으면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의자에 등을 기댄 황자의 앞에는 이미 달필로 꽤나 많은 분량의 종이가 채워져 있었다. 이미 숙제를 다 끝낸 것이겠지. 당장 오늘 저녁에 있을 공부 시간에 다른 태자의 벗들의 종이도 저만큼은 채워져 있을 것이었다. 갤리는 다시 머리를 쥐어짜며 책에 얼굴을 박았다. 항상 쓸 데 없는 것은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갤리는 울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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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년 뒤 갤리는 무과에 합격했다. 장원은 아니었으나, 전시에서 황제에 눈에 드는 데에는 성공했다. 뉴트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어쩔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 뉴트는 받아든 홍패는 읽을 수 있냐며 갤리를 놀렸다. 갤리는 그 정도는 읽을 수 있게 되었다며 태자님 덕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뉴트는 인상을 찡그렸다. 갤리는 석 달 뒤 변방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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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족은 툭하면 성의 안쪽을 넘본다. 그들의 유목 생활을 해서인지 난폭해서인지 진실은 어느 누구도 모른다. 그저 그에 대비할 뿐이다. 이제 임기를 거의 채워가는 목사의 말로는 이민족이 힘을 키워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점점 더 힘이 강해져 간다고도. 갤리는 손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하얗게 김이 올라왔다. 그 겨울은 이민족을 막아내기가 유독 힘이 들었다. 목사가 바뀌었다. 윗나라와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고 목사가 장계를 올렸다고 말이 돌았다. 그래서 반대파가 상소를 올려서 목사를 교체했다는 말도. 황태자가 외교관으로 나섰다고 했다. 갤리는 그러려니 했다. 실물을 보기 전까지는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여전히 멍청한 표정이군."
오랜만에 본 얼굴은 그닥 변하지 않았다. 태자 저하. 갤리는 황당하게 중얼거렸다. 성벽 위 순시를 돌고 있는데 담비털로 양 볼을 감싼 태자가 눈 앞에 있었다. 갤리는 뉴트를 보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었다. 말단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높으신 분'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경력은 갤리에게 없다. 직접 찾아오다니. 갤리는 납작 업드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잠시 고민해야 했다. 뉴트가 웃었다.
"오늘 내 방 경호는 그대가 서시게."
저하? 뉴트는 갤리의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옆에 있던 처음 보는 사람이 당황하여 뉴트를 쫓아가며 저하, 하고 외었다. 갤리는 입을 벌린 채 그대로 멈춰 있어야 했다. 하룻밤을 생으로 새게 생겼으니 이보다 더 끔찍할 수 없었다.
그러나 더 끔찍한 일이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뉴트는 달포가 넘는 시간 동안 그곳에 머무르며 이민족과 대화를 나누었다. 갤리는 그 기간 내내내 황태자의 숙소 앞에서 불침번을 서야 했다. 다른 경호 인력들이 돌아가면서 눈이라도 붙이는 동안 갤리는 내내 뜬눈이었다. 그래도 역이 변하였으니 낮에는 눈을 붙일 수 있도록 해 주었지만 피로함은 어쩔 수 없었다. 이야기가 마무리 되고 황태자가 환궁한다고 하였을 때 갤리는 만세라도 부르고 싶었다.
아궁이불이 따닥따닥 타올랐다. 부엌에서 흘러나오는 훈기는 방문에 이르기 전에 공기 중으로 녹아 없어진다. 갤리는 언 귓바퀴를 녹이기 위해 열중쉬어 자세를 조금 풀고 귀를 문질렀다. 눈이 오려는지 날이 영 우중충했다. 차라리 오면 좀 따뜻해져서 나으련만 올 듯 말 듯만 하고 영 내리지를 않았다. 밖에 누구 있느냐.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예, 태자 저하."
"갤리?"
"예."
"들어와라."
갤리는 눈을 깜박였다. 근 스무 날 사이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갤리는 엉거주춤 방 안으로 들어갔다. 황자는 잠이 아예 들지 않았는지 빳빳하게 펴져 있는 이불 위에 그대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었다. 갤리는 앉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문간에 서 있었다. 황태자는 이 쪽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있었다.
"갤리."
"예, 저하."
잠시 황태자가 말을 멈췄다. 놀리려고 불렀나? 황태자의 취미는 이전의 삼 년 간 질리도록 배웠다. 그는 자신을 놀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도 아주. 하루도 빼놓지 않고 놀릴 정도로 좋아했다. 포복절도를 해 댈 정도로. 갤리는 인상을 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같이 수도로 올라가지 않겠느냐?"
"그."
갑작스런 제안에 갤리는 말을 잃었다. 뭐라고 해야하지. 저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말에 갤리는 어색하게 입을 뻐끔거렸다. 당장 생각나는 것은 하나 뿐이 없었다.
"임기가, 덜 끝났는지라."
"...그래."
황태자는 나가보라며 손을 저었다. 잠을 자려는지 솜이불을 뒤집어 쓰는 모습을 보며 갤리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문을 열자 바깥에서 눈이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갤리는 나름 쾌재를 불렀다. 그나마 덜 춥겠구나. 흔들리는 눈송이 사이로 너른 마당과 마당과 그 너머를 가로지르는 벽이 보였다. 벽은, 당연하지만 기와를 올려 마감했다. 팔작으로 모양을 낸 지붕을 가진 솟을 대문이 별채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 위에는. 갤리는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거셌다. 갤리는 몸을 옹송그려 황태자를 내리 눌렀다.
푹, 하고 뭔가가 꽂히는 소리가 들리고, 그 직후 갤리? 하고 황태자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등 뒤가 서늘했다. 옆구리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창문에 구멍이 났는지 찬바람이 새어들었다.
"저하."
저도 모르게 숨이 찼다. 이 정도 말하는데 숨이 차면 달릴 수 없을 텐데. 갤리는 걱정했다. 말하지 말라. 뉴트가 속삭이듯 말했다. 아무도 없느냐. 뉴트가 다시 한 번 속삭이듯 말했다. 귀가 이상한 걸지도 몰랐다. 갤리는 문득 이상한 것이 떠올랐다. 쓸 데 없는 것은 오래도 간다. 책을 그렇게 읽어도 아무것도 머리에 남는 것이 없더니 이것은 이상하게도 오래도 갔다.
"저하."
"말하지 말래도."
"저것은 창구멍입니까, 창구멍입니까?"
뉴트가 저를 내려다 보는 것이 느껴졌다. 갤리는 이런 것이나 질문하는 자신이 또다시 멍청하게 느껴졌다. 어쩌겠는가. 자신은, 다시 말하지만, 그리 똑똑하지 못하다. 뉴트가 질문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이것은 눈물이겠느냐, 눈물이겠느냐?"
여기는 실내인데다 따듯하여 눈이 내리지 않는다. 이상한 질문이었다. 갤리는 나비가 파닥거리는 것 같은 심장을 안고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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