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D/스타트렉

[스팍커크] 문화다양성

ㄷㄷㄷㄷ 2023. 1. 22. 13:34

2014년 글 백업입니다. 퇴고X

 

 

*이 글은 픽션입니다. 실제 인물, 단체, 사건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단어선택이 좋지 않아서 15금 정도입니다.

 

빨간 틴케이스 위에는 깨끗한 정자로 크게 NINA'S라고 적혀있었다. 한참동안 철로 만들어진 케이스를 두 손으로 들고 바라보던 커크는 시선을 돌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은 함장석에 앉아있고 상대방은 서 있는 입장으로써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홍차입니다. 차엽을 덖어서 발효시킨 일종의 발효차로."

"아니 이걸 왜 나한테 주냐고."

심지어 여기 이거 작은 글씨로 프랑스어로 주뗌므(je t' aime)라고 적혀있지 않냐. 커크는 좀 식은 땀이 날 것 같았다. 아무도 모르는-일단 본인들은 그렇다고 믿고 있는-사실이지만, 사적인 사이에서 스팍과 커크는 엄연히 연인이었다. 워낙에 한 쪽이 이성적인 탓에 아직 이렇다할 신체 접촉이나 성적 관계, 하다 못해 일하는 와중에서 꽃피어나는 로맨스 등등은 결코 기대할 수 없었지만 여튼 그랬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사랑해'라고 쓰여있는 홍차를, 아무리 방금 근무시간이 끝나다고는 하지만 함교에서 건네받다니 커크는 자신이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도통 알 수가 없어졌다. 스팍의 자세와 표정은 영 평소와 다를바가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파란색 부함장복을 입고, 열중쉬어 자세로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생일 선물입니다."

"어?"

진짜? 커크는 다시 케이스를 들어올렸다. 주변에서 웅성웅성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아 그러고보니 오늘 항성력으로 그렇게 되는 군요. 얼마 전부터 당신 생일이 언제라고 얘기하고 다니시더니. 캡틴! 생일 쭈카뜨립니다! 이런 소리나 이런 선물을 하나쯤은 받고 싶어서 떠들고 다닌 건 맞는데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서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아서 커크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니 뭔가, 스팍 같으면 생일은 객관적인 의미 없이 주관적으로 설정한 날로써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비논리적입니다 라고 할 것 같았는데.

"지구에서는 태어난 날을 존중해 선물을 주고 받는 문화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윤리적으로 어긋나지 않는 문화이니 문화 상대성을 존중하는 것이 논리적입니다."

그럼 그렇지. 커크는 하하, 하고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홍차 케이스를 들고 있는 손을 들어올리고는 축하 감사함다- 그럼 난 퇴근! 일 있으면 불러! 라고 외쳤다. 평소라면 수고하셨다는 말이 제일 많이 나오겠지만 오늘은 날이 날이라서 그런지 수고하셨다는 소리와 생일 축하드린다는 소리가 복잡하게 엉켜들었다. 커크는 다시 한 번 웃으며 땡큐! 하고 연예인이 팬서비스 하듯이 손을 흔들었다. 탁, 하고 등 뒤에서 고속 엘레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근데 스팍, 왜 하필이면 홍차야..."

"닥터 맥코이가 함장님의 알콜 섭취량을 줄일 것을 진지하게 권고했기 때문입니다."

아 깜짝이야! 약간 불평했을 뿐인데 바로 뒤따라 들려오는 소리에 커크는 화들짝 놀라 오른쪽 뒤를 돌아보았다. 순식간에 이동한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앞에 스팍이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지금부터 약 3.2초 정도 전부터입니다. 저도 근무시간이 종료되었고 제 침실은 함장님의 침실과 같은 층에 있으므로 같이 이동하는 것이 논리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연인의 근무시간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린 자신의 잘못이었다. 커크는 머리를 긁적이며 엘레베이터에서 내렸다. 따라내린 스팍의 등 뒤로 엘레베이터 문이 닫혔다. 침실을 향해 발을 옮기며 커크는 못다한 말을 붙였다.

"그런데 본즈가 그런 소리를 했어?"

"본즈, 가 닥터 맥코이를 지칭하시는 것이라면, 그렇습니다. 알콜섭취량이 한계를 넘지 않도록 조절하고 계신다고는 하지만 지속적인 알콜 섭취는 인간의 신체에 해롭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대용품으로 차를, 그 중 카페인을 우유와 섞어 희석시킬 수 있는 홍차를, 제품은 대중적인 브랜드의 가장 인기있는 제품을 통계에서 뽑아냈습니다. 저벅저벅 울리는 발소리 사이에 단조로운 듯 아닌 듯 한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이 부끄러운듯 아닌듯한 이름은 거기에서 나온 거였군. 요즘 홍차 관련된 책을 찾아서 읽고있다고 하더니. 커크는 약간 허탈하게 웃었다. 하긴 이 벌칸이 그렇게 로맨틱한 일을 할리가 있겠는가. 일단 건강을 신경써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사이가 장족의 발전을 했다는 의미이리라. 밀크티라,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마셔야겠다고 커크는 생각했다. 몇 마디나 나누었다고 그 사이에 침실의 거리는 간신히 몇 발짝을 남겨두고 있었다. 저기 스팍, 하고 커크는 말을 꺼냈다.

"예 함장님."

"나는 사적인 시간에까지 함장님이야?"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짐."

"아니, 미안할 거까지는 없는데.... 스팍 출출하지 않아?"

커크는 발걸음을 아주 천천히 늦췄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발을 멈췄다. 등 뒤에 바로 자신의 침실이 있었다. 커크는 눈을 접었다. 스팍이 예전에 예쁘다고 한 적이 있는 녹색 눈동자가 눈매 사이로 살짝 숨어들어가도록. 눈꼬리를 슬쩍 흘리듯이 접으며, 커크는 좀 낮은 목소리로 낚시하듯이 말을 던졌다.

"-라면 먹고 갈래?"

"...짐."

벌칸은 감정을 거의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표정으로도, 행동으로도 그들의 감정은 잘 알 수가 없다. 스팍의 목소리는 낮은 편이었다. 커크는 자신의 애칭을 중얼거리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천천히, 입술이.

"제 방에도 리플리케이터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지금 시간에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은 신체에 해롭습니다. 스팍의 목소리가 단조롭게 말했다. 그래. 그건 그렇지. 하, 하하, 하하하. 커크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걸로 통산 34번째 실패였다.

첫번째는 자고 가라고 했었다. 자신의 방을 두고 남의 방에서 자는 것은 비논리적이라는 것을 간신히 설득해서 같이 누운 것까지는 좋았는데 정말 자고만 갔다. 두번째, 술을 먹였다. 알코올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분위기라는 게 있으니까 어떻게든 될 줄 알았다. 자신이 취했다. 세번째 네번째 몇 번을 반복하면서 최대한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 커크는 있는대로 정보를 긁어모았다. 저쪽 섬나라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그이 셔츠 입기. 이건 추워서 남의 옷까지 껴입냐는 소리를 들었다. 자기 방 온도만 물리적으로 올라갔다. 그 위의 반도사람들이 권한다는 옷에 뭐가 묻었다고 하기. 옷 갈아입는다고 제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독살하는 느낌으로 스팍이 모르는 자당이 들어간 음식을 권했다. 밤이 늦었다고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래, 커크는 스팍과 섹스하고 싶었다. 직접적인 말이 뭐하다면 몇개라도 관용어구를 댈 수 있었다. 역사를 이루고 싶었다. 만리장성을 쌓고 싶었다. 홍콩에 다녀오고 싶었다. 순결과 순진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커크다 보니 바에서 슬쩍 돌려서 말을 건네면 따라올 사람은 따라오고 말 사람은 말고 그러는 것이 익숙했다. 2차 가실래요? 아니면, 같이 나가실래요? 물론 이 말을 꺼내기 전까지 줄창 간을 보기도 했다. 여튼, 떡치는게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고자도 아니고 플라토닉 러브를 지향하지도 않는데 사랑해 마지않는 사랑스런 애인을 두고 언제까지 오른손 신세를 져야하는지. 커크는 이제 아예 슬퍼지다 못해 오기가 생길 지경이었다. 심지어 열다섯번째를 넘어가는 시점에서 깔린들 어떠리 깐들 어떠리 하고 포지셔닝에 대한 생각까지 내다 버린채 여자들의 유혹법까지 동원했건만 이건 뭐.

폰파까지 기다리는 것 밖에 답이 없나. 7년을 독수공방해서 하룻밤을 얻어내다니 이쯤되면 비참할 것 같았다. 7년을 기다린다는 전제를 너무나 자연스레 깔고 있는 자신이 커크는 좀 놀라웠지만, 어쩌랴. 좋아하는데.

커크는 스팍을 정말, 정말로 좋아했다. 얼마나 좋아하냐 하면, 자다가 손 잡는 꿈을 꿀 만큼 좋아했다. 섹스도 아니고 키스도 아니고 손 잡는 꿈이라니. 중학생이 하는 몽정도 이것보다는 수위가 높을 터였다. 벌칸이라면 의미가 다를지도 모르지만 자신은 인간이었고 손 잡는 건 어디까지나 평범하게 할 수 있는 스킨십이었다. 악수도 손 잡는 건데 뭘. 그런데 손 잡는 꿈을 꿨다는 거다. 할 짓 안 할 짓 다 해본 천하의 제임스 커크가. 첫사랑이 아니긴 했지만 첫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커크는 스팍에게 푹 빠져있었다. 고백해서 사귈 용기를 낸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아니 사실 사귈 용기는 없었다. 고백할 용기만 간신히 냈지. 그것도 스팍이 반쯤 벌칸이 아니었다면 솔직히 내지 못했을 것이다. 고백한다는 것은 사적인 영역이었고, 또한 그 중에서도 별개의 영역이었다. 없던 일로 해 달라고 커크가 스팍에게 '논리적으로' 요구한다면 스팍은 충분히 납득하고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 줄 것이었다. 그게 유일한 커크의 보험이었다. 그래서 커크는, 예의바르게 노크를 하고 초대를 받아 스팍의 방에 들어가서 이야기했다. 좋아해.

사실, 그래, 엄청난 강경 자세이기도 했다. 갑작스레 방에 찾아들어가서 생전 보이지 않던 태도로 고백이라니. 자신이었다면 어땠을까. 가끔 돌이켜 봤지만 말도 안 되는 전제이므로 커크는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스팍의 대응은 어땠느냐면, '그렇습니까' 였다. 그 어떤 예상과도 어긋나는 말에 커크는 아마 죽을 때까지 그 대답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습니까라니, 그렇습니까라니! 그 다음에 이어진 말이 아니었다면 커크는 울화통이 터져서 죽었을지도 몰랐다. 저도 함장님께 상당한 호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 이 철벽남아. 그렇게 알아들었구나. 따라서, 다행히도(?) 커크는 자신의 감정을 설명할 기회를 한 번 더 가지게 되었다. 아니, 스팍.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여성체와 남성체가 만드는 연인이라는 관계를 너랑 만들고 싶다는 의미에서 너를 좋아한다고. 커크는 그날 정말 오랜만에 스팍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말씀은, 함장님께서 저에게 연인으로써의 교제를 신청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함장님 말고 다른 호칭으로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생각할 시간을 요청한다는 말과 함께 방에서 쫓겨났다.

함교에 들어서서 보고를 받고 있자니 자꾸 절망적인 생각만 나는데다 목구멍에 골프공이 끼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커크는 사흘동안 물과 칼로리가 있는 이온음료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섭취하지 못했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는 건 예상에 없었던 일이었다. 기껏해야 저는 함장님과 연인 관계로 발전할 생각은 없습니다, 라는 말로 차일 줄 알았지. 덕분에 한번 펑펑 울고 버릴 줄 알았던 커다란 스트레스 덩이는 아주 잘게, 미세먼지 단위로 쪼개어져서 연 사흘에 걸쳐서 황사 뿌리듯 커크를 괴롭혔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저녁에 문이 노크 되었다.

저는 함장님과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것도 괜찮은 시도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머리 위에서 팡파레가 울려퍼졌다. 핏기가 돌아오다 못해 새빨갛게 달아오른 볼을 하고 커크는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고 나면 못 물러. 무를 생각은 없습니다만. 커크는, 진심으로 스팍을 끌어안고 싶다고 생각했다. 끌어 안으려고 달려들었을 때 체중을 이용한 공격을 하려는 줄 알고 인간의 세 배인 운동신경으로 스팍이 피하지 않았다면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그날 밤에 한 번 끌어안기는 했다. Hug의 의미에서. 자신의 어깨에 어색하게 얹혀지던 스팍의 손과 녹색으로 달아오르는 귀에 커크는 정말로, 정말로 행복했었다. 근데 그게 스킨십의 한계일 줄 알았으면 그 때 그렇게 행복해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고 커크는 추측했다.

아니, 한계는 아닐지도 모른다. 키스는 했었다. 입술만 스치는 거여서 문제지. 손은, 그래 벌칸인들 입장에서는 손을 잡는게 딥키스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 여튼 손은 잡아봤다. 스팍이 잡아준 적도 있었다. 배가 정박할 때 데이트를 신청하고 신청 받은 게 몇 번이고 데이트를 나간 게 몇 번이며 방 데이트를 한 게 몇 번인데 진도를 거기까지 못 나갔으면 그건 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지는 거라고 커크는 생각했다. 심지어 싫어했다면 모르되 스팍은 별로 싫어했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으면 먼저 손을 뻗지도 않았겠지. 무표정이되 무표정이 아닌 아주 묘한 표정으로, 얼굴이 약간 녹색이 되어서, 커크의 이름을 두어번 불렀었다. 쓸 데 없이 사람 두근거리게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젠장 설마 그게 문제였나. 스물 세 번째 실패했을 때 머리를 싸쥐고 그렇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스물 네 번째 시도에서 손을 잡으면서 그건 아니라는 게 밝혀졌지만. 입술만 스치는 키스라는 게 그거였다. 스팍의 손에 제 손을 포개고, 일부러 등의 조도를 낮추고, 스팍이 책을 보는 소파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스팍, 키스 해 줘. 그리고 입술이 스쳤다. 끝.

총 서른 네번의 가열찬 도전과 실패를 겪고 난 지금 시점에서 커크는 약간 해탈해 있는 상태였다. 섹스하자고 돌직구를 던지는 건 지구 문화권에 익숙해져 있는 인간으로써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 벌칸은 폰파를 빼면 플라토닉인가보지. 문화다양성을 존중하는 것 밖에는 커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딱히 없었다. 서른 네 번이면 참 많이도 도전한 거였다. 그놈의 떡이 뭐라고 사람을 이렇게 곤란하게 만드냔 말이지. 커크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포기하자 그래. 스팍의 폰파 주기가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앞으로 7년 안에 한 번은 돌아오지 않겠는가. 그 때 이후로 다시 탄력을 받아서 시작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커크는 어색한 웃음을 평소의 밝은 웃음으로 되돌렸다.

"알았어. 밤 늦게 음식물 섭취는 자제 할게."

오른손으로 툭툭 입을 두드리려고 하다가 커크는 문득 손에 홍차 틴케이스가 들려있다는 걸 깨달았다. 까먹었다는 게 더 용할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홍차라. 리플리케이터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직접 우려야 하는, 티백도 아닌 홍차라.

"아 근데 음료수 정도는 괜찮지?"

"혹시 알코올 음료를 이야기 하시는 거라면,"

"니가 이거 줬는데 뭐하러. 아, 말 나온 김에 한 잔 하고 갈래?"

스팍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그리고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역시 밤에 뭔가를 먹는다는 발상이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커크는 조금 어색하게 다시 웃었다.

"아니 네가 밀크티를 추천해 준 건 고마운데, 아무래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맛을 모르겠단 말이지. 우리는 거라던가, 차 맛이라던가, 좀 평가 좀 해 줘 봐."

"-밀크티요."

스팍이 한 번 더 반복했다. 응. 커크는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떡은 못 쳐도 데이트는 해야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서러워서 애인이라고 할 수 있나. 스팍은 뒤돌아서 컴퓨터에 문을 열라고 명령을 내렸다. 음성지문을 인식한 컴퓨터가 전자 잠금을 해제했다. 들어와. 뒤에다 말을 흘리고 커크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런 말을 안 하면 또 안 들어올지도 모른다. 리플리케이터 앞의 탁자에 틴케이스를 내려두고 커크는 손가락을 꼽았다. 뒤에서 스팍의 목소리가 컴퓨터에게 문을 닫으라고 명령을 내리는 게 들렸다. 그러니까 필요한 게, 컵 두 개와 티 팟과 밀크 저그와 그리고-

"스팍, 차 우리려면 뭐가."

질문을 하면서 뒤를 돌아보는데. 탁자에 기댄 왼손 위에 서늘한 기운이 살풋 올라왔다. 아예 차가운 건 아니고, 인간의 체온보다 약 3~4도쯤 낮다는 벌칸의 손이 포개어져서. 턱선을 따라 닿을 듯 말 듯 사늘한 손가락이 스치고.

쪽, 하고 입술 위에 차가운 것이 눌렸다 떨어져 나갔다. 

커크의 눈이 조금 크게 뜨여졌다. 스팍? 커크는 저도 모르게 조금 쉰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짐. 귀에 테러를 하는 것 마냥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가 제임스의 애칭을 속삭이듯이 불렀다. 한번 더 말랑하고 약간 거칠지만 차가운 것이 눌렸다, 떨어지고. 그리고 당황으로 벌어진 입 깊숙히 사늘하고 축축한 것이 파고들어왔다. 정말로, 정말로 오랜만에 해 보는 딥키스였다. 몸이 천천히 돌아가 등허리가 테이블에 닿았다. 커크는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어 몸을 간신히 지지했지만 위에서 조금씩 누르는 힘때문에 종래에는 손이 아니라 팔꿈치로 지탱하는 모양이 되었다. 아니, 사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서 어쩔 수가 없었다. 허리 안쪽이 깊숙히 저려왔다. 스팍은, 언제 자기가 플라토닉이었냐는 듯이, 정말로 키스를 잘했다. 지구어로, 그래, 허리가 빠질 것 같았다.

쵹, 하고 입술이 떨어져서 커크는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헐떡거리는 소리가 잔뜩 나고 있어서 야하다, 고 생각했는데 잘 생각하니 자신의 입에서 나는 소리였다. 짐, 하고 스팍이 한 번 더 속삭였다. 잠깐, 잠깐. 커크가 얼굴 앞으로 손을 들었다.

"-싫으십니까?"

"아니, 싫다기 보다는."

싫을리가. 지금까지의 유혹 실패 누적 횟수만 봐도 결코 싫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두 팔 벌려서 환영할 일이지. 다만.

"갑자기 이러니까 좀 당황스러워서."

왜 갑자기 이렇게 동했는지 커크는 알 수가 없었다. 라면 먹고 가라고 하는 건 밤 늦게 먹는 건 안 좋다고 바로 받아치더니 내가 뭘 어쨌다고- 커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니까, 스팍이, 저 벌칸이 약간 눈썹을 들어 올렸다. 지금 저는 매우 당황했습니다 라고 광고하듯이.

"-스팍?"

"짐은, 외계 문화학도 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맞습니까? 하고 스팍이 다시 회복한 무표정으로 질문했다. 아니, 질문한 것 자체가 굉장히 당황했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 벌칸이 그런 걸 물어볼 필요가 무어가 있겠는가. 그들의 뛰어난 기억력은 어쩌고. 여튼 커크는 으응,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벌칸은 자당에 약하다는 사실도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기억하다 뿐이랴 이용해 보려다 장절하게 망하기까지 했었다. 하하, 하고 커크는 어색하게 웃었다.

"지구와 교류하고 나서 벌칸에서 가장 선호한 교류 품목은 차(tea)입니다. 명상에 도움이 되고, 사람을 진정시키는 데 효과적이며, 향이 좋아서 대부분의 차가 벌칸에서도 활발하게 유통되고 있습니다. 마시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이 또한 외계 문화학에서 가르치는 내용의 일부입니다."

"어, 응."

"그렇지만 딱 한가지 방법이 벌칸에서는 그렇게 유통되지 않습니다. 밀크티입니다."

왜인지 아시겠습니까? 오랜만에 들어보는 방식의 질문에 커크는 잠시 외계문화학을 듣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Fuck. 그 때 대답 잘못하면, 스팍은 아니었지만, 교관이 더럽게 쪼아댔던 거 같은데. 커크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 음 우유가 들어가서?"

"그 이유는 약 10% 정도 되겠군요."

아니라는 소리네. 잔소리의 폭풍이 휘몰아 칠 것 같아서 커크는 조금 마음의 준비를 했다. 다 끝마치지도 못했는데 스팍의 입이 열리는 것이 보여서 커크는 긴장했다.

"-밀크티에는 거의 필수적으로 자당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어... 어?"

설탕 넣어? 커크는 당혹스럽게 질문을 되돌렸다. 예. 스팍이 대답했다. 우유에서 나는 달갑지 않은 냄새를 없애 준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벌칸인은 순수한 설탕에 취한다. 최음 효과까지 있다. 그런데, 밀크티에는, 설탕을 넣는다.

"따라서 밀크티를 권하는 것은, 보통 연인끼리 성관계를 원할 때입니다."

예술적인 표현이므로, 사용한다고 해도 비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적나라한 표현에 커크는 얼굴이 조금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아, 이 망할 놈의 문화 다양성.

"문화 다양성을 고려하지 못한 저의 실책입니다. 방금 행동은 논리적이지 못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를."

커크는 두 손을 들어올려 스팍의 얼굴을 잡았다. 사과를, 까지 말하고 스팍의 말이 뚝 끊겼다. 손바닥 사이에 스팍의 얼굴을 끼우고 커크는 검지 손가락으로 스팍의 귀를 슬슬 쓸었다. 스팍의 얼굴이 아주 약간 녹색으로 변했다. 커크는 팔에 살짝 힘을 주어 스팍을 끌어당겼다. 콩, 하고 머리가 부딪혔다.

"안 불쾌했으니까 사과 할 거 없는데."

"-짐."

"그런데 그럼 왜 나한테 홍차를 선물해 준 거야?"

-그런 의미? 짐, 하고 스팍이 한 번 더 말하는 게 왠지 커크의 귀에는 당황스럽게 들려서 커크는 조금 웃었다. 커크는 스팍의 볼에서 슬슬 쓸어내리 듯이 손을 옮겼다. 목까지 닿을 듯 말 듯 쓸어내리고 천천히 뒷목을 넘어 팔을 스팍의 목에 걸었다. 그리고 피식, 한 번 더 웃었다.

"침대로 가실까요?"

입술이 성급하게 삼켜져서 자기야, 라는 말은 목구멍 안으로 스며들어버렸다.

-

"퇴근한다! 수고들 해!"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함장님!"

뒤에서 잔뜩 들리는 인사의 대답을 손짓으로 대신하니 고속 엘레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우둑우둑 목을 스트레칭 하다가 커크는 문득 입을 열었다.

"스팍."

"예 함장님."

"지난번에 선물해준 그 홍차."

찾아보니까 바닐라하고 초콜렛 가향이던데, 냄새가 엄청 달더라. 같이 엘레베이터에 탑승한 스팍이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그놈의 그렇습니까. 커크는 조금 한숨을 내쉬고 싶어지는 기분을 웃음으로 대신했다. 고속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이름도 그렇고 그거 일부러 고른 거야?"

"묵비권을 행사하겠습니다."

푸하하, 하고 커크는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벌칸은 거짓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못하는 거 아닐까. 엉뚱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침실문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커크는 가볍게 입을 열었다.

"스팍, 밀크티 먹고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