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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D/전독시

[중혁독자] 윤당允當

ㄷㄷㄷㄷ 2022. 12. 26. 13:50

모든 기록은 역사가 될 확률을 지니지만, 모든 역사가 기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록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쓰는 역사에 관해서 김독자는 자신보다 더 정통한 이는 없으리라 예측했다.

김독자는 사관이었다. 이 말을 다시 좀 다르게 쓰자면 말단 중의 말단 품계를 받고 있었다. 아, 물론 완전히 미관말직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 계단 올라가 보았자 끝급은 거기서 거기였고, 봉록도 쉬이 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왕의 사관이었다면 자신의 기록이 무엇이나마 세검정에서 씻기기 전 무엇이나마 될 수 있으리라는 미약한 기대라도 걸어볼 수 있겠으나, 글쎄. 김독자는 왕자의 사관이었다.

본디부터 왕자에게까지 사관이 붙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관이란 무릇 국가의 대소사를 기록으로 남기므로써 미래에 이를 반추해보고 좋은 일은 반복하고 나쁜 일은 없도록 하는 것이 기본 이치 아니던가. 그러나 왕자의 일상이란 국가의 대소사라기보다는... 미세사다. 아예 굵직한 뿌리라기 보다는 실뿌리에 가깝다는 말이었다... 왕자가 중요한 일을 치면 대전 회의까지 오를 것이고 그렇다면 알아서 사관들이 적겠지. 그렇다면 왜 작금에 와서 갑자기 왕자에게 사관이 붙었느냐.

그것은 왕의 집착적인 성정 탓이었다.

왕에게는 다섯의 아들과 두 딸이 있었다. 손이 귀한 왕가 치고는 유복했다. 그러나 그 아들들 중 어느 누구도 왕은 믿지를 못했다. 어느날 갑자기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죽이기라도 하리라 생각했던 것인지, 첫째 왕자가 십오 세가 되던 날부터 모든 왕자들에게는 사관이 붙었다.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기록되었고, 왕에게 보고가 올라갔다. 그 집착을 차라리 백성들에게 써 주었다면 참 좋은 나라가 되었겠지. 김독자는 첫 출근을 하는 그 날 셋째 왕자의 사관으로 배정이 되었다. 왕은 아직도 세자를 정하지 않은 상태였고 첫째 왕자는 덕분에 장수왕의 아들 조다보다 못한 신세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수군거림에 항시 시달려야 했다. 덕분에 모든 기록은 '왕자'의 기록으로만 남았고, 어떠한 기록도 역사에 편입되지는 못한 채 쓸쓸히 씻겨져 내려갔다. 읽어주는 이 없이, 그렇게.

왕자가 다섯 순 째 활을 쏘았다. 김독자는 그것을 적어내렸다. 정 가운데에 꽂혀 들어간 화살이 다섯개가 되었다. 이제 막 열아홉이라 하였는데 셋째 왕자는 못하는 것이 없었다. 문文과 무武에 모두 능한데다 가차도 없었다. 그렇다고 자비가 없느냐 하면 막냇동생인 공주를 아끼는 것으로 보아 그것 또한 아니었다. 그야말로 글에서 튀어나온 듯한 완벽한 왕재. 그래서 왕에게 글을 올리는 선배 사관의 얼굴은 나날히 초췌해져 가는지도 몰랐다. 뭐, 김독자에게는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었다. 김독자가 가벼우나마 셋째 왕자를 보고 느낀 것은 하나였다. 어떻게 그런 왕의 밑에서 저런 미모가 나왔을까? 옥을 깎은 듯한 얼굴이 시름에 젖은 듯 눈을 가늘게 뜨고 활을 잡아당기자 잠시 후 여섯 순 째의 화살이 또 퉁겼다. 과녁의 정중앙에 또다시 화살이 꽂히고 잠시 왕자가 화살을 내렸다. 김독자는 또 그것을 적어내렸다.

김독자의 업무는 하루종일 3왕자를 쫓아다니며 그의 일과를 기록하는 것이었다. 누가 이렇게까지 하냐고 할만큼 세세하고 지독하게. 총 스무 순의 활을 쏘고 왕자는 환관이 올린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물론 스무 순 다 명중이었다. 스무 순을 쏘았고 다 명중이라는 건 기록을 끝냈으니 땀을 닦았다는 것만 기록하면 되겠지. 세필이 종이 위에서 춤을 추었다. 벼루 위에 붓을 내려놓는데 마루가 가볍게 울렸다. 김독자는 고개를 들었다. 왕자가 옆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김독자는 다시 붓을 들었다. 이번에는 종이와 먹물이 든 병도 함께였다. 이번에는 또 어딜 가려고 하시나. 김독자는 왕자의 평소 일과를 떠올렸다. 보통 왕자의 일과는 숨돌릴 틈조차 별로 없이 빽빽하게 짜여져 있었다. 오늘의 활쏘기가 그나마 숨쉴 틈이었다. 그러니까 아마, 강연이겠지. 이쯤 되면 매일 반복되는 일과가 읽는 이도 지루할 법 한데 왕은 도통 질리지를 않았다. 훑어보아도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매일 읽고 있다니 왕이 변태인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물론, 어느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고민이었지만.

왕자가 스승들과 토론을 나누는 사이 해가 꼴깍 넘어갔다. 김독자의 오늘 업무는 해가 저물 때까지였다. 정말 말 그대로 12시진 내내 붙어 있어야 하는 업무기 때문에 3왕자의 사관도 김독자 혼자가 아니었다. 오늘의 업무는 강연까지인가. 김독자는 토론의 내용을 받아적으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본디 사관은 한 사람 앞에 둘이 붙어야한다. 말을 적는 사관과 행동을 적는 사관. 아무리 속기를 한다 하여도 그것이 한계다. 그러나 그만큼의 정성까지 들이기엔 신하들도 강했다. 그만큼의 예산을 짤 수는 없었다. 덕택에 김독자의 손은 날아다닐 정도로 바빠야 했다. 아직 어린 5황자면 모를까 그 이상의 사관들은 다 비슷한 처지였다. 오히려 왕의 사관이-정신적 부담감을 차치한다면-더 나을 지경이니 말 다한 것이지. 예전에는 편했다던데. 김독자는 문어 다리 말린 것을 질겅질겅 씹으며 생각했다.

도시의 밤은 야시장이 융성했건만 친우에게 내쫓긴 발걸음이 처량했다. 그래도 더러운 정이라며 문어다리라도 하나 던져준 것이 다행이지. 탁주 한 잔 하자니까. 집필은 좀 낮에 해 둘 것이지. 그쪽도 9품이니 바쁠 것이야 빤하지만 김독자는 모른척 그렇게 생각했다. 혼자서라도 한 잔 할까. 그렇게 생각하며 김독자는 야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당과나 꼬지를 파는 곳은 많았지만 썩 마음에 차는 데는 없었다. 김독자는 문어다리를 마저 삼키고-뻣뻣하게 마른 것이 딱딱하기 그지 없었다-그냥 집으로 돌아갈 마음을 먹었다. 야시장이 끝나는 부분의 시장 거리는 을씨년스럽기 그지 없어서 김독자는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검을 들고 왔어야 했나. 그러나 궁 안에서는 왕과 무관을 제외한 일체의 사람들은 무기를 패용할 수 없었다. 그걸 일일히 차고 풀어놓느니 집에 두고 다니는 게 나았다. 녹이나 안 슬었나 모르겠네. 김독자는 혀를 차고 뒤를 돌았다. 등 뒤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나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었다. 뭔가, 흙벽돌이 으깨지는 듯한, 그런 소리.

김독자는 무엇에 홀린듯 그 쪽으로 발을 옮겼다. 곱게 짠 미투리를 얕게 놀려 발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을 둘 발견했다. 정확히는 셋이었다. 어린 아이 하나와 사내 하나, 그리고 이제는 살아있는지 모르겠는 사람 하나. 김독자는 천천히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담장 모퉁이를 사이에 두고도 보였다. 도성 안 이 시간에도 검을 쓸 수 있던가? 그러나 사내는 검을 들고 있었다. 피는 맺혀있지 않았지만 검 끝은 분명히 쓰러져있는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내는 얼굴을 반쯤,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다. 코 위쪽만 간신히 드러나는 머리는 짧게 잘려 있었다. 상투를 틀기는 커녕 백호조차 치지 못할 정도로 짧은 머리였다. 그 적게, 달빛에 비추어 보이는 얼굴이 꼭, 마치- 어, 사람은 살아있는 모양이었다. 검 끝으로 사내가 벽에 기대어 쓰러진 사람의 고개를 들어올렸다.

와악, 하고 어린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무섭긴 했던 모양이었다. 김독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후두둑, 벽 모퉁이에서 흙먼지가 덩어리로 떨어져 내렸다. 그 작은 소리를 어찌 들었는지 아이의 비명에 입을 막으며 날카롭게 쏘아보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그 칼침같은 눈매와 눈이 마주쳤다. 문득 그렇게 생각하고 김독자는 후다닥 달아났다. 처리해야 할 것이 남았는지 사내는 바로 김독자를 쫓지 못했다. 일부러 굽이굽이 꼬아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김독자는 관아에 고할 생각을 애써 머리에서 지웠다. 신고하면 오히려 아니 될 것 같았다. 왜냐하면.

사내가 마치 3황자 같다는 생각을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으므로.


아니 근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김독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봉두난발을 한 사내가 3황자이건 말건 자신이랑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고발할 것은 고발할 것이고 3황자는 3황자인 것이다. 알아서 빠져나가겠지. 일단 출근부터하고 생각해보자. 어느새 아침해가 뜨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독자는 의관을 정제하고 궁으로 몸을 이끌었다. 닭이 몇번이나 울었다. 인경이 울리고 도성문이 열릴 시각이었다. 3황자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궁인들이 소셋물을 떠오면 그 물로 손과 얼굴을 적시고 비단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곤 왕에게 인사를 올리러 갈 채비를 한다. 그 채비하는 몸을 김독자는 조금씩 훔쳐보았다. 구체적으로는, 머리칼을. 머리꼭지에서 흘러내리는 기나긴 머리를 3황자는 옥으로 된 장식이 달린 망건까지 두르며 상투를 틀어올렸다. ...내 착각이었나. 김독자는 속으로 혀를 차며 글을 적어내렸다. 자연스레 눈이 내리깔렸다.

"너."

묵직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진 것은 그 때였다.

"고개를 들어라."

김독자는 잠시 멈추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의관을 갖춘 3황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등 뒤에서 빛을 쏟아내는 양 눈이 부셨다. 조금 전에 흐트러진 모습도 잘 생겼었는데 지금은 심지어 더 잘생겼다. 인간이 이럴 수 있는 건가? 김독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사관인가?"

"...그러하옵니다 저하."

"오늘 언제까지 근무를 하는가?"

그건 왜 물어보는 거지? 김독자는 아주 짧게 고민했다. 이건 마치 서투르게 건네는 연애의 단초 같지 아니한가. 궁 안에서는 남색도 드러내놓고 행해진다 하였거늘. 그러나 고민은 길지 못했다. 김독자가 답하기도 전에 3황자가 자문자답했다.

"이 시간에 근무하는 것을 보면 점심 전에는 끝나겠군."

"...그러하옵니다."

"좋다."

3황자가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한 손을 뻗어 김독자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쓸어내렸다.

"내 궁에 남아 있어라. 저녁에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예?"

3황자는 어색하게 눈을 깜박이는 김독자를 보다 허리를 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방을 나섰다.

김독자는 급하게 그런 3왕자의 뒤를 쫓아야 했다. 점심 즈음까지 3왕자의 일정은 빡빡하게 짜여있었고 물 샐 틈조차 없었다. 당장도 왕을 배알하러 가는 길이지 않은가. 김독자는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서 빠르게 손을 놀렸다. 지금 이 상황도 기록해 놓아야 했다. 이거 찍히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김독자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마지막 점을 찍었다. 그 순간 환관 중 하나가 외쳤다. 대군 마마 납시오-! 몇 개의 겹문이 차례대로 열렸다. 잠시 멈추었던 일행이 3왕자의 걸음과 함께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독자는 3왕자가 자리에 멈추어 서자 인원들을 조금 돌아서 3왕자의 옆에 섰다. 원래대로라면 불경한 짓이지만 여기가 왕이 지정한 사관의 자리였다.

김독자는 바닥에 종이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울퉁불퉁한 돌바닥이 정강이를 파고들어 불편했지만 딱히 불평할 수는 없었다. 잠시 사위가 침묵에 젖어들었다. 김독자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름 장관이었다. 왕자들이 자리를 지키며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사관들이 한 명 씩 앉아있었다. 왕녀들은 아직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왕이 왕자들만 불러냈거나. 흠, 어제 기록을 좀 보고 나왔어야 했나. 그럴 시간까지는 없었지만. 어색하게 생각하다 김독자는 문득 고개를 꺾었다.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3왕자가 김독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려보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끈질긴 시선이었다. 김독자는 숨을 삼키고 고개를 숙였다. 마침 환관이 다시 외쳤다. 폐하 납시오-!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방 안에서부터 흘러나와 정원을 울렸다. 어찌 들으면 아주 지친듯한 발걸음 소리였다. 왕이 방에서부터 걸어나와 마루 한가운데에 있는 의자에 주저 앉듯 앉았다. 방금 일어나기라도 한 건지 머리가 삐죽하니 흐트러져 있는 상태였다.

"간밤 강녕하셨사옵니까, 아바마마."

"강녕치 못했다면 어쩔 것이냐."

1황자의 말에 왕이 으르렁거리듯이 대답했다. 1황자가 급히 입을 다물고 눈을 굴렸다. 뭔가 걸리는 것이 있는지 살피는 듯 했다. 하지만 왕이 선수를 쳤다.

"네 외숙이 짐이 강녕한지 궁금해 하던?"

"아바마마. 외숙이옵니다. 오랜만에 어마마마와 함께 뵙게 되어 차를 한 잔 대접했을 뿐이옵니다."

"내로라하는 세도가들은 다 속에 꿍꿍이를 숨기고 있다. 왕자가 되어서 그걸 읽지 못하다니 네 속은 얼마만큼 편한 것이냐?"

거의 드러내놓고 면박을 준 후에 왕은 표적을 2왕자로 바꾸었다. 1왕자는 얼굴이 시뻘개져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2왕자는 매사냥을 간 일에 대해 추궁을 받고 있었다. 이 시기에 매사냥을 가다니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 같은 것을 따져 물어지는 2왕자의 표정은 당혹감이 가득했다. 일이 이쯤 되니 5왕자는 숫제 울것 같은 표정으로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인지 울지 않는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뒤에 부복해있는 환관과 궁녀들이 눈치를 보았다. 3왕자는 아무 말이 없었기에 김독자는 잠시 붓을 멈추고 흰 종이를 노려보았다. 왕이 의심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사소한 것까지 물고 늘어지면서 면박을 주는 쪼잔한 인간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는데. 3왕자가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을 살고 있는 이유를 알만 했다. 그 일상을 보고 받는 왕도 딱히 3왕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지 2왕자 다음 4왕자로 넘어갔다. 김독자는 그날 한 자도 쓰지 않고 왕의 궁을 나왔다.

상황이 변한 것은 정오가 된 다음이었다. 점심 때 즈음이 되자 다음 차례를 담당하는 사관이 왔다. 김독자는 사관에게 붓과 자리를 넘겼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3왕자에게 깊이 허리 숙여 인사하고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평소에도 그랬듯이 머리꼭지가 문지방을 넘자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사관 나으리,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나서 김독자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김독자는 궁녀들에게 달랑 들려서 이동당했다. 위치는 3황자궁의 침전이었다. 김독자는 그곳에서 씻겨지고 갈아입혀지고 먹여졌다. 쌀뜨물 세수도 하지 않는데 뽀얗기도 하다며 칭찬 비스무레한 것을 듣기도 했고,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삐 주어진 음식을 먹기도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해가 넘어가 있었고, 김독자는 하늘하늘한 옷 한 벌만을 걸친채 주안상을 앞에 두고 조신하게 앉아있는 상태였다. 너무 늦긴 했지만, 이쯤 되자 슬슬 감이 잡히려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 어째 승은을 입기 직전과 비슷하단 말이지? 등줄기가 오싹해왔다. 3왕자는 왕재라는 말과 어울리게 색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사내였다. 정확히 말하면 색이 뭔지도 모를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러운 일에도 준비라도 잘 된 것 마냥 착착 이루어지는 걸 보면 한두 번 일어난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김독자는 삐걱거리는 머리를 억지로 돌리며 생각하려 노력했다. 어찌되었든 지금에 와서 도망가는 것은 그른 것 같으니 세치 혀를 잘 놀려야 할 때였다. 김독자는 침착하려 노력했다. 문 밖에서 환관이 외쳤다. 3왕자 전하 납시오. 미닫이 문이 양 옆으로 열렸고, 묵직한 발걸음소리가 마루를 울렸다. 3왕자가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도 간단한 잠옷 차림으로.

"궁인들을 물려라. 침전 가까이에는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도록."

"예, 전하."

궁녀가 허리를 굽히고 물러났다. 3왕자의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김독자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나가지 마! 물러나지도 마! 사관은 어디간 거야! 하긴 자기 같아도 다음 상황이 뻔할 뻔자인데 그닥 가까이 오고 싶을 것 같지는 않았다. 김독자는 좌절했다. 갑자기 3왕자가 자기에게 꽂힌 이유가 뭘까? 고민해 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김독자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몸을 꼿꼿이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3왕자가 성큼성큼 걸어 김독자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한 발짝, 두 발짝, 그리고.

목이 쥐어잡혔다. 

목줄기 전체가 한 손에 그러잡혔다. 손아귀가 숨통을 눌러서 김독자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일으켜졌다. 컥, 컥. 기침하는 듯 억눌린 소리가 김독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꿇고 있던 무릎이 어느새 펴져 바동거렸다.

"고해라."

3왕자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김독자는 저를 쥐고 있는 손목을 눌러 잡았다.

"어디서부터 봤지? 누구에게 말했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낱낱이 고해라."

이걸 풀어줘야 말을 하던 말던 할 거 아냐, 이 정신나간 자식아! 김독자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손톱으로 유중혁의 손목을 긁었다. 유중혁은 혀를 차며 놓을 놓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김독자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작 몇 초 되었다고 들이쉬는 숨이 아프고 달았다. 제대로 말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스르렁, 소리가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벽에 걸려있던 예장용 검이 뽑혀 있었다. 검은 검집에서 보이는 것보다 실용성 있게 훨씬 짧았고 거기다 날까지 시퍼렇게 서 있었다. 마치 어제 본 그 검처럼.

"너는, 부황의 간자인가?"

3왕자가 흉흉하게 물었다. 그 와중에 한 점 흐트러짐 없는 것이 얄미울 지경이었다. 김독자는 헐떡이는 것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숨 사이로 말을 뱉었다.

"지랄하지 마십시오, 전하."

그리고 숨을 들이켜고.

"광증은 병입니다."

아직도 목이 피부부터 목구멍까지 죄다 얼얼했다. 김독자는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을 찾기 위해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안타깝게도 술병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저거라도 선점해야하나? 김독자는 잠깐 고민했다. 자신을 지목하던 예기가 누그러지지 않았다면 행동으로 옮겼을 것이다. 김독자는 고개를 들었다. 유중혁은 아주 조금이지만 웃고 있었다. 옥같은 얼굴이 웃자 꽃보다도 환했다. 김독자는 눈을 깜박였다.

"좋다."

"...? 욕을 먹는 게 취향이셨습니까?"

"너는 그냥 입을 다무는 것이 네 명대로 사는 데 좋겠군."

방금 전에는 입 다물고 있었으면 죽일 거였으면서. 뭐가 좋다는 건진 몰랐지만 그간 알 수 있었다. 자신은 방금 죽을 고비를 넘겼다. 김독자는 검을 집어넣지도 않은 채 자리에 천천히 앉는 3왕자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숨이 조금 진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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