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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D/전독시

[중혁독자] 날 만나러 와요

ㄷㄷㄷㄷ 2022. 12. 27. 11:40

*15세 미만은 구독을 권하지 않습니다.

*BL임.

한낮의 밀회. 미노소프트의 계열사에서 나온 소셜네트워크 데이팅앱 이름이다. 이름만 들어도 물음표를 띄우게 만드는 혼종 같은 이 앱은 대충 사람을 소개해주고 1대1로 대화하게 해주는 트위터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전체 공개 트윗 기능은 없지만 자기 소개 글은 있고 거기에 어느 정도까지는 길게 작성하는 게 가능하니까. 김독자는 거기에 대대적인 화력을 쏟아붓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코웃음을 쳤다. 뭔가의 혼종은 그만큼 성공하기 어려운 법이다. 포카락도 아니고. 그래도 이름 하나는 잘 지었네 싶기도 했다.

홍보 모델로 유중혁을 캐스팅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귀가 좀 뜨였다. 돈을 진짜 많이 쏟아붓고 있구나. 나름 탑 모델의 반열에 드는 유중혁을, 데이팅앱에 캐스팅 할 정도면 돈을 얼마나 부었는지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나름 유중혁 팬질을 하고 있는 김독자는 해당 광고가 들어있는 잡지를 소장용 덕질용 감상용 세 부를 사며 혹시 동영상 광고는 뜨지 않을까 기대했고, 광고가 떴다. 물에 잠긴 유중혁을 구석구석에서 핥는 듯한 카메라 워킹으로 찍은 후에 손에 들린 폰에 실행된 데이팅 앱을 비추고, 포스터와 같은 카피가 떴다. 카피는 단순했다. 날, 만나러, 와요. 미친 카피네. 독자는 혀를 내두르며 동영상 광고를 고화질로 저장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김독자는 한낮의 밀회에 별 생각이 없었다. 덕질 거리를 더 줘서 감사합니다. 잘 먹었습니다. 이 정도일 뿐.

그리고 귀찮은 일은 다음날 내려왔다.

말했듯이 한낮의 밀회는 미노소프트의 계열사에서 개발한 앱이다. 그것도 꽤나 공들인 프로젝트로, 어쩌면 그 위에서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말했다시피, 혼종은 성공하기 어려운 법이다. 게다가 부분 유료 서비스이기까지 하니. 뭐랬더라, 한달에 5명 이상의 사람을 매칭하려면 얼마씩 내야한다고 했던가. 독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계약직인 독자의 입장이고, 위에서는 또 생각이 다른 모양이다. 다른 계열사에까지 sos를 친 걸 보면.

한낮의 밀회를 사용해 보라는 '권고'가 내려왔다. 말이 권고지 부장이 한명오가 되고 보면 실상은 명령이다. 아직 계약직인 김독자로써는 거부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독자는 투덜거리며 점심시간에 한낮의 밀회를 핸드폰에 깔았다. 그리고 이메일을 사용해 회원가입을 진행했다. 생각하기를 : 야 이거 UI가 개판이네.

얼마나 개판이었냐하면 데이팅 앱의 필수 요소라 할 수 있는 남자 여자를 선택하는 부분이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빨간 색이 선택됐다는 거야 파란 색이 선택됐다는 거야? 그 와중에 남녀 선택지는 처음 선택한 것에서 변경할 수 없으니 신중하게 골라달라는 팝업까지 떴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가? 독자는 몇 번 터치하며 뚫어져라 화면을 바라보다 파란색이 선택되었다는 뜻임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남자를 클릭하고, 확실하게 하기 위해 한 번 더 터치한 후 독자는 확인 버튼을 눌러 계정을 생성했다. 그리고 독자는 몰랐다. 이 개판인 UI에서는 방심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한 번 더 터치한 그 순간 남자쪽에 빨간색이 들어왔고 반대로 여자 쪽에는 파란색이 들어왔다. 그리고 김독자는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 계정 생성 버튼을 눌렀다. 그러니까, 김독자는 본의아니게 여자 계정을 생성하고 만 것이다.


유중혁은 열이 받았다. 광고가 들어온 제품을 사용해 보아야 한다는 건 어느정도까지는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비록 음식은 한 입 먹고 더 이상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할 지언정. 한 번 입은 옷이 다시 드레스룸에 처박힌다고 할 지언정. 그러나 앱까지 사용해야한다고? 그게 계약사항에 포함이라도 되어 있단말인가? 사용한다면 언제까지 사용해야 하는데? 광고기간동안 내내? 이를 바득바득 갈았으나 앱을 깐 흔적이라도 남겨놓는 것이 덜 귀찮아지는 일이라는 걸 유중혁은 알고 있었다. 다음에는 소속사를 교체하리라. 포기와 오기로 점철된 인생에서 유중혁은 이번에는 포기를 골랐다. 그러나 계정을 제대로-ㅋ-생성하고 난 지 30분 후, 유중혁은 그 선택을 맹렬히 후회했다.

-유중혁...? 정말 유중혁이에요?

유중혁은 아이디도 정직했다. yoojunghuk_01. 바이오도 정직했다. 모델. 프로필 사진도 본인이었다. 당연히 수많은 팬과 연예인을 봤다는 놀라움에 젖은 수많은 사람들이 말을 걸었다. 유중혁의 핸드폰은 통제불능 상태에 빠졌다. 끊임없이 알람이 울려대는 바람에 무슨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알음알음 입소문을 타 실시간 검색어까지 올라간 건 아니지만 꽤 검색어 순위가 오르기까지 했다. 급하게 알람을 끄고 유중혁은 다시 한 번 분노에 빠졌다. 왜 자신이 이런 일을 겪어야 하지? 그래서 유중혁은 그 계정을 내다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이메일만 들어간 계정이었고 계정을 하나 더 만들기는 쉬웠다. 이번에는 아이디를 이렇게 정했다. yjh_02. 이번에도 정직했다. 바이오도 정직했다. 연예인. 프로필만 조금 비꼈다. 이번에는 제 얼굴이 아닌 뒷모습 사진으로 올렸다.

당연하지만 찾아올 사람들은 다 찾아왔다. 유중혁은 아까보다 더 쉽게 계정을 버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더 비틀기로 했다. yoojonghyuk_03. jung에서 joong으로 고치다가, 문득 유중혁은 o를 하나 지웠다. 다른 이름이 탄생한 것을 보고 유중혁은 그럭저럭 만족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바이오 칸을 비웠다. 프로필 사진도 그럭저럭 괜찮아보이게 찍은 손 사진으로 대체했다. 대신 관심사항란에 다음과 같이 넣었다. 해쉬태그, 유중혁. 스포츠, 음악, 미술, 등등 수많은 추천 관심사항을 제치고 유중혁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래도 본인이 유중혁이라는 소소한 자기주장이었다.

아이디 덕인지 프로필 덕인지 바이오 덕인지는 알 수 없지만 찾아오는 사람이 팍 줄었다. 거의 없다시피 해졌고 가끔 있어도 유중혁이 아니라는 한 마디에 순순히 돌아갔다. 유중혁은 만족했고, 앱은 그 자리에서 알람 하나 울리지 않으며 고대로 존재했다. 말 거는 친구 0명. 말 걸어주는 친구 0명. 그게 그 계정의 기록이었다.


김독자는 입에 빨대를 물고 생각했다. 아 , 귀찮아. 한명오는 이제 단순히 계정을 만들 뿐 아니라 누군가와 대화를 하도록 종용하기 시작했다. 일방적이라도 좋으니 하루에 다섯마디 이상씩 말을 하라는 거였다. 한낮의 밀회. 몰래 몰래 만나는 앱을 보고까지 해 가며 사용해야하나 내가. 김독자는 주름진 미간을 꾹꾹 누르며 빨대로 편의점에서 파는 차가운 커피 우유를 쭉 빨아들였다.

그렇다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출퇴근만 해도 덕질 시간은 충분히 모자랐다. 대화을 나누게 되면 가뜩이나 쪼개어 쓰는 시간이 더 줄어들게 될 것이 뻔했다. 게다가 이 앱에 돈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 대화와 가입을 종용한 것 치고는 처음 5인 이상을 위해 지급해야하는 비용을 회사에서는 대주지 않으리라 했다. 물론 잘 보이려면 사비를 내서 회원이 될 수도 있겠지만 김독자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럴만한 돈도 없었고. 김독자는 그래서 그냥, 누군가가 버리고 간 계정을 찾기로 했다. 그런 계정에다 대고 말을 걸면 돌아오는 답은 없을 거고, 혼잣말을 하면서도 충분히 다섯마디를 채울 수 있을 것이었다. 김독자는 아무도 쓰지 않는 것 같은 계정을 찾아 검색에 들어갔다.

그런데 뭐라고 검색해야 빈 계정이 나올까? 김독자는 이 앱이 나름 데이팅 앱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연예인을 찾는 사람은 없겠지. 그리하여 김독자는 검색창에 다음과 같이 검색한다 : 유중혁. 김독자가 제일 좋아하는 모델의 이름이자, 덕질 대상의 이름이기도 했다. 모델이다보니 간간히 나오는 화보와 인터뷰, 광고가 전부였지만 그 잘생긴 얼굴만 봐도 행복했다. ...간혹 성격이 더럽다는 얘기가 안 들리는 건 아니었는데, 그럼 독자는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 니들이 유중혁에 대해 뭘 알아? 잘 생기고 일 잘 하면 됐지! 유중혁이 무명일 때부터 인터뷰를 모으고 잡지를 스크랩해 온 김독자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 어쩌면 소속사보다도 모델로써의 유중혁을 잘 안다고 자부했다. 개인으로는, 글쎄. 연예인을 꼭 개인적으로 알 필요가 있을까. 그건 연예인에게도 가혹한 일이리라.

각설하고, 그렇게 검색하자 몇몇 계정이 나왔다. 유중혁을 좋아합니다, 유중혁 닮은 사람이 좋음, yoojunghyuk_01... 대부분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계정이었다. 특히 마지막 계정은 말을 거는 친구(팔로워)가 어찌나 많은지 손대기도 무서울 지경이었다. 공식 계정이라더니 진짜인가? 잠시 생각하다 흥미를 끊고 김독자는 휙휙 화면을 내렸다. 그러다 관심사항 칸에 해쉬태그, 유중혁 이라고 써 넣은 작은 계정을 하나 발견했다. 팔로잉도 팔로워도 0이고, 바이오도 갱신하지 않은지 오래되어 보였다. 김독자는 그 계정을 터치했다. 채팅창이 열렸다. 뭐라고 보낼까. 김독자는 잠시잠깐 고민했다. 딱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커피우유가 떨어졌는지 빨대에서 쪼르륵 소리가 났다. 김독자는 커피 우유가 들어있던 플라스틱 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사진을 전송했다. 그리고 사족을 덧붙였다.

-저녁밥.


유중혁은 오랜만에 울리는 핸드폰 알람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간만에 들어보는 알람이라 무슨 앱에서 울리는 것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자주 듣는 것은 아닌 게 확실했으니 메신저 앱은 아닌게 확실하고-그마저도 자주 듣는다고 하기는 좀 애매했지만-다른 앱은 알람을 전부 차단해 두었는데 대체 무슨 어플인지. 유중혁은 그 이상 생각하지 않고 핸드폰을 열었다. 대화를 건 사람이 있어요! 지금 만나러 가 보세요. 한낮의 밀회. 알림창에 한 줄이 곱게 떠 있었다. 유중혁은 혀를 찼다. 한동안 조용하다 싶었더니 또 누군가 자신을 유중혁이라고 착각-실은 착각이 아니지만-하고 대화를 건 모양이었다. 유중혁은 대충 뭐라고 대답할지를 생각하며 어플 알림을 터치했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문구가 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셋 중 하나의 패턴이었다. 매니저와 소속사만 알고 있었지만, 유중혁은 게임을 좋아했고 패턴 분석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지금도 약간 게임하는 느낌으로 사람들을 분석하고 있다는 건 비밀이었지만.

여하간, 첫 번째 패턴은 다음과 같았다 : 혹시 유중혁 씨...? 모델 유중혁 씨 아니세요? 그럼 유중혁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평소에 쓰던 말투가 아니라 좀 어색하긴 했지만 대략 이런 대화를 몇 마디 나누고 나면 상대방은쉽게 떠났다.

두 번째 패턴은 아예 유중혁인 걸 확정짓고 들어오는 사람들이었다. 유중혁씨 팬이에요! 너무 좋아해요! 그럼 유중혁은 또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 잘못 봤습니다. 저는 유중혁이 아닙니다. 위의 두 패턴에 대한 대꾸에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는 자존감의 타격 같은 것도 물론 없었다.

세번째 패턴이 조금 끈질겼는데, 그런 것들과는 상관 없이 그냥 데이팅 앱의 본질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 안녕하세요, 프로필 사진이 마음에 드는데 본인이신가요? 저랑 취미가 맞으실 거 같은데 만날 수 있을까요? 패턴도 다양한 편이었고 떨어트리기도 쉽지 않았다. 유중혁은 그럼 최선을 다해 본모습을 내비쳤다. 싫다. 생각 없다. 본인이지만 그래서 어떻다는 거지? 꺼지라고 하지 않은 건 모델로써의 최소한의 이미지 관리였다. 그것만으로도 성질을 많이 죽인 것이었다. 여하간 그러면 금방 또 수그러들었다. 안온하고 안정적인 나날들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많이 달랐다. 새로운 패턴이 나타났다.

사진이 하나 전송되었다. 혹시 음란 사진을 보내는 스팸계정인가. 유중혁은 의심하며 신고 버튼이 어디있는지를 찾았다. 그러나 색은 전혀 살색이 아니었다. 썸네일만 봐도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갈색 테이블 위에 뭔가가 얹어져 있을 뿐이었다. 유중혁은 사진을 클릭했다. 그냥, 근처 편의점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커피우유병이었다. 띠링, 알람이 한 번 더 왔다. 유중혁은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 사진에서 나왔다. 사진 밑에 한 마디가 올라와 있었다.

-저녁밥.

유중혁은 이제 약간 혼란에 빠졌다. 뭐지? 뭘 원하는 거지?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이런 걸 보내는 거지? 유중혁은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핸드폰 자판 위에 손을 놓았다가, 떼었다가, 다시 올려놓기를 반복했다. 그냥 혼잣말이었다. 혼잣말이었는데 그걸 굳이 '나에게' '보내는' 건 왜일까. 지금까지 말 걸어온 사람들 때문인지 약간의 자의식 과잉같은 감이 있었지만 유중혁은 애써 무시했다. 이런 용도로 쓰려면 sns가 세상에 왜 있겠는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유중혁은 어플을 나왔다. 결국 답장은 한 통도 보내지 못했다. 그날 밤, 어플로 메시지가 한 통 더 왔다.

-이 시간에도 지하철 사람 완전 많네.

유중혁은 이번에도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그 사람은 그렇게 잊을만하면 한 번씩 메시지를 보냈다. 가끔은 상사 욕이 올라올 때도 있었고 직장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 할 때도 있었다. 유중혁은 그렇게 오는 메시지들을 꼬박꼬박 읽으면서도, 한 번도 답장하지 않았다. 이 데이팅 앱은 메신저 앱이 아니라서일까, 읽었다는 표시가 나지 않았다.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하간 유중혁은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패턴을 알았지만 어떻게 떨구어내야 할지 알 수 없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다보니, 유중혁은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 사람은 말을 꽤 재미있게 할 줄 알았다. 혼잣말인데도 불구하고 보고 있는 게 꽤 흥미로웠다.

특별히 말하는 게 공감이 가지는 않았다. 유중혁의 생활은 불규칙했고, 촬영은 밤낮이 없었다. 야근이 많아 보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낮근무인 상대방과는 달랐다. 예를 들자면, 이런 메시지가 온 적이 있었다. "이렇게나 야근을 많이 하다니 내가 낮근무인지 밤근무인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일할 거면 아예 밤근무로 옮겨서 출근을 늦게 시켜주던가! 어차피 그것도 칼퇴는 못할지도." 유중혁은 조삼모사라고 생각했지만 조금 웃었다. 그런 식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중혁은 그 메시지를 조금 기다리게 되었다. 적으면 하루에 다섯 개, 많아도 하루에 열 개를 넘지 않는 그 메시지들을 보며 유중혁은 아주 조금 아쉽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런 사람이면 옆에서 종알종알 얘기해도 좋을텐데. 언제부터 자신이 상대방 말을 잘 들어줬다고 감히 그런 생각을 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며칠이 또 흐르고 보니, 한 가지 거슬리는 점이 생겼다.

-저녁밥 ㅎㅎ

바로 특정 시간만 되면 보내는 메시지였다. 사진 한 장이 덜렁. 그리고 그 뒤에 따라오는 저녁밥이라는 메시지. 맥락을 보자면 아마 그 사진이 자신의 저녁이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사진의 대부분은 커피우유 병, 캔, 종이 상자... 어쨌단, 커피우유 하나였다. 쓸데 없이 당분과 칼로리만 높고 영양가는 별로인 그 커피우유. 그 날도 똑같은메시지가 와서 유중혁은 미간을 짚었다. 고뇌하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는 멋있었고 촬영장에서는 카메라 셔터가 끊이지 않았다. 몇 시간을 고뇌하다 유중혁은 데이팅 앱을 켰다. 그리고 메시지를 보냈다. 몇 주만의 첫 메시지였다.

-그게 저녁의 전부인가?

...참, 딱딱하기 그지 없었다.


김독자는 그날도 커피캔을 저녁 대용으로 홀짝이고 있었다. 한명오 부장은 일일히 다섯 문장 이상씩 쓰는지를 검사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시간이 넘쳐나는 인간이었으면... 그런 인간인가. 그만큼 성의가 넘치는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한낮의 밀회를 사용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몇 번 사용해보고 나니 나름대로 이것저것 말하는 것이 좋았다. 하기 어려운 말들을 꺼내놓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돌아오지 않는 대화라도 꺼내놓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말해도 혼잣말이라면, 글로 쓰는 게 혼잣말인 게 뭐가 나쁘겠는가.

"유중혁 잘 생겼다..."

김독자는 잡지 귀퉁이를 만지작거리며-덕질용이었다-중얼거렸다. 날 만나러 와요. 실제로는 만날수도 없는데 무슨. 끝내주는 카피였지만 괜히 속으로 태클을 한 번 걸어보았다. 유중혁은 팬 사인회 같은 거 안 하나. 안 하겠지. 귀에 꽂혀있는 이어폰에서는 cm송으로 사용했던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김독자는 배를 깔고 엎드렸다. 그리고 핸드폰에서 한낮의 밀회를 열었다.

시간은 새벽 세 시. 얼마 안 있으면 해가 뜰 것이었다. 내일은 쉬는 날이었기 때문에 부담은 없었지만 그래도 늦은 시간이긴 했다. 하지만 어차피 혼잣말인데 뭐가 어떨까. 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없이 사그라 들 말이었다. 김독자는 그래서 조금 더 제멋대로 굴어 보기로 했다.

-아 유중혁 잘 생겼다!!! 신이 내린 미모다!!! 사람이 낳았을리가 없다!!!!

한참 그렇게 헛소리를 쓰고나서 김독자는 습관적으로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키패드가 화면에서 사라지고 보내지고 있다는 로딩 표시가 화면에서 돌아갔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업로드된 문장의 다음 문장과의 거리가 이상하게 넓었다. 그리고 자신이 쓰지 않은 말이 올라와 있었다.

-그게 저녁의 전부인가?

그 말에는, 상대방이 한 말이라는 표시가 찍혀있었다.

Yoojonghyuk_03 : 그게 저녁의 전부인가?

화면을 열어놓은 상태여서 알람이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귓가에 흘러나오는 팝송을 들으면서 김독자는 얼어붙었다. 사... 삭제. 삭제하자. 방금 보낸 헛소리라도 삭제하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한낮의 밀회는 그런 기능을 지원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삭제할 방법을 찾아서 구글링을 하고 있는데 알림이 왔다. 한낮의 밀회였다.

-사람이 낳았다.

이거 미친 놈 아냐! 태클 걸 부분이 거기 밖에 없냐고! 김독자는 이건 망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부. 그래서 얌전히, 다음 메시지를 작성했다.

-저어...

-죄송합니다; 제가 이 계정은 안 쓰는 계정인 줄 알고 그냥 아무 말이나 막 써버렸네요.

-앞으로는 그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무례한 부탁이지만

-제가 그동안 썼던 이야기는 잊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독자는 최선을 다해서 정중하게 글을 이었다. 물론 저쪽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잘못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상한 소리를 떠들어댄 이쪽의 잘못이 더 클테니까. 젠장. 계정을 없애면 그동안 썼던 게 지워지려나? 다시 한 번 검색을 해 보았지만 이렇다할 정보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낮의 밀회 자체가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서비스인데다 인기가 그렇게 높지도 않은 탓이었다. Q&A로 문의해 봐야 하나? 또 알람이 울렸다.

-왜지?

...이건 진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김독자는 인상을 조금 찡그렸다. 그러니까, 잊어주기 싫다는 말인가? 왜? 어째서? 아니 자기가 무슨 말을 했다고? 자신이 한 말들을 한 번 쭉 훑어 보았지만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평범한 불평 뿐이었다. 기껏해야 좀 튀는 말이라면 방금 보낸 유중혁 찬양 정도일까.

-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왜 얘기를 그만두겠다는 거지?

-?????

김독자는 이제 혼란에 빠졌다. 아니 그건 내 일기장인 줄 알았을 때에나 가능한 거였고... 누가 읽는다는 걸 뻔히 아는데 대체 뭘 쓰란 말인가. 지금도 민망해서 좀 모든 시간을 되돌리고 싶고 당신 기억을 지우고 싶은 심정인데요? 메시지가 또 올라왔다.

-바쁘군. 다녀오겠다.

-그 사이에 계폭 했다거나 하면

-죽인다, kdj_9158.

...이거 순 미친 놈 아냐! 아니 지가 나를 어떻게 안다고 죽인다 만다야! 김독자는 열이 뻗히고 황당했다. 그건 부끄러움을 잊을 수준이었던데다, 새벽 특유의 감성에 아직까지 잠들지 못한 여파에 따른 약간의 수면부족까지 합쳐져서 김독자는 와다다 말을 쏟아내고 말았다.

-아니 내가 계폭을 하던 말던 무슨 상관입니까??

-저기요 댁이 내 일기장을 읽고 있는데 내가 뭘 써요 예?

-내 덕질 일기장이라도 읽고 싶다면그러시던가!

-유중혁 잘생겼다! 몸매도 풍기문란하다! 모델 되기를 천만다행이다! 모델 아니었으면 뭘 했을까! 뭘 해도 잘 나갔겠지만
그래도 모델만큼 세상을 구원하진 못했을 거다! 중혁아 너는 세상을 구했다 알지??!!!??!!

-이번 광고가 몇 개월짜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완전 잘 찍었다! 카피랑 노래가 끝내주네!! 사진발도 완전 잘 받았다!
아니 못 받았는데 이만큼이나 찍힌 걸 수도 있지 우리 중혁이 완전 잘생겼으니까!!
옷 입고 물에 들어가는 거 별로랬는데 이건 cg니??? Cg면 어때 이렇게 잘났는데!!!

....참으로 장대한 헛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김독자는 한참을 그렇게 글자를 쏟아내다 핸드폰을 내던지고 푹 이불을 뒤집어 썼다. 그리고 씩씩 숨을 고르다 잠에 들었다. 멀리서 동이 터오르고 있었다.


유중혁은 핸드폰에서 끊임없이 울리던 진동이 잦아들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핸드폰을 집어들 수 있었다. 표정이 도통 풀리지 않아서 촬영이 길어진 탓이었다. 좀 더 부드러운 남자가 컨셉이었는데-그러면서 왜 유중혁을 캐스팅했는지는 알다가도 모르겠지만-표정이 저녁나절부터 험악해서 풀리지를 않으니 사진작가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불행중 다행이라면 그것도 잘생겨서 컨셉을 바꿀까 생각하려는 타이밍으로 휴식시간을 가져 유중혁은 드디어 핸드폰에 손을 댈 수 있었던 것이었다.

물을 들이키며 쌓여있는 한낮의 밀회 알람을 터치한 유중혁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덕질 일기장이라도 읽으라고. 자신의 팬이었나보지. 혹시 고도의 접근방법이었나? 유중혁은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곡선 위에 올라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글을 남겨주었다는 건 기분이 좋았는데, 고도의 전략을 쓴 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기분이 나빴다. 흠, 어쩔까. 잠시 핸드폰 화면을 툭툭 두드린 유중혁은 키패드를 열었다.

-그래서, 저녁은 그게 다였나보지?

일단은, 지켜보기로 하자.

"중혁 씨! 방금 그 표정! 그 표정이야!"

사진작가가 외쳐서 유중혁은 고개를 들었다.


"독자 씨."

김독자는 고개를 들었다. 손은 습관적으로 핸드폰 화면을 끄면서였다. 유상아가 김독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야 당연했다. 김독자는 휴게실의 빈 의자 중 하나에 앉아있었고 유상아는 이제 막 휴게실에 들어와 서 있었으니까.

"상아 씨."

"식사 중이셨어요?"

부르시지, 저도 방금 식사하고 왔는데. 상아가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대화가 길어질 모양이었다. 어느정도까지는 빈말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고마운 말이었다. 비용의 문제를 차치하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도시락 드시는 거에요?"

"아, 앞의 편의점에 신상품이 나왔다고 해서요."

반은 거짓말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반은 진담이긴 하지만. 더 뭔가를 구매할 여력이 자신에게 있으려나. 김독자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유상아의 표정이 묘했다.

"백반이라도 드시지... 도시락은 아무래도 몸에 좀, 안 좋을 것 같아서요."

"그 잔소리라면 많이 들었어요..."

김독자는 어색하게 웃었다. 상아 씨는 식사, 하셨다고 하셨나요? 네, 회식하고 할 일이 좀 있어서... 회식이라. 김독자는 젓가락을 물었다. 듣자하니 유상아의 통역 능력이 또 빛을 발했다는 모양이었다. 아마 유상아가 회식의 주인공이었을 거고... 인센티브와 승진은 따놓은 당상이겠지. 잘도 이 시간에 풀려났구만. 김독자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아, 죄송합니다."

"'한낮의 밀회'네요?"

김독자는 눈을 깜박였다. 알람소리만 듣고도 무슨 앱인지를 짐작하다니. 물론 한낮의 밀회가 좀 알람 소리가 독특하긴 했다. 전용 알람 소리도 따로 있었고. 그렇다고는 해도-

"저도 나름 열성적으로 사용했었거든요. 공지도 내려왔고 해서."

과거형이다. 김독자는 그 사실을 기민하게 캐치했다. 유상아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래도 이상한 의도로 말을 거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요. 그냥 평범하게 대화할 때는 재미있는데, 대화 시작하자마자 만나자느니 하는 사람들이 꼭 있어서..."

"아..."

"그리고 무엇보다, 이성하고 밖에 대화 할 수 없는 시스템이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예?"

그런 시스템이었나?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댄데 그런 식으로 시스템을 만드나. 김독자는 황당하게 까맣게 꺼진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알람이 한 번 더 울렸다.

-kdj_9158, 대답 안 하나?

지금 이 사람도, 여자라는 거지? 김독자는 약한 혼란에 빠졌다. 자기가 생성한 계정이 여자 계정인 줄도 모르고.


-편의점 도시락을 식사라고 부른다면 네가 먹는 커피우유도 식사다.

-와 내 저녁밥을 드디어 인정해 줬어. 나 다시 커피 마셔도 돼?

-죽인다

-멋지다는 거야 날 죽이겠다는 거야

-죽인다 kdj_9158

-kdj_9158, 대답 안 하나?

-유중혁 잘생겼다~~~~~~~

-혼잣말을 하란 소리가 아니다

-내맘이다

-근데 반박하는 데가 항상 미묘하네. 유중혁 좋아해?

-싫어하지 않는다.

-그렇구나 ㅎ

-?

-?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죽어라.

-아 왜!!

-관심 사항에 유중혁까지 등록해 놓고! 내가 착각하는 게 아니잖아!

-너야말로 유중혁을 상당히 좋아하나 보지.

-팬이야. 더할나위 없을 만큼.

-왜지?

-왜냐니 우리 중혁이 얼굴을 좀 봐라 팬 아닐 수 있나!

-(사진)

-(사진)

-장난하나

-내가 왜 팬인지를 꼭 말해야 하나. 걍 대충 넘어가.

-kdj_9158

-yoojonghyuk_03, 좀.

-유중혁.

-?

-유중혁이라고 불러라.

-ㅋㅋㅋㅋㅋㅋㅋㅋ 야 넠ㅋㅋㅋㅋㅋㅋㅋ

-본명이다.

-어 이름이 독특하네;

-독특한가?

-좀?

-네 이름은?

-알려주기 싫은가?

-김독자

-고전적인 이름이군.

-? 처음 보는 반응이다.

-뭐가 또

-아니 우리 중혁이가 싱기해서 구래찌~~~~

-죽인다 김독자

.

.

.

.


유중혁은 손톱으로 의자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핸드폰 화면에는 김독자가 하나 가득 차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김독자가 떨어 놓은 호들갑들이. 오늘은 유중혁이 찍은 새 화보가 공개되는 날이었다. 곧 있을 s/s 시즌에 맞추어 공개되는 화보였는데, 품절까지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팔렸다고 들었다. 화보가 많이 나오긴 했지만 일단 대량으로 나오는 잡지니 품절 되면 그것도 문제다. E북으로도 판매하던가? 어차피 모델료만 받고 말았으니 정확히는 모를 노릇이다. 어쨌든, 지금 유중혁에게 중요한 것은 김독자가 신나게 이야기해 대고 있는 사항에 관한 것이었다.

-맙소사 손가락 배치해 놓은 거 봐 검지만 살짝 굽혀서 반쯤 세워놓다니 날 죽이려고.

일단 의도가 없었다는 건 차치해 놓고라도 누굴 죽이려는 의도는 확실히 아니었는데.

-눈빛 봐라 요새 쫌 풀어졌다고 말이 많던데 나는 보들보들해 진 게 더 좋더라 달큰달큰해.

...그럴 생각 역시 추호도 없었다. 유중혁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쉴틈없이 올라오는 빽빽한 덕질의 흔적을 살폈다. 아무래도, 자신을, 좋아하는 게 맞는 것 같지? 연예인을 대상으로 하는 애정이라도 확실히 있는 게 맞다. 그런데 왜 자신이 '진짜' 유중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걸까. 이름을 밝히자고 생각하고- 아니 사실은 상당히 충동적으로 이름을 밝히고 유중혁은 후회했다. 한 10초 정도? 그러나 김독자가 보인 반응은 그게 다였다. '이름이 독특하네.' 좀 전에 그렇게 유중혁에 대해 떠들어 놓고 동명이인인 게 너무 확실하다는 투라서 유중혁은 조금 열불이 터졌다. 그래놓고 자기 이름은 알려주기 싫다는 듯이 한참을 끌다가 간신히 툭 뱉었다. 좀, 할머니 같은 이름이라 그랬나. 그래도 귀여운 이름이었다. 독특하기도 했고. 유중혁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채 화면을 조금 위로 끌어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그 사이 김독자가 떠든 이야기가 갱신되고 있었다.

-아 유중혁 진짜... 너무 잘났다... 우리 중혁이... 실물로 한 번만 보고 싶다...

-날 보고 싶다는 건가?

-너 말고 우리 중혁이 말야

-그래 그러니까 나.

어차피 동일인물인 것을. 본인 답지 않게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는 건지 유중혁은 입꼬리를 조금 올리고 자판을 두드렸다. 화면 안에서 김독자가 유들유들하게 고개를 젓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널 만나서 뭘어쩌겠니 나는 모델 유중혁을 영접하고 싶을 뿐이란다 너 말고

-죽인다 김독자

흠. 유중혁은 작게 소리를 내었다. 주변에서 유중혁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준비하던 스타일리스트나 코디들이 조금 놀랐지만 유중혁은 까맣게 몰랐다. 눈을 약간 내리깔고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조차 화보라 그들은 금세 안정을 찾았다. 여튼, 중요한 것은, 유중혁의 머릿속이었다.

그렇게 만나고 싶다면 한 번쯤 만나게 해 줄까.

지각 변동 수준의 대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다음 날, 김독자는 어제 산 화보를 열심히 덕질하러 들어간 팬 카페에서 팬 미팅을 잡는다는 공지사항을 보게 되었다. 유중혁과 김독자의 한낮의 밀회 채팅창은, 아주 난리가 났다.

각설하자면, 김독자는 팬미팅에 성공적으로 당첨되었다. 오로지 스스로의 힘과 운만으로 이루어낸 쾌거였다. 만일 당첨되지 않는다면 뭐라고 말이라도 흘려야 할까, 어떻게 해야 편파 의혹에서 벗어나면서 김독자를 당첨시킬 수 있을까-이미 그 시점에서 편파라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하는 생각을 하던 유중혁은 반쯤 울면서 자신이 당첨되었다며 한낮의 밀회를 거는 김독자에게 따뜻하게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날려주었다. 일단 따뜻하다는 건 본인 생각이지만. 여하간 김독자는 실물을 영접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날아갈 듯이 행복해 보였고 유중혁은 그 덕에 꽤나 우쭐해졌다. 아주 오랜 시간 연예계에서 활동해 왔지만 이렇게 행복해 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람이 들러붙는 것을 싫어하는 본인의 성격 탓도 있었지만 유중혁은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김독자는 아예 그날 연차를 쓸 생각이라고 밝혔다. 야근이건 뭐건 자신은 모르겠다고. 그래도 괜찮은가? 회사의 생리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걱정이 되었다. 뜻을 전달하자 김독자는 다음과 같이 답장을 보냈다.

-중혁아 넌 몰라. 우리 중혁이가 얼마나 소중한데.

기분이 약간 더러우면서도 좋았다. 모른다며 무시당했다는 기분이 한 숟갈, 소중하다는 말에 조금 들뜨는 기분이 한 줌. 처음 겪어보는 기분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유중혁은 별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잠시 그 느낌을 곱씹었을 뿐. 김독자의 말이 또 다시 나타날 때까지 말이다.

-참, 너도 와?

유중혁은 잠시 손을 멈추었다가, 이번에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도 간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본인이 가지 않으면 무산되는 행사였으니까.

-뭐야 그런데 그렇게 침착했다고? 진짜 유중혁 좋아하는 거 맞아?

-말했지. 싫어하지 않는다고.

-아... 진짜 덕계못이네.

-?

까울 표는 없다만... 뭐라고 적으려다 유중혁은 그만 두었다. 그리고 덕계못의 뜻을 인터넷에 검색했다. 중혁아? 알림이 와서 유중혁은 다시 한낮의 밀회에 접속했다.

-너는 계를 타지 않았나?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후로도 한참이나 ㅋ의 행렬이 이어졌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왜 웃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피식 웃었다. 제멋대로 상상한 이미지지만 김독자의 이미지가 화면 너머로 떠올랐다. 분명 귀여울 것이다. 자신 앞에서는 얼굴이 빨개져서 제대로 말도 못하는 게 아닐까? 소규모 팬미팅이니만큼 한 사람 한 사람 지켜볼 시간은 많을 것이다. 사람은 많겠지만, 그 중에 김독자를 분명히 찾을 수 있으리라. 유중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날 무슨 옷 입고 갈지는 정했나?

...그렇다고 처음부터 특정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도 않았지만. 유중혁은 집요했다.

-나? 정장에 흰 색 코트 입고 가려고 하는데.

정장에 흰 코트. 깔끔한 정장에다 흰 코트를 입은 귀여운 사람. 생각하자니 꽤나 좋았다. 지금 세탁소에 고이 모셔두었다는 말을 보면서 유중혁은 또 피식피식 웃었다. 잠시 후 사진이 몇 통 도착했다. 넌 이중에서 뭐가 더 나아보여? 유중혁은 사진 속 물품들을 유심히 보았다. 전자기기도 있었고 작은 소품들도 있었다. 간식은 당연하다는 듯이 끼어있었다. 선물을 고르다 조언을 구하는 모양이었다. 김독자는 몰랐지만 정말 좋은 조언 상대가 아닐 수 없었다. 유중혁은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

-가격대가 너무 높은 거 아닌가?

-중혁이한테 줄 건데 이정도는 되어야지.

날 뭘로 보는 거지. 자신의 안목이 까다롭다는 사실은 저 멀리 날려버리고 유중혁은 반박했다.

-네 통장을 생각해라.

-그래서 겨우 이 수준이야...

원래는 뭘 주려고 했길래. 유중혁은 기도 차지 않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적당히 사진 중 하나를 골라주며 하위호환을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김독자는 별로 듣지 않는 것 같았지만.


한낮의 밀회는 의외로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금세 서비스 종료가 일어나는 건 아닐까, 그럼 한낮의 밀회의 중혁이를 어디서 봐야 할까, 볼 수는 있을까 하고 김독자가 꽤 고민한 것과는 달리 알음알음 입소문을 타는 모양이었다. 하긴 우리 중혁이도 한낮의 밀회 쓴다는 소문이 있었지. 김독자는 정말 오랜만에 산 커피우유를 마시며 생각했다. 인터넷에서 열심히 찾아보긴 했지만 워낙 가격대가 있는 선물을 주문했다보니 당분간은 개털이다. 편의점 도시락을 먹을만한 입맛도 아니고 해서 그냥 커피우유나 한 잔 마시고 있었다. 조그마한 플라스틱 잔은 금방 바닥을 드러내서 쪼르륵 소리가 났다. 음. 중혁이가 잔소리할텐데 이건 어떻게 피하지. 오늘 하루 한낮의 밀회에 접속을 하지 말까? 그러나 분명히 중혁이는 자신을 기다릴 것이다. 특별히 시간을 정해놓고 접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둘은 서로를 기다렸다. 말을 걸고, 아무리 답장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전에 보낸 말을 잊지 않았다. 그 감각은,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것이라서 김독자는 꽤나 가슴이 술렁거렸다. 저 앞으로 혼자 나아갈 수도 있는 사람이 자신을 기다려주고 있다는 것.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 이런 감정에 설렌다는 딱지를 붙이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잔소리를 듣기는 싫었다. 어차피 며칠 후면 팬미팅이니까 보게 되긴 하겠는데... 김독자는 세탁소에서 찾아와 걸어둔 흰 코트와 정장을 곁눈질하며 웹서핑하던 스마트폰 화면을 괜히 스크롤했다. 이미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냥 오늘 좀 혼나고 말까. 그러나 당분간은 평소처럼 커피우유나 저녁으로 먹을 예정이었다. 당분간 내내 혼나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건 좀 싫은데... 김독자는 몸을 뒤척이며 우울하게 생각했다. 알림이 울렸다.

-김독자 자나?

-아니 아직

잘 거라고 보낼 걸. 김독자는 조금 후회하며 화면을 문질렀다. 이 쯤 되면 그냥 습관이었다. 중혁이에게 한낮의 밀회가 걸려오면 거절할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대답을 하고 만다... 김독자는 이불을 몸에 말며 한숨을 푹 쉬었다.

-다행이군. 저녁은 챙겼나.

-챙겼어.

-또 커피 우유를 마신 건 아니겠지.

-너 나 감시해?

최근에는 그래도 중혁이 때문에 꼬박꼬박 밥을 챙겨 먹었고 그래서 한동안은 중혁이도 커피우유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딱 이렇게 말을 꺼내다니. 김독자는 혀를 내둘렀다.

-무슨 헛소리냐. 설마 또 굶은 건 아니겠지.

-덕분에 잘 챙겨먹고 있다고.

-그렇담 뭘 먹었지?

-커피우유.

-김독자!

얘가 이렇게 쓰면 진짜 내 이름을 외친 거 같단 말이지. 독자는 웃으며 한바퀴를 굴렀다. 그리고 말을 돌리기 위해 한 마디를 꺼냈다.

-넌 밥 먹었어?

-김밥 먹었다.

-바빴나 보네.

-지금도 일하는 중에 잠깐 쉬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 일을 해? 힘들겠다. 김독자는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자신은 슬슬 졸려오는 시간인데 중혁이는 일을 하고 있단다. 야근이 많은 직업이라니. 김독자는 약간 심장이 조여오는 것 같았다.

심장이?

왜?

김독자는 자신의 감정을 금방 깨달았다. 자신도 만만찮게 야근이 많은 직업인데 상대방이 야근이 많다는 데에서 느끼는 게 공감이 아니라 안타까움이라니 너무나 뻔했다. 그런 자신이 뻔뻔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지금껏 몰랐을까. 그러나 김독자는 그 감정을 너무나도 태연하게 접기로 결정했다. 접는 것도 빨랐다. 아마 중혁이는 이렇게 시시덕거릴 수 있는 상대방인 자신이 편한 것일 터였다. 저렇게 다정하고 세세하게 신경 써주는 사람이 인기가 없을리가 없을 터였다. 그런 사람이 뭘 보고 자신을 좋아해 주겠는가. 그냥 편한 친구 상대로만 남는 게 저한테 나으리라. 김독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낮의 밀회에 글을 남겼다.

-어제도 바빴네. 고생했어. 난 지금 출발하는 중!

빨리 깨닫고 빨리 접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며칠이 걸렸다. 그 동안 대화를 입으로 했는지 손으로 했는지 모를 지경이다. 한낮의 밀회가 걸려올 때마다 고양이처럼 놀라고 한참 이따나 답변하는 것을 며칠이나 했다. 바빴다고 사과해야겠다. 김독자는 구두주걱으로 로퍼를 신으며 생각했다. ...중혁이도 팬미팅 온다고 했지? 그리고는 제 양 손으로 제 뺨을 두어번 가볍게 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오늘은 우리 중혁이를 보는 날이다. 우리 중혁이를 보는데에만 집중해야지. 그 편이 중혁이도 좋게 생각하는 걸 테다. 문 밖으로 나서는 김독자의 코트자락이 문이 닫히며 인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한편, 그 시점의 유중혁은 매우 열이 받아 있었다. 속된 말로 해도 좋다면, 빡이 쳐 있었다. 요 며칠 째 김독자가 영 답변이 부실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뭐하냐고 한낮의 밀회를 걸면 다음날이 되어서야 출근한다고 답변이 왔고, 그에 대한 답장으로 잘 가고 있냐고 물으면 또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바빴다며 답장이 왔다. 할 말이 없으면 우리 중혁이 예찬이라도 보내던 평소와는 너무나 다른 태도였다. 뭐가 문제냐 김독자. 자꾸만 미간이 구겨져서 화장을 해 주던 스타일리스트가 난색을 했다. 그래도 오늘은 볼 수 있겠지. 유중혁은 기분을 좀 풀기 위해 노력했다. 김독자는 흰 코트를 입고 오리라 말했다. 겨울 코트는 죄다 짙은색 계열이니 흰 코트를 입고 오면 분명 눈에 띌 것이었다. 그렇다면 발견하기도 어렵지 않으리라. 그 쪽은 모르겠지만, 이 쪽은 볼 수 있다. 유중혁의 미간이 조금은 풀렸다. 코디가 옷을 들고 대기실로 들어왔다. 유중혁이 주장한 대로 한 손에는 검은 코트가 들려있었다. 뭘 입어도 화보처럼 잘 어울리니 입히는 보람이 있었다. 이제 팬 미팅까지 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다. 유중혁은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팬미팅장은 커다란 공연장 수준이었다. 당연히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다. 정원이 800명이었던가? 그런데 어째 그것보다 훨 사람이 많아보였다. 티켓이 없으면 들어갈 수도 없을텐데도 불구하고 밖에서부터 죽치고 있는 사람들도 있어보였다. 그야 유중혁은 모델 치고는 팬덤이 꽤 큰 편이었는데, 이렇다할 팬 행사가 제대로 없었다. 지금까지는. 내가 덕질한 것만 몇 년인데 그 사이에 한 번도 팬 행사가 없었다는 게... 유중혁의 특징이긴 하지만... 김독자는 조금 찝찝하게 생각하며 티켓을 스태프에게 내밀었다. 스태프는 티켓을 확인하고 안 쪽으로 들어가라며 문을 가리켰다. 공연장 안에도 앉을 수 있게 푹신한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연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좋아. 이 정도면 나도 훌륭한 새우젓 중 한마리로 묻힐 수 있겠지! 그런 것 치고는 흰 코트에 정장이라는 옷차림이 생각보다 눈에 띄었지만 김독자는 신경쓰지 못했다. 생각보다 긴장이 많이 되었다. 그닥 좋은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라 중간 정도에 있는 제 자리를 확인하고 선물꾸러미를 내려놓았다. 이제 미팅 시작까지는 몇 분 남지 않았다. 괜히 긴장되는 기분에 김독자는 깊이 숨을 쉬었다. 잠시 후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빼곡히 자리가 채워졌다. 김독자의 옆자리에도 사람이 들어찼다. MC가 등장해 뭐라뭐라 말하는 것이 들렸다. 인삿말과 소갯말, 약간 장황한 환기. 몇몇 화보가 MC의 말과 같이 흘러갔다. 그리고 음악이 잔잔하게 깔렸다. 김독자는 흡, 숨을 들이 쉬었다. 옆자리 앉은 사람에게서도 긴장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리고,

"반갑습니다."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사로잡았다.

"유중혁입니다."

비명이 울려퍼졌다.

팬미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인터뷰 형식처럼 화보를 걸어놓고 해당 화보를 찍을 때 있었던-처음 듣는-일화를 묻는 방향으로 진행 되기도 하였고, 팬이 직접 질문을 할 수 있게 제비를 뽑는 시간도 있었다.-안타깝게도 이 때의 운은 김독자를 비켜갔다.-유중혁은 거의 웃지 않았고 시종일관 무뚝뚝했으나 또렷한 발음과 선명한 음색으로 답을 해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팬들과 눈을 많이 마주쳤다. 끊임없이 객석을 살펴보며,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 하나 살폈다. 그러다 설핏, 흐리지만 웃음을 머금는 때도 있었다. 그런 모습이 화면에 잡히면 또다시 비명이 터져나왔다. 김독자도 그 대열에 합류해 있었다. 그냥 잘 생긴 것만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중혁이 인성 깐 놈들 다 나와봐! 누구야! 저렇게나 다정한데! 김독자는 팔불출처럼 생각하며 속으로 온 몸을 뒤틀었다. 그렇게 꿈만 같이 시간이 지나고 MC가 정리 멘트를 했다. 유중혁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무대 뒤로 물러섰다. 중혁 씨 드리는 선물은 이쪽으로 주세요! 스태프가 외치는 소리가 나서 김독자는 공연장에서 나가다 말고 한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스태프에게 막 선물이 가득 든 종이봉투를 넘길 때였다. 앞에서 몇 번째정도였지? 어쨌든 꽤 초반이었다. 또 비명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 생겼나? 김독자는 불안하게 생각하며 공연장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순간 숨이 멎는다고 생각했다.

건물 밖으로 나가는 문 앞에 유중혁이 서 있었다. 옆에서 스태프가 정신없이 줄을 세우고 있었다. 이거, 악수라도 할 수 있는 상황 같지? 김독자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 손은 닦았던가? 손이 축축해지는 게 절로 느껴졌다. 바지춤에라도 닦을까 하다가 바로 앞-이라고 하기엔 몇 발짝 떨어져 있었지만-에 유중혁이 있는 것을 상기하며 김독자는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손수건을 가지고 다닐 걸. 후회는 때늦었기에 후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김독자는 어쨌든 줄을 섰다. 선착순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이벤트를 아까 화장실 다녀오면서 닦았던 손을 또 닦느라고 놓칠 수는 없었다. 물티슈라도 가지고 다닐 걸! 어딜 가던 있는 휴지가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좀 말리면 나으려나? 김독자는 손을 파닥거리며 말리기 위해 노력했다. 악수 뿐이어서 그런가 김독자의 차례는 금방 돌아왔다. 유중혁의 모양 좋고 큼직한 손이 김독자의 앞에 내밀어졌다. 우와 매번 보던 손이지만 손도 잘 생겼어. 잠깐 정신을 빼느라 타이밍을 지체했던 김독자는 파드득 놀라며 손을 뻗어 유중혁의 손을 맞잡았다. 완전 단단해! 김독자의 얼굴이 화닥닥 붉어졌다. 손이 가볍게 위아래로 흔들어지고 둘은 손을 놓았다. 손끝이 떨어지기 직전 김독자는 온 용기를 끌어모아 입을 열었다.

"패!"

"...?"

삑사리 났다. 김독자의 얼굴이 삶은 문어처럼 빨개졌다.

"팬입니다..."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자책을 해댔다. 그야 팬이겠지! 경쟁률을 얼마나 뚫고 팬미팅까지 왔는데! 빌어먹을! 김독자는 속으로 오열하다시피 했다. 그냥 도망가면 되려나? 지금 도망가면 되려나? 어차피 악수도 끝났고!

"예."

김독자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유중혁은 조금 미소짓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김독자는 항상 청산유수라 칭찬 듣던 제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건 의외로 나쁘지 않은 감각이었다.


유중혁은 다시 기분이 나빴다. 모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악수까지 일일히 다 해 주었는데 흰 코트에 정장을 입은 귀여운 여성분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흰 코트가 귀하긴 했다. 아이보리나 베이지 색은 고사하고 옅은 색 코트조차 드물 판이었으니까. 흰 코트를 입은 것은 남자 하나 뿐이었고 그 외에는 흰 색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혹시 오늘 안 왔나? 오다가 사고라도 난 건 아니겠지? 유중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약간 초조하게 자리를 오갔다. 핸드폰을 집어들어서 한낮의 밀회를 열었지만 와 있는 메시지는 없었다. 이제 팬미팅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먼저 보내 볼까. 뭐라고 보내지. 생각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이 열려서 유중혁은 고개를 들고 인상을 찌푸렸다. 매니저였다.

"뭐야."

"네 앞으로 온 선물들. 검사 끝났다고."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양이 적었을리는 없고 사람이 많이 달려든 모양이었다. 유중혁은 주억거리며 선물 뭉텅이를 향해 다가갔다. 협찬과 달리 선물은 어떻게든 일상에서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물론 요즘 유행하는 움직이는 토끼 귀 같은 건 어떻게 사용하기 어렵긴 하지만... 몇 개나 들어온 토끼 귀 모자를 치워내다 유중혁은 꽤 고가의 전자기기를 하나 발견했다.

"이거."

"어?"

"또 들어온 게 있나."

혹시 이상한 거나 유해한 게 들어오지는 않았나 한 차례 거르는 과정에서-예전에 그런 일이 있어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다 뜯어보느라 목록을 알고 있을 매니저는 전자기기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그거 하나 들어왔는데."

"...그래."

"편지는 여기 따로 모아놨다."

유중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니저는 차를 준비하겠다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 유중혁은 전자기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김독자가 자신에게 조언을 구한다며 보냈던 선물 사진 중 하나였다. 온 건가? 유중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왜 못봤지? 알림이 울렸다. 유중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에 다가갔다. 한낮의 밀회가 여러통 와 있었다.

-중혁아 나 우리 중혁이랑 악수 했다 ㅠㅠㅠㅠ 아 너도 했겠지만

-나 완전 바보짓했어 ㅠㅠㅠㅠ 근데 그 와중에 우리 중혁이 완전 잘생겼더라 존잘 ㅠㅠㅠㅠㅠ

-아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같아 ㅠㅠㅠㅠ 팬미팅 가서 팬입니다가 뭐야 ㅠㅠ

유중혁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흰 코트. 정장. 선물. 팬입니다, 라고 말하던 새빨간 얼굴.

남자, 였나?


뒤통수를 완전 세게 두드려맞은 유중혁은 한낮의 밀회를 지우려고 했다. 이 말을 다시 파헤치면, 결국 지울 수 없었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신이 나서 우리 중혁이 예찬을 올리는 김독자는 여전히 꽤 귀여웠다. 그 남자, 어떻게 생겼었지? 흰 코트에 집중하느라 정작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서 유중혁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평소에 언제 그렇게 열심히 답장을 보냈다고 김독자가 줄줄히 덕질 메시지를 보내는 중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기가 머쓱했다. 유중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띡 메시지를 보냈다.

-이동 중이다. 좀 이따 보지.

-? 알았어

-그나저나 오늘 진짜 좋았다고 ㅠㅠ 우리 중혁이 목소리 와방 좋음 ㅠㅠㅠ

그리고 유중혁은 핸드폰을 잠갔다. 한낮의 밀회 알람이 오는 소리가 여러번 들렸다. 유중혁은 핸드폰을 무음모드로 돌렸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오늘 스케줄은 이걸로 끝이었다. 쉬어야 하니까 매니저도 차를 준비한다고 내려간다고 한 거고... 특별할 것도 없었다. 생각할 시간은 많았다. 마른세수라도 하고 싶었지만 화장이 마음에 걸렸다. 운동이나 하러 갈까. 그래, 그래 좋겠다. 탈진할 때까지 운동 하고 나면 머리가 좀 정리 될 것이다. 그럼 매니저에게 연락을 해서 말을 해 두어야겠지. 유중혁은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그리고 당연히 한낮의 밀회가 눈에 들어왔다. 

다음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가 있었다.

-김독자, 너 남자인가?

말했다시피, 한낮의 밀회는 메시지 정정기능을 지원하지 않는다. 유중혁은 이번에야 말로 침음성을 내며 팔짱을 꼈다. 그 사이 문자가 왔다. 매니저였다. 5분 이따 내려와달라고. 유중혁은 벗어두었던 코트를 챙겼다. 당연히 여러통 온 한낮의 밀회를 본 것은 차에 내려가서였다.

-응.

-남자야.

-그, 나도 일부러 접근한 건 아니고...

여기까지 읽은 유중혁은 심호흡을 해야했다. 그리고 일단은 끝까지 다 읽자는 마음으로 스크롤을 조금 더 내렸다.

-이 어플이 남자랑 여자 사이 밖에 대화가 안 된다고 하더라고

-나도 몰랐어

-나도 네가 여자인 줄 알았으면 처음에 그런 방식으로는 얘기를 안 했을텐데

유중혁은 눈을 깜박이다 잠시 밴 천장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을 보고 김독자의 한낮의 밀회 계정에 들어갔다. 여자 칸에 파란 불이 들어와 있었다. 여자 계정이라는 뜻이었다. 유중혁은 이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니까, 잘못 생성된 계정이었다. 고의였는지 실수였는지는 이제 알 수 없고,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아마도 아직도 자각하지 못하는 실수인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김독자는 남자였다. 유중혁은 일단 핸드폰을 잠갔다. 차에서 내려야 할 때가 가까워 왔기 때문이었다. 많은 생각이 휘몰아쳤다. 일단, 뭐라고 답장해야할까. 화나지 않았다? 자신은 화가 나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보기엔 자신의 실망은 의외로 꽤 있었다. 화는... 화는 나지 않은 것 같지만, 부정적인 감정이 없다는 뜻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이미지가 부서진 것 뿐이었지만 타격은 꽤나 있었다. 멋대로 이미지을 쌓은 자신의 잘못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건 아닌 것 같다. 나도 남자다. 이건 좀 뜬금없다. 갑자기 자신의 정보를 밝혀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여자인 유중혁이라 생각해서 자신을 '그 유중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인가. 가능성이 있다. 여자인 유중혁이라, 확실히 독특한 이름이다. 너 여자 계정이다. 이건 또 뭐라고 해야할까. 내가 남자라고 밝히는 것과 별 다른 차이가 있나? 차이가 없지는 않지만 추론 과정을 조금만 따라오면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실수한 것이 누구인지를 좀 더 확실히 짚어주는 효과 정도만 있겠지.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깨끗하게 정리 된 소파에 몸을 던지고 유중혁은 핸드폰을 열었다. 메시지가 두 개 더 와 있었다.

-지금 와서는 너무 늦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미안해 중혁아.

유중혁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이지만, 김독자를 상대할 때는 종종 하는 것처럼 충동에 몸을 맡겼다.

-김독자.

-얼굴 한 번 보자.


김독자는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남자라는 것을 중혁이가 몰랐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속인 꼴이었고, 그래서 김독자는 사과했다. 속은 사람의 반응은 어떨까. 분노, 경악, 그리고 공포. 아마도 그런 것들이 아닐까 김독자는 추측했다. 자신을 꼴도 보기 싫어하겠지. 김독자는 서글프게 생각했다. 틔우자 마자 죽인 연심이라지만 애모는 애모다. 아직 완전히 밟지 못해 끈질기게 살아남아있는 조그만 싹이 가슴을 옭죄었다. 답장까지 평소에 비하면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영영 답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김독자를 허덕이게 했다. 핸드폰을 끄고 다른 것을 해 보려해도 신경이 핸드폰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종래에는 초조하게 방 안을 왔다갔다하는 꼴 밖에는 되지 않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우리 중혁이 손 잡았다는 사실에 엄청 들떠있었는데. 김독자는 손바닥을 내려다보곤 피식 웃었다. 기분이 아주 조금이지만 나아졌다. 중혁아, 넌 내 구원이야. 아주 오래 전부터.

김독자는 개인으로써의 유중혁은 몰랐다. 그러나 인터뷰를 하고, 촬영을 다니고, ...가끔은 소속사와 싸우기도 하는 모델 유중혁은 알았다. 모델과 소속사의 갈등은 흔하다. 그러나 팬덤이 아니라면 그리 큰 화제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유중혁의 경우는 꽤 큰 화제가 되었다. 소송까지 걸었고, 끝내는 승리했기 때문이었다. 그와 관련된 인터뷰도 있었다. 탑모델이 되기 전에 그는 그 소송으로 꽤 인지도를 쌓았다-덕분에 탑모델이 되면서 이미지 변신을 하느라 고생을 좀 했다-. 인터뷰는 다음과 같았다.

Q.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텐데, 어떤 심정이었는지?

A. 복잡했고 마음도 무거웠다. 사실 이건 우리 소속사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고치려는 건 오기에 가까웠다. 집단은 강하고 개인은 약하다. 보통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때때로 개인도 강해질 수 있다. 집단에 대적할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렇게 믿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싶었다. 나라도 도전해서 도전했다는 선례라도 남기고싶었다. 그래서 나는, 개인도 강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유중혁이 하는 말로써는 당차다 못해 객기 넘친다고까지 평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고등학생 김독자는 부서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집단의 압력, 집단의 손가락질에 짜부라들고 있었으므로. 개인은 강하다. 나는 유중혁이다. 속으로 되뇌며 그 시절을 버텨냈다. 인터뷰가 실린 얇은 잡지 한 권은 그의 성서였고 믿음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할 정도로 유중혁을 믿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유중혁은 그 기대에 부합해 주었다. 수많은 광고를 찍었고 수많은 인터뷰를 했지만,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수없이 많은 용기를 주었다. 내가 어떻게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 중혁이. 홀로 독자를 쓰는 김독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알림이 울렸다. 한낮의 밀회였다. 당연하지만, 김독자에게 한낮의 밀회를 걸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다. 김독자는 심호흡을 하고 핸드폰을 열었다. 그리고 패닉상태에 빠져들었다.

-김독자.

-얼굴 한 번 보자.

내가...? 그래도 된단 말인가? 그렇게 속여놓고? 아니, 의도적으로 속인 건 아니었다만... 내가 어떻게 감히 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단 말인지. 중혁아, 내 밀애. 김독자는 두서없이 쏟아지는 생각에서 말을 건져 올리는데 실패했다. 그 짧은 시간 사이 일방적으로 통보가 날아왔다.

-이번 주 일요일이면 되겠지.

-1시에 보지.

-장소는 xx역 근처다.

-안 나오면 죽인다 김독자.

김독자는 팔을 늘어뜨렸다. 그리고 조금 울었다. 싹만 튼 내 방심은 그곳에서 산산조각이 나겠구나. 김독자는 약간의 기쁨과 많은 아픔을 담아서 눈을 깜박였다. 중혁이에 대한 마음을 접을 때였다.


생각해보면 팬미팅에 나갈 때부터 들킬 거라는 예상을 했어야 했는데. 김독자는 끙,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이미 시간은 일요일 열두 시 오십 분이었고 몸은 착실하게 xx역 앞으로 나와있었다. 사람이 드문드문 있었다. 번화가가 아닌 곳에 있는 지하철 역이라 그런지 아무래도 인적이 드물었다. 일부러 이런 데를 골랐나. 김독자는 코트 깃을 여미며 지나는 사람의 면면을 확인했다. 방금 지하철이 또 지나갔는지 사람 몇이 올라왔다. 그러나 누군가를 찾는 듯이 보이는 사람은 없이 순식간에 다들 바삐 걸어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시간은 이제 곧 한 시인데 도무지 나올 기미가 안 보인다. 김독자는 스마트폰을 열어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오십칠 분이었다. 음,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하기도 애매한데 친근하게 말을 걸어서 어디냐고 묻기도 좀 그랬다. 옆의 차선에서 클락션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독자는 한숨을 푹 쉬고 자리에 쪼그렸다. 옷이 구겨지려나. 그 생각이 든 것은 잠시 후라 김독자는 다시 일어나 옷매무새를 살펴야 했다. 이미 망한 인상이지만 더 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핸드폰이 울렸다. 한낮의 밀회.

-김독자.

-옆에 봐라.

당연히도, 중혁이었다. 그런데 옆이라니? 김독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예쁜 세단 한 대를 제외하면 있는 게 없었다. 사람이라고는 코털조차 보이지 않았다. 김독자는 빠르게 타자를 두드렸다.

-중혁아 나 너 못 찾겠어 ㅠㅠㅠ

잠깐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세단의 창문이 내려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가 외쳤다.

"김독자."

여전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김독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김독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타라."

유중혁이 손짓했다.


"저, 유... 중혁 씨?"

"왜."

운전중인 유중혁이 짧게 답했다. 그 모습마저 잘 생겼다. 김독자는 잠시 잠깐 할 말을 잊었다가 안전벨트를 쥔 손이 힘이 들어가서 정신을 차렸다. 손톱이 손바닥을 조금 파고들어서 따끔했다.

"제가 만나기로 한 중혁이랑 아는... 사이신가요?"

동명이인이라 친해진 그런 사인가? 유중혁이 눈동자만 돌려서 김독자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는 사이라.."

헉 단순히 아는 사이가 아닌가. 스캔들 감인데. 입 잘 다물고 있어야겠다. 김독자의 생각이 쭉쭉 뻗어나가는 동안 차가 신호에 걸렸다. 유중혁이 다시 입을 떼었다.

"김독자."

"네!"

"너 계정 확인 해 본 적 없지."

이건 또 갑자기 무슨 말인가. 김독자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유중혁은 웃음기 없이 말을 이었다.

"네 계정, 여자로 설정 되어있다."

김독자는 이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눈 앞에 있는 자신의 본진. 자신의 이름을 알고 말을 건네는 유중혁. 나오지 않은 중혁이. 거기에 지금, 갑자기 자신의 계정이...? 뭐라구요?

"내가 네 '유중혁'이다."

김독자에게서 혼이 빠져나갔다. 뭐라고 제대로 된 대답도 못하고 입만 달싹거리고 있자니 신호가 바뀌었다. 유중혁이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켰다.

"밥은 먹었나 김독자?"

"....?....??....??????"

"안 먹은 모양이군."

식사하러 가지. 유중혁과 김독자를 태운 차가 부드럽게 좌회전 했다.

유중혁이 차를 몰고 간 곳은 칸칸이 룸으로 되어있는 고급 일식집이었다. 이인용 룸인지 룸은 작았고 방음이 잘 되게 해 두었는지 조용했다. 창문이 없는 방은 약간 답답한 느낌이 있었지만 깔끔한 인테리어가 나름대로의 맛이 있었다. 물론 김독자는, 그런 거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유중혁에게 이끌려 내려서 안까지 들어오긴 했지만 김독자는 아직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내가 중혁이랑 무슨 대화를 했지? 하는 생각과, 그에 대한 답변으로 떠오르는 새하얀 백지가 다였다. 망했다. 그것도 아주 장렬하게. 그 문장만이 백지 위에 새겨져 있었다. 당사자에게 사랑 고백을 해도 이것보다는 부끄럽지 않을 것이었다. 아니, 이게 바로 그 상황인가?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반면 유중혁은 물을 마시며 그런 김독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새하얀 사람이 빨개졌다 파래졌다 끝내는 하얘지는 것이 꽤나 볼 만했다. 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강은 짐작이 갔다. 이제 무슨 반응을 보이냐에 따라 자신이 할 말도 결정이 나리라.

노크 소리가 들리고 전채가 들어왔다. 가벼운 죽이 시작이었다. 그러나 김독자는 그것도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유중혁은 주먹으로 노크하듯 가볍게 탁자를 두드렸다. 김독자의 눈에 퍼뜩 초점이 돌아왔다.

"죽, 들지."

"아... 어... 감사합니다."

김독자가 우물우물 발음을 씹듯이 말했다. 평생 숟가락질 한 번 해 본 적 없는 양 어색하기 그지없게 숟가락을 드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유중혁은 자기도 숟가락을 들며 또 입을 떼었다.

"말 놓지 그러나. 평소처럼."

"@#&=×:=(!!!"

독자는 뭔가 언어가 되지 못한 소리를 뱉었다. 죽 한 숟갈이 입으로 들어간 게 주요한 포인트였다. 간신히 뿜거나 뱉어내지 않은 모양이었다. 유중혁은 고소하고 뒷맛이 깔끔한 죽을 떠 먹으며 김독자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간신히 진정한 김독자는 한 숟갈 간신히 뜬 수저를 받침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저, 유중혁 씨."

"......"

"제가 그렇게 대한 건 어쨌거나 제가... 유중혁 씨라고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이에요. 유중혁 씨인 줄 알았으면 사실 접근도 못했을 겁니다. 제가, 그동안 무례했고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 말 걸었을 때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

딸깍, 수저가 수저 받침 위에 놓였다. 유중혁은 식탁 위로 두 손를 모아 깍지 꼈다.

"기억하나? 내가 처음에 말 걸었을 때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예?"

"지금이랑 별 다를 바가 없는 말이었다. 잘못했느니, 실수했느니, 더이상 말 안 걸겠다느니."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아닌 걸 알지 않나. 뒷 말은 꺼내려다 말고 삼켰다. 왠지는 모르지만, 그래야할 것 같았다. 유중혁은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김독자에게 눈을 맞추었다.

"나는 네가 알고 있는 '중혁이'다. 한치도 다르지 않고 1%의 오차도 없이 그냥 그 사람이지. 네가 오해한 걸 차치하자면 말이다."

"그걸 차치할 수 없으니까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까. 제가 생각하는 중혁이는 유중혁 씨가 아니었다고요!"

"그 부분은 차차 적응해 나가면 되지 않나." 이

건 또 무슨 미친 소리야. 김독자는 말문이 막히는 걸 느꼈다. 유중혁은 물을 한 모금 삼켰다.

"아니면 나는, '유중혁'으로는 친구 하나 사귈 수 없나?"

이번에는 말문이 막히는 게 아니라 숨이 막혔다. 김독자가 뻣뻣하게 굳어있는 사이 다음 요리가 나왔다. 가벼운 조개 요리들이었다. 조개 회도 있었고, 찜이나 구이도 있었다. 한꺼번에 내달라고 주문한 건가 원래 이렇기 나오는 건가. 종업원이 나가자 유중혁은 핸드폰을 꺼내 조작해서 김독자에게 내밀었다. 번호 키패드가 떠올라 있었다.

"네 번호 찍어라."

"예?"

"번호."

유중혁은 너무나 당당히 명령했다. 김독자는 얼떨결에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유중혁이 계속 말했다.

"혹시나 번호를 바꾼다거나, 계정을 폭파한다거나 하면."

넌 뒤졌어 김독자. 유중혁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김독자는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유중혁은 싸이코였다. 그리고, 아, 얘가 중혁이가 맞긴 맞구나. 하는 생각이. 그건 안도와 비슷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김독자는 결국 체했다. 속이 드글드글 끓는 것 같고 배가 아팠다. 좋은 음식을 먹어놓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 정도로 좋지 않았다. 간신히 유중혁 앞에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는 것까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눈치를 챘을지도 몰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김독자는 약국에 들려 소화제를 하나 사서 입에 털어넣었다. 결국엔 다 토하고 말았지만.

토하고 나니 좀 더 정신이 들었다. 한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을 열어서 김독자는 연락처 저장소에 들어갔다. 유중혁. 세글자가 또렷하게 찍혀있었다 유중혁의 핸드폰 번호를 땄다. 새삼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가 오늘 유중혁을 만나서 대화를 했어. 심장이 바닥에 달라 붙었다가 다시 올라왔다. 유중혁은, 그러니까, 성격이 나빴다. 김독자는 몸을 웅크리고 클클 웃었다. 그야 성격이 나쁠 법도 하지! 뭐 어때! 자주적이고 멋지잖아! 그리고 또 무슨 대화를 나눴더라. 체해서인지 기억이 몽롱했다. 우리 중혁이와 중혁이. 두 명이 동일인이었다... 그리고 이젠 우리 중혁이를 상대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어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야 그럴 밖에 없지만. 김독자는 한낮의 밀회를 열었다. 나 너 어디있는지 못 찾겠어. 짧은 단문 아래로 더이상 스크롤이 없었다. 상대적으로 적은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어째 정말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뭐라고 보내야 할까. 휴대폰 화면을 천천히 쓰다듬고 있는데 스크롤이 아래로 내려갔다.

-잘 들어갔나?

중혁이였다. 유중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낮의 밀회로 보내오는 내용은, 너무나 익숙한 말투와 걱정을 담고 있어서. 저도 모르게 손가락이 움직였다.

-못 들어갔어.

-먹은 거 싹 다 체함.

-ㅡㅡ

-소화제는 먹었나.

-ㅇㅇ

-일식이 안 맞는 건가. 기억해 두지.

멈칫, 손가락이 멎었다. 기억해 둬? 왜? 왜죠? 김독자의 눈이 허공을 헤매다 벽에 붙은 브로마이드에 닿았다. '유중혁'과 눈이 마주쳤다. 꺼진 핸드폰 화면에서 알림이 울렸다.

-김독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날더러 뭘 어쩌라고 이런 폭탄을 터트려 중혁아. 김독자는 핸드폰을 잠그고 저 멀리 밀쳐놓았다. 그리고는 몸을 이불로 둘둘 말고 몸을 다시 한 번 웅크렸다. 배가 아파왔다.


유중혁은 화가 났다. 계정을 폭파하지도 번호를 바꾸지도 않았다. 그냥 연락이 안 되었다. 아예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아주 드문드문 되었다. 유중혁은 커다란 손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아보이는 휴대폰을 꼭 쥐고 코를 박을 듯이 화면을 노려보았다. 매니저가 손부채질을 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게임하냐?"

"아니."

"그럼?"

"친구 비슷한 거."

"니가 친구가 다 있어?"

세상이 뒤집어지려나. 매니저가 순수하게 놀라서 유중혁은 눈썹 한쪽을 치켜떴다. 그러나 매니저는 별반 찔리는 기색도 없이 손부채질을 계속했다. 실내가 더운 탓이었다. 더워서 미친 건가? 유중혁은 별로 조심스럽지도 않게 추측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 중에 그나마 오래 일한 게 매니저였으니까. 매니저는 혀를 끌끌 찼다.

"친구 처음 사귀어보냐, 근데. 핸드폰에 빨려 들어가겠는데."

"......"

"뭐야 진짜 처음이야?"

"......"

"요새는 애인도 그렇게 집착 안 한다 야."

"특별하면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유중혁이 궁색하게 대꾸하는 것을 처음 본 매니저는 코웃음을 쳐야할지 웃어야 할지 잠시 헛갈리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한숨이나 푹 쉬었다.

"스캔들이나 안 나게 조심해라..."

그리고 이 대화를 시작한 곳이 개인 대기실임을 대단히 감사하게 여겼다.

그러나 유중혁은 별로 무언가에 감사할 만한 타이밍이 되지 않았다. 매니저의 말이 퍽이나 이상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스캔들? 왜 스캔들이 나지? 자신이 그정도로 김독자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뜻인 걸까? 그러나 이것은 매우 정상적으로 느껴졌다. 연락이 되지 않는 사람을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자 지금까지 잠잠했던 머릿속에서 불쑥 이성이 말을 걸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렇게 사람을 걱정해 본 적은? 안타깝게도 가족을 제외하면 없었다. 누군가와, 일적인 관계를 제외하고, 연락을 지속해 본 적은? 그것도 없었다. 그 연락을 달갑게 여긴 적은? 당연히 없었다... 유중혁은 인정해야 했다. 자신이 김독자를 특별 취급하고 있노라고. 그건 충분히 스캔들 감이었다. 위험, 한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스캔들이 난다한들 뭐가 어떻단 말인가? 그리고 그 말을 입에 올렸다.

"스캔들이 나서 뭐 어쩌라는 거지."

"뭐?"

"지금까지 난 스캔들도 무시하니 조용히 넘어갔지 않나. 이번이라고 다를까."

"이걸 그렇게 무시했다간 그 김독자라는 애가 상처받지 않겠냐? 가짜고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말하는 거랑 똑같은데."

순간 말문이 막혔다. 김독자를 그렇게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김독자가 상처입는 것은 싫었다. 왜? 자기가 언제부터 그런 것에 신경을 썼다고? 혼란에 허우적대고 있는데 매니저가 어퍼컷을 한 대 더 날렸다.

"나도 괜찮은 스캔들은 100% 가짜인 스캔들 밖에 없어."

알잖냐. 그리고 매니저는 전화를 받는다며 대기실을 나가버렸다. 침몰해버린 유중혁을 남겨두고 말이다. 어쨌건 인정해야했다. 김독자는 자신에게 남들과 달랐다. 단순히 친구로써 특별한 수준이 아니라 단계가 달랐다. 상처 입히기 싫을 뿐더러 애지중지하고 싶었다. 맛있는 걸 먹이고 좋은 걸 보이고 듣게 해 주고 싶었다. 동시에 괴롭히고도 싶었다. 자신만으로 일희일비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이게 좋아한다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유중혁은 문득 자신이 김독자와 입맞추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 허여멀건한 얼굴이, 입술이 포개지고, 코 끝에서 숨이 섞이고, 몸이 겹쳐지고, 온기가 자신의 것과 김독자의 것이 누구것인지 모르게 뒤섞이리라. 순간 등줄기에서 뭔가가 기어올랐다. 그것은 소름이라고 말하기엔 지나치게 따스했고 기분 좋았으며, 차라리 쾌감과 비슷했다.

유중혁은 자신의 상상력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혀가 섞이는 것까지 생각이 뻗어나가다 못해 자신이 김독자를 쓰러트리는 것까지 상상하고 나서야 유중혁은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었다. 거울에 비치는 제 얼굴이 생전 처음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홍조는 누가 보더라도 화난 얼굴이 아니었다. 인정의 때가 도래했다. 유중혁은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등 중간까지 오는 낮은 등받이에 기댈듯이 젖혔다.

내가 김독자를 그런 의미로 좋아한다고.

그럼 자신은 어떻게 해야할까.

작은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면 꼬리깃을 한껏 펼쳐 보인다. 자신이 이렇게나 화려하다고, 멋지다고 뽐내는 것이다. 구애행위. 유중혁은, 공작처럼 구애하기로 마음 먹었다.

-김독자

-연락 해라.

...일단, 연락부터 되어야겠지만 말이다.


김독자는 오늘도 온 알람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한낮의 밀회가 누가 보았는지 보지 않았는지 확인해주는 서비스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자신이 중혁이의 연락을 읽고있다는 것을, 중혁이는 모를테니까. ...딱히 연락을 무시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러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고, 그냥, 어쩌다보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타이밍을 잡을 수가 없어서...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벌써 며칠이 훌쩍 지나 있었다. 한낮의 밀회는 쌓이다 못해 산을 이룰 지경이었고 김독자는 이제 정말 뭐라고 보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조금 울고 싶었다.

그치만 내가 '유중혁'이자 '중혁이'에게 뭐라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거기서부터 이미 폭삭 망했다. 존댓말을 해야할지 반말을 해야할지부터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내용은? 이런 말을 '유중혁'에게 해도 될까? 그치만 '중혁이'에게는 항상 해 왔던 말인데. 고민이 끊이지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손은 습관적으로 잘도 움직여서 한낮의 밀회를 열고 있었다.

작은 사진이 한 장 도착해 있었다. 인물사진이었다. 워낙에 작게 축소가 되어 있어서 김독자는 사진을 클릭했다. 금세 사진이 스마트폰 화면을 꽉 채웠다. 그리고 김독자는 핸드폰을 떨어트릴 뻔 했다. 그 사진 안에는 유중혁이 하나 가득 들어있었다. 휴대전화를 들고, 촬영장에서 쓸 법한 나무 의자에 앉아 느슨하게 풀린 자세와 입가를 하고,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당장이라도 꿀이 떨어져 내릴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이거... B컷이지? 한 번도 화보에서 본 적 없는 것이라 김독자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도 풀린 적 없는 B컷이다.

맙소사 내가 최애의 미공개 짤을 얻었어. 그것도 산삼보다 귀하다는 웃는 얼굴로! 김독자는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저장 버튼을 터치했다. 몇 번이고 터치하는 바람에 갤러리에 몇 장이고 사진이 다운로드 되었지만 상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한낮의 밀회 알림이 또 울린 것은 그 때였다.

-김독자 보고 있나

김독자는 찔렸다. 응. 그렇게 보내려다 문득 멈추기 전까지는. 반말... 해도 되려나? 유중혁한테? 잠시 망설이는 사이 한낮의 밀회가 한 통 더 왔다.

-보고 있는 것 알고 있다.

이젠 좀 많이 찔렸다. 그러나 중혁이는 답장할 틈을 주지 않았다.

-연락해라 김독자.

-네가 날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다.

-연락한다면

-열 문장에 하나씩

-위와 같은 사진을 보내주지

-미쳤어 중혁아?????

김독자는 충동을 참지 못하고 메시지를 보내버렸다. 공작처럼 구애한다고 해 놓고 하는 것은 미끼를 걸어놓는 초롱아귀 같았지만 김독자는 모르는 일이다. 김독자가 참지 못한 충동은 당장 좋은 충동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뭘 믿고 저렇게 B컷을 남발하는가 하는, 당혹감과 걱정에 가까웠다.

-그러다 사진 유출이라도 되면 어쩌려고 그래 너도 그 사진 안 푼 데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네 이미지 같은 것도 있는데 그렇게 함부로 막 나 주고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어차피 내 사진이다.

-드디어 연락을 주는군.

김독자는 또 찔렸다. 이번에는 좀 많이. 거기에 갑작스레 반말을 한 것도 걸리기 시작했다. 존댓말을... 하는 게 낫겠지? 이미 말을 해 버린 건 어쩔 수 없다고 친다고 해도 말이다.

-미안합니다. 바빴습니다.

-? 웬 존댓말이지?

-반말한 게 너무 무례한 거 같아서요...

-헛소리를 하는군.

헛소리라니. 김독자는 눈을 깜박였다.

-어차피 지금까지 반말 실컷 하지 않았나. 그냥 반말 해라.

-그래도...

-그보다 바빴다니, 연락할 틈도 없었나?

-게임 회사가 다 그렇죠 뭐

- ㅡㅡ

-다음에는 반말도 조건으로 걸어야겠군.

뭐라는 거야 이 분은. 김독자는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뭐라고 말하려다 관두었다. 자신이 그럴 깜냥이 되지 못했다. 정신이 없을 때는 가능했는데 이성이 돌아오니 못할 짓이었다.

-김독자

-네네, 유중혁 씨.

-(사진)

-열 마디 채웠으니 약속했던 보상이다.

머리를 맞는 것 같은 충격이 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한 번도 본 적 없는 B컷이었고, 웃고 있는 유중혁이었다. 맙소사. 이런 거 함부로 뿌리면 안 된다니까! 김독자는 조금 더 강심장이 될 필요를 절절히 느꼈다. 그리고 강심장이 되어보기로 했다.

-중혁아 이러지 말라니까!

그리고 나서 잠시간 답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타자를 치는 시간보다도 훨씬 오랫동안. 뭐라고 타자를 치려다 어차피 아까 했던 말을 반복할 뿐이라는 걸 깨달은 김독자는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유중혁에게서 답이 돌아오지 않자 문득 불안해졌다. 역시 너무 무례했나. 그치만 받은 게 받은 거고, 문제는 문제인데. 김독자는 좁은 방 안을 서성거렸다. 그러고도 한참, 답이 오지 않다가, 알림이 울렸다. 김독자는 알림이 울리기 무섭게 한낮의 밀회를 열었다.

-김독자, 전화 건다.

짤막한 통보였다. 어? 그 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뇌가 검증할 시간도 없었다. 핸드폰이 진동을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제대로 이름이 떠 있었다. 사칭은 아니겠지, 설마. 헛생각을 하며 김독자는 버튼을 당겼다.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저몄다.

"김독자."

"옙."

그 흔한 여보세요 한 마디도 없는 대화였다. 김독자는 무릎을 꿇어야 할까 잠시 생각했다. 거의 본능적인 충동이었다. 눈을 굴리고 있는데 잠시 머뭇거리다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머?"

뭐도 아니고 머? 하고 멍청한 소리가 나왔다. 김독자가 얼떨떨해하는 사이 유중혁이 말을 이었다.

"B컷이라고는 하지만 같은 포토그래퍼가 찍은 사진이기도 하고... 나쁘지 않다고 여겼는데. 아닌가?"

"아뇨. 그런 문제가 아니라요..."

당연히 마음에는 들지! 김독자 안의 덕후의 혼이 울부짖었다. 김독자는 어디서부터 이걸 설명해야하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자신감을 잃은 유중혁의 모습은 또 처음이라 심장이 절로 두근거렸다. 안타깝기도 했고, 귀엽기도 했다.

"역시 별로인건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지금도 계속 존댓말 하고 있지 않나."

"그건 아직 안 익숙해서 그런 거고요."

김독자는 한숨을 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한숨을 쉬면 저 쪽까지 다 들릴 터였다.

"저, 사진 보내주신 건 좋습니다. 너무 좋아서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을 정도로 좋아요. 그치만 유중혁 씨 이미지도 있고, 이렇게 일개 팬에게 함부로 막 주시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 싶어서."

"일개 팬이라..."

그리고 잠시 침묵이 있었다. 어딘지 모르에 불편한 기색이 느껴져서 김독자도 침묵했다. 입을 먼저 연 것은 유중혁이었다.

"만나지."

"네?"

"언제 쉬나."

"그... 일요일..."

"회사 앞으로 찾아가겠다. 나와라."

그리고 툭, 전화가 끊겼다. 김독자는 망연히 전화를 바라보다 잠시후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왜 상황이 이렇게 되는 건데???


유중혁은 지난번과 같은 방식으로 김독자를 찾아들었다. 불안함과 어색함에 오들오들 떨고있는 김독자에게 가서 차에 태운 뒤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고 출발했다는 뜻이다. 김독자는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묻지도 못한 채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가 잡아먹는댔나. 유중혁은 덕택에 심기가 불편해졌다.

"해코치 하지 않는다."

"예?"

"좀 더 편하게 있어도 좋다."

뭐 그걸 몰라서 저러고 있겠냐마는,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유중혁은 한숨을 씹어 삼키며 핸들을 돌렸다. 쉼 없이 움직이던 차가 멈춰선 곳은 어느 아파트의 지하주차장이었다. 차를 부드럽게 주차하고 안전벨트를 푸는데도 김독자는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유중혁은 의아해하며 그런 김독자를 보았다.

"내려라."

"...요새는 참 세상이 다양해져서..."

"뭐?"

"아파트... 에서도 식당을 하고 그러나봐요?"

그렇다고 해 줘 제발.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렇게 호소하는 것처럼 보였다. 유중혁은 몰랐지만.

"그럴리가."

그보다 내려라. 다 왔다. 김독자는 아까보다 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차를 잠그고 유중혁은 저벅저벅 걸어 익숙하게 공동현관을 지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중간중간 김독자를 챙기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김독자는 가능하다면 눈을 감고 이동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이윽고 묵직한 침묵 속에서 엘리베이터가 멎었다. 유중혁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을 열었다. 스위트 홈이라고 하기엔 멋쩍지만, 그래도 한 몸 누일 수 있는 집이 김독자를 향해 열렸다. 유중혁은 까딱 고개짓 했다.

"들어와라."

"......"

김독자는 몇 번 입을 뻐끔거리다 아파트 복도라는 것을 떠올렸는지 조용히 문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깔끔히 정돈 되어 있었다. 벽에는 꽤 큼직한 화보가 몇 개 걸려있었고, 꼭 필요한 가구가 몇 개 놓여있었지만 자잘한 소품은 몇 없었다. 얼핏 보면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 것치고는 이런 저런 게 꽤 있었지만. 유중혁은 문을 닫고 들어와서 신발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뭔가 먹고 싶은 게 있나? 가능하면 반영해주지."

"저, 유중혁 씨. 여기 유중혁 씨 집인 거죠?"

그 목소리는 흥분했다기엔 너무 가라앉아 있었다. 의도를 알 수 없었기에 유중혁은 사실대로 답해 주었다.

"그런데?"

"그런데라뇨?"

김독자는 이제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였다.

"지난번부터 말씀드리지만 너무, 위기감이 없으신 거 같습니다. 유중혁 씨는 탑스타잖습니까. 이렇게 아무나한테 개인정보를 알려줘서 어쩌시려고요. 유출되거나 하면 힘들거나 위험해지시잖아요."

"아무나라니?"

유중혁은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김독자 네가 왜 아무나지?"

"예?"

유중혁은 눈을 깜박이는 김독자를 보며, 문득 예쁘다고 생각했다. 길다란 속눈썹이 팔락거렸다.

"우리는 오랫동안 얘기했다. 네가 실감을 하던 못하던, 나는 너와 오랜 시간 이야기 했고, 네가 믿을 만한 인간이라고 판단했다. 당장 너는 내 계정이 뭔지 알리지도 않았고, 내 핸드폰 번호를 퍼트리지도 않았지. 나는 김독자, 너를 믿는다."

그리고 유중혁은 뒤를 돌았다. 부엌은 뒤쪽에 있었다.

"적당히 앉아서 기다려라. 먹고 싶은 건?"

"...토마토 빼면 아무거나..."

"알았다."

하려고 했던 목록 중에서 토마토 파스타를 지우며 유중혁은 대꾸했다. 김독자의 얼굴이 붉어진 건 모르는 채로.

김독자는 소파에 스르르 주저 앉았다. 믿는다고? 나를? 얼굴이 화끈거렸다. 누가 유중혁 아니랄까봐 부끄러운 소리는 잘도 하지. 그 와중에도 멋있었다. 얼굴이 뜨거운 건 부끄럽기 때문일까 아니면...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김독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깊게 생각했다가는 정신건강에 좋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생각은 제멋대로 뻗어나가서 끝을 맺었다. 아니면 감동받았기 때문일까. 누군가가 자신을 저렇게 단정적으로 믿어 준 경험이 있었던가. 말이 아닌 태도로라도. 아니 말 뿐이라도. 글쎄. 김독자는 속으로 짧게 조소했다. 그런데 이제와서, 아니 지금이라도, 나를 믿는다는 사람이 나타난다고?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거, 꿈 아닐까? 김독자는 스스로를 의심했다가 손등을 꼬집어 보고서는 꿈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다. 하긴 꿈이라기에는 전개가 너무 길었다.-개연성은 누가 대신 내줬다고 할 정도로 애매했다-그렇구나. 꿈이 아니구나. 그렇게 멍하니 주저앉아 있다 김독자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파드득 자리에서 몸을 세웠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믿는다고 한 거다. '중혁이'가. 아니, 그 '중혁이'가 우리 중혁이... 유중혁 씨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두 명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그렇게 순식간에 퉁쳐져버렸다. 게다가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감정이나 두근거림은 사라지지도 않았다. 중혁이는 그대로 그렇게 유중혁 씨가 되었다. 김독자는 자리에 제대로 앉지 못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는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이미 인상은 망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좋아하는 사람은 되지 못하더라도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는 남기 위해. 그 소망 안에 들어있는 또다른 소망을 읽고 김독자는 다시 서글퍼졌다. 결국 나는 또 사랑을 욕심내는구나. 유중혁과 알고 지내는 것만 해도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는 잘 알고 있다. 심지어 그 사람에게 믿는다는 말까지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사랑을 욕심내고 있었다. 끝이 없는 게 인간의 욕망이다.

"김독자."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김독자는 펄쩍 뛸 정도로 놀랐다. 혼자서 그렇게 몇 번이나 감정의 널뛰기를 겪고 있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난 탓이었다. 유중혁이 마저 입을 열었다.

"식사 하지."

"네, 넵."

김독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 위에는 샐러드와 가니쉬, 연어 스테이크와 와인잔 같은 것이 보기 좋게 놓여있었다. 심지어 플레이팅도 예술이었다. 눈이 휘둥그레 해져서 김독자는 자리에 앉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요리하시는 분이 이런 거 잘 하시나봐요...?"

"내가 했다."

"예?"

"두 번 말하게 하는 게 취미인가? 내가 했다고 했다."

아마 맛도 괜찮을 거다. 들지. 그보다 왜 아직도 존댓말인가. 유중혁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김독자는 벙쪄 버렸다. 유중혁... 이런 것까지 잘 했단 말야? 심장의 두근거림이 도통 멈추질 않았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고 했던가. 플레이팅을 예술처럼 해 둔 점심식사 상은 맛도 그림 같았다. 김독자는 게걸스레 먹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눈 앞에 먹는 것 마저 화보를 찍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입을 헤 벌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덤이었다. 요리도 잘 하는구나. 평소에는 잘 먹지 않던 샐러드조차도 맛있어서 김독자는 우물우물 풀을 씹었다.

"와인 괜찮은가?"

"예? 아, 괜찮습니다."

사실 술은 잘 못하지만. 와인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김독자는 추측했다. 일단 와인이라는 게 많이 마시는 것도 아니고, 바닥에 살짝 깔릴 정도로 따라서 마시는 건데다가 도수가 그렇게 높지도 않을 테니까. 괜찮겠지. 김독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와인잔을 들었다. 유중혁은 와인을 한 병 꺼내와서는 가볍게 코르크를 따고 김독자의 잔을 채웠다. 화이트 와인이 예상한 것보다 조금, 아니 꽤 많이 높게 잔을 채웠다. 괜찮으려나? 김독자는 자신의 주량을 염려했다. 그러나 유중혁이 자신의 잔을 든 순간 그 걱정은 깔끔히 잊혀졌다. 건배 하자는 건가? 혹시나 싶어서 김독자는 잔을 조금 내밀었다. 잔 두 개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맞부딪쳤 다. 눈치 채서 다행이다. 김독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축였다. 와인은 생각보다 달콤 상큼한 맛이 났다. 김독자는 조금 얼떨떨하게 와인을 바라보다 다시 한 번 맛을 보았다. 생각만큼 떫지도, 쓰지도 않았다.

"맛... 있네요."

"다행이군."

유중혁이 식기를 가볍게 달칵거리며 말했다.

"취향에 안 맞을까봐 고민했다."

고민... 했다니. 내가 뭐라고. 마치 내가 굉장한 손님이라도 되는 것 같은 대접이었다. 직접 한 음식과, 고민한 와인과, 집으로 초대까지. 이건 꼭... 김독자는 그렇게 생각하다 와인을 쭉 들이켰다. 얼굴의 홧홧함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조차 죄처럼 느껴졌다. 애인 같다니. 누구 마음대로? 그리고 전투적으로 연어 스테이크를 썰었다. 눈앞이 핑글핑글 도는 건 같은 건 착각이려니 싶었다.


눈을 떠보니 모르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퀸사이즈의 침대는 아늑하고 푹신했다. 두툼하고 부드러운 이불이 몸을 휘감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김독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진 몇 장이 벽에 걸려 있었다. 유중혁의 화보 사진이었다. 김독자는 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 유중혁과 점심식사를 하다가 와인을 조금 마셨는데... 설마 거기서 엎어진건가. 아무리 알콜 쓰레기라고는 하지만. 그럼 설마 여기는 유중혁의 침실인가. 김독자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싸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주사를 떠올렸다. 혹시나 헛소리를 한 건 아니겠지.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당장은 기억이 도통 나지를 않았다. 김독자는 빠르게 선택지를 점검했다. 이대로 도망가느냐, 아니면 유중혁에게 인사를 하고 가느냐. 돌아볼 것도 없이 전자였다. 인사는... 인사는 랜선으로 해도 된다. 김독자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정신이 좀 들었나보군."

유중혁이 문간에서 말을 건넸다. 김독자는 다시 쓰러지고 싶었다. 남의 집에서, 심지어 유중혁의 집에서 추태를 보이다니! 게다가 도망가려는 걸 들키기까지 하다니! 김독자가 침대에서 팔딱대고 있는 동안 유중혁이 긴 다리를 자랑하듯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서 다가왔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들고 당장 손이라도 뻗으면 닿을 법한 거리가 되어서야 유중혁은 멈추었다. 그리고 물었다.

"기억 하나?"

"무, 뭘...?"

요...?

소심하게 뒤에 존댓말을 덧붙이자니 유중혁이 작게 한숨을 쉬는 것이 들렸다. 잘생긴 얼굴이 눈 앞에서 숨쉬고 있자니 눈 앞이 핑핑 돌았다. 김독자는 속으로 빠르게 기억을 되짚었다. 달콤 상큼한 와인을 들이키고 연어 스테이크를 먹었다. 그리고-

'나한테 너무 잘해 주지 마 중혀가'

'좋아해 중혁아'

'마니 마니'

순식간에 몇 개의 기억의 편린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김독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가 새하얗게 질려들었다. 진짜 무슨 짓을 한 거냐 김독자!! 속으로 스스로를 꾸중하고 있는데 유중혁이 덥썩 어깨를 붙들어왔다. 김독자는 눈을 깜박이며 잡힌 어깨와 유중혁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어, 한 대 얻어 맞을 징조인가. 김독자는 조금 불안하게 유중혁을 보았다.

"늦었다."

늦긴 많이 늦었지. 김독자는 수긍했다.

"이젠 싫대도 놓아주지 않을 거다."

얻어 맞아야 끝나려나. 김독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좀 덜 아팠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입술에 말캉한 것이 닿았다. 부드럽고, 조금 까슬하기도 하고, 속에는 단단한 것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김독자는 순간 눈을 떴다.

아, 유중혁이 감고 있는 눈은 정말로 속눈썹이 길었다. 김독자는 몇 번 눈을 깜박이다 다시 눈을 감았다. 살덩이가 입술 사이를 파고 들어와서 입 안 구석구석을 쓸었다. 김독자는 그 살덩이를 그대로 내버려두다 못해 적극적으로 호응해버렸다. 기분이 붕붕 달떴다. 몸이 움찔움찔 비틀리고 손을 어디다 두어야 할 지 모르겠어서 괜한 이불을 쥐어 뜯었다. 고작해야 근육끼리 문질러지는 것인데. 김독자는 감은 눈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입술이 떨어져나갔다. 그제서야 눈이 떠졌다. 눈을 어찌나 꼭 감고 있었는지 눈물 때문에 눈 앞이 어룽어룽 거렸다. 유중혁이 그 모습을 보며 잇사이로 뱉었다.

"오늘은... 내일 출근도 있다고 하니 여기서 참는다."

"참아...?"

"다음엔 안 참는다 김독자."

그 기세가 흉흉해서 김독자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유중혁은 그런 김독자를 지켜보다 문득 침대에, 김독자 옆에 앉았다. 그리고 김독자를 끌어안았다. 으스러질 듯이 강하게 끌어안아서 김독자는 숨을 쉬어도 괜찮을까 고민했다. 숨이 닿을 것만 같았다.

"내 이름 불러봐라."

"유, 유중혁 씨."

"그렇게 말고."

아니 이름을 부르라며. 이름을 불렀는데 어쩌라는 거야. 김독자는 낑낑거리며 고민했다. 유중혁이 약간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중혁이, 라고."

"...?"

"불러봐라."

가면 갈 수록 파격이었다. 김독자는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온기만이 분명했다. 김독자는 간신히 팔을 들어올려서 유중혁의 등을 끌어안았다.

"...중혁아."


지하철역에서 내린 김독자는 옷매무새를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오늘 옷차림 괜찮나? 그래도 나름 데이트를 하겠다고 나온 건데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그래봤자 셔츠에 바지기는 한데... 좋은 옷을 입으려고 노력하기는 했다. 멋지게. 만나는 사람이 모델이니 글렀으려나. 그동안 예약제인 룸이나 집에서 데이트를 한 것과는 달리 오늘은 영화를 보기로 했다. 무려 사람 많은 영화관에서. 김독자는 다시금 옷매무새를 살피다 급하게 사원증을 빼서 가방에 집어넣었다. 여기까지 사원증을 걸고 왔다니. 애사심이 넘치는 것도 아닌데. 숨을 쉴 때마다 희뿌연 김이 주변에 피어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김독자는 핸드폰을 꺼내 지도 앱을 열었다. 만나기로 한 영화관이 이 근처 어딘데... 경로 검색을 해 보고 나서야 김독자는 대충의 지리를 파악했다. 김독자는 이어폰을 핸드폰에 연결하고 유튜브를 열었다. 그리고 적당한 노래를 하나 검색해 켠 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앞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데 익숙하지 않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 곡이 원래 이렇게 시작했나? 잠시 고민하다 나레이션이 나와서 김독자는 광고가 나온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주머니에 쑤셔넣었던 핸드폰을 꺼내자 유중혁의 얼굴이 눈에 비쳤다. 그리고.

[날 만나러 와요]

광고 카피가 귓가를 저몄다. 날 만나러 와요... 김독자는 광고를 따라 한 번 더 중얼거렸다. 그 순간 알람이 울렸다.

-어디냐 김독자.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거의 다 왔어. 지하철 역이야.

-X번 출구?

-ㅇㅇ.

그리고 김독자는 핸드폰에서 고개를 떼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얘가 갑자기 몇 번 출구인지는 왜 묻지? 김독자는 내적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 알람이 울린 핸드폰을 다시 보았다.

-나도 그 근처다.

김독자는 고개를 들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길다란 검은 코트를 입고, 마스크를 쓴 인영이 서 있는 것이 한 눈에 들어왔다. 김독자는 주머니에 핸드폰을 쑤셔넣고 조급하게 걸었다. 보폭이 점점 커졌다. 문득, 자신이 그리도 사랑했던 광고가 떠올랐다. 유중혁이 찍었던 광고. 나를 만나러 와요. 다시 한 번 카피가 떠올랐다. 그래, 너를 만나러 간다. 문득 유중혁과 눈이 마주쳤다. 김독자는 환하게 웃었다. 봄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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