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미도] 너를 만나러 가는 길
2014년도 글 백업입니다.
◎오드리 니페네거 저, 시간여행자의 아내 의 AU, 혹은 패러디 입니다.
이시가키 코타로, 셀 수 없음. 미도스지 아키라, 3.
머리 꼭지가 비틀리는 듯 하더니 시야가 출렁, 하고 흔들렸다. 파도에 흔들리는 쪽배에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정신을 차려보니 풀밭 한가운데에다 위액을 토해내고 있었다. 숨을 고르기 위해 헐떡이는 숨을 내리누르자 속이 다시 한 번 뒤집혔다. 비록 나오는 건 위액 밖에는 없었지만, 그래서 몇 배로 더 괴로웠다.
직전에 뭘 하고 있었지. 그래, 그 때는 아침이었다. 새벽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몰랐다. 겨울 밤은 길다. 출근을 위해 둘이 일어나는 시간에는 아직 해가 뜨지 않는다. 몽롱한 머리로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비척비척 욕실이 비었다고 이야기 하고 수건으로 물기를 털면서 안방으로 들어가려는데… 거기에서 기억이 끊겼다. 그 시점에 그 시간에서 튕겨져 나온듯 싶었다. 그 증거로, 그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맨몸일 수 밖에 없는데도 춥지가 않았다. 토하고 있는 통에 오한이 나서 상대적으로 춥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날이 상당히 따뜻한 편이었다. -그렇게 느낀 건 사실 다 토하고 나서의 일이었지만.
공복이라 처음부터 비기는 했지만, 더 이상 토할 것도 없는 위가 뒤틀리다 가라 앉았다. 쓰러지다시피 몸을 풀밭 위로 떨궜다. 지금이 언제지? 여기는 어디일까? 본능처럼 머릿속을 단어가 헤집고 갔다. 공복에 낮은 혈당이라 생각나는 것을 행동으로 다 옮길 수는 없었다. 이대로 한 몇 분 기다리면 다시 옮겨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늘쪽에 있는 손으로 눈꺼풀 위에서 눈을 눌렀다.
자신이 있는 장소는 안타깝지만 야외였다. 대부분 시간여행을 왔을 때 그러하듯이. 땅바닥이 잔디이고 머리 위로 보이는 게 하늘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항상 그게 뼈에 사무쳤다. 뭐어, 거주지를 침입한 변태 취급을 받는 것보다야 나을지도 모른다. 있는 위치는 그늘… 그 중에서도 건물의 그늘이었다. 사람들이 시선을 주지 않을만한 구석이라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다만 그러다보니 이 위치에서는 움직일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지금 날이 밝은 걸로 보아 사람들이 한창 돌아다니고 있을텐데, 체포 당하는 건 사양이었다.
부지는 의외로 넓었다. 일반 가정집이 아니라 큰 건물인 모양이었다. 시청? 대학교? 그것보다 큰 게 뭐가 있지? 아니 그나저나 언제쯤 돌아가게 되는 거지? 어색하게 무릎을 끌어앉고 쪼그려 앉으려던 참이었다. 철컹, 하고 옆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어리벙벙하게 서 있는 남자 아이 하나. 그 옆에 쓰러져 있는 자전거 하나. 손동작으로 봤을 때 방금 전까지 자전거를 잡고 있던 것으로 보였다. 남자아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것에 따라 자신의 얼굴도 같이 질려가는 게 느껴졌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아이의 손목을 틀어쥐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공포에 질린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 보다 이시가키는 손를 놓고 한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가장 깊은 응달까지 들어가자 아이도 천천히 뒤로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다급하게 아이를 불렀다.
“저… 저기!”
아이의 뒷걸음질이 문득 멎었다. 그래도 얼굴이 새하얀 건 별로 다르지 않았다.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옷이나, 아니, 담요 한 장 만이라도… 부탁해도 될까?”
-
변태가 아니라는 것은 간접적으로 알렸으니 아마 아이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요즘 아이들은 영리하고 똑똑하며, 의외로 세상물도 많이 들었다. 신고나 안 되면 다행이려나. 아주 약간의 시간을 번 셈이었다. 그 사이에 사라질 수 있으면 굉장히 다행인 일이고, 신고 된다면 그건 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기대는 좋은 의미로 배신을 당했다. 아이는 얄팍하지만 몸을 가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큰 하늘색 담요를 한 장 가지고 그늘로 돌아와 주었다. 다만 표정을 보아할 때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기 보다는 패닉에서 벗어나지 못해 대강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인 듯 했다. 몸에 담요를 둘둘 감고 어색하게 쪼그려 앉았다. 아이는 혼란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건지 자신의 옆에 비슷한 자세로 쪼그려 앉았다. 눅눅한 바람이 그늘을 스쳤다.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담요는 꽤 오래 된 것인 듯 새겨져 있던 문구가 많이 지워져 있었다. 흐릿하게 새겨진 단어 중 알아 볼 수 있는 건 한 단어 뿐이었다. 병원. 담요에서도 희미하게 약품냄새가 났다. 상당히 크기가 큰 병원인 모양이었다.
문득 아이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 세 시라고 하지 않았어?”
당황스러웠다. 이 아이는 아는 걸까. 이 아이를 또 어느 시간에 어떻게 만났던 걸까. 아이에게 무슨 말을 건넸던 걸까. 이 아이에게 무엇으로 남았던 걸까. 아이는 세운 무릎 위에 깡마른 팔짱을 얹고 그 사이에 코를 묻고 있었다. 담요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아저씨가 3시에 볼 수 있을 거라고 해서 일부러 1시까지 왔어. 엄마도 봐야하고. 세 시면 산책시간이니까 엄마가 아저씨 보고 놀라면 안 돼서. 아저씨는 시간 약속도 못 지키는 거야?”
“내가 그렇게 말했어?”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팔짱 안으로 고개를 묻었다. 성급한 질문이었다. 아이가 이해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 어느 한 점에서 연이 잇닿아 미래로 이어간다. 그러나 자신의 실은 중간이 도막나 과거에 잇닿아 있거나 중간이 접혀 있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구구절절 설명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아이가 알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고, 자신이 그를 모르는 것이리라고는 믿을 수도 없을 거다.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럴 수 밖에 없는 일도 있다.
“미안.”
어색하게 사과를 꺼냈다. 몸을 둘둘 감은 담요를 괜시리 들척였다. 얇은 담요로 맨몸을 좀 더 감싸느라 풀잎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됐어.”
다리와 몸 사이의 좁은 공간을 울려 아이는 말했다. 조금 웅얼거리도록 들리기는 했지만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그 대답이 거절로 들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말을 할, 그러니까 말실수를 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아이는 말을 이었다. 아이는 다시 눈을 무릎 바깥을 향했다.
“두 번째 봤을 때도 그랬어. 처음 봤을 땐 다 알다가… 두번째 보니까 이름밖에 모르더라. 그 때는 좀 그랬지만. 지금은 됐어.”
계속 그랬으니까. 길게 말하는 게 어색한지 아이는 숨을 돌렸다. 폐가 답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여기에 몇 번을 돌아와 이 아이를 보았다. 아마도 그것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미래인 듯 싶었다. 미래를 기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엄마 보러 갈 거야.”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손을 뻗어 아이의 손을 잡았다.
“저, 있지.”
“…..”
“이름, 알려줄래?”
아이는 뒤를 돌았다. 아이는 더할나위 없이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목소리가 떨렸던건 자신의 착각이었던 걸-
“미도스지.”
까. 문득 두통이 엄습해 왔다. 미도스지. 이름 알려 줄래. 미도스지. 미도스지. 머릿속에서 이름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니까 아이는, 너는-
“가야 돼.”
아이는 아직도 잡혀 있는 자신의 손을 보며 말했다.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두통에 눈물이 나는데 웃음이 나왔다. 웃으면서 우는 자신을 아이는 당황스럽게 쳐다보았다. 속이 뒤집히는 것 같은데 억지로, 어렵게 입을 떼었다.
“담요.”
시야가 뒤틀리는 듯 해서-
“담요 가져가, 아키라.”
눈을 감자 암흑이 감싸안았다.
-
이시가키 코타로, 셀 수 없음. 미도스지 아키라, 잊어버림.
양 뺨에 차갑운 게 닿아서 눈으 뜨였다. 오른뺨은 마룻바닥에 닿아 있었다. 차가울 만 했다. 왜 자꾸 돌아오기만 하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걸까. 반추해 볼 사이도 없이 왼뺨의 차가움이 신경쓰였다. 뭔가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자 옆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20분이야, 꼴값.”
“어?”
“20분 동안 없어져 있었다고. 출근할 생각이 있기는 한 거야?”
너였다. 막 씻고 나온 참인지 네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툭, 툭. 물방울이 바닥에 번졌다. 네가 짜증스레 어깨에 걸쳤던 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려 발로 뭉갰다.
“그래서 언제 아침 먹고 나갈 건데? 말해 봐. 운동선수는 칼로리 섭취가 중요하다고 밤 늦도록 잔소리 한게 누구지?”
“아키라.”
“꼴값이잖아. 지금 그렇게 없어졌다 돌아와 놓고 그럴 말할 자격이-“
“미도스지. 나 널 만나고 왔어.”
문득 너의 움직임이 멎었다. 툭툭, 네 머리칼에서 물이 두어방울 떨어져 내렸다. 그제야 너는 작게 입을 떼었다. 꼴값.
“가서 출근 준비나 해. 알몸으로 있는 거 꼴값이야.”
“응.”
“아침은 토스트야. 늦어서 그런 거니까 불평은 안 받아.”
“응. 아키라.”
“꼴값.”
네가 수건을 주워들고 다용도실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탁기 돌리는 소라가 났다. 조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