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2015년 글 백업입니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실제 인물, 사건, 단체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커크는 한적한 곳에 외따로 서 있는 집 앞에 멈춰 섰다. 한적한 곳에 외따로 있다고 표현하기는 하였으나 같은 표현을 할 수 있는 커크의 집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독립 외에는 어느 것에도 초점을 두지 않은 커크의 집은 낡고, 오래되었으며 심지어 관리도 하지 않는 탓에 집 군데군데 먼지가 굴러다니고 있었고 외벽에는 때가 탔으며 정원- 관리하지 않아 거의 숲이 되어있는 정원으로 통하는 울타리는 항시 잠겨있지 않았다. 사실 대문의 잠금쇠가 제대로 작동하기는 하는지 커크는 의문이었다. 그에 비해 이 집은 좀 더 클 뿐만 아니라 전문가, 혹은 누군가 애정을 가진 사람이 꾸준히 관리해 오는 티가 났다. 돈이 별 의미가 없는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그 무엇인가는 항상 있다. 아름다움, 깨끗함, 단정함, 그리고 애정 어린 것. 그리고 이 집은 그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커크는 휘파람을 불고 싶어졌다. 와우, 진짜 좋은 집 도련님이었잖아.
"도착 한 겁니까?"
커크는 제 셔츠를 꾹 잡고 있는 초록빛이 도는 창백한 손을 내려다보고는 조금 웃었다. 물론 화를 낼 것 같아서 속으로만 웃었다. 핏기가 올라올 정도로 이 꼬마는 뒷자석에서 자신을 꼭 잡고 매달리고 있었다. 법망의 틈을 피해 2인용으로 개조한 에어 바이크-왜 그랬냐면, 그게 커크의 로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뒤에 태울 대상자는 섹시한 누님이었지 이런 꼬마는 아니었지만.-를 보며 바이크에 두 명이 타는 건 불법이라느니 비논리적이라느니 이것 저것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해 대다가 자신을 못 이기고 결국 타게 되었다. 그리고는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며 제게 매달려 오더랬다. 좀 심술을 부렸나 싶은 생각이 들어 커크는 마음 속으로도 웃지 않기로 했다.
"그래 다 왔다 겁먹은 꼬맹아."
본능적으로 놀리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여튼. 커크는 먼저 바이크에서 내린 후 손을 뻗어 아이를 들어 내려주었다. 허리께까지 오는 어린애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꽤나 무게가 나갔다. 어린애를 안아본 적이 없는 커크로써는 상당히 당황스런 무게이기도 했다. 워우. 발이 땅에 닿자 침착하게 유지하고 있는, 그러나 혈색이 옅은 무표정으로 스팍은 말했다.
"벌칸은 겁먹지 않습니다."
그래. 그러시겠지. 커크는 아까 웃지 않기로 한 것을 생각하며 폐부에서 솟구치는 웃음을 내리누르기 위해 헛기침을 두어번 했다. 혈색이 조금 돌아온 스팍은 눈을 두어번 깜박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호의에 감사를 표합니다. 약 16.7분을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뭐, 별 건 아니니까."
커크는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술집이 약간 외곽에 있었기 때문에 걸어서 삼십분 쯤 걸릴 법한 거리는 거의 단숨에 주파가 가능했다. 커크는 역으로 이 거리를 이 어린 아이가 매일 걸어서 왕복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요즘은 스쿨 버스도 안 다니나? 그럴 일은 없을텐데? 커크는 의문을 떠올렸다가 곧 털어버렸다. 자신이 신경 써서 어떻게 될 일은 아니다. 또한 신경 쓸 일이 아니기도 했다. 어쩌다 얼굴을 맞대고 통성명까지는 했지만 이제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터였다. 학생과 백수가 마주칠 가능성이 되어봤자 얼마나 되겠는가. 커크는 다시 바이크에 올라 탔다. 시동을 걸기 전에 커크는 어린 벌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싱긋 웃었다.
"그럼 꼬마야, 이제는 그 근처 더 얼씬 거리지 말고. 난 이제 갈-"
"스팍?"
갑작스레 다정한 여성의 목소리가 말을 끊었다. 커크는 자연스레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 그러니까 집의 현관문 쪽을 쳐다보게 되었다.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아보이는 여성이 문을 열고 현관 손잡이를 쥔 채 이쪽을 향해 있었다. 스팍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
아 그렇겠지. 누나라기에는 지나치게 나이차이가 많이 났다. 그나저나 혼혈이었구나 이 애는. 커크는 어색하게 뒷목을 긁으며 대충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여인이 기쁘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좀 일찍 왔네 스팍? 그 분을 찾았나 보구나?"
"예 어머니."
그 분? 어색한 존칭에 커크는 등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보통 이놈 저놈, 혹은 약간 험한 욕으로 지칭하는 소리만 듣다가 저런 소리를 들으니 가죽 자켓 안에 땀띠가 날 것 같았다. 에이 설마. 나를 가리키는 건 아니겠지. 커크는 그렇게 믿으려고 했다.
"제임스 커크라고 하신다는군요."
꼬마애의 손이 똑바로 자신을 가리켰다. 맞잖아! 젠장! 커크는 소리지르고 싶어졌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어머나, 하고 탄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와서 커크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스팍의 어머니 되시는 분이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을 열고 나오셨다. 방그레 짓고 있는 웃음이 호의를 함뿍 담고 있어서 커크는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만다라고 해요. 스팍을 도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음, 어. 제임스 커크라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특별히 한 일이 없어서 뭐라고 대답해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겸손하셔라. 아니에요, 정말 감사드려요."
악수를 나누는데 있는 줄도 몰랐던 양심이 꺅 비명을 질러서 커크는 등줄기가 홧홧하게 더워졌다. 이렇게 당황스러웠던 적이 또 오랜만인지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호의라는 건 생각보다 다루기 힘든 물건이다. 심지어 그 호의가 거의 무한정적이라면 더할 노릇이다.
"시간이 점심은 하셨을 것 같고, 혹시 다과라도 하시겠어요?"
"예?"
멍청하게 당황한 음성을 뱉었다가 커크는 몇 번 헛기침을 했다. 모자(母子)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어서 커크는 조금 빠른 투로 말을 꺼내려 했다.
"아, 저, 큼, 저는-"
"추후에 일정이 있으십니까?"
어린 벌칸이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커크는 스팍을 내려다 보았다. 표정 없는 딱딱한 얼굴이 자신의 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벌칸의 얼굴을 읽어내릴 수가 없었다. 뭘 원하는 걸까. 이 아이는 나에게 무엇을.
"아니, 음, 특별히 일정이라고 할 만한 건…"
"잘 됐네요. 스팍, 커크 씨 좀 안내해 드리겠니?"
어물어물 사실을 말해버려서 커크는 결국 아기자기한 집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아만다는 후다닥 집 안으로 사라지고 어린 벌칸이-"들어가시죠."-그의 앞을 이끌었다. 커크는 도망가고 싶었다.
-
집은 거실서부터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다정한 가정집 특유의 달콤한 분위기를 잘잘 넘쳐 흘렀다. 소파에 한두개 놓여있는 귀여운 쿠션이나, 깔끔하게 정리된 커튼, 정원에서 넘어들어 온 것 같은 화분 따위가 집 인테리어에 맞추어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커크는 꽃무늬가 수놓인 쿠션이 있는 카우치에 어린 벌칸의 안내에 따라 어색하게 앉았다. 뭐라 말하기 힘들개 만드는 묘한 압박감이 꼬마에게 있어서 커크는 괜한 긴장을 했다. 내가 왜 이리 뻣뻣이 굳어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맞은 편에 있는 소파에 아이가 자리를 잡는 걸 커크는 뻣뻣하게 굳은 등을 하고는 쳐다보았다. 등에 매어진 가방을 푼 아이가 커크를 보고 문득 입을 열었다.
"손님을 앞에 두고 실례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잠시 숙제(Homework)를 진행하여도 괜찮겠습니까?"
커크는 어색하게 두어번 헛기침을 했다. 숙제. 숙제라. 확실히 어린애이긴 한 모양이다. 숙제라니 참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커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뭐. 어린 벌칸은 감사를 표하곤 신속하게 가방에서 노트와 책, 필기구를 꺼내들었다. 소파 사이에 놓인 테이블 위에 책 몇 권이 펼쳐졌다. 내리깔린 갈색 눈이 몇 번 책을 훑더니 공책 위를 샤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어려서 PADD가 없나보네. 커크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아이에게서 눈을 떼었다. 방 한 켠의 장식장 안에는 다기(茶器)나 장식용 접시따위가 들어 있었고 한 켠에는 올라가는 계단이, 다른 한 쪽에는 주방으로 통하는 복도로 이어진듯한 문이 있었다. 복도로 이어진 문 안에서는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있는듯 없는 듯 들려왔다. 남편의 취향인지-그 남편은 분명 벌칸일 것이었다-카펫도 벽지도 소파도, 하다 못해 장식장도 단순하기 그지없는 색과 디자인이었지만 자잘하게 꾸며진 것들이 있어서 지루해 보이지는 않았다. 애정과 사랑이 넘치는게 안에서 다시 한 번 보여서 커크는 왠지 자기가 들어와서는 안 될 곳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커크는 방을 둘러보는 것을 멈추고 요즘은 보기 힘든 공책에 숙제를 처리하는 어린 벌칸에게 다시 초점을 맞추었다. 손이 움직이는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꾸준하고 멈추는 법이 없었다. 공부 잘 하나 보네? 커크는 슬쩍 책을 들여다 보며 생각했다. 그러나 (a^2-bp)의 속도로 이동하는 물체가 있다고 가정할 때- 까지 읽었을때 커크는 비명을 꽥 지를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좀 이상한 소리를 작게 내며 헛숨을 킨 것 정도긴 하지만, 어린 벌칸의 손이 문득 멎고 한 쪽 눈썹을 치켜올린 얼굴이 커크를 쳐다보게 하기엔 충분한 정도였다.
"갑작스런 감정의 동요를 타인도 알 수 있게 표출하는 것은 상대방의 감정적인 동요를 이끌어낼 수 있는데다 논리적이지 못한 행동입니다."
"초등학생이 그런 숙제를 하고 있는게 더 이상한 것 같은데?"
커크는 실례, 라고 말하며-원래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긴 했지만 왠지 이 벌칸에게는 그래야 할 것 같았다.-보고 있던 책을 슬쩍 덮었다가 다시 폈다. 물리 I.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볼까 말까한 과목 명칭이 교과서 앞에 또렷한 까만 글씨로 박혀 있었다.
"너 초등학생 아냐?"
"벌칸의 지능은 인간보다 우수합니다. 또한 저는 월반이라는 제도를 이용하는데 요하는 요건을 충족하였으므로 저를 초등학생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굳이 줄여서 말하자면 월반을 했다는 소리다. 허. 커크는 헛헛한 한숨을 내쉬었다.
'2.5D > 스타트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팍커크] 성장의 물약 (3) (1) | 2023.01.26 |
---|---|
[스팍커크] 그리고 아무도 모른다 (1) | 2023.01.25 |
[스팍커크] 성장의 물약 (1) (0) | 2023.01.22 |
[존+본즈] 죽은 자를 위하여 (0) | 2023.01.22 |
[스팍커크] 문화다양성 (1) | 2023.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