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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된 기집애.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생각했다. 저, 저 아주 못되어 처먹은 기집애. 립이 다 벗겨질 때 쯤에야 나는 긴장을 풀고 부채 뒤에서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걸 알았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알고 있다. 쟤가 못된 기집애면 나는 지옥에 떨어질, 귀신은 안 잡아가고 뭐하는지 모르겠는 기집애라는 걸.
그야 당연하지 난 악역이니까.
소설에 빙의한 지 삼 년, 충실한 악역 영애로 산 지 이 년 십일개월. 짜증나지만 나는 황태자를 주인공과 결혼시켰다. 빌어먹을 퀘스트 같으니라고. 나는 이 소설을 끝까지 읽었다. 젠장, 끝까지 읽었단 말이다. 마음 속으로 쿨하고 멋있게 퇴장하는 악역 영애를 응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얘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얘가 되었으면, 하다못해 다른 빙의물 주인공처럼, 내가 황태자-그러니까 남주인공-과 결혼하고 싶었다.
하지만 퀘스트는 나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사사건건 여주인공을 귀찮게 굴고, 차에다 설사약을 탈까 말까 진짜 타야 되나 고민하는 짓거리를 하게 만들고, 사교계에서 친구가 최대한 적도록 만들게 한 빌어먹을 상태창!
처음 떴을 때는 내가 세상을 바꿀 멋진 주인공이 될 줄 알았지만, 내가 주인공을 말아먹게 만들기 위해 파견된 노동자라는 걸 알고서는 아주 치가 떨렸다. 아주 집으로 보내 줄 듯 말 듯 굴어서 울며 겨자먹기로 그 짓거리를 한 게 몇 번인지. 그러다가 한달 전인가, 본 세계의 내가 완전히 죽었다는 걸 시스템의 실수로 알아채고 나는 내 행동을 180도 바꾸었다.
어차피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면 이따위로 굴어서는 죽는 길 밖에 안 보인다. 나는 츤데레인 척 여주인공을 소태 씹는 마음으로 지원해 주었고 결과는 아아주 성대한 결혼식으로 돌아왔다. 나는 간신히 살아남으면서 말이지.
퀘스트 반대급부와 스토리가 엮여서 반역자로 몰렸던 가문은 내가 명맥이나마 잇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대강 다른 로판에서 그러는 것처럼 대강 히트상품 몇 개 만들면 금전적으로나마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었다. 슬프긴 하지만 어쩌겠어... 결혼식에서 질질 짜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 게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옆에서 다른 영애들이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걸 보니 더 그래야 했다. 잘 살라지 구남친. 아주 잘 살라지 여주인공. 연분홍색 예쁜 드레스를 찢어먹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풀며 숨을 고르고 있는데 옆에서 소근대는 소리가 들렸다.
'근데, 힐베르트 소공작님은 역시 참석 안 하셨나봐요.'
'저런, 가엾어라...'
아아, 서브남주 말이지. 역시 주인공들의 이름은 이 음악소리도 뚫고 귀에 쏙쏙 박힌다. 상태창의 저주인가. 서브남주는... 글쎄, 단물만 빨아먹고 내버려진 건 아니고 나름 자기도 이득을 취하긴 했지만... 불쌍한 건 불쌍한 거다. 집착 직전 남자의 절절한 모습을 보여주긴 했었지. 나는 절차를 끝내고 나가는 황태자 부부에게 인사를 올리고 식장을 빠져나가 화장을 고치러 갔다. 피로연을 사흘이나 열다니 미친 부부 같으니라고. 하이힐 때문에 발이 아팠다.
"...생각보다."
순익이 너무 적은데. 서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자 변하는 건 없었다. 수도에서는 드레스가 나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지만... 판타지 세계의 수도라고 해봤자 사이즈가 고만고만했다. 게다가 만드는 게 완전히 어려운 것도 아니니 베껴다 파는 인간들이 판을 쳤다. 이래서 디자인 표절에 다들 이를 가는 거군. 게다가 대량으로 물건을 떼 올 수 없으니 가격도 고만고만했다. 귀족들 대상으로 파는데 너무 양심적으로 장사를 했나... 손톱으로 탁자를 딱딱 두드리고 있자니 집사가 찻잔에 홍차를 따랐다.
"전문 경영인을 구하시는 게 역시 낫지 않겠습니까?"
"믿을 만한 사람이 있어야지."
돈 버는 쪽에 손을 대어 본 적이 있다면 모르겠는데... 일한 건 전생이니까. 믿을 만 한 사람이라고는 사교계의 수족 같은 영애들이나 사용인 밖에는 없다. 지난 삼 년간 하고 지낸 게 그 꼬라지니 알 만하지. 차를 들이키며 다시 한 번 상태창을 욕하고 있는데 하녀가 편지를 가져왔다. 연회 초대장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종종걸음으로 하녀가 물러나자 집사가 익숙하게 페이퍼 나이프를 내밀었다. 나는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가야지... 이 몸이 그래도 생긴 것 하나는 기깔나서 모델비가 안 드는 게 그나마 좋은 일이었다. 꿀을 바르지 않아도 꿀을 바른 것처럼 윤기나는 금발과 커다란 아몬드형의 사파이어 빛 눈. 잡티 하나 없는 피부와 늘씬한 몸매는 반역자이신 오라버니가 장사 밑천이라고 부를만한 것이었다. 이 동네는 패션쇼도 없는 동네니까 내가 연회에서 모델로 나서는 수 밖에. 나는 디자이너를 불러오라고 집사에게 지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다못해 프랜차이즈처럼 가게를 깔아서 대량생산이라도 하면 좋을텐데... 장사 밑천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힐베르트 소공작님이십니다."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쏠렸다. 나를 포함해서. 소공작이 나온다고? 아주 흥미로웠다. 황태자 부부가 결혼하고 꿈 같고 꿀 같은 신혼을 보낸 지 반 년이 채 넘지 않았다. 벌써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고 나왔을 리는 없을 거 같고... 혼기가 다 찬 아들을 참지 못해서 공작이 억지로 내보냈다는 데에 내 장갑 디자인을 걸 수도 있었다.
레이스를 장갑으로 짜는 건 아직 우리 살롱 밖에 하지 못하는 일이니 아주 고군분투를 했다. 노동 집약적인 물건이라 이거야 말로 프리미엄을 붙여 팔아야겠는데... 얼마나 팔아야 하는지 수다를 떨면서도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모두의 시선이 소공작에게 쏠린 것이다.
과연, 떫은 것이 땡감 씹은 얼굴이 따로 없었다.
"오늘 소공작님 몸상태가 좋지 않으신가 봐요."
표정관리도 안 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게요, 살도 많이 내리신 게 병환을 앓으셨나 봐요."
상사병이 아직도 낫지 않았냐는 뜻이다.
"쉬시는 게 나았을 것 같네요."
왜 파티에 나와서 분위기 망치냐는 뜻이다. 여러분 진정합시다 물론 저분이 파티 분위기를 망치고 있는 건 맞지만 여긴 어디까지나 힐베르트 공작가의 파티니까요. 나는 싱긋 웃으며 말을 돌렸다.
"아무래도 상단주이시니까요. 바쁘셔서 와병하셨나 보네요."
순간 나는 머리 위에 전구가 떠오른다는 게 이런 것이라고 느꼈다. 그치, 섭남이 상단주였지! 그것도 세계 단위의!
이 나라가 작은 나라는 아니지만 세계 단위를 치기에는 사교계가 좁디 좁다. 그렇지만 세계단위로 물건을 공급한다면 어떨까? 더 수익이 나지 않을까? 나는 영애들과 깔깔대며 은근슬쩍 조금씩 소공작의 근처로 다가갔다. 섭남은 사람을 물리고 있는 모양인지 주변에 둥근 사람의 원이 있었고 와인을 물처럼 들이키고 있었다. 오, 춤은 출 수 있겠지? 술에 강하다는 묘사가 있었던 것 같으니 가능성 있겠다. 나는 주변 영애들의 눈치를 보고 원 안쪽으로 한 발 내딛었다.
"힐베르트 소공작님."
서브 남주가 나를 보았다. 나는 부채 뒤에서 싱긋 웃었다.
"저는 일레이유 백작입니다만, 손이 비어서."
냉큼 춤 신청하라는 소리다. 나는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소공작은 내 손을 뚫어져라 보다가 멀리서 자신을 노려보는 공작부인을 한 번 보고 혀를 찼다.
"나와 춤 한 곡 추지."
웃기네. 이 상황.
"기꺼이요."
우리 사업에 대해 찐한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나는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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