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겁쟁이 페달

[이시미도] 자전거의 낙원

ㄷㄷㄷㄷ 2023. 1. 20. 13:11

2014년도 글 백업입니다.

 

※오드리 니페네거 저, 시간여행자의 아내 AU 혹은 패러디입니다.

※과거 날조가 있습니다.

 

이시가키 코타로, 셀 수 없음. 미도스지 아키라, 1.

나뭇잎이 묵직하게 흔들렸다. 물방울이 잎 위에서 구르고 구르다 툭, 하고 흙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툭, 툭, 투두둑. 빗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무가 많은 산길은 그래도 비를 조금 덜 맞는 편이다. 어쩌다 맞게 되면 한꺼번에 많이 맞기는 하지만, 나뭇잎이 그래도 우산역할을 해 주어서 확실히 덜 맞는 편이다. 끼익, 끼익. 약간이지만 물을 맞은 자전거가 쇳소리를 냈다. 미도스지 아키라는 끈적하게 달라붙는 오금을 억지로 펴면서 페달을 밟았다. 더운데다가 비까지 와서 습한 탓에 숨을 쉬어도 쉰 것 같지가 않았다. 목구멍까지 턱턱 차오르는 숨 탓에 할딱할딱 이상한 소리가 났다. 폐가 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질척거리는 흙바닥 때문에 앞으로 나가는 것도 시원치 않았다. 맞는 물 양이 적다뿐이지 소리만 들으면 어디에선가 폭포가 쏟아지고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나올 때는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였다 보니 미도스지가 입은 것은 기껏해야 반바지와 런닝 셔츠 한 장 뿐이었다. 운동화 안에 신은 면양말은 지나치게 질척거려 이미 옷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오늘은 꼭 가야만 했다. 자전거를 타고 산을 넘어 엄마를 만나러 가면 엄마는 잠들어 있기도 하고, 깨어있기도 했다. 사실 잠들어 있는 날이 많았다. 엄마가 맞는 약은 독했고, 진통제도 섞여있었다. 해열제를 먹으면 졸리지? 그런 거야. 숙모가 해 주는 말이 옳았다. 중간에 엄마가 깨어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쯤, 엄마는 검사를 받았다. 약 효과가 미치는 영향을 줄이려면, 의사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엄마가 오전에 검사를 받으면 엄마는 깨어있었다. 오늘이 그 날이었다. 갈 수 밖에 없었다. 미도스지는 있는 힘껏 페달을 밟았다.

바퀴가 헛돌았다.

묵직하게 밟히는 페달의 느낌이 아닌 헐겁게 한 바퀴 도는 게 다리를 통해 전해졌다. 앞바퀴가 진흙탕에 빠진 모양이었다. 안 돼. 생각하는 순간 핸들이 뒤틀렸다. 바퀴가 제멋대로 길을 비틀어 균형이 어그러졌다. 자전거가 다리 사이에서 벗어났다. 귀 바로 옆에서 철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릎과 팔꿈치가 아파왔다. 눈에 흙탕물이 들어갔는지 뜰 수가 없었다. 미도스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뜨지 못한 채로 땅을 더듬거렸다. 자전거, 가. 어디에-

“미도스지?”

먼 곳에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서 미도스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아직 뜨지 못한 눈에서 눈물이 조금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목소리는 낯설었다. 미도스지, 미도스지! 낮은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그와 함께 철퍽이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왔다. 눈을 깜박이자 뿌옇던 시야가 점점 돌아왔다. 툭, 하고 머리 위로 굵은 빗방울이 몇 방울 떨어졌다. 온 턱이 무언가 뜨끈한 것에 감싸여진 채로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돌아온 시야로 낯선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미도스지 괜찮아? 낙차 한 거야? 다친 데는?”

남자가 속사포로 질문은 쏟아내는 듯하더니 황급히 미도스지의 다리와 팔을 살폈다. 다친 데가 있기는 했지만 상처는 작은 편이었다. 남자는 그걸 보고 한참을 안타까워했다. 남자의 옷차림은 기이했다. 기장이 짧은 환자복, 흙탕물로 한껏 더러워진 옷과 다르게 깔끔하게 넘겨진 머리, 신발은 다 떨어져가는 슬리퍼였다. 비가 오는 걸 알았는지 커다란 까만색 우산을 쓰고 있었지만 우산은 살이 두어 개 쯤 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알았다. 미도스지는 그걸 순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자신은 아직 어린 아이였고, 인간 관계가 넓은 편도 아니었다. 심지어 남자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이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자신을 알아보았으며 자신을 불렀을까. 제일 먼저 생각 나는 것은, 누가 뭐라 해도, 가장 많이 받은 교육이었다. 누가 사탕을 준다고 해도 따라가면 안 돼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누가 하겠어, 하고 반에 있는 스물 한 명 전부가 한 귀로 듣고 흘리는 선생님의 잔소리지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 역시 그것이었다. 누가 사탕을 준다고 해도 따라가면 안 돼요. 미도스지는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다리가.”

남자가 황망히 쳐다보다 미도스지의 왼발을 잡아챘다. 왼쪽 발을 유심히 지켜보던 남자는 꾹 하고 발목을 눌렀다. 미도스지가 푸드득 튀어올랐다.

“아파?”

미도스지는 고개를 저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하게 접지른 건 아닌 것 같아. 다행이다.”

붓지도 않았으니까 조금 있으면 나을 거야. 남자가 미소지었다. 그 미소는 완연한 안도를 품고 있었다. 비록 순식간에 어색해지기는 했지만.

툭, 툭툭. 빗방울이 몇 방울 더 떨어져 내려 정수리를 적셨다. 남자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어깨에 걸쳐져 있던 우산을 미도스지에게 씌워주었다. 지나치게 큰 우산이라 시야가 가로 막혔다. 미도스지는 어색하게 우산을 들었다. 남자가 비를 맞으면서 저만치 쓰러져 있는 데 로사를 집어들었다.

“그… 미도스지, 군은 어머니 보러 가는 중이야?”

남자가 다시금 자신에 대해 물었다. 미도스지는 우산을 꼭 쥐었다. 어머니의 존재마저 알고 있다는 건 무슨 뜻일까. 물론 모든 아이에게는 어머니가 있겠지만, 보러 간다는 것은 그리 많은 아이에게 있는 일이 아니다. 미도스지의 뇌가 팽팽 돌았다. 남자의 발소리가 바로 앞까지 다시 왔다. 망가야 할까. 미도스지는 생각했다. 우산이 공중에 띄워졌다. 미도스지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 다음은- 따라와, 인 걸까.

“업혀.”

예상이 빗나갔다. 업혀.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뒤돌아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미도스지는 조금 당황해서 남자를 쳐다보았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자 남자가 고개만 비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어, 음. 잠시 이상한 소리를 흘리던 남자가 다시 말했다.

“고개, 하나만 더 넘으면 병원이잖아. 그 다리로는 돌아가는 것도 힘들테니까… 병원까지 나 우산 좀 씌워주면 안 될까?”

자전거도 끌고 가려면, 손이 없는데. 남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병원이 당장 코앞이었다. 산길에서 병원까지는 채 2분도 걸리지 않는데 주택이 밀집해 있는 골목이라 변변히 차가 들어올 만한 넓이도 되지 않는 길 뿐이었다. 사람도 많이 다닌다. 이 길에서 주택가까지는 외길이나 다름없었다. 미도스지는 주먹을 꼭 쥐었다. 그리고 왼발을 절뚝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의 등은 의외로 넓었다.

-

아이를 하나 업고 자전거도 끌고 가다 보니 남자가 걷는 속도는 느렸다. 그래도 꾸준히 앞으로 나가고 있어서 미도스지는 별 말 하지 않았다. 남자도 입을 열지 않는 터라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유일했다. 남자의 등에 금세 땀이 차서 끈적거리게 되었지만 그래도 남자는 말이 없었다.

고개는 금세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꼭대기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높이의 고개였지만 그래도 꼭대기의 경치는 볼 만했다. 금방 내려가게 되기는 했지만. 남자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저기, 저 병원… 2층, 이었던가.”

어머님. 남자가 묘한 어조로 말을 마무리했다. 미도스지는 침묵했다. 더 많은 것을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남자의 지식이 매우 정확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더 이야기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는 사람이 아니다. 그건 매우 무서운 사실이었다. 엄마의 친구인가, 생각해봤지만, 이런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미도스지는 다시 입술을 사려 물었다. 끼익 끼익, 자전거가 울었다. 빗방울이 우산을 두드렸다. 남자가 코로 시야를 가리는 우산을 약간 올려서 미도스지는 우산을 고쳐잡았다.

“…있지 아키라.”

남자가 문득 이름을 불러서 미도스지는 화들짝 놀랐다. 등을 통해 전해진 건지 남자가 하하 웃었다. 처음 듣는 웃음이었다. 진동이 배를 타고 울려서 미도스지는 소름이 돋았다.

“음, 긴장하는 건 이해 할 것 같지만… 앞으로 많이, 보게 될 거야.”

남자가 웃음을 가라앉히고 이야기 했다. 둘은 거의 산의 발치에 와 있었다. 주택가가 거의 눈 앞에 있었다. 나무가 사라지자 비가 폭포수처럼 퍼부었다. 우산 밖에 있는 자전거와 남자의 오른손이 빗줄기에 사정없이 얻어맞았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다다음주… 한, 2시쯤? 병원에서 보게 될 거고, 그 다음 주 한 시, 아니다. 한 세 시 정도에, 또 병원에서 보게 될 거야.”

너나 나나, 의도 하는 바는 아니겠지만. 그렇게 되면 아저씨라고 불러. 남자가 조금 웃었다. 우산의 진동 때문에 그렇게 쉽사리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가벼운 흔들림이 있었다. 미도스지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한 말이었다. 다다음주 두 시와 그 다음 주 세 시. 미도스지는 다시 한 번 뇌까렸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주택가 안으로 접어들고 남자가 발을 멈췄다. Y자 모양의 갈림길에서 사람들은 많이 헤매곤 했다. 미도스지는 그, 하고 입을 떼었다.

“왼쪽…”

“음, 그쪽 보다는 이 쪽이 더 빠를 것 같은데.”

잠깐만, 미도스지가 입을 열어 말리려 했지만 남자는 오른쪽으로 발을 옮겼다. 막판에 와서 정말 납치를 당하는 걸까. 문득 생각하고 우산을 꼭 쥐었다. 손에 빠듯하게 잡히는 우산 손잡이는 플라스틱이었다. 미도스지의 손이 덜덜 떨렸다. 문득, 남자가 발을 멈췄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겠다.”

그래도 괜찮겠지?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조금 흔들리는 웃음에 미도스지는 당황했다. 걸어가라니?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납치, 가 아니었나? 다리도 이제 조금 걸어도 괜찮을 거고, 같은 태평한 소리를 하며 남자는 미도스지를 길에 내려주었다. 콘크리트 바닥을 딛는 감각이 단단해서 기묘했다. 남자가 데 로사를 손에 쥐여주었다.

“다음부터는 비 올 때 산에서 자전거 타는 건 조심하고.”

남자가 웃었다. 미도스지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알 수 없는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음, 옷은, 정문에서 주웠다고 하면 대충 통할 것 같고… 신발은 그냥 버리고 가도 돼. 우산도. 쓰레기장에서 주운 거니까.”

“뭐?”

황당하게 되묻자 남자가 다시 웃었다. 비를 맞으면서도 남자는 굉장히 신나보였다. 남자의 환자복이 물에 빤 걸레처럼 되어 가는데도 남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미도스지의 팔을 잡아서 오른쪽을 보게 했다.

“자, 미도스지한테만 특별히, 마법을 보여줄게. 셋 셀 때까지 뒤 돌면 안 돼?”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입을 열려고 하는데 남자의 손에 억지로 고개가 돌려져 앞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하나.”

병원이 있었다. 왼쪽 길로 가면 족히 2분은 전속력으로 자전거를 타야 정문이 나타나는데. 미도스지는 할 말을 잃었다. 오른쪽길이 지름길이라는 건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사실이었다. 알 수도 없었지만.

“둘.”

툭, 툭툭. 비 쏟아지는 소리가 점차 옅어져갔다. 마법? 마법이라고? 이런 게? 미도스지는 눈을 깜박였다. 해가 들고 있었다. 그냥 지름길인 거잖아- 일주일에 일곱 번을 드나드는 자신조차 모르는 그런 지름길.

“셋.”

미도스지는 뒤를 돌았다. 환자복과 슬리퍼 두 짝이 빨래마냥 길에 널브러져 있었다. 손에 힘이 풀렸다. 철컹, 툭. 우산과 자전거가 콘크리트 위에 쓰려졌다. 비가 그쳐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