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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글 백업입니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실제 인물, 사건, 단체 등과 관련이 없습니다.
*양궁에 관해 지식이 없는 편입니다. 이상한 부분이 있다면 알려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있는 법이라곤 하지만, 친하지 않은 사이에서 타인의 네임을 묻는 것은 엄연히 실례다. 프라이버시에 포함되는 것이기도 하고,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문제까지 포함하면 숨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기도 하니까. 그래서 갤리가 당장 네임으로 곤란을 겪은 적은 몇 되지 않았다. 매니저나 주치의, 그리고 처음에 검사를 했던 간호사와 경찰 정도가 알고 있을 따름이었다.
다만 소문은 어디서든 나기 마련이다. 아무도 생각한 적조차 없는 일이라 무슨 그런 일이 있냐는 반응이 95%, 그런 일이니만큼 혹시 모른다는 반응이 5%였다. 갤리는 별로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니까.
"신의 약속 비슷한 거지."
매니저가 언젠가 운전을 하면서 말했다. 갤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건성으로 들었다.
"세상에 딱 한 사람 정도는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믿음 같은 게 생기기도 하고… 힘들 때 보고 있으면
이 사람을 볼 때까지는 버텨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언젠가는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증거 비슷하다고 해야하나. 매니저가 마지막 말을 거의 웅얼거리다시피 말했다. 흥미롭긴 하지만 복잡한 생각이 드는 말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면 어쩌려고? 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이랑 그렇게 사는 사람을 보는 기분이 어떨까. A에겐 B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B에겐 다른 이름이 있으면 어쩌지? 동명이인은? 갤리는, 그러나 현명하게 모든 의문을 묻어두었다. 그들이 그렇게 기쁘게 생각하는 네임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불어넣기도 뭐했다.
새로 나온 숙소는 넓었다. 이미 결혼 한 매니저는 따로 살고 있었고 코치와 감독도 마찬가지였기에 갤리 혼자 사는데도 불구하고 거실과 침실, 창고방에 드레스룸과 심지어 손님방까지 딸려 있었다. 방만 네 칸이 넘는데 심지어 복층이었고-아파트 건물이라 2층이라고 부르긴 애매했다-청소를 잘 해서인지 색색의 반들반들한 돌로 깐 바닥은 반짝반짝 빛나기까지 했다. 이게 '숙소'라고? 갤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기가 문제인가 싶다가도 옆에서 당황을 숨기지 못하는 매니저와 코치, 감독을 보며 갤리는 적지 않게 안심했다. 그래.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어.
햇빛이 물방울이 튀기는 것처럼 창문을 통해 들어와 부서졌다. 코치와 감독이 비틀거리며 돌아가고 갤리가 소파에 늘어지는 사이 매니저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의 전화가 터지는 건 아닌지 걱정 될 지경이었다. 핸드폰 발열이 심해서 잡고 있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매니저는 핸드폰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며 오늘은 여기에서 자야겠다고 약간 씁쓸하게 말했다. 갤리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매니저도 떠난 집은 굉장히 크고 공허했다. 잘못 배정된 집일 수도 있으니 쓰는 것도 영 마땅치가 않았다. 들어 올 때 사온 샌드위치로 저녁을 대충 때우고 갤리는 소파 위에 누워 웅크려 모포를 덮었다.
넓은 집인데도 불구하고 집 안에는 나름 훈기가 돌았다. 밤에는 쌀쌀한 날씨였으므로 달가운 일이었다. 고된 연습을 끝낸 날에 늘 그렇듯이 수마는 순식간에 갤리를 덮쳤다. 머리가 소파 팔걸이에 닿았을 뿐인데 눈 앞이 어둑하고 뻑뻑해졌다. 갤리는 졸음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
"특별히 속물인 것 같진 않습니다."
담당자는 거의 스무 건에 달하는 부재 중 전화를 보고하며 웅얼거렸다. 뉴트는 달랑 다섯 장 짜리 보고서를 손으로 팔락팔락 흔들었다. 지나치게 보고서를 자주 올려서 스테이플러 심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아까는 이동 경로, 그 전에는 제공한 숙소. 엄지와 검지로 집어 올린 얄팍한 종이묶음에 담당자는 침을 삼켜야 했다.
"시시콜콜한 것까지 반드시 시간마다 보고해야 하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가 보세요."
담당자는 거의 도망가듯이 물러가서 사장실 문을 닫았다. 올라온 보고서에 적혀있는 부재 중 통화 내역은 번호가 전부 동일했다. 걸러서 받지 않은 모양이었다. 숙소는 단순히 협찬하는 선수에게 제공했다고 하기엔 확실히 지나치게 호화로운 감이 없지 않았다. 소문에 대한 것은 양이 적었다. 알고 있는 사람이 적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건 아주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단순 압박이라고 볼 수 없는 그 무언가. 자극할 필요가 있었다. 뉴트는 흐음, 하고 소리를 내다가 서류를 책상에 내려두었다. 그리고 유선 회선을 연결해서 비서실을 호출했다.
"담당 선수 스케쥴 좀 가져오세요. 내 스케쥴 비는 날이 언젠지도 맞추고."
-
갤리는 크게 숨을 들이키며 눈을 떴다. 심장이 마구 뛰면서 진정이 되지 않았다. 뭔가가 자꾸 귓가에 속삭여 댔다. 너는 내가- --했어. 너는 ------- 해야만 해. 중간 중간이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는 목소리가 갤리를 괴롭혔다. 기포가 올라오는 소리가 꿈마다 귓가를 어지럽혔다. 몇 번 꾼 적이 있는 꿈이다. 이쪽에 넘어와서 아주 가끔, 꾼 적이 있었다. 아는 목소리도 아니고, 특별히 나쁜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 자꾸 괴롭혀대서 가끔은 잠자리에 들기가 괴로웠다. 한동안은 멀쩡했는데 오늘은 또 왜. 갤리는 뻑뻑한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이 완전히 달아난 건 아니지만 물이라도 한 모금 마셔서 진정해야 했다.
시합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게 미련을 둔다고 보기도 어려웠지만, 그래도 나름의 생업이었다. 사냥을 해 먹고 사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요즘 세상은 그게 더 어렵다고 했다. 다시 잠들어야 했다. 소파에서 뒤척이다 갤리는 소파 앞 테이블에 있는 리모콘을 발견했다. 갤리는 리모콘을 집어 들고 텔레비전을 켰다. 검은 화면에 천천히 불이 들어왔다.
갤리는 몇 번이나 화면을 돌렸다. 쇼핑 호스트가 지나가기도 했고, 분노하는 남자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했으며, 앵커가 뉴스를 전달하고 있기도 했고... 갤리는 두 명이 현 주식 시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가장 재미 없는 채널에서 화면을 멈췄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주식이라는 게 뭔지도 갤리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웅웅거리는 말소리가 들리니 잠은 잘 올 것 같았다. 리모콘을 내려놓고 갤리는 머리를 다시 괴고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가 귓가를 대신 맴돌았다.
-...회사의 사장이자 콘체른의 실세인 뉴트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암암리에 후계자로 지목되고 얼마 전에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는 소리가 나오긴 했지만 진위 확인은 불가능 했거든요.
잠이 통 오지 않았다. 소리를 너무 크게 키웠나. 눈은 뻑뻑한데 자꾸 들리는 말소리가 의외로 거슬렸다. 이러면 잠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테이블을 더듬거렸지만 리모콘이 통 손에 걸리지 않았다. 갤리는 옅게 실눈을 떴다. 리모콘이 보일 듯 말 듯 보이지 않았다. 갤리는 약간 신경질을 내며 몸을 일으켜 리모콘을 집었다. 화면이 푸른 빛에서 약간 회백색으로 변했다.
-그런데 최근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무엇인지 시장에서의 판단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믿을만한 저널이긴 하지만 단독 보도이다 보니...
화면에는 신문 기사를 오려 붙인 듯이 사진이 인쇄되어 있는 갱지가 한 장 떠 있었다. 그리고 갱지에 인쇄된 사람의 얼굴을 빠르고 크게 확대했다. 잘생긴 금발 남자의 얼굴이 확대 되기 시작했다. 장소는 공항인 듯 했고, 남자는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일부러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기까지 하고 있었다. 갤리는 순간 강렬한 두통을 느꼈다. 목소리가 귓가에서 날카롭게 외치는 것 같았다. 언어가 되지 못한 비명에 가까운 말이었다. 남자의 얼굴이 곧 사라지자 순식간에 다시 멀쩡한 상태로 돌아갔지만. 갤리는 눈을 몇 번 깜박이고는 소파에 몸을 던지다시피 떨어뜨렸다. 더 이상 목을 가눌 만한 힘이 없어서였다. 두통의 여파인지 잠이 쏟아졌다. 주식 시장에 미친 여파를 설명하는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도 없었다. 문득 문득 뉴트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잠시 정신이 들었다가 다시 빠른 속도로 가라 앉아 들었다. 갤리는 TV를 켜 둔 상태로 잠에 다시 빠져 들었다. 그리고 다시는 꿈조차 꾸지 않고 아침까지 깊은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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