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겁쟁이 페달

[이시미도] 수평선

ㄷㄷㄷㄷ 2023. 1. 20. 13:08

2014년도 글 백업입니다.

 

"미도스지 군은 왜 이 대학에 들어왔지?"

헬멧의 끈을 풀다가 미도스지는 흘끗 감독을 돌아보았다. 높은 눈초리에도 감독은 당황하지 않고 미도스지를 바라보았다. 막 연습을 끝낸 참인지라 뒤쪽에 자전거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시끄러웠다. 감독은 큰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서도 말을 전달하는 법을 알았다. 이런 게 감독이라는 건가, 미도스지는 가끔 그렇게 생각했다.

“별반 이유는 없었습니다.”

대학은 생각만큼 획일적이거나 엄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와는 달리 감독이 존재했다. 달리고 싶은 만큼 달리되, 승리를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위탁이 필요했다. 그래서 미도스지는 말을 줄이고 아꼈다. 고등학교 때의 사람들이 본다면 놀랄 만큼 공손하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감독은 폴더에 펜을 두드렸다.

“기록도 훌륭하고, 성적도 좋았다고 하고. 장학금 받고 다니지?”

“예.”

“프로로 나갈 생각이고.”

“가능하다면요.”

“으음… 알았어. 가서 편히 쉬어.”

고갯짓만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부실을 향했다. 오랜만에 듣는 질문이었다. 결코 새롭지는 않았지만.

나쁘다고 단언할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리 좋은 대학도 아니었다. 로드 관련한 부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뿐이었다. 편차치도 높은 편은 아니었고, 대회 기록도 그저 그랬다. 그린 것 같은 평범함이었다. 미도스지가 옴으로서 승률이 조금쯤 높아졌음을 점칠 수는 있겠지만 그뿐이었다. 집과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연고자라고는 몇 학번을 위로 올라가야 동문 선배 몇을 간신히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미도스지는 한 점 망설임 없이 이 대학을 골랐다. 누구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스포츠 계에서 발을 걸치고 그가 어디쯤의 대학에 갈지를 조용히 점치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학기 초는 그래서 항상 시끄러웠다. 왜 여기였는지를 직접적으로 묻는 사람들과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 미도스지는 둘 다 싫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날이 깊었다. 여름의 끝물과 가을 초입에 걸쳐 있는 날씨에 늦은 시간임에도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자전거에 한 발을 걸치려고 하는데 부매니저가 총총히 다가왔다. 감독의 딸이라고 했던가. 따로 직업이 있지만 쉬는 날에는 도와주러 나온다고 하는 것 같았다. 양 갈래 머리와 화장기 옅은 얼굴이 사촌동생인 유키를 생각나게 했다. 그 뿐이었다.

“미도스지 군 맞지?”

“예.”

얼굴을 다 외우지 못한 건지 매니저는 쭈뼛거리며 파일을 펼쳤다. 한참을 훑어내리다 확신이 섰는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저, 연락망에 휴대전화번호가 적혀있지 않은데.”

비상연락망이고, 없으면 연락 받는데 곤란하지 않을까? 항상 집에 있는 건 아니잖아. 매니저가 웅얼거리는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미도스지는 자전거에 발을 올렸다. 한 귀에 이어폰을 꽂자 주변의 소음이 한결 멀어졌다.

“휴대전화, 없습니다.”

“으, 응?”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

가볍게 발을 구르자 자전거가 앞으로 나아갔다.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개밥바라기가 뜨고 있었다.

-

이시가키 군은 바보야? 묻는 말에 남자는 웃었다. 그럴지도 몰라. 폭언에도 남자는 항상 웃었다. 교토 후시미는 편차치가 기본적으로 높은 학교였다. 상대적인 높고 낮음은 모든 학교마다 꼽을 수 있는 것이니 상관이야 없었지만, 이 학교에 다닌다고 하면 성적이 아주 낮더라도 어느 선 이하로는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그 중에서도 중간에서 약간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래서야, 무슨 대학을 가. 꼴값. 음, 적당한 데 가지 않을까? 미묘한 억양의 차이를 잡아낸 건지 남자는 어찌 보면 엉뚱한 대답을 했다. 남자의 2학기 기말고사 성적표가 쥐어진 손을 내려다보고, 미간을 구겼다. 어디 시험 볼 건지는 정했어? 원서도 제출했어. 남자가 자랑스럽게 말해서 배알이 뒤틀렸다. 그거야 당연한 거고. 남자가 웃었다. 로드도 있는 데가 얼마 없어서 정하기는 쉬웠어. 내가. 남자는 말끝을 조금 흐렸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었다. 그 모습에 절로 혀가 차여서 기분이 나빠왔다. 웃는 거 보니 붙을 자신은 있는 모양이지. 어, 그게, 저. 가서 공부나 해! 으, 응! 빽 소리를 지르자 남자가 바보 같이 대답했다. 뭔가에 쫓기듯 뜀박질을 해서 멀어져갔다. 주머니에 남자의 성적표를 쑤셔 넣었다. 하굣길이었는데도 남자에게는 자전거가 없었다. 마른세수를 했다.

-

가벼워지는 게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열량은 필수적이다. 심지어 선수로서 어느 정도의 조절 또한 해야 했다. 원하는 경로는 아니었지만 미도스지는 2~3일에 한 번씩은 장을 보아야했다. 학교에서는 일정 이상의 성적 유지를 조건으로 전액 장학금과 생활비 전액 지원을 약속했다. 미도스지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 덕에 쓸데없이 연습이 아닌 데에 투자될 시간과 노력을 아낄 수 있다는 것만은 좋은 일이었다. 항상 혼자서 장을 보러오는 미도스지를 의아하게 생각하는지, 계산하는 점원의 손은 아주 조금쯤 굼뜬 느낌이 있었다.

장을 보고 나오면 항상 두 손이 묵직했다. 그 덕에 원하던 원하지 않던 집 근처에 있는 슈퍼를 애용하게 되었다. 로드는 마마챠리 마냥 바구니 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 승리에 쓸모가 없는 건 버려지는 게 당연하다. 학교에서 빌려준 자취방은 아파트였다. 이름은 거창하게 맨션이라고 붙여져 있지만, 아파트였다. 철제 난간과 약간 오래된 건물. 아주 작은 부엌이 간신히 분리되어 있다고 할 만한 작은 자취방. 1층이어서 자전거를 안전하게 둘 수 있다는 게 큰 위안이었다. 이 대학 학생들이 사는 평균적인 곳이었다. 가끔은 둘이서 살기도 했다. 아주 가끔이지만.

자전거를 잠가놓고 미도스지는 한 손에 묵직한 짐을 전부 옮겨들었다. 물이 찰랑거리는지 무게중심이 제멋대로 뒤틀렸다.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찰칵. 금속성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문을 열었다.

“어서 와 미도스지.”

말은 공간을 가볍게 채웠다.

-

남자는 으레 OB가 그러하듯이 잊혀져갈 즈음에 한 번씩 학교를 들렀다. 누군가와 같이 올 때도 있었지만, 보통은 혼자였다. 손에는 음료수 캔이 한 봉지 가득 들려있을 때가 많았다. 돈이 썩어나? 꼴값. 남자는 그럼 웃으며 말했다. 응. 그러니까 같이 밥 먹으러 가자. 한심하게 남자를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가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후배들은 시끄럽게 종알거렸다. 우와 저 분 누구지? 우리 부에도 저런 사람이 있었어? 여자들한테 인기 많을 거 같지 않아? 부실은 쉬이 까마귀 떼가 우는 듯한 소리로 가득 찼다. 가끔은 이어폰이 절실했다. 같이 먹는 저녁은 사실 그렇게 좋지 못했다. 지명하는 것은 기껏해야 덮밥집이었고, 남자는 항상 고기집으로 자신을 이끌려다 실패하기 일쑤였다. 경량화한다고. 시끄러워. 그럼 남자는 꼬리 내린 강아지가 되어 자신을 따라왔다.

남자가 시키는 메뉴에는 간간히 데운 술이 끼어있었다. 그저 그런 체인점 맛인 덮밥은 그렇게 맛을 잃고는 했다. 가끔 남자의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니, 사실 가끔이 아니었다. 급한 전화를 받으면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경우도 많았다. 전화 밖으로 들리는 용건은 사무적이었지만 목소리는 가끔 끈적거렸다. 남자 목소리도 간간히 들려왔다. 남자는 전화를 받고 나서는 한참을 미안해했다. 그러다가 반도 비우지 않고 자신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면, 꼭 같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돌아가기 일쑤였다. 설령 자신은 전화를 받느라 식사에 손도 대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기차 시간은 항상 빠듯했고 남자는 무언가에 쫓기듯 급하게 돌아갔다. 휴학했어. 한 번 더 겨울이 지나고 남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할 때까지는 항상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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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고 왔어?”

야채 볶아놨어. 이시가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미도스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시가키는 방 한 구석에 세워져있던 상을 방에 펼쳤다. 앉았던 주변에는 책 몇 권이 늘어져 있었다. 미도스지가 식료가 얼마 남지 않은 냉장고를 채워 넣는 동안 이시가키는 부엌과 방을 바지런히 오가며 상을 차렸다. 몇가지 밑반찬과 약간의 고기가 들어간 야채 볶음. 잡곡밥. 상은 가볍고 간단하게 차려졌다. 냉장고를 닫고 비니와 마스크를 벗어 적당한 데 두었다. 미도스지는 상 앞에 앉았다. 두 명 분의 잘 먹겠다는 인사가 방 안을 울렸다. 밥을 먹으며 미도스지는 이시가키를 바라보았다. 쇄골이 다 보일만큼 헐렁한 티셔츠와 길이가 늘어지다 못해 바닥에 끌리는 트레이닝 복 바지. 그리고 발에 걸려있는 사슬까지. 이시가키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몇 번 젓가락이 오가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팩스를 겸하는 전화벨은 꽤나 시끄러웠다. 한참을 울려대던 전화가 자동응답기로 돌아가자 감독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일 좀 일찍 나와라. 아무래도 팀을 개편해야 할 거 같은데 작전 회의가 필요해서. 전화가 끊겼다. 전화기 근처에서는 자그마한 전자기기의 잔해 같은 것이 잡동사니의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커다란 액정과 한 입 베어문 사과모양 로고가 유난히도 눈에 띄었다. 방 안은 다시금 조용해졌다.

작은 밥그릇을 비우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도스지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남자는 욕실에서 몸을 씻었다. 사슬 때문에 완전히 문이 닫히지 않았지만 둘 중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현관에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사슬은 욕실로 들어가고 나면 조금 팽팽했다. 미도스지까지 씻고 나온 후에는 방에 이불을 깔았다. 좁은 방에 이불을 두 채 깔고 나면 이불은 잇닿아 있었다. 둘 중 하나가 눕고 나면 불이 꺼졌다. 그리고는 나머지 하나도 곧 누웠다. 창문은 꼭꼭 커튼을 치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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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한 후 몇 번 정도, 남자는 조금 다르게 보냈다. 조금 더 느긋하게 돌아갈 수 있는 시간, 약간 덜 울리는 전화. 그러나 전화가 아예 울리지 않는 건 아니었고, 기차 시간은 항상 약간 빨랐다. 오빠 왜 휴학했어요- 코맹맹이 소리는 더욱 짙어졌다. 그렇게 남자가 돌아가고 난 밤이면 미도스지는 밀려오지 않는 수마를 끌어들이려 애를 써야 했다. 옅게 깜북이던 노란색까지 잦아들고 나면 내려앉은 어둠이 노란색을 위협하듯 덮쳐왔다. 전화벨 소리가 귓가를 울리면 미도스지는 심장에서 타고 올라오는 노란색을 지키려 모로 누워 무릎을 끌어안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가을의 초입은 지독하게 추웠다. 그 해 겨울, 미도스지는 대학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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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미도스지는 모로 누워 자는 버릇이 들었다. 어둑하게 내려앉은 어둠의 너머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숨소리가 들렸다. 미도스지는 문득 입을 열었다.

“이시가키 군 바보야?”

고르게 방 안에 퍼지던 숨소리가 문득 흔들렸다. 남자가 웃고 있었다.

“그럴지도 몰라.”

잠에서 깬 기색이라고는 한구석도 없이 남자가 말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뭔가가 머리에 닿았다. 머리를 헝클 듯이 부비는 손을 미도스지는 치우지 않았다.

“그러니까 괜찮아, 미도스지.”

“…꼴값.”

미도스지는 뒤척여 반대 방향을 향해 누웠다. 등이 따뜻했다. 심장박동을 따라 노란색이 뭉클뭉클 올라왔다. 노란색의 약간 불안한 빛을 곱씹으며 미도스지는 잠을 청했다.