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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눈을 떴다. 볼이 차가웠다. 얼음에 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흐릿했던 시야가 몇 번 눈을 깜박이자 천천히 돌아왔다.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그렇게 걸어 다니는 발들이. 구두도 있고, 운동화도 있고, 스니커즈도 있고, 하이힐도 있고. 정신이 들자마자 그는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맨바닥에 누워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차디찬 길바닥 한가운데에. 내가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던가? 길바닥에 쓰러질 정도로? 그러나 술을 마신 기억은 없었다... 아니, 떠오르는 것 자체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옷차림을 돌아보았다. 정장바지에 구두, 셔츠 위에 흰 트렌치코트. 주변을 돌아봤을 때 그리 이상한 옷차림은 아니었다. 다만 저 수많은 사람들처럼 갈 데가 있지 않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뭔가, 저 사람들하고 나하고 다른 것 같은데-
“저기요.”
그는 고개를 돌렸다. 금색 뿔을 단 여자가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인간인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만.”
그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여자가 배시시 웃었다.
“죽은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여기 있는 걸 보니.”
“예?”
“살아서 지옥에 온 걸 환영해요.”
“예?”
그는 눈을 깜박였다. 여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어딘가에서 물이 솟아났다. 그리고 공중에 고인물이 천천히 회전했다. 허여멀건한 얼굴이 비쳐보였다. 눈, 코, 입, 귀. 약간 길게 자른 머리카락. 여자와의 다른 점은- 뿔이 없었다. 자신은.
“지옥... 이라구요. 여기가.”
“정확히는 지옥의 가장 깊은 곳 중 한 군데죠.”
“그럼 당신은,”
악마, 입니까? 그는 더듬더듬 질문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엉덩이 걸음으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여자가 웃었다.
“진정해요. 죽지도 않은 영혼은 쓸모없다구요.”
“...예?”
“죽은 영혼은 노예로라도 쓸 수 있지. 산 영혼이야.”
그것 참, 상식에 위배되는 말이었다. 보통은 산 영혼을 걸신들린 듯이 탐하는 게 악마 아니던가? 예를 들어-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지끈, 머리가 아파왔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쥐고 앓는 소리를 냈다.
“괜찮아요?”
“예, 예...”
아마도. 그는 어물어물 말을 흐렸다. 괜찮은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머리가 아프다가도 말았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왜지? 지옥이라서 그런 건가?
“어쨌든 지상으로 돌려보내야 할테니...”
여자가 말을 흐리다가 이었다.
“일단 왕께 가보죠.”
“왕?”
“우리의 왕께.”
어차피 가야하고. 여자가, 악마가 고개를 주억거리다 손을 내밀었다. 잡고 일어나라는 뜻인 듯해 그는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제 이름은 나다니엘이에요.”
당신은? 옷을 툭툭 털다 나다니엘의 말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문득 생각나는 이름을 툭 뱉었다.
“김독자입니다.”
왕에게 가는 길은 평탄했다. 잘 닦인 길은 평온했고,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벼랑 위의 외길 같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산책로로 닦인 숲길 비슷했다. 정말 여기가 지옥이 맞나? 김독자는 앞서 걷는 나다니엘에게 질문했다.
“지옥인데도, 평온하네요.”
“인간들에게나 지옥이지, 악마에게는 일상이니까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뭔가, 미묘하게 달랐다. 일상도 얼마든지 지옥 같을 수 있는데. 김독자는 한 번 더 질문했다.
“인간들에게는 어떤데요?”
“노예로 부려지죠. 음... 제가 직접 부리는 입장은 아니어서 어떤지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꽤나 고통스럽다고 들었어요.”
“나다니엘 씨는 어떤 일을 하시나요?”
“저요? 저는 간단한 조사를 하는 일을 맡죠. 영혼이 몇이 들어왔고, 벌이 끝나서 돌아갈 영혼은 몇이고. 그런 걸 정리하는 일을 맡고 있어요. 아. 오늘은 휴일이라서 독자 씨를 돕고 있고요.”
너무나, 인간 같았다. 지옥도 별 차이 없구나. 김독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폐하를 뵈러 가는 거기도 하지만.”
“예?”
“잘 생기셨거든요, 폐하께서는.”
나다니엘이 웃었다. 불경한 거 같은데, 이래도 되나? 김독자는 얼떨떨하게 예에... 하고 말꼬리를 흐리며 대답했다. 길은 내리막길도 오르막길도 아닌 길이었지만 점점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건가. 김독자는 생각했다. 아래로, 더 아래로. 그리고 나무 사이로 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자를 파 놓은 성은 서양식으로 생겨있었다. 그럼, 염라대왕은 아닌 건가. 김독자는 생각했다가, 문득 자신이 이것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의문을 품었다. 다시 머리가 아파오려고 해서 인상을 찌푸리는데 나다니엘이 김독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참아요.”
“예.”
“폐하 보면 싹 나을 거에요. 성함부터 잘생기셨거든.”
진짜 불경한 거 같은데. 어색하게 웃으며 생각하는데, 나다니엘이 말을 이었다.
“유중혁이라고.”
나를 죽여 중혁아. 김독자는 비틀거리며 왼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방금 그건 뭐였지? 자신의 목소리 같았는데. 문득 떠올랐던 목소리가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성 같이 무너져 내렸다. 독자 씨 괜찮아요? 나다니엘이 당황해서 묻는 소리가 들렸다. 김독자는 몇 초 정도, 눈을 감았다 떴다.
“...괜찮습니다.”
그래야만 했다.
성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은, 아니 악마들은 거의 없었다. 하긴 왕을 보러 오는 악마가 몇이나 되겠냐마는. 넓은 성은 상식 속의 서양풍 성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길게 깔려있는 붉은 카펫. 조각과 갑옷, 벽화와 천정화로 차 있는 복도에 걸려있는 샹들리에. 그러나 경비병이 없는 것은 조금 이상했다. 지나다니는 시종들도 한둘 뿐, 집사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덕분에 나다니엘은 집사에게 직접 말을 걸 수 있었다. 집사님, 하고 반갑게 부르며 달려가는 것을 보아하니 오히려 친분마저 있는 듯 했다.
“오늘도 오셨습니까 나다니엘.”
“네, 오늘도 왔습니다.”
싱글싱글 웃는 것을 보며 집사는 길게 숨을 토한 후 그제야 알아차렸다는 듯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눈초리를 치켜뜨며 날카롭게 말했다.
“나다니엘 당신 인간을 데려온 겁니까?”
“죽지 않은 인간입니다 집사님.”
“죽지 않은 인간이 아직도 내려온단 말입니까?”
그러면서 혀를 끌끌 찼다. 김독자는 감정당하는 기분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는 집사의 눈초리를 견뎌냈다. 그리고 집사는 따라오시라며 총총 발을 옮겼다. 양같이 휘어진 은색 뿔 끝이 반짝였다.
샹들리에를 몇개나 지나서 김독자는 커다란 문 앞에 설 수 있었다. 염소가 양각된 나무문을 집사가 장갑 낀 손으로 노크하자 낮은 목소리가 답했다.
-뭐지.
“폐하, 알현하고자 하는 자가 있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아닐텐데.
“...그것이.”
그리고 집사가 김독자를 또 흘끔, 보았다.
“살아있는 인간 때문입니다 폐하.”
잠시간 복도에 침묵이 흘렀다. 김독자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았다. 바람이 부는지 숲이 흔들리고 있었다. 후우, 하고 바람을 불면 어떻게 될까. 문득 민들레 홀씨가 날리는 장면이 눈 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들라 하라.
덜컥 하는 손잡이 소리. 그리고 소리없이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는 것과 같이 복도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안 그래도 밝은 복도였는데, 이젠 눈이 부실지경이었다. 김독자는 조금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아, 그리고.
“-너인가.”
문득 나다니엘의 말이 떠올랐다. 잘생기셨거든요, 폐하께서는. 이름부터 잘생겼어요. 유중혁이라고. 아, 그 말대로였다. 신이 공들여서 빚은 것 같은 생김새.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싶은 신성한 미모. 중혁아, 너는 참. 뭐라고 머릿속에서 떠오를 듯하다가 다시 지워졌다. 김독자는 두 개 풀린 셔츠 단추를 보다 카펫을 밟고 있는 치노 팬츠가 발등을 살짝 덮은 아래 맨발을 바라보았다. 탁, 하는 소리를 내며 두툼한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은 유중혁이 소리 없이 걸어 김독자의 앞에 다가왔다. 한 층 높은 시선이 고개를 약간 숙여 김독자의 약간 들린 시선과 맞부딪혔다. 검은 눈이 깊었다. 당장이라도 홀려서 빨려 들어갈 듯이. 쯧,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발견했지.”
“접니다.”
나다니엘이 말했다. 유중혁은 그 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말을 다시 걸었다.
“너 외에 발견한 악마는.”
“없습니다.”
“좋다.”
이자에게 정해둔 포상을 내려라.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유중혁이 뒤를 돌았다. 너는 나를 따라라. 김독자가 자신을 가리키며 집사를 보자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독자는 방을 가로질러 창가로 가까이 가는 유중혁을 따랐다.
“너.”
유중혁이 창밖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유중혁 두발 뒤에 멈춰섰던 김독자는 흠칫 고개를 떨구었다.
“여기를 기억하나?”
“예?”
무슨 소리지? 김독자는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창 밖에서는 해가 지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다고, 아니, 깨어난 시간 자체가 늦었을지도 모르지. 붉은 색으로 물들고 있는 창문 밖에는 태양이 벼랑 끝에 걸려있었다.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냐고? 아니. 당연히 본 적이 없었다. 김독자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기억나는 게 없습니다만.”
“그런가.”
설핏, 유중혁이 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의 착각이었고, 유중혁은, 왕은 무표정했다. 그리고 유중혁이 손을 들었다. 두툼한 손바닥의 밑부분이 미간에 닿아왔다. 손바닥에 이마가 감싸이고, 손가락이 머리 위를 덮었다. 눈 감아라. 유중혁이 명령해서 김독자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온 몸이 손바닥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김독자.”
그리고 김독자는 눈을 떴다. 잘 알고 있는 천장이 눈 앞에 비치고 있었다.
김독자는 순식간에 일상으로 돌아갔다. 회사에 출근했다가 퇴근하고, 작은 자신의 원룸에 누워서 웹소설을 읽곤 했다. 다만, 다만 조금 이상한 점이라면. 약간씩 넋을 놓는 빈도가 늘어났다는 것 정도. 문득 문득, 그 지독히도 생생한 꿈이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 정도. 내가 그렇게 잘생긴 사람을 본 적이 있던가? 생각해 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곧 잊어버릴 꿈치고는 너무나도 생생했고, 아니, 곧 잊지 못하기도 했다. 금방 떠올라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마치 그 쪽이 현실이고 이쪽이 꿈인 양 싶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치기에는... 이곳은 아팠다. 그 쪽은 아프지도 간지럽지도 않았던 데에 비해, 여기서는 손가락을 종이에 베어도 아팠다.
“어, 독자 씨 피나요!”
“괜찮아요?”
김독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밴드를 가져다 손을 싸매었다. 손끝이 쿡쿡 아렸다. 김독자는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러니 그것은 꿈이었다. 꿈이 맞았다. 꿈을 또 꾼 것은 그날 밤 즈음이었다.
자각몽이었던 지난번 꿈과는 다르게 이번 꿈은 김독자가 없었다. 그저, 폐허가 된 도시 한 가운데에 유중혁만이 있었다. 유중혁은 두툼한 종이뭉치를 들고 있었다. 누가 보면 돈다발인 줄 알겠군. 김독자는 생각했다. 그것은 차라리 화려한 티켓에 가까웠다. 뭔지 알 수 없는 티켓. 검은 코트를 입은 유중혁은 옆에 찬 검을 질질 끌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얼굴 한 쪽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앞을 보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는 양 닦지도 않고 있었다. 저 아까운 얼굴이.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유중혁은 걸었다. 콘크리트와 철근을 넘어서, 깨어지고 부서진 유리조각을 밟고, 갈라진 도로를 건너 뛰며 마침내 목적한 곳까지 다다랐다. 그곳에는 마치 자판기처럼 생긴 그 무언가가 서 있었다. 서 있다고 하기엔 20도쯤 기울어 있었지만, 여하간에. 어디에도 연결되지 않았던 듯, 기계는 공터의 한가운데에서 마치 슬롯머신처럼 화려한 화면을 내보이며 끝없이 작동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그 기계 위에 종이 뭉치를 올려놓고 그 중에 하나를 들어 투입구에 쑤셔넣었다. 마치 자판기에 지폐를 쑤셔넣듯이. 기계는 위잉, 하는 소리를 내며 종이를 잘도 받아먹었다.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기계가 발랄하게 외쳤다. 유중혁은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꺼냈다. 빼곡하게 뭔가를 적어넣은 종이였다. 그리고 그것을 줄줄 읽었다.
“이름, 글로리어. 회색 뿔에 갈색 머리, 붉은 눈.”
유중혁은 누군가의 신상명세를 읊고 있었다. 김독자는 그것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성격까지 다 읊고 나자 기계가 종이를 완전히 빨아들였다. 마치 자판기가 돈을 먹듯이. 유중혁은 기계 위에서 종이를 한 장 더 짚고는 기계에 티켓을 또 쑤셔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반복했다. 티켓을 집어넣고, 누군가의 신상명세를 읊고, 그럼 기계는 종이를 먹었다. 문득 김독자가 정신을 차린 것은 누군가가 비틀비틀 걸어왔을 때였다. 그는 걸어와서, 풀썩 한 쪽 무릎을 꿇고 유중혁의 옆에 앉았다.
“주인님.”
“폐하라 불러라.”
“폐하.”
유중혁은 그 쪽으로 눈길도 주지않고 명령한 후, 몇 장 남지 않은 종이 중 한 장을 쑤셔넣었다. 기계가 종이를 받아먹었다. 그리고-
“이름, 나다니엘.”
김독자는 또 꿈에서 깼다. 이번에는 새벽이었다. 꿈이 이런 식으로 이어지기도 하나? 머릿속이 혼란했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서 김독자는 핸드폰을 켰다. 웹소설이라도 읽을까하고 판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문득 소개글을 읽었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남자, 그곳에서 만난 운명의 연인, 마왕을 무찌르고 왕의 자리에 앉기 위한 투쟁... 김독자는 문득 그 소설을 클릭했다. 운명의 연인의 이름은 나다니엘이었다. 허, 김독자는 한숨을 내쉬고는 마른세수를 했다. 내가 어디서 이 소설을 읽었거나, 혹은 리뷰라도 봤나보지. 한숨이 한 번 더 나왔다. 김독자는 핸드폰을 잠그고 다시 눈을 감았다. 중혁아. 혼곤한 가운데 문득 그 이름이 떠올랐다. 보고 싶어. 그 생각은 너무도 가물가물하여 떠올랐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김독자는 또 꿈을 꾸었다. 유중혁은 무언가과 싸우고 있었다. 새카만 검을 뽑아 들고, 검과 검이 맞부딪혔다. 검은 마력이 덩이로 뭉쳐 유중혁에게 날아들었다. 유중혁은 어렵지도 않다는 듯 그 마력을 피했다. 심지어 어느 순간에는, 튕겨내기까지 했다. 네놈-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렸다. 그러나 유중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눈앞의 악마의 목을 베었다. 악마인 것은 내가 어떻게 알지? 김독자는 잠시 떠올렸지만, 꿈이려니 하고 무심코 넘어갔다. 그리고 유중혁이 잘린 머리를 주워들었다.
“마왕은 어디있지?”
잘린 머리가 뻐끔뻐끔 움직였다. 유중혁은 머리를 내던지고 한 쪽을 향해 걸었다. 김독자는 그런 유중혁을 쫓았다. 중혁아. 김독자는 속으로 작게 유중혁을 불렀다. 왜 이렇게 네가 친근할까 나는. 김독자는 웃었다. 유중혁이 뭔가를 눈치챈 듯 뒤를 돌았다. 그리고는 픽, 웃었다.
“뭘 웃는 거냐 김독자.”
그리고 김독자는 또 눈을 떴다. 알람이 울리고 있었다.
김독자는 이제 좀 미칠 지경이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딜 가든 중혁이가 보일 것 같았다... 어느 정도는,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김독자는 일신상의 이유를 대며 병가를 내었다. 내일이 없는 계약직이니만큼 해고 당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당장의 상태만은 못했다. 잠을 자는 것이 조금쯤 두려웠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되뇌이며 김독자는 냉정하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자신이 꿈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닐까? 꿈은 꿈일 뿐이다. 이게 뭐라고 자신이 이렇게 매달리고 있단 말인가. 자신에게는 작으나마 집도 있고, 계약직이나마 다니는 회사도 있다. 일상은 멀쩡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그래. 오랜만에 친지들에게 연락이라도 해서... 핸드폰을 집어 들다 문득 김독자는 깨달았다. 내 친지가 누가 있었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차라리 없었으면 또 모르겠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김독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핸드폰을 손에서 놓았다.
김독자는 차근히 기억을 되짚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의 고향이 어디인지, 무슨 학교를 나왔는지, 부모님은 누구신지, 친구는 누가 있었는지. 그러나, 망할, 떠오르는 것이 전혀 없었다. 무슨 학교를 나왔는지 이름은 떠올랐으나 그것은 마치 서류에 써 있는 것을 보는 것마냥 감흥 없었다. 그 안에 들어있을 추억이나 악몽 따위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고향? 자신이 무슨 동에서 살았는지도 모르겠는데 무슨 고향이란 말인가. 주소를 모를 정도로 전전했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저 기억이 없었다. 기억이. 처음부터 성인으로 태어난 사람에게 너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고 최소한의 상식만 우겨넣은 것처럼. 김독자는 문득 꿈의 편린을 떠올랐다. 아프지도 않았지만, 현실처럼 생생했던.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김독자.
유중혁의 말이 귓가를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돌아오지' 말라고? 마치 내가 그곳에서 있었던 것 같은 말이었다. 게다가 그는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아. 김독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잊자고. 잊어버리자고. 그것은 한낯 꿈일 뿐이라고. 그리고 혼몽한 정신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는 또 마왕성에 있었다... 허공에 떠 있는 마왕성에. 해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바닥이 없는 깊은 절벽이었으며 성은 다리 하나에 기대어 매달린 듯 위태로운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김독자는 고개를 돌려 유중혁이 보여주었던 낙조를 보았다. 절벽은 그 아래로 끝이 없었다. 그야말로, 영원히 추락할 듯한 모양새였다. 해조차 그래서 지지 못하고 그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착각하게 만드는, 그런 모양새. 거기서 김독자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의 가장 높은 탑 꼭대기에서. 누군가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과연,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물을 필요도 없었다. 유중혁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나를 죽여 중혁아."
누가 말했을까. 내가 말한 걸까? 주변에는 저와 유중혁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유중혁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김독자. 유중혁이 말했다. 말한 것 같았다. 내가 너를. 너를... 어떻게. 그리고 입이 막혔다. 찝찔하게 피맛이 나는 것 같았다. 유중혁의 얼굴은 가까이서 봐도 잘생겨서, 그러니까, 도저히 견딜수가 없어서 김독자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현실에서 눈을 떴다.
김독자는 헐떡이고 있었다. 마치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 사람 마냥. 눈에서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김독자는 천장을 바라보며 주문을 외우듯 되뇌였다. 유중혁. 유중혁. 중혁아. 그리고 흐느끼듯 뱉었다.
"...중혁아..."
"잊어라 김독자."
뭔가가 김독자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것은 온기를 지니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손인 양. 그 때 이마를 감싸 쥐었던 유중혁의 손처럼. 김독자는 흐느껴 울었다. 중혁아, 중혁아. 그렇게 주문을 외우듯이.
"어디까지 떠올랐지?"
"모르겠어."
어디가 시작인지도 모르는데 어디가 끝인 줄은 자신이 어떻게 알까. 김독자는 그래서 모르겠다고 이야기했다. 유중혁은, 아니 그의 목소리는 차분히 그를 다시 추궁했다.
"뭐가 떠올랐지?"
"'나를 죽여 중혁아.'"
"거기까지인가."
유중혁의 목소리가 혀를 찼다. 김독자는 발음했다.
"나를 죽여 중혁아."
"들었다."
"아니, 아니."
김독자는 투정부리듯 말했다.
"나를, 죽여. 중혁아."
나를 데리고 지옥으로 돌아가. 나는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 같아... 김독자는 지금까지 느꼈던 위화감을 한 문장으로 뱉었다. 여기는 아니라고. 여기는 안 된다고. 지금껏 까무라치 듯 잠들었다가 소스라치듯 깨어났던 나날들을 담아. 김독자는 중얼거렸다. 왼쪽 귓가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안 된다."
마치 누군가가 정말로 귓가에서 속삭이고 있는 것처럼.
"안 된다 김독자. 너에게는 여기가 안전하다."
"안전하지 않아..."
김독자는 되풀이하듯 중얼거렸다. 무엇으로부터? 김독자는 물었다. 유중혁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나로부터."
머리카락을 쓰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 표정이 울 것 같을 것 같아서 김독자는 손을 들어 유중혁의 얼굴을 더듬고 싶었다.
"중혁아."
김독자가 조금 더듬듯이 말했다.
"여기도 안전하지 않아."
"무엇이 널 위협해서?"
유중혁의 목소리가 으르렁거리듯이 물었다. 당장이라도 그것을 물어 뜯을 듯한 목소리였다. 거대한 사냥개가 떠올랐다가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그 사냥개는 눈이 다섯 개 달리고 다리가 여섯개에 꼬리가 네 개였다. 평범한 지상의 사냥개는 아니라는 뜻이다. 왜 그런 게 떠오를까. 김독자는 생각했지만 두통이 일 뿐이었다. 두통.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도 두통이 있었다. 왜 그걸 떠올리지 못했지? 김독자는 어리둥절하게 생각했다. 뭔가 파삭파삭 금이 가는 느낌이었다. 조금만 더 힘을 가하면 깨질 듯이. 김독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뱉었다.
"...내가."
내가 위험해서. 얼마 남지 않았다고 뭔가가 속삭였다. 그건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안 된다 김독자. 유중혁이 다급하게 속삭였다.
"여기 있으면 될 거다. 다 괜찮아질 테니. 그러니."
"왜?"
"김독자."
"왜 여기 있는 게 안전해?"
너는 날 해치지 않고 있잖아. 지금도. 김독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유중혁의 손을 떼어냈다. 유중혁의 얼굴이 비쳤다. 조금, 화가 나 보였다.
"여기서 인간인 척 하고 있다고 달라지지 않잖아."
퍼석, 하고 깨지는 소리가 났다.
김독자는 지옥의 밑바닥이었다. 말 그대로. 비유적인 의미로 밑바닥 생활을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강이 흐르고, 온갖 사람과 짐승들이 디디고 다니고, 풀꽃들이 자라고 때때로 지진도 일어나는 그런 바닥. 땅. 그 중에서도 가장 깊은 바닥. 인간 영혼의 고문의 장을 지탱하는 피범벅. 언제부터 자아가 생겼는지는 김독자조차 몰랐다. 김독자는 계속 지옥에서 살았다. 보이는 건 지옥도이고, 들리는 건 비명 소리. 아비규환이라는 말의 탄생지. 김독자는 무심히 그런 것들을 넘기는 법을 배웠다. 이름을 붙이는 방법을 알게 되면서 김독자는 자신을 김독자獨子라 불렀다. 그리고 지옥을 유랑했다. 자신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의의가 있었으니. 가장 높은 층부터 가장 낮은 층까지. 그래도 잠만은 가장 낮은 층에서 들었다.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그곳이 김독자의 태초의 장소였으니까. 그런 김독자가 유중혁을 발견한 것은 중간정도 층에서였다.
그것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천사에 가까웠다. 그야 당연했다. 신이 그렇게 공들여서 빚었는데 그냥 인간일리가. 그리고 악마들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비명소리도 피냄새도 익숙했지만 악마들이 그 대상이 되는 것은 또 오랜만이었다. 없는 일은 아니었다. 악마 사이에서도 계급 싸움은 있었으니까. 그러나 악마는 아니었다. 김독자는 자신이 배태한 모든 악마들을 알고 있었고 유중혁은 그 중 하나가 아니었다. 그래서 김독자는, 인사했다. 태어나 최초로.
"안녕."
유중혁은 눈을 치켜뜨곤 손에 들고있던 덩이를 던져버렸다. 철퍽, 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검을 치켜들다 말고 유중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넌 뭐냐."
"어?"
"인간이냐, 악마냐."
인간이라면 죽이고 악마라면 베어넘겨 주지. 둘 사이의 차이점이 뭔지 모르겠으나 김독자는 둘 다 아니었다. 김독자는 고개를 저었고 유중혁은 코를 찡그렸다. 악마라기엔 뿔이 없었고 인간이라기에는 지옥의 냄새가 너무 짙게 풍겼다. 어찌 되었든 없애 버릴까.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달려들어 목을 졸랐다. 발이 땅에 닿지 않아서 기력이 금방 쇠했다. 김독자는 달랑 들려서 인간의 모습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얼마 가지 않아 맞아 떨어졌다. 김독자는 곧 흙으로 부서져 내렸다. 유중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악마라면 피가 솟구쳤을 텐데. 가짜인가. 유중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김독자는 몸을 재구성했다. 흙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리곤 유중혁에게 다시 다가갔다.
"저기."
이번에는 검이 날카롭게 가슴팍을 찔려들었다. 고통은 없었다. 김독자는 검을 꽂은 그대로 유중혁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저기. 소용 없는데."
"넌 뭐냐."
유중혁이 짓씹듯이 뱉었다. 김독자는 살기를 느끼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답했다.
"나도 몰라."
"뭐?"
"그냥, 여기 있는데."
유중혁은 그 말이 진짜인지 가늠하듯 김독자를 눈으로 훑다가 거칠게 검을 잡아 뽑았다. 흙먼지가 날렸다.
지옥에도 밤은 온다. 유중혁은 불을 피워놓고 주위를 한 번 경계한 뒤 잠자리로 삼은 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거기 그대로 앉아있는 희끄무레한 인영을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꺼지라고 했을 텐데."
"내가 왜?"
당돌하게 반박하자 할 말이 없는듯 유중혁은 맞은편으로 와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김독자는 불에 비친 유중혁을 바라보다 역으로 물었다.
"넌 누구야? 처음 봤어."
"나는 유중혁이다."
"그게 네 이름이야?"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불을 뒤적일 뿐이었다. 김독자는 그 모습을 홀린듯이 바라보다 말했다.
"나는 김독자야."
"희한한 이름이군."
"그런가."
"그리고 악마답지도 않은 이름이다."
김독자, 보통 악마들은 성 없이 이름만 쓰지. 그것도 좀 서양 풍으로. 이름을 잘못지었나. 김독자는 멋적게 고민했다. 유중혁은 그런 김독자를 짧게 끊어 보았다. 김독자는 잠시 후 침묵하는 유중혁에게 다시 질문했다.
"넌 뭐야?"
"인간이다."
"천사가 아니고?"
유중혁은 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 말을 무시했다. 김독자도 실없이 물어봤다는 듯 다른 걸로 넘어갔다.
"지옥에는 왜 왔어?"
"지옥에 오는 이유는 다 비슷하지 않나?"
나쁜 짓을 해서지. 그렇게 말하기엔 유중혁은 다른 인간들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검을 휘두르며 악마들을 도륙한다는 것부터가. 그래서 김독자는 질문을 조금 바꾸었다.
"뭘 하러 지옥에 왔어?"
유중혁은 불을 뒤적이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김독자를 노려보았다.
"지옥을 뒤엎으러."
마치 그 너머에 누군가가 있다는 양. 김독자는 그런 유중혁을 빤히 바라보다 배시시 웃었다.
"나도 같이 가자."
"뭐?"
"지옥이 뒤집히면 나도 지상에 가 볼 수 있겠지? 한 번 쯤 가 보고 싶었어."
유중혁은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눈으로 김독자를 보았다. 그리고는 불의 바깥으로 몸을 두고 누웠다.
"그럼 네가 불침번을 서라."
"응!"
김독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 유중혁이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는 것을 김독자는 몰랐다.
김독자는 유중혁을 어미를 처음 본 오리처럼 따랐다. 어디를 가든 졸졸 따라다녔다는 뜻이다. 그리고 종알종알 이것저것 물어댔다. 피곤한 유중혁은 날이 서 있었지만 김독자는 굴하지 않았다. 여긴 또 왜 왔어? 저거 줏으러? 저게 뭔데? 그걸 쓰먼 어떻게 되는데? 유중혁은 처음 한두마디는 대답해주다가 그 이후로는 입을 다물었다. 김독자는 볼이 퉁퉁 부풀었지만 유중혁을 따라다니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유중혁은 침착하고 공평하게 김독자를 제외한 모두를 베거나, 터트리거나, 썰거나... 아무튼, 죽였다. 그 과정이 아무리 지난하고 어려울지라도. 몇시간씩 잠복하고 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악마들 사이에서는 보기 힘든 인내심이었다. 김독자는 그런 유중혁의 옆에 붙어서 인내심을 갉아먹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그러다 또, 밤이 깊었다. 유중혁은 이번에는 불을 피우지 않고 바위그늘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김독자는 그 옆에 자리를 잡고 또 불침번을 담당했다. 유중혁의 숨소리가 어제와는 다르게 아주 천천히 고르게 변했다. 김독자는 그걸 보다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지옥의 하늘은 결국 지상의 바닥이다. 꼭 닫혀있는 어둠을 바라보다 김독자는 쉿쉿 소리를 내며 가까이 다가오려는 지옥개를 쫓아냈다. 다리가 여섯이고 눈이 다섯이며 꼬리가 네 개인 흔한 지옥개였지만, 유중혁의 수면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은 뻔했다. 김독자는 지옥개를 쫓아내고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무구하다고 해도 좋을 표정으로 유중혁은 잠들어 있었다. 김독자는 물기를 잃어 부스러지려고 하는 손끝을 재생하고는 그런 유중혁에게 살짝 기대었다. 지옥 밑바닥에서밖에 잠들 수 없는 김독자로써는 이렇게라도 쓸모가 있어진다는 것이 약간은 기뻤다.
몇시간이 지나 해가 뜨기 시작한 즈음에 유중혁은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이 잠든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너. 그렇게 김독자에게 말을 걸어놓곤 곧 뭐라 말하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대신 어제보다 더 공고히 김독자가 따라다니는 것을 묵인해 주었다. 그리고 그날 밤은 말을 걸었다.
"오늘은 네가 자라."
"난 안 자는데."
김독자는 준비해 놓은 것처럼 답을 꺼냈다. 유중혁이 눈을 홉떴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눈을 감고 정신을 잃는 일은 그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유중혁은 그것을 몰랐다.
"헛소리 하지 말고 눈이나 붙여라."
"아니 그러니까."
"피곤하다는 헛소리를 지껄이게 되는 날에는 버리고 가겠다."
"무릎 베고 누워도 돼?"
유중혁의 삐죽한 눈꼬리가 더 올라갔다. 김독자는 주섬주섬 자리에 누웠다. 이래봤자 잠들 수는 없는데. 김독자는 속으로 꿍얼거리다 실눈을 뜨고 불을 뒤적이는 유중혁을 보았다. 불길에 비치는 얼굴은 가라앉아 있었다. 김독자는 눈을 감았다.
둘은 그렇게 번갈아가며 잠자리에 들었다. 유중혁은 여전히 악마를 사냥하고 다녔고 김독자는 그런 유중혁을 따라다녔다. 아주 가끔, 유중혁이 졸게 될 때면 김독자는 어깨를 빌려주기도 했다. 사냥이 쉬워졌다는 것을 깨달은 건 어느 시점이었을까. 고위급 악마를 사냥하면서부터 점점 단말마가 바뀌어갔다. 그저 비명을 지르던 것에서 그치지 않고 원한에 찬 목소리를 내며 죽어갔다. 그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다들 그런 법이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시선의 끝이 항상 김독자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어떻게...!"
유중혁은 악마의 심장에 검을 찔러넣으며 생각했다. 또로군. 또 이상한 말을 하는 악마가 나왔다. 유중혁은 악마를 한쪽으로 던지고 발로 툭툭 쳤다.
"마왕은 어디 있나."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별 기대도 하지 않았으므로 유중혁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김독자를 향했다.
"가자."
"응!"
발을 옮기며 김독자는 조잘조잘 입을 열었다. 검을 쓰는 게 멋있었다느니, 역시 강하다느니 떠들어대는 김독자의 말을 들어주다 유중혁은 입을 떼었다.
"김독자."
"어?"
"네가 마왕인가."
"아니?"
김독자는 바로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아니었으니까. 유중혁은 망설임 없이 튀어나온 대답에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마왕이라면 어찌되었든 난 널 죽일 거다."
"응."
김독자는 별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중혁의 보폭이 넓어졌다. 아까보다도 성큼성큼 걷는 움직임이 마치 화가 난 것 같아서 김독자는 그런 유중혁을 뛰다시피 따라가야 했다. 중혁아 같이 가! 외쳤지만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흘끗 돌아보았을 뿐이었다.
유중혁은 배신자를 기대하지 않았다. 마왕이 어디있냐고 묻는 것은 굳이 말하자면 습관에 가까웠다. 어쨌든 알아내기는 해야했으니까. 죽이고 나서야 묻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전투에 정신이 팔려있다가 다 끝나고 나서야, 참, 물었어야 했는데, 하고는 묻고는 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전부 다 죽여야 하기도 하였고. 당연히 마왕성까지 가는 길은 오래 걸릴 수 밖에 없었다. 길을 꼬아놓은 탓도 있었고, 유중혁이 길을 잃은 탓도 있었다. 그러나 어쨌건, 그들은 마왕성에 다다랐다. 유중혁이 마왕을 제외한 마지막 하나까지 전부 죽여버리고 난 후였다.
악마들이라는 것은 어찌나 오만한 것인지. 유중혁이 지금껏 수많은 악마들을 무찔러왔다는 걸 알면서도 마왕은 어렵지 않게 방심하였으며 그 덕에 치명상을 입었다. 당장에 죽지는 않겠지만 그냥 두어도 곧 쓰러져 그 생을 마감할 것임이 틀림없는 그런 상처였다.
김독자가 쓰러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달려갔다. 검을 검집에 집어넣지조차 못하고 달려가는 모습은 다급하고 급박했다. 김독자, 일어나라! 그것은 절규에 가까웠다. 마왕이 기침을 하며 웃음을 머금었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맥을 짚으며 마왕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김독자는 인간을 흉내내었을뿐이지 인간은 아니었다. 맥이 잡힐리가 없었다.
"악마가 없다면 지옥이 아니지."
마왕이 헛소리를 했다. 죽어가는 자의 유언치고는 이상한 감이 있었다. 유중혁의 눈매가 더 날이 섰다.
"지옥 밑바닥도 결국엔 지옥의 일부야. 지옥이 아니게 된 지옥이 얼마나 유지 될 거라고 생각하나?"
유중혁은 김독자를 내려다 보았다. 창백한 얼굴이 눈을 감고 있었다. 유중혁은 그것을 따라하듯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 눈을 떴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그러안고 자리에서 일어나 마왕성 문을 향해 걸었다. 등 뒤에서 마왕이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 스러질 것 같은 소리였다.
유중혁은 그렇게 마왕이 되었다.
"왜 나를 여기로 보냈어?"
"인간계를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유중혁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나 그 뿐이 아니라는 것을 김독자는 알고 있었다. 지옥을 뒤집어 엎을 거라고 하더니. 김독자는 손을 뻗어 유중혁의 볼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눈을 덮고 있는 유중혁의 손을 덮었다. 언젠가 자신을 무너트리고 싶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 지옥을 없애버리고 싶어지게 될 때 자신이 가까이에 있으면 위험해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인간계에 있으면 지옥의 밑바닥이 아니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뒤죽박죽으로 섞인 생각이 그대로 전해져오는 것 같아서 김독자는 웃었다. 네가 나에게 위험하다는 것은 그런 뜻이겠지.
"중혁아."
"그래."
"위험해도 괜찮아."
"김독자."
유중혁이 급박하게 말했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손을 눈에서 떼어냈다. 두 쌍의 검은 눈이 마주쳤다. 유중혁의 눈이 조금 울 것 같았다. 적어도 김독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네가 하고 싶은걸 해, 중혁아."
"김독자,"
"내가 마왕이 될게."
김독자는 웃었다. 아주 꽃같이.
"언젠가 모든 것을 끝내고 싶어지면."
그 때 나를 죽여 중혁아. 김독자는 손을 뻗어서 유중혁을 끌어당겼다.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 김독자의 머리에서 작게 뿔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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