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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글 백업입니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실제 인물, 사건, 단체 등과 관련이 없습니다.
고등학생이라. 커크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생각했다. 푹신한 소파 탓에 몸이 푹 꺼지는 것 같았다. 벌칸 꼬맹이는 잠시 커크를 바라보다 이내 다시 숙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조막만한 손이 사각사각 샤프를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다 커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껏해야 초등학교 6학년은 됐을까 싶은데. 벌칸의 지능이 인간보다 높다고는 하지만 몇 년이나 월반을 한 건지 머리가 아팠다. 커크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어디 안 좋으신가요?"
부드러운 여성의 말에 커크는 고개를 들었다. 쟁반 가득히 찻주전자와 컵, 온갖가지 티푸드가 가득한 트레이를 조심스레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벌칸 꼬마는 어느새 다시 가방을 싸두었다-걱정스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커크는 어물어물 말을 흐리며 허리를 곧게 폈다. 특별히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예의가 차려졌다. 아만다는 웃으며 커크에게 다홍빛 차를 건넸다.
"평소에 하던 대로 했는데, 어째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평소에 하던 대로. 커크는 약간 떨떠름해져서 3단 티트레이를 바라보았다. 맨 아랫층에는 샌드위치, 2층에는 스콘과 과일, 맨 위에는 비스킷 같은 것이 모양도 예쁘게 빼곡히 놓여있었다. 아만다가 건넨 따끈따끈한 차에서는 좋은 향까지 났고, 찻잔도 이래저래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커피라면 모를까 차는 그다지 익숙치 않고, 그나마 커피도 술에 비하면 현저히 익숙치 않은 커크에게 차는 다 이런가 보다, 하고 생각할 도리 밖에는 없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티푸드에 정성이 만만치 않게 녹아 있다는 건 알 수 밖에 없었다. 먹어도 되는 걸까? 커크는 잠시 고민했지만, 차를 한모금 마시자 배가 맹렬하게 고파왔다. 그제서야 아침과 점심을 다 굶었다는 걸 떠올린 커크는 일단 트레이 1층에 들어있는 샌드위치를 집어들었다. 한 쪽에는 마요네즈, 다른 한 쪽에는 머스터드를 바르고 토마토와 양상추, 피클, 얇은 햄을 끼워 넣은 샌드위치는 맛도 향도 일품이었다. 버터를 발라 안쪽만 바삭하게 구운 빵도 무척 맛있었다. 커크는 감탄했다.
"이 샌드위치 사 먹는 것보다 맛있는데요?"
"칭찬 감사드려요."
시장이 반찬인지는 모르지만 놀라울 정도로 맛있는 티푸드에 커크는 감탄을 아끼지 않으며 층을 차례대로 비워냈다. 샌드위치 속은 그 외에도 감자와 양파, 계란을 넣은 샐러드나 베이컨과 계란 프라이를 넣은 것 등이 있었으며 따로 준비되어 있는 잼을 바른 스콘도 무척 맛있었다. 소금 간이 연하게 되어있는 비스킷과 차로 입가심을 하며 커크는 다시 한 번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퍼부었다. 평소에 여자를 꼬실 때보다 더 공을 들인 찬사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지만 커크는 무시하기로 했다. 그만큼 음식이 맛있기도 했고 만족스럽게 배가 부르기도 했다. 이게 얼마만이더라. 커크는 기억을 되짚다가 그만 두기로 했다. 최근에 먹은 음식은 죄 리플리케이터로 뽑아낸 것이기도 했고, 그 전에도 딱히 만족스레 먹은 기억이 없기도 했다.
오늘은 그냥 이대로 집에 가자. 커크는 마음 먹었다. 술집에 가서 사람을 낚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오늘은 그러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크는 깊이 인사치레를 하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만다와 작은 벌칸 꼬마는 문 밖까지 나와서 커크를 배웅해주었다.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열중 쉬어 자세로 말로만 배웅해 주는 게 웃겼지만 커크는 웃음을 눌러 참고 미소를 지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길을 달리며 커크는 따끈따끈한 뱃속의 기운이 뭘까 잠시 고민했다.
-
커크의 집은 고등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편이 아니었다.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킬로미터 단위의 거리였고 학교와 커크의 집, 마을을 이으면 삼각형이 나왔기 때문에 특별히 더 좋은 점은 없었다. 고등학생 쯤 되면 다들 면허를 가지고 있기도 했고. 데우지 않은 캔 스파게티를 먹고 있다가 귓가를 두드리는 천둥소리에 커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또 비가 샐지도 몰랐다. 지난 번에 비 올 때 지붕에 뭘 좀 덧댔던가? 고민해 보았지만 그런 기억은 없었다. 간신히 비가 오는 집에서 뛰쳐나가 술집에서 한 사람을 붙잡고 비가 그칠 때까지 밖으로 나돌았다는 걸 기억해 낸 커크는 머리를 거칠게 긁었다. 오늘도 또 그럴까. 잠시 포크를 물고 고민하던 커크는 통조림에 포크를 쑤셔 박았다. 대충 대야 같은 거 받혀 놓으면 되겠지. 커크는 마당 한 켠에 세워둔 에어바이크나 창고에 들여놓기로 했다. 날은 구름이 잔뜩 끼어서 아직 해도 지지 않았는데 흐리다 못해 밤 같았다. 번개와 천둥이 한 번 더 쳤다. 에어바이크 손잡이를 잡을 때에 이미 빗방울이 툭툭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유난히도 굵었다. 채찍처럼 따끔하기까지 해서 커크는 손등을 슥슥 문질렀다. 약간 발갛게 달아오른 것이 빗발이 여간 강한 게 아니었다. 오래 밖에 있을 날이 아니었다. 에어바이크를 창고 한 쪽에 기대다가 커크는 문득 벌칸 꼬맹이를 떠올렸다.
걸어서 집에 돌아간다고 했는데. 어른이 한 줄기 맞아도 아픈 비를 초등학생이 흠뻑 맞으며, 그것도 걸어서 집에 들어가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가 있었다. 잠시 얼굴을 찌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커크는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이 안 계신 것도 아니고 알아서 하겠지.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오지랖이 넓었다고. 커크는 에어바이크를 창고 격벽에 기대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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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 시각이 지나고 나면 고등학교는 출입이 금지 된다. 그냥 금지되는 정도가 아니라 학교가 폐쇄되는 수준이다. 커크가 졸업하기 전까지는 대략 다섯 시 정도였지만, 요즘은 더 빨라진 모양이었다. 걸어 잠긴 교문 앞에서 커크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쓸 데 없는 걱정의 말로는 결국 이런 거군. 커크는 짧게 생각했다. 우비를 입었는데도 빗줄기가 어깨를 두드리는 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시계를 불러내자 네 시 반이 겨우 넘어있었다. 커크는 다시 바이크 머리를 돌려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빗소리를 뚫고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서, 잠시 고개를 돌렸지만.
"미스터 커크?"
막 문 밖으로 나서는 듯한 창백한 얼굴의 꼬마가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일단 이거라도 마셔."
커크는 대강 닦은 머그잔에 끓인 물을 부어서 벌칸 꼬맹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창백한 피부를 한 꼬맹이의 피부는 부분 부분 푸릇하게 물들어 있었다. 사람이 추워서 몸이 어는 것과 비슷해 보였다. 집에 따뜻하게 마실 만한 게 마땅치가 않아서 줄 수 있는 게 끓는 물 정도 밖에 없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천장에서 비가 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집에 목재가 남아 있던가. 커크는 꼬맹이를 잠시 돌아보았다. 수건을 몇 장이나 친친 감고 있으니 곧 나아질 것 같기는 했다.
천만다행으로 창고에는 목재가 남아있었다. 커크는 사다리를 끌고 지붕 위로 올라가 대충 나무를 잇대고 망치질을 했다. 모양새가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비는 새지 않을 것 같았다. 흠뻑 젖기는 했지만 히터를 켜면 그럭저럭 마를 것이었다. 샤워는 애를 집에 보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 사다리에서 내려가다 커크는 수건을 바닥에 끌면서 문 앞까지 나온 꼬맹이를 발견했다. 잠시 빗소리가 요란했다. 꼬맹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붕이 무너지는 줄 착각했습니다."
"그렇게까지 낡지는 않았는데."
"착각했습니다."
정보의 부족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벌칸 꼬마가 덤덤하게 말했다. 커크는 왜 자신이 저 꼬마를 도와줬는지를 고민했다.
문을 닫자 빗소리가 한결 줄어들었다. 낡은 집이지만 그래도 집이라고 구석에 있던 히터를 켜자 곧 훈훈해졌다. 커크는 안쪽 방의 침대에 던져두었던 통신기를 가져와 통화 화면을 연결했다. 번호를 누르는 화면을 켜고 커크는 식탁 앞에 앉아있는 꼬맹이에게 통신기를 건넸다. 자기가 두르고 있던 수건을 개던 꼬맹이가 고개를 들었다.
"부모님께 연락 드려."
"...감사합니다."
커크는 덜 마른 수건을 한 장 들고 머리를 털었다. 물기가 의외로 많았는지 수건이 금방 젖어 들었다. 꼬마가 몇 번 버튼을 누르자 곧 신호음이 들렸다. 통신이 연결 된 것 같아 커크는 화장실로 자리를 피했다.
더운 물로 세수를 하자 기분이 한결 나았다. 대강 머리를 적시기라도 하자 훨씬 나았다. 바깥에서 대화하는 소리가 사라지자 커크는 머리를 털며 문고리를 잡았다. 꼬맹이는 통신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직 좀 추운지 귀가 초록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온도를 더 올려야하나. 커크는 무덤덤하게 생각했다.
"아버지께서 곧 데리러 오신다고 하십니다. 통신기의 위치 검색 기능을 마음대로 사용해 죄송합니다."
"아니, 뭐."
커크는 한 손으로 통신기를 받아들었다. 묘하게 저 꼬마랑 엮이면 예의를 차리게 된다니까. 커크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꼭, 자신이 변해가는 것 같았다. 호불호와 선악을 가리기 이전에 그건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커크는 벽 대신으로 쳐둔 칸막이 뒤로 가서 티셔츠를 뒤집었다. 물을 흠뻑 집어먹은 티셔츠가 피부에 들러붙어서 잘 떨어지지를 않았다. 스펀지를 접시에 문지르는 것 같은 뿌득뿌득, 하는 소리 사이로 그리고, 하고 꼬마가 말을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으십니까?"
커크는 티셔츠를 찢어먹을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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