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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BL

전설은 (어쨌든) 이루어진다

ㄷㄷㄷㄷ 2022. 11. 15. 18:21

/가장 고귀한 자의 다른 한 편이 세상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라/

신탁은 애매한듯 명확했다. 왕은 왕자에게 명령했다. 이제는 멸망한 나라의 고성에 가서, 네 신부를 데려 오라고. 왕자는 그렇게 했다. 호위기사 몇몇과 짐을 꾸려 고성을 향했다. 왕자는 그 스스로도 검 솜씨가 있는 편이라 호위기사들은 가끔 전서구의 역할도 해야 했다. 그래서 고성에 다다랐을 때 왕자 옆에는 호위기사 하나만이 남아있었다

키도 크고 몸도 단단한 남자 기사는 왕자의 검처럼 움직여 고성을 샅샅이 뒤졌다. 그가 걷은 거미줄 밑을 지나고 기사가 턴 먼지를 스쳐 성 꼭대기까지 다다랐지만, 당연히도 고성에 사는 사람은 없었다. 멀리서 해가 지고 있었다.

왕자는 장갑을 낀 손으로 창틀을 짚었다. 먼지가 풀썩 올랐다.

“아를.”

“예, 전하.”

기사가 충직하게 대답했다. 왕자는 그런 기사를 돌아보았다. 짧게 깎은 짚풀 색 머리칼이 노을에 흐리게 반짝이고 있었다. 왕자의 은색 머리칼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돌아가자.”

“예.”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그사이 다시 걸쳤을지도 모를 거미줄을 헤치러 먼저 발을 딛었다. 왕자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해가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신전 것들이 사기 친 게 아닐까요?”

전서구의 소임을 다한 이반나가 속닥였다. 톤 높은 소리를 죽이느라 애를 쓰는 것이 역력한 모양새였다. 아를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설령 진짜 엿을 먹이려는 짓이었대도 왕자가 그렇게 순순히 당할리도 없었다. 그가 왕자에게 가지는 신뢰는 굳건했다. 무엇보다도, 신전은 왕자와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왕이 왕자를 엿먹였으면 모를까. 당장 오늘도 신부의 얼굴은 커녕 존재 여부도 모르는 채로 왕자비맞이 연회를 연다고 하지 않는가. 아를은 한숨을 삼키고 정복의 상태를 점검했다. 멀리서 왕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문 옆에 기립한 시종이 왕자 전하가 든다고 크게 외쳤다. 모두의 시선이 왕자와 그 주변을 훑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왕자는 그 모든 것에 신경쓰지 않는 듯 절도 있게 걸어 왕 앞에 섰다.

왕이 숨을 쌕쌕거리며 말했다.

“미하엘, 내 아들아.”

“예, 전하.

” “네 신부는 어디있느냐.”

조롱의 기색이 역력한 연극투였다. 왕자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아를.”

“예, 전하.”

아를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목을 가다듬었다. 설명을 하기 위해서였다. 고성엔 아무도 없었노라고. 다른 세상에 끝에 가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렇게 말하려는 찰나.

“신부는 여기 있는 아를입니다 전하.”

왕자가 선수를 쳤다.

장내가 물 속에 가라앉은 듯이 고요해졌다. 잠시 입을 뻐끔거리던 왕이 말했다.

“무어라 했느냐?”

“신전에서 일컬은 고성에 제가 발을 들이자, 저보다 앞서 아를이 들어 제 앞길을 텄습니다. 아를은 저보다 한 발 앞서 저를 기다렸습니다. 이가 신탁에서 말한 제 신부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왕자가 웃었다. 아주 짖궂게.

아를은 그렇게 왕자비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호사가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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