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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D/스타트렉

[스팍커크] 성장의 물약 (5)

ㄷㄷㄷㄷ 2023. 1. 26. 10:49

*이 글은 픽션입니다. 실제 인물, 사건, 단체 등과 관련이 없습니다.

 

방은 생각보다 넓었다. 비를 뚫고 나가려 했지만 비는 내린다기보다는 양동이로 들이붓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무섭게 오고 있었다. 이 비를 뚫고 킬로미터 단위를 걸어가는 것은 정말, 죽어도 무리였다.-고집이었지 사실 밤에 킬로미터 단위를 걸어가는 것 자체가 무리긴 하다-커크는 그렇게 또 하룻밤 신세를 져야 했다. 손님방은 작은 옷장과 시트를 씌우지 않은 침대 같은 단출한 가구에 작지만 화장실이 하나 딸려 있었다. 슬리퍼가 없는 것을 제외하면 호텔 같은 모습이었다. 너무 거한데. 커크는 문틀에 어깨를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찜찜하게 생각했다.

"실례합니다 미스터 커크."

커크는 뒤를 돌아보았다. 허리까지 오는 꼬맹이가 잘 개어진 천뭉치를 들고 서 있었다. 시트인 모양이었다. 노크를 하지 못한 점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또랑또랑 말하는 어린 목소리에 커크는 정말 귀여운 벨보이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정도 나이 대의 벨보이는 없지만.

"고맙다."

"맨 위에 있는 게 잠옷이라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시트를 끼워야 하니 화장실에서 갈아입어 주십시오."

시트를 끼운다고? 커크는 침대를 확인했다. 싱글 사이즈의 크지 않은 침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요 쪼그만 손으로 정리를 하기엔 그렇게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 부모님도 커크에게 전해주라는 취지의 말을 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스팍은 척척 방 안으로 걸어들어가 시트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맨 위의 밋밋한 파자마를 커크에게 내밀었다. 커크는 파자마를 받아들며 스팍에게 말했다.

"무리하는 거 아냐? 그냥 두고 가면 내가."

"벌칸은 무리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커크는 애매하게 웃으면서 파자마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새 칫솔이 있는 김에 이도 닦았다. 비가 많이 와서인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바짓단도 꽤나 젖어 있었다. 식사하는 사이에 대충은 마른 것 같지만, 그래도 보송보송한 파자마를 입으니 한결 몸이 데워지는 기분이었다. 마지막으로 파자마를 입은 게 언제였더라. 보통은 속옷만 입고 자지만 이것도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옷장에 걸어 놓을 생각으로 셔츠와 바지를 가지고 나오니 조그맣고 동그란 뒤통수가 매트리스에 묻혀있는 것이 보였다. 시트는 반은 끼워지고 반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상태였다. 커크는 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도와줄까?"

"...부탁 드리겠습니다."

통통하고 동그란 얼굴과 귀가 초록색으로 물들어서 완두콩 위에 머리카락을 얹은 것 같았다. 힘이 세 배 남짓 세다고 하지만 저 쪽은 아무래도 요령인지라. 매트리스 이쪽 저쪽을 들며 시트를 끼우자 그럭저럭 볼만 해졌다. 주름이 잡힌 것까지 신경 쓰는 편인지 스팍은 약간 불편해 보였지만, 그래도 계속 무표정으로 있으니 커크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세세한 데까지 신경 쓰다간 병 난다-고 커크는 생각하는 편이었다-.

"고생했다."

"...고생은 자신의 한도를 뛰어넘는 것을 시도하는 비논리적인 일입니다. 따라서 벌칸은 고생하지..."

스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않습니다, 하고 말을 마쳤다. 중간에 무리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으면서 결국 도움을 구한 게 떠오른 것 같았다. 커크는 좀 웃으려다 스팍이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이는 걸 보았다. 벌써 시간이 아홉 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애들은 보통 이 시간 쯤 자는 것 같은데. 벌칸이라고 해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건 습관화 된 모양이었다. 아니, 벌칸이니까 더 그런가. 커크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스팍을 방 밖으로 보냈다.

"그래, 그래. 잘 시간이다. 자야지."

"...벌칸은 일주일 쯤 수면을 취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넌 벌칸이기 전에 어린애고."

"논리... 적이군요."

졸려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생각한 것 보다 많이 귀여워서 커크는 푸슬푸슬 웃으며 스팍을 계단으로 올려보냈다. 숙면하시길 바랍니다. 스팍은 그 와중에 깍듯하게 인사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커크는 표정을 정리하면서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뒤를 돌았다. 그리고 체스판을 정리하던 사렉과 마주쳤다.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서 커크는 어, 하고 약간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사렉은 마저 체스판을 정리하고 말들을 작은 주머니에 넣어서 한쪽으로 정리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스팍과 체스를 두던 중에 정리하지 않고 바로 식사하러 갔던 게 떠올랐다. 실수한 기분에 커크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사렉은 손을 가볍게 들었다. 지구식 제스처에 익숙한 모양이었다.

"스팍으로서는 저녁을 먹고 대국을 지속하는 것이 논리적이었을 것입니다."

"시간이, 생각보다 늦었죠."

"어린 나이에는 상당한 수면이 필수적입니다."

사렉은 고개를 끄덕였다. 커크는 뭐라고 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음, 하고 말을 끌었다. 분명 커크도 사교적인 편이긴 하였으나 사교적인 것과는 별개로 사렉은 상당히 대하기 어려운 편이었다. 외계인이어서 그럴 수도 있었다.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스팍이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예?"

갑작스런 말에 커크는 불쑥 반문했다. 사렉은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휴가를 왔음에도 그리 즐거워 보이지 않아 아만다가 '걱정하고 있다'는 말을 5회 정도 꺼냈습니다. 57.7% 확률로 돌아갈 것을 고민하던 중에 스팍이 도움을 준 사람을 만났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오늘도 식사량이 약 12% 증가한 것으로 보아 세로토닌의 분비가 촉진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스팍이 저에게 꽤나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 된다. 동네 친구 같은 의미일 수도 있긴 하지만. 순수하고 순진무구한 호의에 커크는 뒷목이 화끈화끈하게 달아오른 것을 느꼈다. 얼굴과 귀도 꽤나 뜨끈했다. 이 정도까지 제가 기뻐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커크는 더듬더듬, 감사합니다, 하고 말을 꺼냈다.

"일찍 잠자리에 든 것도 좋은 경과로 사료됩니다. 감사드립니다."

"아뇨, 그, 저야말로."

숙면을 취하시길 바랍니다. 사렉이 인사를 하고 커크를 스쳐 지나갔다. 커크는 뜨끈뜨끈한 눈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손님방으로 향했다. 기분이 들뜨는 동시에 한없이 울고 싶어졌다.

-

다음날 아침 커크는 습관적으로 침대 옆 테이블을 더듬거리며 잠에서 깼다. 아스피린을 찾기 위해서였는데, 손끝에는 약통 비슷한 것도 잡히지 않았다. 커크는 대신 두 가지를 깨달았는데- 하나는 두통이 이미없다는 것이었다. 하긴 그의 두통은 만성적이긴 했지만 대부분 숙취에 의한 것이었고 어제는 알콜 비슷한 것도 손에 대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침대 옆에는 테이블 비슷한 것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 그래. 여긴 내 집이 아니었지. 커크는 머리에 생긴 까치집을 부수며 몸을 일으켰다. 창밖으로 해가 새어들고 있는 걸 보니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몸단장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지만 대강의 시간 여유는 있었다. 벌칸들은 엄청 일찍 일어나거나 그런 건 아니겠니? 부정할 수가 없어서 커크는 다리를 최대한 질질 끌지 않으려 노력하며 화장실로 뛰어들다시피 했다. 

청바지에 다리를 쑤셔넣고 있을 즈음에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커크는 아슬아슬하게 차려입은 옷차림으로 문을 열어줄 수 있었다. 어제 저녁보다 훨씬 맑고 말똥한 커피색 눈동자가 커크를 올려다보았다. 커크는 열심히 말을 골랐다.

"어... 좋은 아침?"

"'좋다'는 말은 불명료하고 부정확합니다."

기껏 골라낸 말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커크는 헛웃음처럼 웃어주었다. 스팍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3.2분 뒤에 아침식사 준비가 완료될 예정입니다. 준비는 모두 마치셨습니까?"

"나는 그럭저럭."

"완전히 끝나지 않으셨다는 의미십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대화가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커크는 일단 문 밖으로 나왔다. 커크가 한 말의 비논리성을 어느 정도 떨쳤는지 스팍이 커크보다 반발자국 앞서 걸었다.

"아침 식사 후에 어제 다하지 못한 체스 대국을 속행하고 싶습니다."

"어,"

커크는 두 발짝 정도 대답을 미뤘다가 입을 열었다. 

"그거 어제 네 아버지가 치우셨는데."

물론 커크도 어느 정도까지는 기억하고 있었지만 세세한 일부분까지 전부 외우고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야 늘어놓다보면 기억이 날지도 모르지만서도. 다시 두는 것이면 모를까 '속행'은 아무래도 무리가 아닐까. 커크는 추측했다. 그리고 거의 틈을 두지 않고 스팍이 말했다.

"벌칸에게는 직관 기억력이 있습니다. 어제의 대국 종료 상태를 숙지해두고 있습니다."

오, 그거 편리한데. 커크는 새삼스레 스팍을 바라보았다. 스팍은 문득 발을 멈추고 커크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잠시의 눈싸움 같은 대치 상태가 이루어졌다. 커크는 스팍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문득 떠올렸다.

"한 판만 두는 거다?"

스팍이 고개를 끄덕였다. 커크는 그 모습이 활짝 웃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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