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미도] 네가 만나러 오는 길
2014년 글 백업입니다.
※오드리 니페네거 저, 시간여행자의 아내 의 AU, 혹은 패러디입니다.
※과거 날조가 있습니다.
이시가키 코타로, 셀 수 없음. 미도스지 아키라, 9.
틱, 탁, 틱, 탁. 저녁을 넘기고 나면 별채는 고요해진다. 사람도 없고, 유일한 사람도 말이 없다. 기껏 해봐야 시계소리나 종이를 긁는 펜 소리 정도만이 어색하게 침묵을 탈출하고자 한다. 미도스지 아키라는 이런 침묵에 익숙해진지 이미 오래였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기도 전에 방은 이미 별채로 독립되었다. 아예 건물이 다르다보니 여동생이 놀러오는 시간, 밥 먹으러 가는 시간, 대청소 같은 몇 가지 상황을 제외하면 사람이 들어오는 것부터가 역으로 익숙치 않다고 하는 게 옳았다. 별채는 영원할 것 같은 고요 속에 있기 다반사였다. 항상 소리는 멀리서부터 들렸다. 미도스지는 그게 편했다. 익숙해진 거라고 봐도 별 차이는 없었다.
샤프를 책 위에 내려놓고 미도스지는 마른 세수를 했다. 탁상시계는 아홉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이 그렇게 깊은 편은 아니었지만 시험이 끝난 후에 다음 시험을 대비 해서 계속 공부를 해서 그런지 눈이 뻑뻑했다. 장학금. 미도스지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할 수 있는 건 해 두는 게 좋았다. 편차치 높은 학교에 장학금을 타서 들어가는 게 현재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편 중 하나였다. 다시 샤프를 들었다.
쿵, 하고 장지문 바깥 쪽에서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복도에 뭔가 두었던가? 그런 기억은 없었다. 미도스지는 정확히 방만을 사용했다. 복도에 둘 만한 물건은 두지 않았다. 그럼 누가 들어온 걸까. 미도스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푹 절은 기침 소리가 문득 들려와 미도스지는 좁은 방을 달려 문을 열어젖혔다. 나체의 남자가 복도에 쓰러져 있었다. 이시가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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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미도스지 집이었구나.”
큰 실례 할 뻔 했네. 하하. 이시가키는 어색하게 웃었다. 무표정하게 쳐다보자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 남자는 복도 바닥에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매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봤자 역시 맨몸으로 떨어졌는지라 대강 미도스지의 헐렁한 트레이닝 복과 티셔츠를 걸치고 있었지만. 찰칵, 찰칵. 괜히 샤프를 두어번 눌렀다.
“그래서 또 어디서 온거야.”
“31살에서.”
남자는 항상 저 먼 미래에서 여기까지 떨어져 내렸다. 아마 지금의 또 다른 나는 10대 중반일걸. 이시가키는 그렇개 말했었다. 그 때 같이 20대에서 30대로 막 꺾이고 있다고 제 입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그건 그 때였고, 지금은 또 서른 살이 넘어 있었다. 대답이 없자 남자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점심시간이어서 점심 먹고 커피도 한 잔 사서 사무실로 올라 가서 자리에 앉은 거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누가 그런 거 알고 싶대 이 자쿠야.”
오랜만에 듣네, 그거. 남자가 웃었다. 이 남자가 어떤 자신을 얼마 전에 만났을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이시가키를 만날 때마다 미도스지의 시간 개념은 뒤죽박죽 엉켜버리곤 했다. 의자에 앉은 채로 빙글 뒤를 돌아 책상 위에 얹힌 노트와 교과서를 다시 보았다.
이 직전의 만남은, 미도스지의 기억으로는 시내에서였다. 한낮이었다. 길을 가고 있는데 문득 이시가키가 미도스지를 불렀다. 이시가키는 싸구려 흰 티셔츠와 청바지라는 나이대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이시가키는 미도스지에게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한 캔을 뽑아주었고 간단한 잡담을 한 후에 둘은 헤어졌다. 나타난 것도 가는 것도 보지 못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이시가키가 산 음료수 캔을 묘하게 바라보았던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그 때의 이시가키가 몇 살이었는지는 묻지 못했다. 항상 떨어져 내릴 때는 알몸이었으므로 그 옷과 돈이 어디서 났는지는 물을 수 없었다. 남자는 자물쇠 따기와 소매치기에 아주 능란했다. 그 사실을 남자는 여섯 번째인가 만났을 때 서글픈 듯이 알려주었다.
“이 교복 미도스지 거야?”
문득 목소리가 들려 미도스지는 뒤를 돌아보았다. 샤프는 내려놓은 자리에 멈춰 있었다.
“중학교 교복이야?”
“…그래.”
남자는 침대에 걸터앉아 벽 한 켠에 걸린 까만 교복을 보며 그래, 중학생이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가 아주 쓸쓸하게 느껴졌다.
“지금 몇 살… 언제인지 알려줄 수 있을까?”
“그 말투 꼴값이야.”
미도스지는 흘끗 탁상시계를 바라보고 시계의 유리면이 바닥으로 가도록 엎었다.
“12월 17일, 중3이고… 밤 11시 30분 쯤.”
“아 이런, 민폐였네.”
“알면 됐어 자쿠.”
미도스지는 다시 책상을 앞에 뒀다. 내일 시험은 수학이었다. 자신이 없는 과목은 아니었지만 한 글자라도 더 보는 게 유리한 것은 어느 과목이라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샤프를 고쳐잡았다.
“그럼 이제 좀 있으면 고등학교에 가겠네.”
“…시끄러워.”
“나를 만나는구나.”
툭. 길게 뽑힌 샤프심이 부러졌다.
이시가키가 처음으로, 미도스지의 미래에 대해 선언했다. 근 열 번 가까이 만나면서 이시가키는 단 한 번도 미도스지의 미래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갑작스레.
“그래?”
그래서 미도스지는 모른 척 하기로 했다. 말의 의미를, 어떤 분명한 함의를. 특유의 영리한 머리로 느끼면서도 외면했다.
“있잖아. …아키라.”
안타깝게도 이시가키는 그렇게 둘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찰칵찰칵. 샤프 꼭지를 눌렀다. 틱, 탁, 틱, 탁. 엎어놓은 탁상시계에서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미도스지는 거기에 집중했다.
“어쩌면 다음에 만날 때 나는 너를 완전히 잊어버렸을지도 몰라.”
그리고 소리가 멎었다. …이시가키는 마치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는 듯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첫 번째 만났을 때, 이시가키는 자신의 모든 것을 꿰다시피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 자신이 넘어오는 산길, 그 산길에서 병원까지 오는 자신이 모르던 지름길, 어머니 병실의 위치, 자신의 집. 악의가 전혀 없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소름이 돋도록 무서울 정도였어서 아직도 말 한 마디까지 기억이 났다. 지정해 준 장소로 지정한 시간에 나올 때에는 그 무서움을 못 이겨 억지로 나왔던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두번째의 그는 자신의 이름만을 간신히 기억하는 백치와도 같았다. 병원의 지리를 몰라 길을 잃어 헤메고 있던 것을 현관까지 끌어다 놓자 그는 곧 사라졌다. 그리고 세번째. 첫번째에서 마지막으로 지정해 준 세번째 만남. 그는 완전히 자신을 잊고 있었다. 만났다는 그 사실조차.
그에게는 단순히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일 뿐일지도 모른다. 시간을 제멋대로 건너뛰는 이시가키에게 있어서 자신의 과거와 그의 과거가 일치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시간은 등식이 아니다. 최소한 그의 시간은.
그러나 당신이 내 대신 울어준 흔적이 그렇게 아프게 남아있는데. 미안하다고 몇 번씩이나 울며 사과한 그 아픔이 영문을 모르는채로 남아있는데.
‘그러고보니.’
자판기에서 뽑힌 음료수는 포카리였다.
‘어머니는 쾌차하셨어?’
당신은 결국 나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리고 아마 너를 싫어할지도 몰라.”
곧 만나게 된다면 고등학생 때 인건가. 그리고 또한 졸업하게 되겠지. 떨어지게 된다. 설령 동급생이라고 해도 3년이다. 그리고 영영 헤어지게 된다. 어쩌다 먼 미래에 마주치게 된다고 하여도 그 때의 이시가키가 자신을 기억하는, 시간을 넘고 돌아온 그 시점의 이시가키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퇴색한 기억의 한 편린으로 남아, 아 너 누구 맞지, 하는 그 정도의 기억으로나 남게 될 것이 당연하다.
결국 이시가키는 미도스지를 잊는다. 너무나 자명한 명제였다.
“그래도 있지, 미도스지.”
상처를 받는 것은 자신 뿐이었다. 미도스지는 샤프를 던졌다. 이시가키가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있지 아키라.”
이시가키가 한 번 더 반복했다. 미도스지는 뒤를 돌아보았다.
“만나러 와 주지 않을래?”
털썩. 침대 위에 티셔츠가 무너져내렸다.
-
이시가키 코타로, 1. 미도스지 아키라, 잊어버림.
"근데 이시양. 너 오늘 국어 시간에는 어디 갔다온 거야?"
미즈타와 야마구치를 야스 선배에게 보내고 나서 이하라가 이시가키에게 물었다. 어딜 다녀왔었지. 이시가키는 생각했다. 국어시간이면, 그래.
“좀 어지러워서. 양호실에 다녀왔어.”
-겨울 한 중간으로 떨어졌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시간은 밤이었다. 인적도 드물었고 열려있는 가게는 편의점 정도 뿐이었다. 술에 취해 널브러진 아저씨의 지갑을 슬쩍해서 몇 천엔을 빼낸 후에 다시 지갑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경찰에 전화를 걸고 자리를 떴다. 옷가게의 자물쇠가 구식이어서 열쇠를 따기는 편했다. 옷을 갖춰입고 거리를 배회하다 24시간 하는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 코코아로 몸을 녹였다. 그러다 헛구역질이 나서 화장실로 달려갔고, 정신을 차리니 수업시간은 30분가량 지나있었다. 그 이후에는 정말 양호실에 가 있었으니, 완전히 거짓말을 한 셈은 아니다.
“너무 부활을 열심히 해서 뻗은 거야?”
“에이스가 되고 나서 이시양은 가장 열심히 연습하니까.”
“지나치게 열심히 한 거군.”
츠지와 이하라가 하는 말을 듣고 있다보니 어색한 웃음이 나왔다. 그게, 하며 뭐라고 말이라도 꺼낼 수 있다면 좋을텐데. 거짓말은 항상 끝 맛이 좋지 못했다. 진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끝내 잔혹하다.
“야스 선배도 그랬지만 졸업한 선배들도 그랬지. 이시가키는 좋은 팀을 만들 거라고.”
“아… 아니, 저기, 그건 그냥 하는 말이지!”
이시가키가 팀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고작 해야 참는 것 뿐이었다. 참고, 참고, 참고 또 참아서 과거나 미래로 떨어지지 않는 것. 다리가 떨어지도록 페달을 밟고 있으면 그나마 현재에 못박혀 있을 수 있었다. 팀이라는 것에 대해 이시가키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정도였다. 겨우 그것 뿐이었다.
“…나는 모두가 서로를 생각해 주는, 인내할 수 있는 팀으로 만들어가고 싶어.”
부스럭.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미즈타와 야마구치가 돌아온 걸까. 돌아보자 처음 보는 얼굴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실례합니다.”
웃고 있는 남자는 흔들흔들, 지긍지긍 걸어왔다. 오 1학년인가? 신입생? 옆에서 이하라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벌쭉 웃고 있었다. 손에는 슈즈와 헬멧을 들고 있었다. 아니, 그것 외에는 들고 있지 않았다.
“-참고로 나는 3학년 스프린터, 이쪽은.”
이하라의 말이 뚝 끊겼다. 신입생이 이하라의 팔을 쳐냈다. 그것도 아주, 무례하고 큰 동작으로. 신입생은 천천히,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눈 옆으로 치켜들었다.
눈이 마주친 것 같다고 이시가키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눈이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 같다고-
“….에이스.”
이시가키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넘버 1은, 내가 단다.”
착각은, 아주 짧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