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D/스타트렉

[스팍커크] 나머지 선생

ㄷㄷㄷㄷ 2023. 1. 22. 13:30

2014년 글 백업입니다.

https://youtu.be/BkzVOKqTcBo

 

 

 

 

모티브입니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특정 인물, 사건, 단체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제임스. T. 커크. 자네의 함장 직위를 해제하겠네."

파이크 제독이 매우, 침통하게 말했다. 커크의 발 밑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

오랜만에 입는 아카데미 생도복은 뭣 같았다. 우주선에서 입는 노란색 함장복에 익숙해진 커크로써는 이가 갈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보고서, 그 놈의 보고서. 커크는 욕을 하고 싶었다. 살려준 게 누군데. 자신은 자신의 부함장을 살려야 했고, 그 선택이 옳았다고 믿었다. 부함장을 죽이느니 프라임 디렉티브를 어기는 게 옳다. 커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당장도 그 망할놈의 보고서에 욕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다면 정말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5초 후에 담당 교관을 만나서 인사를 해야하는 지금 상황으로써는 불가능했다. 담당 교관이라니, 빌어먹을. 정말로 오랜만에 듣는 단어였고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단어이기도 했다. 신입 교관인지 연구실 앞에 이름표도 없이 문은 밋밋한 색이었다. 커크는 이를 갈고 노크를 했다. 똑똑.

응답이 없었다. 커크는 한 번 더 노크했다. 대답이 없었다.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신참에, 누군지도 모르는데, 약속시간을 5분 남기고 자리에 없었다. 거지 같은 노릇이군. 안 그래도 매우 주관적인 감정으로 인해 그다지 높지 못했던 담당 교관에 대한 점수가 바닥을 찍었다. 혹시라도 연구실을 잘못 찾아 온 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연구실의 번호를 확인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열받는데 그냥 튀어버릴까. 5분 남기고서도 자리에 없다면 솔직히 제시간에 볼 수 없을 확률이 더 크다. 도망을 가고 찾아갔는데 안 계셨습니다, 라고 하면 딱히 거짓말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캡, 아니, 미스터 커크?"

-거기까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매우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옆을 돌아보자 아주 익숙한 얼굴이, 뾰족하게 올라선 귀와 감정을 거세해 버린 것 같은 표정이 서 있었다. 스팍. 커크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교관이 없어서. 너-"

"미팅 시간은 5분 후로 알고 있습니다만."

"왜 여기에, 뭐?"

스팍은 커크를 스치고 연구실 문을 열었다. 지문을 감지한 문이 부드럽게 열리고 스팍이 문을 밀어 연 채로 고개만 뒤로 돌렸다.

"들어오시죠."

"그러니까, 네가, 내 담당 교관이라고?"

"존칭을 써 주시기 바랍니다, 미스터 커크."

하, 하고 커크는 웃음을 흘렸다. 재미있는 상황이다. 대체 뭘 하고싶은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커크는 생각했다. 커크는 항복을 표시하듯이 두 손을 들고 고개를 조금 숙였다. 치켜뜬 눈과 웃는 얼굴은 정면에서도 또렷이 보일 것이었다.

"-그러죠, 미스터 스팍."

-

"미스터 커크의 전공과 마지막 학기 시간표를 보면. ...미스터 커크."

스팍이 하던 말을 끊는 것은 그다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럴만한 정말 이유가 있을 때나 하는 일이었으니까. 커크는 어, 예? 하고 조금 멍청하게 되물었다. 습관적으로 반말이 튀어나갈 뻔 한 이유도 있었다.

"집중해 주시겠습니까?"

낮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컴퓨터 패드를 가리키며 스팍이 말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아있는 스팍의 얼굴을 바라보다 커크는 조금 토해내듯이 말했다.

"...죄송하지만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비논리적이군요."

그거야 그렇겠지. 어련하시겠어. 커크는 속으로 조금 빈정거렸다. 현 상황에 감정적으로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누구라도 마찬가지겠지만 그것을 밖으로 티나게 드러낸다는 것은 저 녹색 피에게는 적용 되지 않을 게다. 그는 벌칸이니까. 집중해 주실 것을 다시 한 번 요청합니다. 미스터 커크의 향후 아카데미 생활에 필요한 부분이니까요. 스팍이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두 눈을 양손의 검지와 중지사이에 끼우고 중지로 미간을 꾹꾹 누르다 커크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스팍, 아니 교관님."

"왜 그러십니까 미스터 커크."

"저는 교관님이 이 자리에 있으신 게 뭔가 제게 말씀하실 것이 있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화에 집중해 주기를 조금 전부터 요청하고 있었습니다만."

커크는 다시 한 번 이를 악물었다. 이성, 논리, 그 놈의 이성. 커크는 다시 한 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아무런 말씀하실 게 없으십니까."

"미스터 커크의 아카데미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그런 거 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버린 커크는 큰 소리를 누르기 위해 이를 짓씹었다. 이에서 부드득, 하고 갈리는 소리가 나는 걸 막기 위해서도 커크는 사력을 다해야 했다.

"제가, 생도가 되고, 미스터 스팍이 교관이 된 이 상황에 대해 할 말씀이 없으시냐는 겁니다."

"-그 건에 대해서라면."

스팍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선 커크를 올려다 보았다. 그 편이 더 논리적이라고 생각한 걸까. 그럴 확률은 높았지만, 장담할 수는 없었다.

"말씀드렸다시피,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이 논리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 뿐입니까."

"벌칸은 거짓말을 하지 못합니다."

"사과 같은 건 생각도 안 해 봤다는 거야?"

벌컥 반말이 튀어나갔다. 아니, 사실, 존댓말이 더 어색했다. 스스럼 없이 나누던 수많은 대화, 결코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자신도 모르게 마음먹었던 그 찰나의 연속. 다만 상명하복이 아니라고 믿었던 관계에서 상명하복의 아래 위계로 떨어져내린, 그 순간의, 절망이.

"너는, 충분히 다른 함선의 1등 항해사로 발령 날 수 있었어. 내가 아니라도 파이크 제독님이라도 보장할 수 있는 일이야. 그런데, 굳이 내 담당 교관을 지원해 놓고, 할 말이 없어? 그럼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데?"

"...착각하시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미스터 커크."

스팍이 손을 천천히 모아 깍지를 꼈다. 착각? 커크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스팍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미스터 커크의 담당 교관 자리에 지원한 적이 없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벌칸은 거짓말을 하지 못합니다. 덧붙이는 말이 더할나위 없이 잔인했다.

-커크는 문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

"그래서! 그 놈이 뭐라고 했냐면!"

"그래. 벌칸은 거짓말을 하지 못합니다, 라고 했다고."

맞아, 스팍 이 개-새-. 발음을 다 끝맺지도 않고 커크가 벌컥 술잔을 들어올렸다. 사실 맥코이는 조금 질려있었다. 지금 이게 벌써 다섯번째 반복이었다. 전화를 받아서 나온 자신도 웃기긴 하지만 전화에서부터 혀가 꼬일 정도로 취해서 스팍 그 놈이 뭐라고 했냐면, 이란 말을 다섯번째 하고 있는 커크는 정신에 손상을 입은 게 아닐까 싶을 지경이었다. 감정적인 상처도 손상이라면 손상이겠지. 

"그니까말야, 내가, 왜 내 담당 교관을 지원했냐고 해떠니이."

"좀 주무시죠."

얼음이 들어있는 술잔을 테이블을 아주 기어다닐 기세인 얼굴에 문댔더니 차가! 하고 커크가 비명을 질렀다. 위이잉, 하고 진동소리가 났다. 통신기가 진동하는 소리에 맥코이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통신기를 꺼내들었다. 진동의 위치가 달랐다는 게 문제였다.

"엽때어?"

혀가 꼬이다 못해 발음을 씹고 있는 수준의 커크가 제 통신기에다 대고 생전 들어보지 못한 언어를 지껄이고 있었다. 외계어는 아니고 대강 영어의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알아듣기가 심각하게 곤란했다.

"와 씨, 교과니미자나! 교과님! 니미!"

갑작스레 낄낄 욕을 지껄인 커크가 통신을 뚝 끊고서는 통신기를 테이블 위에 던져 놓았다. 그리고는 테이블위에 엎드려서 웃는 것도 같고 우는 것도 같은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나는 시바 나는... '나는'이라는 단어를 제외하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혀를 꼬다가 커크는 곧 숨소리만 간신히 들리게 되었다. 급성 알콜 중독 같은 걸로 죽은 거 아니지? 가지고 있던 트라이코더로 가볍게 검사를 하는데 다시 진동이 울렸다. 테이블 위에 커크가 던져 놓은 통신기에서 울리고 있었다. 맥코이는 한숨을 쉬고는 통신기를 들어올렸다.

"USS 엔터프라이즈 호의 맥코이 박사입니다. 현 통신기의 주인은 스타플릿 아카데미의 제임스 T. 커크 생도입니다. 현재 의식 불명이므로 제가 대신 전달하겠습니다."

「닥터 맥코이?」

"-스팍 부함, 아니, 미스터 스팍?"

맥코이는 조금 혀를 씹을 뻔 했다. 그렇게 뛰쳐나간 상대한테 두 번씩이나 통신을 하다니 그런 감정적인 배려를 할 만한 인물이 아닌데?

「커크 생도가 의식 불명이라고요?」

"술을, 좀 지나치게 마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다음 미팅 날짜를 잡기 위해 일부러 일과가 끝날 시간에 맞추어 연락을 드렸는데 비논리적인 선택이었나 보군요. 내일은 일과 시간에 연락을 드리겠다고 전해주시겠습니까. 맥코이는 이마를 짚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럼 그렇지. 맥코이는, 미스터 스팍,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아카데미에서 커크 생도의 기숙사 위치를 알 수 없습니다. 마중 나와 주실 수 있으십니까?"

-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안내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운반도 그렇고요. 벌칸의 힘은 지구인의 그것보다 더 세다. 객관적인 사실이니 참으로 논리적이다. 게다가 아카데미 학생들의 기숙사 위치라니 어떤 의미에서는 기밀이니 내부 관계자가 움직인다. 이 또한 논리적이기 그지 없다. 벌칸에게서 이성을 빼면 남는 게 거의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맥코이는 가끔 여기에서 이질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이성적으로 감정을 설득한다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인걸까. 그것마저도 설득해 버린걸까.

"미스터 스팍."

"예?"

스팍이 뒤를 돌았다. 커크의 손이 스팍의 어깨에서 늘어뜨려져서 덜렁덜렁 흔들렸다. 잠꼬대도 없이 정말 잘도 자고 있었다. 아니, 기절한 걸지도. 어쨌든 아까는 멀쩡했으니까.

"왜 굳이 커크의 담당 교관이 되셨습니까?"

"제독님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던 것 뿐입니다."

-아무런, 거절 의사도 없이. 그저 '제안' 그 발언에 어떠한 논리도 끌어오지 않고. 최소한 맥코이가 보기엔 상당히 비논리적이어 보이는 선택이었다. 맥코이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떼었다.

"커크가, 관계가 재설정 된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런 것 같더군요."

"의도하셨습니까?"

스팍의 무표정이 조금 깨진 것 같았다. No. 간결하고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맥코이는 고개를 기울이며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그걸 듣고 싶은 것 같더군요."

"독특한 추리군요. 추론 과정을 알 수 있겠습니까."

"감정의 부분이라 설명이 어렵군요."

"비논리적이군요."

맥코이는 조금 웃었다. 이 부분은 확실히 인간인 것도 같았다. 타인의 상황을 완벽히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 자신의 상황과, 생각과, 감정을 일정부분 투영하는 것. 벌칸들이 규칙을 지키지 않는 인간들을 볼 때마다 하는 저 생각. 이해할 수 없다는 저 감정. 저 비논리가 약간은 인간의 그것과 닮아있는 것 같았다.

"지구에서는 인간 감정은 이성으로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어지지 않아서요. 벌칸과 같은 논리를 원하신다면 주기적인 케어가 필요하죠."

"그렇습니까."

내일부터 일과 외의 시간을 따로 잡아야겠군요. 스팍이 한숨쉬듯 중얼거렸다. 일과 외의 시간이라니. 맥코이는 픽, 비웃었다. 나머지 공부라니 정말 아카데미 생도때도 하지 않던 걸. 커크가 힘내기를 맥코이는 조금의 조소와 함께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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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리고."

 

맥코이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감정을 컨트롤을 조금 약화하신다면 커크를 좀 더 능숙하게 이해하게 되실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리스크가 너무 크군요."

"제 생각일 뿐입니다. 제언일 뿐이고요."

벌칸의 뜻은 벌칸이 선택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