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미도] 신의 잉크 방울
2014년 글 백업입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바보 같다. 미도스지 아키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름이라는 것은 언제고 대체 될 수 있는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는 자의적이다. 중학교 때 성적 1점을 위해 거의 모든 학생들이 외우는 문장이었다. 심지어 사람의 이름, 고유 명사마저도 이제는 바꾸기가 용이하다. 그런데도 남의 손목에 이름을 새기는 신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전 세계에 걸쳐 남의 이름을 미아 방지용 목걸이마냥 손목에 걸고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1%정도 밖에 되지 않는 미미한 숫자임에도 그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사람을 찾기 위해 헤매고, 만나기도하고, 엇갈리기도 하고, 그럼으로써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때로는 영영 만나지 못하기도 하며 그들은 살아갔다. 까만 이름은 그렇게 그들을 구속했다. 이름이 나타나는 시기도 매우 제멋대로라 70대의 노인의 손목에 새겨지기도 하고 이제 갓 태어난 아이의 손목에 새겨져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을 통해 사람들은 소울메이트가 그렇게 따스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재확인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중학생 아이들에겐 상당히 유용한 화젯거리였다. 어제 어디의 누구에게 이름이 생겨났다더라. 로맨틱한 것 같지 않냐. 누군가를 위해 태어났다는 것. 미도스지는 귓가에서 앵앵 울리는 그 말을 떨치며 자전거를 탔다. 속도를 올리면 바람이 소리를 씻어주었다.
이름이란 바보같았다. 저런 말을 들을 때마다 미도스지는 다시 생각했다. 자신의 매끈한 손목에 그는 항상 감사했다. 단지 누군가와 만나기 위해 태어나는 삶이란 얼마나 덧없는가. 누군가의 인생, 노력, 슬픔과 기쁨 모든 것이 다만 그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아픈가. 어머니의 이름은 자신의 손목에 새겨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세계의 반절이었다. 이름 같은 건 끼어들 여력조차 없었다. 미도스지는 자전거를 탔다. 바람이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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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한 풀 꺾인 공기는 습기가 덜했다. 까끌한 안감에도 불구하고 팔에 감겨들던 여름 셔츠와는 다르게 긴팔의 가을 셔츠는 매끈하게 팔을 빨아들였다. 날은 더운 편이었지만 곧 해가 지면 오히려 쌀쌀해지게 될 것이다. 서리가 내릴 날도 얼마 남지 않을 듯 싶었다. 한바퀴를 더 돌고 온 탓에 다른 부원들은 거의 다 옷을 입고 나가고 있었다. 먼저 가겠음다- 내일 보자. 별 거 아닌 말들이 툭툭 등에 부딪혀 튕겨나갔다. 어차피 자신을 향한 말도 아니었다.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그 말에 일일히 대답해 주고 있는 호인을 향한 것이었지.
샤워를 마치고 나와 머리가 덜 말랐는지 이시가키는 수건을 뒤집어쓰고 한 손으로 머리를 털며 다른 한 손으로 라커를 뒤지고 있었다.
이시가키는, 굳이 말하자면 귀찮은 축이었다. 지나치게 사람이 좋고, 덕분에 여기저기 신경을 많이 쓰며, 그런 주제에 딱 적당히 자전거를 잘 탔다. 버릴 수 있는 패조차 되지 않고.
"왜 그래 미도스지?"
"…아니."
아무것도. 손목에 아대를 끼우던 남자가 문득 말을 걸어와 미도스지는 고개를 돌렸다. 옷걸이에 걸어서 넣어둔 바지는 낮동안 앉아 있던 자국만 희미하게 남은 채 모든 주름이 풀려있었다. 테이핑 한 다리를 바지에 끼워 넣었다.
"혹시 어디 아파? 일교차가 심해졌는데 열 같은 거 나는 거 아니지?"
"꼴값."
대꾸를 하자 이시가키는 웃었다. 하하,소리까지 내면서. 아니라면 됐고. 수건을 말아서 스포츠 백에 집어넣고 남자는 팔에 셔츠를 꿰었다. 펄럭, 하고 셔츠가 흔들렸다. 의외로 탄탄한 편인 다리에 까만 천이 감겨서 미도스지는 가쿠란을 몸에 둘렀다. 감겨오는 천의 느낌이 유난히 인상깊었다.
가방을 들자 이시가키가 잠깐, 하고 미도스지를 불러 세웠다. 잠시 발을 멈추자 이시가키는 금세 미도스지를 따라붙었다. 가방도 제대로 잠기지 않았고 머리에는 아직 물기가 맺혀서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듯 보였다. 꼴값이야. 미도스지가 말하자 이시가키가 웃었다.
"금방 마르겠지 뭐."
"기분 나빠."
아직 다듬지를 못해서 이시가키의 머리는 앞으로 내려져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머리 모양에 약간 적응이 안 될 정도였다. 이시가키의 머리 모양은 항상 왁스나 젤을 발라서 거의 일정했고, 그건 집에 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가서 머리를 한 번 더 정리하는 것 같았다. 사실, 상관 없는 일이긴 했다. 아주 가끔, 둘이서 하교하게 될 때 이시가키는 머리를 내렸다. 의도했다기 보다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게 더 정확했다. 미도스지는 거의 기다리지 않았다.
"그렇게 별로인가."
이시가키가 또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기분 나빠.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자전거는 아까 묶어놓은 그대로 서 있었다. 안장에 앉자 철컹, 하는 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교복과 가방의 무게가 몸을 더 내리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건 아주 묵직하고, 묘한 기분이라, 미도스지는 그 기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무거운 것은 분명히 방해였으니까. 그것이 천 한 조각이라고 할 지언정. 잉크 한 방울이라고 할 지언정.
"미도스지?"
미도스지는 문득 자신이 이시가키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데나 둔 시선의 중간에 이시가키가 있었다. 아직 안장에 앉지 않고 어정쩡하게 핸들을 쥔 채로 이시가키가 서 있었다.
그러고보니, 아까 이시가키는 아대를 찼었다. 불필요하기 그지 없는 천 한 장. 쓸모 없고 쓸데 없고 무거운, 촘촘한 고무와 폴리에스테르의 연합체.
"이시가키 군은 그런 걸 차고서 이길 자신이 있는 거야?"
미도스지는 분명하게 힐난했다. 무게는 쓸모없고 가치 없다. 승리를 향해가는 걸림돌이다. 몇 번이고 혼잣말이나마 이야기를 했음에도 저 안이한 생각이란. 이시가키는 정말 딱, 적당한.
"아… 미안. 이건, 좀. 그게."
인간이었다. 인간이었는데. 딱, 하고 미도스지는 이를 부딪혔다. 뭐라고 이시가키가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귓바퀴에서 튕겨져나갔다.
"관둬. 꼴값."
"미, 도스지?"
발을 페달에 걸치고 있는 힘껏 밟았다. 자전거가 잠깐 휘청 흔들리다가 이내 중심을 잡았다. 아대는 무겁다. 다만 천쪼가리 하나의 무게가 아닌 여러겹 묵질한 실들의 무게였다. 그걸 뺄 수 없다고? 승리를 위한 순수함을 이시가키는 동경하지 않았던가?
아대가 손목을 감싼다는 것을 깨달은 건 아주 짧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손목. 신이 이름을 새기는 자리. 구속의 상징.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서 속눈썹까지 내렸다. 바람이 쌀쌀했다. 신의 잉크 방울은 그 무게가 무겁고 깊고, 닻과도 같아서. 다만 어느 한 사람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어서. 누군가의 길 앞에 서서 그를 기다리기 위한 사람이 되어서. 이시가키 코타로는 그를 위해서, 아대라는 것은, 그러니까.
거칠게 브레이크를 잡자 바퀴가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멈췄다. 집까지는 아직 조금 남아있지만, 이미 상당한 거리를 와 있었다. 당연히 그의 뒤에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미도스지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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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미도스지는 열이 났다. 부활동은 커녕 학교에 갈 수도 없을 정도의 고열이었다. 하루를 내리 앓으면서 미도스지의 눈 앞에는 환각처럼 몇 명의 얼굴과 몇 개의 사물이 오갔다. 엄마, 백모, 사촌동생, 이시가키, 자전거, 때이른 사과, 젓가락. 분명 몇 개는 환상이고 몇 개는 실제로 본 것이었겠지만 구분 할 수는 없었다.
고열이 조금 떨어진 것은 깊은 밤이 되어서였다. 베개와 이불이 축축해서 미도스지는 설핏 잠을 깨었다. 방안은 조용했고 커튼마저 꽁꽁 닫혀있어서 어두웠다. 아직 갈지 않은 여름 커튼새로 달빛만 조금 들어오고 있었다.
문득 손끝이 저려와서 미도스지는 손을 내려다 보았다. 손목에서 선명하게 빛(光)이 나고 있어서 미도스지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