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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부터 설명해야 할까요.
안녕하십니까, 마리아라고 합니다. 이쪽 세상에 태어난 지는 대략 사십 년쯤 되었군요. 그것보다 적기는 하지만 그냥 마흔이라 여기셔도 됩니다. 저쪽 세상의 나이까지 합하면 예순이 훌쩍 넘으니 별 관련이 없겠네요. 네, 맞습니다. 환생자입니다.
흔한 이야기지요. 트럭에 치이고 나니 다른 세계에 왔다는 것은. 저는 그 사실을 스물이 조금 넘었을 때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날은 날씨가 아주 고왔답니다. 빨래를 하고 이불을 널어둘 만한 날씨였어요. 모자에서 빠진 머리를 다시 넘기고 땀을 훔치다 저는 문득 알게 되었습니다. 저것만큼 좋은 날씨를 어디서, 아주 한가하게 본 적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벼락 같은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다른 세계에서 왔구나, 하고.
미친 소리 같지만 어쩌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저는 현실 순응이 빠른 편이었습니다. 당장 설거지를 하러 달려가야 하는 판에 과거에 잠길 시간은 없었습니다. 자작님은 성격이 급하시니까요.
그리고 그날 밤에 깨달음을 천천히 반추해 보았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저 말고도 메이드가 둘 정도 더 있었던지라 그 아이들이 몰래 놀러간 사이 방을 보아 주겠다는 말이 효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알았습니다. 이곳은 로맨틱 판타지의 세계관이라는 것을요.
제가 넘어올 당시만 하더라도 네X버도 카X오페X지도 모두 로맨틱 판타지가 하나 가득 했습니다. 환생하고 빙의하고 회귀하고, 저와는 다른 사람들의 낙원이었습니다. 지나치게 낙원이다보니 저는 제가 어떤 세계관에 떨어졌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제가 모시는 자작은 지방 영지에서나 이름이 있지, 중앙 사교계에서까지 알아주는 인사는 아니니까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로맨틱 판타지 세계관에 있는 걸 알았느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상하수도 구별이 철저했습니다. 2020년대에서 넘어온 제가 봐도 윗물은 맑고 아랫물은 탁했습니다. 화장실도 수세식이었고 세면대도 있었습니다. 목욕도 어렵지 않았고요. 급탕은, 불을 때긴 해야했지만 어렵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귀족집 마나님도 목욕을 꺼리지 않으시더군요.
그리고 신관의 축복이 있었습니다. 만병 통치약이라는 그것 말이죠. 가끔 마님이 아프실 때마다 하얀 정복을 입은 신관님들이 찾아와 신성력을 불어넣고 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굳이 이것과 관련 짓자면, 마법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희야 오븐 정도에만 간신히 사용하는 것 같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딘가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머리칼 색이 유난히 색색깔이더군요. 저는 사람에게 분홍색 머리가 실제로 있을수도 있구나, 새삼 감탄했습니다.
즉, 빼도박도 못하고 로맨틱 판타지 세계관인 것이죠. 저는 그 시점에서 호르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저는 절대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악역도, 심지어 엑스트라도.
저는 메이드 오브 올 워크입니다. 벼락부자인 자작님은 단란한 가정을 이루셨고, 자신의 부를 자랑하기 위해 딱 네 명의 하녀를 두었습니다. 그 중의 한분은 하녀장이고, 나머지 셋 중 하나가 저입니다. 하인도 없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하녀장님도 열심히 일을 하시지만 그래도 관리 감독이시고, 마님을 보좌하시느라 정신이 없으시니 실질적인 집안일은 저희 셋이 도맡습니다. 저택을 쓸고, 닦고, 빨래와 요리 설거지는 저희 몫이라는 뜻이지요.
그래도 귀족과 엮일 일이 많으니 다르리라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시녀가 아니라 하녀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평민이라는 뜻입니다. 푸른 피가 아니니 그 분들 눈에는 아예 대상이 아닙니다.
드라마틱한 가정사도 없습니다. 저희 어머니와 아버지는 입 하나라도 덜고자, 그러나 동시에 그 덜어둔 입이라도 잘 먹이고자 없는 살림에 촌장에게 뇌물을 넣어 저를 시내에 있는 자작님 댁에 하녀로 넣으셨습니다. 그 푸른 여름날까지의 기억에 따르면 저는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집에 내려가 동생들과 부모님 입에 닭고기라도 넣어드리는 데에 열심이었죠.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으로, 저는 이렇다하게 예쁘게 생기질 않았습니다. 오히려 노안이라 불릴 만큼 나이 들어 보였고, 눈은 날카로워 고지식하고 깐깐해 보였으며, 하나로 틀어올린 머리는 그런 인상을 더욱 강하게 보이게 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있는 강점은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현실 순응이 빠른 것이었죠. 두 번째 인생이라지만, 첫번째와 별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잡은 안정된 직장, 이대로 쭈욱 이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이 세계도 나름 깔끔하니 만족하지 못할 것도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첫 삶도 불꽃 같은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두 번째 삶까지 피곤하게 사는 것은 제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그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메이드 오브 올 워크였습니다.
동기 둘이 시집을 갈 때에도, 하녀장님이 늙어서 은퇴를 하실 때에도, 자작님이 벼락부자의 꼬리표를 떼고 그 재산에 벼락이 맞았을 때에도 저는 그 집에 메이드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노안과 꼬장꼬장한 얼굴에 어울리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훌륭하게 흠잡히는 노처녀가 되었지요. 그것이 오늘에 이르릅니다.
설거지를 끝내고 앞치마에 손을 닦고 있는데 숨넘어가는 초인종 소리가 났습니다. 우편 배달부를 받는 것은 하인인 요한의 몫입니다. 저는 오랜만에 남는 시간에 공을 들여 스콘이나 굽기로 했습니다. 반죽을 끝내고 스콘을 오븐에 올리는데 설렁줄이 연결된 종이 울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습니다. 마님의 방이었습니다. 이렇게 급하게 종소리가 오래 이어지는 것은 또 오랜만입니다. 음, 제가 해고 된다는 소식이라도 듣게 되는 것일까요. 마지막으로 저렇게 울린 게 집사님이 별로 명예롭지 못하게 은퇴하실 때였으니 말입니다.
저는 최대한 빠르게, 그러나 발소리를 죽이고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앞치마를 한 번 털고 마님 방 문을 노크하려는데 안에서 거의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 리- 아아아악!!!”
“예, 마님. 부르셨습니까?”
저는 노크를 포기하고 그냥 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쉰이 넘으신 마님은 그렇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우셨지만, 지금은 머리를 쥐어 뜯기라도 하셨는지-맙소사!-아침에 곱게 빗어드린 머리가 엉망진창이었습니다.
“당장! 당장…!”
“예, 마님.”
“당장 재단사를 불러와!”
“예?”
저는 머릿속으로 바쁘게 주판을 튕겼습니다. 생활비를 이리 빼고 저리 빼 봐도, 마님도 아시는 바지만, 드레스 값을 갑자기 마련할 방도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 몇 년간 돈을 모으시기만 하시고 드레스 한 벌 제대로 안 하시던 분이신데. 제가 얼떨떨해 하는 걸 아셨는지 마님은 친히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황궁에서 연회 초대장이…!”
“당장 재단사를 부르겠습니다. 큰 마님께는.”
“여보야한테는 요한이 갔어! 얼른 재단사나 부르렴!”
“알겠습니다 마님.”
어쩌면, 이 집안에 다시 날개가 달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구둣발 소리조차 잊은채 정문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드레스와 연회복까지는 어찌어찌 맞출 돈이 되었습니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시녀가 없었습니다.
그야 그럴 수 밖에요. 이렇게 기울고 있는 집안에 시녀로 들어올 귀족 영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중앙 연회까지 참석하는데, 황제 폐하께서 친히 내려주신 초대장을 들고 시녀 한 명 없는 참석이라니 영 면이 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데뷔탕트 겸 해서 시녀를 한 명 쓰자니 어떤 귀족 부모가 옳다구나 하겠습니까? 주인 마님께서는 골머리를 끙끙 앓으시다 문득 외치셨습니다. 아주 기발한 생각이었죠.
“마리아! 네가 시녀를 하렴!”
“예?”
요즘 따라 자꾸 불경하게 말대꾸를 하게 되는군요. 저는 그저 눈만 껌북였습니다.
“네가 이 집안의 하녀장이잖니? 요즘은 하녀장이 시녀를 대행하는 경우도 있으니 그렇게 하자꾸나!”
이 집에 하녀가 저 밖에 없고 하녀장이 시녀를 대행하는 건 지방 사교계 정도라는 걸 제외하면 아주 훌륭한 방도였습니다. 그야 저도 그런 식으로 연회에 따라가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제가 긴장한 것을 아셨는지 마님께서 저를 달래셨습니다.
“괜찮아. 중앙 사교계라고 크게 다를 것도 없고, 시녀가 하는 일이 크게 다른 것도 아닌 걸? 내가 네 사프롱인 것도 아니고, 그냥 조용히 벽의 꽃처럼 있다 오면 된단다.”
그 정도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왜 마님이 시장에서 가자미를 반 값에 준다고 말하던 이반나처럼 보일지 모를 노릇이었습니다.
다만 덕분에 저도 짙은 녹색의 새 드레스가 한 벌 생겼으니 그것만은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요한도 시종의 역할로 연미복을 한 벌 얻었다고 하더군요. 부디, 저희가 이 일을 망치게만 하지 마소서.
“도로테아 자작과 그 부인 들어오십니다!”
황궁 연회는 지방 영주들도 하나 하나 이름을 불러주나 봅니다. 저는 눈을 내리 깔고 마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당연하지만 주인공은 늦게 온다는 법칙에 따라-이번 연회는 황태자의 17번째 생일 연회라고 하더군요-마님 앞에 입장한 사람은 거의 없는 듯 싶었습니다. 마님 부부는 곧 친우분들을 찾아-“세상에! 도로테아 자작 부인! 너무 오랜만이에요!”,“드레스 너무 곱다!”-연회장으로 흩어졌고, 저는 요한과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후 각자 테이블로 흩어졌습니다. 지방 사교계에서도 그렇지만 티타임이 아니면 이래저래 차려놓은 음식들은 의외로 손대는 사람이 잘 없더군요. 저는 벽에 한켠에 줄지어 놓여진 의자에 앉아 한 입 크기로 차가운 카나페를 조금 주워먹었습니다. 이게 손이 얼마나 가는 음식인지 알면 누구라도 먹어줄텐데, 조금 아까웠습니다.
중간에 높으신 분-대공 각하 부부와 황제 폐하, 황후 폐하, 황태자 폐하가 입장하신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물론, 너무 먼 데다 사람이 많아서 보이진 않았습니다.- 들이 입장할 때나 잠시 일어나 고개를 숙일 뿐, 아무도 저를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시녀로 온 분들도 다들 젊고 아름다워 부채로 입을 가리고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죠. 좋을 때입니다. 저럴 때 시집을 가 두는 것이 어르신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도 할 겁니다. 저야, 뭐, 거리가 멀었습니다만.
펀치라도 한 잔 더 마실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문득 멀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그 쪽을 일별하고 스쳐 지났습니다. 뭔가 싸움이라도 난 겐가… 하고 생각하다 문득 마님이 떠올랐습니다. 맙소사, 혹시 마님이 휘말리신 거면 어떻게 하지?
저는 실례를 무릅쓰고 조심스레 사람들 사이를 헤쳐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다행히도 친절하신 푸른 피 분들이 자리를 비켜주시어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맨 앞 줄에 들자마자 사위가 고요해졌습니다.
“-차피, 저는 황후 소생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바마마.”
나리들이 둘러싼 가운데에는 호화로운 옷을 입은 세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부부로 보이시는 두 분께서는 팔짱을 끼고 계셨고, 아드님으로 보이시는 분께서는 짝다리를 짚고 반항기 넘치게 두 분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마님께서 휘말리신 건 아닌 것 같아서 저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태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만하셔도 됩니다 황후 폐하! 이미 산파가 제가 황후마마의 소생이 아니라 증언 했습니다!”
순간적으로 시계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연회장이 고요해졌습니다. 제 앞에 있는 분이 황족이셨군요. 저는 몹시 놀랐지만 표정을 가다듬었습니다. 제가 낄 곳이 아닐 것 같으니 조용히 물러나는 것이 일일 듯 했습니다. 뒤로 가려 했지만 쉽지는 않았습니다. 아까 이래서 앞으로 헤치고 오는 것이 쉬웠던 모양입니다.
“태자!”
“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저의 친어머니는 이 분이시라는 걸!”
문득 제 쪽을 향해 시선이 쏠렸습니다. 헉!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 울렸습니다. 저는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모든 시선이 저를 향해 꽂히고 있었습니다. 뒤를 돌아보자 황제 폐하의 황망한 시선이, 그리고 황후 폐하의 증오가 저를 향해 내리꽂히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 말입니까?
…그러고 보니 손이 뭔가에 잡힌 것 같은데.
“어머니.”
금발 벽안의 미남자가 제 눈 앞에서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그간 고생하셨습니다.”
마리아, 39세, 동정녀.
자칭 아들이 생겼습니다.
직업은… 황태자 전하… 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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