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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형은 연애 안 해요?
언제 한 번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 말이었다. 그게 누구였더라. 아니, 언제였더라. 희미하게 회수를 떠올린 신재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 그래, 연애질로 그 회차를 말아먹었던 놈의 대사였다. 형은 연애 안 할 거 같아요? 그놈의 연애. ‘청려’는 그 때의 마지막에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청려는 웃으며 소파에 드러누운 채율을 바라보았다. 방금 운동하고 와서 뻗어있는 꼴이 당연히 좋아보이지 않았다. 청려의 웃음이 점점 더 온화해지자 채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씼을게요! 씻을 거에요!
그럼.
근데 형, 형은 진짜 연애 안 해요?
너 연애해?
채율은 대답 대신 고개를 붕붕 휘저었다. 빠르게 거미줄을 짤까 하다가 청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선 상 채율이 연애할 곳이 마땅하지도 않거니와 채율이 티를 내지 않고 연애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한 번만 믿는다 율아.
…
어? 어 뭐야 분위기 왜 이래.
욕실에서 머리를 털며 나온 신오가 분위기를 깼다. 청려는 채율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채율은 와악 비명을 지르며 신오의 등 뒤로 도망쳤다.
뭐야, 뭐야 왜 그래?
당신 누구야 청려 형 아니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청려는 얼굴을 또 찌푸려야 했다.
형은 나 믿는다는 말 같은 거 안 해!
헐 뭐?
하하 율아 훈련이 부족하구나?
채율은 그대로 욕실로 도망쳤다. 청려는 500미리짜리 물병을 하나 따서 그대로 바닥을 보였다. 속으로는 댄스 플랜을 다시 짜는 채였다.
뭐야 무슨 말을 했길래 채채한테 그런 말을 했어?
채율이가 연애에 대해서 묻길래, 연애는 안 한다고 믿는다고 했지.
오와 소름이네요 누가 봐도 형한테 뭐가 씌였네요. 형 요새 쫌 변했어…
청려는 웃었다. 자신이 변했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여벌 동전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더 열심히. 더 하고 싶은 대로. 더…
형 진짜 애인 생겼어?
그렇다고 이런 소리 듣게 행동한 건 아닌 거 같은데. 두 번이나, 그것도 둔한 동생들에게 이런 소리를 듣자니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청려는 눈을 두어번 깜박였다. 아니, 하며 신오가 다시 입을 떼었다.
그… 애인 분 혹시 문대 씨야?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나. 청려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공을 물고 온 콩이가 목으로 소리를 내며 청려의 정강이를 꾹꾹 머리로 눌렀다. 청려는 콩이의 머리와 목덜미를-현란하게-쓰다듬고 공을 마당 저편으로 던졌다. 그래봐야 그리 넓지도 않은 마당이지만… 터그 놀이를 좀 해 줄 때가 됐나? 새벽에 뛰는 코스를 좀 더 바꿔볼까? 왕! 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서 청려는 되돌아온 콩이와 눈을 맞추고 말을 걸었다. 이제 공놀이는 그만 할까? 콩이가 한 번 더 짖고 청려의 얼굴을 핥아댔다. 청려는 콩이의 발을 닦아주고 거실로 들였다.
저녁에는 덥앱을 했다. 티카들이 청려에 옷에 붙어있는 콩이 털을 보고 놀려댔다. 노란 콩이의 털은 검정색 옷에서는 유독 잘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청려는 능숙하게 머쓱해하며 털을 떼내었다. 내일은 터그놀이라도 해 줄까봐요. 생각을 흘려내자 덧글창이 빠르게 올라갔다.
-연애하는 티 졸라 내네.
티카들 사이에서도 거의 보이지 않던 어그로가 눈에 박힌 이유를 신청려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청려’는 다음날 브이틱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 주제는 연애하는 티를 안 내는 방법이었다. 오해를 줄이기 위해 말하자면, 신재현은 연애를 하지 않고 있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기실, 신재현-아니. 청려보다 이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사랑. 아이돌에게. 사랑. 자신들이 매일 연습하고 부르는 경구들에. 사랑. 내가 모든 것을 다 해줄 반려동물에게. 사랑. 지금껏 지나쳐온 많은 사람들이 못 잃어 자신을 죽인! 사랑. 사랑. 그 수많은, 셀 수 없는, 무량대수의,
사랑들.
그런데, 그렇기에, 그래서. 청려는, 신재현은 사랑과는 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사랑해요 티카.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거대한 집단을, 세상을, 그 편린밖에 나눠 가질 수 없는 반짝임을.
그 모든 것을 한 사람에게 쏟아 붓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형은 연애 안 할 거 같아요?
청려는 대답할 수 있었다.
응 안 해.
신재현도 대답할 수 있었다.
응 못 해.
그 거대함을, 도대체, 사람으로 태어난 존재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그것은 코스믹 호러에 가까웠다. 그래서 표현이 잘 됐나? 청려는 조금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난 정말 궁금해.
청려가 웃자 주단이 침을 꿀꺽 삼켰다.
티 안 내는 건 좀 이따 다시 얘기하고, 왜 하필 문대 씨였어?
신오와 채율은 숫제 벌을 서고 있었다. 딱히 청려가 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세를 풀라고 하지도 않았다.
응? 다그치듯 다시 한 번 묻자 신오가 입을 열었다.
아니, 그냐앙. 형이 문대 후배님을 좀… 특별하게 여기는 거 같길래…
말을 꺼내 본 거였는데… 갈 수록 목소리가 기어들었다.
특별한가? 신재현은 다시금 머릿속을 정리했다. 과연 특별했다. 자신의, 아니, 이 세계의 적법한 후계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분 동전이 없어진 후의 동전이었고, 그 다음에는 가장 떠오르는 별이었다. 여러가지 생각할 것도 많고 많았지만, 가장 주시해야 할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특별하다고 해서 사랑은 아니다.
가장 큰 라이벌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채율이 어물거렸다. 그치만… 하고 신오가 말을 받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으로, 돌림노래하듯, 주단이 입을 뗐다.
우리 단톡방에 초대도 했고… 그런 거 처음이니까.
신재현은 한 번 더 고민했다. 그렇다면 처음은 사랑인 걸까? 그렇다면 자신의 첫 생은 전부 사랑이었던 걸까? 신재현은 웃었다. 사랑과 사랑과 사랑 속에서 파과했다. 다시 맺은 열매가 단단해 졌으니 된 게 아닐까? 그리하여 지금의 과육이 달았으니 그 사랑은 끝이 났고 그걸로 족했다. 청려는 더 말하지 않고 어찌하면 티를 내지 않을 수 있나로 말고삐를 돌리려 했다. 핸드폰이 진동이 울리지 않았으면 그랬을 것이다.
연락은 대단찮았지만 시간은 대단했다. 넷은 그대로 스케줄대로 이동해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웃고, 이야기하고, 그것을 녹화하고, 얼굴을 보이고, 인사하고, 안부를 나누고. 평소와 같이.
평소와 같이?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그리고 오랜만에 저 뚱한 표정도 보고. 청려는 웃었다.
안녕하세요. 후배님.
쉽사리 일그러지지 않는 표정을 보며, 아 그렇지. 이 생은 여벌이 없지, 하고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 곡 잘 나왔던데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곡도 좋던데요.
처음 들어보지만, 귀에 감기고 좋더라고요.
‘좋은’ 것을 듣는 기분이 하도 오랜만이다 보니 청려는 웃음이 났다. 성적이 잘 날 것이 아니라, 좋은 것. 물론 두 개는 호환 되지만, 반드시 그러지는 않으니까. 문득 후배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가 다시 피었다. 그 꿍해보이는 표정이 웃음을 자아냈다. 뒤쪽 멀리에서, 문대문대, 하고 후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후배는 아까보다 훨씬 편한 표정으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아, 이런. 청려는 문득 그렇게 떠올렸다가, 떠올렸다는 걸 깨닫기도 전에 지워버렸다. 그리고 다시 웃음을 띄웠다.
자 그럼 다시 고민해 보자. 사랑이란 무엇인가?
글쎄.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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