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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D/스타트렉

[스팍커크] 성장의 물약 (1)

ㄷㄷㄷㄷ 2023. 1. 22. 13:45

2015년 글 백업입니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실제 인물/사건/단체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내 앞에는 두 개의 알약이 있었다. 하나는 거지 같고, 비참하고, 지옥의 한 구렁텅이 같은 현실 같은 환상에 안주하게 해 주는 파란 알약이었고, 다른 하나는 골치 아프고, 빡치고, 열 받지만, 그래도 아주 실낱같은 희망이 보이는 더 환상 같은 현실을 보여주는 빨간 알약이었다.

나는 파란 알약을 먹기로 했다.

-

제임스 타이베리우스 커크는 그 날 그 시각 아이오와의 시내 중 한 군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특별히 뭔가 그 쪽에 볼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굳이 이유라 한다면 잘 빠진 에어바이크를 자랑하고 싶었던 정도였다. 리플리케이터로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광택이 예쁘게 살아있는 에어바이크는 사흘 밤낮을 프로그래밍에 쏟아부은 커크에게 상당한 보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일반 에어 바이크 엔진 모델링에 튜닝을 새로 해서 요란한 소리가 나는 것 또한 뿌듯함의 한 요인 중 하나였다. 물론 '평범한' '정상적인' '보수적인' 감각의 사람들은 시끄럽고 정신사나운 그런 종류로 보이겠지만 어쨌든 커크에게는 마음에  쏙 드는 굉장한 물품이었던 것이다.

드라이브를 제외하면 특별한 목적이 없는 나들이었기에 커크는 잠깐 신호등 앞에서 핸들 쪽으로 상체를 숙이고 남은 시간에 무엇을 할까를 잠시 생각했다. 상당히 의미없는 시간 분배이기도 했고, 동어 반복이지만, 역시나 특별한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커크는 평소에 하던 행동패턴을 반복하기로 했다. 좀 풀어서 설명하자면, 단골인 술집에 가서 여자를 하나 꼬셔서 밤을 보낸 후 새벽에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신호등에 불이 들어와서 커크는 좌회전했다. 대낮부터 심히 불량한 계획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그 평소의 행동패턴은 술집의 문 앞에서 금이 갈 수 밖에 없었다. 술집이 문을 안 연 건 물론 커크의 패착이었다. 그야 술집이 지금 시간부터 문을 열리가 없지 않은가.술집의 문 옆 좁은 골목에서 키가 기껏해야 제 가슴 근처에 올까 말까 한 어린 것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걸 본 건 아니었다. 술집 앞에서 망을 보던 어린 것이 비명을 지르다시피 경보를 올리고 골목에서 몇몇이 후닥닥 튀어나오는 걸 본 것 뿐이니까. 경찰이다!(Cop!) 당연히 커크의 기분은 순식간에 바닥을 찍었다. 아니 우리 이쁜이가 그 단순하기 짝이 없는 경찰 바이크하고 얼마나 다른데 경찰이래. 튜닝을 더 해서 손을 보아야 하는 생각을 하며 커크는 술집 앞에서 멈춰 섰다. 셔터가 굳게 내려가 있었다. 아 이런. 그러고 보니 오픈 시간이 좀 늦은 편이었지. 커크는 입맛을 다셨다. 이젠 뭘 해야할까 가늠을 하고 있는데, 술집 옆 골목에서 인기척이 났다.

이번에는 한 명이었다. 키는 기껏해야 커크의 허리께 올 것 같았다. 알 만한 상황이었다. 이 근처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 거기서 거기지. 소수쪽의 입장을 겪어보지 못한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저렇게 어렸을 때는 아니었지만. 발소리가 이상하지 않은 걸로 봐서 특별히 아프다거나 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얻어 맞지는 않은 건가. 커크는 약간의 흥미를 가지고 골목에서 나오는 아이를 살펴보았다. 약간 흐트러지고, 구겨지고, 먼지도 묻어있었지만 꽤나 칼같이 다림질을 한 듯 한 바지와 역시 구겨진 것을 손으로 펴 낸 것 같은 셔츠, 그 위에 조끼, 단정하게 잘라낸 뱅 헤어와, 오, 그런 웃기는 머리 치고는 꽤 예쁘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은 진한 초콜릿 색이었고- 귀가 뾰족했다. 커크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문득 스치고 지나갔다.

"오, 벌칸?"

꼬마애가 커크를 올려다보았다. 커크는 휘파람을 불고 싶었다. 아주 그린 것 같은 따돌림과 집단 린치의 현장이었다. 시골 마을에서 보기 힘든 외계인에-커크도 들어본 적만 있어서 떠올리는데에 약간 시간이 걸렸다-, 크지 않은 어린애라. 피가 안 비치는 게 용한 일이었다. 아니 그 직전에 내가 온 건가. 커크는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눈썹을 치켜올렸던 꼬마애가 꼿꼿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휴머노이드 종족 차별은 연방법에 의거 처벌될 수 있습니다."

-우와. 덜 큰 것들이 들으면 정말 한 대 갈기고 싶어지는 응대였다. 물론 그걸 실행에 옮기느냐가 얼마나 덜 컸는지를 증명해주는 척도기는 하지만. 커크는 조금 미간을 좁혔다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이 촌동네에서 벌칸 보기가 쉽지 않으니 네가 이해해."

"...논리적이군요."

아오 저 논리적 운운. 고등학교 때 딱 한 번 들어본 적 있는 수업을 기억하지 못했으면 아까 그 놈들마냥 저 꼬마애를 골목 안으로 끌고 들어갔을 것 같았다. 인사조차 없이 꼬마애는 휙 몸을 돌려 골목에서 큰 길로 나갔다. 커크는 다시 술집으로 눈을 돌렸다가 입맛을 다시고 역시 에어바이크를 돌려 큰 길로 나갔다. 늦은 점심이나 먹을까 한 것 뿐이었지만- 커크는 충동적으로 같은 길을 가는 꼬마애를 불렀다. 꼬맹아.

"태워다 줄까?"

안타깝게도 돌아오는 눈초리는 차갑다 못해 싸늘했다. 호의에 이렇게까지 냉대를 받아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 때의 호의에는 흑심이 섞여있었으니 순수한 호의에 받는 냉대에 관하여-없는 커크는 이제 짜증이 날 것 같았다. 우와, 이 녀석 진짜 때리고 싶은 타입이다. 벌칸은 다 이런가. 폭행 피해자한테 손도 못 건네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또 입이 열렸다.

"벌칸의 체력은 평균적으로 인간의 세 배이므로 여기서 집까지는 무리가 없습니다."

아 그러세요. 커크는 고개를 저으려고 하다가 그냥 에어바이크의 속력을 올리기로 했다. 요란한 엔진음과 함께 골목이 저 뒤로 멀어졌다. 벌칸이란. 커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곧 그 상황을 잊었다. 아마 그 다음주에 있었던 일이 아니었으면 커크는 그 일을 무의식 안에 영영 묻어 놓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날 단골집에 들르지 못한 커크는 그날부터 또 이틀을 밤새어 에어 바이크를 튜닝했다. 경찰 에어바이크의 모양새를 참고해 가며 최대한 그것과 다른 모양새가 나오게 힘을 썼다는 뜻이다. 무독성 페인트 스프레이 분자 공식을 짜서 그걸 제조해 도색하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조언을 얻어가며 범퍼도 교체했다. 그리고 며칠이나 가지 못한 술집에 가기 위해 그 다음주에 집을 다시 나섰다. 그리고 단골 술집 앞에서 그 어린 벌칸을 다시 발견한 것이다. 사실, 발견했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어린 벌칸이 먼저 그를 주시했기 때문이다. 뾰족한 귀 만큼이나 청력도 좋은 건지, 아니면 그의 에어 바이크가 유난히도 엔진 소리가 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멀리서부터 그 엔진소리에 반응해 어린 벌칸은 그 술집으로 향하는 골목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커크에게 시선을 붙박아 둔 채 말이다. 그 조용하고도 침착한 시선이 아주, 굉장히, 따가웠기 때문에 커크는 천천히 속력을 줄일 수 밖에 없었다. 약간 그를 스쳐 지나가서야 완전히 멈춘 커크는 에어바이크에 탄 채로 허리를 꺾어 뒤를 돌아보았다. 어린 벌칸은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와 커크의 바로 앞에 섰다. 오늘은 셔츠도 바지도 칼 같이 주름이 잡혀있는 걸 보니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렇게 보니 천상 좋은 집 도련님이네. 커크는 짧게 생각했다.

"여기 와서 좋을 게 없을텐데 도련님."

그리고 어떤 정제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말이 툭 튀어나왔다. 어린 벌칸의 눈썹이 슬쩍 치켜올라갔다. 논리적이지 못한 설명이군요. 아주 짧은 대답이 튀어나왔다. 정말, 이쯤되면, 커크는 벌칸 자체가 싫어질 것 같았다. 왜 어린애를 술집 골목 밖으로 내쫓는데 이렇게 힘을 써야 하는 건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이 제임스 커크가 말이다. 아이오와 한량의 대표 주자가.

"여기는 술집 골목이고, 알코올은 미성년자한테 권장되는 품목은 아냐. 게다가 술집 골목이라는 건 불량학생의 터전이라는 뜻이고, 너는 지난 번에 그 녀석들한테 폭행 당할 뻔 했지.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너는 여기서 빠져 나가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데."

최대한 '벌칸스럽게' 말을 하고 커크는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좀 일찍 열까 싶었는데, 빌어먹을, 술집은 또 문이 닫혀 있었다. 그냥 이 시간에 오면 안 되는 거군. 커크는 바이크 핸들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 자 그럼 이젠 또 뭘 한다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I-)

"현재 시점에서 이 골목이 위험할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벌칸은 알코올 성분에는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성년 미성년의 문제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폭행 사건의 경우."

잠깐 어린 벌칸이 말을 끊었다. 마치 심호흡을 하듯이 몇 번의 호흡 타이밍이 지나갔고 아주 천천히 그 어린 벌칸은 입을 열었다.

"그 사건에 관해 말씀 드릴 게 있어 여기에 와있습니다."

커크는 미간을 찌푸렸다. 몇몇가지 있을 법한 상황이 머릿속으로 슥슥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쪽도 좋을만한 것이 없었다. 커크는 좀 짜증스레 몇 마디를 뱉었다.

"미안한데 폭행사건의 목격자나 그런 걸 원하는 거면 사람 잘못 골랐다고 해 주고 싶은데. 난 본 게 없으니까."

"그러한 확률은 이미 심의가 종결된 사건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상당히 낮은 값을 매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심의 종결이라니 맙소사 빠르기도 하군. 이 어린 벌칸이 상당히 좋은 집 도련님이라는 게 다시 한 번 확실해 져서 커크는 조금 더 빈정이 상했다. 어린 벌칸은 다시 한 번 머뭇거리더니-나중에 커크는 이 일을 두고두고 놀려먹었다. 세상에, 벌칸이 머뭇거리다니!-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저의 대처가 인간 사회의 사회 자본에 상당히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셨고 저는 그것이 논리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사회, 뭐?"

"사회 자본, 입니다. 사회자본은 20세기 부르디외(Bourdieu)에 의해 발견 된 개념으로써 이 사회의 신뢰 준수성이 경제적 효율성에 일정한 연관성을 보이는 것을 이야기 한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1

커크는 이제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이 도련님은 나한테 자기 똑똑하다고 자랑하려고 왔나. 그런 생각들이 퐁퐁 솟아나는 와중에 어린 벌칸이 이어서 말했다.

"그러니까, 지난번에 있었던 폭력 사건에서, 구해 주신 데에 감사를 표하지 못한 점을 사과해야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오 그건 상당히 귀여운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얼굴이 딱딱한 무표정에 낯빛조차 바뀌지 않았다는 걸 고려해 본다고 해도 그건 정말로 귀여운 발언이었다. 맙소사, 그러니까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감사와 사과를 표시하기 위해 골목길을 얼쩡거리는 벌칸이라니, 심지어 어린 아이라니. 웃음을 터트릴만큼 귀여운 행동이었다. 그래서 커크는 웃었다. 아주 신나게. 어린 벌칸의 한쪽 눈썹이 휙 들어올려졌다.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트리는 병 혹은 지속적으로 지나치게 기분이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증상이 있으시다면 전문의와 상담하시길 권장드립니다만."

"네가 나를 웃긴 거야 이 어린 벌칸아."

"-종족으로 타인을 호칭하는 것은 차별로 연방법에 저촉될 수 있으며 판례도 존재합니다."

"오, 그래. 근데 난 네 이름 모르거든?"

어린 벌칸이 입을 다물었다. 커크는 어깨를 으쓱 하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어린 벌칸의 시선과 고개가 그 쪽으로 떨어졌다.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지만 꼬맹이는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몇 초가 흐르고 커크는 어색하게 손을 비틀어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제임스 커크."

"...스팍입니다."

"그래, 사과는 받아 주마."

그리고 커크는, 또한 매우 충동적으로 자신의 뒷좌석을 가리켰다.

"타라 꼬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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